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22화 (22/24)

22장.

수술과 더불어 성치 않은 발목으로, 입원은 뻔히 예정된 일이었다. 도내 대형병원의 입원 절차는 차무겸의 선에서 다 정리가 되어 내가 특별히 나서야 할 일은 없었다.

그간 호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으리으리한 VIP 전용 병실에서 대부분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실제로 행할 의지도 없었다. 그나마 하는 것이라고는, 가끔씩 벌레가 알을 까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듯한 배에 손을 올려 문질러보는 게 전부였다.

내가 머무는 병실 바깥에는 차무겸의 집안에서 세운 경호원 반, 병원 측에서 세운 보안 요원 반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총괄 역할을 맡는 이가 오래간만에 만난 박승원이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미미한 망설임과 그에 상응하는 죄책감을 어렴풋이 읽었다.

그도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걸까?

원하지도 않은 남자의 아기를 뱄다가 결국 유산이 되어 그 생명체의 잔여물이 죄다 끄집어내지고, 임신조차도 힘들어진 허약한 몸이 된 게. 혹은 그 딱한 결과에서 지난날 가지 말라고 붙잡던 내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차마 잊지 못하고 반추하는 걸지도.

“…….”

입맛이 없어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할 때였다.

창밖으로 무언가 휘날렸다. 가는 햇살 줄기에 가려져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고서야 조금은 뚜렷하게 보였다.

작고 동글동글한 눈송이였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그것을 보자 내가 이리 산송장처럼 군다고 한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사실이 뼛속으로 차게 스며들었다.

기실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단서는 지금까지 아주 많았다. 흉한 자상으로 난리가 난 팔을 뒤덮고 있던 차무겸의 붕대가 얇아진다거나,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꺼워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느 한 구간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고정되어 썩어가는 건 나 하나밖에 없는 셈이었다.

“…오빠.”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박승원이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얼떨떨한 낯빛이었다. 이 주가 되어가는 입원 기간 동안 내가 먼저 그를 부른 게 처음이어서였다.

“답답해.”

“어?”

“산책 나가고 싶어.”

박승원의 시선이 어딘가로 미끄러졌다. 그가 무얼 염려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차무겸의 붕대와 달리 내 다리의 깁스는 여전히 굵고 무거웠다.

“휠체어 있잖아.”

“아, 그래. 잠시만.”

그가 문을 반쯤 열고서 바깥에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봐도 뻔했다. 차무겸이겠지.

그가 전화를 마치기까지 무수한 얼음 결정체가 바닥으로 낙하하는 장면만 눈에 담았다. 잠시 후 허락이 떨어졌는지 박승원은 내가 휠체어에 앉을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새 구비를 마쳐둔 겨울 외투가 어깨에 걸쳐졌다.

VIP 전용 병동을 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구름 정원이라는 다소 유치하고 뻔한 이름을 가진 옥상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꽤 되는 환자들이 있었다.

까르륵대는 소리에 절로 시선이 가닿았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긴 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잡으려고 손을 바동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눈을 넘어 마음에까지 담기기 전에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검질기게 달라붙은 잔상은 희끄무레하게 흐려지다가 끝내 흩어졌다.

난간 앞으로 가고 싶다고 하자 박승원은 바람이 차갑다는 이유로 너무 가까이 붙지 않고 중간쯤에 세웠다. 바깥바람이 내 속을 겉면 핥듯이 휩쓸고 지나갔다. 여전히 무능감에 잠겨 맥을 추지 못하는 속은 바람의 기류를 따라 텅텅 울리고 있었다.

허하다. 견딜 수가 없이 허했다.

혹시 의사가 제거한 건 배 속에서 죽어버린 생명이 아니라 내 장기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뭐가 이렇게 허전한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앞으로 쭉 뻗자 나풀나풀 추락한 눈이 손바닥에 안착했다. 점점이 고이기 시작한 그것이 손바닥 위에 맺혔다. 나도 모르게 팔을 앞으로 더 쭉 뻗었다. 그러다가 순간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발목만 멀쩡했다면 바닥을 제대로 지탱하여 충분히 넘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습관적으로 내디딘 발에서 찌릿하고 느껴지는 통증에 힘이 축 빠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쿠당, 하며 바닥으로 고꾸라진 후였다.

“사은아!”

박승원의 아연해진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그와 그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들이 황급히 내게로 달라붙었다. 나는 나를 억지로 휠체어에 앉히려는 이들의 팔을 뿌리쳤다.

“놔…!”

내가 할 수 있는데.

이런 것 정도는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그것조차 여의치 않게 만드는 타의들이 진저리가 났다. 대체 나를 어느 정도까지 무능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걸까. 더군다나 이 부상이 그들이 모시는 이로부터 기인했다는 게 조금 더 나를 냉혹한 궁지로 내몰았다.

차무겸에 의해 부서져도, 결국은 차무겸에 의해 일으켜질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거부감이 심지를 뾰족하게 세웠다. 졸지에 손이 내쳐진 박승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보란 듯이 휠체어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주 만에 침대를 벗어난 다리가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아등바등거리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거의 발악에 가까운 몸짓으로 사지에 힘을 주는 찰나였다.

“…….”

흉터가 새겨진 손이 쭉 뻗어져 나왔다. 맥없이 처진 고개가 위로 들렸다. 서서히 훑고 지나가는 시야에 요 며칠 이따금 봐온 복장이 들어찼다. 해운그룹 소속이 아닌 병원에 속한 시큐리티 복장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얼굴이….

“괜찮아?”

넋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뻗어진 손을 잡을 생각조차 못 하고 천치처럼 있다가, 한참 후에야 내가 짐작한 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술을 벌려야만 했다.

“…문태욱?”

그런 내게 긍정을 대신하듯, 문태욱이 엷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나와 문태욱을 위한 자리는 간결하게 갖추어졌다. 찬 바람이 쌩하니 부는 정원의 구석 쪽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은 벤치의 뒤편으로 박승원과 다른 경호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박승원은 갑작스러운 문태욱의 접근에 날 선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런 만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부탁에도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어조가 튀어나갔다.

‘하지만….’

‘차무겸도 알아. 거짓말 같으면 전화해서 물어봐.’

그 말에 박승원은 주저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차, 싶은 낭패감을 느꼈다. 차무겸이 안다면 허락해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전화를 끊고 다가온 박승원은 10분 안에 끝내라는 말을 간결하게 전했다. 어찌 됐든 허락을 받기는 했다는 거다.

그리하여 우리는 길쭉한 나무판자 세 개가 붙여진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내 손에는 혹시 추울지 모르니 쥐고 있으라고 박승원이 떠안기고 간 따듯한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몇 년 만이지?”

문태욱은 그사이에 붙임성이 꽤 는 듯했다. 아니, 얘와 나 사이에 붙임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쥔 쓰레기통을 걷어차고, 내 아버지를 비방하며 낄낄대던 그 질 낮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를 훤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그와 대화를 하고자 한 건 단지 차무겸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뿐이다.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을, 침묵을 유지하는 태도에서 알아챈 듯 문태욱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음, 갑자기 말 걸어서 놀랐나 보다. 사실 너 입원한 후로 계속 병실 앞을 지키고 있기는 했는데.”

손에 쥔 뜨끈뜨끈한 캔커피만 보던 눈길을 들었다.

“아무래도 VIP의 입원이 예정되면 병원 측에서는 보안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VIP에 대한 정보도 알아둬야 하거든. 이번 예약자 성명이 차무겸이라길래 혹시나 했는데….”

문태욱은 내가 오해라도 할 줄 알았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의 복장을 훑었다.

“여기서 일해?”

“어? 아, 응.”

그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뭐, 예전에 있던 일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예전에 있던 일?”

“왜, 그… 나 차무겸한테 맞았을 때 있잖아.”

그걸 제 입으로 직접 꺼낼 줄은 몰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렸다. 시간이 지난 만큼 이제는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지 문태욱은 제법 무덤덤해 보였다.

“코뼈 부러지고 입원한 게 이 병원이었거든. 입원 당시에 나 봐주던 간호사 누나한테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는데…. 그때 그 누나가 자기는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좋다고 하더라고. 뭐, 당연히 의사나 간호사처럼 같은 직종을 말한 거겠지만 그래도 나름 눈에 들어 보겠다고 노력하다 보니… 결국 이렇게 됐다.”

시간이 지나고 철이 좀 든 걸까?

이전에는 없던 수더분한 면모가 이따금 느껴졌다. 그게 신기해서 가만히 보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을 앞에 둔 사람처럼 계속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반대로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다고 한들, 이전과 같은 면 역시 존재했다. 머리칼에 자주 손을 대는 건 그의 버릇이었다. 입술을 감쳐 물고 무언가를 골몰하는 듯 보이던 문태욱이 잠시 후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기회가 된다면, 줄곧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

“그땐 나도 어려서 생각이 너무 짧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 사이에 일이 생긴 이후로도 너한테 계속 호감이 있었던 게 맞고. 내 딴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아.”

아까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면, 이제는 조금 말문이 막혀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문태욱의 사과는 예상치 못한 어느 경계에 있는 일이었다.

“좀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차무겸한테 후려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그렇게 티 나게 굴었나 싶기도 하고…. 솔직히 너한테 화풀이했다는 걸 부정 못 하겠더라고. 내가 봐도 존나 꼴사나웠는데 뭔 말을 하겠어.”

“…….”

“미안했다. 김사은.”

