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13화 (13/24)

13장.

화가 많이 났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차무겸은 흥분할수록 언행을 조절하지 못했다. 앞뒤 생각 없이 충동에 기대 뱉어내는 말이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분노와 결이 같은 흥분이든, 섹스에 취한 흥분이든. 그러니만큼 이번에도 내 기를 단단히 죽여놓기 위해 협박성으로 뱉은 으름장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정말로, 나를 침실에서 나갈 수 없게끔 만드는 행동에 아연해졌다.

내 몸을 구속하는 무언가는 없었다. 다만 언제나 문이 잠겼다. 나의 의지로 열 수 있는 문이었는데, 이젠 차무겸의 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안쪽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 누구 하나 와주지 않았다. 그것도 분명 차무겸의 명령 때문이겠지.

갇히고 난 뒤의 일주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금세 개강이 다가왔고 나는 차무겸이 경고한 대로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다. 마침내 개강 날, 차무겸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며 난리를 쳤지만 변한 건 없었다.

“휴학계 냈어.”

그것들을 가뿐히 피하며 차무겸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포기를 주입시키려고 작정한 행동이었다. 말로 표현 못 할 우울감과 무력감에 수몰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무겸은 여느 때처럼 탈의를 했다.

결국 내 스스로 세운 현실의 마지노선까지도 무너져버린 마당에 그의 아래에 깔려 우는 나는 균열이 아주 또렷하게 이는 소리를 들었다. 심약하고 매끄럽지 못한 소음. 삐걱삐걱, 자각자각.

이후 나의 모습은 아주 안락한 생활을 하는 수감자가 따로 없었다.

공간만 제한됐을 뿐, 식사는 여전히 꼬박꼬박 행해졌다. 차무겸이 있을 때는 그가 직접 가지고 왔으며 없을 때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대령되었다. 집안일을 책임지는 가정부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식사를 건네주는 거라면 그때를 노려볼 만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곳에 갇힌 다음 날, 특별할 것 없던 문 하단에 이상한 빗금이 그어졌다. 바깥에서 그걸 밀면 안쪽으로 열 수 있었다. 사람 머리 하나 집어넣기도 힘들 만큼 좁게. 문을 열지 않고도 식사를 제공할 수 있도록 차무겸이 공사를 지시한 것이었다. 개구멍 같은 그건 안쪽에서는 열리지도 않았다. 잔인하게도 오직 바깥에서만 밀 수 있었다.

한번은 시위를 한답시고 식사를 족족 거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한 악수였다. 차무겸은 암영에서 지낼 적 내가 영양실조에 가까운 상태였음을 안 이후로 내 입에 좋은 질의 음식을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만큼 내가 끼니를 거르는 것에 상당히 예민하게 굴고는 했다.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한 상이 엎어지는 게 예삿일이 되었다.

“놔!”

한번은 차무겸이 찾아온 자리에서 그랬다가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졌었다. 나는 내 앞으로 숟가락을 디민 그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수저가 침대 아래 깔린 러그 위를 초라하게 나뒹굴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음식물이 허공으로 튀었다.

차무겸은 그 처참한 잔해를 가만 내려 보고 있다가 불시에 내 팔을 끌어당겼다. 끌려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침대에 몸이 부딪쳐 비틀거렸다. 그사이 재빠르게 나를 깔아뭉갠 그가 양 뺨을 한 손으로 짓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을 집은 젓가락을 들이밀어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자 그의 반반한 미간에 금이 꾸깃꾸깃 새겨졌다.

차무겸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나는 그가 그쯤에서 포기한 줄 알았다. 그래서, 돌아온 그가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직접 음식을 먹이려 들 때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음식, 찬 음식 가릴 것 없이 입 안으로 침투했다. 차무겸은 제 손이 벌겋게 데든 말든 내 입에 그것들을 쑤셔 넣는 데에 집중했다. 그 외에도 숟가락으로 입 안을 험하게 쑤석거리는 탓에 점막이 다 터지기도 했고, 먹기 싫어서 도망가는 머리채를 움켜쥐는 바람에 두피가 얼얼해지기도 했다.

“아예 자퇴 처리되고 싶어?”

이 끝도 없는 항쟁에 만만치 않게 지쳤는지, 차무겸이 최후의 보루처럼 꺼내 든 말이 사지를 오싹함에 푹 담갔다가 빼냈다.

그는 내가 어떤 걸 가장 두려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나의 세상을 자신의 썩은 내 나는 재력으로 세운 이다웠다. 두려움을 부추기는 차무겸의 말도 있지만, 나 스스로 식사를 거르는 것만큼 멍청하고 미련한 짓이 없단 걸 깨달아서 나는 그 시위를 일찌감치 접었다.

이따위 무용한 오기만 부풀릴 바에야 조금이라도 잘 챙겨 먹으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틈을 노리는 게 나았다. 체력을 비축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 첫 번째 소요가 끝났을 때는 침실에 갇힌 지 이 주가 지나 있었다. 이곳은 시간을 쭉쭉 빨아 먹는 뒤틀린 공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소요가 막을 내리고서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잠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침실에서 티브이나 책만 보면서 버티는 시간이 너무나 무료하게 다가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달음은 한순간 부닥쳐왔다.

