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4화 (14/24)

14장.

[오늘 오후, 귀추가 주목되던 국내 최대 복합관광단지 착공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많은 유명 인사들이 얼굴을 비추어 화제가 되었는데요. 그중에서도 투자에 참여한 해운그룹의 차혁수 사장과 외아들 차무겸 씨가 공식적으로…]

티브이 소리는 오늘도 공백을 잡아먹는다.

내 눈동자는 시리디시린 티브이의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시리고 창백한 색. 생명력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색. 그렇게 가만 앉아 있다가 뉴스 하단에 뜨는 현재 시간을 힐끔 보았다. 어느새 6시에 가까워졌다. 이곳은 여전히 나의 시간을 눈 깜짝할 새에 빨아 먹는 중이었다.

그새 자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알고 보니 차무겸이 내게 먹인 건 정말로 영양제였다. 성분 중 수면을 유발하는 게 있었고, 체력이 썩 좋지 못한 이들은 약이 몸에 적응되는 동안 잠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 설명처럼 조금쯤 길이 든 건지 이전처럼 병든 닭같이 시도 때도 없이 꾸벅대지는 않았다.

멍하니 티브이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난 새벽처럼 침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저것은 이제 여느 때건 저렇게 개방된 형태를 유지했다. 심지어 차무겸과 관계를 나눌 때마저도. 예전엔 못 열게 하느라 안달이더니 이제는 마치 저 문턱을 어디 한번 밟아보라 유혹하듯 눈앞에 줄기차게 펼쳐졌다.

차무겸의 고약한 술수였다.

그는 나의 고분고분함과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쉽게 믿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의 본능과 두려움을 저울질했다. 희망과 절망의 바닷속에 담금질하듯 나를 집어넣었다가 빼내기를 반복했다.

그 노골적인 증거가 바로 저 열린 문.

그는 한편으로는 내가 그날의 새벽처럼 부리나케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저 문을 아예 걸어 잠가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완벽히 거머쥐기 위해서. 차무겸은 언제건 결과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 데에는 나의 잘못이 크다고 주장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보란 듯이 버텼다.

이제는 문이 닫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갇혔다고 볼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나는 내 스스로 이 침실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가끔씩, 가끔씩 너무 숨이 막혀올 때면 열린 문 너머의 복도만 슬쩍 바라보고는 했다. 고작 문과 문틀을 사이에 둔 같은 공간인데, 이곳과 저곳의 공기가 다를 것만 같은 달콤한 상상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느라 부단히 애를 먹었다.

터벅터벅.

침대 끝에 시체처럼 앉아 있자니 저 너머 계단에서부터 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금 푸른빛의 티브이 속에서 나오는 인영이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의 예상대로, 2층으로 올라온 차무겸이 멀거니 보였다.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차무겸이 보이자마자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정확히 선을 지켜 문턱 직전에 멈춰 섰다. 오늘따라 피로한 낯의 차무겸이 나를 가만 응시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빛이 가시처럼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왔어?”

내가 인사를 건네자 차무겸은 얼음 상태에서 깨어나 침실로 들어섰다.

“응. 나 넥타이 풀어줘.”

오늘도 역시나 투정이 이어진다. 나는 넥타이의 매듭으로 손을 뻗어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사르륵. 천이 매끄럽게 스치는 소리와 함께 넥타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차무겸이 허리를 기울여 내게 입을 맞춘 것도 동시였다.

적당히 숨을 섞었다 싶을 즈음, 그가 입술을 떼며 물었다.

“잘 있었어?”

질문에서 구역질 나는 악랄함이 폴폴 내풍긴다. 나는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 대답이야 이미 가정부를 통해 들었을 테다. 그들은 차무겸이 없을 때에 나를 감시하는 눈과 귀가 되어주니까. 무엇보다 지금 내가 침실에 있다는 게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는 가장 큰 증거기도 하고….

“응.”

차무겸의 사나운 눈발 아래에서는 순종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는 무엇이든 확실하게 맺음 짓는 걸 좋아했다.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었느냔 질문에 반드시 그렇다고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말이다.

차무겸은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치고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욕실로 향한 그를 기다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푹 꺼지는 침대 매트리스가 초조하게 마른 나의 속내 같았다.

오늘, 그를 기다리며 내내 마음속에 품었던 결심을 끄집어낼 때가 도래했다. 이 공간에 갇히는 것과 동시에 멈춰버린 나의 시간을 그나마 멀쩡한 궤도로 돌리기 위한 방안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본능을 잠재우고 조금 진정하니 현실이 확고히 보였다. 이 집을 나간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었다.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차무겸이 필요했다. 그간 나의 안정적인 삶 뒤에는 차무겸의 지원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가 발을 쑥 빼면 나의 삶은 단단한 지반을 가진 들판이 아닌, 황량한 바람만 부는 척지가 될 테다.

차무겸이 가진 부와 권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나였다. 그러니만큼 이곳에서 빠져나가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야, 좋은 관계를 다지며 아군으로 놔두는 게 나았다. 기실 차무겸이 작정하면 나와 같은 애의 인생을 망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관계를 이전처럼 돌리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게 틀리지 않았다. 되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내가 바라보던 미래와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 더, 그에게서 일찍 독립하는 발판을 만들 테다.

꾹 닫힌 욕실 문 너머 쏟아지는 물소리가 귓전을 웅웅 울렸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차무겸이 가벼운 차림새로 욕실을 나왔다. 욕실에 딸린 드레스룸을 이용했는지 슈트가 아닌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말리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 위에 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저녁 아직이지?”

차무겸은 젖은 머리칼을 두어 번 가볍게 턴 뒤에 수건을 침실 안 벨벳 소파 위로 대충 걸쳤다. 그리고 내게 심상하게, 일상의 흔적을 읊듯 속삭였다.

“밥 먹으러 가자.”

“…가자고?”

“응.”

“어디로?”

차무겸은 아주 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한쪽 눈가를 샐그러뜨렸다. 곧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에서 물기가 뚝, 떨어졌다.

“어디긴 어디야. 1층이지.”

벙찐 나를 두고 차무겸은 먼저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보여주는 너른 뒤태에서 나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뒷골이 뜨거워지며 동시에 등골은 서늘해지는 그런, 모순적인 감각.

그건 지난날 깨어났을 때 열려 있는 침실 문을 보고 느낀 것과 한 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또 무슨 함정이지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차무겸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벼이 문턱을 넘었다. 뒤따르는 걸음 소리가 없는 걸 알아챘는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안 가? 여기서 먹고 싶어?”

그 말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던 나의 발목에 실을 걸어 끌어당겼다.

나는 차무겸의 뒤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발씨는 조심스러웠고 복도와 계단을 걷는 내내 주변을 눈치로 살폈다. 누군가에게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침실에 갇힌 지 대략 몇 달이 다 되어가는 내게는 이 과정이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거실의 통창 너머로 분수대가 보였다. 해가 길어진 탓인지 바깥은 아직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는 나비가 형형색색으로 핀 꽃과 녹음 사이를 분주하게 휘저었다. 나는 그 장면을 꿈결처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저 유리창을 깨고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들끓은 까닭이었다.

“서서 잠이라도 든 거야?”

그러던 차, 어깨에 손이 휘감겼다.

강한 힘이 실리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벗어날 수 없는 압박감이 전달됐다. 차무겸은 우두커니 서 있던 나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정말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맛깔스러운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조리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가정부가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초면인 것을 보아하니 새로 온 가정부인 모양이었다. 푸근한 인상이었다. 나는 제법 딱딱하던 지난날의 가정부를 떠올렸다가 지우며 그녀를 향해 어색하게 묵례했다.

저녁상을 차린 가정부는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를 남기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니 차무겸과 주방에 단둘이 남겨졌다. 이제 막 만든 듯한 소고기뭇국에서 연기가 포슬포슬 올라왔다. 숟가락을 들어 국을 휘휘 저으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손은 태연함을 모방하듯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따스한 국물이 입 안으로 들어올 때쯤 정신이 번쩍 들었다.

1층으로 내려왔다.

시공간을 마구 비틀던 그 침실에서 벗어난 것이다.

“갑자기 왜….”

기뻤지만 그만큼 불안했다. 나는 일전에 희망과 함께 절망 역시 먹어치웠다. 코앞으로 닥친 희망에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폭풍전야일지도 모르기에.

내가 무심코 뱉은 혼잣말에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차무겸이 고개를 들었다. ‘응?’ 하고 묻는 태도가 천진하기 짝이 없다.

“나… 침실 나와도 돼?”

차무겸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었다.

“왜 안 돼?”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너그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거기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차무겸은 호불호가 확실한 만큼 보상과 처벌도 확실했다. 아마도 지금 이건 내게 내려진 보상일 테지. 침실 문을 활짝 열어뒀음에도 보이지 않는 족쇄라도 찬 것처럼 얌전히 굴며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데에 내려진 보상.