미리 VIP 병동 예약자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는 스케줄을 조정하여 우리와의 대면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고 우리 앞에 나타날 각오를 하고, 더하여 나에게까지 이렇게 선뜻 모습을 보였다는 게 저 사과에 신빙성을 더했다. 어쩌면 나 역시 시간이 지난 만큼 그때의 상처에 무뎌진 것일지도 모르겠고.

…또 어쩌면, 암영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너무나 수두룩하게 겪어서 과거의 파편 따위 아프지 않은 수준이 된 걸지도 모르겠고.

“입원한 내내 생각도 많이 나고, 후회도 많이 하게 됐어. 그래서 퇴원하고 돌아가면 너한테 사과하려고 했거든. 근데 막상 돌아가니까 넌 이미 전학 갔다고 하더라.”

“…응.”

당시 차무겸의 일정에 맞추어 나 역시도 암영을 벗어났다. 나에게조차 믿기지 않았던 일이니, 남에게는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느껴졌을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아, 그러고 보니… 너 그 이후에 전예슬 만난 적 있어?”

문태욱의 입에서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이름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건 나를 괴롭히던 하이톤의 음성이었다. 날씨가 춥긴 한지, 아까보다 식은 캔커피를 그러쥐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걔, 그, 얼굴 난리 난 것도 모르나?”

“아니… 그건 알아.”

“어? 어떻게?”

“서울로 가기 전에 전예슬이 나를 찾아왔었어.”

그때도 지금과 같은 겨울이었다.

서울과 같은 도심의 풍경에 가려지지 않은, 생생한 겨울 속에서….

‘걔 진짜 미친 새끼야!’

나를 찾아온 전예슬은 그렇게 소리쳤었다.

무슨 일인지 예쁘장한 얼굴에는 짐승의 손톱에 긁힌 것만 같은 흉흉한 상처 자국 세 줄이 길쭉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 이거 차무겸이 그런 거야.’

‘…….’

‘왜 그랬는지 알아?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그런 거래. 입을 아예 찢어놓으려다가 이걸로 참아주는 거라더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 일밖에 없어. 내가 너, 차무겸네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그 말 한 것밖에 짚이는 게 없단 말이야!’

‘…….’

‘너 걔랑 같이 서울 갈 거라면서?’

당시에는 전예슬이 내게 왜 이런 말을 전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

‘그 새끼 정말 또라이니까.’

우리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고, 그녀는 차무겸에 관련하여 나를 이성적으로 견제하기 바빴기에. 그러나 지금에 와 헤아려보니 그 뜬구름 같던 감정이 어렴풋이나마 잡혔다.

전예슬은 차무겸을 두려워한 것이다.

평소 나와의 걸쩍지근한 관계를 뒤로 미룰 만큼의 급박한 위기감에 사로잡혀서, 나에게 나름의 경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때, 진하고 붉은 흉터 사이로 자리한 전예슬의 눈동자는 배신감과 상처, 공포와 두려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문제는 당시의 나였다.

나는 그때 차무겸의 내면을 차지하는 시커먼 저변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전예슬과 나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것도 그 말에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다방면으로 괴롭혀만 오던 애가 갑자기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니까, 나로서는 그저 질투를 하는가 보다, 정도로만 유추했다.

물론 그렇게 단순히 판단하기에는 상황이 여간 미묘하고 괴이한 게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흉한 상처를 달고서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던 전예슬의 눈빛이….

그럼에도 그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당시 내 눈앞에는… 차무겸을 따라가는 길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과거를 반추하던 틈새로, 문태욱의 침잠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깍지낀 손으로 턱을 받친 문태욱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에서 익숙한 면을 보았다. 칼바람이 나부끼던 겨울, 그때 보았던 전예슬의 눈이다.

차무겸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 눈.

“내가 보기엔 전예슬 다친 거, 차무겸이 한 짓 같아.”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지금은 알고 싶지 않지만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차무겸이, 도박장을 전전하던 아빠에게 부러 깡패를 붙여두었던 사실이라든지. 그래서, 내가 그를 찾을 수밖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모든 게….

“나도 그렇게 생각해.”

“…….”

“그러니까 그때….”

바람이 한 번 불었다. 정면을 응시하던 문태욱의 눈길이 내게로 미끄러졌다.

“뭐?”

“…….”

“방금 뭐라고….”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흡사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듯 나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뱉은 거라서,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차라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태욱은 내 미온적인 표정을 보고 제가 잘못 들었다고 여겼는지 ‘아니, 아니야.’ 하고 손을 저었다.

문태욱의 어깨 너머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티 없이 맑은 그 아래로 낭자한 여러 소음이 일제히 귀를 찌른다. 눈을 느리게 가물거렸다. 이건 이명일까, 실제일까. 모든 게 다 나를 향한 위협처럼 다가온 지는 오래였다. 눈길이 도피처를 찾듯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이곳과 달리 텅 빈 어느 건물의 옥상을 발견했다. 입이 사고와 상관없이 멋대로 벌어졌다.

“저긴 어디야?”

“응? 아, 구관 병동이야.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저번 연도에 새로 지어진 신설이고.”

“저긴 왜 사람이 없어?”

“지금 내부 시설 문제로 공사 중이거든. 몇 달 됐어.”

누가 시선을 빼앗아간 것처럼 가만 보고 있던 차였다.

“사은아, 시간 다 됐다.”

박승원이 다가왔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손에는 빈 휠체어까지 들린 채였다.

나는 이번엔 고분고분히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올라탔다. 문태욱이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온화한 공기가 감도는 실내로 들어섰음에도 소란이 끊이지가 않았다. 복도를 거닐어 VIP 전용 층으로 들어서고서야 좀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한 게 맞나? 아직도 귓가에 여러 소음이 곰팡이처럼 엉겨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병실에 도착하니 어느새 차무겸이 돌아와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나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몸이 그의 손길에 번쩍 들려 침대로 이동됐다. 자상한 손길이 신경을 거북하게 적셨다. 하지만 감각과 사고가 따로 노는 것처럼 표정은 무덤덤했다.

차무겸은 한쪽에 놓인 이불을 펴 내 몸 위로 덮어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거만함이 향한 대상은 문 앞에 서 있던 문태욱이었다. 병원 측에서 VIP 전용으로 세워둔 보안 요원인지라 병실 앞까지는 따라올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차무겸의 간결한 고갯짓으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박승원은 빈 휠체어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병실에는 우리 셋만 남았다.

“오랜만이다, 태욱아.”

“어… 그러게.”

문태욱은 나를 대면할 때보다 더 어색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저지른 것보다 자신이 당한 게 더 크게 와닿는 건 당연했다. 나조차도 그가 차무겸에게 꼼짝도 못 하고 후려 맞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차무겸은 마주 보고 서 있던 몸을 돌려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자상하게 뺨을 어루만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양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달리 대상이 누구 있겠는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어색하게 응시하는 문태욱뿐이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고 싶지 않아서 차무겸의 손길을 피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무겸은 그런 내 귓불을 은밀하게 쓸고는 문태욱에게로 다시 신경을 흘려보냈다. 몇 년 만에 만남을 표하듯 공백은 그 자리를 파편처럼 채웠다. 어색하고 불편하게. 삐죽빼죽 들솟은 분위기 속에서 차무겸은 퍽이나 친근한 척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잘 지냈어?”

“나야 뭐….”

“몇 년 만이지?”

“글쎄. 한… 7년 정도 됐나.”

그가 다리를 꼬고 앉는지 침대가 살짝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어?”

“얼마 안 됐어. 대학 졸업하고 나서니까.”

“흐음.”

차무겸은 질문을 던진 이답지 않게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사은이랑 얘기는 잘 했고?”

이어 볼품없는 인내심이 금세 바닥났음을 표하듯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대화 속에 등장하는 장본인이지만 나는 마냥 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고집스레 창밖만 내다보았다. 번드르르한 유리창 위로 문태욱이 나를 힐끗 보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어, 뭐, 그냥….”

떨떠름한 문태욱의 반응을 유심히 들여다보는지 차무겸은 잠시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코는 괜찮나 봐?”

침습은 예고도 없이 벌어졌다.

살가운 걱정을 보이는 척하는 어투지만 그 안에 박힌 건 명백한 빈정거림이었다. 그건 나도, 그리고 문태욱도 알 수 있었다. 지난날 문태욱의 코뼈를 일격으로 부러뜨린 차무겸이 하기에는 지나친 염려, 더 나아가 쓸데없는 시비에 가까웠다.

“…괜찮지, 그럼. 몇 년이 지났는데.”

“다행이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내 쪽으로 연락해. 도움이라면 충분히 줄 수 있으니.”

더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대화를 나누는 건 두 사람인데 꼭 내가 일제히 둘을 상대하는 것처럼 진이 빠졌다. 나는 차무겸의 팔뚝을 힘없이 그러쥐었다.

“나 졸려.”

차무겸은 딴죽을 거는 것처럼 빙글거리던 미소를 지우고 나를 가만 응시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맞대응했다. 차무겸이 저를 붙잡은 내 손을 쓰다듬으며 문태욱을 느릿느릿 돌아보았다.

“이만 가도 돼. 오늘 사은이 챙겨줘서 고맙다.”

