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6화 (16/24)
  • 16장.

    당연하게도 가연이는 나와 달리 성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하는 중이었다. 내가 비굴하게 혹은 비참하게 차무겸의 아래에서 설설 기는 사이 그녀는 이미 교생 실습까지 마친 상태였다.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인 길을 완벽하게 걸어 나가고 있었고, 심지어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연이는 최대한 나를 배려했다. 내가 의지와 상관없이 자퇴 처리가 된 걸 알고서 되도록 학교생활과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의 부탁에 따라 남자친구인 안진권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나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

    또한 지난날 내가 꺼낸 속사정에 그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간간이 털어놓는 토로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평소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해주는 게 고마웠다. 어떠한 반응을 보였다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쪽으로 생각이 또다시 뭉게뭉게 퍼질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상황, 많은 생각은 독이었다.

    가연이가 외출한 사이 나는 집안일을 하고는 했다. 서울로 올라온 후부터는 가정부가 늘 맡아주었으나 암영에서 혼자 산 기억이 있는 덕분인지 퍽 어렵진 않았다. 가연이는 굳이 그럴 것 없다고 했으나 신세를 지는 입장에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런 것으로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시계를 팔고 남은 돈 역시도 아주 소량만 남기고 전부 가연이에게 넘겼다. 가연이는 한사코 사양했지만, 내가 머무르는 동안은 그걸로라도 월세를 보탰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집 정리가 얼추 끝나면 가연이가 쓰다 남은 영어 문제집으로 예습과 복습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차무겸에게서 벗어나며 가장 시급해진 건 돈이었다. 차무겸의 시계를 팔아 어쩌다가 생긴 돈 같은 게 아니라 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가연이는 대학 입시 과외를 맡아보는 건 어떠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서울로 올라오고부터 공부에 전념한 덕분인지 학교 성적은 4점대를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걸 기억하고 추천하는 모양이었다.

    가연이는 ‘요즈음 대학 입시로 과외하는 애들도 많으니까 한번 동기들 통해서 알아볼게.’ 하고 당차게 말해주었다. 물론 지금 당장 과외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차무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가능한 일일 테니까. 지금 섣부르게 구했다가 그에게 걸리게 되면, 그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후에 차무겸과 완전히 연이 끊어질 때를 대비할 겸, 미리미리 공부를 해두는 것이었다.

    “사은아, 나 왔어.”

    석양이 지고 하늘이 적당히 어두워졌다 싶을 즈음 가연이가 귀가했다.

    “이거.”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은 가연이가 내게 까만 봉지를 쓰윽 내밀었다. 안을 들여다본 나는 멈칫했다. 내가 부탁했던 피임약과 임신 테스트기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평온하게 흘러가던 생활이 별안간 훅 어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침체된 낯으로 봉지 안을 들여다보는 나를 향해 가연이가 물었다.

    “지금 해볼 거야?”

    “…그래야지.”

    이러한 속사정까지 털어놓는 건 너무나 곤욕스럽고 힘들었다. 감금을 당한 채 차무겸과 관계를 가졌다면, 그게 내가 원해서가 아닌 일방적 행위였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가연이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니만큼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나마 털어놓을 때 가연이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었다. 이것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 말문이 막힌 반응에 가까워 보였다.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가연이가 나를 덥석 붙잡았다.

    “사은아.”

    “응.”

    “만약, 정말로 만약에… 생겼으면 어떻게 할 거야?”

    가정을 반복해서 두 번이나 붙인 질문인데도 숨이 턱 막혔다. 아주 깊숙한 동굴 속을 보는 것처럼 막막한 눈으로 테스트기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 나를 향한 가연이의 다갈색 눈동자는 염려로 물들어 있었다.

    “그땐… 병원을 찾아야겠지.”

    “하지만 병원은….”

    가연이는 피임약과 임신 테스트기 이야기를 꺼내는 나에게 처음에는 병원을 권유했었다. 그러나 병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나의 호불호를 떠나서 기록이 선명하게 남기 때문이었다. 차무겸이 아직까지 나를 찾지 못한 이유야 뻔했다. 내가 그 어디에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터. 물론 차무겸의 시계이기 때문에 명품 중고 매장까지는 따라잡았을지언정 이후의 과정은 추적이 불가능한 현금만 사용했다. 그리고 이 집에 도착한 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병원에 가게 되면 그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참 입술만 달싹거리던 가연이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나 단호히 굴던 내가 결국 병원을 운운하는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차무겸에게 위치가 발각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기를 내 배 속에 놔둘 생각이 없다는 살벌한 의지였다.

    “…그래.”

    “…….”

    “나도 같이 가줄게.”

    그리 말하는 가연이에게 희미하게 웃어주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박스에 써진 사용법을 그대로 따라 한 뒤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거울을 응시하는 시선이 멍했다. 가연이에게는 담담한 척 말하고 들어왔지만 사실은, 못 견디게 불안했다.

    진짜 애가 생겼으면 어떡하지?

    지금 나의 상황, 낙태, 차무겸에게 들킬 확률, 이후 나의 불안정한 삶. 고작 하나의 가정으로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꼬여 들었다. 그만큼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파리하게 질린 낯빛을 알아채고 느리게 마른세수를 했다. 피로도가 어찌나 상당한지 일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욕실이 지나치게 답답하게 다가왔다. 폐쇄성은 이제 발작처럼 제멋대로 도지고는 했다.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적당히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서 천천히 테스트기를 쥐었다. 눈앞으로 가져오는 그 짧은 시간에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느린 움직임을 따라 온갖 부정적인 상념들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이윽고 용기를 내 눈을 떴다.

    “…아.”

    한 줄이었다.

    입술을 틀어막았다. 테스트기를 쥔 채로 비틀거려 벽에 기댔다. 안도감에 취한 두 눈이 몇 번이고 깜박이며 그것을 재차 담았다. 얇은 칼날이 되어 속을 저미던 불안감이 일말 정도는 사그라들었다. 하나로는 확실시할 수 없어 내일이나 모레쯤 한 번 더 시도해 봐야겠지만, 일단 우선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나는 테스트기를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손을 씻었다.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시원한 물을 따라서, 덕지덕지 달라붙은 갖은 생각들도 털어냈다. 눈꺼풀 아래에 검질기게 눌어붙어 있던 두통이 약간 가시는 듯했다.

    손을 수건에 닦고 화장실 문을 연 나는 바로 앞에 선 가연이를 보고 놀라 멈칫했다.

    “어떻게 됐어?”

    발을 동동 구르던 가연이가 냉큼 물었다. 나는 그 진심 어린 태도에 살짝 웃으며 답했다.

    “한 줄이야.”

    “아…!”

    가연이가 실로 다행이라는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른 읊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이나 모레쯤 하나 더 해 봐. 그러려고 두 개 사 온 거니까.”

    “고마워, 가연아.”

    가연이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반짝거리는 화면을 확인한 가연이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의도치 않게 보게 된 액정 속 이름은 안진권이었다. 가연이는 내게 ‘잠깐만.’ 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응. 잘 다녀왔어? 나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집에 왔어. 아니, 그냥. 응, 곧 먹으려고. …어? 아냐. 뭐? 벌써? 왜?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가연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알겠어. 지금 나갈게. 아냐, 내가 나갈 테니까 기다려. 응. 응.”

    황급히 전화를 끊은 가연이가 한쪽에 벗어둔 외투를 입었다. 그 허둥지둥하는 동선을 눈으로 좇는 날 알아챈 듯 가연이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

    “진권이가 집 앞으로 왔다고 해서. 올라오겠다길래 일단 기다리라고 했어. 보내고 올게.”

