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8화 (18/24)
  • 18장.

    탕-!

    총알이 발포되는 소리가 창백한 적막을 깼다. 나른하게 감긴 눈동자 위로 짙은 스크린관의 화면이 일렁였다.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에 맞춰놔서인지 집 안은 겨울처럼 썰렁했다. 이 드넓은 공간에 존재하는 이가 나밖에 없어서 더 그리 느껴지는 걸지도.

    어중간하게 흘러내린 담요를 추슬렀다. 미처 가려지지 못한 발끝이 냉한 공기 중에 드러나자 절로 말려들 만큼 시려웠다. 그럼에도 꼼지락거리기만 할 뿐, 굳이 담요를 내려 덮지는 않았다. 그 추위보다 앞서는 무기력함에 멍하니 영화만 응시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덟 번에 가까운 횟수가 반복 재생된 영화는 신물이 날 만큼 뻔했다. 주인공이 어느 구간에서 어떤 대사를 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심지어 어떤 표정을 지을지까지 훤히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서 조금 전 요란한 발포음에도 눈가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놀라기는커녕 약간 졸린 것도 같았다.

    간혹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처럼 지직대는 총소리와 비명이 한데 어우러진 영화를 켜둔 채 소파에서 내려왔다.

    전면이 뚫린 펜트하우스는 무척이나 높아서 꼭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자 서울의 야심이 은하수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아주 먼 거리였지만 도로에 깔린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발광과 간판에 부딪친 빌딩의 밤빛, 묘하게 바쁘고 또 묘하게 질서 어린 전경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아득한 높이감에도 도시의 화려함은 망막에 똑똑히 박혔다.

    그런데 사실은, 잘 모르겠다.

    화려한 것 같은데 화려하지가 않았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 걸까? 어느 순간부터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잿빛으로 보였다. 짙디짙은 어두움에 동화되었던 순간의 부작용처럼, 뇌가 눈에 담기는 모든 것을 회색빛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래서 여기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화려한 반면 화려하지 않았다.

    유리창 앞에 쪼그려 앉자 담요에 가려져 있던 팔다리가 드러났다. 부들부들한 감촉임에도 결국은 살갗을 건드리는 자극이 돼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긁적거렸다. 이미 한차례 긁어 피를 비쳤다가 겨우 딱지가 앉은 상처가 무참히 벗겨졌다.

    반짝이는 은하수 몇 개를 훔쳐낸 듯한 무채색을 가만 내려다보며 끝없이 팔다리를 긁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가려워서 긁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습관, 이해할 수 없는 변화가 너무 많이 생겼는데 그걸 헤아려보려고 할 때마다 누가 뇌를 쑥 빼가는 것처럼 멍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긁다가 인터폰이 울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타인의 기척을 듣고서야 하루 종일 정적이던 생체 시간이 제 박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제야 문지르던 피부에 또다시 벌건 생채기가 죽죽 가해졌음을 깨달았다. 길지 않은 손톱 안으로 진홍빛 핏물이 스민 채였다.

    혼나겠다….

    의기소침해지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 무렵 도어 록을 해제하는 전자음이 들렸다. 통창 앞에 서 있자니 머지않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한 차무겸이 거실에 나타났다.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뚜벅뚜벅 걸어오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거기서 뭐 해?”

    “영화 보고 있었어.”

    차무겸의 고개가 티브이를 향해 돌아갔다. 클라이맥스로 진입한 액션 영화는 조용한 밤과 어울리지 않게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거슬렸는지 차무겸이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껐다. 그로 인해 깔리는 적막을 밟으며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안 추워?”

    들어오자마자 바깥의 더운 날씨와 달리 냉한 기운을 느꼈는지 흘러내린 담요를 제대로 덮어주었다. 그것을 대신 잡으려고 팔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차무겸의 두 눈이 팔목에 꽂혔다. 조금 전 알레르기라도 돋은 것처럼 미친 듯이 긁던 쪽이었다.

    차무겸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칠흑같이 까매서 좀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그것이 저렇게나 아득히 침체될 때면 나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 그가 혀를 차는 반응에 손끝이 굽어들었다.

    “또 긁었어?”

    “미안….”

    그는 움츠러든 나를 가벼이 안아 서재로 데려갔다. 사무용 목제 테이블 위에는 최신형 컴퓨터와 함께 볼펜, 서류철 등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전 집에서 그대로 가져온 장식장이 그 옆에 자리했다. 지난날 내가 명품 중고 매장에 내다 판 시계 역시 그 안에 있었다. 처음 그걸 발견했을 때 어땠더라. 말로 못 하게 황당하고, 허무하고, 망연해졌었다.

    “팔 내놔.”

    책장 쪽으로 갔다 온 그가 명령했다. 죄를 자수하듯 난도질된 팔뚝을 쓱 내밀었다. 빨간 물감을 여기저기 찍어놓은 것처럼 엉망인 상처 위로 따끔한 연고가 발라졌다. 손을 댈 때마다 움찔거리자 차무겸이 탐탁지 않은 듯 쳐다봤다.

    “간지러웠어?”

    “응.”

    사실 모른다.

    간지러웠는지, 안 간지러웠는지.

    그저 긁고 싶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긁어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고. 설령 그게 맞다고 한들 긁어내려고 한 게 무언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 천지다. 세상만사 무지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간지러워서 그랬다고 확언한 건, 그러지 않았다가는 차무겸이 민감하게 나올 게 분명해서였다. 그는 내가 정상적이지 않게 구는 꼴을 못 봤다. 웃긴다. 나의 온전한 일상과 자유를 그리도 혐오하면서 정신병자처럼 구는 꼴은 또 보기 싫은 모양이지. 그가 나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보기에 좋고, 곁에 끼고 있기에 좋은 인형처럼 보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아니라고 한다면 간지럽지도 않은데 왜 팔을 이따위로 들쑤셔 놓았느냐고 또 한차례 소요가 벌어질 게 뻔했다. 피하고 싶다는 회피감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고 그래서 적당히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다.

    “저녁은.”

    “먹었어.”

    “뭐 먹었는데?”

    “된장찌개랑… 제육볶음.”

    차무겸은 치료를 마치고 소매가 내려오지 않도록 걷어준 뒤 다시 나를 안아 올렸다.

    “이상해.”

    “…….”

    “꼬박꼬박 먹는다는데 왜 자꾸 가벼워지지?”

    등골이 오싹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자 차무겸이 답을 독촉하듯 지긋한 눈길을 보내왔다.

    “나 원래 여름 되면 살이 잘 빠져. 알잖아.”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걸 모르겠어?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그러지.”

    “…….”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있으면 말해. 나한테 전화해도 되고, 저기 부엌에 있는 포스트잇에 써서 냉장고에 붙여둬도 되고.”

    이곳에 온 이후, 어쩌다가 마주치는 가정부들은 흡사 벽처럼 굴었다. 그들은 나를 극진히 모시면서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마주할 때마다 날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했다. 가끔씩 물을 게 있어서 입을 열어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굴었다. 나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기를 쓰고 피했다. 차무겸 역시 그 태도를 당연히 여기며 혹여나 필요한 게 있으면 냉장고에 부착된 포스트잇을 이용하라고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드높은 곳에 가둬둔 상태면서, 실내에서조차 숨 막히는 고립감을 선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허튼 생각 따위는 애초에 발아하지 못하도록.

    우스운 구속이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내 발목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족쇄가 단단히 채워져 있는데.