문태욱은 떨떠름한 얼굴로 나와 차무겸을 번갈아 보다가 이만 병실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자 발목 부근에서 찰랑이던 물살이 조금 더 차올랐다. 언제부턴가 차무겸과 함께 있으면 꼭 천천히 물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발끝부터 잠겨서 허리께에서 넘실거리다가 끝내는 머리까지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익사의 감각을 부추기는 그 답답함에 잡아먹히기 전에 늘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차무겸이 상체를 기울여 입을 맞춰온 까닭이었다. 나는 수용도, 거부도 하지 않은 채 목각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차무겸의 무게가 실린 침대가 거칠게 삐걱거렸다. 그가 입술을 가만히 맞댄 채로 내 눈을 지척에서 들여다보았다. 닿는 족족 갈가리 찢어버릴 것처럼 무언의 흉포함이 은은하게 감도는 동공이었다.

곧 턱을 살짝 틀며 말캉한 혀를 내밀었다. 고집을 부리듯 벌려주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질척한 타액을 두른 살덩이가 입술 사이를 간지럽히듯 문질러 기어이 안을 비집어 파고들었다.

시트 위를 짚고 있던 손이 환자복 상의를 파고들었다.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차가운 감촉을 덧입히는 바람에 절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평정이 깨진 것을 기점으로 차무겸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툭툭 무심하게 풀리는 소리와 그가 내 입 안 점막을 나른하게 훑는 감촉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읏….”

얇은 옷자락 안쪽으로 자리한 젖가슴이 한 손 가득 잡혔다. 그는 둔덕 부분을 꽉 그러쥔 채 손가락만 움직여 젖무덤 부근을 둥그렇게 문질렀다. 거부감에 고개를 틀자 맞닿아 비벼지던 입술이 촉, 하고 어긋났다. 그는 집요하게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어 시야를 장악하며 발갛게 살찐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아, 미간 사이에 얇은 금을 그리며 신음하자 보란 듯이 유두를 살살 돌렸다.

이 짓에 비위를 맞출 기분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한들 차무겸을 말릴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아픈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특히나 한쪽 다리가 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고장이 난 상태라 격렬한 저항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여전히 망부석처럼 굴며 그의 손이 차오른 유방을 반죽 주무르듯 조물대도 가만히 있었다.

차무겸은 이런 내게서 반응을 끌어내려 안달이라도 난 양 흐트러진 앞섶을 주저 없이 젖혔다. 옷자락에 딸려간 젖가슴이 요동치기 무섭게 그가 울긋불긋한 유륜의 끝을 입술로 물어왔다. 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부위에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자극이 척추뼈를 하나하나 간지럽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도망가고 싶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뒤틀리는 허리를 붙잡고 갓난아기를 연상시킬 만큼 격렬히 젖을 빨았다.

직전 손길에 희롱당하여 미세하게 굵어진 알이 그의 혓바닥에 이리저리 뭉그러지며 기이한 희열을 자아냈다. 그가 한 번씩 힘을 주어 쭙, 소리가 나게 살덩이째 빨아들일 때마다 움찔움찔대며 시트를 발끝으로 긁었다.

그가 한참이나 쪽쪽대던 입술을 벌렸을 때 젖꽃판은 난잡스러운 모양새로 함빡 젖어 있었다. 차무겸은 마치 마주치라 윽박하는 것처럼 악착스럽게 위를 올려다보며 혀를 넓게 펴 뾰족하게 곤두선 돌기를 핥아 올렸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는 것처럼 그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고 나니 선홍빛 유두는 이미 퉁퉁 부어 더 만져달라고 성화라도 부리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여기서 젖물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가 진정 아쉽다는 듯 혼탁한 말을 뇌까리며 젖무덤을 감싸 물고 동그랗게 부푼 꼭지를 쭉 빨아들였다. 그 상태로 혀를 뾰족하게 세워 유즙이라도 나온다고 착각하는 양 젖구멍을 진득이 후벼댔다.

그쯤 되니 나 역시도 무기력으로 인해 갖추고 있던 평정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통을 만류하듯 붙잡았다. 울렁이던 거부감이 극심해진 건 차무겸이 젖을 쭉쭉 빨아대며 환자복 하의로 큼지막한 손을 밀어 넣은 타이밍에서였다.

달뜬 호흡이 두려움에 전 숨결이 되고 미세하게 균열이 일던 얼굴빛은 금세 사색이 됐다. 모든 걸 꿈이라고 여기며 털어내기엔 아직 사실감이 지극히 선명한 시기였다. 악몽처럼 들러붙은 유산의 잔상이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었다.

“안 넣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흑….”

드디어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올린 차무겸이 음욕에 범벅이 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꺼칠한 어조나 지금 바지춤을 급하게 풀어헤치는 태도나. 어디에서도 그의 말에 관한 신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도망가고 싶어서 몸을 비틀었다가 깁스로 무거워진 발을 인식하고 멈칫했다. 그사이 차무겸이 나를 조금 더 침대로 내리누르며 얼굴을 밀접하게 들이밀었다.

“안 한다고… 그니까 얼른, 하아, 내 입에 혀 넣어.”

빙글 돌아버린 눈으로, 어느새 하복부로 파고들어 팬티를 덧그리는 손으로 잘도 말한다. 곧이곧대로 따라주기 싫은 마음에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가만히 있자 차무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네가 안 하면 내가 움직이면 그만이라는 것처럼 사납게 입술을 겹쳐왔다.

조금 전은 부드럽게 움직여주었던 것임을 주지시키듯 거칠고 산만하게 점막을 휘저어대며 곳곳에 제 타액을 펴 발랐다. 그사이 팬티선에 그의 손가락이 걸렸다. 허리가 움찔 튀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싫어.’ 하고 미세한 항변이 튀어나갔다.

“싫어?”

발정 나서 눈이 빙글 도는 것처럼 굴어도 내 반응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기라도 한 양 그가 잽싸게 말문을 잡아채 물었다.

“왜? 문태욱이 듣기라도 할까 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극히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어조였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내 속내를 어떻게든 파헤쳐볼 요량인 양. 그에 섣불리 반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문태욱이 나간 문가를 흘끗거렸다. 차무겸은 이런 내 반응에 더욱이 머릿속 어딘가가 짓뭉개진 것처럼 턱을 감싸 쥐고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문태욱이랑 무슨 얘기 했어?”

그는 침묵을 고수하는 내 얼굴을 눈빛으로 뚫어버릴 것처럼 이목구비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직시했다.

“아직도 너 좋아한대?”

그의 손이 환자복 바지를 벗겨 내렸다. 미약하게 버둥질하자 반항 자체를 묶어버리듯 내 양팔로 제 어깨를 감싸게 만들며 하체를 가까이 접붙여왔다.

“나 같은 건 버리고 같이 어디로 도망이라도 가재?”

겨우 한 겹 입은 팬티 속으로 아까부터 허벅지를 꾹꾹 눌러대던 묵직한 좆이 파고들었다. 다행히 곧바로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게 아니라 팬티 사이에 굵직한 몸대를 끼운 채 음부에 가벼운 마찰만 시켰다. 위아래로 문질러지며 옅은 질척거림과 함께 선홍빛으로 물든 귀두가 팬티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했다.

“대답해, 사은아.”

“…흐….”

이렇게 차후 추궁할 거면 대체 왜 만남을 선선히 허락했을까. 그의 의도는 여전히 잡아보려 애써도 잡히지 않는 하나의 난제이고 미궁이었다. 나는 어쩌면 평생을 가도 그 속내를 파악하지 못할 거라는 뼈아픈 사실 하나를 떠올려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차무겸은 고집스럽게 눈을 맞추며 나와 몸을 더욱 비비지 못해 안달이었다.

팬티 속에서 혈관이 두툼하게 불거진 성기의 기둥과 구멍이 끈적끈적하게 비벼졌다. 내가 흘리는 애액은 극히 소량이었으므로 이건 전부 차무겸의 좆이 과도한 흥분으로 질질 싸지르는 선액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는 끝의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다가 하반신을 조금 위로 들어 올렸다. 자연스레 나의 몸이 조금 더 밑으로 깔렸다.

차무겸은 완전히 나를 질식시킬 수 있는 자세로 말뚝질을 했다. 퍽, 퍽. 철퍽, 퍽! 그저 문질러지는 건데도 정말 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마찰음이 울렸다. 그의 달뜬 호흡이 나의 의식을 엉망으로 깨부수는 것만 같았다. VIP 전용 침대가 금방이라도 푹 가라앉을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시트를 그러쥔 내 손을 앗아가 깍지를 끼며 잡아먹듯이 입술을 덧대었다. 사타구니는 계속해서 진한 농도로 맞부딪쳤다.

이윽고 그가 내 턱을 으스러뜨릴 듯이 그러쥔 채 지껄였다.

“안 그랬지?”

“…….”

“응? 너 믿어도 되지?”

조금 전까지 섬뜩한 광기를 내보이며 나를 곤궁으로 밀어 넣던 모습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는 달라진 태세로 그리 말을 한다. 그가 도톰하게 부은 내 입술을 할짝거리며 끝없이 독어를 밀어 넣었다.

“너도 이제 술래잡기라면 지긋지긋할 거 아니야….”

확신한다기보다는 확신을 구하려고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절박함을 드러낸 듯, 다소 성마른 질문이었다. 그게 나의 감정을 고리에 걸어 여기저기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이겨내기 힘든 탈력감을 자아냈다. 적어도 이 숨 막히는 추격전에 있어서 단단히 기가 질리고 지친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응.”

금방이라도 파삭, 깨질 듯 유약하고 사소한 답변조차 차무겸의 포악한 입맞춤에 빨아 먹혔다.

