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 지독하다.
나는 그것을, 엄마에게서 중절 수술을 진행할 산부인과를 소개받을 때에 똑똑히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껄적지근함에 차라리 땅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만 싶어지는 기분. 그러나 현실은 외면하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이 또한 마땅히 감내해야 했다.
곳곳의 층이 임대로 비어 왠지 모르게 폐건물 느낌이 나는 병원은 음산한 외관과 다르게 안쪽은 제법 그럴싸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시설은 적당히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고, 데스크 직원도 적당히 친절했다.
데스크로 향해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말하자 데스크 직원은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에 입력하는 게 아니라 수기로 무언가를 작성했다. 병원 접수는 진료 기록이 남기 때문에 차무겸에게 발각당할 위험이 있어 이마저도 엄마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엄마가 살아가는 곳이 이런 불법적인 행위를 주저 없이 행할 수 있는 배경이라는 게 복합적인 심경을 야기했다. 서글프면서도 다행이었고, 그렇게 여기는 내 스스로가 역겨웠다.
데스크 직원이 부지런을 떠는 걸 지켜보다가 돌연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가죽이 벗겨진 낡은 소파에 갓난아기를 껴안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긋한 눈길이 향했다. 하얀 포대기 안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표정이 햇살을 움켜쥐어 솔솔 뿌린 양 해사했다. 사랑과 애정을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딱 저런 얼굴이 나올 것처럼. 여자가 제 아기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눈동자에 넘실거리는 부드러운 온유함이 또렷이 증명했다.
“저기요, 여기 금연이에요.”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직원이 날카롭게 말했다.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이 내 쪽에 가까워 고개를 돌리다가 뒤늦게야 옆에 다가와 선 사람을 발견했다.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인기척에 흠칫 놀라 거리를 벌렸다.
직원의 뾰족한 타박에 점화하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옮겨 잡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여긴 왜….”
지난번 그 남자였다.
엄마에게 뭐라도 만들어주기 위해 음식 재료를 사러 나왔다가 마주쳤던 남자. 약 올리듯 내 모자를 뺏어가며 농락에 가까우리만치 무례한 제안을 건넸던.
경계심이 가시처럼 돋아올랐다.
“이서영이 부탁하던데.”
그는 외려 놀란 내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 뚜하게 답했다. 오늘 아침, 엄마가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윤 실장에게 따로 부탁을 하겠다, 어쩐다….
“그쪽이… 윤 실장이에요?”
“어. 몰랐냐?”
이제야 엄마가 나를 만난 이래 자주 통화를 하던 ‘윤 실장’의 정체를 깨달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듯 굴며 함께 일을 하던 사람이 이 남자였구나.
“너 임신했다며?”
윤 실장은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외양부터 그렇게 생기기는 했다만…. 테스트기만 한 거라 임신이 확실하진 않았으나 무엇도 대꾸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데스크의 나뭇결무늬만 고집스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윤 실장은 이런 내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저 좋을 대로 지껄였다.
“순진한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발랑 까진 계집애였네.”
“…….”
“야, 애 아빠는 누구야?”
“관심 끄세요.”
“기껏 챙겨주러 온 사람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윤 실장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낄낄대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어라.”
“…….”
“얘 진짜 발랑 까졌네.”
부러 외면하고 있는데, 윤 실장이 불시에 내 네크라인에 손가락을 걸어 쭉 잡아당겼다. 그 바로 아래로 차무겸이 새긴 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빤한 눈길이 그것을 스쳐서라기보다는, 낯선 남자의 손길이 내게 닿았다는 데에 기겁해 화들짝 그 손을 쳐냈다. 짝-! 하는 소리가 조용한 병원 로비를 울렸다. 몇 없는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보다도 기괴하게 뒤틀리는 심장의 모양이 조금 더 나를 옥죄었다.
“허.”
졸지에 손이 내쳐진 윤 실장이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내가 너 잡아먹냐?”
“…저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예, 예.”
흐트러진 네크라인을 정리하며 남자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경우 없는 남자와 얼마나 더 함께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데스크 직원이 나를 불렀다.
검사는 간결하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시한 대로 따른 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대면하고 있었다.
“임신 맞습니다. 8주 정도 됐군요.”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밋밋하던 아랫배에 묵직한 무언가가 얹힌 것만 같았다.
“수술을 원하신다고 들었는데, 최대한 주수가 이른 편이 좋겠죠. 날짜는 언제가 편하십니까?”
의사는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듯 통상적으로 굴었다. 내가 말을 하면 받아 적을 것처럼 펜을 들고서 기다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기도를 틀어막았다. 대답이 없는 나를 향해 돌아오는 눈동자는 돌멩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감했다. 온기나 의지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든 그 태도는 정말로….
수술.
이상하게 충분히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사실로 들어서기 전, 우는 아기를 바라보던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스스로조차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사나운 격동이 맘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의사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입 안은 계속해서 뻣뻣하게 말라 갔다. 모래를 가득 퍼먹은 것처럼 속이 텁텁한 사막으로 변질되어간다. 이토록 황량한 상태로는 내가 다짐한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자칫 하다가는 나 자신이 그 모래 속에 빠져 그대로 사장될 것만 같았기에.
내 망설임을 깨달은 걸까, 의사는 적당히 여유가 있는 이 주 후로 날짜를 잡았다. ‘빨리’ 하는 게 좋다고 했지만 내 상태를 보니 외려 이르게 잡았다가 역효과가 날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계획대로의 일인데, 마음이 왜 자꾸….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감정을 따라 무거워진 심경에 걸음마저 덩달아 축축 처졌다. 왜 막상 수술을 앞에 두니 눈앞에 벽을 마주한 것처럼 막막한 기분만 드는 걸까. 예정대로 진행되는 일인데 꼭 이정표가 부재한 길을 빙글빙글 맴도는 것만 같다.
터벅거리며 걷다가 한 박자 늦게야 귀를 아우르는 걸음 소리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아챘다.
“…….”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불을 붙였는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를 삐딱하게 문 윤 실장이 내 뒤에 서 있었다.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아무리 봐도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처럼 보여 힘없이 전했다. 지금은 윤 실장과 사소한 입씨름을 벌일 만큼의 기력도 없었다.
“너 데려다주는 거 아닌데?”
그러나 남자는 그런 나에게 의향을 맞춰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럼 어디 가는데요?”
“내 집.”
자기 집에 간다는데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하기도 뭐해서 나는 조용히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윤 실장은 내 뒤에서 멀어질 생각을 안 했다.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연립 주택에 도착했을 때까지 멀어지지 않는 인기척에 우뚝 멈춰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그만 가세요.”
“가긴 어딜 가.”
“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냐고.”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그쪽 집이라고요?”
“여기 내 건물이야.”