그러나 보상인 동시에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나의 발목에 걸린 보이지 않는 족쇄는 그저 쇠사슬이 늘어난 것뿐이다. 내 의지로 다닐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것뿐, 여전히 마음대로 이곳에서 벗어나도 되는 건 아니었다. 차무겸은 가끔씩 이상한 데서 악착스러운 면모를 보이고는 했다. 우리가 작금 벌이는 이 희한한 줄다리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줄을 확 끌어당길 순간을 역이용하기 위해 제가 쥔 것의 일부를 슬금 내어주는 가증스러운 아량일 뿐이다.

한번 정신이 드니 흐려진 상념이 조금쯤 걷어졌다.

“그렇구나….”

나는 큰 감정의 격동을 보이지 않으려고 담담한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술 떠먹었다. 입 안에 굴러다니는 밥알을 씹어 넘긴 후 나는 오늘 부탁하고자 다짐했던 것을 지금 꺼내자고 결심했다.

“무겸아.”

물을 한 모금 마신 차무겸이 고개를 들었다.

“너 밖에 나가 있을 동안… 나도 공부 좀 하고 싶어.”

내가 이 집에 갇히며 동시에 차무겸이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수가 증가했다. 그는 이제 선대가 닦아놓은 해운의 승승가도에 올라타기 위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차무겸과 티브이 속에 나오는 그는 마치 다른 인물 같았다. 그곳에서는 나에게 보인 기이한 집착과 사람 하나를 가볍게 구렁으로 처박아버리는 악랄함 따위 엿볼 수가 없었다.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라 훌륭하게 성장한, 번듯한 재벌가의 후계자일 뿐이었다.

그런 차무겸을 볼 때마다 내가 딛고 있는 바닥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이렇게 있어서는 안 돼. 차무겸이 나를 지금 이곳에 가두었다고 해서 넋 놓고 시간만 죽일 때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갇힌 입장에서 바랄 수 있는 건 차무겸이 베풀어줄 알량한 자비가 전부였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부탁은 무엇이 됐든 간에 공부할 수 있는 걸 좀 달라는 항변이나 다름없었다. 갇힌 그날부로 나는 핸드폰을 포함하여 내가 평상시 들고 다니던 그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노트와 필기구마저도.

“공부?”

“응. 나 학교도 가야 하는데… 요즈음 공부를 통 못 하니까 걱정이 돼서.”

“…….”

“복학하면 진도도 따라가야 하고, 졸업반 되면 바로 임용도 준비해야 하니까….”

차무겸이 픽 웃었다.

그 웃음이 혀끝을 굳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절주절 늘어놓던 말이 뚝 그쳤다. 그렇지 않아도 퍼석하던 입 안이 견딜 수 없이 깔깔해졌다. 나는 물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차무겸의 눈치를 살폈다. 저 반응의 의미를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이유로 멈추었던 식사가 재개되었다. 차무겸이 간간이 말을 걸었고 나는 그에 대답을 해주거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차무겸이 다시 그 주제를 꺼내 드는 일은 없었다. 언제 희망이 찼느냐는 듯 절망은 다시 스멀스멀 물때처럼 끼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으로 수십 권의 임용고시 대비 기출 문제집과 유선 노트, 다양한 필기구가 도착했다.

차무겸의 자비가 내게로 떨어졌다.

* * *

1층으로 내려온 날 이후, 생활 반경이 부쩍 넓어졌다.

이제 더 이상 침실의 문턱은 내게 있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씻고 침실을 나서는 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었다. 이 집을 나설 수 없는 답답함을 그나마 환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쳇바퀴 굴러가듯 일정하게 흘러갔다. 오전, 햇살이 가장 광활하고 찬연하게 흩뿌려지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문제집을 풀었다. 그리고 정오가 가까워질 즈음 주방으로 향해 가정부가 차려놓은 점심 식사를 했다.

“입에 좀 맞아요?”

“네.”

새로 온 가정부는 푸근한 인상답게 곧잘 말을 걸었다. 점심 식사를 한 뒤에는 2층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빽빽하게 늘어선 책 중 영문으로 이루어진 원서를 꺼내 번역을 해보며 모르는 단어를 정리하고 문법을 익혔다. 그 후에 차무겸이 돌아오기 전까지 서재에 있는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그렇게만 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가고는 했다.

그 쳇바퀴 속에서 으리으리한 저택을 둘러싼 풍경은 여러 색감이 덧입혀지며 변화를 겪었다. 침실에만 박혀 있어야 했던 빛바랜 봄, 고분고분함으로 포장한 대항 속에 지나간 여름.

이제 가을이 코앞이었다.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곧 돌아오신다네요.”

가정부였다.

나는 노트북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차무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거나 외부 주차장 개방 알림이 울리면 그녀는 이렇게 나를 부르러 왔다. 내가 부탁한 일이었다. 행여나 그가 저보다 공부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변하여 자유를 깨뜨릴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가로지르는 서재 한편에 큼지막한 장식장이 놓여 있었다. 일정한 크기로 나뉜 칸 안에 질서정연하게 놓인 시계줄이 반짝, 광란한 빛을 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쓱 훑은 뒤 서재를 빠져나갔다. 함께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가정부는 오늘의 날씨나 저녁 식사 메뉴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럭저럭 반응하며 고개만 주억거리기를 반복했다.

침실을 나서기 시작한 후로 가정부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수 번 나눈 대화로 짐작건대 그녀는 내가 지금 이 집에 갇혀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설마 알고 있다면 무슨 일로 휴학을 했냐, 복학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냐와 같은 속 편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생각은 의구심이 되었다. 혹시나 그런 태도 역시 차무겸의 지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 그래서 나는 가정부에게 내 이야기를 일절 털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정부는 자신에게 나와 동년배의 딸이 있다며 매번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1층에 막 도착했을 때 집으로 들어서는 차무겸을 발견했다. 그 혼자는 아니었다. 차무겸과 비슷한 색채감의 슈트를 입고서 그의 뒤를 따르며 무언가를 전하던 박승원이 나를 발견했다.

“어, 사은아. 오랜만이다.”

우울함은 가끔씩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이렇게 갇힌 입장에서 그 예민함은 빠른 눈치를 선사하는 하나의 무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나는 나를 보자마자 티 나게 멈칫하는 반응과 더불어 지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박승원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그는 내가 차무겸에 의해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을 아는 걸지도 모르지.

속상한 깨달음을 애써 밀어내며 담담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게, 오빠.”

곧 시야가 가려졌다. 내게로 다가온 차무겸 때문이었다.

“밥 먼저 먹고 있어.”

무언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차무겸은 나를 주방 쪽으로 보내고서 곧바로 서재로 올라갔다. 박승원이 그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두 장정을 보던 나의 눈동자가 어디론가 미끄러졌다.

조금 전 차무겸과 박승원이 함께 들어온 현관문이었다. 이전의 그 밤이 아주 흉흉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도어 록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요즈음 1층에 있다 보면 시시때때로 현관문 쪽으로 신경이 가닿았다. 지금이라면 열리겠지. 지금이라면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겠지. 그 본능이 신경을 쭈뼛 세우고 어떠한 전율을 머리끝까지 내달리게 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것처럼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럼에도 향할 수 있는 건 지긋한 시선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얼른 눈을 돌리고는 했다. 학습된 무기력함과 두려움이 몸속에 망설임의 기포를 꾸물꾸물 피워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는 적당히 눈을 떼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입맛이 없어서 깨작거리고 있기를 한참, 차무겸과 박승원이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가정부가 식탁에 세 사람분의 음식을 차렸기에 나는 당연히 박승원이 밥을 먹고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박승원은 주방까지 뒤따라왔다가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편한 옷으로 환복한 차무겸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내일 무슨 날인지 알지?”

“알아. 형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얘기했잖아.”

“그래, 그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아 참, 내일 숍 예약은 두 명으로 해.”

이만 주방을 나서려던 박승원이 멈칫했다.

“두 명?”

“응. 사은이도 갈 거야.”

접시 위에서 맥없이 이어지던 나의 젓가락질이 멎었다. 스케줄과 관련된 대화 속에 난데없이 내가 등장했다. 나는 조금 커진 눈동자로 내 맞은편에 앉은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박승원은 당황했는지 말없이 눈알만 굴리다가 날래게 그의 뒤로 다가왔다.

“무겸아. 거기가 어떤 자리인지 잊었어?”

“형이 지겨울 만큼 얘기해서 안 잊었다니까.”

“너 알잖아. 내일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회장님도 참석하시기로 했어.”

“알아. 그래서 데려가는 거야.”

박승원의 심각한 태도와 달리 차무겸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차분했다. 나를 화두에 던져놓고서 이리저리 떠드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어디를 가는데?”

차무겸과 박승원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돌아왔다.

“저번에 우리 아버지 뵀던 자리 기억하지?”

“…응.”

“그런 자리에 한 번 더 가는 거야.”

차무겸은 실로 여상스레 굴었으나 벌써부터 걱정이 한가득인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박승원을 보고 있노라면 결코 그 태도 그대로 받아들일 일이 아닌 듯했다.