    “홍가연은 잘 지낸다고 하던데.”

    바로 이런 점이….

    그는 가끔가다가 가연이의 화제를 한 번씩 입에 올렸다.

    “걔가 너 이러는 거 알면 슬프겠어. 둘이 친했으니까. 그렇지?”

    차무겸이 내게 무얼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그 뜻은 헤아릴 필요조차 없었다. 가연이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이전에 건넸던 협박을 공고히 하는 것뿐이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마. 내 곁에서 달아날 생각 따위 집어치워. 가연이의 이름을 거죽으로 뒤집어쓴 그 주문이 귓가에 퍼부어지는 것뿐이다.

    “제대로 좀 챙겨 먹어. 살 내려서 그런가, 섹스할 때도 뼈 부딪치면 아파.”

    “응….”

    내가 영혼 없이 대답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 차무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꽤나 늦은 귀가라서인지 그는 곧장 침실로 들어섰다.

    “아.”

    나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가 약한 탄성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돌아온 손에는 큼지막한 케이크와 은빛 포크가 들려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꿀 발린 채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였다.

    “입 벌려.”

    그가 케이크를 크게 떠 내 입으로 가져다 댔다. 단내가 훅 풍겼다. 거북한 내음에 미적지근하던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

    “입 벌리라고.”

    디밀어진 포크는 치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 내가 저녁 식사를 전부 다 개수대에 버렸다는 걸 알아챘는가 싶을 만큼 집요한 태도였다.

    버텨 봤자 뻔한 줄다리기였다. 결코 차무겸이 먼저 굽히는 일은 없을 테니.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정도 이상의 단맛이 입 안을 채웠다. 원래 단걸 좋아했고 없어서 못 먹는 수준이었으나, 이런 디저트는커녕 제대로 된 식사도 챙기지 않는 내게는 고역 같은 것이 된 지 오래였다.

    차무겸은 간신히 녹여낸 케이크를 거의 삼킬 즈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포크를 들이밀었다. 몇 입 받아먹다가 느끼해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고개를 젓자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쭙 빨았다. 한 번 핥아 먹고 멀어진 입술은 포크를 내려놓고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닿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자연히 몸을 끌어당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다리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녹은 생크림의 단맛이 그대로 남은 입 안 곳곳을 뜨겁고 말캉한 혀가 쓸고 지나갔다. 골반을 가벼이 쥐고 있던 손이 헐렁한 티셔츠를 들추고 들어와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이젠 시간이 꽤 지나 감각이 느껴질 리가 만무한 상형문자에 환각 같은 홧홧함이 덧입혀졌다.

    “안 피곤해?”

    문신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물었다. 내 가슴 위로 얼굴을 묻은 차무겸이 음, 하고 답을 끌었다.

    “피곤한데, 하고 싶기도 하고.”

    “…난 졸려.”

    “하루 종일 뭐 했길래 졸려.”

    악의는 없을 어조가 속을 바짝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제 내성이 생겼는지 속내에 균열이 일지언정 표정은 담담했다. 차무겸이 날갯죽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신의 이름을 더듬으며 제안했다.

    “같이 씻을까?”

    “팔에 물 닿으면 아플 것 같아.”

    “그니까 누가 이따위로 조져놓으래?”

    작게 핀잔을 놓은 그가 나를 침대에 내려두고 일어났다. 욕실 쪽으로 향하는 그를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단정하게 깔린 이불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천천히 이불을 당겨 몸 위로 뒤집어썼다.

    잠시 후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씻고 나온 차무겸은 약한 불을 뿜어내는 스탠드를 켜둔 채로 내 뒤로 와 누웠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병적으로 기겁을 했던 이후로 사위가 암흑으로 잠기면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리고는 했다. 그게 하루 이틀로 멎지 않고 지속되자, 차무겸은 스탠드를 켜두기 시작했다. 내내 침대로 스며들어오는 빛이 수면을 방해할 텐데도 꾸준했다.

    등에 가슴팍이 달라붙도록 밀접하게 누운 그가 내 머리칼 사이에 코를 지그시 묻었다.

    “나랑 같은 샴푸 냄새 나.”

    같은 걸 썼으니까.

    그 당연한 걸 모를 녀석이 아닌데도 차무겸은 기분이 좋은 것처럼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피곤하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젖꼭지나 아랫배를 이리저리 매만지던 그는 잠시 후 일정한 숨소리를 냈다.

    차무겸이 잠들 때까지 뜬눈으로 건침만 거푸 삼키던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본격적인 경영 승계에 발을 들이며 쏟아지는 격무가 만만찮게 고되었는지 그는 벌써 곯아떨어져 있었다. 속 편하게 잠든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슬쩍 돌아간 시야에 협탁이 들어왔다. 먹다 만 케이크와 하얀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포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잔해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포크의 끝은 여전히 날렵한 빛을 냈다. 잿빛 속에서의 발광, 속이 문드러지는 느낌이 한층 더 심해졌다.

    저걸 들고서 차무겸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몇 번 해보다가 관두었다. 목구멍을 아릿하게 찌르는 감각이 점점 심해져 온 까닭이었다. 행여나 그가 눈을 뜨는 일이 없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사이 속을 비트는 역겨운 기운이 한층 더 심해졌다.

    잰걸음으로 침실에서 나와 거실 화장실, 그중에서도 침실과 가장 거리가 먼 화장실로 들어섰다.

    “우욱!”

    변기를 붙잡고서 꾸역꾸역 넘긴 것들을 죄다 게워냈다. 내내 속을 비릿하게 만들던 생크림과 케이크의 잔해가 역스러운 모양새로 둥둥 떠다녔다. 변기 뚜껑을 닫고 레버를 눌렀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지러워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연신 터져 나오는 숨은 구역질로 인해 불쾌하게 젖어 있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화장실 밖을 보았다. 집주인의 귀환으로 암흑에 젖어 든 공간은 이 밤에 녹아들듯 어두컴컴했다. 까맣게 칠해진 전경을 보자 또다시 귓가에 이상한 게 맴돌았다. 손을 들어 잡음이 일기 시작하는 귓바퀴를 후려쳤다. 고통과 환청은 별개인 모양인지 얼얼한 와중에도 지직대는 게 그치지가 않는다. 손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때리는 순간 스스로도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몸이 맥없이 휘청거렸다.

    매끄러운 화장실 바닥 위로 축 늘어졌다. 적응되지 않는 잡음이 그치지 않던 왼쪽 귀가 차디찬 바닥에 닿았다.

    “아….”

    안 들린다….

    잡음이 바닥에 가로막히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어수선한 마음이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느리게 가물거리는 눈동자 속에 세면대 아래 구불구불한 배수관과 욕실의 습한 구석, 꾀죄죄한 수챗구멍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존재하지만 언제나 눈에 담을 필요는 없는 것들. 자질구레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약간은 더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들.

    문득 그것들이 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똑.

    또독.

    어디선가 낙하하는 물방울 소리가 흐리멍덩해진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화장실 바닥이 생각 이상으로 차갑다는 게 확 와닿았다. 그 잠깐 사이에 몸이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잠시 후 떠오른 건 차무겸이었다. 그가 혹시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다음 순간 어떻게 나올지는 빤했다. 형형한 그의 눈빛을 상기하자 팔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꾸물꾸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쏟아지는 물에 입을 몇 번이나 헹구고 식은땀이 맺힌 얼굴을 여러 번 씻었다.