‘혹시 수면제를 먹이는 건가…?’

나는 한 상 곱게 차려진 음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 속에 내가 눈치채지 못한 약 가루가 곱게 빻아진 채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 식사를 화장실 변기에 버렸다. 밀물처럼 쏟아지던 잠이 조금은 덜해졌다. 나의 의심은 어느 정도 확신으로 변질됐다.

식사에 수면제를 타는 거야.

그러나 차무겸이 식사를 하는 걸 지켜볼 때가 많기 때문에 매번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수면제가 들었음이 틀림없는 식사를 꼬박꼬박 삼켜야 했다.

잠이 늘어나면 신경이 느슨해지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지가 더뎌진다. 홀로 남겨진 침실에 백색소음을 채우려고 켜는 티브이가 아니었다면, 혹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의 잎 개수 변화가 아니었다면 날짜가 흘러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을지도.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삼 주가 더 지나 있었다. 신경 가닥을 늘어뜨리는 기면에 취해 하루를 어떻게 흘려보내는지 모를 무의미한 일상이 이어졌다. 천장 바로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유리창에서 한낮의 뙤약볕이 쏟아졌다.

아득한 빛줄기를 응시하고 있자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나가야 해.’

하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조급하게 뛰는 박동에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주변을 돌아보기를 한참.

“아.”

한순간 깊숙이 파고든 치아가 손톱 안쪽의 여린 살을 찢었다. 종이에 베인 것만 같은 따끔따끔함이 손끝을 덮쳤다. 슬쩍 내려 보니 손톱 안으로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처가 나면….’

병원을 데려가야 하니 여길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차무겸은 내가 병원을 싫어한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 상처가 심각하면 마지못해 데려갈 수밖에 없을 거다. 사고회로가 직선적으로만 움직였다. 희망감에 젖어 다른 미지수를 죄다 배제해버린다. 이곳의 고립감은 사람 하나를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욕실로 들어섰다. 고개를 홰홰 돌리다가 한쪽에 놓인 샴푸통을 발견했다. 세면대에서 적당히 물러서서 거울을 향해 그것을 집어 던졌다. 한 번으로는 되지 않아서 두세 번을 잇따라 던졌다. 마침내 샴푸의 딱딱한 주둥이가 거울을 직격타로 후려치는 순간 미미한 금이 가더니 쩍 갈라지는 파열음이 났다.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던지자 거울에 핏줄 같은 금이 쩌적쩌적 생기다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나는 개중 큰 조각으로 팔목 안쪽을 쓱쓱 긁었다.

안정적으로 뛰는 동맥과 제법 먼 거리였다.

당연했다. 난 죽을 생각이 없으니까.

그 언젠가 파도가 넘실넘실 몰아치는 것만 보고도 겁이 들어 자살로부터 한발 물러난 게 나였다. 그것에 잠식되는 게 무서워 굳센 각오를 접어버리고 도망친 내가, 이 날카로운 조각으로 동맥을 찌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추상적이고 잔혹한 행위에 공포심을 느낀다면 나는 아직 죽을 마음이 없는 거다. 이건 단지, 내 시간을 일그러뜨리는 비공간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도일 뿐이니까.

“으…….”

그래도 고통은 숨겨지지 않았다.

난도질되어 피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차무겸이 이걸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뻔뻔하게 휴학계를 입에 올리고, 그 상태로 나를 짓이겨뜨리던 오만한 면모 그대로일지.

방음이 어지간히 잘 되나 보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그렇게나 소란했음에도 방문 너머로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면 들었어도 나의 개수작일 게 뻔하니 열어주지 말라는 차무겸의 명령에 따르는 걸지도 모르지.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다. 벌써부터 제지를 당했다가는 병원 구경도 못 해볼 테니까.

살갗을 적당히 뭉개다가 유리 조각을 집어 던졌다. 살점인지 피가 묻은 건지 벌겋게 물든 그것이 욕조 속으로 투하했다.

나는 욕실을 나서 침대 위로 올랐다. 시트에 상처가 닿으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아파서 가만히 배 위에 올려두었다. 그 상태로 눈을 감았다. 성한 피부가 찢어발겨진 감각이 욱신욱신하지만 참을 만했다. 이 정도의 출혈로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수 없었다. 죽음은 먼 상태였기에 두렵지 않았다.

이제 차무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였다.

* * *

다시금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아릿아릿한 통증이 가장 먼저 신경을 억눌렀다. 습관적으로 팔을 움직이자 미미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실내는 조용했다. 내가 내는 기척이 아니고서야 허공을 채우는 침묵만 낭자했다.

가늘게 뜬 시야 속으로 붕대가 보였다. 나는 하얀 붕대가 둘둘 감긴 팔을 가만 응시했다. 간단한 처치를 보니 집에서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병원은 가보지도 못했네.

