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5화 (15/24)

15장.

부촌을 빠져나오고서는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먼저 명품 중고 매장으로 향해 외투 속에 고이고이 가져온 시계를 팔았다. 매장의 사장은 영 시원찮은 내 매무새를 보고는 건성건성 응대하다가 내가 내민 시계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그건 고가 중에서도 고가였다. 감정을 마친 후 사장의 얼굴에는 아주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혹시 계좌이체 말고 바로 현금으로 받을 수 있나요?”

“예? 아… 이 정도 물건이면 현금이 모자라서요. 지금 가지고 있는 걸로는 조금 부족한데.”

“괜찮으니까 그거라도 주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사장이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부지런을 떨다가 잠시 후 내게 수북한 돈다발을 내밀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던 예상치를 훅 벗어난 금액이었다. 나로서는 진가를 알지 못하니 훨씬 더 가격을 후려쳐 치른 대금일지 몰라도, 지금의 내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뭣보다 당장이라도 누가 내 뒤를 쫓아올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잔재해서 될 수 있으면 얼른 이동하고 싶었다. 그 바람대로 봉투에 든 돈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매장을 빠져나왔다.

햇살은 여전히 밝고 환했다.

다음으로는 잡화점에 들러 가방을 하나 사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옷가게로 들어가 옷 몇 벌과 모자를 샀다. 혹시 몰라 구매한 것 중의 하나로 갈아입고, 입고 왔던 옷은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슬슬 저녁을 향해 가는 무렵이라 그런지 학생부터 노인까지, 길거리에 사람은 조금씩 많아졌다. 나는 부러 인파가 많은 곳만 골라 다니며 중간중간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계속 갈아입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야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정거장을 들르며 멈춰 설 때마다 나는 창밖으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몇 년 전의 기억을 토대로 찾아가는 거라서 막연한 짐작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대학교로 찾아가면 편할 테지만 차무겸이 언제 어떻게, 내가 침실을 나갔다는 걸 알게 될지 몰랐다. 그러니 그가 익히 아는 나의 생활 반경에는 애초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이제는 차무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골이 묵직하게 땅겨왔다.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관계에 대하여 이제는 침묵 아닌 의문만 가득이었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를 토하는 심정으로 반추하게 된다.

그러나 그게 의미가 있나.

일단은 나를 이리도 혼돈의 파란 속으로 밀어 넣는 차무겸이 그 변화에 대해 설명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고, 버릇을 고친다는 명목하에 침실에 가둔 것이겠지. 다시금 겪게 된 며칠간의 폐쇄적인 감각이 살갗을 까득까득 긁어내는 듯해 나는 공연히 팔뚝을 쓸어내렸다.

버스의 흔들림에 머리통이 창가를 퉁퉁 두드렸다. 내리깔린 눈 속에 해갈되지 않는 심란함이 점점이 쌓였다.

차무겸에게 무작정 빌고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리도 애써온 것, 그래. 사실 안다. 차무겸의 그늘 속에서 연명하는 세상이 편하다는 걸 차마 부정하지 못한 거다.

그를 따라 서울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놀란 건 물가였다. 암영 마을에 있는 구멍가게의 가격보다 두 배는 족히 비싼 물건들을 보며 나는 일순 망연해지기까지 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돈이었다. 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돈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첩첩이 쌓아 올린 권력과 그에 딸려오는 재물이 넘치는 차무겸의 곁에서, 나는 분수에 맞지 않는 호사를 영위하지 않았던가.

그가 여자친구와 나를 양옆에 두고 저울질하며 노는 구역질 나는 짓거리도, 그 외에 고역을 씹어 삼키면서까지 그의 기분에 맞춰주려 아등바등한 것도 다 그 이유에서였다.

이제 와 부정하기에는 어설픈 속물밖에 되지 않는 길이니.