잠시 후, 팬티 사이에 끼워둔 페니스가 음부의 도톰한 살에 파묻힌 채 격동적으로 꿈틀거렸다. 문질러지는 내내 탐욕스레 벌름대던 요도구에서 끈적하고 후끈한 체액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환자복 앞섶이 활짝 벌어진 채라서 밤꽃내를 생생하게 풍기는 정액은 그대로 나의 가슴께와 뱃가죽에 떨어졌다. 그것들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감촉은 손톱으로 긁어 파내고 싶을 만큼 꺼림했다.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턱이 붙잡혔다.

파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차무겸이 다소 사납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어중간하게 놓인 혀를 사탕 핥아 먹듯 굴리고, 잇몸 여기저기를 건드리는 움직임은 제 영역을 활보하는 짐승처럼 나른하며 진취적이었다. 이제는 내가 반응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았다.

“믿어 줄게.”

“…….”

“넘어가 주겠다고.”

타액이 진득하게 섞이던 키스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사근댔다. 뜨끈한 숨결이 가득 고인 어조는 가시지 않는 여운으로 거칠게 다가왔다. 그래 봐야 너덜거리는 마음에는 크게 타격도 없었다.

한 점의 틈도 없는 빽빽한 눈동자가 가슴 안짝을 갉아 먹는다. 기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나의 반응을 보며 차무겸은 흡족하게 웃었다.

휘어지는 입꼬리가 이상하다. 그는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뿐인데 내게는 귀까지 과하게 찢어지는 포악한 잔상으로만 남았다. 그것이 찐득하게 남아버린 눈꺼풀 안쪽이 희한하게 시렸다. 털어내고자 눈을 깜박거려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를 장악한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태욱과 대화를 나누던 옥상에서의 하늘이 떠올랐다.

내가 얼마나 낮아지든 하늘은 여전히 높고 아름다웠다. 변함없는 기개와 위축되지 않는 압도. 사슬에 얽매인 것처럼 숨 한 자락 버겁던 마음이 아주 잠시간 편안해졌었다.

아.

‘뭐?’

‘…….’

‘방금 뭐라고….’

옥상에서, 제 청각을 의심하던 문태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 * *

마음이 미묘하게 홀가분해졌다. 꼭 미루고 미루던 방 청소를 드디어 마친 것처럼. 내버릴 것을 아둔한 미련에 꼭꼭 갖추고 있다가 드디어 굳센 결심을 마친 사람인 양.

개밥 보듯 거르기 일쑤이던 식사에 제대로 임하기 시작하자 굼벵이 기어가는 것처럼 더디던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 위장이 작아진 까닭인지 호기롭게 숟가락을 들어도 반의반도 비우기 힘들었던 때를 지나 이제 1인분의 몫은 충분히 비울 수 있었다.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산책을 나갈 때면 늘 챙겨야만 했던 휠체어를 탈피하는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루에 한 번씩 꼭 나가게 되는 산책에는 휠체어가 아닌 목발을 챙기게 됐다.

목발이 필요치 않게 될 때는 오직 한 경우밖에 없었다. 차무겸이 병원에 있어 산책에 기꺼이 동행할 때. 오늘도 그러한 경우였기에 목발 대신 그의 팔뚝이 내 허리를 안정적으로 감싸 안았다.

“옥상으로 갈 거야?”

“아니.”

“그럼?”

“그냥 복도….”

“그게 산책이야?”

“옥상은 너무 자주 가서 질려.”

대화는 제법 단란하게 이루어졌다.

이전과 똑같다. 쳇바퀴 굴러가듯, 내가 날을 세우지 않으면 차무겸 역시 잠잠해진다. 그의 품 안에 안정적으로 심어질수록 차무겸은 이성을 찾는다. 대화가 가능해지고, 주고받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제법 그럴싸하고 정상적으로 비쳐지는 관계가 그려진다. 사실 까보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걸 아는 것조차 나밖에 없다는 게 공허를 부추길 뿐이다. 그러니 그런 사소한 내막 따위야 꾸역꾸역 감내하기보다 털어내는 게 나았다.

복도 한쪽으로 난 유리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렷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유난히 선명하고 밝았다. 오후의 따사로운 볕이었다. 하강하는 직사광선이 눈가를 서슴없이 찢어발겼다. 망막 위로 너울거리는 황금빛이 시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앗아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잘 보이지 않지만 오늘의 하늘 역시 푸르청청할 것이 분명했다.

“…….”

잠시 후 산만하게 흩뿌려지던 빛의 입자가 가려졌다.

튀어나온 손. 차무겸이 차양을 만들듯 내 이마에 곧게 세운 손바닥을 가져다 대주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눈가가 따가울 만큼 부신 아득함은 사라졌을지언정 하늘마저도 덩달아 가려지고야 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차무겸을 돌아보았다.

차무겸은 창가 바로 앞에 선 나를 그늘 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푸르고 눈부시게 펼쳐지던 것들로부터의 탈출은 벗어나는 게 아닌 또 하나의 속박 같았다. 그는 그 상태로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맞췄다.

쪽, 하고 붙었다가 떨어지는 가벼운 버드키스였다. 지나가던 간호사나 근방에 서 있던 환자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뒤에 선 경호원들의 시선도 저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을 문태욱 역시.

요즈음 차무겸은 진득한 스킨십보다도 이런 가분한 접촉을 즐겼다. 혹여나 우리를 따르는 뒤편의 문태욱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인가 싶다가도, 그가 없는 병실에서까지 이러는 걸 보면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닌 듯했다. 언제나와 같은 변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지.

고약한 변덕에 반응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서 있으니 차무겸은 버드키스를 한 번 더 반복했다.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천진무구하게까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고개가 꺾이고 기울어지는 각도를 따라 바닥에 그려진 그림자가 울렁거렸다.

“왜 안 말리지?”

“…….”

“이쯤 되면 그만하라는 소리가 나올 때인 것 같은데.”

안 말리니까 오히려 서운하다. 이상해. 그치.

친근하게 달라붙어 그리 속삭이면서도 차무겸은 온순한 내 태도가 여간 기꺼운 게 아닌지 그림 같은 미소를 입가에 곁들이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날 놀리기 위한 저 말에도 쉽사리 흔들렸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요동이 없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마음이 이상하게 너그러워졌다. 형태를 종잡을 수 없는 관용이었다. 차무겸은 내 태도가 싱겁게 느껴졌는지 별말 붙이지 않고 자세를 바로 했다. 별안간 중단된 산책을 재개하려는 찰나였다.

불현듯 뒤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야?”

오붓한 산책을 방해받은 게 마뜩잖았는지 차무겸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함께 돌아본 그곳에서 목격된 인물이 나의 시야를 붙잡아 탈탈 터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점점 커졌다.

“아, 놓으라니까!”

환각이 아니라는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찌른다. 야, 문 열어 봐, 쾅쾅. 불쑥불쑥 찾아와 문을 두드리던 그 우악스러운 행동. 너 나 무섭냐? 하, 참. 그런 주제에 희한하게 기민한 면모가 있어서 내 두려움을 생각보다 곧잘 파악하던 사람. 이후 뜻하지 않은 배려심까지 언뜻 목격하게 되었던.

“너희한테 볼일 있는 게 아니라고.”

남자는 형사가 범인을 잡는 것처럼 제 팔뚝을 강하게 옥죈 경호원들을 향해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경호원들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차무겸을 응시했다. 차무겸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까이 선 나에게로 미끄러졌다. 그러나 나는 내 앞에 나타난 윤 실장을 허상처럼 응시하는 중이었기에 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시선은 다소 일방적으로 이어졌다.

이목 속에서도 주눅 드는 법 없이 굴던 윤 실장이 이내 나를 발견했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쟤라서.”

곧게 펴진 손가락과 한 점 비틀림이 없는 시선이 온전히 내게로 닿는다. 차무겸의 끈질긴 눈빛이 뺨을 따갑게 긁었다. 요 며칠 메마르기만 하던 감각에 거북한 소름이 피어올랐다. 예기치도 못했던 인물의 등장이 심해 깊숙이 처박혀 멍멍하게만 굴던 정신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아는 사람이야?”

차무겸이 내 머리통에 뺨을 지그시 기대며 물었다.

잃어버린 기력을 되찾은 것처럼 정상인의 탈을 쓰고 굴던 며칠간, 나름대로 정리한 추측이 하나 있었다. 태연하게 물어오는 것과 달리 차무겸은 그의 정체를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테다.

윤 실장, 이라며 제 입으로 직접 운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퍼즐 조각을 맞춰 그림을 온전히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윤 실장과 나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알지 못하는 듯했으니까. 그곳이 윤 실장의 명의로 된 연립 주택이며 내가 그에게 몸을 바친다고 오해했다면, 그에게 우리 사이의 ‘연결점’은 아직 들키지 않았으리라.

“…아니.”

그걸 꼭꼭 숨길 요량으로, 나를 직시하는 윤 실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뭐? 야!”

조금의 여지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외면에 윤 실장은 벌써부터 노발대발할 조짐을 보였다. 여긴 왜 왔을까. 간신히 삼켜내는 감정은 반색보다는 착잡함에 가까웠다. 차무겸은 이런 나를 첨예한 눈길로 짓뭉개다가 허리를 감싸 한 발 내디디게 만들었다. 마치 저 소란스러운 인물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선을 긋듯.

그러다가 멈칫한 건 왠지 모를 충동이었다.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를 당해 나와 차무겸 가까이로 접근하지 못하던 윤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포악하게 벌리던 입을 멎었다. 머루 같은 동공이 나의 이목구비에 덧발리듯 끼인 감정을 헤아리려는 것처럼 내 얼굴 위로 치열하게 고정됐다.

