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도서관 안, 예상외로 일찍 끝난 강의 덕택에 동기들과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아 과제 분량을 나누고 있던 차였다.
“아, 뭔 놈의 과제가 이렇게 많아.”
“교수들 이 정도면 우리 기말 성적 망하라고 작정한 거 아니야?”
“진짜. 어떻게 다들 짠 것같이 기말 바로 전에 리포트를 내주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나는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필기구를 대강 정리하며 동조의 웃음을 보냈다.
무르익은 겨울과 함께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쌩쌩 부는 바람의 온도가 여간 차가운 게 아니라서 바깥에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도서관 안은 히터를 가득 틀어 훈훈했다.
“참, 사은아. 우리 종강하면 스터디할 건데 같이할래?”
가연이가 꺼낸 스터디라는 말에 짐을 챙기던 나의 손길이 느려졌다.
“스터디?”
“응. 우리 이제 다음 학기면 교생도 나가야 하고… 임용 준비도 슬슬 본격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여자애들끼리만 모여서 하려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하게도 차무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연이는 내게 이렇게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았으리라. 당연히 했을 테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통금이 있는 고등학생처럼 빠릿빠릿하게 구는 나를 알기에 묻나 보다 싶었다.
“음….”
하고 싶은 의지가 있더라도 차무겸이 안 된다고 하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걸 동기들이 다 모인 이 자리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차무겸이 필요 이상으로 내게 강박적으로 군다는 걸 선전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때마침 지이잉.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곧 도착하니까 나와.
통화는 간결하게 끊어졌다.
“차무겸?”
나를 보던 가연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짐을 마저 챙겼다.
“사은 언니, 가?”
“누군데?”
“언니 남자친구일걸.”
“헉, 저번에 그 술자리 왔었다는? 존나 잘생겼다는?”
그러나 이미 테이블의 이목은 내게로 쏠린 상태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책과 필통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차무겸이 내 남자친구라고 믿는 아이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속 어딘가가 못 견디게 메스꺼워졌다. 이제는 하루의 당연한 일과로 자리 잡아버린 섹스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동기들에게 오해라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었지만 관뒀다. 나중에 그게 또다시 차무겸과의 관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몰라서였다. 지금도 불안정한 지반을 더더욱 위태롭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내게 일어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뭐? 언니 남자친구 생겼다고?”
호들갑은 때로 불운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미처 몰랐던 동기까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순간이 생기기 때문에.
요 며칠 바빠서 함께하지 못한 동기, 진아였다.
“뒷북을 요란하게 치네.”
“야, 이미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일이야.”
“허얼. 왜 나만 몰랐어?”
진아는 진정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망했네.”
그러나 그 반응이 단지 동기의 연애 소식을 늦게 알게 되어 부리는 짜증이라기에는 다소 의아한 감이 있었다.
“왜?”
누군가 나의 의문을 대신 해소해주었다.
진아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아니… 나 타과에 친척인 남자애가 한 명 있는데, 언니랑 같은 교양 듣는다고 했거든. 언니 소개해달라고 난리여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그새 누가 채갔단 말이야?”
동기들이 알 만하다는 듯 눈빛을 교환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간 학교에서 번호를 물어오는 남학우가 그리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쪽으로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매일 밤 차무겸이 핸드폰 검사를 하는 통에 어쩌다가 번호를 알게 된다 한들 학교를 나서며 지우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동기들은 이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아서 자연스레 내가 눈이 높다고 판단했고, 주변에서 소개해달라고 성화를 부린다 해도 만류하거나 곧잘 쳐내고는 했다.
진아는 그 와중에 누군가를 내게 소개시켜주려고 간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뭐.”
“이래서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그래도 언니, 걔 진짜 괜찮은 애거든.”
“야, 남자친구도 있는 애한테 별소리를 다 해.”
“친구로라도 지내면 좋잖아!”