    가연이는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집을 빠져나갔다. 닫힌 문을 가만 응시하던 나는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이렇듯 나를 숨겨주는 대가로 가연이가 피해를 입거나 애먼 일로 고생을 할 때마다 심경이 말도 못 하게 복잡해졌다. 이전이라면 안진권을 아무런 무리 없이 집 안으로 들였을 테니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 완전히 까무잡잡하게 색칠된 하늘을 따라 노란빛을 뿜어내는 가로등 아래, 우뚝 선 남자가 있었다. 잠시 후 공동현관을 빠져나온 가연이가 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안진권은 자연스럽게 가연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짜고짜 키스를 하려는 그를 밀어내며 가연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좀 높아지고 있는지 빌라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두 사람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안진권은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짝다리를 짚고 있던 몸이 살짝 휘청대는 걸 보니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라고 해도 광대 부근이 비정상적으로 불그스름했다.

    그러던 차였다.

    안진권이 대뜸 고개를 훅 쳐들었다.

    커튼 사이로 둘의 동향을 살펴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불쾌한 심장 박동이 전신을 감쌌다. 잠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 있다가 얇은 커튼을 실금만큼 벌렸다.

    내가 서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안진권은 다시 고개를 내리고 가연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손까지 휘저어가며 그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던 가연이가 이마를 짚었다. 안진권의 표정 역시 만만치 않게 어두웠다. 척 보기에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나의 짐작대로 오래 지나지 않아 안진권은 그녀를 두고 등을 홱 돌렸다. 가연이는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다가 공동현관으로 들어섰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소파에 앉았다.

    꺼진 티브이 화면만 눈에 담고 있자니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으로 들어선 가연이가 외투를 벗으며 웃어 보였다.

    “미안. 놀랐지?”

    나를 숨겨주려고 그를 거부하다가 상황이 틀어진 것 같은데도 가연이는 내 상태를 먼저 헤아려 주었다. 그게 더 마음을 미어지게 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꽉 옭아맸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기분이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가끔 저렇게 연락도 안 하고 찾아오더라고.”

    “…미안해. 나만 아니었으면 이럴 일도 없을 텐데.”

    나의 얼굴에 켜켜이 묻어나는 자책의 기운을 읽은 걸까, 주방 쪽으로 가려던 가연이가 발을 틀어 내게로 다가왔다.

    “사은아. 너 만약에 반대 입장이었으면 나 안 도와줬을 거야?”

    그 말에 순간 머릿속으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꿈에서도 사치 같아서 차마 바라지 못한 평범한 가정을 가진 나, 그리고 위급한 일로 그런 나에게 도움을 청한 가연이. 지금 가연이의 마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라도 기꺼이 손을 뻗었을 것 같다. 그저 짐작만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는 적어도 3년이라는 시간이 쌓여 있으니까.

    내 표정만 봐도 답을 알겠는지 가연이가 씩 웃었다.

    “그니까 그만 좀 미안해해.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라면 끓여 먹을까?”

    홀가분한 말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고 위로를 해주는 듯했다. 코끝이 찡해졌다. 침실에 갇히며 내도록 후회나 한탄만 가득했었다. 나를 향한 차무겸의 기이한 집착이 기어이 외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서울로 괜히 왔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내가 겪어온 모든 시간이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지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가연이의 태도가 그 생각을 정정했다.

    마냥 허무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고.

    가연이의 뒤를 따라가며 문득 생각이 났다.

    우리의 첫 만남.

    내가 국립대로 진학하게 된 건, 서울로 올라오고서 처음으로 차무겸과 떨어진 첫걸음이었다.

    ‘안녕. 너도 영어교육과야?’

    아는 얼굴 하나 없어서 입학식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는데 과 팻말을 보고 다가온 누군가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서서 말을 걸었다. 그게 가연이었다.

    ‘혼자라서 뻘쭘한데 혹시 옆에 앉아도 돼?’

    ‘응.’

    ‘나이가 어떻게 돼? 내가 재수를 해서….’

    ‘어? 나돈데.’

    ‘진짜? 잘됐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러면서 사르르 웃는 태도는 내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살가움이었다. 아버지의 죄로 비난을 받거나, 차무겸의 비이성적인 집착과 과보호 속에서 그 누구 하나 편하게 만나본 적 없는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숨통이었다.

    그래서일까, 가연이랑 있으면 탁한 공기가 정화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당시 나는 주머니에서 징징 울리는 차무겸의 문자마저 뒤로한 채 가연이와의 대화에 몰두했었다.

    “…고마워.”

    그날을 복기하며 사죄 대신 감사를 전하자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던 가연이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날, 입학식에서 본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미소였다. 비척대던 마음에 싱그러운 안정의 싹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 * *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직선처럼 이어졌다.

    물론 자잘자잘한 변화는 있었다.

    언제 차무겸이 이 집으로 쳐들어와 나를 끌고 갈지 모른다는 강박증에 잠조차 설치던 상태가 많이 완화되었다. 이제 밤중에 갑자기 벌떡벌떡 깨어나는 일 없이 온전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가연이의 막학기 끝자락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막학기가 끝나면 진정한 지옥의 시작이라며 앓는 소리를 하는 푸념의 빈도 역시 늘었다. 그리고 차무겸이 빠진 나의 삶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공유했다.

    ‘핸드폰도 얼른 사야 할 텐데.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너무 불편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연락할 수가 없잖아.’

    가연이는 개중에서도 연락망의 부재를 가장 시급하게 여겼다. 나 역시도 동의했다. 차무겸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핸드폰을 가장 먼저 마련해야겠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 다달이 나오는 핸드폰 요금은 공짜가 아니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 좀 모아둘걸, 싶었으나 동시에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인지 안다. 차무겸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죽어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실제로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가 들켜 한바탕 난리가 난 전적이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

    ‘…….’

    ‘이딴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고.’

    그때는 코앞에서 마주한 차무겸의 싸늘한 얼굴이 꼭 세상이 무너질 일처럼 다가왔다. 나의 세상에서 그건 쉽게 간과하고 넘길 수 없는 위압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카페 아르바이트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곧장 관두었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며 폭언을 던지는 사장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를 몇 번이고 전했다. 그날, 차무겸은 제 말을 잘 들은 보상이라는 것처럼 새로운 카드를 내밀었었다.

    “휴우….”

    거북한 과거의 파편을 애써 밀어내고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으로서 급한 건 돈을 버는 일이다. 차무겸과 함께 있을 때는 고민해본 적조차 없는 것들이 지금의 내게는 하나하나 골치 아픈 문젯거리로 다가왔다. 그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했는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동등하게 적용하는 게 이 자유로부터 얻어지는 달콤함이었다. 차무겸과의 관계는 이다지도 반비례적이었다. 자유를 얻으면 물질을 잃고, 물질을 얻으면 자유를 잃게 된다.

    이 불안정한 달콤함의 끝을 헤아리고 있다 보면, 불안증은 시시때때로 도졌다.

    차무겸이 이렇게나 오래도록 나를 못 찾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흔적을 최대한으로 남기지 않았다지만, 그의 집요함을 보면 나의 족적을 뒤져서라도 현재의 위치를 알아낼 것만 같았으니까. 그 불안증이 도질 때마다 가연이에게 질문했다. 혹시 요즈음 주변에서 이상한 낌새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느냐고.

    ‘딱히 잘 모르겠던데….’

    ‘…….’

    ‘혹시 차무겸이 널 포기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아, 걔 엄청 부잣집이랬지. 그럼 그, 자기가 벌인 일 관련해서 입을 막아두기 위해서라도 널 찾으려나?’

    오리무중인 차무겸의 동태가 가장 큰 문제였다.

    가연이의 짐작대로 그가 나를 찾는 걸 포기한 거라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지가 않은데.

    암영의 끝자락에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발현하고 서울로 올라오고서는 숨기는 법조차 없던 그 역겨운 집착증이 한 번에 나을 리가. 차무겸이 몇 년간 봐온 나를 잘 아는 만큼, 나 역시 그를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요즈음 자꾸 불쑥불쑥 떠올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이 있었다.