오래지 않아 그는 허, 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저를 결박하는 경호원들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것으로 습자지처럼 얄팍하게 이어진 관계에 종지부를 찍듯 나 역시 등을 돌렸다. 말로 설명 못 할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남자였다. 애써 설명하거나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그는 몇 가지를 능히 알아챌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궁금해하던 내 배 속 생명의 친부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실이 어떻듯 비치기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나와 차무겸의 모습이라든지.

차라리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는 게 낫다. 그가 전해주는 내 모습이 그리 흉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윤 실장의 존재를 면피하듯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글쎄, 사람을 착각했다니까!’ 하고 항변하는 윤 실장의 거친 태도가 마음의 모퉁이를 긁적거렸다. 이어 묵직한 걸음 소리가 차츰 멀어져간다. 그 희미해지는 기척이 불안감을 조금씩 사그라뜨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손끝을 차게 식혔다.

이렇게 또다시 다가온 연을 자의로 끊어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확히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 *

“주사 놓겠습니다.”

길고 가느다란 바늘이 반짝거렸다.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거렸다. 한때 저런 날붙이만 보면 속에서 모락거리던 감정의 발현이 있었다. 사납고 질기고 내가 표현하기에도 벅찰 만큼 선득한 유형의 감정. 그를 부추기는 개체는 포크의 끝이 되기도 했고, 만년필의 촉이 되기도 했다. 수시로 바뀌었으나 그때마다 드는 감정, 아니, 상상은 하나였다.

푸른 혈관이 맥동하는 목덜미가 있다. 급소, 라고 불려도 이상할 게 없는 연약한 부위. 미끄러뜨리기만 해도 피부를 날카롭게 찢을 수 있을 무기로 그 부위를 쑤시는 상상은 넌더리가 날 만큼 숱하게 했다. 결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상상 속에서는 염증이 돋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저질렀다.

잔혹한 행위를 그려내는 감정은 모두 증오와 분노였다. 그러나 재의 빛깔과도 같은 무기력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 그 대상은 변했다. 지금 간호사의 손안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저것을 당장 그러쥐고 싶은 욕망을 참아냈다.

드러내기엔 일렀다. 아직은 아니었다.

나의 머릿속에서 상념이 발광처럼 날뛰든 말든 주사는 무사히 이루어졌다.

의아함이 고개를 든 건 그 순간이었다.

이만 물러갈 줄 알았던 간호사가 눈에 띄지 않게 팔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부름에 이끌리듯 바라보니 그녀는 꺼내 든 무언가를 이불 안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닿아왔다. 고개를 쓱 들자 간호사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 입술을 벙긋거렸다.

에, 우….

이…. 욱…. 세….

태욱이.

그 이름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몇 번이고 반복한 간호사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럼 푹 쉬시고, 혹시라도 이상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의례적인 행동처럼 너스콜을 가리킨 간호사가 병실을 빠져나갔다. 뜻밖의 인물이 전해주고 간 물건은 여전히 손에 붙들려 있었다. 무심결에 병실을 훑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박승원이 보였다. 그는 간호사가 내게 무얼 전해주었으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낯이었다. 이불 안에서 그것을 잘 갈무리한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인기척에 박승원이 내 쪽을 보았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아냐. 화장실 좀 가려고….”

“부축해줄까?”

“괜찮아.”

다행히 크게 의심을 사지 않은 모양이었다. 침대와 화장실의 위치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아직 성치 않은 발목으로 간신히 화장실에 도달해 문을 닫았다. 혹시 몰라 문을 잠근 뒤 변기 뚜껑을 내리고서 앉았다. 그제야 내내 환자복에 숨겨둔 그것을 꺼낼 수 있었다.

“…….”

핸드폰이었다.

문태욱이 이걸 왜…. 의아해져서 둘러보다가 머잖아 한 가지를 깨달았다. 묘하게 손에 익다 싶더라니 이건 내가 연립 주택, 엄마의 소개로 지내던 그 방에 두고 온 핸드폰이었다. 홀린 듯이 액정을 터치했다. 이게 갑자기 내게로 올 이유가 없다. 핸드폰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며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메모장을 켜는 순간이었다.

[나 문태욱이야.]

그 안에는 문태욱이 대면할 수 없어 간결하게 적어놓은 쪽지가 있었다. 지난날 복도에서의 소요를 보고 혹시 몰라 윤 실장이라는 사람을 따라가 봤다는 것, 그가 자신에게 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는 것,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할 수 있도록 핸드폰에 제 번호를 저장해두었다는 것….

곧장 전화번호부로 들어갔다. 얼마 없는 번호 속에 문태욱이라는 저장명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그 번호 위에서 손가락이 맴돌았다. 수두룩하게 닥쳐온 위기 속에서 행운은 언제나 악몽으로 변질되기 바빴다. 이제는 선뜻 손을 뻗어오는 손길조차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곳으로 오기 전의 암울한 나였으면 그랬으리라.

하지만.

새벽의 밤바다처럼 무섭도록 편안해진 마음은 뜻 모를 호의를 제법 유순하게 받아들였다. 신도 이 정도면 나를 가엾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한 번쯤은 순수한 의도의 적선을 내려주어도 괜찮다고 여긴 걸지도 모르니까. 며칠 내리 바깥을 올려다볼 때면 뻗어져 내리던 빛살이 떠오른다. 그 아득함이 새까만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나야]

손가락을 놀려 메시지를 작성하는 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말로 날 도와줄 수 있어?]

목구멍 안쪽으로 간신히 넘어가는 침이 썼다. 은빛 포크, 만년필의 촉, 주삿바늘. 예리하고 첨예한 그것들이 일제히 눈앞에서 산란하게 번뜩이는 듯했다.

* * *

기다리던 때는 생각보다 이르게 도달했다.

그리 지겹지 않았다.

오히려 단출해진 마음 아래 거칠 것 없이 흘러갔다.

잡히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고이지 않고 계속해서.

발목이 붕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꾸준히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차무겸과 대화를 했다. 우리의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알맹이가 쏙 빠져버린 뒤였다. 겉면만을 할짝거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본질을 꿰뚫는 무언가를 저 멀리 내다 버린 채 안 하느니만 못한 물음만을 공처럼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만 차무겸이 그와 동일한 의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속내가 어떨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와 달리 진작 부상이 나은 차무겸은 일정 때문인지 병원을 나서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2, 3일에 한 번씩은 꼭 들러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했는지, 잠은 잤는지, 산책을 했는지, 문태욱과 이야기를 했는지. 대체로 점검의 형태로 흐른 대화의 끝은 몸을 맞대는 것이었다.

벌어진 입술을 타고 혓몸이 넘어왔다. 혀뿌리가 뽑힐 것처럼 알알하게 빨리는데도 뒷골만 살짝 가려울 뿐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가 내 위에 올라타 환자복 바지로 손을 서슴없이 밀어 넣어도 반항하지 않았다. 일말의 양심인지 무언지 그래도 직접적으로 삽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페팅으로나마 절절 끓는 성욕을 해갈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는 얘기였다.

“무겸이 이제 출발했나 봐.”

도착한 연락을 확인한 박승원이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로 밀어 넣으며 간결하게 전했다. 그의 목소리가 창문을 맥없이 두드리는 소리에 묻힐 듯 말 듯 다가들었다. 한 시간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그새 굵어져 시야에 빼곡한 빗금을 그리고 있었다.

예정된 퇴원은 내일모레였고 차무겸은 현재 오늘의 일정을 마친 뒤 병원으로 오는 중이었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우리 둘 중 과연 누가 빠를까? 차무겸이 도착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섰다. 변기 물탱크 뚜껑에 테이프로 붙여둔 핸드폰을 떼어냈다.

[지금 갈 거야]

문자 하나를 전송해놓고서 그것을 환자복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산책을 가기 위해 챙겨 입는 외투를 걸치는 데에 의심을 살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박승원의 예사로운 표정이 그 방증이었다.

“무겸이 오면 같이 가지.”

하루에 한 번, 자연스러운 일과로 자리 잡은 일에 대해 이제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박승원을 무시하고 병실 문을 열었다. 바로 문 앞에 서 있던 문태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떤 결연한 이채가 응집되어 있었다. 그게 꼭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문득 기괴함을 불러일으켰다. 문태욱에게 머무는 시선 역시 길지 않았다. 아래에 무어가 있든 보지 않고 밟은 채 지나갈 것처럼 무심한 태도로 외양을 포장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온기를 지니고 있어야 할 텐데, 일찍이 깨달은 공허함처럼 열기가 느껴지는 부분이 없다. 배 속에서 죽어버린 생명이 끄집어내질 때 함께 딸려가 모조리 소실된 것처럼.

내디디는 걸음 하나하나에 갖가지의 상념이 진흙처럼 들러붙었다. 쩍, 신발을 바닥에 붙였다가 떼는 과정의 소리가 유난히 확장되어 들렸다. 물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곤하던 강박증이 예고도 없는 발작을 일으키듯 속에서 들끓었다.

이게 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거다.

이제는 복잡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옥상에 다다를수록 빗소리가 텅 빈 속에서 환류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세졌다.

세상이 물속으로 잠겨간다. 한 달 전에는 눈이 오더니 이제는 비가 내린다. 이대로 세상이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나의 익사도 아무런 수고 없이 이루어질 일일 테니까. 하지만 비는 분명히 그 전에 그칠 것이다. 이제 나는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박승원이 미리 챙겨 온 우산을 건네받아 펼쳤다.