“…….”
“네가 지내는 그 집도 내 집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윤 실장은 날 비웃듯이 쪼개며 다가왔다. 내 앞에 선 그가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뜨려 발로 지져 끄고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발랑 까진 게 도끼병까지 있나 봐.”
담배 냄새가 어린 까닭에 목소리가 톡 쏘듯 느껴졌다. 눈이 따가워 눈살을 찌푸리자 윤 실장이 피식 웃었다. 그는 우두커니 선 나를 두고서 휘적휘적 걸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그 뒤를 따른 것은 왠지 모르게 겸연쩍어진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였다.
집으로 들어서서 잠금장치를 걸다가 멈칫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윤 실장에게 연락을 했고, 윤 실장은 제 명의로 된 건물 중 하나의 방을 내어줬다는 거지. 그럼 결국 그 남자가 언제든지 여기 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여긴 그가 소유권을 쥔 공간이니까.
어떠한 생각이 들기도 전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평소엔 가장 하단의 문고리 정도만 잠가두는 편이나, 오늘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철걱, 철걱 모조리 잠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습관처럼 이부자리 위에 눕는데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현관 쪽을 힐끔거렸다. 한우현과 헤어진 이래 겨우 벗어던진 불길함이 다시금 나를 스멀스멀 좀먹어오고 있었다.
‘인생 좆같아질걸?’
여전히 그 고약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
의사의 확진을 듣고서야 몸이 임신임을 받아들인 걸까, 고생길이 포문을 열었다. 음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을 하는 건 우스운 정도였다. 배가 갑자기 아파졌다가 고파졌다가, 또 날붙이로 긁는 것처럼 쓰려졌다가. 요 며칠간 잠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난 것 역시 임신 증상 중 하나였다.
덕분에 작금 들어 내 생활 패턴은 늘어지게 자든지, 깨어나 속을 게우거나 채우든지 둘 중 하나였다.
엄마는 병든 닭처럼 골골대는 내 모습에 마음이 못 견디게 쓰린지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진종일 내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까닭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챙겨둘 것을 당부했다.
달리 누가 있겠는가.
망할 윤 실장 한 사람뿐이었다.
남자가 식사를 챙겨준다는 이유로 불쑥불쑥 찾아올 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야, 문 열어라.’
윽박질처럼 쾅, 하고 문을 두드리는 윤 실장의 태도는 심장 전체를 싸하게 물들였다. 잘 묻어두었다고 여겼으나 날 선 자극 앞에서 극한의 공포심은 쉴 새 없이 들춰졌다. 그가 그럴수록 나는 닫힌 문 안에서 울렁임이 멈추지 않는 속을 부여잡고서 간신히 심호흡만 했다. 그 상태에서 족히 몇십 분은 지난 후에야 문을 열어줄 수가 있었다.
그때마다 윤 실장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해쓱하게 질린 나를 보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그냥 맥을 못 추네, 못 춰.’라며 퉁명스레 말하고는, 엄마가 부탁한 음식을 툭툭 내던졌다.
‘너 나 무섭냐?’
그런 그가 어느 날 음식을 주다 말고 물었다.
이어지는 나의 침묵 속, 그는 대답을 알아서 유추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길고 짙은 입아귀가 비뚜름하게 휘어졌다.
‘눈 동그랗게 뜨고 따박따박 말대답할 때는 언제고.’
‘…….’
‘알겠다, 알겠어.’
그러고는 다음 날부터 큰 기척 없이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사라졌다. 나중에서야 문을 열어 보면 음식은 문고리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모를 듯한 남자였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은 세심함이었다.
이제는 겨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날씨.
정오에 가까워진 시각임에도 다소 쌀쌀한 감이 있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작은 창 너머로 눈길이 미끄러졌다.
오늘도 생각은 백지 위에 그려 넣은 낙서처럼 지저분했다. 최근 들어서는 ‘만약 수술하지 않는다면’에 대한 가정이 끊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각도에서 돌아보아도 희망이 없는 가정이었다. 이 아기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맞았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엄마의 우려와 일맥상통할, 예정된 가시밭길. 그걸 알면서도 굳이 발을 디딜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한 번씩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신물 같은 감각이 모든 이성을 토독토독 부서뜨린다. 이건 뭘까? 죄책감일까? 얘가 내 몸속에 기생충처럼 자리를 잡은 게 얼마나 된다고…. 그런 걸 느낄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게 있나? 모르겠다. 모르겠어. 내게로 닥칠 현실을 알기 때문에 낳겠다는 결정은 죽어도 내리지 못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또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가기를 택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이랬지.
치닫는 생각의 끝은 언제나 마음이 으깨지는 자괴감이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에서 항상 달아나려고만 했으니까. 받아들여 이겨 낼 용기 따위 없어서 늘….
똑똑.
오늘도 여지없이 기척이 문을 두드린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다가 핑 도는 머리에 잠시 멈칫했다. 현기증이 심해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차피 윤 실장은 음식을 문고리에 걸고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다는 마음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축 처진 상체를 간신히 일으키는데 아랫배가 뭉근하게 아파 왔다.
또 시작이다. 어쩌면 이 생명이 며칠 후 자신을 제거하려는 걸 알고 발악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사고회로마저 이 지경이구나. 나는 점액질처럼 끈적하게 파고드는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그새 땀이 난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며 몸을 마저 일으켰다. 현관까지 걷는 게 아니라 몸을 끌고 가는 심정이었다. 고작 그거 걸었다고 지친 게 여실한 안색으로 문을 열었다.
열린 틈 너머로 찬기가 쏟아졌다.
“…….”
동공이 갈피를 잃은 것처럼 휘청댄 건 찰나였다.
윤 실장이 무언가를 걸어두고 갔으리라는 짐작과 달리 문고리는 휑했다. 그를 대신하여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열린 문 앞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동백꽃 한 송이였다.
건물 내부임에도 싸하게 부는 겨울바람과 그것은 조화를 이룰 듯 이루지 못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놓인 붉은빛이 피처럼 진했다. 망연함에 나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문손잡이를 밀었다. 그러자 끼이익, 하고 조금 더 열리는 문 너머 붉은 향연이 이루어졌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흡사 이정표를 대신하듯 길고 비좁은 복도를 따라 동백꽃이 일정한 폭으로 놓여 있었다. 손잡이를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손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늑골이 함부로 쥐어짜인 것처럼 수축했다. 지금 당장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야만 한다는 이성과 달리 본능은 한발 늦었음을 알아챈 것처럼 크고 광폭하게 진동했다. 진폭의 정도는 어느 때보다도 거셌다.