    ‘너 나한테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진짜….’

    ‘…….’

    ‘인생 좆같아질걸?’

    그런 말은 대체 왜 한 걸까?

    차무겸과 함께 있는 게 가장 버티기 힘든 일이던 나인데, 대체 왜 그를 벗어나면 더 힘들어질 거라는 저주 같은 말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생각이 또다시 곤죽처럼 늘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리모컨이 시야에 들었다. 이 집에 와서 한 번도 티브이를 보지 않았다. 의식적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이기도 했다. 침실에 갇혀 티브이를 켜놓고 하릴없이 흘려보낸 그 시체 같던 시간이 떠오를 것 같아서.

    하지만 그게 아주 우스운 짓이라는 깨달음은 불시에 들이닥쳤다. 최근의 차무겸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심리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 모르는데.

    나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하나의 점처럼 가운데로 빛을 쭉 빨아들이던 티브이가 번쩍 커졌다. 시끌벅적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을 조작하여 뉴스 화면을 틀었다.

    ‘드디어 국내 복합관광단지가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최소 내후년 8월 완공을 목표로….’

    익숙한 화젯거리가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나의 눈동자가 차츰 생기를 잃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창백한 색깔의 화면이 여러 차례 전환되었다. 요 근래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대규모 관광 단지 예상 완공 모형도가 지나가기도 했고, 이제 막 착공에 들어간 공사 현장의 사진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가다가.

    차무겸이 나왔다.

    지난날처럼 제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일순 머릿속이 지지직, 끓는 라디오처럼 뿌옇게 변한 건 그에게서 이전과 전혀 달라진 점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였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재벌가 자제의 자태였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사라지기 전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여전히 쉽게 여길 수 없을 만큼 이성적이고, 어쩌면 그 정도를 넘어 냉소적으로 보일 만큼 차분하고 단정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방황하듯 흔들렸다. 스치듯 확인한 현장 날짜는 분명히 최근이었다.

    그러니까 저 티브이 속의 차무겸도 요즈음의 시간을 사는 그겠지.

    “…….”

    정신이 멍해졌다.

    예상하던 게 완전히 빗나간 일을 겪은 사람처럼.

    그러니까, 나는, 대체 왜 이런 기분이…. 하나로 꼬집을 수가 없을 만큼 복잡미묘했다. 조금의 타격도 없이 의젓한 차무겸은 그의 그늘에 기생하던 나라는 존재를 빠르게 지워내 버렸다. 저 옆에 내가 붙어 있던 시간 자체가 허황된 꿈 같았다.

    그건 정말 이대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서늘하게 식는 것만 같은 감각을 동시에 선사했다.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개입하여 나의 자유를 틀어쥐고 일상을 엉망으로 부서뜨리지 않을 듯하여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그 뒤로 따라붙는, 잿빛 같은 이 씁쓸함은 대체 무엇인지.

    황급히 티브이를 껐다.

    화면은 다시 까맣게 암전됐지만 차무겸의 잔상은 여전히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질기게도 어른거렸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을 띤 얼굴이 거뭇한 화면 위로 반사됐다.

    ‘질렸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만 군데로 뇌 속을 헤집고 다니던 생각이 별안간 그것으로 꽂혀 들었다.

    의문은 고작 일각 만에 확신으로 변했다.

    ‘이번에야말로 질린 거야.’

    지원이라는 지원은 다 받아놓고 그의 뜻에 반하여 달아나기를 택한 나에게서, 제대로 싫증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우려와 달리 차무겸은 진작 나를 놓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가연이의 집에 숨어든 몇 주간의 숨 막히는 추격전은 오로지 나 홀로 끌어안고 있던 두려움이었을지도….

    “핸드폰, 사도 되겠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혼잣말이 음산하게 퍼졌다.

    “아르바이트도 구해야지.”

    내 인생에서 차무겸만 빠진다면 행하려고 하던 것들을 입 밖으로 줄줄 나열했다. 먼저 돈을 벌어서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고서 자퇴 처리된 학교에 복구 방안이 있는지 알아보고 안 되면 다시 진학할 방법도 찾아야지. 굳이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영어교육과면 된다. 이후로 공부도 다시 시작하고, 임용고시도 보고….

    상상만으로도 벅찬 가정을 늘어놓았지만 머릿속을 에워싼 안개는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다. 톡 쏘는 듯 매캐한 느낌을 자아내는 안개였다.

    그렇게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이 든 건 도어 록을 누르는 전자음이 들릴 즈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에라도 신경을 돌려야만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건, 문을 열고 들어선 가연이가 비틀대며 내게 푹 안겼을 때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사은아아.”

    가연이에게서 풍기는 진한 알코올 향이 콧속을 아프게 찔렀다.

    “술 마셨어?”

    “으응. 미안, 내가 너무 늦게 왔지.”

    “아냐. 들어와.”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가연이를 붙잡고서 힘겹게 신발을 벗겨주었다. 연신 휘청대는 가연이를 간신히 식탁 의자에 앉혀두고서 물을 한 잔 떠 왔다. 사막을 횡단한 사람처럼 가연이는 아슬아슬하게 차 있던 물을 한입에 다 비웠다. 컵에서 입을 떼고 하아, 하고 터뜨리는 숨소리가 마치 속 깊은 곳에서 끓어 올린 듯 무겁고 짙었다. 쾌활하던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두침침한 구석이 엿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좀….”

    가연이는 머리가 아픈지 이따금 이마를 매만졌다. 혹시 목이 더 마를지도 몰라서 다시 물을 떠 오던 차였다.

    “진권이랑 싸웠거든. 속상해서 그랬어.”

    “아….”

    “실은 저번에 집 앞에 찾아왔을 때 좀 다퉈서 줄곧 연락을 안 하고 있었는데… 계속 이럴 수는 없으니까 오늘 자존심 죽이고 내가 먼저 연락했단 말이야. 근데 글쎄, 웬 여자가 받는 거 있지.”

    다시금 물을 채운 컵을 가연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가연이는 이번엔 컵에 손을 대는 대신 침울한 낯으로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머지않아 고개를 쓱 들었을 때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너도 나한테 차무겸 얘기 해줬으니까, 나도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뭔데?”

    “자존심 상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안진권 말이야, 나랑 사귀는 동안 바람 열 번도 넘게 피웠다.”

    가연이의 입가에 바스러질 것만 같은 실소가 걸렸다. 안진권의 실책을 꾸짖는 책망과 자신을 향한 자조가 반반씩 섞인 듯한 냉소였다.

    “나랑 만난 게 3년이야. 근데 그동안 바람만 열 번을 넘게 피웠다는 거지…. 심지어 한 번은 아침에 걔 깨워주러 몰래 집으로 찾아갔다가 침대에서 여자가 나오는 바람에 들켰어.”

    “…….”

    “그때는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되게 사람이 비참해지더라고.”

    이 속사정에 그리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굴 수 있는 건 처음 만났을 때 안진권에게서 느낀 날티 나는 인상이, 바르고 옳은 행색보다야 가연이가 끄집어놓는 망나니 같은 행색과 더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차무겸과 함께했던 연회장에서의 일이었다. 그때, 안진권에게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 아직까지도 확실한 건 하나 없지만 나는 그 여자가 안진권의 혈연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곳이 가연이가 올 만한 자리가 아님을 알고 데려온 여자인 거겠지. 개새끼.

    “근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

    “…….”

    “나야, 내가 제일 이상해.”

    “…….”

    “걔를 도저히 놓을 자신이 없는 내가….”

    가연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서 제 앞에 놓인 컵의 둥근 표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냉수로부터 생긴 물기가 물방울이 되었다. 그것은 컵의 겉면을 적시고 가연이의 손가락까지 타고 흘러갔다. 꼭 그녀를 대신하여 하강하는 눈물 같았다.

