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7화 (17/24)

17장.

‘…이면 영구적인 손상이 갈 수도 있어.’

‘내버려 둬.’

‘시기 놓쳐서 나중에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꿈속에서마저 고압적인 음성은 나를 억눌렀다. 향하는 대상이 내가 아닐지언정 신경줄을 잔뜩 오므라들게 하는 힘이 있음은 확실했다.

‘…기면 누나한테 연락해. 꼭.’

두런두런 주고받던 대화가 끊겼다. 아주 설핏 든 나의 의식도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까무룩 수면 밑으로 잠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몸을 감싸는 포근함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가연이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은 제대로 누워본 적이 없는 침대의 감촉. 목이 마르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 여기저기가 따끔거렸다. 한 곳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고통이 희미한 의식 너머로 생생하게 쏟아져서 단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잇새로 앓는 소리가 얄따랗게 흘러나갔다. 누워 있는데도 불편한 몸을 뒤척거리자 미세한 이명이 왼쪽 귀를 덮쳤다. 인상을 찌푸리고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귓속에 고장 난 라디오를 집어넣은 것처럼 잡음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불편한 기분에 콜록, 옅게 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낯선 풍경, 낯선 공간이 시야를 파도처럼 덮쳤다.

나는 가슴 위까지 덮인 이불을 그러쥔 채로 천장을 응시했다. 초점이 선명하지 않은 동공이 위축됐다. 이리도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누워 볼 수 있던 천장이 아니었다. 층고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아져 있었다. 생경함이 머리끝까지 달했을 때 물 적신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한쪽 발을 침대 밑으로 내디디기 무섭게 화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방은 매끄럽고 굳건한 유리창으로 막아져 있음에도 아주 차갑고 톡 쏘는 듯한 찬 바람이 나를 스쳐 가는 것만 같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를 부러 움직여 창 앞으로 다가갔다.

두 손이 얼음 같은 표면에 닿았다.

“…….”

허망함에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걸까.

한낮의 도심이 유리 아래로 빼곡하게 수놓아졌다. 수많은 빌딩과 삐죽빼죽 솟아난 건물들이 눈높이에 맞거나 그보다 아래였다. 그러니까, 그만큼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마어마한 고층에 위치해 있음을 뜻했다.

눈앞이 어찔하게 흐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발밑이 위태로이 휘청거리는 듯도 했다. 고공에 두둥실 뜬 것만 같은 심리적인 압박감이었다.

“깼네.”

양손을 통창에 얹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영문인지 윗옷을 입지 않은 차무겸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낯선 공간, 낯선 위치, 그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주는 산물처럼 그조차도 낯설었다. 다가오는 차무겸의 걸음 소리가 귓가에 대고 유리 조각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바삭바삭,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손끝이 둥글게 말렸다.

“여기… 어디야?”

목소리를 낸 건 나인데, 그 소리에 놀란 것도 나였다. 멀쩡한 성대에 까끌까끌한 모래를 잔뜩 뿌려둔 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사했어.”

간결하게 답한 그가 허리를 끌어안고 나를 다시 침대로 데려갔다. 벗어나고 싶어서 몸을 비틀었다가 사지 곳곳을 쥐어짜는 통증에 으, 하고 앓는 소리를 터뜨렸다.

차무겸은 협탁에 놓인 잔을 들어 침대에 앉은 내 입가로 가져다 댔다.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서 미미한 염려가 들었지만, 일단은 목을 축이는 게 먼저였다. 쩍쩍 말라붙던 입술이 수분기를 머금자 살 것 같았다.

한입에 다 비우자 한 잔이 더 내밀어졌다. 잠자코 삼켰다. 기도가 타는 것만 같은 조갈증이 조금쯤 나아졌다. 그러고서야 뒤늦게 훑는 입 안의 물맛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막 일어난 데다가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에 단지 나만의 착각임을 간과할 수 없었다.

“무섭지 않았니?”

갈증을 축인 나를 침대에 도로 눕혀주던 차무겸이 대뜸 말했다.

“…뭐?”

“납치당했다가 돌아왔을 때, 어른들이 나한테 한 첫 번째 질문이 그거였어.”

“…….”

“그때 할아버지는 진지하게 정신 분석을 의뢰할까 고민하셨대. 왠지 알아?”

차무겸의 길쭉한 손가락이 헝클어진 앞머리를 쓱 넘겨주었다. 이 공간은 히터의 훈기로 가득 찬 데 반하여, 그 손길은 이상하게도 눈가를 떨리게 하는 서늘함을 끼쳤다.

“내가 웃으면서 그랬거든.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

“어른들 눈에는 그게 퍽이나 심각한 문제로 보였나 보지. 납치당했다가 혼자 살아 돌아온 애가, 더군다나 기억도 없다는 애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근데 진심이었어. 뭐…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실은 다 기억하고 있기도 했고.”

왜 다짜고짜 이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차무겸은 절대로 허튼 행동을 하는 법이 없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다. 두통이 가시지 않은 저조한 상태로도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됐다.

“납치범이 정신과 의사였다는 말을 했던가?”

차무겸은 남에게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백처럼 주절주절 읊고 있었다. 그는 몸을 편안하게 늘어뜨린 채로 있었기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숨을 꾹 억눌러야만 했다.

이럴 때가 아님을 아는데. 묻고 싶은 게 머릿속에서 가득 끓고 있었다. 갑자기 이사는 왜 한 건지. 아니, 그보다 안진권이 살아 있기는 한 건지, 또 가연이는 어떻게 됐는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혀가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굳어 여의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해. 내가 보기엔 납치범 그 새끼가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심한 불안증과 강박증이 있었거든. 주변을 제 뜻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인 것처럼 굴더라. 나와 차진겸을 납치해 데려왔으면서 제가 저지른 짓은 보기가 싫은지, 옷장에 처박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또, 납치범인 주제에 보상과 처벌을 확실히 하는 것도.”

“…….”

“그래서 무섭지 않았어. 한두 패턴만 지켜보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답이 훤히 나왔으니까.”

내내 벽을 응시하던 차무겸이 나를 쓱 돌아보았다.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던 나의 동공이 움찔 튀었다. 차무겸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밀을 전하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귀 쪽으로 가까이 내렸다.

“사실 처음에는 좀 재밌었어. 오히려 내가 그 새끼를 가지고 노는 기분이 들길래.”

저음이 내려앉은 자리가 오싹하게 물들었다.

당시에… 납치를 당했을 때 그가 몇 살이었다고 했지? 한우현을 통해 들은 바로는 꽤나 어렸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가운데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 나는 동요를 채 숨기지 못한 낯으로 그를 바라봐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기분이더라도 현실을 놓고 보면 전혀 아니잖아. 나는 납치를 당해서 그 새끼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라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그게 뭔가 불만스럽더라고. 꼭 한 번은… 내가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담담하게 끄집어놓는 토로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지금 이 말이, 그가 어른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처럼 들렸다. 어떻게 보면 순수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영악할 이면이 단지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함이라니.

터무니없는 착잡함이 속을 잔뜩 졸아붙게 만들었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기대한 만큼 재밌지도 않더라.”

차무겸의 손가락이 베개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내가 왜 암영으로 내려갔는지 기억해?”

느린 손길은 하얗고 검은 건반을 차례대로 누르는 피아니스트의 것처럼 유려하고 차분했다.

“그 기대했던 게 너무 지루해서야.”

“…….”

“다들 내 눈치만 살살 보면서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걸 구경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축축 처지는 음성에 권태로움이 여실하게 묻어나 있었다. 나를 겁주기 위해 꾸며내는 음성이라기에는 감정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래서 널 만난 게 즐거웠어.”

“…….”

“이쯤이면 되겠지 싶었는데 턱도 없고, 그러다가도 생각지 못한 데에서 홀라당 넘어오고.”

“…….”

“분명 그게 신선해서 좋았는데… 이상하네.”

부드럽던 손아귀가 한순간 모습을 달리했다.

“이제 좀 짜증 나려고 해.”

“…읏!”

머리채를 아프게 쥐어 채 베개 위로 누르는 힘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차, 차무….”

“곱게 대해줬잖아. 성질머리 다 죽여가면서 몇 년을 애지중지 대해줬는데 왜 자꾸 이래? 넌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아, 으, 아프…!”

“나 속상하게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이나 해?”

어느새 위를 장악한 차무겸의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떠돌아다녔다. 혈향이 가득 내풍기는 가연이의 집에서 막 마주쳤을 때 보았던 바로 그 눈빛.

나의 버둥질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물결치듯 요동쳤다. 차무겸의 완력이 그런 나의 사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억눌렀다. 삐걱삐걱, 침대가 꼭 섹스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한 소음을 사방팔방으로 터뜨렸다.

차무겸이 귓가에 입술을 딱 갖다 붙인 채로 거칠게 뇌까렸다.

“말해 봐… 안진권이 어디까지 만졌어?”