    화장실을 나왔다. 수건으로 닦지 않은 얼굴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문턱을 지저분하게 적셨다. 침실로 가는 길목, 어둠에 잠긴 복도를 보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두드리는 것만 같은 둔탁한 두통이 끊이지가 않았다. 어차피 침대로 돌아가 봤자 잠을 잘 수는 없을 테다.

    침실 대신 거실로 발을 뻗었다.

    한쪽에 놓인 담요를 어깨에 덮은 뒤 소파 위에 몸을 옹송그렸다. 리모컨으로 티브이를 켜 채널을 돌렸다. 침실에 잠든 이를 헤아리고 볼륨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아무렇게나 버튼을 누르다가 한 코미디 프로그램 채널이 나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출연자 전부가 깔깔 웃고 있었다. 그게 흥미를 끌어서 리모컨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나 눈이 빠져라 보아도 왜 웃는지를 모르겠다. 그들이 꺼내는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머릿속에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투과해버렸다. 따라 하면 알 수 있을까 싶어서 억지로 입꼬리를 말았다가 내 스스로가 정신병자처럼 느껴져서 관두었다.

    몸을 조금 더 동그랗게 말며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백색소음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예전, 암영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자신을 너무 못살게 구니 외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현재의 생활은 그때에 비하면 몹시 편한 건데도 잠이 오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인생은 참 알쏭달쏭하다.

    너무 팍팍하게 살 때는 숨 한 번 내쉬기도 벅차더니, 이제는 너무 느슨해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 * *

    하루 중 유난히 버거운 시간이 바로 이때였다.

    차무겸과 마주한 채 억지로 아침 식사를 해야만 하는 때.

    그는 제 두 눈으로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꾸역꾸역 나를 주방으로 데려갔다. 밤새 불면에 허덕이다가 새벽 동이 틀 때쯤에야 잠드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죽을 맛이었다. 가뜩이나 잠을 떨쳐내지 못해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식욕도 들지 않는 속에 음식을 넣는 일은 구토마저 유발했다. 그럼에도 나의 각고보다야 차무겸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주는 억압이 조금 더 강했기에 늘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거푸 물을 들이켰다. 그로 인해 어느새 텅 비어버린 잔을 가져가 물을 채워주던 차무겸이 나를 가만 응시하다가 말했다.

    “머리 많이 길었다.”

    행동만 부산스러울 뿐 입에는 넣는 게 거의 없던 젓가락질이 멎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긴 건 거추장스러워서 늘 가슴선에 맞춰 자르던 길이가 어느새 등을 전부 덮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길어졌다. 그건 내가 그만큼 이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슬슬 잘라야겠네.”

    “응.”

    단조로운 대화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내가 차무겸에게 고분고분하게 굴고, 차무겸이 그런 나를 너그러이 대하면 우리의 일상은 대개 이런 형태로 흘러갔다. 안에 뾰족뾰족한 삼각형이 잔뜩 쑤셔져 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원만한 동그라미에 가까운 관계.

    나는 더욱이 추락하는 입맛을 달래기 위해 물을 들이켜야만 했다.

    “네, 아버지. 지금 출발하려고요.”

    때마침 전화를 받은 차무겸이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턱을 감싸 뒤로 젖히게 만든 그가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입을 맞추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멀어지는 걸음 소리에 따라 식탁 위를 아우르던 움직임이 둔중해졌다.

    이윽고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나는 식탁을 밀치고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려남과 동시에 식탁이 덜컹 흔들렸다. 가지런히 놓여 있던 물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하고 깨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그러나 그때쯤 나는 급히 주방을 나서고 있었으므로 뒤를 돌아볼 새 따위 없었다.

    급히 화장실에 틀어박혀 변기를 붙잡았다. 이후에는 익숙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우욱, 욱. 목구멍이 아릿아릿해질 만큼 먹은 것을 죄다 게워냈다. 나중에는 하다 하다 씁쓰름한 위액이 역류할 정도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변기 레버를 눌렀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구다 못해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는 일련의 행동은 쳇바퀴 같은 일과가 된 지 오래였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들자 거울 위로 해쓱하게 질린 낯이 여과 없이 비쳤다. 어느 순간부터 거울을 마주하는 게 거북해졌다. 까만 티브이 화면이나 흐릿한 유리창으로 비치는 것과 달리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사시키는 게 싫어서였다.

    이전과 같지 않은 나의 모습을 날것으로 인식시키는 그게….

    “하아….”

    힘겹게 터뜨리는 숨 한 번에 몸이 휘늘어졌다. 심신을 바르게 고정시키는 심지가 하루하루 무너져 내리는 심경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욕실 바닥에 늘어지게 되는 걸 테다.

    하지만 그 어디보다도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이었다. 지난날 밤중에 우연히 얻게 된 도피처. 이제는 축축하고 음습한 바닥에 대한 거부감도 별로 없었다.

    차무겸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역꾸역 아침 식사에 임한다. 그리고 그가 출근하고 나면 곧바로 화장실로 뛰쳐 와 구역질을 한 뒤 이명이 끊이지 않는 귀를 틀어막기 위해 바닥에 누웠다.

    에어컨이 빵빵한 바깥과 달리 여름의 후덥지근함이 남은 이곳은 잠시만 머물러도 목덜미와 곳곳에 땀이 뱄다.

    그래서 더 익숙했다.

    이러고 있다 보면 꼭 한여름의 암영 속, 좁고 비틀린 집에 처박혀 있을 때로 돌아온 것만 같아서.

    고물 같은 선풍기 바람에도 의존할 수 없어서 네모난 얼음 조각을 하나 물고, 시원한 감촉이지만 땀이 나면 찐득하게 눌어붙던 장판 위에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때.

    만만찮게 추레했다고 한들 이보다는 나았다. 이 호화롭고 번지르르한, 돈을 처바른 게 분명한 공간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정말 그나마 누추한 화장실이 내가 머물기에 가장 그럴싸한 공간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바닥을 치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필요 이상으로 시끄러운 세상이 공허 속으로 몸을 숨긴다.

    작은 소리에도 따끔한 통증으로 이어지는 이명이 그치고, 피부를 써늘하게 식히는 바닥의 냉촉이 나를 빠르게 잠재운다. 엿가락 잡아당기듯 한없이 늘큰늘큰 늘어지는 일상 가운데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박수가 기이하게 조성된 평화 속에 몸을 기댔다.

    설명할 수 없는 안온함에, 억지로 행해진 식사로 잠시 물러갔던 잠기운이 몰려왔다.

    톡, 토독.

    어딘가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이 내게 경고를 주듯 끝없이 기척을 냈다. 그러나 지난날의 밤처럼 두렵지 않았다. 차무겸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그는 적어도 아침에 나가면, 낮 동안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 숱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천천히 눈이 감겼다.

    정신이 번쩍 든 건 우악스러운 힘이 축 처진 몸을 억지로 일으킬 때였다.

    “너 왜 이래.”

    가늘게 떠진 눈 사이로 비치는 시야가 어른거렸다. 그래서 잠시 이성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느릿한 속도로 초점이 잡히는 시야에 차무겸이 보였다. 그런 그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환한 낮의 풍경. 그래서 일순 꿈인 줄 알았다.

    “김사은.”

    그러나 명료하게 귀를 울리는 그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

    “쓰러진 거야? 어디 아파?”