그럼에도 홀린 듯 발을 내디뎠다. 희망이란 아주 못되고 고약한 것이라서, 눈으로 절망을 맛보기 전까지는 완연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나와 연관이 없다고 단정 짓고 싶은 것처럼 복도 한가운데를 차지한 꽃을 피해 더듬더듬 걸어나갔다.
대체 어디서 이리도 생생한 동백꽃을 구했을까 싶은 의문이 고개를 들 무렵, 바닥을 암울스럽게 가로지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
뒷덜미가 잡혀 신경이 질질 끌려간 것처럼 돌아본 그곳에는 계단 위에 걸터앉은 차무겸이 있었다.
“네가 거기서 나오면 안 되는데.”
존재하는 기억 속 단 한 번도 내 눈을 피한 적이 없는 강건하고도 미려한 눈매, 그 안에 예리하게 번들대는 동공이 범접할 수 없는 한기가 되어 나를 덮쳤다.
“그렇잖아, 사은아.”
“…….”
“넌 한우현 집에 있어야지.”
쿵, 무언가가 초라하고 볼품없이 낙하했다. 그게 내 심장이라는 걸 알아챘을 때 두 가지 변화가 일었다. 첫째로 차무겸이 앉아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것, 둘째로 내가 등을 돌려 집을 향해 달음박질한 것. 과연 내가 보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아직은 이른 계절인 겨울을 완연히 알리는 꽃의 존재가 결코 차무겸의 흔적이 아니기를 바라기라도 한 걸까.
이미 뒤를 돌았음에도 등줄기로 꽂혀 들어오는 매서운 시선에 숨이 막혔다.
정신없이 뛰어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기 전, 커다란 손이 불쑥 들이밀어져 쾅! 하고 그것을 제지했다. 아등바등한 것이 무색하게 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좁아진 문틈을 우악하게 벌렸다.
“한우현 집에 얌전히 처박혀 있다가 나한테로 돌아와야 맞는 거잖아.”
“…….”
“이딴… 씨발… 좆같은 곳에 네가 있으면 안 되지, 어?”
급격하게 꺾여 바닥을 치는 저음에 나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손님이라도 받나 봐?”
모로 꺾인 고개의 각도조차 내게는 위협이었다. 그 목소리에 조각조각 어긋난 정신이 확 깨어났다. 냉기를 싸늘하게 두른 몸이 기어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손발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냉기를 피하고 싶은 것처럼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의 등장으로 숨 막힐 것처럼 협소해진 공간 속에서 넋을 잃은 채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동백꽃 다발을 성의 없이 내던졌다. 집 안 여기저기로 고혹스러운 홍빛의 꽃잎이 너울너울 퍼져 바닥을 장식했다.
차무겸은 등을 문에 기댄 채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동안에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짐승의 선득한 발톱이 혈관 바로 위에 놓인 것처럼 오싹했다. 아까처럼 도망을 시도할 수 없었다. 당장 뒤를 돌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조마조마함이 심장을 옭아맨 까닭이었다.
철컥, 라이터 휠을 돌리는 소리가 적막에 미묘한 실금을 냈다.
그는 담배를 아슬하게 문 채로 다시금 안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품에서 끄집어져 나온 것은 바로 지갑이었다.
“얼마 받아?”
“뭐…?”
아주 가늘게라도 내쉬던 숨이 졸아붙었다.
내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차무겸이 지갑을 벌렸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느 과거의 흔적이 불시에 들춰진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쪽으로 지폐 몇 장을 집어 던지는 차무겸의 태도로 회상은 깨부숴졌다.
“이 정도?”
“…….”
“아님 더?”
얼굴을 찰싹찰싹 때린 지폐가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속 어딘가가 일그러지는 듯한 모멸감을 감출 수 없었다.
“너 지금, 뭐 하는….”
“얼마면 네 밑구멍 다른 남자한테 내놓는 거냐고.”
그가 다가올수록 나는 덫을 코앞에 둔 생쥐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갔다. 너무나 협소한 집구석에서는 그를 피할 길이 없었다. 차무겸의 존재감, 아니, 그 존재로부터 기인하는 공포감이 나를 위협스레 억누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후에야 그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 나는, 몸 판 적 없어.”
“그럼 그 새끼한테 다리 벌려주고 적선이라도 받아? 뭐랬더라… 윤 실장?”
그의 입에서 아는 호칭이 튀어나오자 등골이 섬칫, 말렸다.
“무슨….”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차무겸이 겨우 두세 입 태운 담배를 벽에 함부로 지져 껐다. 사납고 느린 움직임 후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는, 꺼멓고 동그란 자국이 새겨졌다. 탄내가 코를 거북하게 스쳤다.
“아!”
다음 순간, 머리채가 붙잡혔다.
“내가 이제 재미없다고 말했지.”
“흑, 놔…!”
“넌 이게 재밌어? 내가 계속 너 쫓아다니면 기분이 막 째지고 그래?”
자비를 찾아볼 수가 없는 손길에 눈두덩이가 시큰하게 물들었다. 나는 머리채를 억세게 붙잡은 그의 팔뚝에 손톱을 세우며 차무겸을 노려보았다.
“네가, 네가 날 속였잖아!”
“…….”
“나, 다 들었어. 안진, 권. 멀쩡하다며. 안 죽었다며…!”
“…….”
“넌 대체, 나를, 날 뭘로 보고 그런 거짓말을. 어차피 들킬 걸 왜,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차무겸은 내가 울음에 반쯤 먹혀 더듬더듬 터뜨리는 힐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외려 이맛살을 찌푸리며 미묘한 불쾌감을 표출했다.
“누구지?”
그 얼굴 그대로 터뜨리는 음성이 겨울의 첫눈처럼 마냥 깨끗해서, 잠시 소름이 돋았다.
“누가 얘기한 거지?”
“아…!”
“조질 만큼 조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쓸데없이 입 터는 새끼가 남았어? 이번엔 또 누군데? 또 누가 너한테 넘어가서 좆같은 짓을 한 거야?”
“차, 차무겸. 하지 마. 놔! 아프다고!”
“아, 한우현인가…?”
목소리의 곡조가 음산함을 모방하듯 더디어졌다.
“왜 내가 한우현을 족치러 가지 않았는지 알아?”
차무겸이 친절히 설명해주겠다는 듯 입술을 귓가에 바짝 가져다 댔다.
“그 새끼는 어차피 너한테 손 못 댈 거 알고 있었거든….”
“…….”
“소심한 새끼라, 대범한 척하면서도 늘 중요한 문제에서는 한 발 빼기 일쑤인 걸 잘 알아서.”
그가 뜨거운 숨을 연방 터뜨리던 입술을 오므려 귓불을 세게 깨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필요 이상으로 발버둥을 치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차무겸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나 혼자 바닥을 뒹구는 꼴을 볼 바에는 함께 진창을 뒹굴자는 것처럼 기꺼이 내 위에 올라타 왔다.