“무겸아, 아무리 그래도….”

다시금 설득을 해보려는 건지 분주하게 입술을 떼던 박승원은 돌아오는 차무겸의 서슬 퍼런 눈빛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 아프니까 그만 가.”

“…휴우.”

박승원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나를 힐끗 본 후 알겠다며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심상치 않은 박승원의 반응이 내 마음속에 찜찜함을 낳았다. 회장님도 오시기로 한 자리. 내가 알기로 박승원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왜?”

“그냥… 승원 오빠 반응 보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솔직히 내가 뭐라고 그 자리에 가.”

기실 그가 평소처럼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하여 나를 압박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차무겸은 예상과 달리 빙그레 웃으며 나의 팔목 부분을 어루만졌다. 접촉이 스친 끝에 미묘한 전류가 흘렀다. 이제야 상처가 나아 붕대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위였다.

“내일은 네가 꼭 가야 하는 자리야.”

“…왜?”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하지만 승원 오빠는 그것 때문에 걱정을….”

“슬슬 거슬리는데.”

“어?”

“그 오빠라는 소리.”

“…….”

“박승원이랑 친한 것 같아 보이잖아.”

화를 낼 부분에서는 의외로 침착하고 정작 별것 아닌 부분에서 꼬투리를 잡는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차무겸을 응시하다가 기력이 다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녀석이 그러고자 정했으면 나에게 피할 길은 없었다. 이제 막 듣게 되었지만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일 나는 차무겸의 곁에 서 있을 것이다. 나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일까.

차무겸과 함께하는 내일이 다가오는 게 점점 두려워졌다.

* * *

오늘의 자리가 중요하다는 박승원의 말은 결코 허투루 넘길 게 아니었다. 그건 이 바닥 사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주요 인사들만 참석한 것처럼, 창립기념식보다 머릿수가 훨씬 적었다. 엄선된 장소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날처럼 샹들리에의 산란한 빛 아래 펼쳐지던 널찍하고 탁 트인 연회장이 아니라 일정 수만 포용할 수 있는 호텔 클럽 라운지였다. 입장 절차부터 복잡해 보이는 이곳은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알고 보니 이번에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떠들던 국내 복합관광단지 투자에 참여한 이들의 고고한 회합이었다. 명망 있는 여러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차무겸의 집안은 유독 도드라졌다. 일단은 모임을 가지게 된 이 호텔이 그의 집안 소유라는 것부터가 그랬다.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오늘도 칙칙하기 그지없는 검은빛을 발산했다. 차무겸도 나와 같이 검은색 옷을 입었다면 이런 품격 있는 자리가 아니라 장례식이라도 온 것처럼 우스웠을 테지만, 그는 회색 슈트를 차려입어 그 우스꽝스러움에서 교묘히 벗어났다.

차무겸은 그간 후계자로서 소화해낸 시간을 입증하듯, 이전보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능숙해졌다. 가식적인 미소와 입에 발린 말, 상투적인 인사를 우아하게 건네면서도 저를 견제하거나 해운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뱀처럼 서늘한 인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런 차무겸의 옆에 서서 나는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샴페인만 홀짝거렸다. 톡 쏘는 맛 때문에 목 안쪽이 따끔따끔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막 라운지로 입장하는 안진권을 보았다. 참석한 이 중 우리 나이대가 별로 없음을 생각하면 역시나 안진권의 집안도 힘깨나 쓰는 편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안진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향해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차무겸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잡아당겼다. 혹여나 안진권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나 싶어 뒷골이 서늘하게 말라붙었다. 그러나 다행히 차무겸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디 가?”

말없이 빙글 웃은 차무겸은 클럽 라운지의 한편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섰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 너머에 방 하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밀스럽던 공간 속에서 등장한 더더욱 은밀한 공간.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충분할 만큼 넓은 복도가 갑자기 너무나 비좁게 느껴졌다. 별안간 엄습한 긴장감이 유발해낸 폐쇄성이었다.

달칵.

복도 끝방의 문을 연 차무겸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라운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그곳은 사교의 장이라면 이곳은 한숨 돌리기 위한 휴식 장소에 가까워 보였다. 일단은 은은하게 낮춰놓은 조도만으로도 피로도가 확 하강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래서 더욱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선뜻 접근할 수 없는 기류가 발목 아래로 안개처럼 넘실댔다.

쭈뼛거리며 차무겸을 따라가던 중, 가죽 소파 상석에 앉은 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차무겸과 닮았고, 전에 인사를 드렸던 그의 부친과도 닮은 사람….

차무겸의 조부였다.

“할아버지.”

차무겸이 나의 확신에 불을 지피듯 잔잔한 웃음과 함께 그를 불렀다. 나는 그에게 질질 끌려가 강제로 소파에 착석했다. 차무겸의 조부이자 해운그룹의 회장인 그는 노쇠한 듯 보이나 동공 속에 푸르고 날렵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마치 늙고 발톱이 빠졌다고 한들 맹수는 맹수임을 증명하는 호랑이처럼.

난데없는 맞닥뜨림에 온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런 나와 달리 차무겸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차무겸의 조부는 말이나 행동이 크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욱 몸가짐을 바로 하게 되는 기백을 풍겼다.

그 엄숙한 시선이 머지않아 내게로 와 닿았다.

“사은이에요. 저번부터 인사드리겠다고 했는데 이제야 데려와서 죄송해요.”

차무겸의 소개는 늘 일방적이다. 내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나를 덜렁 도마 위로 끄집어 올렸다. 나는 경직된 몸을 얼른 깨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혀가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말실수를 하느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을까, 고민에 빠져 있는데 그의 조부가 대뜸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무겸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바로 너와 결혼할 생각이라던데.”

그 화제는 어벙한 정신을 날카롭게 찢어발겼다.

“…네?”

정신이 돌아온 건지 아니면 완전히 나가버린 건지, 도통 분간할 수 없는 혼란이 몰아쳤다.

“아버지 따라서 차근차근 과정 밟고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렴,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이런 나를 두고 그와 그의 조부는 태평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가운데에 두고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거리는 화제에 노출되는 게 빈번해졌다. 나의 의지는 늘 그랬듯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멍청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차무겸.”

나는 나도 모르게 차무겸의 팔뚝을 홱 붙잡았다.

“무슨 소리야, 이게?”

매끄럽게 이어지던 대화에 제동이 걸렸다. 차무겸의 얼굴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긴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경직된 낯을 한 채 그를 마주했다.

“결혼이라니. 너, 지금,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다시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도 허무맹랑했다. 지금 이렇게 내 스스로 집을 나서지도 못한 채로 사는 것조차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인데, 나와 무얼 할 거라고? 결혼? 내가 그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차무겸은 이런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지금 역시도 하나의 시험 혹은 심판일지도 모르지만 평소처럼 차분함을 가장할 수 없었다. 침착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다가 차무겸이 만든 진창에 고꾸라지기 직전이었으니까.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마땅히 대항을 해야 했다. 기실 그렇게 논리적으로 굴 수 있는 정신머리가 아니기도 했다.

그제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꼭 와야 한다던 차무겸의 말을 이해했다.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침묵으로 일관하는 차무겸을 대신하여 나는 그의 조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제가 차무겸과 결혼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조부와 손자가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나의 신경을 뜯어먹는 듯했다. 초조함에 속이 뒤집어졌다. 차무겸의 시선이 뚫어버릴 것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는 걸 아는데도 좀체 진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저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애예요.”

내가 그간 어떠한 마음으로 그의 비위를 맞췄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 고충을 버텼는데.

“저와 결혼하는 거, 차무겸이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거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디 핏줄의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막아달라는, 이를테면 부탁이자 간절한 청이었다.

어렸을 적 납치 사건으로 하여금 차무겸의 부친이나 조부가 그를 오냐오냐하는 건 잘 알겠다. 그러나 설마 결혼까지 넙죽 허락해줄 정도인 줄은 몰랐다. 보통 이런 있는 집 자식들은 저들과 비슷한 집안끼리 이어지는 게 불문율 아니던가. 아니, 그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를 위해 베풀어줄 아량으로 나를 희생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과호흡이 온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뻔뻔하게 결혼을 운운하는 차무겸의 태도로부터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없었지?”

“…….”

“나 풀어줄 생각… 없었던 거야, 너.”

지금까지 내가 벌인 행동을 잠자코 응시하던 차무겸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어디 한번 계속해보라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여유로움에 이가 갈렸다.

그에게 순종적인 양처럼 굴던 과거의 나날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싫은데도 억지로 다리를 벌리고,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대하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살랑거리면서 아첨하던, 자존심이라는 건 저 멀리 내던져버리고 비굴하게 설설 기던 그 모든 것들이 뜨겁고 울컥한 분노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차무겸을 두고 그대로 돌아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방을 뛰쳐나왔다. 카펫을 밟는 걸음이 금방이라도 자빠질 듯 심히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높은 구두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구두를 벗어 던졌다. 다른 출구를 찾고 싶었지만 길도 알지 못했고 시간도 부족했다. 내게 주어진 도피처라고는 조금 전 차무겸의 곁에 인형처럼 서 있던 라운지뿐이었다.