    나는 뒤늦게야 내가 화장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두 다리를 바동거려 그에게 거의 안겨 있듯 기댄 몸을 가까스로 세웠다. 황망한 심정에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야. 쓰러진 게 아니라 잠들어서….”

    “…잠들었다고?”

    차무겸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여기가 침실이야? 왜 여기서 잠을 자?”

    아직 잠이 덜 깬 머리가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 차라리 쓰러졌다고 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말을 정정할까 했으나, 돌연히 매섭게 굳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입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속에 내재된 두려움이 습관처럼 부추겨져 사고를 얼렸다.

    “일단 나와.”

    “시, 싫어.”

    “나오라고.”

    “싫어! 놔, 하지 마…!”

    억지로 끌고 나가려는 힘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저항했다. 이대로 질질 끌려가게 되면 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 다시 갇힐 것만 같아서.

    차무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짢은 게 여실한 낯을 보자 마음이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그가 웃었다. 살갗을 톡 쏘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아린 감각을 떠안기는 웃음이었다. 매끄러운 척 굴러가던 일상의 동그라미 속에 숨겨진 세모, 그 따끔한 모서리가 뾰족뾰족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계속 거기 처박혀 있든지.”

    차무겸이 차게 읊조리고는 한참 잡아당기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몸은 반동으로 인해 자연히 뒤로 비틀렸다.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화장실 문이 쾅 닫혔다. 닫힌 문을 허망하게 응시하던 차였다. 탁. 내부를 밝히던 불이 꺼졌다.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확장됐다. 너무나 커진 그 안으로 어두움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삽시간 달려들었다. 어느 밤이 떠오른다. 아침이 오지 않는 공간. 한 치 앞도 헤아릴 수 없던 밀실. 침 한 번 삼키기 버거울 정도의 중압감이 전신을 내리누르고.

    톡,

    “헉.”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괴이하게 울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바닥이 아니라 나의 등줄기 같았다. 톡, 톡, 톡, 톡, 톡, 톡. 어디서 이렇게 물소리가 들리지? 나도 모르게 뒤를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육안으로 구별이 가능하던 내부가 시커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은 가끔 허상을 그려낸다. 마치 저 칠흑 속에 몸을 숨긴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그려지는 윤곽이 익숙하다. 숨을 거둔 것처럼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던 안진권의 얼굴이었다. 어쩌면 이 물소리는 벌어진 그의 살갗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핏물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톡, 톡, 토독, 톡.

    액체의 소음이 나를 조롱하듯 짓궂게 울렸다.

    또다시 도지기 시작하는 이상 현상에 두 귀를 틀어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편안하던 마음이 불안의 미로에 똑 떨어진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에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릎걸음으로 절박하게 기어 문가로 다가갔다.

    “아, 아냐. 싫어. 여기 있기 싫어…!”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라도 환청을 없애야 했다.

    “열어, 열어줘!”

    누가 저기서 날 쳐다보는 거 같아.

    “열어줘, 제발, 열어줘. 무겸아, 열어줘….”

    여기 나 혼자 있는 게 맞아?

    아닌 것 같아.

    언젠가 머리에 덮개가 쓰인 채로 강간 아닌 강간 행위를 당하던 때가 떠올라 토악질이 치밀었다. 주먹 쥔 두 손으로 문을 부수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내려쳤다. 암흑 특유의 폐쇄성에 이어 욕실의 꿉꿉하고 습한 감각이 사지를 섬뜩하게 짓눌렀다. 내가 찾아낸 평화를 기어이 훼손당하자 마음이 견딜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중심을 바로잡지 못하는 초점이 부산스레 휘청거렸다.

    “으, 흐, 흐윽, 으읍….”

    또다시 팔다리가 가려워지고 있었다. 발끝을 타고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만 같다. 나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문에 이마를 박은 채로 팔다리를 부산스럽게 문질렀다. 약을 발라 간신히 새살이 돋은 위로 손톱자국이 길게 그려졌다. 누가 폐부를 쥐어짜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게 변모했다.

    그렇게 정의할 수 없는 두려움에 좀먹혀가며 헐떡이던 차.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몸이 외압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정신이 조금 들고서는 내가 먼저 그에게 매달렸다. 그를 놓치면 또다시 저 지옥에 빠지리라 믿는 것처럼 그 품으로 절박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차무겸이 나를 욕실 옆 벽에 내려놓고서 다리를 굽혀 앉았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겉으로 보기엔 썩 친절하고 곰살맞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손길이 언제 흉악하게 변하여 내 뺨을 후려칠지 모른다는 걸.

    “몇 번이나 묻게 좀 하지 마.”

    “…….”

    “저기서 왜 잠이 든 거야?”

    “시끄러워서….”

    “시끄러워?”

    “귀, 아프고, 자꾸 시끄러워…. 바닥에 대고, 있으면, 좀 괜찮아져서 그랬어.”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주절주절 토로했다. 차무겸의 큰 손이 왼쪽 귀를 덮어 더듬거렸다.

    “여기?”

    “응….”

    차무겸이 귓바퀴를 살살 어루만지며 나를 제 품에 기대게 만들었다.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나, 나야.”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그는 계속해서 내 귀를 만져주었다. 가증스러움에 역겹기만 한 손길이지만 떨쳐냈다간 다시 저 암흑 속에 갇힐 것 같아 무서웠기에 잠자코 그의 몸에 기댔다. 무언가를 질문한 차무겸이 수화기 건너편에 귀를 기울이며 나를 내려다봤다.

    “자꾸 귀가 아프고 시끄럽다는데, 저번에 말했던 후유증 그거랑 연관이 있어?”

    유선 너머로 빠르게 뇌까리는 소리가 전달됐지만 명확히 들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여전히 멍했다. 대답을 듣던 차무겸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바로 집으로 와.”

    전화를 끊은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푹신한 침대 위에 눕혀질 때까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와중에 그의 옷자락을 쥔 손에는 힘이 꼿꼿이 들어간 채였다. 공포심은 아직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를 베개 위에 눕혀준 차무겸이 침대에 걸터앉아 벌그죽죽하게 부은 뺨과 눈가를 어루만졌다. 애지중지 대하는 물건이라도 건드리는 것처럼. 미간 사이가 여지없이 땅기고, 머릿속은 몽롱하게 가라앉았다. 애꿎은 소요로 한 번 진을 빼고 나면 늘 이랬다.

    “왜 울고 그래, 나 마음 아프게.”

    속에서 무언가 모락거렸다.

    며칠 전의 밤, 날카롭고 뾰족한 포크로 푸른 혈관이 맥동하는 그의 목을 몇 번이고 찔러버리고 싶다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던.

    그러니까, 그 형형한 살의가.

    나는 차마 더는 그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벌레에 야금야금 뜯어먹히는 잎사귀처럼 속이 볼품없이 문드러지고 있었다.

    * * *

    지끈거리는 두통에 허덕이고 있자니 잠시 후 누군가가 감옥 같은 이 집에 나타났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낯이기도 했다. 여자가 챙겨 온 가방을 침대 근처에 펼쳤다. 그 안에는 청진기처럼 알 만한 것부터 전혀 용도를 모르겠는 의료기구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의사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반가워요, 사은 씨.”

    여자는 내게 친숙하게 말을 걸었다.

    “저번에도 한 번 봤는데, 그때는 사은 씨가 잠이 들어 있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아… 네.”

    “잠시 살펴볼게요.”

    내게 의향을 구하는 어조가 사근사근했다.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손길은 귀 부근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사은 씨, 평소에도 두통이나 이명이 심한가요?”