그러나 예전에도 생각했듯, 그건 나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돼야지만이 유지 가능한 관계이기도 했다. 차무겸이 나의 자유를 제한하며 우리의 파동적인 관계는 기어이 금이 갔고, 비틀대고 휘청대다가 어딘가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건 결코 내게 이롭지 않은 결과를 도출했다.

혼란한 마음에 생각이 여기저기로 튀던 무렵이었다.

버스 바깥으로 하얀 약국 간판이 쓱 스쳐 지나갔다.

“…….”

순간 허옇게 질린 낯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신물과 같은 초조함이 단전에서부터 꾸물꾸물 새어 나왔다.

‘피임약….’

마지막 복용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가물가물했다. 그만큼 오랜 기간 섭취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차무겸과 이따금 관계를 가졌고…. 섹스를 할 때마다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그는 언제나 내 안에 꾸역꾸역 흔적을 남겼다.

한번은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엉덩이골을 타고 덩어리진 정액이 울컥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아무렇지도 않게 수건을 끌어다 아래를 닦고 있던 내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거부감을 느낄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처리를 하던 모습을 막 깨달았을 때,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벌레 같은 환멸을 감추지 못했다. 아래에서 스며든 정액이 기어이 내장으로 진입한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었다.

그때를 반추하니 역스러운 감각마저 되살아났다. 욱, 억지로 삼켜내는 호흡에 고약한 비린내가 풍겼다. 나는 바짝 마른 입 안을 달래기 위해 여러 번 침을 삼켜야만 했다.

‘도착하면 사정을 얘기하고, 그리고 피임약이랑 혹시 모르니까 테스트기도….’

침착하게 굴려고 노력하며, 일단 가장 시급한 일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했다. 시야 안으로 언뜻 익숙한 골목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쭉 뻗어져 나가 버스 하차벨을 눌렀다. 아슬아슬하게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쬐는 빛줄기는 여전히 아득한 감을 선사하여 모자를 조금 더 깊이 눌러썼다.

“아….”

핸드폰이 없어 낭패였다. 지나가는 인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번호를 모르기 때문에 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협소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금으로서는 직접 찾아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은아, 나 사는 빌라 이름 엄청 특별하다? 우정빌라야, 우정빌라.’

당시에는 잊어버릴 일은 없겠다며 웃으며 지나갔으나 지금으로서는 퍽 도움이 되는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골목길을 한참 동안 누비며 잊어버리기 힘든 그 이름의 빌라를 찾아 헤맸다. 삼십 분쯤 골목길을 전전했을까, 매끈한 대리석에 [우정빌라]라고 금틀 위 양각으로 새겨진 빌라 하나를 발견했다.

여긴가?

혹시 몰라서 근처를 조금 더 배회했다. 그러나 근방에 이러한 이름을 가진 빌라는 이 한 채뿐이었다. 나는 1층 공동현관 유리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도가 부재하다는 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만약 오늘 집을 나섰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다고 빌라 안으로 들어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모자캡을 쥐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청한 하늘이 시야로 드넓게 펼쳐졌다. 내 속도 모르고 티 없이 맑은 뭉게구름이 야속했다.

일단은 기다려보자.

나는 빌라 옆 가로등에 등을 기대고 섰다. 무작정 기다리는 게 썩 미련한 짓임을 알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가 있기도 뭐했다. 행여나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외출했다가 돌아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언젠가 이곳이 여성 전용 빌라라는 걸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대로 앞을 지키는 동안 드나드는 이라고는 여자가 전부였다. 저들 중 하나를 잡아서 내가 찾아온 이의 이름을 대며 주소를 알려달라 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우두커니 선 나를 흘끗 보고 지나가는 눈빛만으로도 수상쩍게 여기는 기색이 가득해서였다.

나는 지친 마음을 끌어안고 유리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아….”