새까만 틀로 이루어진 라운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고상한 클래식이 물결처럼 흐르는 내부에 쩌적, 균열이 갔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아마도 그들의 눈에 지금 나는 무척이나 괴이해 보일 것이다. 양껏 달리느라 헝클어진 머리칼에, 신발을 어디 내다 버린 채 맨발로 카펫 위에 서 있었으니. 실제로 이 변변찮은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기이함을 품은 시선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속을 빠듯하게 일구는 분노가 저런 불편한 이목 따위를 간단하게 녹였다. 나는 서둘러 라운지 입구를 향해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경호원들이 나를 막았다.

“이거 놔요, 이거 놔!”

지금 잡히면 끝이야.

순종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자코 묻어둔 적신호가 속을 번쩍번쩍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경호원들은 나의 저항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 벗어나지 못하도록 팔뚝을 아프게 옭아매는 까닭에 미간 위로 금이 새겨졌다.

나는 그들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리다가 그만 발목을 삐끗했다. 시야가 기우뚱 비틀리며 바닥으로 엎어지는 동시에 뒤편에서 인기척이 엄습했다.

끼익, 내가 닫다가 만 문을 가벼이 여는 손짓에서 묘하게 첨예한 기류를 느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보지 않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데, 이미 그 정체를 짐작한 것처럼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뒤덮었다.

나는 추레한 몰골로 더듬더듬 뒤를 돌아보았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차무겸의 반반한 안면이 어렴풋이 비쳐왔다. 그는 미적지근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라운지를 한 번 쓱 둘러보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가신 일이라도 맞닥뜨린 사람처럼.

멍청한 나는 여전히 차무겸의 행동 하나하나에 갖은 희망을 품었다. 이런 나를 상대하기 싫은 것처럼 그냥 지나가 줘. 이제 질릴 때도 됐잖아. 횟수를 세는 것도 의미 없이 부딪쳐온 몸뚱어리, 이제는 지겹게 느껴질 만도 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가. 이대로 나를 버려.

그러나 이런 내 바람과 달리 차무겸은 천천히 다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왜 그래, 사은아.”

“…….”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시끄럽게 굴면 안 돼.”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살가운 음성이 나에게 절망의 꺼풀로 내려앉았다. 희망이 비껴간 점에서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머잖아 날카로운 실소가 비죽 새어 나왔다. 아주 터무니없는 걸 그에게 바라고 있었음을 깨닫자 마음이 공허하게 비었다. 그리고 동시에 초조해졌다.

차무겸을 있는 힘껏 노려보던 나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손으로 더듬더듬 짚으며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기었다. 일어나고 싶었으나 아까 풀린 두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가 않았다. 얼마 못 가 팔뚝이 붙잡혔다. 더 이상 이런 내 초라한 행색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처럼 굳건한 손길이 나를 억지로 일으키려고 했다.

“싫어! 거기로 안 돌아가, 안 돌아갈 거라고…!”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딛고 있던 얼음판은 깨졌다.

차무겸은 처음부터 나를 풀어줄 생각 따위 없었고 나는 그의 악독한 계략 속에서 우습게 놀아난 것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눈앞에 있는 희망에 닿을 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다.

산산이 조각난 얼음판은 이제 송곳이 되어 나의 여기저기를 찌를 게 뻔했다. 그곳, 시간을 비정상적으로 빨아 먹는 그 침실 속에 다시 갇히게 될 것이다.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도와주세요, 누가, 저 좀 도, 도와…!”

나는 내 허리를 감싸 안으려는 차무겸의 몸을 밀치며 다급히 외쳤다. 내가 등장한 것을 기점으로, 라운지의 분위기는 오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렸다. 요동치던 시야가 눈앞에 깔린 인물들의 상을 바로 세웠을 때, 나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

주변에 사람이 가득한데 모두 다 무미건조하게 식은 눈길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모조리 내게 꽂혀 있었다.

마치 사람의 형태로 깎아놓은 돌덩이 사이에 놓인 양 눈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굴러갔다. 오래지 않아 나는 낯선 기류 사이에서 그나마 친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샴페인 잔을 든 안진권이 나를 보며 허,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쭉 편 검지로 제 관자놀이 부근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그제야 나는 사람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깨달았다.

내가, 이상해 보이는구나.

차무겸이 아니라 내가.

차무겸처럼 고고하기 짝이 없는 혈통만으로 이루어진 이 특권층의 온상지 속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내가 불가해한 이방인이었다. 뭐 하나 빠지는 데 없는 재벌가 후계자의 파트너로 이 자리에 참석해서는, 이따위의 저급한 소동을 벌이는 내가….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침착하게 시선을 보내는 태도와 달리 안진권처럼 속으로는 나를 미쳤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이상하게도 그게 너무나 허망해서 혀가 굳었다. 나 홀로 종족이 다른 외딴섬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나의 절박함이 그들에게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모양으로 처졌다.

차무겸은 내 발버둥이 잠깐 사그라든 틈을 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이 자리를 더 지킬 생각이 없는지 그는 날 데리고 곧장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목에 한바탕 소요가 잇따랐다. 그의 어깨를 밀치고 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쳤으나 차무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주차장에 도착하여 뒷좌석에 욱여넣어질 때까지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놔! 놓으라고!”

찰싹!

아무렇게나 손을 휘두르다가 그만 차무겸의 뺨을 후려쳤다. 마찰음이 고요한 주차장 내부에 울렸다. 차무겸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매끈한 그의 뺨 위로 손톱자국이 길게 났다. 그는 제 손등으로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볼가를 쓱 어루만졌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모습이 공기를 꽉 조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겁을 먹어 목을 움츠리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차무겸이 열린 문을 닫으며 나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어 시트 위로 내리찍듯 눕혔다.

“어리광도 정도껏 부려야지.”

“놓으라고, 나, 싫어. 거기 안 갈 거야. 안 돌아가…!”

그는 내 애처로운 항변을,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틀어막았다. 운전석에 올라탄 박승원이 뒷좌석에서 완전히 뒤엉킨 나와 차무겸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키웠다. 차무겸이 그런 그를 향해 “출발해.” 하고 싸늘하게 일갈했다. 박승원은 시동을 걸어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면서도 룸 미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형, 이거 올려.”

곧 차무겸이 뒷좌석 어딘가를 툭툭 두드렸다.

박승원은 고민하듯 말이 없더니 이내 어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운전석과 뒷좌석 가운데로 검은 막이 지이잉,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간을 완벽히 분리시키는 차단 기능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음 같아서는 일정한 속도로 올라오는 그 막 위로 머리통을 쑤셔 넣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이 비좁은 공간에 차무겸과 단둘이 놓이기 싫었다. 하지만 차무겸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온몸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다.

검은 막이 완전히 천장에 닿아 공간이 분리가 됐을 때 그의 손이 치맛자락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정도를 모르는 파렴치한 손길에 마음이 차게 식었다.

“하지 마, 차무겸!”

갈급하게 외쳤으나 이제 와 말을 들을 놈이 아니었다. 차무겸은 능숙하게 손을 놀려 속바지와 팬티를 끌어당겨 벗겼다. 곧 검지와 중지를 혀로 핥고서 가랑이 사이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아무런 자극도 없어서 건조한 입구에 손끝이 닿아 둥글게 비벼졌다.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싫, 안, 안 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시각은 가려졌을지언정 소리는 앞 좌석까지 영향을 미칠 터였다. 더군다나 마구잡이로 처박는 식의 섹스를 주로 하는 차무겸이라면 이 차가 덜컹덜컹 흔들릴지도 모르지. 그럼 결국 박승원에게 우리가 이 뒤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죄다 들키게 될 거다. 물론 그는 이미 내가 차무겸과 수도 없이 배를 맞춘 걸 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단지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실제로 오감을 통해 겪어 보는 건 하늘과 땅 차이의 일이었다. 내 마음 깊숙이 내재된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수치심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

꽉 다물린 아래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악스러운 파고듦은 두려움에 혼탁해진 정신을 갈라놓는 것만 같았다. 정수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쿵, 소리를 냈다. 차무겸은 쉽게 틈을 내주지 않는 아래를 우악스레 쑤셔대며 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나는 눈꺼풀을 깜박거릴 때마다 눈물을 흘려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의 뺨을 핥았다.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

손가락이 각도를 틀어 조금 더 은밀하게 빠졌다. 스치기만 해도 등허리를 발발 떠는 부위가 집중적으로 찔리자 내벽이 조금씩 습해졌다. 나는 구두를 내던져 오롯이 드러난 발바닥을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도리질했다. 차무겸은 질구에 박아놓은 손가락을 가위질하듯 벌렸다가 맞붙였다가 하며 아래를 제멋대로 난도질했다. 그러면서도 추삽질하듯 푹푹, 안으로 일정하게 찔러 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엉덩이 아래에 깔린 옷자락이 조금씩 젖어 들고 있었다.