    입술을 잠깐 말아 물었다가 답했다.

    “맨날은 아니고… 가끔씩 심해질 때가 있어요.”

    “어느 때요?”

    “어두운 곳에, 있거나….”

    “어두운 곳? 자기 전 침실 같은 곳이요?”

    “아니요. 불 꺼진 화장실 같은….”

    여자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서 있던 차무겸에게로 눈을 돌렸다.

    “무겸아, 아무래도 병원에 와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심각해?”

    “그때, 그러니까, 겨울이었지. 당시에 고막 파열로 의심이 됐었는데 치료를 제대로 안 하고 방치해둬서 증상이 계속되는 것 같아. 이거 꽤 아팠을 텐데 어떻게 버텼는지….”

    여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차무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병원 가고 싶어?”

    갑자기 내게로 온 선택지에 ‘어?’ 하고 멍청하게 반문했다. 차무겸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병원, 가고 싶냐고.”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은데도 그의 눈빛에 속박당한 것처럼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나의 심신을 위축시킨다기에는 그 눈초리에 내포된 어떤 압박감이 있었다. 한 박자 늦게야 그게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었다. 냉랭한 겨울철, 차무겸이 내 속에 심어 놓은 공포심은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꿈틀거렸다.

    “아…니.”

    “…….”

    “나가기 싫어. 그냥, 그냥 여기 있을게.”

    처음 이곳에 온 게 겨울, 그로부터 여름이 될 때까지 나는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선 적이 없었다. 차무겸이 이전처럼 문을 잠근다든가 혹은 사람을 배치시켜놨다든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한 나의 의지였다. 나는 내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갇힌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걸 정말 ‘갇혔다’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네?”

    당연히 병원에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여자가 당혹스레 반문했다. 나는 그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적당히 시선을 내렸다. 여자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차무겸의 눈치를 살피고는 쓱 다물었다.

    “그럼 일단 약이라도 처방할게요. 그리고… 저, 혹시 필요하다면 여기도 치료해줄까요?”

    여자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팔뚝이었다. 그녀가 오기 전 차무겸과 벌인 짧은 소동으로 덧이 난 상처였다. 나는 남 일 대하듯 기력 없는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부가 찢어지다 못해 짓무르는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싶었다. 여자가 의료 가방을 뒤적거려 연고와 방수 밴드를 꺼내 들었다.

    우리가 하는 걸 얼마간 지켜보던 차무겸은 전화가 왔는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침실 바깥으로 나섰다.

    침묵을 지키며 치료에 전념하던 여자가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사은 씨.”

    훅 억누른 목소리는 마치 저 문 바깥에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이의 모습과 유사했다.

    “혹시… 맞는 건 아니죠?”

    “네?”

    “무겸이한테요.”

    “…….”

    “맞는 게 아니면 갇혔다든지. 그도 아니면 아까처럼 대답을 하라고 강요를 받기라도….”

    여자가 무얼 염려하는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 그 낯에 배어 있는 감정은 명백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속에 똬리를 뜬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 그것을 한껏 왜곡시켰다. 이런 걸 왜 물어보지. 혹시, 차무겸이 시킨 건 아닐까? 내가 또다시 자신을 벗어나려는 사특한 계략을 남몰래 스멀스멀 키워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시험해보기 위해서….

    “아뇨….”

    그 왜곡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답하자 당혹스러웠는지 여자가 ‘아….’ 하며 말을 끌었다. 침묵 속에서 치료가 이어졌다. 여자는 나의 쌀쌀맞은 반응에도 여전한 태도로 방수 밴드를 꼼꼼히 붙여주었다.

    “혹시….”

    차무겸이 전화를 끊었는지 침실 너머에서 들리던 말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여자가 바닥에 깔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요.”

    “…….”

    “도와줄게요.”

    왜?

    왜 날 도와줘.

    당신이 날 언제 봤다고….

    내 속에서 피어오르는 건 날이 선 경계심이 전부였다.

    여자는 치료를 마치고 쏜살같이 내보내졌다. 그 대신 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세 번씩 자택에 방문하기로 했다.

    도와주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지 그녀는 치료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그 태도에 다소 진실성이 묻어나서 정말로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원 치료 대신 내밀어진 제안이라서 차무겸은 탐탁지 않은 듯 보였으나 끝내 받아들였다.

    차무겸이 여자를 배웅하러 나간 사이 고개를 돌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담뱃갑과 라이터를 발견했다. 그것을 쥐고서 침실 한편의 발코니 문을 열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언가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여름의 무더운 공기가 얼굴을 할퀴듯 문지르고 지나갔다. 나는 담뱃갑에서 하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 휠을 돌렸다. 지르르 퍼지는 불씨에 끄트머리를 가져다 댔다. 천천히 들이마시는 호흡에 혀끝으로 쓴맛이 퍼졌다.

    담배를 입에 대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고등학생일 적,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차무겸의 권유였었다. 그러나 당시에 겪은 맛은 터무니없이 써서 한 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지져 껐었다.

    “…….”

    이상했다.

    그때는 빻은 가루약을 듬뿍 삼킨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 견딜 만큼 쓰게 다가오지 않았다. 적당히 씁쓰름하고, 적당히 떫었다. 폐까지 담지 못하고 입 안에서 감도는 숨을 훅 뱉어냈다. 회색빛의 운무가 입술을 타고 넘실넘실 퍼졌다.

    나란히 세운 무릎을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팔로 끌어안고서 필러를 치아로 잘근잘근 씹었다. 낮의 풍경은 너무나 찬연하다. 그 찬연한 것을 발밑에 두고서 삼키는 모든 숨이 버겁기 그지없었다.

    차무겸이 하던 걸 따라 하듯 담배를 깊숙이 물었다가 빼는데, 뒤쪽으로 터벅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기보다 차무겸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앉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중지와 검지 사이에 낀 담배를 보고 멈칫했다가 내 손목을 잡아당겨 필러를 가벼이 물고 빨아들였다.

    “갑자기 담배는 왜.”

    그러고는 나처럼 짙은 연기를 호흡에 실으며 물었다.

    “그냥….”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요 며칠 도통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아서, 혹시라도 다른 식으로 호흡을 해보면 좀 달라질까 했을 뿐. 효과가 전혀 없진 않았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와 혀를 톡 쏘는 알싸한 맛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정신을 일말쯤은 깨워주었으니까.

    불씨로 지글지글 끓는 담배를 바라보는데 차무겸이 허리를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담배의 몸통을 잡아 앗아갔다. 동시에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칼칼한 호흡이 뒤섞였다. 마치 우리가 하나의 숨통으로 숨을 나뉘어 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질식할 것만 같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감내하기 힘든 마음을 억누르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 * *

    요 며칠 자주 괴롭힘을 당해 진분홍빛으로 물든 젖꼭지를 돌리는 손길에 등줄기가 움찔 튀었다. 그 민감한 반응에 잔잔하던 물가 위로 짙은 파동이 남실거렸다. 욕조 물이 바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차무겸이 야릇하게 놀리던 손을 치우고 입술로 유두를 삼키며 허리를 움직거리자 몸 곳곳이 대번 곱아들었다.

    “아흐…!”

    수증기가 잔뜩 낀 욕실인지라 신음이 텅텅 울려 퍼졌다. 입술을 오므려 빠는 힘을 조절해가며 정점을 유린하던 그가 쓱 눈을 치켜떠 허벅지 위에 올라탄 나를 주시했다. 집요하고 사나운 시선이 허한 가슴속을 파헤쳤다.