나는 불이 옮겨붙는 것처럼 이쪽저쪽 옮겨 다니는 화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근데 괜찮아.”
진아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이만 가볼게.”
가연이가 가방을 어깨에 메는 나를 향해 손을 붕붕 저었다.
“잘 가! 스터디 생각해보고 할 마음 있으면 연락 줘!”
훈훈한 도서관을 빠져나오자 겨울의 냉랭한 공기가 피부 위를 따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벌써부터 꽁꽁 언 것 같은 뺨을 만지작거리며 정문으로 향했다. 인파가 꽤 되는 도로변에 정차되어 있는 차를 발견했다.
예전에는 곧잘 혼자서 돌아가고는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를 데리러 오는 건 박승원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차무겸은 대체로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 나는 저 차 안에서 이미 차무겸과 배를 수두룩하게 맞췄다. 카섹스는 차무겸의 새로운 취미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조수석 문을 열자 따듯한 바람이 언 피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시트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당기던 나는 슈트를 차려입은 차무겸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오늘 어디 가?”
“집안 행사.”
“아…. 그럼 나 데리러 오지 말지. 바쁠 텐데.”
“너 데리러 와야지.”
차무겸은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너도 가는 자리인데.”
가방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던 내가 멈칫했다.
“뭐? 왜?”
“내가 널 데려갈 생각이니까.”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내가 거기 가서 뭐 해.”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 구경도 해. 아, 아버지한테 인사도 좀 하고. 안 그래도 너 보고 싶다고 하셔서.”
“차무겸.”
“맨날 공부만 하니까 쉬엄쉬엄하라고.”
전방을 주시하던 차무겸이 실실 쪼개며 말했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관두었다. 맨날 공부만 한다고. 최근 들어 각 잡고 의자에 앉아본 적이 없다는 걸 아는 놈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마냥 조롱으로만 느껴졌다.
“안 갈래. 나 지금 옷도 이렇게 후줄근하고….”
“지금 너 옷 갈아입히러 갈 거야.”
차무겸은 막무가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녀석이 주로 이용하는 개인 룸에 도착해 있었다. 연간 몇억 원 이상의, 범상치 않은 소비력을 보여야지만 예약이 가능한 VVIP 룸으로, 퍼스널 쇼퍼가 상주해 있어 원하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면 종류별로 대령되는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쭈뼛거리기 바빴으나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 차무겸과 함께하는 5년간 왕왕 방문한 덕분이었다. 대체로 차무겸이 쇼핑을 할 때였다.
그래, 분명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 극진함을 받는 대상이 되자 말도 못 하게 불편해졌다. 차무겸은 이런 나를 인형처럼 세워두고서 이것저것 갈아입혀 보라 지시를 내렸다.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투피스 룩을 입고 나오자 소파에 앉은 차무겸의 인상이 대번 찌푸려졌다.
“다리 드러나지 않는 걸로 입혀.”
그는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직원들에게 잘도 하대를 했다. 커튼이 다시 쳐지고 이번엔 살구색 원피스가 입혀졌다.
“벗은 것처럼 보여서 좀 야한데.”
턱을 괸 차무겸의 심드렁한 평가에 커튼은 다시 쳐졌다. 결국 나는 종아리 반을 가리는 단아한 느낌의 검은 원피스를 입게 되었다.
“얼굴이 워낙 작으시고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라인이 훌륭하셔서 드러내면 좋겠지만….”