“너 같은 거랑, 흐, 결혼, 을 왜 해, 내가…!”

“말 존나 예쁘게도 한다.”

차무겸이 심술을 부리듯 질벽을 콱! 쑤셔발겼다.

“으흑!”

내가 높은 신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운전을 하고 있는 박승원을 상기해내고 급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행여나 그가 지금의 교성을 들었나 헤아리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나는 미끈하게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걸 깨달은 건, 뭉툭한 무언가가 비부에 닿아 살살 비벼지고 있을 때였다.

“아! 안, 안…! 흣!”

대체 어느 틈에 바지춤을 끄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무겸은 잔뼈가 도드라진 나의 목덜미를 혀로 길쭉하게 핥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제가 삽입하기보다는 마치 내가 집어삼키게끔 만들려는 것처럼 제 하복부 쪽으로 내 몸을 슬슬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맞물려 비벼지던 성기가 조금씩 안으로 진입했다. 그 압박감에 허벅지 안쪽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차무겸이 거대한 체구를 사이에 끼워 모아지려는 내 다리를 채신없는 상태로 고정시켰다.

“아, 흐, 으으…!”

그렇지 않아도 협소한 공간에서 이런 짓을 하려니 숨이 다 막혔다. 아니, 사실은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친 상태라서 그런 걸지도. 이렇게 비참하고 화가 나는 와중에도 차무겸에게 일방적으로 깔려야만 한다는 게 속에서 피눈물을 나게 했다. 속 어딘가에서 비린내가 나는 심정이다. 언제건 벌겋게 까져서 새살 돋을 일이 없던 가슴속 여린 살이 또다시 무참히 벌어졌다.

“개새끼… 진짜, 윽, 진짜, 흐, 시, 싫어…!”

나는 시트를 박박 긁던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밀어내며, 저주를 퍼붓듯 중얼거렸다. 내 딴에는 최대한 힘을 실어 반항한 건데 차무겸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 뿐이다. 그게 더 약을 바짝 올렸다.

슬금슬금 허릿심으로 밀어 넣던 그는 마침내 내 안을 가득 장악하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몽롱하게 만드는 쾌락의 물결로 뒤덮인 얼굴이 나른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그게 무엇인들 죄다 찢어발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나웠다.

그게 나만의 기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차무겸이 내 머리채를 아프게 잡아챘다.

“더 해 봐.”

“흑, 아, 아파, 놔, 좀, 아, 빼라고, 빼…!”

“너 욕하니까 존나 꼴린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안에 든 거대한 살덩이가 움찔움찔거렸다. 차무겸이 나의 엉덩이 살을 쥐고 허리를 부드럽게 짓쳐 올렸다. 내벽 안쪽이 진득하게 문질러지는 느낌에 밭은 숨이 쉼 없이 터졌다. 사방이 가로막힌 차 내부의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문에 어정쩡하게 기대고 있던 상체가 불쑥 잡혀 완전히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읏, 하, 아, 아응, 으…!”

차무겸이 불시에 속도를 높여 안을 난잡하게 찔러왔다. 엉덩이 아래로 깔린 시트가 금세 축축해지는 게 피부 위로 선연히 느껴졌다. 웅덩이인지 진창인지, 어딘들 더러운 흙밭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붙잡힌 왼쪽 다리가 꾹 닫힌 검은 막을 툭툭 쳤다. 이러다가 검은 막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박승원은 이런 내 모습을 꼼짝없이 보게 될 테다. 나는 터져 나오는 오열을 삼키며 허리를 비틀었다.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왜? 형이 들을까 봐?”

“흑, 읍… 읏!”

“그럼 잘 참아. 이왕이면 내가 형 귀를 자르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악마처럼 번지르르 웃은 그가 말려 올라간 치마 아래로 드러난 엉덩이를 찰싹 후려쳤다. 반사적으로 수축하는 내벽 안짝으로 포악한 페니스가 쭉 미끄러져 들어왔다. 깊숙이 치달아 안쪽 어딘가를 찌를 때마다 목구멍이 움푹 졸아붙었다. 반응하고 싶지 않아도 그는 내 몸을 너무 잘 알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분노에 야금야금 짓씹히는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흣, 으응, 하아…!”

그가 흔들거리는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조금 더 깊숙이 맞물렸다. 안쪽으로 기이한 전류가 흘렀다. 내부가 아릿하게 휘저어지는 감각에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여기 좋나 보네.”

차무겸이 입꼬리를 휘며 그 부위를 빠르고 예리하게 찍어 눌렀다. 엉덩이가 시트 위에서 통통 튈 때마다 물기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질척한 흔적을 남겼다. 차무겸은 시체처럼 늘어져서 움찔대기만 하는 내 반응이 별로였는지 대뜸 나를 끌어 올렸다. 몸이 한바탕 구르며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 머리가 더더욱 지끈댔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는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뒷좌석이 워낙 좁다 보니까 그렇게 앉으니 내 등에 바로 검은 막이 닿아왔다.

“저거 흔들리면, 하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떡치는지 알까?”

“읏, 아, 내, 려! 차, 무겸, 흐으응…!”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어? 빼라는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빨리 나를 싸게 해서 끝내는 게 낫다는 거.”

“흡, 윽, 아, 깊, 어…!”

“깊게 쑤셔주고 있으니까 당연히 깊지.”

차무겸이 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서 귓가에 입술을 딱 갖다 붙였다.

“네 자궁에 최대한 가까이 싸질러야 애가 생길 것 아니야.”

악랄한 음성이 속을 저몄다. 그러나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작된 정사로 기력이 쭉쭉 빠져나간 몸으로는 완벽히 대항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결국 나는 차가 도로를 달려 자택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없이 그의 위에 올라타 있어야만 했다. 차가 멈췄을 때는 이미 비부가 한가득 고인 정액으로 질척질척했다.

정차하고, 그게 꽤 됐음을 깨닫는 순간 정신이 확 돌아왔다. 나의 반년 가까이를 허무하게 삼켜버린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쯤 차무겸은 완전히 등받이에 몸을 기댄 상태였다. 한 번 사정을 하여 제법 긴장을 푼 기색이었다. 나는 허리께까지 말려 올라간 옷자락을 다급히 끌어 내리고 문을 더듬거렸다. 잠금장치를 수동으로 해제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밤기운을 실은 찬 바람이 내부로 가득 들어찼다.

나는 황급히 아무 곳이나 밟고 또 짚어 뒷좌석을 탈출했다. 그러나 차무겸이 그 꼴을 얌전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뒷좌석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 직전, 그가 내 발목을 턱 붙잡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지막지한 악력이었다.

“윽!”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몸이 간신히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동안, 뒤따라 차에서 내린 차무겸은 희부연 액상으로 번드르르 젖은 거대한 성기를 손바닥으로 쭉 털어내고는 자연스럽게 바지춤을 갈무리했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 그대로 더듬더듬 물러났다.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가고 풀이 깔린 바닥이 피부를 험하게 긁고 있음을 알지만 일어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멀리, 그에게서 달아나야만 했다.

그런 나를 향해 차무겸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비좁은 공간에서의 섹스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쓱 쓸어 넘기는 태도가 실로 차분했다. 새까만 어둠 속에 무리 없이 녹아든 그 모습은 나를 꿀꺽 삼킬 악한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무겸아!”

별안간의 외침이 농축된 긴장감을 갈랐다.

나와 그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어느새 운전석에서 내린 박승원이 불안한 눈길로 우리를 좇고 있었다. 차무겸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아아, 하고 눈가를 느릿하게 문지르다가 고개를 모로 까닥거렸다.

“수고했어, 이만 가.”

나는 희미한 시선으로 박승원을 응시하다가 절박하게 외쳤다.

“오빠! 가지 마!”

이미 주차장에 들어온 거면 혼자 탈출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박승원의 어설픈 동정에라도 기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조금 전 차 안 룸 미러에서 마주쳤던 눈이나 지금 저 흔들리는 표정. 명백히 차무겸의 행동이 선을 넘었음을 인지하는 반응이었다.

“나 좀 도와줘. 나 여기 있기 싫어. 차무겸이 나 여기 가뒀단 말이야. 또, 또 그럴 거야. 오빠, 제발…!”

내 말에 박승원이 거대한 몸을 움찔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와 차무겸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제가 고개를 조아려야 할 상대와 본능적인 양심 사이에서 부단히 깊은 혼란을 겪는 것처럼.

나는 무너질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를 버리고 가지 말라는 무언의 애걸이었다. 머지않아 턱이 강하게 붙잡혔다. 차무겸의 서슬 퍼런 얼굴이 코앞까지 디밀어졌다. 그는 내 눈길 한 줌마저 박승원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 시야를 그득 장악한 채 차게 뇌까렸다.

“꺼져.”

동공 속에 점점이 고인 이채가 광기인 양 파르라니 빛났다. 차무겸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선 박승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느린 긴장감이 공기를 포악하게 갈랐다.