    엉덩이를 감싼 손바닥이 물갈퀴처럼 쭉 펴지더니 이내 가볍게 내 몸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깊숙이 삽입되어 있던 페니스가 살짝 빠졌다가 다시 안으로 진입하는 게 물의 표면 장력과 부딪쳐서 꽤나 진득하게 와닿았다.

    “응, 흡… 아아.”

    아예 젖구멍을 쑤셔발기듯 혀를 세워 빙글빙글 문지르던 혀가 앙가슴을 지나 반대편에 안착했다. 이번엔 젖무덤째로 감싸 물어 뻑 흡입하는 힘이 상당했다. 뜨끈하고 말랑말랑한 점막에 불뚝 올라선 꼭지가 닿아 비벼질 때마다 오금에 힘이 탁 풀리고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차무겸은 그럴 때마다 오싹한 성감에 전 내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직접 움직여 봐.”

    어깨에 얹어진 내 팔을 채간 그가 양 손목을 복부 부근에 단단히 고정시키고서 종용했다. 신체 대부분이 그렇듯, 손가락의 뼈 마디 하나마저도 굵은 차무겸의 손은 내 양 손목을 가벼이 압박하고도 남았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을 싹 넘긴 반듯한 이마 아래로 물방울이 지나갔다. 높고 아름다운 콧대를 타고 내려간 그것이 아래로 똑 떨어지는 순간, 물속에 잠긴 엉덩이를 슬슬 돌렸다.

    “하으, 응, 읍… 아흣!”

    찰박찰박.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에서 진행되는 정사는 요란한 소음을 냈다. 무릎에 힘을 주어 어정쩡하게 일어났다가 사선으로 내려앉으며 거대한 성기를 꽉 머금을 때마다 물장구를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차무겸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주시하면서 입으로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더 빠르게 움직여.”

    “흑, 응, 으, 아…!”

    “젖 흔들릴 만큼 허리 돌리라고.”

    붙잡혀 그의 복부 위에 고정된 두 팔 때문에 유방이 풍만해 보일 만큼 그러모아진 상태였다. 조금만 몸을 들썩거려도 출렁거리는 야릇한 자태를 그려내는데도 그는 퍽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니면 또다시 뛰쳐나온 예의 고약한 성정일지도.

    “이건 뭐 했다고 이렇게 볼록해졌어?”

    그가 욕조 턱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빳빳하게 올라선 젖꼭지를 꼬집어 비틀었다. 아! 입에서 날 샌 교성이 가파르게 터져 나왔다. 그가 힘을 주어 젖꼭지를 희롱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홧홧한 열감과 찌르르한 전율이 재빠르게 내달렸다. 차무겸의 입가에 걸린 악독한 미소가 진해졌다.

    “좋아? 좋아 죽겠어?”

    “흑, 아흐, 응… 흐으!”

    물속을 헤집는 몸이 벌써 기력을 잃어갔다. 지친다. 저절로 눈이 감길 것처럼 나른해져 간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 한 번씩 머리를 허옇게 점멸시키는 쾌락에 금세 꼬리를 말고 함락하게 된다. 느른하게 풀어지는 몸은 감각에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하복부에 힘을 줬다. 아까부터 욕조 벽에 부딪치던 무릎이 찡하니 아려왔다. 어느새 미적거리는 식으로 돌아온 나의 요분질이 썩 마뜩잖았는지 차무겸은 그러모은 손목을 놓아주고 내 골반을 바투 감싸 쥐었다.

    그대로 몸을 덜렁 들어 올리는 힘에 수분기 머금은 피부를 타고 물이 촤악, 쏟아졌다. 욕실은 충분히 따듯했지만 온수 속에 푹 절여져 있다가 나오니 돌연 엄습하는 추위를 간과할 수 없었다.

    갈 곳을 잃어 허둥거리는 양다리를 제 허리에 감싸게 한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욕실 옆으로 이어지는 드레스룸이었다.

    정확히는 그 사이 복도에 놓인 화장대.

    차가운 목재의 촉감이 엉덩이를 스치자 무심결에 몸이 덜컹, 흔들렸다. 차무겸은 제게 안기려는 나를 매정하게 떼어놓고서 억지로 다리를 벌렸다. 반쯤 빠진 페니스가 다시 안으로 부드럽게 짓쳐 들어왔다.

    “으흑…!”

    허공에서 덜렁거리던 발이 그의 아귀힘에 의해 화장대에 걸쳐졌다. 뒤꿈치가 모서리를 짚으며 다리가 완전히 엠 자 모양으로 벌어졌다. 차무겸은 나를 화장대에 내리꽂듯이 억누르며 벌어진 구멍 속으로 성기를 처덕처덕 들이박았다. 아랫배 어딘가가 저릿저릿하게 수축하는 희열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치들린 입술을 타고 눅진한 호흡이 연신 터져 나왔다.

    “아, 아아, 아… 응, 앙!”

    덜컹덜컹, 화장대가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다리 하나가 부서져 내릴 듯한 거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는 그런 소음도 온통 흐지부지 흐려졌다.

    차가운 화장대와 뜨거운 차무겸의 체구 사이에 짓뭉갤 것처럼 끼인 채라 벗어날 도리 없이 쾌감이 꽂혀 들었다. 시야가 희게 물들고 허벅지 안쪽에 계속해서 움씰움씰 힘이 들어갔다. 핏줄이 퉁퉁 불거진 자지가 매섭게 꽂혀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투명한 음액이 정신 사납게 튀어 올랐다. 내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댄 채로 상스럽게 접붙는 아래를 응시하던 차무겸이 얄궂게 웃었다.

    “너, 이렇게, 흣, 예민해져서 어쩔래.”

    “아응, 으, 으, 으…!”

    “이제는, 씨발, 자지만 꽂아줘도 분수가 터지네.”

    그의 말대로 굽이굽이 파고든 성기가 한 번씩 깊은 안을 거세게 후려치고 나갈 때마다, 그리고 귀두가 어귀에 걸쳐지는 게 아니라 완전히 빠져나갈 때마다 움찔거리는 구멍에서 오줌발처럼 거센 물기가 포물선의 형태로 쭉쭉 흘러나왔다. 하나로 찰싹 달라붙은 사타구니가 내가 쏟아낸 물기로 엉망진창이었다.

    “아, 이, 상해, 이상해, 흑, 아앙…!”

    “이상한 게 아니라, 큿, 좋은 거지. 너 지금, 하아, 아랫구멍 쑤셔지는 거 좋아서 죽는 거야….”

    쾅쾅쾅. 화장대 전체가 요동을 치는 소리가 벽에까지 맞부딪치며 사고회로를 자각자각 갈라놓았다. 차무겸의 말대로 몸이 이전보다 훨씬 예민해졌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날, 그날 이후부터였다.

    밀실에 갇혀 그가 주는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꿀꺽 삼켰던 날. 정확히는 최음 효과를 부추기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며칠 내리 매트리스 위를 뒹굴며 짐승처럼 붙어먹었던 순간들.

    그 후 일상생활을 할 때는 괜찮았지만 차무겸과 섹스를 할 때면 여지없이 신경이 그날처럼 절절 끓었다. 그가 질 안에 손가락을 넣어 한 번 휘젓는 것만으로도 오금에 힘이 풀리고, 발기한 성기를 밀어 넣으면 정신 못 차리게 물을 쏟기 바빴다.