나는 내가 차무겸을 대단히 얕봤음을 깨달았다. 조금 더 긁었어야 했나? 역시… 피가 철철 나야지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가? 경험에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유난히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조치가 취해졌고, 침실이 조용한 걸 보니 차무겸은 왔다가 다시 나간 모양이었다.

화장실로 향하기 위해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나는 다치지 않은 쪽 손을 들어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망연했다. 그럼에도 내가 보는 장면에서 변하는 건 없었다. 마치, 네가 바라던 그 현실이야, 라고 속삭이듯이.

침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몇 주간 구경도 못 하던 바깥 복도가 훤히 보이고 있었다.

뭐지?

왜?

왜…?

머릿속이 삽시간 꼬여 들었다. 저게 왜 열려 있지? 그리도 열리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저게 나를 훕 빨아들일 블랙홀처럼 환히 개방되어 있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절대 내 두 발로 걸어서 이곳을 나갈 거라고는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침실을 빙빙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이 아귀지옥 안에 차무겸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얼마 안 가서는 두리번거리는 걸로 모자랐다. 급히 발을 옮겨 침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러나 침실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적은 내가 정신없이 이동하며 내는 게 전부였다.

곧 나는 다시 우뚝 멈춰 서서 열린 문을 보았다. 칠흑 같은 의구심만 가득 낳는 문은 마냥 함정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침대에 앉아 멍하니 문밖을 응시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상황이 코앞까지 디밀어졌는데 정작 보고만 있다는 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둔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었다. 그 상태로 5분, 10분을 기다렸다. 무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 심연의 구렁텅이 같은 문을 파헤치기 위한 의심인 것도 같고, 혹은 뜸을 들이는 것도 같았다.

이윽고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흘렀을 즈음, 대뜸 일어나 침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복도를 내달려 허겁지겁 계단 난간을 붙잡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 과정 가운데 숨이 차오르고 몇 번이나 앞뒤 양옆을 살폈다. 거실 한 면을 죄다 뚫어놓은 통창 너머로 뿌연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것만이 이 집 안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꾀죄죄한 옷을 제대로 갈아입거나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현관으로 직행했다.

덜컥.

도어 록의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왜, 이게…!”

황망한 손길이 잇따라 이어져도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찼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손길이 연신 미끄러졌다. 그래서 몰랐다. 도어 록의 버튼을 눌렀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한참 늦은 후에야 알아챘을 때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실수를 인지한 사람처럼 더듬더듬 뒤로 물러났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허둥지둥 굴며 거실 쪽으로 발을 튼 찰나였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빨간 불씨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그 불씨가 워낙 시선을 잡아끌어서 그렇지, 어둠에 제법 익숙해진 눈동자는 그것보다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을 조금 더 또렷하게 담아냈다. 차무겸의 너른 가슴팍이 들숨을 따라 부풀었다. 홀쭉하게 파이는 굴곡진 뺨을 타고 불씨가 선명하게 화르르 타올랐다. 그 끝으로 금방이라도 재가 떨어질 것 같았다. 거리가 먼데도 그 재가 꼭 내 몸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신경이 움찔움찔 떨렸다.

“거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입술 사이에서 뺀 차무겸이 나직이 말했다.

“넌 틈을 주면 벗어날 생각밖에 안 한다니까?”

바로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끄는 태도가 밤의 일상처럼 여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니까 내가 가둬둘 수밖에 없잖아.”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신의 체구를 따라 바닥과 천장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음영이 생겨났다. 그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나의 발치를 덮을 듯했다. 반사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현관이 막힌 이상, 차무겸이 있는 쪽이 아닌 방향으로라도 뛰어가야 하는데 몸이 경직돼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근거를 댈 수 없는 어떠한 중압감이 내부를 장악했다. 내 힘으로 처치할 수 없는 괴물을 앞에 두고 겁을 집어먹은 것과 유사했다.

“네가 와.”

차무겸은 소파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고고하게 서서, 오연하게 명령을 내릴 뿐.

“아니면 내가 가는 수밖에 없는데….”

“…….”

“거기까지 가게 되면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뭘? 근본적인 의문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양의 울음처럼 발발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하며 차무겸을 직시했다. 이런 나의 요지부동이 또 어떤 자극을 낳은 건지, 그의 눈썹이 매끈하게 꿈틀거렸다.

“기어이 내가 가게 만들 셈이야?”

서슬 퍼런 기색이었다.

붕대로 둘둘 감싸인 아래팔이 지끈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지금 차무겸의 경고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솜털 한 올 한 올로 모자라 정수리까지 쭈뼛 서게 하는 이 불길한 기류는 단 한 번도 예상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꽉 눌러 죽인 숨을 심호흡처럼 터뜨리며 나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내부에 불똥이 떨어진 것처럼 또다시 열기가 고인다.

차무겸은 내가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불만족스럽지만 어쨌든 나 스스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는 데에 그럭저럭 참아주는 낯이었다. 희한하게도 차무겸에게 다가가며 나는 더더욱 어두운 저변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차무겸은 인내심이 동이 났음을 알리듯 내 팔을 확 끌어당겼다.