엎드린 채로 앞을 향해 기어가려던 몸이 바닥으로 억눌렸다. 그악스러운 손길이 고무줄로 이루어져 헐렁한 바지를 쭉 잡아 내렸다. 헉, 하고 목구멍이 틀어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보다 왜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
“으, 싫…!”
“윤 실장 그 새끼랑 얼마나 붙어먹었냐고 물었잖아.”
차무겸은 대답 없는 나를 대신하여 직접 알아보겠다는 듯 가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엉덩이가 벌어지며 꽤 오랜 시간 아무런 자극도 닿지 않았던 구멍이 둥글게 문질러지는 느낌에 어깨가 움찔, 튀었다.
“아, 아으흡…!”
이윽고 구멍 주름이 벌어지며 안으로 그의 손가락이 진입했다. 차무겸은 뻑뻑한 안이 여의치 않았는지 혀를 차며 그 아래로 침을 뱉었다. 바닥을 구명줄처럼 움켜쥔 손가락이 바짝 서서 손톱으로 장판을 박박 긁었다.
“빼, 빼… 빼. 그만, 그만해…!”
아래가 강제적으로 벌어지는 감각이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를 바닥에 딱 붙이게 된다. 벌벌 떨며 다리를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에게 이 존재를 죽어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 에워쌌다.
“그 새끼 좆은 커?”
“그만, 아, 으.”
“내 거보다?”
“빼, 빼라고….”
마치 나를 떠보듯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멈추지 않으면서 아래를 집요하게 쑤석거린다. 누가 보면 그 안에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걸 숨겨두기라도 한 줄 알 정도로. 그러다가 겹쳐진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박혀 안쪽 살점 어딘가를 두드리듯 짓누르는 순간 등허리를 쑤셔대는 전율이 아찔하게 범람했다.
“으…!”
“하.”
차무겸은 이런 상황에서도 느끼는 내가 기막힌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리며 손가락을 더 정신 사납게 놀렸다. 아, 아, 흣. 입에서 누가 칼로 툭툭 자르듯 완성되지 않은 신음이 험한 모양새로 터져 나왔다.
차무겸은 어느 순간부터 말도 없이 벌게진 눈으로 내 아래만을 악착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붙잡혀 그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그 상태로 질구가 사정없이 벌어져 그의 손가락에 의해 무참히 쑤셔발겨졌다.
배 안쪽이 꽉 조여드는 아찔함에 나뒹구는 이불만 찢을 듯이 잡아당기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벗어나고 싶어도 복사뼈 부근을 움킨 아귀힘에서 달아날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차무겸이 피스톤질 하듯 일정하게 추켜올리던 손가락을 스르륵 빼내었다. 벌어지는 거리를 따라 아래를 질척하게 적신 점액질이 손끝으로 거미줄처럼 기다랗게 늘어졌다.
그가 엎드려 있던 나를 정자세로 눕히고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다리를 고정시켰다. 날 제압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바지춤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나른하게 풀어진 몸을 간신히 추스른 나는 그런 그를 경악스레 응시했다. 혼몽으로 으깨진 머리가 어질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발을 헛디뎌 악몽 속에 빠진 것처럼 이 상황 그 어느 부분도 끔찍하지 않은 구간이 없었다.
“좋아하, 지, 않는다면서.”
벨트를 풀던 그의 손길이 멎었다.
“나, 나, 사랑하는 거 아니라며. 그런 거 다 의미 없다고 여긴다며….”
달뜬 숨이 울음기로 변질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너, 왜,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여태껏 부정하고 외면하려고 애써보았다. 하지만 차무겸과 마주칠 때마다 그의 행동과 태도는 내가 스스로 그어놓은 부정의 선을 아주 쉽사리 지워버렸다. 회피하고자 쌓아둔 벽을 와르르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나에게 이리도 집착적으로 굴고, 뭐든 쉽사리 싫증을 내는 녀석이 도통 나를 놓을 생각을 안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발정 난 것처럼 안으려고 하는 이 모든 태세가.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을 좀, 돌아봐봐. 그렇잖아. 너, 너, 꼭….”
날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잖아.
수준이 지독하다고 한들, 정도를 넘어섰다고 한들, 그 기저에 깔린 건 오직 하나의 감정으로밖에 다가오지가 않는데.
그럼에도 아직까지 마음에는 부정의 물살이 어김없이 출렁이고 있어서 어떻게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가 않았다. 반쯤은 오기였다. 그 말을 꺼내게 되는 순간 내가 그간 외면하던 모든 현실을 직접적으로 마주치게 될 것만 같았기에.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온 그것이 사실은 나만 모르는 정답이었을까 봐.
나의 위에 올라타 햇살을 반쯤 가린 차무겸에게서 지긋한 시선이 뿜어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저 눈을 보는 게 무서워졌다.
온갖 곳에서 우글우글 몰려든 상념에 잠겨 덜덜 떠는 나와 달리 차무겸은 지나치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붓사붓한 눈꺼풀에 반하여 그 아래로 드러나는 눈동자는 양날의 검처럼 선득하게 번들거렸다. 광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채가 찐득하게 깃들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썩 긍정적인 신호로 다가오지 않는 안광의 점화가 단순히 기우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런가 봐.”
제 행로를 막고 있는지도 몰랐던 벽을 깨부순 것처럼.
“이게 사랑인가 봐, 사은아.”
저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던 무형의 깨달음에 당도한 것처럼.
세계를 뒤집을 획기적인 발견을 한 과학자도 저리 눈을 빛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내 부모가 하던 그딴 쓰레기 같은 게 아니라….”
“…….”
“그건 애초에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하찮고 가볍잖아. 입맛 따라 바꿔 가는 감정을 그렇게 무겁게 표현해서는 안 되잖아, 그치?”
샐쭉 휘어지는 입꼬리가 광대의 그것처럼 기이했다. 내가 꺼내 든 가정이면서도 결코 원치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기류 안에서 속이 뒤집히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이게 사랑일 리가 없었다. 차무겸의 입에서 뱉어지는 고백은 닿는 즉시 살을 녹이고 내장을 썩게 할 맹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야….”
무언가를 힘껏 부정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간신히 말했다.
“너는, 넌 나 사랑하는 거 아니라고….”
쾌락으로 쭈뼛 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검은 동공이 나의 얄팍한 부정 한 결에 써늘하게 식었다. 겨우내 암영 마을 곳곳을 둘러싼 얼음장처럼 온기를 잊은 채로 바닥을 친다. 마치 내가, 그가 일컫는 사랑을 부정하는 것에 있어서 굉장한 모욕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왜?”
웃음을 품고 있는 낯이 공포감을 맥동하게 했다.