    몸이 이상해. 이상해진 것 같아. 어떡해. 하필 섹스 중이라 그토록 펄펄 닳아 오른 상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적으로 와닿아 위화감이 배로 짙어졌다. 울렁울렁거리던 눈가에서 물기가 터져 나왔다.

    “으흑, 흐, 하, 아응…!”

    “하아, 너무 예, 민해도, 위험하잖아. 다른 새끼가 만져도, 후, 이렇게 발정 난 것처럼 질질 싸면 어떡하려고.”

    혈관이 툭툭 선 그의 손이 이 와중에도 움찔움찔 아래를 조이며 성기를 더 씹어 먹으려는 엉덩이를 꽉 붙잡았다. 그 상태로 활짝 벌어진 질 주름 사이에 뱀의 몸통같이 미끈한 좆을 무작스럽게 쑤셔 박으며 내 목덜미를 흠빨았다.

    “아흐, 응, 응, 으, 아!”

    정도 이상의 쾌락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어찌나 거세고 격렬한지 머리통 안쪽이 후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얼했다. 그 극치감이 너무 좋으면서 또 너무 싫었다. 부추겨지는 몸의 반응은 가뭄 속에 만난 단비처럼 펄떡펄떡 뛴다고 한들, 의식이 멀쩡한 한 가시지 않는 위화감과 자괴감은 속에 여전히 뻑적지근하게 고여 있었다.

    그러던 차, 차무겸이 몸을 뒤로 물리며 안을 험하게 두드리던 성기를 쭉 잡아 뺐다. 큼지막한 기둥이 내벽을 긁고, 귀두가 입구 부근을 꽉 팽창시키는 것마저도 어질거리는 희열을 자아내 질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왜, 왜….”

    아직 온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안이 퉁퉁 부은 것처럼 가려웠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신경이 펄떡펄떡 맥동했다. 불온하게 요동치는 눈을 들자 차무겸은 흐트러진 다리를 화장대 위에 고정시키며 심상히 지껄였다.

    “혼자 해 봐.”

    “어…?”

    “자위해보라고.”

    반질거리는 검은 동공은 또다시 얄망궂은 성미를 잔뜩 뿜어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를 응시하던 눈을 내리깔자 아직 사정에 이르지 않아 배꼽까지 올라붙어 아랫배를 툭툭 두드리는 흉흉한 페니스가 보였다.

    “그냥, 그냥 해, 계속….”

    나는 거울에 등을 기대며 사지를 이리저리 뒤챘다. 몸이 정도 이상으로 예민해지는 건 이럴 때 쥐약이었다. 이전이라면 섹스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 하는 애원이 됐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정말로, 신경줄 하나하나에 작고 얇은 가시가 박혀 온몸을 근질거리게 하는 이 미묘한 성감을 해결하기 위해 그에게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섹스에 환장한 여자가 된 비참한 기분이었다.

    차무겸은 내가 제 성기를 응시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잔뜩 성이 난 아랫도리와 달리 꽤나 차분한 그 얼굴은 나에게 절망적인 신호처럼만 보였다.

    “저번에 해봤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는 되지도 않는 변명은 집어치우고.”

    “무, 무겸아….”

    “응? 나한테 박아달라고 애원하다가 안 되니까 혼자 클리 비비면서 지랄 났었잖아. 기억 안 나?”

    아무리 봐도 쉽게 넘어갈 태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들 생각을 다각도에서 요리조리 돌려 돌파구를 찾아낼 만큼 한가한 상태도 아니었다. 몸이 뭉쳐진 열기로 후끈하게 끓고 있었다. 아까부터 벌름대며 투명한 애액을 질금질금 뱉어내는 구멍은 먹을 걸 달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 댔다. 눈두덩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가랑이 사이로 더듬더듬 내렸다.

    “흣….”

    욕실에서부터 이어진 교접으로 퉁퉁 부어오른 음핵이 손끝에 걸렸다. 그 부위를 조심스레 문지르자 달콤한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관통했다. 아, 하아…. 어쩔 수 없는 흡족한 숨이 새자 차무겸의 입가에 깃든 미소가 진해졌다.

    “나 보면서 비벼.”

    냉혹한 명령이 또다시 떨어졌다. 맹하니 풀린 눈동자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잔뜩 서린 흥분감의 증거로 고른 그의 이목구비에는 군데군데 사나운 기색이 맺혀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며 음핵을 둥글게 문지르자 꼭 차무겸이 직접 애무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한 번씩 움찔거리는 몸을 따라 흔들리는 화장대로 말미암아 착각이 깨부숴지고 현실이 들이닥쳤다. 지금, 차무겸 앞에서 허벅지를 활짝 벌리고 내 스스로 아래를 애무하고 있다는 현실이.

    “으흑, 응, 아, 아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살짝 가져다 대 어설프게 꾹꾹 누르는 수준이었다면 어느새 까득까득 긁어내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번지는 희열은 아프고 따가울 만큼 확실했다. 가랑이 사이에서 소심하고 음탕하게 노니는 내 손길이 빨라질수록 차무겸의 홍채 역시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다리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푼 건 잠시 후였다.

    굳건히 움켜쥐고 있던 오금을 놓고서 클리토리스를 가쁘게 비비던 손을 휙 채갔다. 그 위로 묻어나는 번들거리는 음액을 물컹한 혀가 할짝거리며 앗아갔다. 그는 아예 내 손가락 두어 개를 제 입 속에 넣어 쭉쭉 빨았다. 얼마 안 가서는 더 나올 게 없나 찾는 것처럼 아예 이를 세워 짓씹는 통에 손끝이 저릿했다.

    “손가락, 구멍 안으로 넣어 봐.”

    곧 타액으로 축축 젖어 든 손가락을 놓아주고는 그리 지시한다. 이제 와 수치심을 알고 내빼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게 강한 자극이 되어 나를 질금질금 녹아내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 정도의 자극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속에서 갈망이 울부짖었다.

    뻐끔대며 공기만을 삼키기 바쁘던 구멍에 무언가 닿자 아래가 저절로 살그미 벌어졌다.

    “하아으.”

    질구 안으로 축축이 젖은 중지를 밀어 넣자 절로 아득한 탄성이 터졌다. 안이 어찌나 팔팔 끓고 있었는지 손가락에 쫀득하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이었다. 내 몸의 신체 기관임에도 그 생경함에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였다.

    “내가 핥아준 손가락으로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네 아래를 핥아주는 거랑 비슷하네.”

    차무겸이 내 턱을 들어 입을 쪼듯이 맞춘 후 속살거렸다.

    “안에서 둥글게 원 그려 봐.”

    그의 명에 따라 손가락이 안에서 돌아가자 쯔걱, 쩍거리는 젖은 소리가 났다. 흐물흐물한 점막이 손가락에 빨판처럼 흡착했다. 머릿속이 조금 더 몽롱하게 가라앉았다. 사리 분별이고 뭐고 죄다 내팽개치고 정신 사납게 손가락을 놀리고 싶어질 만큼 아득한 감각이었다.