뜨거운 숨에 딸려 나온 거친 저음이 성치 않은 고막을 찢어발길 듯 사나웠다.

차무겸이 이를 세워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여기?”

“아흣…!”

다음으로 쓱 내려간 높고 아름다운 콧대가 쇄골과 앙가슴 사이로 끈덕지게 비벼졌다.

“아님 여기?”

“으, 시, 싫….”

등줄기를 헤집던 손길이 알아채지 못한 사이 하의로 쏙 파고들어 엉덩이 한쪽을 잡아 벌렸다.

“아니면 여기?”

예리한 손끝이 사이로 도드라진 엉덩이골을 더듬거렸다. 조금만 더 깊숙이 파고들면 바로 질구에 닿는 위치였다. 그러니 차무겸이 지금 가리키는 부위는 빤했다. 돌변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납작하게 짓뭉개지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대답해.”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안, 안 만졌어…! 안 만졌다고…!”

기실 안진권의 손길이 몸 여기저기를 스쳤으나 그때도 지금처럼 발버둥 치기에 여념이 없어서 정확히 어디를 만졌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리고 지금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제발 부정의 의미를 알아달라는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도리질을 했다. 차무겸이 나의 턱 아래쪽에 입술을 가져다 붙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한눈을 판 사이 제 품에서 빠져나간 귀중한 것을 되찾은 듯, 커다란 손 여기저기가 내 몸을 이따금 어루만졌다. 서투른 들숨을 따라 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사실 사은아, 네 대답은 필요 없어.”

신경 안정제라도 복용한 것처럼 사나운 눈발을 살짝 누그러뜨린 그가 나른한 어조로 속삭였다.

“내가 직접 알아볼 거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신 어느 한구석이 탁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몸의 주인인 나조차도 떨쳐낼 수 없는 잠기운이 설설 퍼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완전히 꺼지기 직전 차무겸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전해졌다.

“이제 네 말은 못 믿어.”

* * *

다시 눈이 번쩍 떠졌을 때, 순간 시야가 멀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분명히 눈꺼풀을 들고 있음에도 눈앞이 검은 크레파스를 덧칠한 것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새까매서.

옆으로 누운 채 적응될 길 없는 암흑을 감각에만 의존하여 수 분을 헤쳤다. 그러다가 굼뜬 속도로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몸은 어디 결박된 곳 없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눈가를 더듬고서야 시각에 실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를 이곳, 내가 늘어져 있던 바닥은 잠들기 직전의 푹신한 침대가 아닌 삐걱대는 건조한 목재였다. 몽롱하고 서늘한 송진내가 후각을 오싹하게 긁어내렸다.

“차, 차무겸.”

누가 영혼을 잡아뺀 것처럼 넋을 잃고 있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인물의 이름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부름은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공기 중에서 허무하게 흩어져버렸다.

벌레 한 마리가 고막 속에 내려앉아 달팽이관을 살살 뜯어먹는 듯한 이명이 불시에 덮쳐왔다. 무심코 손을 들어 귀를 감싸자마자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내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딘지 모르는 칠흑 같은 공간, 그 속에 괴괴히 울려 퍼지는 나의 가느다란 미성,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해 까슬한 공기 중에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는 지금 이 상황….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무엇보다도 생생한 공포가 빠르고 사납게 치솟아 올랐다.

당장 내달려 어디로라도 도망을 가고 싶은데 앞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기에 방향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맥없이 두리번거리기만 반복했다. 여긴 어디지? 차무겸은? 어떻게 된 거지? 나로서는 하나도 해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기포처럼 뽀글뽀글 피어올랐다.

그러는 순간이었다.

끼익, 쿵.

어디선가 소음이 들렸다. 유일한 흔적을 따라 고개가 황급히 돌아갔다. 가느다란 빛줄기가 언뜻 보였다가 명멸하듯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무언가를 해볼 새도 없이 펼쳐진 암흑의 되돌이표였다.

“무겸아…?”

어느 때는 원망밖에 들지 않지만 어느 때는 빌어먹게도 유일한 동아줄이 되어주는 이름. 눈을 뜬 지 몇 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질식할 것만 같은 고립감을 느끼며 붙잡을 수 있는 건 그 이름 하나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전무했다.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 심박수를 애써 억누르며 숨을 죽였다. 무엇인들 반응이 이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얼마간 집중에 집중을 다하던 차였다.

뚜벅, 뚜벅, 뚜벅.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날렵한 송곳이 되어 귀를 찍어 내렸다.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있는 쪽으로.

차무겸일까? 차무겸이겠지. 하지만 아니면? 무얼 근거로 그라고 확신할 수가 있어? 당장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형국인데.

소리를 따라 이어지는 안개 같은 의구심이 마음을 불편하게 옭아맸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같았다. 구석에 숨는 소동물처럼, 저절로 몸을 옹송그리게 됐다.

“아!”

잠시 후, 무언가가 팔뚝을 콱 붙잡자 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갔다. 한껏 벌어진 입술 아래 턱이 붙잡히고 무언가 입 안으로 쫄쫄 흘러 들어왔다.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혀를 휘젓다가 그것을 꿀꺽 삼켰다. 미끈하고 끈적거리는, 다소 불유쾌한 맛이었다.

“윽, 하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기도 끝으로 뱉어내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악력이 몸을 좋을 대로 휘둘렀다. 보이는 게 없어 휘청대기 바쁜 나신이 질질 끌려가 어딘가로 내던져졌다. 스프링이 끼기긱, 수축했다가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침대 위에 얹는 매트리스 같았다. 신축성이 매끄럽지 못해서 그런지 몸을 감싸는 느낌이 자못 딱딱했다. 거부감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장 내려오지 못했다. 나를 엎드리게 만든 힘이 둔부를 하늘로 치켜들게 만든 까닭에. 엉덩이 살을 거머쥔 아귀힘이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강건했다.

머지않아 아무런 자극도 없어 메마른 질 안을 무언가 뚫고 들어왔다.

“아악!”

날 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에 닿는 게 싫어서 바둥거리던 시트에 이마가 절로 처박혔다. 다행히 먼지가 묻거나 더러운 냄새가 나진 않았다. 실은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정신이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 온 신경이 하복부로 쏠렸다. 버겁고 묵직한 무언가가 반쯤 쑤셔진 구멍은 불쏘시개라도 꽂힌 것처럼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으, 시, 싫어…!”

골반을 바투 감싸 쥔 힘이 제멋대로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퍽, 퍽. 아래가 정신 사납게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둥그런 모양으로 벌어진 아래가 무참히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피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홧홧함이 잇따랐다.

나는 쥐어지지도 않는 시트를 박박 긁기 바쁘던 손을 황급히 뒤로 뻗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손에 만져졌다. 사내의 허벅지였다.

“무겸아, 하지 마, 미, 미안해. 하지 마… 제발, 아! 으읏…!”

항문에 힘이 꽉 들어갈 정도로 엉덩이를 포악하게 벌리는 손길에 애처로이 빌던 행동이 무너졌다. 회음부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환하게 드러나며 거대한 성기가 틀어박힌 구멍이 속속들이 내비치고 있다는 게 실로 잘 느껴졌다. 뿌리 끝까지 처박혔던 성기가 살점이 딸려 나올 정도로 천천히 후퇴했다가 다시 콱! 후려치듯 진입했다.

“아흡!”

눈동자의 초점이 비틀렸다. 속을 가득 메우는 압박감에 내장이 찢어질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겁을 한 움큼 집어먹어 몸이 잔뜩 경직되지 않았나. 이런 상태로 사내의 발기한 페니스를 받아들인다는 건 어지간히 공을 들인 전희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암흑을 찢듯이 벌리고 다가온 무법자는 그 정도의 아량조차 없이 내 아래를 멋대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배 속에 아주 날카롭게 벼린 칼날 하나가 처박혀 이리저리 휘둘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차였다.

“앗, 헉, 하, 으, 읍…!”

성기 끝이 반복적으로 짓누르는 질벽 어딘가에서 부정하고 싶은 열기가 퍼졌다. 나도 모르게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폐부를 흠뻑 적시는 후끈한 기운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고 아래가 움찔, 조여들었다. 그러자 야만인처럼 안을 차지한 페니스도 덩달아 꿈틀, 맥동했다.

“아, 아아, 하윽…!”

그런 내 반응을 진작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사내는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서 본격적으로 허리를 짓쳐 올렸다. 골반을 얼싸안고 있던 큰 손이 배 쪽으로 넘어와 흉기 같은 기둥을 감싸 문 음순 위쪽을 긁듯이 궁굴렸다. 도드라진 음핵이 자리한 부위였다.

“아흐읏!”

간신히 들린 고개가 다시금 아래로 고꾸라졌다.

공기 중에 열띤 호흡이 너울너울 퍼졌다. 몸이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발정을 일으키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원치도 않는 흥분이 부추겨졌다. 언뜻 조금 전 입 안을 깔깔하게 적신 액체가 떠올랐다. 하지만 찜통처럼 뜨끈한 열기에 절여져 가는 머리로 생각을 이어가기란 무리였다.