“꺼지라고, 박승원.”

이번엔 그나마 형식적으로 취해주던 호칭까지 떼어버린 어조가 실로 포악했다. 그 살벌한 기색을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박승원의 어깨선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가 결국에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나의 눈동자가 좌절로 도색됐다. 이런 나와 눈을 맞췄다간 또다시 갈등이 들 것 같았는지 박승원은 이쪽을 외면하며 시동을 걸었다. 적막을 깨는 엔진 소리가 나를 잡아먹을 짐승의 포효 같았다.

유일하게 나를 도와줄 이가 사라진 곳에 남은 건 내게로 쏟아질 암흑밖에 없었다.

차무겸이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나를 덜렁 들어 올렸다. 이미 늦어진 시각인지라 가정부는 퇴근했는지 들어선 집 안은 조용하고 서늘했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와중에 팔다리를 마구 비틀며 발버둥을 쳤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게 통했으면 이미 호텔에서부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섬망 같은 불길함이 목 끝까지 알싸하게 물들이는 이 감각을 느끼고 있노라면.

나는 내 허리를 감싼 차무겸의 팔뚝을 깨물었다. 온 힘을 다해 깨문 게 통했는지 그가 순간 나를 놓쳤다.

대리석 바닥을 데구루루 구른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내달렸다. 바로 몸을 세우니 아래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 찜찜함에도 주춤거리거나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1층 복도로 뛰어들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뛰어 들어와 문을 잠갔다.

하아, 하아.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며 더듬더듬 뒤로 물러섰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현실 같지가 않아. 무슨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떼어다 놓은 것처럼 사람을 극한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머릿속이 혼잡했다. 근본적인 이유도, 해결 방안도 그 어떤 것도 바로 서는 게 없었다.

분명 문으로 가려져 있어서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 새까만 음영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너무도 또렷이 느껴졌다. 그 증거처럼 대리석 바닥을 쓱쓱 스치는 둔탁한 걸음이 나의 심장께까지 찍어졌다. 살갗에 좁쌀 같은 소름이 우둘투둘 일어났다.

“사은아.”

쿵.

문을 손가락등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등줄기를 쭈뼛 세웠다.

“열어, 이거.”

나는 괴한의 침입을 앞에 둔 이처럼 숨을 죽였다. 멍청하게 문만 응시하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허둥지둥 숨은 이 공간은 창고에 가까운 방이었다. 문을 제대로 막을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창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망할, 망할…!

자진해서 막다른 길로 들어오다니, 아둔해도 정도가 없었다.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심경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사이 문을 두드리는 힘은 점점 세지고 있었다.

“부순다?”

깔끔하고 냉혹한 경고처럼 문고리에 쿵, 하고 강력한 타격이 가해졌다. 순간 숨을 흡 집어삼켰다. 풍선처럼 팽창한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숨을 곳을 찾아보았다. 그마저도 가구가 적어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옷장, 아니면 침대 밑…. 문가에서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길쭉한 옷장이었다.

내가 보이지 않으면 저기부터 찾을지 몰라. 그럼 그가 옷장을 보는 사이 얼른 침대 밑에서 뛰쳐나오면…. 하지만 침대부터 찾으면?

쾅!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몸을 굽혀 침대 밑으로 더듬더듬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바닥에 자리를 잡은 동시에 문고리가 박살 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게 보였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곧 매끈하게 뻗어진 두 다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불쾌하게 뛰었다. 어느새 잔뜩 맺힌 식은땀이 목 뒤를 습하게 적셨다. 내부를 둘러보는 듯 그 자리에 서서 반응이 없던 차무겸이 하, 하고 옅은 실소를 터뜨렸다.

“술래잡기하자고?”

“…….”

“좋아. 대신 잡히면 벌칙은 내 맘대로야.”

장난스러운 어조마저도 살 떨리는 협박에 가까웠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옹송그렸다.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질서 없이 쿵쾅댔다. 잠시 고민하는지 우두커니 서 있던 차무겸은 나의 짐작대로 옷장 쪽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기다란 두 다리가 그려내는 그림자가, 내가 숨은 침대 아래까지 침범했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그의 두 발이 완전히 옷장 근처로 다가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다가 침대의 다리 기둥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서둘러 몸을 꼼질거렸다.

마침내 침대 아래에서 나오기 위해 상체를 빼는 순간.

“왁.”

“……!”

차무겸이 내가 숨어 있던 침대 아래로 상반신을 확 숙였다. 비좁은 틈새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씩 웃는 얼굴에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분명 옷장 쪽으로 간 걸 봤는데…. 아니면 처음부터 내 생각을 훤히 읽은 건가? 차무겸은 아연함과 창백함이 반쯤 섞인 내 얼굴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그 웃음이 조각조각 어긋난 정신을 깨웠다.

나는 황급히 침대를 밀치고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침대를 가벼이 뛰어넘은 차무겸이 내 허리를 휘감는 게 더 빨랐다. 휘청대는 내 몸을 가벼이 움킨 차무겸이 턱을 쥐어 올렸다.

“술래잡기 끝.”

“흑, 놔! 차무겸, 놓으라고…!”

“이런 거 좋아하는지 몰랐네. 앞으로 종종 할까?”

“닥쳐, 이거나 놓아…!”

“너 욕하면 나 꼴린다니까….”

차무겸은 이번엔 아예 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서 거실 쪽으로 나섰다. 흥얼거리는 그의 콧노래가 정신을 볼품없이 비틀었다. 주먹 쥔 손으로 그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그러나 기분 좋게 웃는 걸로 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했다. 그게 좀체 떨쳐내기 힘든 무기력감을 선사했다.

나는 뜨끈하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고개를 저었다.

“가두지 마. 제발, 제발…!”

급하게 애원했으나 차무겸은 한 치의 자비도 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밟았다. 나의 시야에 거꾸로 뒤집힌 정원이 보였다. 차무겸과 엮이기만 하면 나의 세상은 저렇게, 너무나 쉽게 일그러지고 뒤집어졌다.

왜 몰랐을까. 암영에 있을 때는 왜 몰랐을까. 아니,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도….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에 그리도 매달린 걸까.

“아!”

차무겸이 나를 어딘가에 내려놓았다. 일 층에서 벌인 반항으로 알게 모르게 화가 났는지 손속이 제법 거칠었다. 러그 위로 찧은 꼬리뼈가 찡하니 울려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부분을 간신히 만지작거리는데 시야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차무겸이 내 허리 양옆으로 두 발을 디뎌 섰다.

오만한 권위자처럼, 거만한 포식자처럼.

그가 내 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나는 바닥과 붙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워서 그를 간신히 올려다보고 있는 처지였다. 우리는 장소가 어딘들 늘 이랬다. 한 번도 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위고 나는 아래. 철저하고도 확고하게.

일렁이는 달빛에 반사된 안면이 고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런 우아한 상판으로 하는 짓은 늘 야만적이었다. 그 부조화에 홀린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홀연히 물었다.

“너… 대체 나한테, 왜 이래….”

“…….”

“안 이랬잖아. 우리 이러지 않았잖아. 무겸아….”

대체 관계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말 잘 듣는 인형인 척 굴면서 나는 내내 그 의문을 떨쳐내지 못했다. 우리의 시작은 암영이 분명하고, 암영에서부터 서울로 오기까지 그 인연의 끈이 이어진 건 확실한데. 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엮이고 꼬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차무겸이 나한테 느닷없이 돈을 줬을 때? 고작 연락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보냈을 때? 사채업자를 피하겠다고 그에게 갈급히 도움을 청했을 때? 아니면, 차무겸을 따라 서울로 오겠다고 결정했을 때?

차무겸은 덜덜 떨리는 나의 음성을 귀에 담으며 상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툭 꺼내 입에 무는 태도가 울음기로 젖은 나의 태도와는 상반됐다. 누군가의 위에 서 본 경험이 너무 많아서 이마저도 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태연함이 나를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눌렀다.

허공에 푸르스름한 불길이 일었다. 꽁지에 불을 붙인 차무겸이 담배를 깊숙이 빨았다가 뱉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검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담배의 희붐한 불씨가 그나마 밝히는 그의 뺨 위로, 길게 난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그걸 보자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해?”

소꿉장난 같은 질문을 던진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터무니없고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차무겸이 보이는 태도는 그 감정에 빗대지 않노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 주위에 비뚤배뚤한 원을 하나 그려놓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옥죄고 압박하는 이 태도는, 사랑의 발로라고 하기엔 괴기하지만 그와 결이 비슷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친구에 가까우나 결코 친구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었던, 위태로웠던 지금까지의 관계가 그제야 내 의심에 불을 지폈다. 차무겸은 쉽사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긴 숨을 내쉬었다. 담배 냄새가 허공으로 흩뿌려져 기어이 내게까지 닿았다.

“그래서 이러는 거냐고!”

“너도 듣고 싶어?”

“뭐?”

“사랑한다는 말.”