낮은 온도의 한숨이 터졌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자고 다짐한 마음은 서서히 기우는 해의 행방을 따라 차츰 기우뚱거렸다. 하늘은 어느새 뉘엿뉘엿 깔리는 땅거미를 따라 속절없이 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는 어둠이 눈 깜짝할 새에 도래할 테다.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없었지만 하늘의 변화로 대강 짐작해 본다면 차무겸은 귀가를 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렇다면 나의 부재도 알아차렸겠지. 그 생각만으로 심장 끝이 알싸하게 조여들었다. 아주 차가운 얼음 조각을 씹지도 않고 넘긴 것처럼 속이 차게 식었다.

이제 더 이상 목적도 의식도 없이 앉아서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다음에 돌아오는 이가 있거든 의심을 받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묻고자 다짐했다.

그러던 차 저 골목 모퉁이 쪽에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단 빌라 입구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지나가는 몇몇의 눈이 입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기 때문에. 근처가 대학가라서 그런지 이 주변에는 빌라가 즐비했다. 혹시라도 내가 지키고 선 이 빌라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러나 골목길을 빠져나온 걸음은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물어야겠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찾던 얼굴이 선물처럼 등장했다. 핸드폰을 보느라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이를 향해 발씨를 죽여 다가갔다.

“가연아.”

호명에 멈칫한다. 곧 몇 달 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조금도 없는 가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쓴 까닭에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가 머지않아 토끼눈을 했다.

“사은이?”

가연이는 대번 목소리를 높이며 화들짝 내게로 다가왔다.

“너 사은이니?”

그저 내가 맞는지를 묻는 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빠듯하게 비틀렸다. 그리웠던 나의 일상 한 꺼풀을 되찾은 느낌이라서. 아늑한 새장과 다를 바가 없던 침실 속에서 반추하고 상기하길 반복하던 그 평화로운 생활의 한 겹. 가연이는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친구였다.

그래서일까,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솟았다. 그것은 갈비뼈 내 아주 깊은 샘 속에 갇혀 있던 감정의 타래로, 슬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눈시울을 가장 먼저 뜨겁게 적셨다.

가연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고 놀랐는지 부산스럽게 굴었다.

“괜찮아? 일단 들어가자. 응?”

나는 짠 내 나는 물기로 번들번들 젖어가는 뺨을 대강 쓸어내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공동현관으로 들어서기 전 뒤를 돌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를 닦아내고서 경계심을 세웠다. 다행히 수상쩍은 기척은 없었다. 아직 차무겸이 여기를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가연이의 집은 빌라 3층 왼쪽 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을 밟아 올라온 집은 방과 거실이 분리된 원룸과 투룸의 중간에 가까웠다. 깔끔한 성정을 가진 가연이답게 외출하고 돌아온 직후임에도 곳곳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리 와서 앉아.”

2인용 베이지색 소파에 나를 앉힌 가연이는 외투를 벗으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모자를 벗은 나는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다가 베란다 쪽을 힐끔 보았다. 가릴 것 없다는 양 환히 오픈된 커튼이 신경 쓰였다. 조용히 일어나 커튼을 쳐 바깥에서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막았다.

그때쯤 가연이가 컵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이거 마셔.”

“고마워.”

따뜻한 물이었다. 나는 목을 적당히 축이고 컵을 내렸다. 정신이 여전히 바로 서지 못하고 물렁거렸다. 그러나 가연이에게 설명해야 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적잖이 놀랐을 테니까.

“이 앞에서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몸 식은 것 봐.”

가연이가 컵을 쥔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연락을 하지 그랬어!”

“미안해. 나도 너 놀랄까 봐 그러고 싶었는데,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서….”