“하으, 흐….”

딱딱하고 차가워 마치 얼음 같은 시트에 한쪽 뺨을 댄 채 달뜬 숨을 터뜨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쾌락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풀어지고 있었다.

별안간 치켜든 엉덩이에 철썩철썩 부딪쳐오는 이 무지막지한 장골의 주인이 덜컥 두려워졌다. 차무겸이 맞기는 할까? 화가 나면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는 건 비슷하지만 그건 다른 사내라도 충분히 모방할 수 있는 짓거리였다.

만약, 지금…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내 안을 들쑤시는 게 다른 사내의 성기라면?

“우욱…!”

속을 불쾌하게 긁는 토악질이 치밀었다. 나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이 뺨을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읏읏대던 내 신음이 멈춘 걸 알아차린 어둠 속 짐승이 팔뚝을 붙잡아 억지로 입가에서 떼어냈다. 타력에 의해 뚫린 입으로 애원이 갈급하게 터져 나왔다.

“아! 무, 무겸아. 무, 겸이 너, 맞, 맞지. 응, 아, 흐으…!”

“…….”

“너, 맞, 하응, 맞냐고. 대답해. 대답해줘… 빨, 아, 빨리… 읏!”

아무리 외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간절한 외침만 메아리처럼 떠돌아다녔다. 이보다 아주 조금만 더 정신이 또렷했더라면 주변 상황에 집중하여 사내의 숨소리에라도 귀를 기울여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게 불가능할 만큼 자극적이고 격렬한 정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느닷없이 갇힌 동굴 속 같은 공간 하며, 그 어느 접촉도 없이 하복부만 철퍽철퍽 때려대는 가혹한 행위가 공포심을 날것으로 자극했다.

“흐, 나, 무, 무섭단 말이야… 아, 아아!”

“…….”

“으, 읏, 제발, 제발 무겸아. 뭐라고 말, 좀…! 아흐응!”

양쪽 젖꼭지가 아프게 꼬집혔다. 한동안 자극이 없어 말랑하게 풀어져 있던 유륜이 곧장 예민하게 돋아났다. 단단한 손가락이 가운데 정점을 집요하게 꼬집고 긁어 뾰족이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사이 익숙한 길로 파고들어 안쪽을 일정하게 때려 박던 귀두로 말미암아 아래는 계속해서 미끈하게 녹아내렸다. 조금 전만 해도 건조하여 생살을 찢는 것만 같던 아래에서는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매트리스 위에서 목각 인형처럼 부자연스레 삐걱거리던 몸이 요염한 선을 그리며 풀어졌다. 간신히 무릎으로 버티어 서서 바들거리는 허벅지 위로 애액이 줄줄 샜다. 구멍 주름을 벌리고 좁진 안의 살점을 콱 밀어 올릴 때마다 배 안쪽 전체가 찌르르하게 울렸다. 머리 안쪽이 깨질 것처럼 조여드는 쾌락이었다.

“아흐, 아, 흣…!”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나의 입에서 흐르는 건 짐승의 절규 같은 신음이 다였다.

순간 후, 하는 사내의 깊은 탄성이 귓바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전율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헤아려 볼 여력도 없었다. 나는 매트리스와 사내의 몸 사이에 낀 채로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고 있었다. 잠시 후 귓바퀴가 아플 정도로 짓씹혔다. 그사이에도 성기는 오물대는 구멍 속을 일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하으, 응, 으, 그, 그만… 아읍!”

거부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유두가 까득 비틀렸다. 그럼에도 무참히 쑤셔 박히는 구멍은 파고드는 살덩이가 그리 좋은지 거리낌 없이 쭉쭉 빨아 먹고 있었다.

속에서 두 가지의 반응이 격정적으로 맞부딪쳤다. 지금 이 성기가 다른 놈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구역질, 그러는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가랑이를 벌리게 되는 흥분감. 그야말로 돌아버릴 것만 같은 혼돈의 양극단이었다.

“하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무겸아, 어딨어? 도와…. 아! 으, 싫어, 그만…!”

두 눈이 어둠에 묶여 판별력이 흐려졌다. 거기에 폭염 같은 열감으로 성감이 치솟아 오른 탓에 생각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파손됐다.

그러다 보니 속으로 고이는 건 진흙탕 같은 두려움이 전부였다. 시야를 따라 암전된 머릿속에 차무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정만 둥둥 떠다녔다. 평소 그가 지껄이던 음담패설을 찾아 헤맬 만큼 이 상황은 잿더미 같은 절망감을 한가득 떠안았다.

“아읏!”

시트 위를 헤집기 바쁘던 두 팔이 붙잡혀 뒤로 휙 잡아당겨졌다. 억지로 끌리는 힘에 상체마저 반쯤 세워졌다. 후끈후끈한 열기로 점철된 시야에 뱀이건 벌레건 그 무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캄캄한 야음이 드리웠다.

무서워, 무서워. 다 이상해. 이게 뭐야. 여긴 어디야. 내 몸은 왜 이래. 이 사람은 누구야? 차무겸이 맞을까. 아닌 것 같아. 무서워. 아니면 어떡해? 내가 누구랑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두려워. 여기서 나가고 싶어. 몇 시지. 아파. 좋아. 힘들어. 기분 좋아. 이상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이상해. 왜 이러는 거야. 싫어. 무서워.

한 가지로 좁혀지지 않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널을 뛰듯 오만 군데로 발산했다.

정신력이 버텨주지 못하는 몸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손목과 팔뚝이 붙잡힌 상태라서 고개만 푹 떨군 채 퍽퍽- 안으로 헤쳐 들어오는 성기를 감당해야 했다. 한껏 벌어진 구멍이 숨 가쁘게 혹사당하자 목 안쪽이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움푹 조여들었다.

그러던 차, 별안간 눈 위로 무언가가 엄습했다.

“으…!”

보드라운 재질의 덮개가 얼굴을 가렸다.

이번엔 완전히 눈에 무언가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다. 그 상태로 몸이 휙 정방향을 향해 돌려졌다.

체액으로 푹 젖어 엉망진창 흐트러진 다리가 추스를 새도 없이 벌어지며 잠깐 빠졌던 귀두관이 젖은 구멍에 맞닿아 살살 비벼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안도가 들었다. 그건 차무겸이 삽입 직전 익히 행하는 버릇과도 같은 것이라서.

“하으, 응!”

입구를 맞추자마자 그대로 사납게 찍어 올리는 힘에 등줄기가 휘었다. 체위가 바뀌었다고 한들 인정사정없는 면모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차무겸과 섹스할 때 이따금 취했던 체위인지라 나 역시도 기억하는 몇 가지의 특징들이 있었다. 지금 손을 뻗으면 닿는 이 판판한 가슴팍과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찧어대는 격동적인 허릿짓, 각도나 바닥을 짚는 팔의 위치 등이, 내가 아는 차무겸의 섹스 방식과 유사했다.

내 위를 덮친 어둠에 매달려 속을 한껏 답답하게 만든 흥분감을 풀어헤치는 데 주력했다. 제정신을 유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발목이 붙잡히고 양다리가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들어 올려졌다. 횃불을 삼킨 것처럼 벌겋게 타는 속이 피스톤질 한 번에 찬물을 착 뿌리는 듯한 쾌락으로 자르르 녹아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도는 전율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아, 아, 흣, 아아…!”

흐물하게 벌어진 질구 속으로 둘레 굵은 성기가 힘차게 파고들었다가 빠질 때마다 검게 칠해진 눈앞으로 섬광이 번쩍번쩍 일었다. 거대한 좆이 안을 일정하게 때려 박는 힘과 속도에 따라서 안쪽에 고인 질액이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다. 억센 아귀힘에 인질처럼 붙잡힌 발등이 맥을 못 추는 것처럼 곡선으로 휘어졌다가 원만하게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흐응, 응, 아, 아읏, 흐윽…!”

혼돈은 여전했지만 그보다도 몸을 잠식하는 이 극치감이 대단히 선명했다.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위에 올라탄 음영에 의지하게 된다. 가뭄이 인 것처럼 바짝바짝 마른 목구멍에 시원한 물을 퍼부어주는 기분인데, 의지하지 않고 버틸 수가.

한차례 유린을 당하여 불뚝 솟은 젖꼭지가 축축한 점막에 둘러싸여 쭉 빨아올려졌다. 이마저도 날 선 쾌감으로 돌아오는 탓에 끙끙대며 머리통을 밀어내도, 남자는 아예 유방을 통째로 삼키고 싶은 것처럼 악착스레 달라붙으며 젖꽃판 전체를 침칠해 놓았다. 진득한 흡입력에 허리가 달달 떨렸다. 그러던 차 지금껏 안을 힘차게 박아주던 피스톤질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서 한차례 내부를 들쑤시던 성기가 쭉 빠져나갔다. 격렬하게 확장되다가 졸지에 텅 빈 구멍이 굶주림에 젖은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 아….”