“네가 먼저 물은 거잖아.”
그거야 당연히 그가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빌미로 나를 괴롭히는 건 이제 그만두라고 할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왜 인정을 해? 왜?
그 복잡한 심리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나의 고개가 어설프게 도리질을 쳤다. 차무겸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의 흉내를 내듯 미소를 덧그렸다. 그 가증스러움이 우스웠다. 웃기면서도 두려웠다. 차무겸의 급진적인 변화는 속을 장악한 두려움을 극도로 극대화시켰다.
나는 흐트러진 옷을 추스를 생각도 안 하고 더듬더듬 몸을 일으켰다. 누가 밟아 꿈틀한 지렁이처럼 가련하기 짝이 없는 몸놀림이라도 간절했다. 도망가야 해. 지금 당장 저 비이성적인 광기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억지로 뒤틀었다. 그러나 능폭한 권역 아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도 전에 발목이 콱 붙잡혔다.
“씨발, 자꾸 어디 가는데.”
음산한 성음이 등줄기를 끈적하게 훑었다.
“내가 지금 너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있잖아….”
침이 고인 입이 헤벌어졌다.
차무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복숭아뼈를 쓸었다. 피부를 얇게 포 뜨듯, 아주 느긋하게 더듬는 그 손길이 미세한 솜털을 쭈뼛쭈뼛 일으켰다.
공기의 입자 하나하나가 비틀린 양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괴기한 감각에 좀먹히는 순간이었다.
“아… 아, 안 돼! 흑, 하, 하지…!”
복숭아뼈의 위쪽을 감싼 그의 손목이 힘을 주어 발목을 기괴한 각도로 꺾었다. 뼈가 일그러지는 듯한 통증에 허리가 바닥에서 뜨며 몸이 엉망으로 굴렀다. 그 격렬하고 간절한 저항에도 차무겸의 손길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억세게 힘을 주며 나를 꿋꿋이 억누르려고 했다.
“아아악!”
마침내 뚜둑, 하고 딴딴히 당겨지고 있던 무언가가 허망하게 끊기는 파열과 함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헉, 하고 목 끝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숨이 터져 나왔을 때 옅은 피 맛이 났다. 정신이 얼추 들었을 때는 작열통에 가까운 통증이 신경을 떠돌았다.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 발목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가락에 조금만 힘을 줘도 아작난 뼈로부터 극심한 통증이 기어 올라왔다. 천장을 응시하는 동공의 초점이 맹하니 풀렸다. 그가 손을 댄 발목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체성을 갖춘 어마어마한 고통만으로도 그 모양은 볼품없이 처참할 것이 훤히 예상이 갔다.
“으, 흐으….”
덫에 걸린 짐승처럼 몸을 웅크린 채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데, 고무줄로 이루어진 바지가 다시 멋대로 끌어 내려졌다. 휑한 아래의 감각이 소름 끼쳐서 숨을 꺼트리며 몸을 마구 뒤척였다. 그를 발로라도 차고 싶었으나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아 무리였다. 무력감에 눈시울이 따끔따끔 달아올랐다.
차무겸은 순식간에 팬티까지 벗겨내고는 훤히 드러난 질구를 위아래로 마찰시켰다. 아까 전 멋대로 휘저어진 구멍은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에 바짝 마른 지 오래였다. 그걸 눈치챈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아까처럼 손가락을 마디 전부 밀어 넣어 질 안을 긁었다.
느린 속도로 젖는 게 시원찮았는지 차무겸은 검지에 침을 묻혀 음핵을 둥글게 비볐다. 애매한 모양으로 접힌 다리가 움찔, 떨렸다. 얼마 안 가 그는 아예 혀로 볼 안을 긁어 손으로 지분대는 비부에 침을 뱉었다. 윤활제 역할을 하는 게 늘자 좀 수월해졌는지 손가락 두 개가 안에서 매끄럽게 활력을 찾았다. 엉덩이와 종아리를 움찔움찔 뒤틀자 그가 잔혹하게 꺾인 발목을 잡아챘다.
“아악…! 흐, 아, 아파. 하지, 으, 하지 마. 아.”
아주 날카로운 유리 수십 조각이 박힌 것처럼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 부분을 함부로 붙잡고서 주물러대고 있으니 의식 역시 그렇게 파훼될 수밖에 없었다.
“사은아. 내가 너, 발목 예쁘다는 얘기를 했었던가?”
조금씩 습하게 젖어가는 구멍 속에서 가위질하듯 손가락을 벌렸다가 맞붙였다가 하면서 태연자약하게 지껄인다. 차무겸은 정말 황홀한 무어라도 되는 것처럼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내 발목을 보다가 혀를 내어 그 부분을 핥았다. 악! 욱신거리는 통증에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채워놔도 예쁠 것 같아.”
그건 물렁하고 축축한 습지의 느낌을 담은 혀가 복사뼈 언저리를 지나칠 무렵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 잠시간 맥을 추지 못했다. 경직된 내 상태를 알아챈 듯 차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찌꺽, 쩍, 쩍. 어느새 질액이 손가락에 척척히 달라붙을 정도로 안이 풀어졌다. 차무겸은 흥분액이 질펀하게 묻은 손가락으로 곧장 바지 버클을 풀었다. 고장 난 발목이 그의 손에 붙잡힌 채라서 도망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그가 매끈한 쿠퍼액으로 젖어 반들거리는 귀두를 지금껏 이완시킨 입구에 가져다 미적미적 비볐다. 이윽고 굵직한 성기가 헤실헤실 풀어진 질 안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아, 하, 윽…!”
아무리 손가락 두 개를 쑤셔 넣고 흔들어 풀어줬다고 해도 그 정도의 이완으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실은 발목의 통증에 도통 몸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아주 좁은 골을 생수통 같은 것으로 쑤시는 것처럼 벌어진 아래가 미치도록 얼얼했다. 피멍을 꾸욱꾸욱 찌르는 느낌이었다.
입구의 주름이 한계치로 벌어질 때마다 피가 흐르는 것만 같은 작열감과 따끔함이 엄습했다. 긴장한 만큼 꽉 수축하는 구멍의 조임이 그에게까지 전달됐는지 차무겸의 입에서 느른한 숨이 터져 나왔다.
“아, 좋다….”
“흑, 으, 응…!”
“씨발…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응?”
“하으, 으, 아!”
허벅지 안쪽을 큰 손바닥으로 억누르며 귀두까지 쭉 빼냈다가 숨 고를 틈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무지막지함에 고개가 홱 젖혀졌다.
“사은아. 아무래도 너는, 나 만나려고 태어난 것 같아.”