차무겸의 앞에서 깍듯하게 설명하던 퍼스널 쇼퍼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자체적으로 꿀꺽 삼킨 말을 잘 알았다. 쇄골 부근에 차무겸이 밤새 찍어놓은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 그러므로 머리를 묶을 수도, 이보다 조금 더 가슴골이 파인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탈의를 도와주며 다 보았을 테니 그녀는 눈치껏 자국을 가릴 수 있는 의상을 가져온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그 자국 때문에 언제나 답답할 정도로 목을 가리는 목폴라를 입어야 했다. 그래도 쇄골 위쪽으로는 남기지 않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지, 긴 옷이 허용되는 겨울인 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직원 중 하나가 아무렇게나 묶어둔 머리를 풀어 단정하게 정리해주었다. 의상이 정해지자 나머지 소품 역시 빠르게 결정이 되었다. 굽이 제법 높은 구두를 신고 비틀대자 차무겸이 허리를 껴안아 지탱해주었다.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돌리니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나와 차무겸이 질펀하게 키스라도 한 줄 알겠다. 아, 정말이지 못 견디게 불편했다.
“나 꼭 가야 해?”
차에 올라탄 내가 한 번만 기회를 달라는 것처럼 비굴하게 물었다.
“옷까지 갈아입고서 묻기엔 늦은 거 아니야?”
“네가 입힌 거잖아.”
영 내키지 않는 마음에 퉁명스레 말하다가 움찔했다. 차무겸이 창가를 향하던 턱을 단단히 그러쥐어서였다. 그가 조수석에 앉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사실 나도 가기 싫은데.”
“…….”
“그럼 우리 그냥 집으로 가서 네 옷이나 찢으면서 놀까?”
질 나쁜 협박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옷까지 갈아입은 이상 절대로 오늘 그가 향하려는 자리에 빠지지 못하게 됐다는 걸. 차무겸은 한번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 실행하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내 앞에서 번들대는 눈동자는 게걸스러운 욕구로 기름칠 된 채였다. 느릿하게 혀로 입술을 축이는 태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나를 한입에 삼키려는 짐승을 코앞에 둔 것만 같았다.
나는 긴장감을 끌어안은 양 날숨을 조절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고분고분하게 구는 태도에 차무겸이 내 입술을 한 번 핥고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막힌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앞에서 호흡조차 버거워졌다.
으리으리한 호텔 연회장에 도착한 건 금세였다.
그리고 나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낭패감을 맛보았다.
[해운그룹 창립기념식]
망할.
하필 오늘 모임의 주인공은 차무겸의 집안이었다. 이런 건 좀 미리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연한 수순으로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인파도 마찬가지였다. 걱정했던 대로였다. 차무겸이 등장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화살촉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 가운데에는 지난날의 변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김형준부터 안진권까지, 여러 의미로 얽힌 낯익은 얼굴들이 속속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멈칫한 건 안진권의 옆에 선 여자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차무겸 옆에 선 나처럼, 안진권의 파트너로서 참석한 듯 보이는 여자는 당연하게도 가연이가 아니었다. 친밀한 사이처럼 팔짱을 끼고 상체를 딱 맞붙인 모습이 유독 거슬렸다. 가연이는 모르는 안진권의 면모를 우발적으로 발견한 것만 같아서.
그래도 확실한 건 아니었다.
가족일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단순히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는 거고…. 차무겸에게 물어보면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그러나 지금 그는 내가 말을 걸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분주했다. 게다가 괜한 이야기로 모여든 인파의 이목을 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잠깐 사이, 안진권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관심 속 차무겸과 대면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탐색 어린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그네들의 노골적인 눈길에 피부 살갗이 다 벗겨지는 것만 같았다.
“무겸아.”
그러던 중 누군가 사람들을 가르고 나타났다.
나는 언젠가 기사를 찾아보다가 인터넷으로 본 얼굴을 기억했다. 수행비서인지 추종자인지 모를 사람들을 뒤에 길게 거느린 차무겸의 아버지였다. 그간 서울로 올라와 지낸 내내 차무겸의 가족을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왔구나.”
“좀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아니다, 오면 된 거지.”
차무겸의 부친은 차무겸과 이목구비가 유사했다. 멀리서 보아도 부자임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쏙 빼닮은 구석이 여럿 있었다. 말끔하게 빼입은 차무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그의 시선이 다음 순간 내게로 꽂혀 들었다. 나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허리를 얼른 숙였다.