헤벌어진 입술을 타고 애원의 어조가 샜다. 아쉬운 마음에 혀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안 돼, 응, 싫어… 하으.”

손을 위로 쭉 뻗어 휘저어 보았으나 걸리는 게 하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전신에 철퍽철퍽 부딪쳐오던 단단한 신체 역시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갔어, 어디 갔어…. 타는 듯한 갈증은 그대로인데, 아니,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물을 공급해줄 오아시스가 사라져버렸다. 죽을 것 같아.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해결책이 사라지자 더더욱 몸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흐, 아, 싫, 으, 뜨거워, 답답, 답답해… 흑.”

매트리스를 짚는 손끝이 달달 떨렸다. 몸을 살짝만 움직여도 자극을 요하는 구멍이 움찔대며 스스로 조여들었다. 당장 삼킬 걸 달라고 뻐끔대는 추잡스러운 애걸이 따로 없었다. 나는 경련을 멈추지 못하는 몸으로 매트리스를 헤집었다. 그러나 걸리는 게 없다. 죽을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정말로, 속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견딜 수가 없는데.

“무, 무겸아… 무겸아. 무겸아….”

성욕으로 벌겋게 칠해진 머릿속은 자괴감을 인지할 새도 없었다. 아니, 자괴감 같은 이성적인 사고는 물론이거니와 인질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에 씌워진 덮개마저 벗을 줄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구멍 속에 손가락을 양껏 쑤셔 박고 흔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흐읍…!”

엉클어진 다리 사이가 밀착하듯 스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치솟는 아슬아슬한 감각에 힘이 쭉 빠졌다. 매트리스 위에 자빠지듯 늘어지며 헉헉거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정신을 차리기가 버거웠다. 이런 와중에도 배 속에 꽂힌 불씨는 사그라들 생각을 안 했다. 신경 속에 가느다란 터럭 하나가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흐, 무겸, 무겸, 으, 사, 살려줘, 나, 진, 아읍, 흑…!”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겨우 한 줌, 정말 손에 쥐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소량으로 남은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성감과 본능에 좀먹혀 정말 이지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짐승처럼 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신경이 가랑이 사이로 전부 밀집했다. 나는 결국 축 늘어진 채 불두덩 아래로 손을 내렸다.

“아흑, 흐, 흐으, 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어색하게 손을 놀렸다. 아까 전 괴롭힘을 당해 통통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문질렀다. 등줄기가 곧장 말리며 허벅지 안쪽에 힘이 꽉 들어갔다. 덮개로 가려진 눈동자가 아슬아슬한 감각에 세게 요동을 쳤다.

“흐, 으응, 으, 핫, 읍….”

성기가 들이박혔던 모양대로 벌어진 구멍을 타고 미끈한 물이 주륵 새는 게 느껴졌다. 수치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은 수치를 뒤로한 채 민감해진 돌기를 자극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혀로 입술을 한 번 훑는 순간 손가락이 쭉 미끄러졌다. 아까부터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붕어처럼 뻐끔거리기 바쁘던 구멍 위로 중지가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누가 멋대로 자위하래.”

차가운 어조와 함께 손목이 붙잡혔다.

“아…!”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안타까움이 차올랐다.

지금껏 호흡조차 버겁게 만들던 덮개가 불시에 걷혔다. 시야가 거뭇한 건 여전했으나 그럼에도 동공 위로 그어지는 윤곽은 비교적 또렷했다. 적어도 내가 밤중에 이따금 봐온 얼굴임은 확실했다.

“내가 언제 맘대로 보지 비벼도 된다고 했어?”

“으, 아, 제발, 놔, 놔…!”

차무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턱을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내 입으로 확실히 듣겠다는 것처럼 상스럽게 지껄였다.

“줘? 자지 대줄까?”

“응, 응, 얼른, 얼른….”

“내가 왜?”

머리끝까지 달아오른 기대감이 단조로운 어투 한 번에 무너지기 바빴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

“흐으, 으, 무겸아….”

“나한테서 토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좆으로 쑤셔달라고 앙탈을 부려….”

“흑, 흐으, 읍.”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네.”

차무겸의 말이 이명처럼 지직, 끓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다. 다시금 내 위를 결박한 자세 때문인지 허벅지에 튼실한 성기가 또렷하게 닿고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다가 내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그러고서 직접 가랑이 사이에 가져다가 문질러댔다. 내가 안달이 난 만큼 차무겸의 성기도 평소보다 더 강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차무겸이 이런 내 행색에 황당하다는 듯한 조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보이는 눈동자만큼은 기이한 열기를 품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헛손질이 여러 번 이어진 끝에 귀두가 간신히 구멍에 맞추어져 꾸물, 파고들었다.

“더, 하으, 더…!”

칭얼거리면서 스스로 허리를 들썩여 어설프게 요분질에 임했다. 허벅지 안쪽이 저릴 만큼 커다란 살기둥을 욕심껏 삼키기 위해 서투른 몸짓으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속도도 박자도 허술한 탓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구멍 주름이 팽팽하게 펴질 정도로 굵직하게 들어차는 귀두가 내벽을 깔짝깔짝 긁어주는 덕에 조금이나마 가려움을 해갈할 수 있었다.

차무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뜬 열기에 절대로 전 숨결이었다.

“아흐응!”

홀로 감탕질을 벌인 데에 보상이라도 주듯이 반쯤 박혀 있던 페니스가 질액을 타고 매끄럽게 빠졌다가 못질하듯 깊숙이 타고 들어왔다.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휘도는 찌르르한 전율에 까무러칠 것처럼 몸을 비틀었다.

퍽, 퍽, 퍽! 모질고 우악하기 그지없는 허릿짓이 나를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캑캑거렸으나 그보다도 아래로 사내의 좆을 받아들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완전히 섹스에 정신이 나간 창부처럼 허리만 반복적으로 흔들며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똑바로 봐.”

차무겸의 으르릉거리는 듯한 어조가 뺨에 깊게 내려앉았다.

“흑, 응! 으, 아읏, 흡!”

“네가 이렇게, 섹스하자고 달려들고 애원할 수 있는 남자는, 나뿐이야. 알겠어?”

“읍, 아, 아아… 아!”

허리를 쳐올리는 힘이 어찌나 빠르고 격렬한지 상황을 압도하는 차무겸의 음성마저도 뚝뚝 끊어졌다. 까만 어둠을 갈라 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 꼭 잘 벼린 칼날 같았다. 피하고 싶어도 턱이 단단히 붙잡혀 무리였다.

타액으로 범벅되어 엉망인 입술을 그가 잘도 감쳐 물었다. 입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온 혀가 점막을 진탕 휘저어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밀어붙이는 탓에 폐가 통째로 전율했다. 정신이 상스럽게 유린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니까,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살아. 사은아.”

달큼한 경고였다. 적어도 지금, 이 미칠 듯한 가려움을 긁어주는 희열은 그렇게 달큼한 식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이 비참하고 끔찍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배 속에 불을 지피기라도 한 것처럼 사지가 발발 떨리는 갈증과 육욕 앞에서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차라리 어둠 속에 잠기고 싶었다.

* * *

누가 기억의 필름을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냈다가 다시 붙인 양 회상은 뜨문뜨문한 형태로 존재했다. 의식도 사고도, 모든 게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평생 해가 뜨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암전막 속에서 버틴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게 하나 정도는 있었다.

어둠을 가르고 다가온 강압적인 차무겸의 몸짓 아래에서 짐승처럼 뒹굴며 몸을 섞었다는 것. 숱하게 이어지는 섹스에도 인조적으로 지펴진 흥분감이 사그라들듯 사그라들지를 않아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에게서 받아먹은 액체는 처음 깨어났을 때 딱 한 번인데도, 효과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가히 고통스러울 정도의 흥분감에 오열하고, 전신을 발발 경련하며 차무겸에게 매달렸다. 그가 한 번씩 골을 내듯 방아질을 멈추면 발정기를 맞아 사내의 씨물을 받으려 안달 내는 암컷처럼 홀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성기를 더 깊숙이 쑤셔달라 애걸복걸하는 모양새까지 그려냈다. 이미 그 굵직한 걸 뿌리 끝까지 삼키고 있었음에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미쳐버린 것 같았다.

뜨문뜨문 잔재하는 회상 속 모든 구간이 이상했다.

차무겸은 제 존재를 똑똑히 각인시킬 것처럼 매 정사마다 내 머리에 덮개 같은 걸 씌웠다가 사정 직전에야 그것을 벗겨주었다. 그리고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제가 누구인지 내 입으로 말하라 시키기도 하고, 다른 새끼가 널 어디까지 만졌느냐며 다그치기도 하고, 너와 이렇게 개처럼 흘레붙을 수 있는 건 나뿐이라며 신랄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가끔씩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귓가에 밀어 넣기도 했다. 그걸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필 안진권과의 몸싸움으로 타격을 입은 왼쪽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무어라무어라 속삭이는 바람에.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꾸역꾸역 밀어 넣는 저음은 전부 지지직거리는 잡음으로만 인식됐다.