검은 우산이 하늘을 가렸다. 나는 손잡이를 직접 그러쥐어 어렵사리 한 발을 내디뎠다. 타닥, 탁. 수직으로 낙하한 물방울이 그대로 튀어 올라 발목께를 적셨다. 척척한 감각이 서늘하게 피부를 뜯어먹었다. 눈을 느리게 가물거리고는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비가 와서 그런 걸까, 편안해진 마음을 완전히 풀어헤칠 날이 다다라서 그런 걸까.

체감하는 분위기가 괴이하고 이상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꺼림칙함과 석연치 않음이 곳곳에 팽배했다. 우산을 뒤로 젖혀보았다. 언제나 푸르던 하늘이 오늘따라 멍이라도 든 것처럼 시커멓다. 먹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빗줄기가 때마침 추락하여 뺨을 톡, 두드렸다.

덤덤한 손길로 물기를 쓱 닦아냈다. 손끝의 질척함을 곱씹으며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이제는 나를 따라 함께 걸음 하는 이들마저 지긋지긋했다. 차무겸의 손과 발이 절대로 내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가정이 폐를 통째로 쥐어짜는 듯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강박에 가까운 세뇌를 되뇌며 행렬의 말미에 선 문태욱과 시선을 마주했다.

[옥상에 혹시 따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어?]

그에게 보낸 문자를 상기하는 순간, 우산을 뒤로 과도하게 젖혔다. 그들의 시야가 적당히 차단됐을 무렵 우산에 힘을 줘 그대로 밀었다.

선두에 선 박승원이 예상치 못한 우산의 습격에 비틀거렸다. 거리가 제법 가깝게 모여 있는 탓에 뭉쳐진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그 틈을 타 우산을 집어 던지고 급히 발을 뻗었다. 찰박찰박! 물기 찬 땅을 박차 오르는 소리가 유난했다.

뒤에서 누가 ‘잡아!’ 하고 외치는 노성이 들렸다. 경호원을 달고 등장했던 입구가 아니라 저 구석 쪽에 난 쪽문을 향해 내달렸다. 빗소리에 덧대어진 소란이 귀를 침범했다. 그러나 쪽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부터 귀마개를 낀 것처럼 희미해졌다.

[그 출구에서 왼쪽으로 틀면 나오는 C구역 비상계단에 유일하게 CCTV가 없어. 위치를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거면 그쪽을 이용해]

여유 없는 달음박질을 따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금세 바닥을 보이는 체력을 대신하여 몸을 바로 세우는 건 절박함, 그게 전부였다. 비상계단을 숨 가쁘게 밟아 도착한 로비는 평소처럼 환자들로 붐볐다. 부러 정신이 없는 응급실 쪽을 이용하여 병원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왔다.

젖혀진 얼굴을 후두두 쏟아지는 물방울이 끝없이 쓸었다. 이목구비가 그대로 녹아내릴 것처럼 잠겨갔다. 머리카락과 입고 있는 옷이 속수무책 젖었다. 옥상에서 볼 때와 차이가 없는 잿빛 하늘이 나를 독촉했다. 완전히 병원을 벗어날 수 있는 주차장 입구가 아닌 방향으로 발을 틀었다.

문태욱이 나를 도와주는 데에는 아마도 과거의 죗값이 클 테다. 어릴 적 치기를 내세워 나를 괴롭히기 바빴던 자기 스스로의 실책을 꾸짖듯이. 그렇기 때문에 선뜻 나서줬을 테고 내가 하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 크게 골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골몰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도망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니 주차장으로 들어선 후 어떻게 이곳을 쥐새끼처럼 빠져나가야 하는지 상세하게 가르쳐주었을 테지.

한참 공사 중이라는 구관의 비상문에 길 한 번 헤매는 법 없이 다다랐다. 부상이 낫기를 기다리는 동안 되찾은 기력과 하루에 한 번씩 행해온 산책으로 병원 구조는 진작 꿰뚫은 참이었다.

끽.

몇 달간의 공사로 인적이 드문 비상문은 끼긱대며 녹슨 소리를 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 공간 속에 갇힌 것처럼 빗소리가 눅눅하게 가라앉는다. 부족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고서 먼지가 쌓인 계단을 하나하나 밟았다.

이것도 도망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태욱이 예상하고 있는 것과 같으냐 묻는다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도망이었다. 나의 심중을 일찍이 알았다면 그는 결코 나를 돕지 않았으리라. 그만큼 우리가 협업하듯 꾸린 계획에는 지대한 간극이 있었다.

그가 뒤늦게 알아채도 괜찮았다. 시간을 벌어주기만 하면 돼. 문태욱은 약속한 대로, 경호팀이 나를 찾지 못하게 고군분투하며 이리저리 훼방을 놓고 있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부지런히 계단을 밟으니 폐부 안쪽이 사포에 긁힌 듯 아려오고 허벅지 근육이 여지없이 당겨왔다. 얼굴을 뒤덮는 물은 차츰차츰 땀으로 변질되었다.

그간 무수한 충동질이 마음을 흔들어댔는데, 발이 다 낫고 나서야 실행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어쭙잖게 막을 내렸을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그럴 수 없었다.

끼이익.

구관 옥상 문은 1층의 비상문보다 배는 낡은 모양이었다. 쇠붙이의 산화를 생생하게 알리는 소리가 그 무엇보다 오싹하게 등골을 긁었다. 잠시 아득한 눈으로 옥상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왜 이 순간, 언젠가 옥상에서 보았던 어머니와 아기의 행복한 한 장면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다 털어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결국 맘 한편에 확고하게 남아버리고야 말았다.

탁탁. 가슴께를 털었다.

뭐가 묻었는지 몰라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 발의 이동을 따라 잘착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그새 빗물이 꽤 차올랐다. 칠이 벗겨진 시멘트 바닥은 흠뻑 젖은 데에 반하여 황폐하고 건조하게만 보였다. 문을 잠그고 완전히 들어서자 이곳은 온전한 나의 세상이 되었다. 짙은 호흡을 유지했다. 물기에 젖은 눅눅한 공기가 폐부로 딸려 들어왔다.

옥상 문 상단을 꾸미는 처마의 밑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온 세상이 빗물로 잠겨 드는 가운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의도치 않게 이것을 돌려받은 순간부터 고민의 연속 선상이었다.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달라졌다. 결국은 체념하듯 생각을 뒤로 미뤘다. 그러고 나니 오늘이었다. 어제의 마음은 오늘과는 또 달랐으리라.

그러나 먹먹한 날씨 때문인지, 삭막한 심경 때문인지 손바닥 뒤집듯 또다시 마음의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액정에 뜬 엄마의 번호 위에서 손가락이 맴돌았다. 충동은 한순간에 깃드는 질 나쁜 유혹이었다. 통화 버튼이 꾹 눌러졌다.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건 통화연결음이 두 번은 울리고 난 후였다. 싸아아. 싸늘한 빗소리가 나를 한입에 잡아먹을 아우성 같았다. 또다시 우글우글. 강박증 어린 환청이 빗소리를 타고 광란하게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보세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요란하던 세상을 잠재워버렸다. 온 신경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목소리로 쏠렸다.

-사은아. 사은이니?

다급함이 음성 속에서 널을 뛴다. 왜 그걸 들으니 이 모든 행동이 무의미한 색깔로 덧칠되는 것만 같은지….

어쩌면 포기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다 긁어내져 비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속은 참 야속하고 멍청했다. 그렇게 으스러지고도 아직 망가질 부분이 남아 있단 말인가. 내게 있어서 더 이상의 인내와 버팀은 그런 의미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삶이란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으로 갈음된 지 오래였으니까.

“나 괜찮아.”

하지만 그 싹에 주목하기에는 척박한 환경을 몹시도 지겹도록 겪어온 바였다. 희망도 금세 꺾여버릴 황무지에서 더 이상 자라날 꽃은 없었다. 그건 아무리 용을 쓰고 버텨도 결국엔 시들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싹이었다.

간신히 비집어 벌린 음성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전 채였다.

이상하게 목이 멨다. 잘근잘근 깨무는 입술로 짠맛이 느껴졌다. 어, 벙찐 낯을 한 채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뺨을 더듬거렸다. 그제야 눈치도 채지 못한 사이 터진 눈물을 인지했다. 그런 형편없는 모습을 숨기듯 급히 뇌까렸다,

“괜찮으니까 찾지 마.”

-사은아.

“이해, 해보려고 했는데 못 하겠어.”

-…….

“나는 엄마가 그런 일 하는 거, 도저히….”

차무겸이 아직 엄마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게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진즉 들켰다면 모든 걸 뒤로하고 홀가분하게 떠날 자유마저도 박탈당했을 것이다. 연약하고 가녀린 엄마는 차무겸에게 인질처럼 잡힐 것이고, 나는 엄마를 사랑하는 감정으로 인해 저당 잡힐 것이다.

그럼 또다시 되풀이가 될 게 눈에 선했다. 숱하게 겪어온 지옥을 재차 걸을 만큼의 용기는 내게 없었다. 많이 지쳤고, 이젠 힘겨웠다.

어릴 적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던 손길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좁은 집구석에서, 이제는 나를 감싸 안을 수 없을 만큼 작아진 품 역시도 기억한다.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이 층층이 깔린 애틋함과 안쓰러움의 정체였다.