“방법이 왜 없어? 핸드폰은?”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에 입이 다물렸다. 가연이는 이런 내 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바로 조금 전 물을 들이켰음에도 목구멍 안쪽이 건조하게 말라붙었다. 까슬까슬한 느낌에 기침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가연아, 혹시 나 며칠만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말릴 새도 없이 안도의 숨이 터졌다. 가연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연한 불안감이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 한가운데를 헤매는 중이었다. 내 심중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절로 느껴졌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언제였지? 방학에 카페에서 스터디 하다가 나간 이후로 연락이 전혀 안 돼서 얼마나 놀랐는데. 동기들 아무도 네 소식 모른다고 하고. 더군다나 개강하자마자 조교가 너 자퇴 처리됐다고 해서….”

“…어?”

간신히 평정을 찾은 마음의 호수 속에 돌덩이 하나가 던져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연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응? 너랑 아무도 연락 안 됐다고.”

“아니, 그거 말고… 나, 내가 자퇴 처리가 됐다고?”

나의 눈동자에 혼란이 고인 걸 알아챘는지 가연이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부디 그녀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를 바라며 나는 떠듬떠듬 시정했다.

“그럴 리가. 나 분명히 휴학 처리됐을 거야. 자퇴가 아니라… 휴학일 텐데.”

차무겸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휴학이라고. 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내 입 속에 수저를 처넣으면서 아예 자퇴 처리되고 싶느냐던 신랄한 협박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니야. 조교가 분명히 자퇴라고 그랬어. 나도 믿기지가 않아서 세 번도 넘게 찾아갔었거든. 3학년까지 학교 잘 다니던 애가 갑자기 자퇴를 왜 하냐고 물어봐도 자기들은 모른다더라. 그냥 그렇게 접수가 됐다고. 너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도통 연락이 안 되지, 동기들 다 네 소식 모른다고 하지. 그래서 나는….”

가연이가 조심스럽지만 확고하게 꺼내놓는 이야기가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한 귀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감에 분명히 남아서, 그러니까, 어벙한 머리와 달리 가슴은 상황을 똑바로 인지하고 있기에, 속에 시커먼 곰팡이가 멍울멍울 번져갔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반응은 허탈한 실소였다.

“하….”

거짓말이었구나.

“자퇴, 자퇴라고….”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어?’

‘그럼 내 마음에 들게 잘 좀 해.’

차무겸은 나를 학교에 보내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남의 약점을 쥐고서 살살 흔드는 그 사악한 말들이 귓전을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하, 하하. 힘 빠진 웃음이 멈추지가 않았다. 나는 대체 어디까지 놀아나고 있던 거지?

아니, 차무겸은 대체 나의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차무겸이야?”

언제 겪어도 적응하기 힘든 무능의 늪에 또다시 발이 잠기는 기분을 느끼던 차, 가연이가 물었다. 나는 거뭇하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연이는 아까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무겸이 네 동의 없이 그런 거냐고 묻는 거야.”

“…….”

“그날 너희 진짜 이상해 보였어. 사은아, 혹시 걔가 너를….”

“갇혀 있었어.”

탄로 난 진실 앞에서 기력은 모조리 흩어져버렸다. 내가 담담하게 끄집어낸 한마디의 토로에 가연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나는 그런 가연이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보았다. 한쪽에 놓인 자그마한 티브이 화면 위로 나와 가연이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무채색의 풍경 위로 얼룩진 창백한 인상이 참으로 잘 어울려 허탈했다.

“나는, 난 원하지 않았어.”

“사은아.”

“날 가두고 못 나오게 했다고….”

잔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연이가 그걸 보고 잔을 가져가 소파 옆 탁자에 내려놓은 뒤 조심스레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 인생은 언제나 이랬다. 어릴 적에는 아빠의 삿된 탐욕하에 관심과 애정 대신 멍에 같은 욕만 들으며 자라왔고, 다 큰 후에는 내 스스로 차무겸에게 인생의 뿌리를 내어주는 바람에 이따위로 너절하게 비틀렸다.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의지대로 가도 엉망이지. 이정표를 따라 잘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나는 이런 터무니없이 막다른 길에 덩그러니 놓여버린 걸까. 차무겸에게서 도망쳐 바로 복학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가 자퇴 처리가 되었다면 마지막 보루이자 돌아가야 할 곳마저 잃어버린 셈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그에게로 돌아가는 길 하나뿐이라고 명시하는 것처럼.