    “그날, 침실에서 웬 여자가 알몸으로 나오는 거 보니까 정신이 확 깨더라. 누가 나한테 찬물이라도 부은 것처럼.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쟤랑 대체 왜 계속 이러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때는 각오가 좀 섰었어. 헤어져야지. 저런 놈인 거 알면서 만나는 거 이제 정말 그만둬야지, 얼마나 한심한 짓이야… 했는데.”

    물기가 짙게 묻어난 가연이의 손끝이 애처로이 번들거렸다. 가연이는 그것을 닦듯 손가락으로 문질러 비비며 낮게 속삭였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하니까 또 맘이 흔들리더라.”

    “…….”

    “그런 거 보면 나도 진짜 답 없는 거 같아.”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태도에 그간의 맘고생이 켜켜이 묻어났다.

    안진권이 가연이의 속을 자주 썩이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토록 심각하고 역겨운 수준인 줄은 몰랐다. 단지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거나 제멋대로 약속을 취소하는 정도에 국한하는 줄 알았는데…. 꼭꼭 숨기던 속사정을 알게 되니 그간 그녀의 연애사도 만만치 않게 다사다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에 저조차 놀아나는 것만 같은 상황은 짐작만으로도 무척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정말로 걔를 많이 좋아한다든지….”

    바깥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을 떠올리게 할 만큼 씁쓸한 어조였다. 사랑보다는 고단함의 감정과 더 잘 어울렸다.

    “…안진권이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신입생 때 애들이 같이 클럽 가자고 했다가… 아, 사은이 너는 그때 집에 일이 있다고 일찍 갔을걸.”

    언제를 일컫는지 몰라도 분명 그랬을 거다. 나에게 클럽이란 차무겸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가 아니고서야 걸음 할 일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나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차무겸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을 것 역시도 뻔하고 말이다. 애꿎은 일을 만들어 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드느니, 적당히 나 홀로 현실과 타협을 보았을 테다.

    “어쩌다가 테이블을 합석하게 되면서 처음 만났는데… 딱 보니까 쟤는 사귀면 고생 꽤나 하겠다 싶었어. 왠지 알아? 어쩌다가 이상형 얘기가 나왔는데 그러더라고. 자기 이상형은 처음 만난 여자래.”

    가연이는 아주 우스운 코미디 프로라도 보는 것처럼 큭큭거렸다.

    “진짜 어이없지 않아? 근데 대체 왜 그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어. 나도 철이 덜 들었던 건지…. 머리로는 충분히 쟨 절대 아니라고 인지하고 있었는데… 걔가 번호 달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주고 있더라. 그 뒤로 몇 번 만나고 사귀기 시작한 후로는 언제나 이랬어.”

    “…….”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말걸.”

    바닥을 기는 후회가 나의 속을 채운 공허한 울림과 유사했다.

    나 역시도 침실에 갇힌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무겸을 따라 서울로 오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뼈아픈 현실의 처절함을 조금 더 깊게 만들 뿐이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가연이의 심정이 조금쯤 이해가 됐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을 테다. 후회는 늘 그랬다. 손을 뻗어서 가연이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멍하니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린 그녀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네가 이런 위로를 해주니 나도 못다 한 이야기를 한 자락 더 꺼내겠다는 듯이.

    “저번에 진권이가 우리 술자리에 왔었잖아. 사실 그것도 엄청 망설이다가 부른 거야. 너무 추하고 꼴불견이라 말하기 싫었는데… 너랑 만나지 않았으면 했어.”

    가벼이 움직이던 내 손이 우뚝 멎었다.

    “진권이가… 너한테 관심 보일 것 같아서.”

    “…….”

    “너랑은 정말 그런 식으로 틀어지지 않기를 원했거든.”

    조금 전 안진권이 바람을 피웠다는 이야기보다 더 망설이다가 꺼냈다는 게 여실히 와닿았다. 그만큼 숨기고 싶었던 깊숙한 의식 밑바닥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끄집어낸 건, 그만큼 나와의 유대가 깊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끝내 한마디를 내놓았다.

    “나는 늘 네가 아깝다고 생각했어.”

    “…….”

    “걔 실제로 만나기 전에도 그랬고, 만난 후로도.”

    가연이는 그 말에 눈을 깜박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갈 것만 같은 그 미소를 보며, 나는 못다 한 속엣말의 한 꺼풀을 기도 끝으로 밀어냈다.

    “…좋은 사람 만나, 가연아.”

    네가 내게 그런 사람이니까, 너 역시 그랬으면 좋겠어.

    이런 내 진심을 알아본 듯 가연이의 웃음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오늘 나에게 털어놓은 속사정이 단순히 취기가 부추긴 용기라 할지라도, 지금 전하는 이 말만큼은 기억하기를 바랐다. 가연이는 내게 있어서 충분히 그래야 할 사람이었다.

    두통이 가시지 않는지 끙끙대던 그녀는 식탁 위로 엎드렸다. 차가운 유리판에 이마를 대며 가연이는 한탄 조로 읊조렸다.

    “오늘 이 말을 꺼낸 건, 그러니까….”

    “…….”

    “나는… 너한테 쓴소리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서야, 사은아. 내가 이 지경 이 꼴인데 누구한테 충고를 하겠어. 그치?”

    나는 그게 차무겸에 관하여 털어놓을 때 그녀가 침묵을 지키던 이유임을 알아차렸다.

    가연이는 알게 모르게 피곤했는지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가지런히 놓인 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 입도 대지 않은 물이 그 안에서 잔잔하게 일렁였다.

    문득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컵을 들어 물을 꿀꺽 들이켰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처음부터 온수가 아닌 냉수였기에 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식도를 타고 들어간 흐름으로 말미암아 속이 차게 식었다.

    못된 사랑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연이의 모습은 떨쳐낼 수 없을 만큼 나와 비슷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그럼 대체 난 어디서 허우적대고 있는 거지?

    내가 빠진 이 늪은 대체 어디인지.

    뒷골에 식은땀처럼 달라붙는 서늘한 감각이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 * *

    문제집 위로 정오의 햇살이 가느다랗게 엉겨 붙었다.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린 채 영어 지문을 읽던 나는 피로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빛의 입자가 잔상으로 남은 것처럼 새까맣게 칠해진 시야로 번뜩번뜩 드리웠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문제는 여전히 풀다 만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몇 번을 읽어도 친숙해질 길이 없는 영단어에 밑줄을 긋다가 멈칫했다. 지문 위를 숨 가쁘게 달리던 샤프가 쓱 옆으로 틀어졌다.

    턱을 괸 채 무감한 시선으로, 빈 문제집 영역에 숫자를 가지런히 썼다.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쓴 것도 아닌데 숫자는 마치 본능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술술 써졌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암영을 떠난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이렇게 기억이 잘 날까.

    나는 영단어 대신 나란히 쓴 11자리 숫자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에 잠겼다. 연락, 해볼까.

    새벽마다 나를 깨우던 번호.

    차무겸이 줄기차게 핸드폰을 바꿔줄 때마다 이 번호는 단 한 번도 저장해두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번호로 연락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빠처럼 이미 인연이 끊기다 못해 남처럼 살고 있는 인생, 나와 그녀를 잇는 건 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번호 하나가 유일했으니.

    “…후우.”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둔 이것을 간간이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무겸에게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정말 그게 코앞까지 다가오니 기쁨과 행복보다 혼란과 공허가 조금 더 컸다. 그저 막연하게 대비하던 모든 것이 현실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이나 각오가 아니라 진실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러니만큼 도움이 절실한 형국이기도 했다.

    돈 버는 것, 다시 학교에 진학하는 것, 졸업 준비, 임용 준비. 다 말이야 쉬운 법이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 이 번호에 연락을 할 만큼 속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생각에 지우개를 들어 번호를 지웠다.

    띵동.

    하얀 지우개를 쥔 손가락 끝이 움찔했다.