“이쪽이….”
“네, 사은이요.”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만났다고 한들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는지 남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이 연회장의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조아려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안녕하세요, 김사은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구나.”
나는 용기를 내어 차무겸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잔주름조차 발견할 수 없는 수려한 얼굴은 여전히 판판하기만 했다. 불쾌하다거나, 마뜩잖다거나, 언짢은 기색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티가 나지 않도록 잘 갈무리하는 걸까?
그럴 리가. 차무겸의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나를 배려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는 제 아들 곁에 들러붙은 거머리를 향해 싫은 티를 내도 한참은 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럼 정말로 날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신빙성이 없는 가정이었다. 결국은 오리무중이었다.
“재미있게 놀다 가렴.”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서 놀 만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척 봐도 인맥을 넓힐 사교의 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메리트야 있는 집 자식인 차무겸에게나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거지, 나 같은 빈자는 한껏 위축되어 기만 죽는 장소였다. 기껏해야 한쪽에 핑거푸드 케이터링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그러나 저게 의례적으로 건네는 인사임을 알기에 나는 그저 ‘네, 감사합니다.’ 하고 고분고분히 답했다.
“무겸이는 잠깐 나와 가자꾸나.”
차무겸의 아버지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차무겸은 썩 내키지 않는 듯 보였으나 벗어날 방도는 없었다.
“쉬고 있어. 저기 구석에서 음식이라도 먹든지.”
차무겸이 내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여 속삭댔다. 허리춤을 은근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기도가 졸아붙었다. 그 노골적인 행색을 지켜보는 이들이 주위에 적잖았다. 여기저기 박혀 드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무겸이 마지못해 아버지를 따라 떠났다. 그제야 숨통을 칭칭 옭아매던 실이 툭 끊어졌다. 멀어지는 차무겸과 차무겸의 부친 뒤로 여러 인물들이 바퀴벌레 떼처럼 달라붙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실감 나는 장면이었다.
동시에 차무겸에게서 떨어져 나온 나는 외딴섬에 놓인 것처럼 혼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나의 주위를 감돌던 인파가 썰물처럼 흩어져버렸다. 주변을 아우르던 기척의 목적이 차무겸이라는 게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로서는 환영이라, 더듬더듬 뒤로 물러났다. 차무겸이 입장한 내내 허리를 잡아주고 있어서 나름대로 지탱할 수 있던 몸이 속절없이 휘청거렸다. 나는 연회장 입구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차무겸은 그의 부친이 소개해주는 누군가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조금은 시간이 생긴 듯해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손을 여러 번 씻었다. 사실 정신을 차릴 겸 세수를 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애써 한 화장이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아까 그 숨 막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참아야만 했다.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벌써 진이 빠졌다.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연회장에 서 있는 내내 우리 속에 갇힌 구경거리가 된 심정이었으니.
다들 익숙하게 차무겸에게 말을 걸며 내게 일말의 관심을 내비치는 걸 잊지 않았다. 남자의 경우에는 머리와 옷으로 가렸음에도 은밀히 드러나는 살갗을 눈길로나마 지분거렸고, 여자의 경우에는 나를 품평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고 또 훑어보았다. 어느 쪽인들 불쾌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서 화장실을 나섰다. 맞은편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익숙한 인물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한우현이었다.
쟤도 왔구나.
아니, 쟤는 차무겸 사촌이니까 당연히 왔겠지.
“안녕.”
잇따라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선 한우현이 머뭇대다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응.’ 하고 답하며 한우현을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던 차 별안간의 일이 머릿속을 침투했다. 김형준과 안진권이 내게 나란히 꺼내놓은, 차무겸과 관련이 있는 과거의 파편이었다.
적어도 한우현이 걔네보다는 잘 알지 않을까. 그 생각에 걸음이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한우현.”