“아!”

순식간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허리를 감싸 쥐는 아귀힘 아래에서 소파 아래로 굴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러그 위에, 차무겸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양 무릎을 벌려 내 상체 옆을 장막처럼 가로막은 차무겸은 화살촉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잖아도 엉망인 속이 무참히 파헤쳐지는 것만 같다.

“사은아, 재밌는 거 알려줄까?”

나는 여전히 숨을 씨근댔다.

압제자처럼 내 위를 차지한 차무겸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분이었어.”

“뭐…?”

“2분만 더 침실에 있었으면 너 풀어주려고 했다고.”

“…….”

“그 2분을 못 참아서 뛰쳐나왔네.”

안타까워하는 음성과 달리 저 입꼬리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는 상황을 가지고 논 승자에 더 어울렸다. 꼭 내가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사실일지도 모르지. 내게 지옥의 탈출구 같던 침실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자기는 거실에 앉아서, 과연 내가 뛰쳐나올지 아닐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차무겸이 천천히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천장에 그려지는 기다란 그림자가 시야를 아득하게 흔들었다. 입을 쩍 벌린 괴물이 다가오는 느낌과 흡사했다. 그의 손바닥이 붕대를 감싼 팔을 움켜쥐어 바닥에 내리눌렀다.

“으… 아, 아파…!”

안쪽의 상처가 함부로 문질러지는 바람에 날카롭고 후끈한 통증이 일었다.

“왜? 아프려고 한 거 아니야?”

“흐읏….”

“죽으려고 한 짓은 당연히 아닐 테니, 아프고 싶어서 이렇게 조져 놓은 줄 알았지.”

“손, 좀 치, 치워…!”

“너 왜 자꾸 나를 이렇게 속상하게 해?”

그 음성에 짐짓 서운함이 묻어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원인이 저라는 건 생각도 못 하고 결과만 내 탓으로 돌리는 행색이 기가 막히게 뻔뻔했다.

“한 번만 더 네 몸뚱이에 이딴 짓 해 봐.”

그가 가증스럽던 태도를 금세 날카롭게 갈음했다. 암흑에 섞인 채로 쏟아지는 사나운 기색에 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멀쩡한 피부 어딘가가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무겸은 나의 우려대로 짐승처럼 여기저기에 이빨을 세우는 대신 입고 있던 면바지를 확 끌어 내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속옷까지 말려 내려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흐…!”

맨다리가 공기 중에 노출되자 잔 소름이 돋았다. 몸부림치듯 무릎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그게 어느새 불룩하게 솟아오른 차무겸의 바지춤임을 알게 된 건 얼마 있지 않은 후였다.

그가 양 발목을 한 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엉덩이가 허공에서 살짝 떠오를 정도로 압박된 자세였다. 그는 슬금슬금 내려가 훤히 드러난 음부에 고개를 처박았다.

“읏!”

타액으로 감싸여 추근추근한 혀가 질구를 부드럽게 갈라 파고들었다. 구멍 주름이 팽팽하니 펴져 그의 혓몸을 마구 옥죄었다. 이제 섹스에 제법 능란해진 차무겸은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내가 손쉽게 반응하는지 잘 알았다. 나는 그가 싹싹 핥고 빨아대는 행위에 맞춰 몸만 움찔움찔 떨었다. 어제 벌인 정사의 여파로 아직까지 퉁퉁 부은 음핵을 치아로 긁자 벌름대던 구멍이 속수무책으로 젖어 들었다.

왠지 모르게 토악질이 일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호흡이 어딘가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좀체 안정을 찾지 못했다.

역겨웠다. 진심으로. 지금까지 차무겸과의 섹스를 고역처럼 여기면서도 반항 없이 받아준 건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니까. 내가 바란 적이 없음에도 내 모든 걸 거머쥔 차무겸에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시에 일상이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주었기에 유의미한 짓이라 여기고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꾸역꾸역 인내하는 게, 의미가 있나?

차무겸이 한순간 눈이 돌아 벌인 작금의 짓거리는 나의 삶을 초토화시키고 폐허로 만들었다. 이골이 나는 무자비함에 또다시 휩쓸린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지키려던 현실까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갇혀 있는 동안 나의 속에 몰아친 감정은 그 폐허 더미를 이리저리 뒤엎는 잔바람일 뿐이었다. 더러운 잔해만 남은 그곳에서 풍기는 건 당연하게도 악취였다. 그러니 이렇게 역겨울 수밖에.

“으흑…!”

쭙쭙,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숨 가쁘게 아래를 빨아재끼던 차무겸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입술에 묻은 애액을 혀로 핥아 먹은 그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바지춤을 풀어헤쳤다. 머지않아 배꼽 부근을 툭툭 칠 정도로 불뚝 올라선 좆이 나의 구멍 속으로 뱀처럼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꾸물꾸물 파고드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허릿심을 이용해 무지막지하게 쑤셔 박는 편에 가까웠다. 마치 벌을 주듯이 말이다.