    떨구고 있던 고개를 훅 쳐들고서 현관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지? 내가 홀로 이 집을 지키는 동안 누가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씻고 나온 가연이가 전한 당부를 떠올렸다.

    ‘오늘 택배 올 게 하나 있는데 받아놔 줄 수 있어?’

    가끔씩 택배를 받아두지 않으면 멋대로 사라질 때가 있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라며 가연이가 두 손을 맞붙인 채로 부탁했었다.

    기다란 샤프를 문제집 사이에 끼워 넣고 덮은 뒤 일어났다. 도어 록 버튼을 누르고 홀가분하게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진한 향수 냄새였다. 그 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을 무렵, 문 앞에 선 인물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고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는 사람은 내가 기대하던 택배 배달원이 아닌 안진권이었다. 서서히 눈이 커지고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안진권은 내가 놓친 문을 대신 잡으며 문가에 고개를 기댔다.

    “안녕?”

    그가 비딱하게 선 채로 인사를 전했다.

    예기치 못한 조우에 심박수가 가파르게 고조됐다. 나는 아연해진 눈빛으로 더듬더듬 물러났다. 이런 나를 가만 바라보던 안진권이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가연이 없어?”

    그제야 난 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어쩌면 가연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숱하게 싸워 헤어졌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한 두 사람. 가연이가 끄집어낸 단편적인 속사정만으로 헤아릴 수 있었던 연애사인 만큼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도 예삿일은 아니었겠지.

    그보다 가연이가 지금 학교에 있는 걸 모르나? 의문이 들었다가 그와 싸웠다는 말을 상기해냈다. 다툼의 연장선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하지 않는 거라면…. 아니, 그래도….

    “비켜 봐.”

    안진권은 당황하여 말없이 선 내 어깨를 밀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 뻔뻔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비켜섰다.

    현관 벽에 철썩 붙어서 자연스레 집 안으로 들어서는 녀석을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가 문이 닫히고 도어 록이 다시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일단은, 안진권과 한 실내공간에 단둘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알싸한 불안감이 들었다.

    “가연이 오늘 오후 수업 있어서 조금 늦게 올 거야.”

    안진권을 뒤따라간 나는 식탁 의자에 걸린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만지작거리던 안진권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니 그를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 공간에 함께 있지 않으려거든 내가 나가는 게 맞았다.

    “나는 나가 있을 테니까 가연이 돌아오면 둘이….”

    “어디 가는데?”

    관심이 썩 달갑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일자로 굳히며 말했다.

    “어디든 가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럴 수는 없지.”

    “뭐?”

    “나 홍가연 아니고 너 보러 온 건데?”

    식탁 구석에 놓아둔 돈을 외투 주머니로 집어넣던 내가 멈칫했다. 안진권에게로 돌아가는 고개가 삐걱삐걱, 기름칠하지 않은 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공기 중에 이상하고 오묘한 기류가 얽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안진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여기 있었을 줄이야.”

    “…….”

    “요새 가연이가 절대 집에 못 오게 하길래 혹시나 했는데.”

    “…차무겸이야?”

    내가 어렵사리 꺼낸 질문에 안진권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심상한 태도가 더욱 골을 뜨겁게 울렸다.

    “차무겸이 시켜서 온 거냐고, 너.”

    이상한 일이었다. 실로 멀쩡한 차무겸을 보고 나에게 질렸다는 걸 분명 체감하고 있었는데, 입은 자연히 그런 식의 추론을 꺼내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이미 안진권에게 전적이 있는 까닭이었다. 내가 기를 쓰고 차무겸의 연락을 피할 때 제 호기심과 욕심을 채우겠다고 차무겸을 그 자리로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나에게는 얘나 김형준이나 역겹고 짜증 나긴 매한가지였다.

    “차무겸?”

    안진권이 거실 풍경을 단조로이 훑었다. 공간을 압도하듯 가볍게 곳곳을 맴돈 시선이 곧 내게로 꽂혔다.

    “아니. 그냥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

    불쾌함이 풍기는 듯한 대답이었다. 내가 차무겸의 명령 따위에 움직일 것처럼 보이냐는 듯한 오만한 뉘앙스. 상황을 이 이상 위험하고 험악하게 비틀 생각이 없기에 나는 빨리 덧붙였다.

    “차무겸 일이 아니라면 네가 날 찾아올 용건이 없잖아.”

    “왜 없어?”

    “…….”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으면 충분히 찾아올 법하지.”

    누가 뒤통수에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섬칫했다. 솜털 하나까지 쭈뼛하게 서는 이 감각이 낯설지 않다. 아버지가 나에게 손찌검을 하기 직전에, 혹은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찾아온 차무겸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테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부를 에워싸는 순간 동반되고는 하는 감각이었다.

    나의 발이 무심결에 뒤로 직 끌렸다. 그걸 본 안진권의 입가에 고인 웃음기가 진해졌다.

    “너 차무겸한테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망친 거 아니야?”

    “…….”

    “그거,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말투는 얼핏 듣기에 살갑고 상냥하지만 저 시커먼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동공을 보고 있노라면 순순히 넘어갈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도 원한다면 특별히 적선을 베풀어주겠다는 건방진 태도에 외려 이가 갈렸다.

    “…네가 뭔데 날 도와줘.”

    “글쎄. 필요할걸?”

    이상하게 자신만만한 그 얼굴이 이유 모를 께름칙함으로 변해 목께를 덮쳤다.

    “필요 없어.”

    근거 없는 안진권의 착각을 깨뜨리기 위해 입을 벌리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정말로?”

    “그렇다고.”

    “차무겸이 네가 여기 있는 걸 안다고 해도?”

    “…뭐?”

    “지난번에 한 번 만났는데 말이야. 걔가 나한테 그러더라. 내 여친은 잘 지내냐고.”

    “…….”

    “처음에는 그딴 걸 왜 묻나 했어. 새로운 방식으로 시비를 거는 건가 싶기도 했고. 애초에 차무겸이랑 가연이는 잘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내가 이 집에 꼭꼭 숨어 있는 동안, 나는 알지 못하던 차무겸의 행적에 대해 들으니 모골이 오싹하게 경직됐다. 특히나 지금, 상황의 우위를 분명하게 선점하고 있는 안진권의 예사로운 태도가 더욱이 목을 조여왔다. 자꾸만 실실 웃어대는 저 행색이 신경줄을 살살 건드렸다. 간신히 삼키는 침에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근데 나중에 가서야 알겠더라. 그건 홍가연이 아니라 너를 향한 말이었어.”

    “…….”

    “너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던 거야.”

    저조차도 말을 하며 다시금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안진권의 음성은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만약 정말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왜 찾아오지 않고….

    달빛조차 보이지 않던 야밤 속, 나를 침실에 가두고 숨 막히는 폐쇄성을 선사하던 차무겸이 떠올랐다. 그토록 지독한 놈이 이미 내가 지내는 곳을 알면서도 뻔히 찾아오지 않고 있다는 게 의구심을 날것으로 부추겼다. 그건 가연이의 집으로 와 밤낮 할 것 없이 떨며 문가와 창밖을 병적으로 힐끔거리던 나의 태도가 뒷받침하는 두려움이었다.

    일순 티브이를 통해 보았던 차무겸의 모습이 쓱 스쳐 지나갔다. 내가 사라지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 말쑥한 자태를 보며 고개를 들었던 가정이 불쑥 생각났다.

    “질렸을… 수도 있잖아.”

    “뭐?”

    “걔가 나한테 질려서, 찾아오지 않는 걸 수도….”

    나의 의지로 내뱉는 말임에도, 신빙성이 없다는 걸 증명하듯 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내 주변에 동그란 원을 그려놓은 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것. 차무겸은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미 숱하게 행해온 바 있었다. 야밤에 집에서 벌였던 말도 안 되는 술래잡기부터가 그랬다. 뻔히 내가 숨어 있는 곳이 침대 밑인 걸 알면서도, 보란 듯이 옷장으로 먼저 향했었지.