    “앞뒤로, 흔들어도 좋고… 내가 네 보지 속에 손가락 넣고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초점이 풀려 흐리멍덩해진 눈알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가 내 아래를 난도질할 때의 움직임을 상기하며 손가락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부드럽게 앞뒤로 움직이며 안을 자극했다. 맥을 못 추듯 고개를 비틀어 차가운 거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흣, 응, 아응, 응….”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하지는 못해도 이것 역시 자극이 되기는 분명했다. 차무겸은 잔뜩 오므라든 내 무릎을 활짝 벌린 뒤 끈덕지고 상스러운 눈길을 가운데에 꽂았다. 일렁이는 정욕으로 물들어서 번들대는 동공이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치는 지금 나의 모습도 썩 정상처럼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으으, 으, 읏….”

    아슬아슬한 기분에 기도가 자꾸만 졸아붙었다. 아무래도 감질이 났다. 차무겸이 있는 힘껏 찔러주면 까무러칠 것처럼 몸을 비트는 그 부분엔 손가락이 잘 닿지 않은 탓이었다. 너무 깊고 멀었다.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이자 그가 낮게 웃었다.

    “아!”

    다음 순간 그가 안에서 꾸물꾸물 기어 다니던 손가락을 확 빼냈다. 투둑, 툭 튄 물기가 그의 아랫배를 험하게 때렸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차무겸은 아까부터 위협스레 꺼떡거리던 성기를 위아래로 쓸고는 벌름대는 구멍에 맞춰 단숨에 찔러 넣었다. 흐물렁하게 풀어진 아래는 조금의 뻐근함과 압박감 없이 살기둥을 너끈히 조여 물었다.

    “흐으윽!”

    그가 벗어나려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비틀대는 나를 감싸 쥐고서 홧홧하게 달아오른 질벽을 무참히 박아 올렸다. 달아날 방법은 없다. 그걸 헤아리고 골몰할 만큼의 정신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뇌가 으깨지는 것만 같은 쾌락이 삽시간에 심지를 무너뜨렸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좋아? 응?”

    “흑, 읏, 으, 아, 아!”

    “너, 좋아하는 덴 손가락이, 닿지도 않잖아. 후, 그치?”

    그간 숱하게 이어져 온 정사,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해온 만큼 차무겸은 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가 철퍽철퍽 유연하게 자맥질하며 나의 머리칼을 확 쥐어 챘다.

    “너도 손가락, 넣어 보니까 알겠지?”

    “아읏, 응, 앙…!”

    “내가 그 안에 왜 이렇게 환장하는지.”

    두피에 바늘이 박히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럼에도 아랫배가 절절 녹아내리는 쾌락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엉망으로 뒤엉키는 감각에 의식이 혼탁해졌다. 차무겸이 나의 등줄기를 껴안고서 조금 더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거울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몸이 조금 떨어지자 그의 눈동자가 거울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졌다.

    “하, 씨발….”

    그의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유리에 문질러졌다가 떨어지는 날갯죽지의 문신이 후끈거렸다.

    “읏, 응, 아흡, 흑…!”

    “예쁘네, 진짜….”

    야릇한 찬탄을 머금은 그가 목덜미를 까득 깨물었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자 금세 치아를 혀로 갈음해 자국이 남은 부위를 부드럽게 핥아주며 허리를 맹렬하게 짓쳐 올렸다.

    추삽질이 거듭될수록 그나마 남은 정신의 터럭마저 놓게 된다. 이미 아래는 온갖 체액이 뒤섞여 난리 그 자체였다. 한동안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무어라 거칠게 뇌까리던 그가 머지않아 몸을 바로 세우고서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손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허벅지를 쥐고서 좁진 내부로 정신 사납게 출납을 반복했다.

    “흑, 핫, 하… 아아!”

    “와. 이렇게, 자꾸 지려서, 어떡해.”

    그의 말마따나 탱탱 올라붙은 고환이 회음에 뭉개질 만큼 접붙었다가 거리가 벌어질 때마다 물이 찍찍 새어 나왔다. 시원스럽지 않은 소변이라도 보는 것처럼 실금 같은 애액이 끊이지가 않았다. 차무겸은 걱정스럽다는 어투를 가증스레 뱉어내면서도 아래를 잘도 헤집어대고 있었다.

    “오줌도 못 가려? 애기야?”

    “흐, 으, 그, 만, 아, 아아…!”

    “바닥 지금 물난리 났잖아… 응? 사은아, 나 발이 축축해.”

    그저 나를 골려 먹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경황없이 들썩이는 엉덩이 밑도 찝찝하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질척하게 젖은 상태니까. 사내는 사정을 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많은 체액을 쏟아낼 이유가 없으니, 이건 거의 다 내 아래에서 흐른 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윽…!”

    순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감각에 눈앞이 명멸했다. 나도 모르게 가까이 들러붙은 그의 가슴팍을 밀며 도리질했다. 지금껏 잘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거부감을 표하는 나의 행동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두려워서 얼른 입 밖으로 내뱉었다.

    “흐, 그만, 그만하면 아, 안 돼…?”

    “왜.”

    “아, 안 닫힐 거 같, 아.”

    “뭐가.”

    “밑에, 밑….”

    “밑?”

    차무겸이 고개를 쓱 내렸다. 지금 이렇게 부탁하는 와중에도 방아질을 지속하는 결합부를 힐끗 확인하고는 내가 무얼 말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보지가 계속 이렇게 벌어져 있을 것 같다고?”

    “응, 응….”

    “그럴 리가….”

    호색한처럼 웃은 그가 흐물흐물 늘어진 내 몸을 제대로 화장대 위에 눕히고서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이어 탄탄한 장골이 벌어진 엉덩이를 짓누르듯 퍽퍽 마찰했다.

    “네 구멍, 박을 때마다 쫄깃해서, 하아, 이렇게 늘어나도 결국엔 모르는 척 다물릴 거야.”

    “응, 무겨, 무겸, 아, 아아… 아!”

    “뭐, 진짜 헐렁해져서 안 닫히게 되면, 흣, 정액으로 채워줄게. 그럼 빈 느낌은 안 들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끔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턱을 비틀어 사납게 입을 맞춰왔다. 덜컹덜컹. 화장대의 요동이 심해졌다. 그 위에 올라타 얽힌 두 나체 역시도 몸선을 휘는 행위가 점차 격해져 가고 있었다.

    “아, 아아, 아…!”

    고지가 눈앞이었다. 누가 토막을 내는 듯 뚝뚝 끊기는 교성만 터져 나왔다. 머릿속에 연신 빛이 터지는 바람에 말하는 법을 깡그리 잊은 기분이었다. 모서리를 짚은 발가락이 잔뜩 오므라들었다가 팽창하듯 펴지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그가 엉덩이 바로 윗부분을 감싸며 안으로 강하게 꽂아 넣었다. 아득할 만치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가 날래게 빠지기를 반복하던 살덩이가 뿌리 끝까지 쾅 밀려 들어와 내부를 장악했다.

    “하으으응!”

    눈앞이 비틀렸다. 요란한 절정으로 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경련하는 안쪽의 조임에 차무겸이 까끌한 음성으로 신음을 토했다. 그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두 팔로 나를 껴안은 채 후희라도 즐기듯 목덜미와 턱을 쪽쪽 빨았다.

    “아, 너무 좋아.”

    “…….”

    “우리 평생 이렇게 살자, 사은아.”

    뭉근한 혀의 감촉이 나를 까마득한 어딘가로 밀어버리는 듯했다. 간신히 화장대에서 내린 발을 나도 모르게 휘적거렸다. 그럼에도 허공만 저을 뿐, 내디딜 땅이 없었다.

    이건 과연 버티고 있는 걸까, 추락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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