“아…! 욱…! 싫어, 하지 마, 하지 마…!”

그에게 붙잡히지 않는 팔로 입술을 틀어막으며 외쳤다. 차무겸은 그런 나를 비웃으며 허리를 쭉 물렸다가 있는 힘껏 쳐올렸다. 울퉁불퉁한 기둥이 좁은 길을 아릿하게 긁으며 진입했다. 아! 교성이 막무가내로 터졌다. 몸이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파들파들 경련했다.

“싫은 거 맞아?”

“으흡, 흣, 아, 읏, 응…!”

“그러기엔, 읏, 벌써 안쪽이 질퍽질퍽하잖아.”

“흐, 싫어, 아아…!”

“나 아직 사정 안 했으니까 이거 다, 하아… 네 물인데 어디서 내숭을 부려.”

어느새 숨이 격해진 차무겸이 야차 같은 낯으로 내 윗옷을 들춰 올렸다. 브래지어를 차지 않아 옷자락에 딸려 올라간 뽀얀 살덩이가 출렁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밤새 물어뜯는 바람에 여전히 퉁퉁 부어 있는 젖무덤을 한입에 삼켜 쭈웁, 쭙 빨아들였다.

신음하며 그의 머리를 밀어내자 차무겸이 다친 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어왔다. 아귀힘에 악의성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부위로부터 퍼지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대항할 의지가 푹 사그라들었다. 몸에 힘이 풀리며 위아래로 자극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나의 의지와 다르게 배 속으로 자르르한 열감이 쉼 없이 퍼졌다. 철퍽철퍽, 체액에 흥건히 젖은 샅이 쫀득하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으흑, 아, 하응, 응…!”

내부를 꽉 움키는 고된 압박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폐부가 아플 만큼 헐떡거리던 나는 그의 거근이 얼추 빠져나간 틈을 타 몸을 빙글 돌렸다. 러그를 구명줄처럼 그러쥔 채로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등을 세게 누르는 힘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뭐, 뒷치기 해달라고?”

회음이 활짝 벌어지며 뻐끔뻐끔 공기를 빨아들이는 젖은 구멍이 여실히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안을 흉포하게 찔러 올리던 살덩이의 끝이 옴찔거리는 구멍에 안착해 부드럽게 비벼졌다. 그리고 터진 숨을 급히 삼키는 순간, 수축한 입구를 무작스럽게 벌리며 파고들었다.

“아으응…!”

그는 아예 내 위로 상체를 겹친 채 격렬하게 허리를 놀렸다. 볼기짝을 활짝 잡아 벌리고서 결합부를 깊게 맞물려 안을 고루고루 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거부하고 싶은 쾌감과 날것 그 자체의 메슥거림 사이에서 쓰디쓴 혼란을 겪었다.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은 러그에 이마를 비비며 바들바들 떨었다.

차무겸은 나란히 누운 자세라 영 속도가 나지 않아 언짢았는지 내 허리를 감싸 안아 불쑥 들었다. 엎드린 채 엉덩이만 불쑥 든 자세로 몸이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나는 오늘의 섹스가 평소와는 상당히 다르게 펼쳐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차무겸은 아래를 끝없이 부딪쳐오면서 늘 나와 연인 행세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몸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뺨과 입술, 귓불 등을 무슨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감빨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흥분할 곳만 빠르게 자극하고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아랫도리를 찔러왔다.

그 태도는 일종의 화풀이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구멍 사이로 크게 부푼 성기가 퍽퍽 쑤셔발겨지는 와중에 떠올리기엔 다소 자괴감이 드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내 몸이었다.

정상위라면 허리를 비틀어서라도 빗나가게 하려고 아등바등할 텐데, 지금은 완전히 차무겸에게 짓눌리는 자세라서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그가 흉흉한 페니스로 연방 찔러오는 부분이 배 속을 꽉 쥐어짜고 요의를 가득 느껴지게 했다. 아마 차무겸 역시 푹, 내리꽂을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내 몸을 보고 그 반응을 알아챈 듯했다.

“하아… 읏, 뜨거워….”

“흐응, 응…!”

“안에 이렇게 쑤셔주니까, 좋아? 응? 보짓살이 자지에 달라붙지를 못해서, 안달이잖아.”

“아냐, 아, 흑…!”

부정하자 큰 손바닥이 엉덩이를 가감 없이 후려쳤다. 거실을 울리는 찰싹거리는 소리와 함께 후끈한 통증이 일었다.

“또 아니라고 해 봐.”

“아니라…! 아! 앗!”

이번엔 두 대가 날아왔다. 살갗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마찰음이 고막을 찢는 듯했다. 너그러움을 찾아볼 수 없는 손길은 억셌다. 그렇기에 고작 몇 대 맞은 걸로도 엉덩이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안 봐도 벌겋게 부어올랐을 게 뻔했다.

차무겸의 말이 내 짐작을 확신으로 변질시켰다.

“빨개졌어.”

“흐응, 으읏…!”