    그만큼 차무겸은 나를 붙잡기 위한 덫을 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고, 덫을 쳤을 때에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태연함과 오만함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펼쳐질 미래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조급해하거나 안달복달하는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티브이를 통해 목격한 일상적인 면모 역시 그 양상의 일환인 걸까?

    “……!”

    상념의 타래로 깊이 수몰되던 정신이 깨어난 건, 우두커니 서 있던 안진권이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왔을 때였다. 한가하게 골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가연이가 없는 집에 그녀의 남자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마땅히 경계해야 했다. 뒷걸음질 쳐 좁혀진 거리를 어느 정도 벌렸다.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난 나가 있을 테니까 가연이 오면….”

    적당히 거리가 생겼다 싶을 즈음 등을 홱 돌렸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 속에 얼른 발을 욱여넣고서 도어 록 버튼을 눌렀다. 열린 문틈 사이로 찬 바람이 쏟아졌다.

    “아!”

    그러나 문밖으로 걸음 하나 내디딜 수가 없었다. 조용히 열린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머리채를 옭아매는 강한 악력에 두피가 얼얼했다.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헛된 불안감이 아니었다. 나는 내 허리를 두른 안진권의 팔뚝에 손톱을 세우고서 몸을 마구 비틀었다. 온갖 눈치를 살피며 현관문까지의 거리를 좁힌 보람도 없이 어느덧 다시 주방 근처로 와 있었다.

    발을 아무렇게나 휘저어 안진권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윽! 하고 뭉툭한 비명을 터뜨린 안진권이 나를 놓쳤다. 그에게서 풀려나자마자 황급히 현관문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콘센트 선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장판을 찍은 팔꿈치와 무릎이 못 견디게 쑤셨다.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가 황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기다란 그림자가 내 위를 덮친 건 동시였다.

    ‘너 나한테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진짜… 인생 좆같아질걸?’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저주 같은 말이 떠오르는 건지.

    “놔!”

    “조용히, 좀 해.”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은 안진권이 손으로 내 입가를 틀어막았다. 깨물고 싶어도 살갗을 누르는 힘이 장난이 아닌지라 입만 뻐금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한차례의 몸싸움에 서로의 숨이 격해져 있었다.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안진권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제압당한 상체와 달리 움직일 수 있는 하체를 마구 바둥거렸다. 안진권은 그 다리를 제 허벅지로 누르며 기어이 내 위로 올라탔다.

    “차무겸이 몇 년이나 옆에 끼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거 영 띨띨하네.”

    무어라 말하고 싶어도 입이 단단히 틀어막혀서 무리였다. 나는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하나 나의 서슬 퍼런 눈발이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지 피식 웃고 말 뿐이다. 그게 더 심장을 팽창하게 만들었다.

    “이러면 너만 손해야, 김사은. 네가 혼자서 차무겸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여전히 도움을 준다 어쩐다는 타령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고 고개를 저어 입가를 틀어막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너 같은 거한테 도움받을 생각 없다고!”

    “아, 다른 새끼들 말대로네.”

    “뭐?”

    “차무겸 아닌 딴 놈한테는 날 존나 세운다고 들었거든.”

    “…….”

    “근데 그거 알아? 너 그런 모습에 넘어간 애도 꽤 돼. 너만 꺾으면 꼭 차무겸을 이긴 우월감이라도 들 것 같은지.”

    남의 이야기를 꺼내듯 평이로우나 나는 안진권 역시 개중 하나에 해당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안진권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느리게 축였다. 나를 감싼 공기가 조금 더 뻑뻑하게 응집됐다.

    “김형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

    “너희 다 이상해. 나 차무겸한테 그렇게 특별한 존재 아니야. 나 꺾는다고 차무겸을 이긴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느낄 만큼 걔한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안진권은 흡사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대하듯 피식 웃었다. 그럴수록 나의 속은 가뭄이 찾아온 것처럼 자각자각 일그러졌다. 어쩌다 시선이 하나로 포개어질 때마다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만 같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하….”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바시랑거리는 나를 억누르던 안진권의 입술이 기묘한 모양으로 비틀렸다.

    “하하하!”

    안진권은 나를 앞에 두고 박장대소를 했다. 대체 뭐가 그리 웃긴지 알 수가 없었다. 날카롭게 뻗어져 나가는 소리는 비틀린 분위기를 한층 더 기괴하게 꺾어댔다. 위협적인 웃음에 휩쓸린 나의 어깨가 동그랗게 말렸다. 경계심이 점액질처럼 몸 곳곳으로 끈적하게 퍼졌다.

    “진짜였어?”

    “뭐…?”

    “그냥 개소리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목매는 쪽이 네가 아니라 차무겸이었나 봐? 씨발, 너무 웃긴데. 이거….”

    “…….”

    “불쌍한 차무겸.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됐을까.”

    폭소인지 차무겸을 향한 힐난인지 모를 것들을 두서없이 뱉던 안진권이 내가 입고 있던 외투를 억지로 벗기려 들었다. 그 손짓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의 발버둥이 격렬해지자 그가 쯧, 혀를 찼다.

    입과 숨을 동시에 틀어막는 손이 떨어져 나가 비명을 지르려는데, 그보다 한발 앞서 커다란 손이 뺨을 후려쳤다. 찰싹! 하는 마찰음과 함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눈앞이 번뜩이는 점멸 후 화끈한 통증이 뺨 위로 번졌다.

    “아, 미안. 때릴 생각까진 없었는데.”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사과였다.

    “그니까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놔, 이 개새끼야!”

    나는 입이 뚫린 틈을 타 그에게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사지를 뒤틀었다. 안진권은 포기를 모르는 내 행동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외투를 벗기는 손을 결코 물리지 않았다.

    나는 상체를 세워 그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

    “아!”

    둔탁한 신음을 내지른 안진권의 몸이 흔들리는 틈을 타 서둘러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화장실로라도 들어가 문을 잠가야 했다. 가연이가 올 때까지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모르겠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가던 오후의 시간이 왜 이렇게….

    “꺅!”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기도 전에 어깨가 다시금 붙잡혔다. 벽으로 밀쳐 고정시키려는 억센 힘에 저항하다가 그만 몸의 균형을 잃었다. 비틀거리다가 한쪽 다리가 풀리는 순간 탁자 모서리에 귀 부근을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부딪쳤다.

    관자놀이를 강타하는 힘에 정신이 흐릿하게 풀어졌다. 그 자리 그대로 풀썩 주저앉기 무섭게 찌르르한 이명이 귀를 점령했다. 아, 아파…. 고통에 찬 신음이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처럼 멍멍하게 울렸다. 더듬더듬 손을 들어 올려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끈적한 액체가 손끝으로 고여 들었다.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돈 것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하아…. 일 존나 복잡하게 만드네.”

    어지러워서 완전히 주저앉은 내 앞에 선 안진권은 아까보다 조금 더 흐트러진 차림새로 다리를 굽혀 앉았다. 나는 피가 흐르는 귀를 감싸 쥔 채로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손으로 이마부터 목 뒤까지 쓸어올려 머리칼을 대강 정돈한 안진권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차무겸이 너한테 질린 걸지도 모른다고?”

    안진권은 조금 전 미처 다 발산하지 못한 미소를 이제야 터뜨리듯 입꼬리를 빈정빈정 휘며 고개를 저었다.

    “걔 보면 알걸?”

    “…….”

    “그 새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가까이서 보면….”

    안진권은 손가락을 쭉 뻗어 제 눈앞에서 한 바퀴 원을 굴렸다.

    “눈이 완전히 회까닥했던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 몰아치는 차무겸의 소식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입술이 저열하게 휘어졌다.

    “그런 눈깔로 내 여친은 잘 지내냐고 묻는데,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니까.”