대답이 아닌 질문이 돌아왔다.

그보다 향하던 길이 완전히 비틀리는 것처럼 궤도를 이탈하는 반문에 정신이 혼탁해졌다.

“여자들은 늘 그러더라고.”

“…….”

“사랑한다는 말에 목이라도 마른 양 굴어.”

차무겸이 살짝 턴 담배에서 재가 투둑 떨어졌다.

“그거 못 들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은 것처럼.”

나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 후끈한 기운이 살갗을 스쳐 미끄러져 내렸다. 교묘하게 계획된 손길 같았다. 아찔함이 코끝을 알싸하게 덮쳐왔다.

그가 일컫는 ‘여자들’이 누구인지 유추는 쉬웠다. 내가 차무겸과 지내는 동안 봐온 그의 여자친구들. 윤다정을 포함하여 그에게 어떠한 모욕을 당하든 사랑 하나로 굳건히 그의 곁을 지키던….

“근데 난 그거 잘 모르겠더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곱씹는 얼굴이 짙은 회색빛을 연상시켰다. 담배를 삐딱하게 문 얼굴은 절대로 상대가 원하는 걸 내어주지 않을 것처럼 빈틈없이 고상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쉽게 포기로 물들이는 이목구비였다.

“내 부모부터가 그래. 자기보다 스무 살은 어린 여자애한테 정신이 나가서는 스폰서고 뒷바라지고 다 해줬던 아버지나, 그런 남편에게 상처받았다고 맞바람이나 피우는 갖은 지랄은 다 떤 어머니나…. 그래 놓고 뭐라는지 알아? 서로 아직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니까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해 보겠대.”

“…….”

“사랑은 그렇게나 얄팍해, 사은아.”

비틀린 한쪽 입꼬리가 차게 식은 비웃음을 그려냈다.

“자기 입맛대로에다가… 식상하고 뻔하기까지 하지.”

“…….”

“나는 적어도 사은이 네가 이런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 구석도 비슷한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입술에서 슬그머니 샌 말이 내게는 허무맹랑할 따름이었다. 이런 나의 아연함을 친절히 타이르듯 차무겸이 조곤조곤 덧붙였다.

“너도 너한테 관심 가진 남자들을 죄다 벌레 보듯 대했잖아.”

“…….”

“귀찮고, 성가시고, 얽혀 봤자 인생에 방해밖에 되지 않을 것처럼.”

차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담배를 물고 있어서일까, 웃음이 어쩐지 쓴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랑 그런 관계 안 할 거야.”

단정 짓는 어투는 일견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쉽게 변질되는 거, 안 해.”

“…….”

“왜냐하면 사은아, 나는 너랑….”

어둠 속을 가르는 사내의 몸짓은 느리고 찬찬한 데 반하여 이상하게 광폭하고 거칠었다.

“오래오래 잘 지내고 싶거든.”

차무겸을 보아온 기간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을 쉽사리 인정할 거라고는 단연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무심코 까발리게 만든 그의 속내가, 짐작하던 수준 이상으로 시커먼 어떤 덩어리 같아서. 심연의 밑바닥 언저리를 아주 언뜻 목도한 것만 같아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얘는… 얜, 대체 뭐지? 언제나 품고 있었으나 오늘은 그 정도가 남다른 근본적인 의문이 속에서부터 괴어올랐다.

“근데 그러려면.”

“…….”

“네 버릇부터 좀 고쳐놔야겠다.”

그는 입가에 아슬하게 문 하얀 막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그것을 내 머리통 바로 옆 바닥에 지져 껐다. 악력이 실린 손가락 사이로 달빛이 은실처럼 덧입혀졌다. 아름답고 오만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사은아, 네가 뭘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데. 넌 나한테서 벗어나기만 하면 다 잘 풀릴 것 같지?”

느릿느릿한 손길에서 잔혹함이 뚝뚝 떨어졌다.

“근데 내가 보기엔 아니야. 너 나한테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진짜….”

바닥이 미미하게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생 좆같아질걸?”

연기는 어느새 적막 속으로 사라졌는데 나의 눈앞은 여전히 안개 낀 숲에 놓인 양 흐렸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말의 저의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무겸은 여러 의미로 넋이 나간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상냥한 손길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 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는 부모의 행동을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후에 몰아치는 행동은….

“차, 차무겸…!”

어둠 속에서 차무겸이 그대로 등을 보였다. 붙잡으려 했을 때는 늦었다. 침실 문이 지옥의 초입처럼 굳건히 닫혔다.

황급히 손잡이를 돌렸으나 지난번처럼 구멍 사이에 낀 걸쇠가 힘없이 돌아가는 덜컥거리는 소음만 났다. 부산스럽게 굴어도, 허망하게 굴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눈앞에 뻔히 펼쳐지는 미래에 문가에서 더듬더듬 물러났다. 한 줄기 달빛이 시야를 어설프게 가로질렀다. 직, 발이 끌리는 소리 뒤로 밤의 매서운 적막이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아득한 침묵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귀지옥으로의 두 번째 귀환이었다.

* * *

지난번과 같으면서도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지난날에는 차무겸이 꼬박꼬박 방에 찾아왔었다. 그는 나를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잡아둔 채로도 밤마다 뒹구는 일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방이 더욱 싫었던 점도 있었다. 마치 내가 그를 위해 준비된 창녀라도 된 비참한 심정을 떠안겨서.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아무도, 정말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가 감옥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감옥은 이쪽이었다. 부촌 내 저택의 침실이 아니라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섬 같았다.

드나드는 이 없이 멈춰버린 공백 속에서 나는 천천히 고여 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의지를 갖고 대항하기 시작한 건, 이렇게 고이고 고이다가 결국엔 썩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들이쳤을 때였다.

“열어줘, 열어달라고!”

결국은 되풀이였다.

첫 번째의 감금처럼 나는 또다시 유일한 탈출구에 매달려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전엔 섹스를 위해서라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비치던 차무겸을 붙잡았다면, 이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는 문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진종일 나무 문을 두드린 까닭에 손날의 살갗이 죄다 까졌다. 그다음으로는 박박 긁는 바람에 손톱이 까슬까슬하게 갈렸다. 이토록 문에 정신없이 매달리는 이유가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 가운데서도 하루에 세 번 식사가 꼬박꼬박 나왔다. 공사를 지시하여 터놓은 문의 하단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가 이 침실 앞까지 온다는 뜻이었다.

자율학습을 위하여 마련해준 노트와 필기구는 죄다 서재에 있어서 쪽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고로 내가 나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도와주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저 여기 갇힌 거예요… 꺼내 주세요. 제발 도와달라고…!”

차무겸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침과 점심에 식사를 마련해주는 이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이를테면 가정부라든지. 내게 곧잘 말을 걸어주던 아주머니.

그러나 이마저도 희망은 희박한 편이었다.

사용인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차무겸이다. 오로지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이며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다른 말로 하자면 차무겸의 심복들.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 차무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이상, 그에게 우선적으로 복종하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당연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누구라도 제발….”

티브이를 켜면 시간을 알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 갇혀버린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음을 자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아도 고통스럽고, 길어도 고통스러울 테다. 차라리 무지한 상태로 현실을 가리고서, 그나마 남아 있는 의지를 태우고 싶었다.

그러나 의지라는 건 돌아오지 않는 호응 속에서 차츰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두 발로 서서 쾅쾅 두드리기에 분주하던 나는 문가에 기대앉아 손톱으로 간신히 문을 긁었다. 타인과 말을 섞어본 게 무척이나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질 즈음 나는 도움을 청하는 이 소리마저 고독한 혼잣말임을 인식했다. 깨달음과 동시에 들이닥치는 외로움이 시시각각으로 목을 조였다.

그럴 때마다 째각째각, 방에 있지도 않은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따금 귓전을 때렸다. 째각째각째각째각. 그럴 리가 없는데. 째각째각째각째각. 왜 자꾸 들리지?

홀로 이곳에 놓여졌다는 게 와닿으면, 고막을 일정하게 때리는 초침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물렁하게 가라앉은 뇌를 갉아 파먹는 소음이었다. 그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두 귀를 틀어막고 몸을 옹송그린 채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어딘가에 부단히도 성난 파도가 밀려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공허해지기를 반복했다. 터무니없이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내 맘속에 깃든 무언가도 차츰차츰 흐트러지고 쓸려 나갔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부질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였다.

덜컥.

일과로 자리 잡은 양 기대앉은 문의 손잡이를 힘없이 잡아 내리는데 문득 헐거운 느낌이 들었다. 묘한 기분에 몇 번이고 반복하자 확실히 덜컥거리며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음이 들렸다. 그간 이 손잡이를 부수기 위해서 온갖 것을 던지고 쑤셔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길래 일찌감치 접었던 희망이 다시 씨앗처럼 돋아났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위쪽 둘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걸 보자 희망이 제멋대로 몸집을 키웠다. 경망스레 일어나 침실 안을 분주히 뒤적였다. 창가 쪽 테이블을 꾸미는 화분과 침대 아래 깔린 러그를 질질 끌고 왔다. 화분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다가 던지듯이 내려치자 화분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산산이 조각났다. 러그로 떨어진 까닭에 큰 소음이 나지는 않았다.