섹스의 기억은 언제나 중간에서 뚝, 잘렸다.

비리디비리도록 농도 짙은 정사에 기절했다가 깨기를 수 번 반복했는데, 정신이 들 때마다 체위만 바뀐 채로 발기한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입술은 평소의 언어를 잃은 채 날 서고 뾰족한 교성만 터뜨렸다.

어떻게든 버티고 싶어도 버틸 수 있을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체감상 며칠 내리 이런 생활을 한 것 같았다. 시간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작열감에 식욕마저 잡아먹힌 건지 배도 전혀 고프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 한 식욕보다 성욕이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서 다리를 벌리고 파고드는 무례한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죽도록 앙알대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또, 또, 또….

결국 기억 속에서 마무리를 짓지 못한 섹스가 끝나고 홀로 남겨질 때면, 몸은 언제나 깨끗하게 씻겨진 채였다.

“으….”

차무겸의 고약한 면모는 여전했다.

다른 곳은 싱그러운 비누 향이 날 만큼 깔끔히 씻겨놓고서 절대로 가랑이 사이는 건드리는 법이 없었다. 겹쳐 올린 다리를 살짝 움직이자 여전히 벌어져 있는 느낌이 드는 구멍에서 왈칵, 하고 무언가 새어 나왔다.

섹스 후 정신이 들면 언제나 이랬다. 내벽 안이 미끌미끌한 정액으로 가득 차서 아랫배에 힘을 살짝만 줘도 덩이진 정액이 오줌발처럼 주룩주룩 샜다.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여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번드르르하게 젖어서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 과정이 그리 버겁지 않았다. 외려 배 속에 남은 미미한 열기가 또다시 추적추적 고이는 느낌에 이를 사리물게 된다. 아직도 미미하게 남은 잔열 때문인지 안쪽 살점이 손가락에 진득이 눌어붙었다.

“하… 흐읏.”

턱을 뒤로 젖힌 채 아랫입술을 꽉 말아 물고서 안에 가득 고인 정액을 긁어냈다.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결국 빼나 안 빼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사가 끝난 후에는 버릇처럼 행동했다. 어떻게든 임신에 대한 가능성을 지워보고 싶어서 발악하는 건지….

“하아….”

하도 숱하게 사정을 해서 색마저 물그스름해진 정액이 손끝에 묻어났다. 누긋하고 끈끈한 게 끔찍했다. 매트리스 위에 손을 아무렇게나 쓱쓱 문질러 닦았다.

콜록, 메마른 기침이 터졌다. 매 성교 때마다 목이 나갈 정도로 교성을 지르는 바람에 목 안이 깔깔했다. 그럼에도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가만히 늘어진 채로 있었다.

초점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멍하니 밀실 속을 휘저었다. 슬슬 이 어둠에 눈이 적응될 때도 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캄캄하기만 하지. 어쩌면 정말로 눈이 멀어버린 걸지도 몰라. 나는 이리저리 깨물린 탓에 아릿아릿한 팔을 들어 다시금 눈을 매만졌다.

눈은 괜찮은 거 같은데, 아무런 이상도 없는 듯한데. 근데 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 거야?

째깍.

의식이 조금 고개를 든 사이, 기묘한 환청이 들렸다.

아냐. 이게 환청이라고 어떻게 단언해. 여기에 진짜 시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째깍. 그래.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는데…. 째깍. 그러나 동시에 그건 또 다른 공포감을 조성했다. 째깍. 어느 순간부터 이 초침 소리는 신경 세포를 긁어 강박증을 낳는 불안 요소가 되어버렸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동자를 깜박거리자 따끔한 통증이 잇따랐다.

“…으.”

살금 몸을 움직이니 돌팔매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온몸이 지끈거렸다. 어디로라도 나아가기 위해서 손을 앞으로 짚는 찰나였다.

“윽!”

당연히 이쯤일 거라고 생각한 높이가 훅 낮아지며 힘 빠진 몸이 균형을 잃었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가 매트리스에서 굴러떨어졌다. 맨바닥의 감촉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를 이리저리 긁었다.

“흡, 뭐야….”

대리석이나 장판과는 너무도 다른 깔끄러운 촉감. 꼭 까맣고 작은 벌레들이 온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과연 착각일까.

비릿한 밤꽃향이 깔린 가운데, 은은하게 감도는 마른 나무 냄새가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런 데라면, 진짜, 진짜 벌레가 있을 수도 있잖아.

헉, 기겁하는 심정에 목이 잔뜩 졸아붙었다. 시골에서 자라온 만큼 벌레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에서 바닥이나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는 것과, 눈이 가려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내 몸 위로 올라타는 벌레의 감촉을 겪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껄끄럽고 징그러운 감각이 떨쳐낼 수 없는 형태로 끼얹어졌다.

서둘러 매트리스로 올라가기 위해 손을 내디뎠다.

“어딨어, 어딨어… 어딨어!”

그러나 먹물을 풀어놓은 것만 같은 환경에 황망함까지 더해져 길을 잃은 것처럼 같은 자리만 맴돌게 됐다.

“어딨어, 어딨어. 흐, 어딨, 흡, 어딨어. 아, 으, 으….”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개미 같은 벌레가 피부를 갉작갉작 저몄다. 으, 싫어, 으, 으, 으…. 결국은 매트리스를 찾는 걸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팔뚝이고 등이고 할 것 없이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이 기괴하고 불쾌한 촉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 번 쓸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재차 까슬까슬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그게 벌레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알을 깐 것처럼 소름 끼치게만 여겨져서 결국 손톱까지 세웠다.

박박박. 목부터 가슴께, 아랫배, 허벅지 사이까지. 빠짐없이 손톱으로 긁고 또 긁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입에서 진절머리를 치는 소리가 쉼 없이 터져 나갔다. 그런데도 벌레는 계속해서 내 살결을 긁어먹고 뜯어먹었다.

지긱, 지지직. 한쪽 귀의 이명이 끝도 없었다. 아, 어쩌면. 이건 이명이 아닐지도 몰라. 알고 보니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무수한 벌레들이 홀로 널브러진 나를 갉아먹기 위해 다가오고 있던 소리일지도 몰라. 왜, 그렇잖아. 다리 수십 개가 달린 지네가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소리. 그럼, 지금 나한테 느껴지는 이 감각은 진짜일 수도 있겠네.

촉감이 실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하게 일그러졌다.

“아으, 흑, 흐….”

피부를 문지르고 할퀴는 속도가 부산스러울 만치 빨라졌다. 어디선가 미미한 피 냄새가 풍겼다. 아무래도 벌레가 피를 빨아 먹고 있는 듯했다.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따끔따끔한 통증이 번졌으나 그보다도 이 더럽고 흉측한 벌레를 먼저 떼어내는 게 먼저였다. 아, 아, 아. 질색 어린 반응이 고장 난 로봇처럼 반복적인 신음을 내뱉게 했다.

“아아…!”

쇳소리처럼 가늘게 터져 나오는 신음에 골수가 뒤흔들리고 몸속 어딘가에 차오른 기력이 쭉쭉 빨려 나갔다. 막을 새도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눈앞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는 여전히 어둠 속의 미로를 거닐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귓가를 맴돌던 초침 소리가 바뀌었다. 띠리리리. 전화벨 소리, 암영의 구닥다리 집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 그게 여기서 들릴 리가 없었다. 아하하. 쟤가 그 차무겸 몸종이래, 하인이래, 차무겸한테 몸을 팔았대…. 누군가의 비웃음. 째깍. 또다시 째깍.

이제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거닐어 온 특정 시간 속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귓전을 괴롭혔다. 시계였다가, 벨소리였다가, 비웃음 소리였다가. 온갖 잡다한 소음이 덩어리지듯 뭉쳐져 나를 내리눌렀다.

온몸을 타고 오르는 벌레도 떼어내야 했고, 귀도 틀어막아야 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서 입도 가려야 했지만 손이 부족하여 무리였다. 기실 수많은 괴롭힘이 시커멓게 수몰된 속에서 텅텅 울려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짓이기고 있었다.

의식은 고작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걸로 깎여나갔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경망스레 굴던 손이 바닥으로 툭 추락했다. 서서히 감기기 시작하는 의식 속으로 이마저도 까만 빛깔의 파도가 들이찼다.

* * *

언젠가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의 시간이 어느 하루에 멈춰버린 영화.

그러니까… 주인공은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드는데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어제의 하루가 반복되는. 그게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래서 그 비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영화.

요 며칠 꼭 그 쳇바퀴에 갇힌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러니까… 딱딱한 매트리스는 그대로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변화는 분명하게 실존했다.