    어이가 없는 마음에 실소를 삼키지 못했다.

    “회까닥한 건 너겠지. 또라이야…. 너 네 여자친구 집에서 이러고 싶니?”

    한 자 한 자 거칠게 씹어뱉는 힐난에도 안진권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말 뿐이었다. 저 악독한 호선을 볼 때마다 어딘가로 숨어 엉엉 울고 싶어졌다.

    나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몸을 추스르려 애쓰며 눈에 칼을 세우는 데에 온 힘을 다했다. 안진권은 소요가 길어지는 게 피로했는지 이마를 뜸지근하게 문질렀다. 곧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나를 위에서 아래로 길게 훑어내렸다. 속내를 추측하느니 외면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지는 검측측한 눈길이었다.

    쭉 뻗어진 손가락이 아래로 떨궈진 내 턱을 받쳐 살짝 들어 올렸다.

    “차무겸이고 다른 새끼들이고, 왜 다들 하나같이 난리를 치는지 알겠어. 너 남자 진짜 잘 들러붙게 생긴 얼굴이거든.”

    “…….”

    “나도 처음 술집에서 봤을 때부터….”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안진권의 그림자는 이미 내 위를 덮고 있었다. 방심하는 순간, 그대로 눈을 뜬 채 겪는 악몽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조마조마함이 사슬의 형태로 가슴을 옭아맸다. 탁자 다리에 위태로이 기대앉은 나는 침체된 눈으로 심호흡했다.

    “가연이 곧 올 거야.”

    “그래.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고.”

    마치 후다닥 해치워도 되는 일거리쯤으로 여기는 듯한 어투에 속이 울렁거렸다.

    “…가연이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내 머리맡의 탁자에 손을 턱 올린 안진권이 비열한 낯짝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아까부터 자꾸 가연이 얘기를 하는데, 설마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물러나주길 원해서 그러는 거야?”

    “…….”

    “그런 거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홍가연은 나 이런 새끼인 거 알면서 만나는 거거든.”

    속에 담긴 게 어찌나 많은지 물 한 잔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서 넋두리를 하던 가연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대체 왜, 가연이는 대체 왜 이런 쓰레기랑…. 이번에는 순전히 나에게로 닥친 위협만이 아니라 소중한 친구를 하찮게 여기는 안진권의 태도에 속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엮이기 싫어서 나를 소개하는 것조차 하염없이 고민했던 그녀의 복잡한 심중을 알기에.

    짓씹던 입술을 놓으며 안진권을 향해 침을 뱉었다.

    “개 같은 새끼.”

    안진권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는 손가락등으로 제 뺨에 튄 타액을 쓱 훔쳤다.

    까만 동공 속에 그악스러운 빛깔이 번뜩인 건 순간이었다.

    짝-!

    공기 속에서 피어나는 피 향이 불시에 진해졌다. 아니, 맛인가? 아까 전 맞은 뺨을 한 대 더 후려 맞으며 기어이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혀로 쓱 쓰는 뺨 안쪽으로 비릿한 내음이 가득 풍겼다. 그러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머리채가 붙잡혀 탁자로 쾅 밀쳐졌다. 뒤통수가 깨질 것처럼 찡하니 울렸다. 어쩐지 독이 바짝 오른 듯한 안진권이 내게로 얼굴을 디민 채 거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이리 비싸게 굴어…. 차무겸한텐 수십 번도 넘게 다리 벌렸을 거 아니야.”

    “…….”

    “나한테 한 번 더 벌린다고 문제 생기진 않을 텐데.”

    그간 녀석이 어떻게 놀았는지 훤히 보이는 저속함이었다. 농락에도 정도가 있지, 완전히 가연이를 가지고 노는 게 분명한 태도에 속에서 불길처럼 거센 기포가 빠글빠글 일었다.

    나는 날 세우고 있던 눈에서 힘을 빼고는, 보란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차무겸이랑 너랑 같니?”

    가만 보면 차무겸 앞에서 입도 뻥긋 못 하는 놈들은 이상하게 그에게 열등감 비슷한 걸 품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이 대체로 차무겸을 대신하여 그 옆에 있는 나를 헐뜯거나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마도 조금 전 안진권이 제 입으로 시인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흠집 내서라도 일종의 우월감을 채우고 싶은 것이겠지.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 김형준이 있다. 그와 아는 사이라는 안진권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꺼낸 도발이었다.

    “아…!”

    예상대로인지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안진권이 열 받아서 분이 풀릴 때까지 흠씬 두드려 패길 바랐다. 정말 그걸 간절히 바랄 정도로, 성적인 행위로 빠지지 않았으면 했다. 여긴 가연이의 집이고, 며칠 전의 대화로 나는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가연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대상인지 알고 있었다.

    가연이의 애달픈 고백은 결국 사랑을 기반으로 한 한탄이 아니던가.

    ‘진권이가… 너한테 관심 보일 것 같아서.’

    ‘너랑은 정말 그런 식으로 틀어지지 않기를 원했거든.’

    그녀의 불안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리도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해의 소지를 잘라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가연이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고, 또 내가 안진권에게 그런 식으로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복합적인 수치심을 겪는 것보다 물리적인 폭행을 당하는 게 훨씬 나았다. 상처에도 치료가 되는 상처가 있고, 아무리 비싼 약을 들이부어도 치료되지 않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역시나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돌연 어깨가 붙잡혀 바닥으로 억눌렸다. 나는 다시금 내 위를 장악한 안진권을 아연하게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약간 핀트가 나간 듯한 눈빛이 가슴 속을 뾰족하게 긁었다.

    “안, 안진권…!”

    “달라?”

    “이거 놔!”

    “뭐가 그렇게 다른데?”

    벗겨지다 만 외투가 또다시 외력에 의해 끌려 내려갔다.

    “씨팔. 여기나 저기나 차무겸, 차무겸….”

    휙 치켜 들린 다리를 타고 바지 자락이 흘러내렸다. 드러난 종아리를 쓱 어루만지는 손길에 급격히 토기가 일었다. 손끝이 닿는 자리자리마다 지네가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몸을 떨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역겨움과 오한이 함께 몰아쳤다.

    한 손으로 헝클어져 멋대로 벌어지는 옷자락을 어떻게든 추스르며, 다른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성인 남성의 힘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차무겸이 나를 깔아뭉갤 때와는 차원이 다른 거부감이 쏟아졌다. 얘와 이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리라는, 그런 절박함에 기반을 둔 거부감.

    “싫어, 싫어…. 하지 마!”

    다급함을 알리듯 날카로운 비명이 고조되어 갔다. 안진권의 피부를 손톱으로 긁고 사지를 비틀며 격렬하게 버둥질했다. 위에 올라탄 사내의 뜨거운 숨결에 구역질이 났다.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손길이 옷자락을 들추고 허벅지 안쪽과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 절망의 언저리에서 누구보다도 지난하게 구르던 차였다.

    끼익, 어딘가에서 고막을 불편하게 긁는 소리가 났다.

    엉망으로 조성된 이 난장판 속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소음. 이어 뚜벅거리는, 묵직하면서도 성마른 티가 나는 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악!”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억누르던 위협이 불시에 사라졌다. 순식간에 뒤집힌 상황을 침착하게 살펴볼 새가 없었다. 으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음기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급히 몸을 뒤집어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직도 피부를 쓸고 지나간 손바닥의 촉감이 진하게 남아 있어서 끔찍했다.

    뒤편에서 어딘가에 부딪치고 밀리고 쓸리는 소리가 찌릿찌릿한 형태로 갈음되어 귀를 찔렀다. 안진권의 저질스러운 권역에서 벗어난 나는 잽싸게 기어 거실 구석에 몸을 말았다. 그러고서야 둘뿐이던 집에 산처럼 우뚝 선 누군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시야가 어룽진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부산스러운 손길로 눈가와 뺨을 닦고 나서야 그게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씨발, 뭔… 아!”