그가 죄악 같은 말을 내뱉었다. 흘려듣고 싶었으나 그 말은 가슴 속까지 기어들어 와 뻑적지근하게 고였다. 뜨끈하게 고조된 사내의 숨결이 목덜미를 핥듯이 스쳤다. 자꾸만 꿈질대는 발목이 붙잡혀 고정되고 정신 사나운 방아질이 시작됐다. 거북함인지 역함인지 모를 팽만감에 구역질이 났다. 아, 넋을 잃고 올려다보는 천장이 희미하게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산발적인 신음에 차무겸이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철퍽철퍽, 소리가 날 만큼 사타구니를 격렬하게 부딪쳐 오면서도 만족이 안 되는지 그가 얇은 티셔츠마저 벗겨냈다.
“그나저나 머리 잘랐네?”
“흑, 읍, 으….”
고통으로 버무려진 머릿속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차무겸은 그런 내 정신을 깨우려는 것처럼 한 번씩 발목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렇지 않아도 으스러진 뼈가 조금 더 모래처럼 갈라지는 듯한 느낌에 모골이 쭈뼛 서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어느새 목이 나갔는지 성대를 타고 나오는 비명의 음조가 맥없이 꺾여 있었다.
차무겸이 풍만하게 차오른 둔덕 위로 입술을 내려 젖꼭지를 머금고 부드럽게 조였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통통하게 부푼 유두 사이의 홈을 집요하게 후벼팠다. 손은 반대편 젖가슴을 그러쥔 채로 흠씬 주물러댔다. 이마저도 날 선 쾌감이 되어 머리통을 밀어내도, 아예 유방을 통째로 삼키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악착스레 달라붙으며 젖꽃판 전체를 침 범벅으로 만들어놓았다.
양 가슴을 원 없이 빨아재낀 후에야 고개를 든 그가 아득한 탄성처럼 속삭였다.
“긴 머리도 좋았는데… 후우….”
“…….”
“넌 왜 다 예쁘지….”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렀다. 그에게 붙잡힌 발끝이 옷장에 툭툭 부딪치며 섬망 같은 고통을 일으켰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어지는 통증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한결같이 밀려 들어오는 거대한 살덩이로 인해 내벽은 후끈후끈하게 긁어지고 있었다. 그가 내밀한 안쪽을 무아지경으로 두들길 때마다, 엉덩이가 장판 위에서 채신머리없이 들썩이며 반강제적으로 부추겨진 성감에 물이 쿨쩍 튀어 올랐다.
모든 구간, 모든 장면, 모든 감각 속에 나의 의지가 배제됐기 때문일까, 꼭 시체가 된 기분이었다.
“머리 짧아지니까 문신이 더 잘 보여.”
차무겸이 나의 몸을 반쯤 돌려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쭉 미끄러진 그것이 날갯죽지 사이로 자리 잡은 글자를 게걸스레 핥아댔다.
“윤 실장 그 새끼 장님이야? 이거 안 봤어?”
“흐, 으, 으으….”
“네가 하도 나돌아서, 자꾸 나 버리고 다른 호구 잡으려고 하길래 내가 친절히 이름까지 박아놨잖아….”
그가 잊지 말라고 경고하듯 침칠하며 문질러대던 부분을 잘근잘근 씹었다. 장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손가락이 몸서리를 치듯 움질움질 말려들었다. 차마 삼켜내지 못한 타액이 입 밖으로 샜다.
어쩌다가 구멍 안쪽에서 자맥질하는 성기의 귀두가 예민하게 달아오른 부분에 비벼질 때면 뇌까지 꽉 조여드는 기묘한 전율이 전신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차무겸은 이런 내 반응으로 느낀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속도를 높여 탄탄한 장골로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찔뻑, 찔뻑. 복잡하게 뒤얽힌 네 개의 다리 사이로 점성 짙은 소리가 끝없이 생성됐다.
“하아, 흣….”
“흐, 끅, 으, 아, 아아….”
분명 나란히 누운 자세였지만 나는 계속해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차무겸은 그런 나를 잡아먹으려 야금야금 진득하게 덮쳐왔다. 그래서 고지가 눈앞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반쯤 엎드린 자세였다. 차무겸은 마지막에 가서는 뱃거죽을 감싸 안고서 개처럼 뒤로 흘레붙으며 팡팡 쳐올렸다. 애매하게 떠오른 엉덩이 아래로 물이 후두둑 흩뿌려져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누구의 체액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난잡할 뿐이었다.
차무겸이 내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불거진 음핵을 간지럽혔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함에 푹 절여진 신경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삐쭉빼쭉 솟았다. 익숙하여 더 진절머리가 나는 감각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야가 오색찬란하게 물들었다가 꺼멓게 정전되기를 반복했다.
흐으, 흣, 아…. 입에서는 규칙성이 조금 더 없는 신음만 낭자하게 터져 나왔다.
이윽고 차무겸이 짐승처럼 들이박아대던 안을 거세게 찔러 올리는 순간 맞붙은 두 개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막 절정에 다다르며 동시에 안쪽으로 점액질의 무언가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여러 의미로 소름을 유발하는 느낌을 삼키는 동시에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 나는….”
안을 한참 찔러대던 성기가 찌걱대며 찬찬히 빠져나가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바늘이 잔뜩 박힌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호흡 한 자락 받아 마시는 것조차 벅찼다.
“나는, 너랑, 안, 가….”
“…….”
“너랑, 너랑 다시는….”
이 잔악함은 끝내 극에 달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사랑일 수가 없다. 사랑이어도 사랑이 아니다. 이게 사랑이라면 사랑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이건, 이건, 이건….
차무겸은 여전히 나의 의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한 번의 섹스로는 발기가 풀리지 않는 성기를 대충 갈무리하고는, 바닥에 늘어진 나를 안아 들려는 지금의 태도를 보면 딱히 그런 면모를 숨기려고도 안 했다. 그런 그의 손길을 피하듯 다가온 가슴팍을 밀쳤다. 벽에 간신히 기대앉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맺힌 눈물이 시야의 상을 흐릿하게 문댔다. 그럼에도 몸서리치게 되는 이 끔찍함은 도무지 끝이 나지 않았다.
“난, 나는 네가 싫어….”
이제는 얼추 등가교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서 지원을 받아온 만큼 내 삶이 무참히 갈려 나간 정도가. 받아먹은 만큼 충분히 짓밟히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뭉개지고 으깨지느라 이제는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은 마음의 조각 사이를 헤집어 먹색처럼 시커먼 조각 하나를 간신히 뱉어냈다.
싫다.
간결한 표현이지만, 실상 내재되는 건 무수히 많았다.
어쩌면 싫다기보다는 무서움을 우회하여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내 발목까지 분질러버린 그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저 감정에 씹어 먹혀서, 앞으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서. 차무겸의 곁에서 지내는 나의 모습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버려진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말라가고, 문드러지고, 썩어가다가, 결국엔 사장되겠지. 그건 결국 다른 의미의 죽음일 텐데.