‘조금 더 벌어졌어.’

희망이 보였다. 이건 결코 눈먼 희망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 놓인 이불을 가져와 삐걱대는 문고리를 감싼 채 던질 만한 것들을 모두 챙겨왔다. 단단한 샴푸통부터 양장본으로 이루어진 책, 침실 한편에 놓인 조명등까지. 그것들을 마구잡이로 내려치고 던진 후 이불을 풀자 문고리가 전보다 심하게 삐걱거렸다. 내던지는 바람에 엉망이 된 책의 하드커버를 뜯어내 벌어진 틈새로 욱여넣었다. 갇혀 있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겠다고 생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느새 땀이 잔뜩 맺힌 상태였다.

“…아!”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며 무게 힘이 실리자 문고리의 이음새가 크게 덜커덕거렸다. 나는 하드커버를 내려놓고서 문손잡이를 잡아 뒤로 꽉 당겼다. 잡아뺄 것처럼 좌우로 흔들며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반동에 의해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다가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손잡이를 깨닫고 눈이 커졌다.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문고리가 빠져 살짝 열린 문이 보였다.

엉금엉금 기어가자 동그랗게 비어버린 구멍으로 바깥의 복도가 보였다. 고작 그 작은 구멍에도 꽉 막혀 있던 숨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문가에 너저분하게 늘어진 것들을 발로 밀고서 곧장 문을 붙잡았다. 그러나 무언가에 뒷덜미가 잡힌 것처럼 바로 나가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여기서 나간다고 능사가 아니야.’

침실이 끝이 아니었다. 이 집을 무사히 나가서, 요새처럼 집을 감싸는 대문까지 뚫어야 했다. 내가 쥘 수 있는 자유는 그 바깥에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섰다가 차무겸이 심어 놓은 이에게 붙잡히기라도 했다가는 다시 갇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단 문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문고리를 끼워놓고서 고심에 잠겼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한 줌의 모래처럼 가벼이 흘려보낸 대화가 불쑥 떠오른 건 그 타이밍이었다.

‘왜 그러세요?’

내게 친근하게 잘도 말을 걸어오던 가정부 아주머니와의 대화였다.

‘분리수거 해둔 거 내다 놓는 걸 깜빡했네요.’

무슨 그런 일로 저리 호들갑을 떠는가 싶어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으나,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조금 있다가 하셔도 되잖아요.’

가정부는 그때 나에게 뭘 모른다는 얼굴로 설명했었다.

‘도련님이나 아가씨가 다니는 앞문은 원할 때 열 수 있는데 뒷문은 아니에요. 그쪽 문은 원격으로 설정해둬서 3시에만 열리거든.’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주로 차가 드나드는 대문은 누군가가 지키고 있거나 카메라로 24시간 감시 중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뒷문은? 사용인들이 오후 3시에 한 번 나가서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그쪽은 적어도 정문보다 감시가 덜할 테다.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확보되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다른 것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나는 일단 문고리를 다시 조용히 빼고 바깥을 살폈다. 아래로 뚫린 문을 통해 점심 식사가 들어온 지 약 한 시간이 지났다. 그 덕분에 2층 복도는 인적 하나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매번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는 곳에 대고 간곡히 도움을 청했다고 생각하니 새삼 몸에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허탈해졌다.

드레스룸에서 검은 모자를 쓰고 외투를 걸쳐 입은 나는 숨을 죽인 채 문을 열었다. 복도로 완전히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바로 1층으로 내려가는 대신 발을 옮겨 평소 공부를 하던 서재로 향했다. 닫힌 문에 귀를 대고서 한참이나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안쪽이 지나치게 조용한 걸 깨닫고 문고리를 잡았다.

예상대로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곳은 두고 볼 것도 없이 곧장 장식장으로 향했다. 매끄러운 유리장 안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는 손목시계를 살펴보다가 가장 구석에 있는 것을 하나 빼냈다.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서재를 빠져나왔다.

2층 난간을 붙잡고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갇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오붓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집 안의 풍경에 속이 쓰렸다. 가정부는 어디에 있는지 이곳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금살금 계단을 밟았다.

“흡…!”

완전히 1층에 다다르기 무섭게 저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금 들키면 끝이다. 그 생각에 허겁지겁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계단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복도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갈까 했으나 자칫 길이 겹친다면 낭패였다. 입술을 초조하게 씹다가 복도 끝으로 나 있는 유리창을 발견했다. 활짝 열어젖히면 몸을 통과해 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1층이었고 야외에 푹신한 잔디가 깔려 있어서 마냥 무모한 짓은 아니었다.

주저할 새는 없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유리창 문손잡이를 밀어젖혔다. 끼이익. 철제가 울리는 미세한 소음에 간이 쪼그라들었다. 복도 옆을 꾸미는 장식장을 밟고서 천천히 상체를 밀어 넣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저 복도 너머를 울리는 인기척이 실시간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허…!”

하체가 거의 다 빠져나왔다 싶을 즘에는 아예 뛰어내렸다. 예상대로 잔디가 쿠션 역할을 해준 덕택에 어딘가 잘못되거나 하진 않았다. 급히 몸을 일으켜 유리창을 안쪽으로 닫았다. 때마침 이쪽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정부가 복도 옆을 지나갔다. 얼른 몸을 숙였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호흡으로 다듬으며,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손목시계를 꺼냈다.

2시 40분.

3시까지 20분 남아 있었다. 탁 트인 형식으로 조성된 정원에는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건물 안에서 최대한 볼 수 없는 위치로만 걸으며 뒷문과 근접해 있는 쪽의 서브 차고로 향했다. 차무겸은 대문과 가까운 쪽의 차고만 사용하기 때문에 이쪽은 평소에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혹여나 잠겨 있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천만다행으로 문은 열렸다.

나는 그가 애용하지 않아 이곳에 처량하게 처박힌 차 뒤편에 몸을 숨기고서 숨을 골랐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가장 우선적으로 떠오른 의문이었다.

내가 머물던 오피스텔은 본래 차무겸의 소유이니 가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가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녹슨 것처럼 삐걱대는 머리를 쥐어짰다. 이곳 서울에 올라와 연을 쌓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숱하게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그러다가 신경이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돈은….’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하던 차 눈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손에 들린 시계.

‘여기서 나가게 되면 팔자.’

일단은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는 데에 급급해 가져온 것이지만 이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나야 이런 데에 있어서 문외한이지만 차무겸이 쓰는 거라면 필시 입이 떡 벌어질 명품일 것이다. 그것도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 최고급에 가까울.

‘50분….’

발산하듯 이리저리 튀는 생각을 갈래로나마 정리한 후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바짝 낮춘 채로 바깥의 동태를 끈질기게 살폈다. 타인이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차무겸의 집에는 상주하는 일꾼이 적었다. 운동장만큼이나 너른 정원을 책임지는 정원사조차 주말에만 출근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예민함 덕분에 지금 나의 탈출은 조금이나마 용이해질 수 있었다.

긴장 속에서 시간은 똑딱똑딱 멈추지 않고 흘렀다.

어느새 58분.

나는 발소리를 꾹 눌러 죽이고서 차고를 빠져나왔다. 사방을 꾸미는 수풀 더미와 대형 규모로 제작된 트렐리스를 지나 나무 몸통 뒤로 몸을 숨긴 채 뒷문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시간 확인을 위해 외투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저택의 쪽문이 열리며 두 손 가득 무겁게 짐을 든 가정부 아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내가 침실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오후의 햇살을 타고 드러나는 얼굴은 평소처럼 푸근하기만 했다. 차후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시간대가 아주머니가 계셨을 때인 것까지 들통이 난다면 그녀는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곳에서 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안쓰러움에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베풀 여유가 없다면 알량한 죄책감 따위 버리는 게 낫다. 괜스레 콕콕 찔려오는 마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뒷문에 집중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앞에 서자 때마침 끼이익, 하는 음산한 쇳소리와 함께 담벼락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이 개방됐다. 그녀가 나가서 곧장 왼편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얼른 마지막 수풀 더미를 빠져나왔다.

이윽고 문을 넘었다.

고작 한 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정수리를 사선으로 찍어오는 햇살이 아득하게 다가왔다. 기어이 땀을 나게 하는 선명한 빛의 입자가 반가우면서도 거북했다. 그간 내가 젖어 있던 차무겸의 그늘이 얼마나 아늑했는가를 복기시킨 까닭이었다. 복잡다단한 마음이 속을 으깰 것처럼 저몄다.

나는 마음속에 이는 안개를 애써 걷어내며, 외투 안에 시계를 잘 갈무리한 뒤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전의 부촌은 꼭두새벽의 산속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절로 입술이 짓씹혔다. 속으로 셋을 센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쪽으로 내달렸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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