“살짝 뜨겁네…. 핥으면 아프려나?”

뿌리 끝까지 들이민 성기를 쭉 끄집어낸 그가 불시에 허리를 잡아채 몸을 덜렁 들어 올렸다. 찌릿찌릿한 쾌락의 여운이 새겨진 몸으로는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리기조차 무리였다. 나를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앉힌 그가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렸다. 허리춤을 잡아 아래로 당긴 그는 조금 전 손바닥으로 후려갈긴 엉덩이를 혀로 그림 그리듯 빙글빙글 핥았다.

“흐아읏…!”

이상한 느낌에 등줄기가 덜덜 떨렸다. 후끈후끈한 잔열이 남은 곳을 휩쓸고 지나가는 축축한 감촉이 잔 소름을 유발했다. 껍질 깐 과일을 사르르 벗겨 먹듯 느리고 끈질긴 움직임. 소름이 끼치면서도 동시에 아랫배를 자극하는 어떠한 아슬아슬한 무언가가 있어서 발끝이 연신 곱아들었다. 살점이 한 겹 한 겹 발라 먹히는 듯한 오싹함도 간간이 미쳤다.

차무겸은 엉덩이 살갗을 죄다 발갛게 까뒤집고 싶은 것처럼 악착스럽게 혀를 놀렸다. 아래가 타액으로 물씬 젖어 견딜 수 없이 찝찝했다.

그렇게 한참 코를 박고 쭙쭙 빨다가 결국은 원점이다. 아직 사정하지 않은 살덩이가 내벽을 가르며 가득 들어찼다. 소파와 그의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자세였다. 팽만감에 아랫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차무겸은 바시랑거리는 내 골반을 틈 없이 그러쥐고서 콱, 깊숙이 박아 넣었다.

“하으읍!”

배 내부가 찌르르하게 울리는 바람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자세와 더불어 초반부터 격렬한 추삽질에 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 위아래로 물이 연신 터졌다. 물기로 얼룩진 시야가 엉망으로 뭉개졌다.

원점으로 돌아온 섹스는 감정과 상태마저 비슷하게 돌려놓았다. 뇌까지 저릿하게 쑤셔대는 아슬아슬한 쾌락, 동시에 덮쳐오는 온통 뒤집힌 세상에 놓인 듯 속절없이 술렁대는 속.

나는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배경 속, 본래라면 정원의 풍광을 비추어야 마땅할 통창에 두 개의 음란한 인영이 고스란히 반사됐다.

소파 위에서 사람인 듯 아닌 듯 기묘한 형상이 딱 달라붙어 난잡한 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건 뒤로 젖혀진 나의 목선이기도 했고, 내 안으로 한계까지 들어왔음에도 더 파고들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는 차무겸의 탐욕스러운 몸선이기도 했다.

마음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의와 속옷은 이미 저 멀리 내던져진 지 오래고, 상의 역시 뒤집어 까인 채 젖가슴을 훤히 내놓은 상태.

그 상태로 헐떡대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와 달리 차무겸은 별반 흐트러진 점이 없었다. 녀석은 셔츠의 단추를 가장 위와 그 아래 빼고는 단정하게 잠근 채였고 심지어 성기를 내놓은 바지마저도 멀쩡했다. 단지 지퍼를 벌려 꺼내 든 몽둥이만 한 좆으로 이 행위에 임하는 당사자임을 알렸다.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비적인 행색에서부터 미치도록 깊고 아득한 서글픔이 괴어올랐다.

“내가, 흐, 잘, 잘못했다고 했잖아….”

약자에게 사과는 습관이 된다.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님에도 알량한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버릇처럼 빌게 된다. 베푸는 입장에서는 알량할지언정 받아먹는 입장에서는 동아줄과 다를 바 없음을 알기에.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흑, 으, 응… 아! 했, 했는데…!”

나의 서투른 호소에 혀로 젖꼭지를 궁굴리던 차무겸이 고개를 들었다.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칼마저도 그다지 헝클어지지 않아 속에 열기가 가득 고여 올랐다. 이런 짓을 벌여도 멀쩡한 차무겸. 반면 그의 심기 하나 불편하게 만들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나. 눈물방울이 조금 더 굵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윽, 흡, 아, 으! 어, 어떻게 해야…!”

그럼에도 자괴감의 밭을 구를 수밖에 없는 건 이 서글픔의 발로에도 결국엔 차무겸에게 애걸하는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차무겸의 허용 없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지는 데서 전해져오는 무기력감이 나를 해충처럼 갉아먹는다.

그러나 아직도 속 저변에서 출렁이는 미약한 희망은 그것에라도 매달리기를 원했다.

내 위에 올라타 못질하듯 일정한 속도로 처박던 차무겸이 잠시 피스톤질을 멈추었다.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쩌덕쩌덕, 체액이 뭉친 소리가 났다.