“왜?”
침묵을 지키던 차무겸은 얼마간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의 손가락이 조금 전 제가 맘대로 비틀고서 양껏 주물러댄 발목에 닿았다. 아주 살짝 닿는 것조차 고역스럽다. 엇나간 뼛조각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눈가를 섧게 일그러뜨리며 몸을 옹송그렸다.
“내가 왜 싫은데?”
그 순간에 놀랄 수밖에 없는 건, 정말로 길을 잃은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차무겸의 눈을 대면해서였다.
어린아이에게 터무니없는 질문을 듣는다면 이런 마음일까?
답은 우리 둘의 사이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하다못해 그가 지금 손을 대고 있는 발목마저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거늘.
“네가 나를, 흑, 존중해준 적이 있어…?”
“…….”
“늘 그랬잖아. 매번 멋대로. 내가, 으, 싫다는데도 가두고, 강간하고, 문신도 막, 맘대로 새기고….”
“…….”
“난, 나는, 이제 싫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누가 개입하지 않아도 충분히 기구한 인생, 이 이상 나락으로 추락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눈을 깜박거리자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개를 덧씌운 것처럼 잔뜩 흐려져 있던 상이 조금쯤은 바로 잡혔다.
“뭐야.”
그가 티 없이 천진무구하며, 그렇기에 악독함조차도 훤히 드러내는 눈알을 데굴 굴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목이 바짝 말라간다.
“화난 거였어?”
화? 화가 난 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입장이기는 할까? 적어도 버림받았으면 받았지, 분통을 있는 그대로 터뜨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 거면 말로 하지.”
차무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자,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태도에 사지가 떨렸다. 문이 닫혀 있는데도 어디선가 자꾸만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은 이제 겁만 나게 된 지 오래였다.
이윽고 그가 주방 조리대로 향해 무언가를 붙잡았다. 예리한 날붙이가 번뜩였다. 가벼이 휘두르면, 공기마저도 살벌하게 찢을 것만 같은 식칼이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다가오는 차무겸의 태도에 벽으로 더욱 달라붙었다. 옹송그린 몸이 간헐적인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수록 발목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음을 아는데도 좀체 진정할 수 없었다.
차무겸은 대수롭지 않게 쭈그려 앉은 채로 한쪽 팔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내려둔 칼을 고쳐 쥐었다. 숨죽인 채 그를 지켜보던 나는 이내 그 칼로 제 팔목의 피부를 주저 없이 그어버리는 차무겸의 행동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흠 없는 살집이 흉하게 갈라지고 진득한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무심코 손을 뻗었다.
차무겸은 만류하는 내 손을 떼어놓고는 날붙이로 팔뚝을 난도질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살갗이 벌어지는 족족 선혈이 새어 나와 바닥으로 툭툭 흘러내렸다. 옅었던 피 냄새가 눈 깜짝할 새에 진해졌다. 위험천만하게 살갗을 가로지르던 날붙이가 기어이 손목의 선명한 혈관을 파고들었다. 그곳이 피를 위아래로 통과시키는 지름길임을 증명하듯, 줄줄 흐르는 혈액의 양이 배는 불어났다.
“뭐 하는 거냐고, 지금!”
코앞에서 펼쳐지는 붉은 물줄기에 기겁하여, 황급히 널브러진 이불을 끌고 와 그 팔을 감쌌다. 차무겸이 그런 나를 제지했다.
“왜 말려?”
“뭐…?”
“나도 똑같이 조져놔야 네 화가 풀릴 거 아니야.”
“…….”
“그래야 또 내 뒤통수 후려치는 짓도 안 할 테고!”
치밀하게 번뜩이는 홍채 속에는 차마 내가 감내할 수 없는 감정의 뭉텅이가 담겨 있었다. 뭉치고, 고이다가, 결국엔 시커멓게 썩어버린 것들.
“아니면 이걸로 안 돼? 부족해?”
그가 조금 전까지 제 팔을 엉망진창으로 베던 칼을 저 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든 채 제 몸을 해할 다른 것을 찾는 태도는 미치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 마, 하지 마…. 나의 입에서 애처로운 어조가 쉼 없이 터져 나갔으나 차무겸은 계속해서 광인처럼 굴어댔다.
이윽고 그가 히죽 웃었다.
“내 목 조를래?”
차무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내 손을 끌어다 직접 제 목에 얹어주었다.
이상하다.
“자, 네 화가 풀릴 때까지 졸라.”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차무겸의 팔뚝을 타고 흐른 뜨끈한 피가 나에게까지 옮겨붙었다. 끈적함이 나의 뇌 안쪽까지 퍼지는 것만 같았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왜 또. 정신이 나간 건 어쩌면 시종일관 천연덕스러운 그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쥐어진 단단한 목울대가 징그러웠다. 속이 게워내고 싶을 만큼 울렁거렸다. 눈앞에 온통 지긋지긋한 것 천지였다. 내가 싫어하는 피, 싫어하는 비좁은 구석, 싫어하는 폭력적인 상황, 그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종용한 차무겸.
마음이 한 번 출렁거렸다.
내 손에 지금 뭐가 있는 건지 인식한 건 다음 순간이었다.
차무겸의 목이다. 푸른 혈관이 또렷하게 맥동하는 강인한 살갗, 인간에게 있어 가장 연약한 부위 중 하나인 곳이 내 양손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징글맞기 그지없는 감촉이 손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마음이 다시금 출렁댔다.
어느 날부터 꾹꾹 억누르기만 했던 감정의 실타래들이 충동을 일으키듯 속에서부터 소용돌이쳤다. 감추고, 숨기고, 참아내고, 견디기 바쁘던 무수한 원망과 분노, 그를 향한 증오와 비난.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았던 나의 삶을 결국엔 저 좋을 대로 망가뜨린 주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차무겸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있음에도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그의 목을 졸랐다. 완전히 어긋나는 탓에 작열감 비스무리한 고통이 이는 발목을 억지로 움직여서라도, 그의 목을 조르는 데에 사력을 다했다.
툭 불거진 목울대를 엄지로 누르고 그 외의 혈관을 나머지 손가락으로 쥐어짤 듯 억압했다. 견디고 견디다가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졸라야지 나에게도 미래가 있을 것만 같은….
“……!”
손등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주던 차.
내 아래에 깔린 차무겸과 눈이 딱 마주쳤다.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눈매를 나른하게 푼 채의 차무겸은 입아귀를 찢어 웃고 있었다. 숨이 막힐 텐데, 기도가 조여 호흡이 원활하지 않을 텐데도 그는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마냥 황홀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그게, 그 아찔하게 부추겨진 감각이 지금 내가 벌이는 일에 대한 자각을 뒷골에 정통으로 꽂아 넣었다.