차무겸이 엄마를 도와준다면 내가 차마 어쩌지 못한 그녀의 삶은 풍족하고 윤택해지리라. 그 언젠가 나의 상상 속에서 보았던 모습처럼.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런 마음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엄마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이 한 겹 남은 애처로움마저 끔찍한 미움과 증오로 오염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엄마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된다면 우리의 끝은 예정된 파멸일 테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

-…….

“딸 하나 잃은 셈 치고… 나도 그렇게 살 테니까. 엄마 없다고 생각하고 살… 테니까.”

그러기 전에 벗어나는 것뿐이다.

올가미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발을 들이는 바보는 없었다.

맞은편에서 넘어오는 무거운 침묵이 심장을 험악하게 두드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혀끝에서 들끓었다. 진실이 아니라는 아우성이 혀뿌리를 꽉 조였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억누르고 거짓으로 포장된 전언을 내뱉었다.

“저번에 말했잖아. 우린 그냥, 각자 선택한 삶을 산 거라고.”

-…….

“그러니까, 그것처럼… 앞으로도….”

어디가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끝 간 데 없이 뜨거운 것 같다가도 반대로 헤아릴 수 없이 시려웠다.

“잘 살아.”

핸드폰을 쥔 손이 아래로 떨궈졌다.

끊기지 않은 통화 화면이 창백한 빛을 뿜어냈다. 바닥에 푸른 발광이 진하게 일렁였다. 나는 혹여나 엄마가 이런 내 마음을 간파할까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핸드폰을 바닥으로 던졌다. 물기에 젖은 핸드폰이 바닥을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화면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처럼 액정이 까맣게 변색됐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비로소 다 끝난 기분이 들었다. 놔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았다. 쥐고 있는 것이 없다는 걸 깨닫자 조금 더 홀가분해졌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마음에 남은 무게감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처마를 빠져나왔다.

칠흑 같은 희망이 발끝을 가뿐하게 적셨다. 사람이 많아 적당히 펜스를 쳐둔 구름 정원과 달리 이곳의 옥상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이번만큼은 아무도 날 막지 못할 것이다. 주저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휘청대던 걸음에 속도가 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달리는 중이었다. 박승원과 경호원들을 따돌릴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빠르고 경쾌하게.

어느 순간부터 손으로 잡을 수 없이 드높기만 하던 하늘이 오늘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힘껏 뛰면 닿을 수도 있을 것처럼 기이한 가능성의 포문을 열었다. 그게 마지막 한 줄기, 올처럼 남은 사슬을 풀어버리는 듯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간 미소에 인색했던 얼굴인지라 그 근육의 움직임마저 낯설었다.

끽- 쾅!

돌연 날이 선 소음이 끼어들었다.

문이 강한 힘에 떠밀리듯 열리는 소리. 누군가 왔다. 그러나 늦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미련은 쓸모가 없는 부산물이었다. 발목을 넝쿨처럼 감싸는 찰박거림이 심해졌다. 마치 아주 깊은 웅덩이를 헤집는 것만 같았다.

익사가, 아니, 추락이 코앞이었다. 땅끝까지 처박혀 기어 다니기 바쁘던 의지가 나의 지휘 아래에서 활개 치는 것이 이리도 커다란 쾌재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마지막 정도는 내 의지대로 되는 게 너무나 기뻐서 오직 이를 위해 살아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녹슨 난간을 붙잡았다. 상체를 기울이면 끝이다. 무게중심이 쏠리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낙하하고야 말 테다. 그 기쁨에 정수리마저 쭈뼛쭈뼛 올라섰다.

“…아!”

그러기 전이었다.

바라던 대로 기우뚱, 하고 몸이 기울기 전.

뒤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쏜살같고 그만큼 갈급한 힘이었다. 닿기를 갈망하던 하늘이 멀어진다. 그 아뜩한 광경에 점점이 고여 시커먼 돌덩이처럼 응집되어 있던 의지가 흩어졌다. 파생된 잔부스러기들이 신경계 여기저기로 흩날렸다.

물에 푹 젖은 몸이 바닥을 험하게 뒹굴었다. 음울한 빗소리 아래, 격렬하게 일렁이는 음영이 시야를 덮었다.

“너 지금 뭐 하려고 했어.”

차가운 목소리가 얼굴을 덮쳤다. 하늘이 완전히 가려졌다. 가까웠는데. 조금 전만 해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근접했는데. 또다시 멀어졌다. 지금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는 게 불가능할 것처럼 까마득해졌다.

찰싹-!

흐리멍덩한 나의 정신을 깨우겠다는 일념처럼 커다란 손이 뺨을 올려붙였다. 고작 한 대로 입안이 터졌는지 비린 피맛이 입 안에 퍼졌다.

“지금 뭐 하려고 했냐고, 김사은!”

화끈한 열기를 일으키는 타격에도 정신이 멍했다. 그와 달리 내게로 쏟아지는 노성은 하늘을 찢을 듯 격렬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차무겸이 비현실적이었다.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얼굴은 너무도 사실적으로 눈앞에 드리웠다. 그게 마음속에 흩뿌려진 몹쓸 부스러기의 정체를 일깨웠다.

또.

실패했구나. 또….

“이래서였어? 며칠간 죽은 듯이 얌전하게 군 게 다 이따위 개짓거리나 하려고 그런 거냐고!”

“…….”

“씨발, 넌, 너는….”

차무겸의 눈동자가 유례없는 세기로 요동쳤다.

범람하는 혼돈이 내게로까지 전해져오는 듯했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어느새 의지는 또다시 거세당했다. 내 의지로 꾸린 일이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속이 척박하게 갈라졌다. 정서의 가뭄이 끝이 없었다. 이렇게나 비가 많이 오는데. 하다못해 지금 차무겸의 뺨을 타고 내리는 차가운 빗방울마저도 내 뺨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데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곯말라만 가는 걸까.

조악한 손길이 폭우를 뚫고서 축 늘어진 나의 다리를 잡아챘다.

“이랬으면 네 발목 치료 안 했어. 두 발로 걸어서 이딴 짓이나 할 줄 알았으면!”

이런 나의 참혹함마저도 짓밟는 노기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생생했다. 확장된 동공 속에서 너울 치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안광처럼 파르라니하게 떠다니는 그것은 차가운 빗줄기와 비슷한 결을 가진 광증이었다.

“발목, 아예 힘줄을 끊어버릴 걸 그랬나? 응?”

그가 어디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라는 것처럼, 이제 겨우 나은 쪽의 발목을 조금의 틈도 생기지 않게 그러쥐었다. 그야말로 행동으로 표하는 위협이었다.

“못 걸어야 정신 차리지… 그치?”

광인이 귓가에 대고 못된 말을 속삭였다. 하지만 온몸이 비로 젖어 들며 정신까지 그렇게 눅눅하게 무뎌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손톱이 정말로 아킬레스건의 부분을 사특하게 긁어오는데도 머릿속은 영혼이 빠져버린 것처럼 혼미했다. 얼마 안 가 인상이 설핏 찌푸려진 건, 그가 정말 발목의 힘줄까지 끊어버릴 요량으로 양손에 힘을 준 찰나였다.

그런 그가 다음 순간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무겸아, 진정해!”

“놔! 씨발.”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조금 전 어설픈 방식으로나마 따돌렸던 박승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들이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물기로 젖어 든 바닥을, 아가미 잃은 잉어처럼 헤매며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박승원의 가슴팍을 밀치던 차무겸은 내가 또다시 난간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채자마자 서릿발 같은 얼굴이 되어 나를 덥석 끌어 올렸다. 웅덩이를 헤집기라도 한 것처럼 물로 흠뻑 젖은 두 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익숙하여 더 진저리가 나는 품이었다.

차무겸의 품속에서 내가 간절히 그리던 추락과 하늘은 멀어져만 갔다. 왜지, 왜. 조금 전만 해도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웠는데. 서늘하게 식어가는 몸을 따라 심장도 그렇게 얼어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의 역치를 벗어난 삶은 호흡 한 자락마저도 고역이었다. 홀가분해진 마음, 이상하게 모든 것에 너그러워진 생활, 그건, 전부, 가까스로 움키고 있던 사소한 희망마저 내려놓은 체념의 연장선이었거늘.

비로소 미련처럼 남은 모든 걸 뒤로하고 떠날 준비를 마쳤거늘.

나와 맞닿은 단단한 음영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흡사 심호흡인 것처럼 인식될 만큼.

“잭나이프 있지? 내놔.”

“무겸아.”

“빨리 안 내놔?”

차무겸이 뒤따르는 박승원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멀어지는 하늘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져서, 나는 그가 무얼 하는지 제대로 헤아릴 새도 없었다. 차무겸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우중충한 하늘은 조각으로도 가져볼 수 없는 것처럼 손에 그러쥐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

그 이후로 어떻게 병실까지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던 자리에 뇌를 버려두고 온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나를 병실 침대 위에 눕힌 차무겸이 종아리를 그러쥐고서 잭나이프의 날렵한 날붙이를 드러냈다.

“자르자, 그냥.”

“…….”

“내가 매일 안고 다닐게. 그럼 되잖아. 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안 하는데, 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러면 되는 거라고 잇따라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맥없이 꺾인 고개 너머, 하늘을 가리는 창틀이 쇠창살처럼 다가왔다. 답답해. 숨이 막힌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머쥘 수 있는 자유 앞에 있었거늘, 왜 또 정신을 차려보니….

“왜 반응을 안 해.”

“…….”