어두워서 한 치 앞도 헤아려 볼 수 없는 공간에 빛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노랗고 희붐한 빛줄기로 말미암아 방향을 잡지 못해 매트리스조차 찾지 못하던 기절 전과 달리, 지금은 육안으로 어느 정도 사물을 구별하는 게 가능했다.

꾸물꾸물 시선을 들었다. 빛은 열린 어느 문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더러운 흙탕물을 뒹구는 것만 같던 내게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는 빛자락이었다.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다가 움찔했다.

그제야 손목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슬쩍 내려다보니, 손등에 꽂힌 링거와 팔뚝이며 다리며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느리게 내쉬는 숨이 죽은 사람의 것처럼 희미하고 고요했다. 쏴아아. 물소리가 들렸다. 이것마저 허상인가? 그러나 그건 잠시 후 뚝, 그치는 분명한 소리의 변화로 말미암아 현실임을 일깨웠다.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채꼴 모양의 빛 사이로 일정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

환한 곳에서 빠져나온 차무겸이 내가 누운 매트리스로 다가왔다. 그친 물소리… 수도꼭지인가? 그럼 저기가 화장실인가 보다. 늘 어두워서 설마 이 안에 저런 별개의 공간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끼익. 매트리스 한쪽이 무게감에 푹 가라앉았다.

빛점이 둥글게 고여 번들거리는 차무겸의 눈동자가 잔뜩 찢어져 너덜거리는 팔을 보고 있었다. 뻗어져 나오는 빛의 입자는 아무런 요동이 없건만 그의 동공 위는 너울이 인 양 짙게 일렁였다. 불기를 머금어서 따듯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싫어, 여기 싫어….”

차무겸은 차분한 손짓으로 저를 붙잡는 내 손을 떼어냈다. 조금 전보다 더 야멸차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가벼운 몸짓으로 매트리스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조를 힘이 있다면, 계속 여기 있기에 이상이 없다고 판단한 걸까?

안 돼.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아주 중요한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외상과 내상으로 버무려진 사지 육신이 삐걱거렸다. 매트리스에서 굴러떨어져 나무 바닥에 부딪친 무릎이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손목에 딸린 링거 폴대가 넘어졌는지 뒤쪽으로도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매정하게 나를 두고 가려던 차무겸은 잡아채는 힘에 뒤를 돌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소한 신호마저도 무서웠다.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잘못했어. 내가, 내가, 흑, 멋대로 나가서 미안해….”

동아줄이라도 쥐는 양 그의 소매를 간신히 그러쥐었다. 마른 바닥에 닿은 무릎으로 또다시 거슬리고 견딜 수 없는 감각이 스며 올라왔다. 심장이 조급함에 푹 담긴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박동했다.

“속상하게 해서 미, 미안해. 응?”

그저 시간만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깨어 있을 때는 정신의 어느 부분을 해충이 파먹는 것처럼 끝없이 신경을 옥죄어오고, 그게 아니라면 다리가 벌어지고 성기에 박히기만 하는 나날들. 또 그게 아니라면 기절하여 죽은 듯 잠만 자는 이 모든 것이 나를 빠르게 수몰시켰다.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깊디깊은 우울감의 바다로.

단지 내가 숨이 붙어 있기에 버티지만, 그렇기에 고통이 가시지 않는 순간들. 반대로 고통이 그치면 자연한 수순으로 나의 숨 역시 똑 끊겨버릴 것만 같은 절망이 도처에 수두룩하게 깔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건 자존심 다 버리고 차무겸에게 빌 정도로 두렵고 끔찍했다. 이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까만색이 될 것만 같은 질 나쁜 예감이 들었다.

차무겸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굽혀 앉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또다시 바닥을 구르는 게 짜증 났는지 어떻게든 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눈물 콧물을 빼며 그런 그의 품에 안겼다. 아양을 부리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믿는 어린아이처럼 가슴팍에 엉망인 얼굴을 비볐다.

“나,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제발, 제발….”

차무겸이 미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른한 숨결과 달리 다소 무자비한 손길로 턱을 그러쥐었다.

“반성했어?”

“응, 응….”

“내가 너한테 정말 꼼짝 못 하나 보다.”

“…….”

“적어도 일주일은 생각했는데… 겨우 나흘 가지고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네.”

버릇 제대로 고쳐놔야 하는데.

귓전을 스치는 음성이 그대로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여기서 나가면 내 말 잘 들을 거야?”

고개가 떨어져 나가라 주억거렸다.

그 태도에 커다란 손이 내 손목에 연결된 링거를 처리하고는, 바닥에 엉겨 붙듯이 늘어진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시야가 높아지자 살가죽에 닿던 가닐가닐한 느낌이 조금은 갈려 나갔다. 절대 이 벌레의 소굴에 다신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의 목에 팔을 단단히 둘렀다.

차무겸은 무게가 별로 나가지 않는 인형을 안은 것처럼 가뿐한 태도로 발을 옮겼다. 돌아선 그의 어깨 너머로 나를 덮치고, 짓뭉개고, 깨뜨렸던 짙은 밤이 자리해 있었다.

이상했다. 차무겸의 곁에 있을 때마다 눈앞이 착잡한 어두움으로 물들고는 했는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도움에 어둠 속을 탈출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그가 만든 어두움이고, 계략이자, 덫임을 아는데도, 마음속에 심어지는 이 안도감이 사고회로를 저 좋을 대로 뒤틀고 있었다.

그에게 안긴 채로 실내를 빠져나오고서야 내가 있던 곳이 다락방임을 깨달았다. 정결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 문이 서서히 닫히더니 이윽고 칠흑 같은 밤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침이 오지 않는 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뜨면 시종일관 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차무겸의 품속에서 맞이하는 바깥세상은 태양이 하늘 정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화창한 낮이었다.

사방으로 뚫린 창에서 스며들어오는 채광이 훌륭할 정도로 따사롭고 은은했다. 이전엔 나를 두고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꼴이 야속할 만큼 싫어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여전한 야속함과 그럼에도 깃드는 안도감 사이에서 감정이 완전히 길을 잃었다. 화를 내야 하는지, 서글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감정인지 모르겠다. 짓무르고 터진 속은 점점 고통에 무뎌지고 있었다.

차무겸은 나를 안고서 어딘가로 향했다. 물기가 어린 시야로 익숙하지 않은 집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지난날 머물던 저택보다도 더 층고가 높고 인테리어가 세련된 느낌이 강했다.

“아…!”

순간 차무겸이 나를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반사적으로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꽉 붙잡았다. 푹신한 감촉이지만 이마저도 나의 착각, 혹은 그의 술수일지 몰라 덜컥 겁을 먹었다. 나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던 차무겸이 곧 질겁으로 덮인 낯빛을 읽었는지 작게 웃었다. 묘하게 흡족해 보이는 입꼬리였다. 내가 겁을 먹은 게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그에게 의지하는 게 만족스러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야를 아득하게 흔드는 입술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차무겸이 내 뺨에 길게 입을 맞췄다. 꼭 달래려는 몸짓 같아서 한편으로 구역질이 났다.

먹이를 삼키려는 비단뱀처럼 내 몸 여기저기를 틀어쥐고 있던 차무겸의 손길이 멀어졌다. 나를 눕혀놓은 침대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그를 멀거니 응시할 때였다. 그의 고개가 모로 비틀리더니 곧 내 쪽으로 턱짓을 했다.

나는 뒤늦게야 조금 전 지나쳐 온 문턱에 선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차무겸의 명령을 따라 침대로 다가왔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헤드 쪽으로 더듬더듬 피했다.

“뭐, 뭐야….”

“말 잘 듣겠다고 했지?”

꼭 되짚어주는 듯한 어투였다.

차무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결박끈이 되어 나를 경직시켰다. 그사이 두 사람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발목이 붙잡히는 순간 본능적으로 비명이 터졌다. 몸이 뒤집어진 상태에서 티셔츠가 훌러덩 올라갔다. 무얼 하려는지 몰라도 나를 억압하는 힘은 희뿌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심신이 써늘하게 식어갔다.

희망을 품고 차무겸을 응시했으나 몇 걸음 더 물러난 그는 태연자약하게 침대 옆 소파에 앉을 뿐이었다.

“하, 하지 마, 싫어! 하지 마…!”

내게 그 어떤 짓도 할 수 없도록 마구 저항했다. 그러한 반항은 등줄기를 꾹 억누르는 억센 힘에 가로막혔다. 그럼에도 포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의 끈질긴 버둥질에 위로 올라타 제압하던 두 사람이 차무겸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담배를 꺼내 든 차무겸이 그것을 입에 물며 한쪽 눈을 샐그러뜨렸다.

“가만히 있어, 사은아.”

“차, 차무겸….”

“그러다가 살 찢어진다.”

“시, 싫어. 하지 마. 뭐, 뭐 하려는 건데. 나한테 뭐 하려고….”