영영 이 구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아득함이 속을 무기력으로 채웠다.

문득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내 어깨를 토닥거리던 가연이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하트 표시가 붙여진 안진권의 이름이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세상 다급히 가연이를 붙들었다.

“안진권한테 말하지 마.”

가연이는 내가 무얼 우려하는지 알아챈 듯 걱정하지 말라며 손등을 도닥였다.

“안 할게.”

그녀는 액정을 누르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끊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멍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현실이 부추긴 충격 앞에서 허우적거릴 새가 없었다. 길을 잃었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학교로 돌아갈 수 없다면 다른 목적지를 골라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겠지.

“일단 밥부터 좀 먹자. 너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어?”

“핼쑥해진 거 봐.”

핸드폰을 한쪽에 내려놓은 가연이는 내 손을 놓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그녀에게 고한 설명은 ‘갇혀 있었다’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연이는 더 묻기보다는 적당히 주의를 환기했다. 그게 나에게는, 내가 영 어려워 보이니 나서서 이 화제를 피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역시 지금은 모든 사정을 털어놓기가 힘든 기분이라서 잠자코 따랐다.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소소한 반찬들로 차려졌다. 마침 지난주에 엄마가 찾아와 반찬을 채워주고 갔다며 내게 이것저것을 내어주는 태도가 곰살맞았다. 내가 기억하던 3년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쉽게 이해하지 못할 타이밍과 몰골로 나타났는데도 가연이는 나를 조금도 꺼리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아릿아릿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간신히 참아내며 젓가락질을 했다.

드넓은 저택 침실에서 홀로 하는 식사는 고급스러운 식재료와 훌륭한 솜씨에 비하여 고역을 씹는 것처럼 맛없고 질기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가연이가 내어준 것들은 입에 넣자마자 녹아버리는 것처럼 맛있었다.

몇 입 먹고 식사를 버리듯이 내친 며칠과 달리 오늘은 오랜만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그래서인지 식사다운 식사를 한 기분이었다.

“욕실은 저쪽이야. 먼저 씻어, 사은아.”

아기자기한 부엌처럼 협소하면서도 소담한 욕실이었다. 그러나 차무겸의 저택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가 양껏 뿜어져 나와서 좋았다. 거기서는 나 역시도 정물처럼, 살아가는 게 아닌 존재로 느껴졌으니.

쏟아지는 온수 밑에서 몸 여기저기를 문지르는데,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움찔했다. 어느 밤, 창고방에 숨은 나를 찾아 문 앞까지 다가온 차무겸의 노크 소리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사은아, 앞에 잠옷 놨으니까 그거 입어.”

씻고 나오니 문 앞에는 가벼운 반팔티와 반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걸쳐 입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며 발을 옮겼다. 가연이는 침대 옆으로 이불을 깔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침대가 좁기도 하고, 또 내가 잠버릇이 좀 심하거든.”

“응, 괜찮아.”

“나 내일 아침 수업이 있어서 일찍 자려는데.”

“그래.”

나 역시도 피로하던 차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계의 초침 소리는 내게 있어 어떠한 강박을 낳았다. 그것은 마음속에 꾸준히 돌멩이를 던져서 간혹 밤에 잠도 자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불을 끄면 삽시간 내려앉는 어둠의 공백이 종종 이유 모를 질식감을 선사해서 자다가 화들짝 깨어나 불을 켠 적도 더러 있었다.

오늘은 그러지 말아야 할 텐데.

그때가 돼서야 나는 이 집에 들어온 후로 내 귀를 앵무새처럼 맴돌던 초침 소리를 한 번도 듣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내가 아끼는 베개인데, 특별히 빌려줄게.”