“이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차무겸의 지저분한 숨결이 얼굴께로 다가왔다. 그가 나의 턱을 그러쥐고서 함부로 혀를 밀어 넣어 난폭하게 키스했다. 물컹한 살덩이가 치열을 쓸고 연약한 연구개를 문지른다고 한들 움츠러들지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아직도 나의 정신은 어느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중에 있었다. 모퉁이가 계속해서 갈려 나가던 의식이 기어이 맛이 갔는지, 거푸 곱씹게 되는 죽음 앞에서는 발목 하나 잘려나가는 게 그리 수선을 떨 일이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그것을 알아챈 듯, 내 위로 엎드린 차무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등을 대고 누운 나를 그대로 두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억압하는 것처럼 내리누르는 힘이 없다고 한들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서라도, 뛰어내릴까? 그래, 어쩌면 쇠창살은 내 마음속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고약한 생각이 곤죽처럼 퍼진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리하여 닫힌 창문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쾅!

어디선가 비명이 들렸다.

등줄기를 냉한 한기에 젖게 만드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익었다.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선이 향한 끝, 애매하게 닫힌 병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리며 누군가의 머리채를 그러쥔 차무겸이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형형한 눈발을 한 채 들어오고 있었다. 오한이 몰아쳤다. 물론 비 때문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추울 만도 했으나 이 오한은 그러한 외적인 요인이 아닌 내적인 요인에 가까웠다.

“무겸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차무겸을 따라 병실 바깥에 서 있던 박승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차무겸은 그를 개무시하고는 내가 무릎을 꿇고 앉은 침대 앞으로 다가와 손에 쥐고 있던 이를 밀어뜨렸다. 흠씬 두드려 맞았는지 상체를 새우처럼 만 문태욱을 보자 소름으로 뒤덮여 쭈글쭈글해진 심장이 완전히 차게 가라앉았다.

“이 새끼지? 너 도와준 거.”

“…….”

“머리를 존나게 굴려 봤는데 얘 말고는 답이 안 나와.”

차무겸은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털듯이 쓸어 넘기고는 문태욱의 머리맡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하여튼. 발정 난 개새끼들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네. 진짜.”

그가 손에 쥔 잭나이프로 문태욱의 뺨을 함부로 내려쳤다. 잘 벼른 날붙이이다 보니 단조로운 손길임에도 생살 위에 붉은 생채기가 죽죽 그어졌다. 곧 그가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박승원 쪽이었다.

“뭐 해? 형.”

“어?”

“잡아. 나 이 새끼 발목 자를 거야.”

가벼운 어투를 듣자마자 움찔한 건 세 명이었다. 나, 이미 발목에 문제가 생긴 듯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문태욱, 그리고 지시를 받은 박승원. 차무겸이 가분하게 던진 돌멩이는 그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돌멩이를 맞고 개구리가 죽으리라는 걸 아는 사람 역시 우리 셋뿐이었다.

“안 잡고 뭐 해?”

차무겸이 요지부동인 박승원을 노려보며 서늘하게 뇌까렸다.

“형도 어느 정도 책임 있는 거 알지? 이 새끼 거 아니면 형 거 자를 거야.”

반드시 누구 하나는 조져놓을 거라는 포부가 살벌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박승원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발을 움직였다. 그가 문태욱의 머리맡으로 향해 상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는 걸 보며 속이 시커멓게 썩어들어갔다.

“노, 놓으세요. 이거 놓…!”

나만큼이나 핼쑥하게 질린, 흘러가는 대화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짐작한 문태욱이 뒤늦게 반항했다. 그러나 상체는 박승원에게, 하체는 잭나이프를 높게 치켜든 차무겸에게 잡힌 채로는 무용한 짓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일이 실제인지 꿈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 끔찍하고 처참하지 않은 부분이 없어서 현실성을 느끼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저 날카로운 것이 향한다면 내 발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그게 문태욱에게….

머잖아 그게 오롯한 현실임을 일깨워준 건, 아래로 내리꽂히는 나이프의 궤적이었다.

“아아악!”

칼날이 기어이 발목의 살갗을 꿰뚫었다.

병실 내에도 붉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진한 피가 분수처럼 괴어올랐다.

그럼에도 날이 바짝 선 칼은 그 안에서 신경을 모조리 끊어버릴 것처럼 생살을 휘적거렸다. 차무겸은 손등으로 모자라 팔목까지 피가 튀고 있음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정말 문태욱의 발목을 완전히 못 쓰게 만드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동공이 온통 시뻘게졌다. 코를 스치는 피 냄새가 병실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잔혹하게 퍼졌다. 그토록 몰인정하고 가학적인 차무겸의 행동은 내게 확고한 뜻을 전하고 있었다. 포기해. 자살은 관둬. 넌 죽어도 나를 못 떠나. 그는 내가 창문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문태욱을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다.

이제 모든 감정이 탁하게 흐려지고,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고 있는 장면은 도무지 흘려보낼 수 없는 중압감과 공포심을 선사했다. 특히나 문태욱은 앞선 두 경우와는 달랐다. 김형준, 그리고 안진권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내게 위협을 가하려던 게 아니라 나를 도와주려다가 저런 몰골이 되어 저렇게….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니 창문을 향해 뻗어지던 손이 툭, 떨궈졌다. 나는 어느새 풀려버린 다리에 힘이 잘 들어오지 않아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듯 추락했다.

“그만, 그, 만….”

박승원은 도저히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문태욱은 정도 이상의 고통에 졸도한 건지 고개가 모로 꺾인 채였다. 이 와중에도 살점을 휘저어대는 끔찍한 소리가 멎지 않았다. 무자비한 손길로 난도질을 당하는 게 문태욱의 발목이 아니라 나의 정신머리인 것처럼 뇌 안쪽이 헐겁게 삐걱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마! 그만해, 제발, 그만해….”

도통 이성을 부여잡을 수가 없어서 바닥에 휘늘어진 채 외쳤다.

안간힘을 다해 터뜨린 그 한마디에 칼날이 핏줄기를 가르고 나와 바닥을 핑그르르 굴렀다.

차무겸이 흥미를 잃은 것처럼 잭나이프를 내던지자 박승원과 다른 동료가 서둘러 문태욱을 데리고 나갔다. 모순적이었다. 이곳은 병원이고, 여긴 병실인데. 아픈 곳을 치료하고 다친 곳을 돌보는 병실인데 내 주변에는 코를 찌르는 혈흔만 가득했다.

그가 주저앉은 내 앞으로 다가와 나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에게 덕지덕지 묻어 있던 핏자국이 나에게까지 옮았다.

“어떡하지, 사은아?”

“…….”

“나 진정이 안 돼.”

그가 멋대로 끌고 간 내 손을 제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제 입으로 뱉은 실토를 증명하듯 터질 것처럼 뛰는 심박수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피가 정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돌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 살갗 역시 뜨끈한 감이 있었다. 차갑게 말라붙어 식어버린 나와는 달랐다.

“너 아까, 옥상 난간에 올라가 있는 걸 본 순간부터 그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이 지랄이야….”

조금 전까지 미치광이처럼 굴던 게 거짓말처럼 차무겸은 온통 불안만 낭자한 세상 속에 빠진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럴 때야말로 그에게 소름이 돋았다. 생전 처음 맞닥뜨려보는 감정과 상황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것처럼. 내 앞에서는 잘난 모습만 보이던 그가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흉내 내듯 구는 이럴 때가….

그걸 보자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이미 까슬하게 메마른 줄만 알았던 속으로 울분이 너울너울 차올랐다. 기어이 울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미로에 갇힌 심경이었다. 차무겸과 함께할 때의 감정은 늘 이렇게 상하로 요동치는 곡선을 그렸다. 급격한 경사를 타며 실컷 하늘로 솟구쳤다가 막을 새도 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함께 나아갈 영역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됐잖아.”

왜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지.

“나, 나 이 정도로 가지고 놀았으면 충분하잖아….”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서 두 손으로 눈가를 짓뭉개듯 가렸다. 차라리 시야를 가로막고 싶어서였다.

“왜….”

헤아릴 수가 없는 노도였다.

“왜, 왜 이렇게….”

도저히 끝을, 헤아릴 수가 없는….

눈동자에서 뜨끈한 물기가 끝없이 샘솟아 올랐다. 막을 수 없는 오열이 감정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넌 내가 널 가지고 노는 것 같아?”

심장의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며 씨근대던 그가 스스로 제한을 걸듯 눈을 가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착각하지 마. 그 반대니까.”

흐릿흐릿하게 번진 눈앞에 완연한 분노로 범벅된 얼굴이 보였다.

“매번 네가 날 휘두르는 걸 정말 모르겠어?”

“…….”

“이렇게 뭐에 홀린 병신처럼 정신 못 차리게!”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감정을 엿본 것처럼 속이 뒤엉켰다. 온갖 것이 지저분하게 얽힌 감정의 덩어리 속, 그의 낯빛은 십 년 감수한 얼굴 같기도 했다. 내가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발견해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능폭함을 어설프게 갈무리한 광증이 우울하게 돌아다니는 단언이었다.

“너한테만 이래. 너만 이래. 그러니까… 나 좀 적당히 가지고 놀아, 사은아.”

또다시 나의 하늘을 가려놓고서 차무겸 너는 그렇게 말을 한다. 마치 우리의 관계 속에서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게 나라도 되는 것처럼.

병실 내에 음울한 빗소리가 차올랐다.

감각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그게 피할 길이 없는 증거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나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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