    흐트러진 자세를 간신히 추스르던 안진권이 복부를 얻어맞으며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위협스러운 타격음에 구석에 달라붙은 몸이 조금 더 동그랗게 말렸다. 하악질하는 고양이를 피해 숨은 쥐처럼 자꾸만 숨을 죽이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바람처럼 나타나 안진권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차무겸에게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심경에 맘속의 심지가 휘청휘청 꺾였다. 아까의 내 것을 대신하듯 울려 퍼지는 안진권의 신음과, 이제는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뚱어리를 자비 없이 걷어차는 악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큼 아찔하기만 한데 내 동공을 장악한 차무겸은 힘 하나 들이지 않는 태세로 안진권을 후려 패고 있었다.

    과거의 잔상이 쓱,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고 있던 기억에 덧입혀진 것처럼 익숙한 상황. 한두 번이 아닌 장면이었다. 나에게 상한 우유를 던졌던 문태욱, 질 낮은 호기심을 보이며 나를 멋대로 잡아채던 김형준…. 그리고 이제는 여자친구를 두고 나를 멋대로 겁간하려던 안진권.

    그리고 그 속에 한결같이 놓인, 나를 어떤 식으로든 괴롭히던 치들을 벌이라도 주듯 거리낌 없이 폭행을 가하는 차무겸까지.

    이 모든 상황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안진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입증됐다.

    진짜, 진짜로 내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었구나.

    너는 정말로….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라면 이렇게 적시에 나타날 수 있었을 리가 없을 테니.

    그러니까 차무겸은 또다시 나를 희망 고문하고 있었던 셈이다. 아주 얄따란 희망을 줄에 걸어 내 머리 위에서 고약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쯤 나가떨어질지 시험해보는 사람처럼 재차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는 데에 통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컥!”

    동공이 한순간 위축됐다.

    차무겸이 안진권의 머리카락을 쥐어 들었을 때였다. 그는 그 상태로 곤죽처럼 늘어진 안진권을 질질 끌고 갔다.

    그제야 나는 턱이 치들린 안진권의 몰골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혹독하게 쏟아진 폭력 세례에 여기저기가 퉁퉁 붓고 터져서 피가 질질 새고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조금 전 나를 보며 얄미울 만치 빙글빙글 웃던 표정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에게 얻어맞던 문태욱을 목격했을 때처럼, 마음이 차게 식었다.

    안진권이 끌려가는 상태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차무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머리칼을 움킨 손에 힘을 주는지 아악-! 하는 외마디 비명만 커져 갔다.

    “헉…!”

    숨조차 내쉬지 못하던 내가 헛숨을 집어삼킨 건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머리칼이 아닌 머리통을 감싸 쥐고 안진권의 이마를 탁자 모서리에 세게 내려친 것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뭍으로 끌려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던 안진권의 몸이 시체같이 힘을 잃었다. 시야를 휘젓는 궤적 하나하나가 소름이 끼쳐서 가슴이 털썩털썩 내려앉았다.

    “아.”

    인정머리 없는 물살에 휩쓸린 것처럼, 집으로 들어선 내내 무표정이던 차무겸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탁자에 드세게 내리박던 안진권에게서 피가 착 튀었을 때였다. 그가 손을 놓자 안진권은 탁자 아래로 축 늘어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니 누가 영혼을 쭉 잡아뺀 것처럼 망연해졌다.

    곧 일렁일렁 차오르는 빨간 물이 보였다. 내가 주저앉은 쪽 바닥으로 진한 핏물이 길을 이루고 있었다. 꿈보다 더 꿈 같은 어느 현상을 보는 것처럼 얼이 빠졌다. 한 박자 후에야 그게 안진권의 머리에서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더럽게….”

    차무겸이 뺨에 튄 핏방울을 손가락등으로 쓱 쓸었다.

    냉혹한 정도를 넘어 조금도 인간 같지 않게 느껴지는 악랄한 성질머리를 보고 있자니 구석에 콕 박혀 무슨 액션도 취하지 못하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상체를 바로 세우자 고막을 따갑게 찌르는 이명이 심해졌다. 공기마저도 뾰족뾰족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 상태로 차무겸의 발치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하지, 마…. 그만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근처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안진권을 보자 피가 차게 식었다. 내가 주저앉은 이 공간이 엉망으로 만지작거린 진흙처럼 마구 짓이겨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까부터 뇌리를 이따금 점멸하게 만들던 현기증은 나아질 겨를 없이 심해져 갔다. 나는 잔 떨림이 멈추지 않는 눈으로 안진권을 응시했다.

    왜, 왜 안 움직이지.

    저렇게 피가 나는 걸 보니… 죽은 거 아니야?

    죽었으면?

    만약 죽은 거라면 어떡하지…?

    그건 안진권이라는 존재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걔를 도저히 놓을 자신이 없는 내가….’

    ‘아니면, 내가 정말로 걔를 많이 좋아한다든지….’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일렁이는 건 가연이가 어렵사리 꺼내놓은 진심 한 톨이었다.

    그가 가연이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아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술김에 털어놓은 진심을 곱씹을수록 마음이 더 요란하게 쿵쾅댔다. 아무리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호흡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과호흡이 온 사람처럼 가슴팍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그렇게 애를 써서 들이켜는 숨에는 피 냄새가 잔뜩 엉겨 있었다.

    “제발, 제발 좀….”

    나의 간곡한 청에 차무겸이 한숨을 터뜨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은 고개를 들 만큼의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는 안진권만 헤아리며 정신이 얇고 볼품없이 조각나고 있었다.

    차무겸이 그런 나를 향해 다리를 굽혀 앉으며 어느새 꺼내 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형, 나야.”

    조금 늦은 감이 있는 지금에서야 코앞에서 그의 눈을 마주했다.

    ‘눈이 완전히 회까닥했던데?’

    그리고, 차무겸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안진권의 말이 실로 잘 이해가 갔다.

    “지금 여기로 와 줄 수 있어?”

    차무겸이 입을 열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나 사고 친 것 같아.”

    “…….”

    “몰라… 죽은 것 같기도 하고.”

    마디가 굵고 길쭉한 손가락이 다친 흔적을 또렷하게 드러낼 인중과 귓바퀴를 지나 물기로 흠뻑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 전 안진권에게 가하던 폭행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곰살맞은 손길에 몸 곳곳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더하여 자신이 구타한 이가 앞에 쓰러져 있는데 태연하게 ‘죽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태도나 이런 때마저 유리알처럼 말갛기만 한 눈동자 역시.

    내가 졸도할 듯한 경악에 잠긴 사이, 통보에 가까운 통화를 끊은 차무겸이 혀를 쯧, 찼다.

    “또 다쳤네.”

    “…….”

    “속상하게 진짜.”

    그가 대뜸 얼굴을 찌푸렸다. 뺨 가운데를 누비던 그의 손가락이 코 쪽으로 이동했다. 뒤늦게야 코끝이 정도 이상으로 시큰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쓱 닦아주고 멀어지는 그의 손가락에 핏자국이 새로이 그어져 있었다.

    아, 코피.

    암영에서는 버릇처럼 터지는 것이었으나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는 거의 겪은 적이 없어 일순 생경했다.

    차무겸의 태도는 우스웠다. 굳이 닦아줄 필요가 있나. 저걸 닦는다고 멀쩡하지 않은 꼴이 멀쩡해질 리가 없는데. 나는 후각을 에워싸는 피 향을 맡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머지않아 아슬아슬하게 버텨주던 신경줄의 가닥이 툭 끊어졌다. 그대로 축 늘어지는 몸이 어딘가에 기대어졌다.

    나를 지탱하는 게 차무겸이라는 사실이 끔찍하면서도, 그나마 다른 남자가 아닌 차무겸이라서 안도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이율배반이 나를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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