가연이가 새초롬하게 구는 척하며 내게 베개를 쓱 내밀었다.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부러 발랄하게 구는 것이었다. 나는 엷게 웃으며 베개를 받아 들었다. 가연이는 내가 보이는 쪽으로, 나는 가연이가 보이는 쪽으로 누웠다. 단란한 집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 눈동자는 자연히 침대 아래에 꽂혔다. 낮은 매트리스 아래의 공간에 짙은 어두움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저 아래에 갇혀서 숨을 한껏 죽이던 때가 있었다. 불가항력으로 떠오르는 순간이 눈앞을 저리도 진한 심연으로 물들였다.

“암영이라고…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처음 만났어.”

그걸 보고 있다 보니 무심결에 속엣말이 튀어나갔다.

“나는 서울로 올 생각이 없었어. 아니, 정확히는… 올 수가 없었다고 해야 옳겠지. 집안이 형편없었거든.”

“…….”

“아빠는 가정폭력범에 술주정뱅이인 데다가, 도박까지 했어. 엄마는 그런 아빠가 질려서 내가 어릴 적에 진작 도망가버렸고. 가끔 뉴스에서나 나오는 콩가루 집안, 그게 우리 집안이야.”

가연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차무겸이 여기로 데려왔어.”

“…….”

“나 있잖아. 사실… 너나 동기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지 않아. 그간 내가 입고 먹고 쓰던 것 전부, 차무겸이 지원해주는 거였거든. 걔 없었으면 애초에 대학에 다니지도 못했을 거야.”

언젠가는 곧 죽어도 숨기기 위하여 그리 기를 쓰던 현실.

추한 나의 이면.

동정과 적선밖에 부추기지 못하는 구질구질한 사정.

그러나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에는 술술 터져 나왔다. 너무나 꾸역꾸역 집어넣어 결국은 밑이 빠져버린 독처럼. 그 틈새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인 양, 나의 고백이 서투르게 터져 나왔다.

가연이가 이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다. 자기를 기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이런 나를 안쓰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라면 이런 내 사정을 듣고 나서도 나를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어떠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차무겸이 이러는 걸까?”

“…….”

“다 지원해줬으니까, 나를 멋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는 걸까?”

청자가 있음에도 공허한 읊조림이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허공을 떠돌다가 누구의 귀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파삭거리며 흩어지고야 마는. 가연이와 함께 있음에도 차무겸만 떠올리면 고독을 먼저 씹어 삼키게 되는 심정이었다.

“차무겸이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걔가 없으면 내가 생활이 안 되니까. 여기서 나 혼자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어. 그렇다고 암영으로 돌아가자니 너무 아쉬운 거야. 내가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그래서 그냥 모르는 척했어. 걔 여자친구들이 날 싫어하는 걸 알지만, 내가 차무겸이 없으면 안 돼서….”

“사은아.”

잠자코 듣던 가연이가 한참 만에 소리를 냈다.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조금의 잠기운도 묻어나지 않는 명료한 어조였다.

“한번은 차무겸 여자친구가 나한테 그러더라. 너 진짜 썅년이라고. 임자 있는 남자 옆에 붙어서 그렇게 꼬리 치고, 뭐 나올 거 뻔히 알아서 달라붙어 있는 거 진짜 역겹고 추하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부정 못 했어. 솔직히 사실이니까.”

달빛 한 줌 없는 암흑 속에서 가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벌 받는 걸까?”

“…….”

“다 알면서 다른 사람한테 상처 줬으니… 벌 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토로한 적 없는 내 죄를 내 입으로 시인했다.

똑딱.

별안간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귀를 침투했다.

나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침대 위에 은색 테두리의 동그란 시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저것의 소리일까? 아니면 또다시 내 마음의 압박감이 낳는 소리일까? 명확히 분간하지 못하는 채로 눈을 감았다. 어둠이 삽시간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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