나는 상황을 직접적인 시야가 아니라 통창을 통해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무겸을 직접 응시할 자신이 없는 것처럼. 나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갠 사내의 형체는 어두움에 반쯤 먹힌 채라서 사람이 아니라 무슨 흉측한 괴물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차무겸이 허리를 감싸 아래로 철퍽철퍽 내리꽂던 손을 들어 내 턱을 휘어 감아 제게로 고정시켰으니.

“이런 좆같은 짓을 하지 마.”

“…….”

“나 속상하게 하는 짓을 하지 말라고.”

“그럼… 그럼 풀어줄 거야?”

마냥 눈먼 희망이 아니었다. 차무겸은 조금 전 러그에 누운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2분만 더 침실에 얌전히 있었다면 풀어주려고 했다는 그 말. 그건 분명히 나를 침실에서 나오게 해줄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차무겸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는 늘 별 마음 없이 벌이는 행동이지만 나는 그를 보며 마음을 느슨하게 풀기도 하고 터질 것처럼 조이기도 했다. 지금은 명백히 후자였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팔이 붙잡혔다. 하필이면 붕대를 감은 쪽. 지금 그 부위를 움켜쥔 건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다. 차무겸은 지금 내게 간단한 행동만으로 위협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고분고분히 굴어.”

그러쥔 내 팔목을 움직여 억지로 제 목을 얼싸안게 만든 차무겸이 고개를 비틀며 내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개왔다.

나는 멍한 눈을 한 채 입술을 빨리며 생각했다. 고분고분? 그렇게 굴기만 하면 이전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건가? 그럼 못 할 것도 없다. 지금 내 처지로는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도 온 힘을 실어 매달릴 수 있는 심경이니까.

조금 전까지 열없이 늘어져 있던 손에 힘을 줘 그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안에 박힌 거대한 페니스가 움찔, 하고 박동했다. 씹,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그가 거친 욕설을 터뜨렸다. 내벽을 긁는 아스라한 감각에 벌어진 나의 잇새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진짜, 읍, 진짜지…?”

키스가 중간중간 멎을 때마다 확인을 바라는 질문도 잊지 않았다. 차무겸은 알겠노라 순순히 답했다. 다 흘러내리지 못하고 고인 눈물 때문에 그의 얼굴이 짓이긴 찰흙처럼 마구 뭉개져 보였다. 그 가운데로 벌어지는 입꼬리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광대처럼, 혹은 거짓말쟁이처럼.

그러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더 이상 생각이 어려웠다. 아팠다가, 기분이 좋았다가, 기대했다가, 다시 바닥을 쳤다가. 과격한 곡선을 그리는 감정은 진 빠지는 탈력을 부추기기 충분했다.

여유를 갖추던 추삽질이 본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그가 장골로 하반신을 퍽퍽 내려칠 때마다 엉덩이가 반동으로 소파 위에서 통통 튀었다. 여기저기로 난잡하게 튄 애액이 소파에 질척한 흔적을 남겼다. 차무겸은 아랫도리를 흠뻑 적시는 물기를 볼 때마다 조악한 웃음기를 숨기지 않았다.

“씨발, 이렇게 끝까지 씹어 삼키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우네, 울어.”

어중간한 자세가 미끄러졌다. 등이 소파 착석 부분과 완전히 맞닿았다. 허공을 휘적거리던 두 다리가 차무겸의 어깨에 걸쳐졌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정수리를 쿵쿵 부딪치며 교성을 내질렀다. 머지않아 허리를 잘게 털며 그가 사정에 임했다. 안에 파정액을 질펀하게 싸지르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는 까닭에 구멍 주름 사이로 뿌연 포말이 겹겹이 차올랐다.

“아, 으, 허, 허리 아파… 으응…!”

등은 소파에 댄 채 하체는 허공에 뜬 자세는 생각보다 부담이 심했다. 나도 모르게 소파를 박박 긁으며 말하자 차무겸이 그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곧장 계단으로 이동하는 그에게 안긴 채 엉망진창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둘레 굵은 성기가 속을 함부로 찔러댄 이유에서였다. 한 번씩 느끼는 부분을 직격으로 후려칠 때마다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지며 입술이 헤벌어졌다.

그런 내 입 속에 혀를 집어넣어 휘젓던 차무겸은 기어이 침실에 다다랐다.

내 발로 나가도 결국은… 돌아왔구나.

무채색의 씁쓸함을 억지로 삼키는 사이, 차무겸이 본격적으로 탈의를 했다. 그가 옷을 벗으면 끝이다. 오늘 밤도 편히 자기는 글렀구나. 체념과 함께 고개를 돌리다가 침대 시트에 묻어난 핏방울을 발견했다. 시간이 꽤 된 걸 표하듯 색이 바랜 핏자국. 유리 조각으로 팔을 험하게 긁어댄 후 누웠을 때 생긴 듯했다.

나의 시선을 따라 차무겸의 눈길 역시 그리로 이동했다. 사정의 여운에 취한 듯 얼근하게 풀어져 있던 동공이 대번 서릿발처럼 사나워졌다.