“아, 아아, 아….”
사람의 목을, 그것도 차무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 어떠한 것보다도 그 객체가 ‘차무겸’이라는 사실에서 의도치 않게 손에 힘이 빠졌다. 나조차도 예상치 못한 주저였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벌게진 그의 눈동자가 약간은 느슨해졌다. 이상하게 그 속에서 피를 질질 흘리던 안진권이 보였다. 그때 겪었던 두려움이, 그때보다 더 응집되고 극대화되어 나를 파도처럼 덮쳐왔다.
자각은 뒤늦은 깨달음을 동반했다.
목을 조르라며 뻔뻔하게 급소를 내어준 이마저도 간계이고, 계략이자, 수작일 게 뻔했다. 그의 속내는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다. 내 손에 죽어서라도 똑똑히 나의 머릿속에 남고 싶다는 새빨간 집착. 설령 숨을 거두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저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족쇄 하나를 더 만들기 위한.
나조차도 예기치 못한 난폭함으로 점철된 숨이 입술 새를 비집었다.
그 찰나였다.
“헉…!”
만만찮은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침습하던 배 안쪽의 통증이 별안간 거세졌다. 누가 길고 가느다란 칼을 복부로 끝없이 쑤셔 넣는 것만 같았다.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 아, 으….”
상체가 힘을 잃으며 땀에 젖은 고개가 맥없이 휘늘어졌다. 차무겸의 복부를 깔고 앉은 가랑이 사이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피 냄새는 분명 아까부터 풍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위가 상할 만큼 격렬해졌다.
차무겸은 내 상태가 이상해진 걸 눈치챈 듯 휘청대는 허리를 잡아주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 둘의 고개가 동시에 아래로 추락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깔고 앉아 있던 차무겸의 옷자락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선명하고 잔혹한 흔적을 꼼짝없이 담는 순간, 눈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세상이 뒤집혔다.
* * *
‘…모의 자궁 상태가….’
‘그냥… 바로 시술을….’
‘…다고 해도 이상이….’
귓가에 모래알 같은 소리가 덜그럭덜그럭 굴러다닌다.
‘꺼내.’
‘예?’
그 사이로 명료하게 꽂히는 날카로운 자갈 하나가.
‘배 속에 있는 거 당장 꺼내라고.’
마음을….
가늘게 떠진 눈자위로 비스듬히 기운 빛줄기가 스쳤다.
깨어나자마자 내 배 속에 깃들어 있던 것이 싹싹 긁어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마취가 되어 잠들어 있었을 텐데, 배 속에 차가운 기계가 들어와 이리저리 헤집어진 걸 기억하는 것처럼 속이 못 견디게 시렸다.
내가 깨어난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간호사였다. 그녀는 얼른 병실을 빠져나갔다가 금세 되돌아왔다. 하얀 가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의사와 함께였다.
의사는 쉼 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무어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태아가 배 속에서 숨을 거둬… 자궁 내용물을 꺼내기 위해… 자연 배출이 깨끗하게 진행되지 않아 소파 수술로… 단어 하나하나가 받아들이기에 과부하일 만큼 끔찍했다. 두 귀를 틀어막아볼까 했지만 그런다고 이 현실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친절한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선을 흘끗 내렸다. 이불에 덮인 왼쪽 발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깁스를 한 까닭이었다. 기절하기 전 발가락 하나 굽히는 것마저도 진땀을 자아내던 통증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차무겸이 나타난 건 의사의 설명이 거의 끝 무렵에 달했을 때였다.
문 하나를 열고 등장한 것뿐인데 모여든 인파의 시선이 쏠렸다. 나의 고개는 그 흐름에 휩쓸린 것처럼 느린 속도로 남들을 따라갔다. 차무겸은 한쪽 팔뚝에 나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아, 막 오셨으니 말씀을 드리자면….”
차무겸의 뒤로 선 박승원과 눈이 마주친 때였다.
의사가 난처한 것처럼 눈살을 구기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못다 한 말을 맺음 지은 건 차무겸이 침대 근처로 다가와 섰을 때였다. 차무겸이 가까이 다가오며 나의 눈은 다시 아래로 떨궈졌다.
“앞으로 자연임신은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인공 수정이나 임신 촉진제를 쓰는 방법도 있지만… 일차적인 문제가 환자분의 심약한 상태인지라 그것 역시도 몸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겁니다.”
의사는 여전히 입으로 독을 쏟고 있고, 차무겸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깨끗한 이불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굼뜬 속도로 고개를 들었다. 내내 나를 응시하고 있었는지 차무겸과 시선이 닿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기이하게 끓고 있는 그 눈을 목도하자마자 입술이 벌어졌다.
“이래도 안 질려?”
“…….”
“이제 애도 못 가진다잖아.”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기도 끝에서 튕겨 나가듯 뱉어졌다. 나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느닷없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차무겸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처럼 얼굴을 단단히 굳혔으니까.
입가에 메마른 웃음을 걸치며 잇따라 덧붙였다.
“하자품 같은 나 데리고 뭐 하겠다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차무겸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의 행동 하나로 주변에 빙결 같은 긴장감이 고였다. 그리고 그건, 다가온 그가 상체를 기울이며 내 머리채를 그러쥐었을 때 쩌적, 깨졌다.
“무겸아!”
뒤편에 선 박승원이 급히 달려들고.
“이러시면 안 돼요!”
간호사가 기겁한 어투로 만류했다.
그럼에도 차무겸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맹렬한 눈빛이 내 얼굴을 가를 것처럼 내리꽂혔다.
“너 다 알고 있었지.”
차무겸의 숨소리는 전력 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가빴다.
“임신한 거 알고 토낀 거지?”
“…….”
“그럼 흠집 날 만한 좆같은 짓은 네가 다 저지른 건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네가 내 말만 잘 들었으면 이렇게 됐어?”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속에는 힐난의 어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묵직한 감정이 켜켜이 어려 있었다. 그조차도 유산을 알고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는 것처럼.
평소였다면 저 날을 세운 기색에 절로 꼬리를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이 나의 본능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우려고 마음먹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칠흑 같은 상실감은 무언지. 속이 텅 비다 못해 그 자리에 벌레들이 알을 까 시컴하고 흉흉한 구더기를 생성해낸 것만 같았다.
무언가가 안을 쉼 없이 갉아 먹고 있다.
잠시 후, 나를 내려다보는 차무겸의 지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 공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배 속 존재의 소실보다는 내 의지가 배제된 일이 또다시 반복되었다는 게 나를 조금 더 미치게 만든 것뿐이다.
나 자신을 먼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이 무기력의 파란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경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