“걱정하지 마. 내가 설마 너한테 위험한 짓을 하겠어?”

차무겸은 부들부들 떠는 나를 보며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황망함과 당혹감에 젖어 한 줄기의 희망만 찾던 마음이 그 얼굴을 보고 풀썩 꺾였다. 그렇게 당해놓고, 또다시 눈이 먼 희망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또렷하게 인지시키는 얼굴이었다.

환멸의 웅덩이가 발목까지 덮여 찰랑댔다.

어둠 속을 빠져나와 봤자 무엇 하나.

결국 펼쳐지는 건 또 다른 지옥일 뿐인데.

* * *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깬 건 처음이었다.

“으….”

기도를 멋대로 조였다가 푸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마가 끈적끈적했다. 손을 들어 매만지니 진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눈을 뜨니 침대에 엎드려 누운 자세였다. 또 어떻게 의식을 놓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기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다. 지금, 등줄기에 엄습하는 통증이 말도 못 하게 매서운 까닭이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차무겸이 내 뒤편에 누워 있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을 감은 그는 편안한 숨소리를 내쉬었다.

입술을 꾹 짓씹은 채로 그 얼굴을 응시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잘 모르는 구조인 탓에 화장실을 찾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다. 무엇보다 잠이 든 사이 누가 불을 붙이고 도망이라도 간 것처럼 찌르르하고 후끈한 등의 통증에 걸음을 제대로 내디디기도 버거웠다.

스위치를 터치하자 화장실의 조명이 쨍한 빛을 뿜어냈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얼마간 문턱에 서 있다가 겨우 안으로 들어섰다. 물때 하나 없이 깨끗한 거울 위로 얼굴이 비쳤다. 피죽도 못 먹은 양 창백한 꼴이었다.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걸치고 있던 얇은 가운 끈을 풀었다. 스르르 내려가는 감촉마저도 따끔거려서 혼났다.

“…이, 게….”

뭐야…?

당혹감에 혀가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눈이 의심스러웠다. 자꾸만 통증이 느껴지던 양 날갯죽지의 사이, 이전에는 없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순간, 기절 전 침대 위에서 결박당한 채 무언가를 가늠하듯 등줄기를 더듬거리던 손길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문신을 새기기 위해서였어?

부산스레 요동치는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부위의 글자를 훑으려고 노력했다. 한글이나 영어는 아니었다. 어떤 기하학적 무늬 같기도 하고, 도형 같기도 한 그것은 묘하게 눈에 익었다.

얼마간의 고민 끝에야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시에 범람한 기억에 무심코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스어로 쓰면 되게 길구나.’

내 마음속 사진처럼 남은 어느 휴양지의 기억. 그곳에서 보냈던 차무겸과의 시간. 그가 그리스어로 자신의 이름을 쓰는 걸 지켜보고 따라 써본 기억이 있었다. 꽤나 어려워서 두세 번을 쓰다가 관두었었다. 그때 나는 그리스어 아래로 해석처럼 늘어진 차무겸이라는 이름을 보며 말했었다.

‘네 이름은 되게 단단한 거 같아.’

‘단단?’

내가 선선한 타국의 바람을 맞으며 종이에 낙서를 끄적거리는 동안, 할 일을 마치고 핸드폰을 두드리던 차무겸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치는 시선 속 부딪치는 눈동자마저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느낌이 났다.

내 기억 안에서의 차무겸은 언제나 저랬다.

방벽이 빼곡히 둘러싸인 성채처럼 높다랗고 견고했다.

‘무겸. 뭐랄까,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잖아.’

차무겸은 제 이름을 읊는 내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거에 비해서 내 건 너무 연약한 느낌이 나. 사은. 안 그래? 손에 쥐고 힘을 주면 모래처럼 부서질 것만 같잖아.’

바위나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튼실한 느낌의 차무겸과 달리 내 것은 바람 한 번에도 이리저리 나부끼는 모래알, 혹은 민들레 홀씨 같기만 했다. 가끔 이름이 그 대상의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 의견에 지극히 동감했다. 차무겸과 달리 난 이름 따라 모래처럼 흩날리고, 작은 일에도 쉽게 물렁거렸으니까.

‘그래서 매번 네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어.’

‘마음에 들어?’

‘응?’

‘그럼 가져도 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차무겸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잘난 상판에서 감정만 쭉 빼낸 그 얼굴이 희한한 느낌을 피워냈다. 갑자기 공기가 뒤틀리는 듯 첨예해지는 분위기를 인지하고 나는 순간 내가 무언가 실수를 했나 했다. 그래서 ‘뭐야.’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자, 차무겸 역시도 언제 이상한 태세를 보였느냐는 듯 입꼬리를 슬슬 휘었다. 그러나 장난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한 번 더 똑똑히 말했었다.

‘네가 원하면 줄게.’

그때는 그저 장난처럼 건네는 말인 줄 알았다.

어쩌면 이런 의미였던 걸까?

머리끝까지 달하는 허황된 심경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

아래로 환한 불빛을 뿜어내던 화장실 조명이 뚝 꺼졌다.

삽시간 암흑이 비처럼 퍼부어졌다. 온몸이 얼어붙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똑. 어딘가에 맺힌지도 모르겠는 물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등골을 섬찟하게 울렸다.

나도 모르게 두 귀를 감싸 쥐었다. 다친 귀는 분명 이전보다 잘 들리지 않는데, 모순적이게도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는 신경증이 극대화됐다. 습관적으로 기도가 조여들어서 아무런 문제도 없던 호흡을 방해했다. 침실 전체가 훈훈해서 문을 살짝 열어둔 화장실도 그리 춥지 않았는데, 갑자기 온도가 뚝 꺾인 것처럼 맹렬한 추위가 엄습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벌려 억지로라도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이었다.

다시 불이 들어왔다. 사방이 환하게 트이는 감각에 막혔던 숨구멍이 트였다. 끼익. 거의 닫혀 있던 화장실 문이 열렸다.

“놀랐어?”

나처럼 가운을 걸친 차무겸이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지.”

전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표정. 내가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표정. 그러나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양성해내는 질 낮은 어둠이 머릿속에 또렷한 공포심을 각인시킨 탓에. 그에게 불만을 터뜨렸다가는 또다시 나를 짓누르는 밀실에 갇히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왜 깼어. 아… 등 아파서?”

차무겸이 퍽 가증스럽게 지껄이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깨어난 김에 보습제 좀 바르자. 잘 발라줘야 한다더라.”

그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이런 짓을 벌인 의도는 훤히 읽혔다. 그리 거창하게 여길 것도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저지른 일일 테니까.

등 뒤로 다가온 차무겸은 머리칼을 넘겨주고서 통증이 이는 부분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볼 수 없던 나와 달리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문신을 들여다보았다. 앞을 응시하는 나는 거울을 통해 그런 차무겸의 얼굴을 보았다. 서서히 지어지는 예쁜 미소를 보니 당장이라도 거울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읏….”

끈적한 점액질의 느낌이 후끈거리는 부분 위에 발라졌다. 행위 자체의 가혹함과 별개로 보습제를 발라주는 손길은 더없이 꼼꼼하고 상냥해서 괴리감이 일었다.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몸이 쉬지 않고 움찔거렸다. 세면대를 쥔 손이 쥐라도 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아직도 혈류를 타고 도는 성감이 남은 것처럼 오금에 절로 힘이 풀렸다.

“아직도 기운이 남았어? 이렇게 손만 대도 좋아?”

그런 나의 민감함을 알아챈 건지, 뒤편에서 비웃는 듯 가벼운 조소가 터져 나왔다.

흡, 하고 숨을 들이 삼켰다. 차무겸의 한 손이 허리를 감싸 안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르트고 까슬한 내 것과 달리 보들보들한 입술이 목덜미에 닿아 문질러졌다. 상체는 살짝 거리를 벌리고 있는 반면, 하체는 제법 가까이 맞붙었다. 엉덩이로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한동안 무리하면 안 된다니까 자극하지 마.”

그리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아랫도리를 비비적대는 게 파렴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면대를 붙잡은 손등의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차무겸은 이제 문신 위에 보습제를 치덕치덕 바르는 건 안중에도 없어진 사람처럼 더운 숨을 흩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자꾸 생각나.”

“…….”

“더 박아달라고 울면서 보채던 거.”

높다란 콧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함부로 갈라놓으며 귓바퀴에 문질러졌다. 가뜩이나 주체할 수 없는 몸, 예민한 구석만 쓱쓱 어루만지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등줄기 위로 불똥이 떨어지는 듯한 고통 역시 또렷이 잔재했다.

“존나 예뻤는데….”

아득한 감상이 머릿속에 검은 안개 같은 자괴감을 낳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음으로써 내가 처한 모든 것에서 달아나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이거 뭔지 알아?”

불현듯 날갯죽지 사이 글자를 덧그리는 손길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거울 위로 시선이 부딪쳤다.

“내 이름이야.”