“성질 더러운 거 알면 다신 이딴 식으로 자극하려고 하지 마.”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가 들으면 내 몸 걱정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몸, 걱정. 그 생각에 순간 상념이 어딘가로 꽂혀 들었다. 그때쯤 나신이 된 차무겸이 그림자처럼 내 위를 덮었다. 이미 체액으로 한차례 젖은 사타구니가 부드럽게 맞물렸다. 잘착거리는 내벽으로 너끈히 파고드는 성기의 부피감에 허리가 휘어졌다. 차무겸의 손이 그 허리 아래를 받쳐 들 때 입이 벌어졌다.

“나, 으, 약 먹, 기 싫어… 흣!”

“뭐?”

차무겸의 어조가 아까보다 한층 더 낮아지고 거칠어졌다. 제멋대로 발산하는 흥분감을 나름대로 참아보는 노력의 증거 같았다. 그래도 아래를 우악스레 벌리고 들어오는 건 여전했지만. 요철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성기는 굼질굼질거리며 금세 내 안을 꿰뚫었다. 미약하게 앓는 소리를 흘리고서 잔 경련이 이는 입술로 바들바들 덧붙였다.

“흐, 응, 그, 약, 아! 수, 수면제…!”

“무슨 수면제.”

차무겸이 나의 한쪽 다리를 껴안아 어깨에 걸쳤다. 제 것과 내 것이 맞물린 걸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자세라며 좋아하는 체위였다. 다리가 과도하게 벌어지며 결합부의 사정이 내 눈에까지 들어왔다. 1층 거실에서 한바탕 벌인 섹스로 인해 찐득찐득하게 젖어 든 그 꼴은 천박하고 음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응, 네, 네가, 먹였잖, 헉!”

“그딴 거 안 먹였는데… 아, 영양제?”

“영, 영양제라고…?”

차무겸이 근육으로 도톰하게 차오른 골반을 빠른 박자로 올려치며 내 발목을 짓씹는 것처럼 아득아득 깨물었다. 그러나 예민하게 달아오른 안쪽 살점이 사정없이 짓뭉개지는 지금은, 그 고통마저 쾌락의 일부처럼 다가오기만 했다. 흐느끼며 도리질하는 나의 턱을 차무겸이 단단히 틀어쥐었다.

“네가 쓸데없이 피임약 같은 걸 처먹어서.”

“흣, 흡, 응….”

“호르몬 망쳐놓은 거 돌려놔야… 큿, 임신을 하든가 하지.”

차무겸이 흥분에 젖은 음성으로 소곤대는 단어가 흐물렁하게 녹아내리던 정신을 일순 확 깨웠다. 동공에 미약하게 초점이 돌아왔다. 그제야 나의 위에 드리운 어둠을 제대로 목도했다.

아니, 어둠일까? 차무겸일까?

“이, 임신?”

휘둥그레진 나의 눈동자를 그가 장악했다.

“처음 듣는다는 그 반응은 뭐야.”

어린아이의 무지함을 지적하듯 차무겸이 가벼이 퉁을 놓으며 입꼬리를 휘었다. 그 매끄러운 호선은 나의 머릿속을 악독하게 휘저어놓았다.

“나, 임신, 읏, 하면, 학, 학교는… 어떡하라고…?”

퍽퍽, 소리가 날 만큼 격정적으로 쑤셔 박던 차무겸이 순간 멈칫했다. 나는 물기가 곳곳에 여실하게 남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기 중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곧 차무겸이 다시금 미소를 되찾으며 짠 내 나는 물기로 뒤덮인 뺨을 문질렀다.

“학교가 그렇게 가고 싶어?”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무겸은 무척이나 자애로운 사람처럼 내 턱을 살짝 들어 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쪽, 하고 맞닿았다가 떨어진 사이로 스며 나오는 건 내게로 쏟아지는 독이었다.

“그럼 내 마음에 들게 잘 좀 해.”

“흐, 으….”

“늘 네가 문제잖아. 날 화나게 하는 건 다 네 행동이니까. 그렇지?”

“응, 응….”

“사은이 너만 잘하면 우리 사이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독은 그 정체를 숨기기 위해 달콤했다. 지금 희망과 절망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나의 상태로는 그게 독인지 달콤한 설탕인지 확실히 구분 짓기란 무리였다. 나는 그저 차무겸이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만 하는 입장이었으니. 희망도 삼키지만, 결국에는 그 밑바닥에 깔린 절망마저도 일단은 삼켜야 했다.

이제 내 앞에 놓인 길은 미지수다. 둘 중 무엇이 향후 내 삶을 채우게 될지는….

“혀 내밀어… 빨아줄 테니까.”

고분고분.

그것만 곱씹으며 혀를 쭉 내밀었다.

차무겸은 가뭄 든 땅에 내리는 비를 맞은 사람처럼 게걸스레 살덩이를 들이빨았다. 나는 내 몸을 압박하는 차무겸의 너른 어깨를 끌어안으며 옆을 힐끔거렸다. 침실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안 돼.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회는 분명히 올 것이다.

나는 내 눈앞에 놓인 도피구를 버리고 차무겸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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