“…….”

“네가 예뻐서 좋다고 했었잖아. 기억 안 나?”

차무겸이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에 묻은 크림색 보습제가 거울 위에서 글씨의 형상으로 갈음됐다.

Τ σ α μ ο υ γ κ ι έ ο μ

매끄러운 유리판 위로 낯선 외국어가 한 자 한 자 새겨졌다. …아마도 내가 위치 때문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문신의 형태일.

가벼이 손을 놀린 차무겸이 다시 도드라진 척추뼈 부근으로 눈을 내렸다. 아예 낙인이라도 찍고 싶은 것처럼 손끝이 계속해서 문신을 덧그렸다.

“내 등에도 있어. 나는 네 이름으로 새겼거든.”

그가 불쑥 꺼낸 말에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깨어났을 때 왜인지 상의를 벗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럼 그는 이런 잔악한 짓을 벌이려는 생각을 그때부터 품고 있었던 걸까. 심경이 형언할 수 없이 번잡해지는 와중에도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통증에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후끈거리면서도 그 밑으로 층층이 깔린 가려움 때문에 이 역시도 고통과 쾌락이 혼탁하게 뒤엉켜 있었다.

희망과 절망, 고통과 쾌락. 차무겸은 늘 내게 흑백논리와 같은 극단적인 인상만 남겼다.

“무슨 생각 해?”

욕실등의 빛이 산란하게 번지는 거울 위, 차무겸의 두 눈이 내게 콕 박혀 있었다.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내부에 서슬 퍼런 기색이 은은하게 떠도는 눈빛.

“내가 맞춰볼까.”

차무겸의 입술이 나의 귓바퀴를 가벼이 물었다가 떨어졌다.

“뒈진 안진권 생각?”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색됐다.

고집스레 거울만 응시하던 고개가 그를 향해 삐걱삐걱 돌아갔다. 차무겸은 이런 내 행동을 예상한 것처럼, 이번엔 거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어?”

하얀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표백된 머릿속에는 조금 전 내게 홀연히 던져진 한마디만이 메아리쳤다.

“안진권이… 죽었다고?”

거실 장판 위로 퍼지던 농도 짙은 핏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사건은 나에게 있어서 끔찍하게 인식되었으나, 차무겸과 보낸 며칠간의 소요로 완전히 흘려보낸 채였다. 기실 누군가를 생각할 만큼 속 편한 처지가 아니지 않았던가.

“거짓말….”

차무겸이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일이 결국, 내가 가장 우려하던 부분으로 빠졌다는 게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아주 재미없는,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기분이 나빠지는 농담을 들은 것만 같았다. 내포된 근거 없는 믿음이 자각자각 바스러지며 속이 건조하게 말랐다. 어느새 싸하게 내려앉은 오한에 문신의 작열감은 흐지부지 흐려질 정도였다.

“거짓말?”

차무겸은 외려 나의 반응을 꾸짖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때문에 죽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가 툭 던진 한마디에 눈길이 부산스레 치들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그게 어떻게….”

내 탓이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네가 홍가연 집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 말이 비수처럼 속을 냉정하게 찌르고 들었다.

아…. 머리가 멍해졌다.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안진권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분명 차무겸이었다. 정도 이상의 폭력을 행사한 것도, 잔혹한 피를 비치게 만든 것도 그니까. 맹세컨대 나는 안진권에게서 도망가기 급급하기만 했다.

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게 이성을 기준으로 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차무겸의 말대로 모든 인과과정을 두고 보자면 나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는 셈이니까. 내가 감옥 같던 침실을 빠져나가 가연이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니, 아닐 테다.

내가 찾아가지만 않았다면,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로 차무겸이 주장하는 죄악에는 나의 책임 역시 내포되어 있었다. 안진권이 묵사발이 됐던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기억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죽인 거야.”

“……”

“안진권, 너 때문에 죽은 거라고.”

욕실 옷걸이에 걸린 가운을 집어 든 그가 내 어깨 위로 덮어주며 쐐기를 박았다. 허망함에 좀처럼 이성을 찾지 못하는 나와 달리 차무겸은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으로 가운의 끈을 다정히 묶어주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끈을 묶는 걸 마친 손이 위로 들려져 턱을 그러쥐었다.

“너 나한테서 벗어나면 인생 더 꼬이기만 할 거라고.”

마치 네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듯, 거울을 통해 코앞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안진권도 이거에 넘어갔지?”

차무겸의 말도 귀담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이 물큰하게 차올랐다. 몸만 여기에 있고 영혼은 사건이 벌어졌던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코가 아플 만큼 풍기는 피 냄새에 비리게 절여질 것만 같던 그때로.

“여친도 있다는 새끼가…. 걸레인가. 나처럼 정조를 지킬 줄 몰라.”

여친.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빤했다.

“가연이는…?”

속삭여 나오는 소리가 듣기 흉할 만치 녹슨 쇳소리 같았다. 내가 듣기에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인데 차무겸은 조금도 거북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허리를 감싸 쥔 채로 내 목덜미에 코를 문지를 뿐이었다.

안진권이 시체처럼 축 쓰러졌을 때도 걱정이 된 건 그가 아닌 가연이었다. 조금의 망설임 없이 나를 성심성의껏 도와줬던 그녀를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차무겸을 말리기까지 하지 않았나.

결론적으로 안진권이 숨을 거뒀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됐을 가연이의 마음은….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생각을 내 몫으로 넘기는 태도가 무책임하고 잔혹했다.

언제나 비운을 거닐어온 만큼, 내 사고회로는 늘 한계를 넘어서 최악까지 곧잘 도달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만 놔두면 알아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성정. 남들은 고작 한 계단을 내려갈 때에 나는 열 계단씩 훅훅 주저앉았다. 그런 내 고질적인 습성을 잘 알기에 이런 방식을 써먹는 것일 게 뻔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런 상태로는 그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 사은아.”

그가 내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고 느리게 비볐다.

“그러다가 다음이 홍가연이 되면 어쩌려고 그래….”

그 말에 몸을 울리는 떨림이 조금 더 심해졌다. 차무겸의 이 말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경고와도 같았다.

“내가 또 눈이 돌아서 네 소중한 친구까지 그렇게 만들면 안 되잖아, 그렇지?”

이번에는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사람을 그런 무참한 꼴로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살 떨리는 협박. 내 두 눈으로 보았던 참혹상의 대상이 가연이가 될 것을 상상해보니 쉬이 간과할 수 없는 공포심이 몰아쳤다. 이목구비가 엉망으로 터져서 피를 줄줄 쏟던 그 얼굴이 가연이가 된다면.

그의 성미가 아무리 괴팍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여자한테까지 그리 모질게 굴까, 싶은 의심도 잠시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거, 이거 차무겸이 그런 거야.’

혹독한 겨우내, 모든 게 꽁꽁 얼어붙은 암영 속에서의 기억이 반증처럼 살아났다.

‘너 걔랑 같이 서울 갈 거라면서?’

‘…….’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언제나 나를 괴롭히기만 하던 전예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매섭게 감돌았다. 그때는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며 넘겼던 일이 지금에 와서야 고약한 현실성을 갖추었다. 차무겸은 상대가 누구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슴지 않고 폭력적으로 굴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정말, 가연이 역시도….

“그러니까, 사은아.”

좀 전까지 공허한 것처럼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이 이제는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집념에 무거워졌다. 온갖 잡다한 게 뒤엉키는데 명료한 게 하나도 없어서 하릴없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애먼 짓으로 다른 사람 엿 먹이지 말고 나한테 어떻게 빌붙을지 궁리나 해.”

발목이 무거워졌다. 힐끗 내려다본 시야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발 앞으로 뻗기가 벅찰 만큼 무거워진 채였다. 그건 마음의 무게였다. 발목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안진권에게 행해졌고 이후 가연이에게 향할지도 모르는 차무겸의 난폭함이 나의 발목을 완전히 옭아맸다.

“헛짓거리 좀 작작하라고.”

사활을 건 나의 도주는 차무겸에게 고작 그런 의미밖에 되지 않은 거다. 헛짓거리. 기어이 하느니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행동. 괜히 골치 아픈 일만 벌여 시간을 버리고 몸을 버린, 바보 같은 짓.

거울을 보았다.

나의 표정은 이상했다. 눈은 울 것 같고 입술은 비틀려 있었다. 모순적이고 기괴하다. 내면에 소용돌이가 이는 것처럼, 감정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의 전경은 하얗고 깔끔한데 이상하게도 눈앞에 쨍한 핏빛이 자꾸만 일렁였다. 잠시 후 무언가가 두 눈을 가렸다. 차무겸의 손이었다. 그것에 가려진 눈앞으로 깜깜한 암흑이 드리웠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표하듯 여전히 거북하고 불편한 색깔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어둠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었다.

자꾸만 눈앞을 벌겋게 물들이는 비린 핏빛보다야 새까만 어둠이 낫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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