“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영 뜻밖이었는지 한우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곳을 가리켰다. 화장실 반대편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구두 굽이 높아 살짝 비틀거리자 한우현은 날랜 동작으로 팔을 붙잡아주었다. 나는 웅얼대는 수준으로 고맙다고 말한 후 얼른 팔을 붙잡아 뺐다. 한우현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왜?”
문이 닫히고서, 한우현은 얼떨떨한 감정을 완연히 지우지 못한 채로 물었다.
“있잖아, 그… 차무겸 말인데.”
내 입에서 차무겸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동공 속에서 일렁이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혹시 어렸을 때 무슨 일이 있었어?”
“뭐? 네가 그걸 어떻게….”
한우현은 내가 그를 불러세웠을 때보다 더 놀랐는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대답을 촉구하듯 그를 가만 마주했다.
“아, 그게….”
“차무겸을 아는 애들이 나한테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고. 차무겸이 정신병자라느니… 게이라느니….”
“누가 그래?”
평소 보이던 모습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예민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곧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인지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곤혹이 잔뜩 묻어나는 태도를 가늠하듯 응시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야?”
“차무겸한테 물어봤어?”
“아니… 근데 언뜻 말한 적 있어. 자기 어릴 때에 일이 좀 있었다고…. 그것 때문에 군대도 면제됐다고 하던데.”
한우현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잠겼다. 이 얘기를 내게 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판단이 끝났는지 그가 턱을 문지르며 입술을 벌렸다.
“무겸이 어렸을 적에… 납치를 당한 적이 있어.”
“…납치라고?”
“응.”
“누구한테?”
“어머니 내연남한테.”
한우현은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며 나를 한쪽에 놓인 푹신한 소파로 이끌었다. 사실 거리가 정도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게 불편했지만 일단 저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마음에 잠자코 따랐다. 제법 밀접해진 한우현에게서 독하지 않은 스킨 향이 났다.
“어머니 내연남이라고…? 차무겸 어머니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야?”
“그래. 근데 따지고 보면 이모부가 먼저…. 아, 얘기가 너무 깊어지는데.”
한우현은 난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이마를 문질렀다. 판단이 끝난 줄 알았더니 아직도였나. 아니면 단편적인 부분으로 내가 지핀 호기심을 해결해주기엔, 영 녹록지 않음을 인지했다든지.
나는 한우현의 입 속에 갇힌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속삭였다.
“곤란한 거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냐. 차무겸이 먼저 얘기한 거라면, 네가 물어보면 그냥 알려줄 수도 있어. 이 문제는 걔보다 걔 주변이 민감하게 구는 거라서.”
이윽고 한우현은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외도의 시작은 차무겸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어. 무겸이 아버지, 그러니까 이모부께서 먼저 다른 여자가 생기셨거든. 젊은 여배우였는데… 그때가 아마 무겸이가 6살 때였을 거야. 근데 이모가 어쩌다가 그걸 알게 되셔서… 그 일로 많이 힘들어하셨어. 그렇지 않아도 무겸이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차에 남편의 외도까지 알게 되셨으니까.”
나는 조금 전 연회장에서 마주쳤던 차무겸의 부친을 떠올렸다. 반듯하고 모난 곳 없는 인상과 외도라는 단어가 잘 연관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에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게 이성과 관련된 정치적 추문이었다. 차무겸의 부친이라고 해서 반드시 예외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이모가 좀 괜찮아지셨는데…. 우리는 당연히 주기적으로 받는 상담 덕분인 줄 알았지. 근데 알고 보니 이모도 남자가 생기셨던 거야. 상담을 맡아주던 의사였다고….”
“…….”
“문제는 이모나 이모부나, 두 사람 모두 이혼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거지. 이모부는 얼마 되지 않아서 내연녀를 정리하고 가정으로 돌아오셨고…. 이모부가 그렇게 나오니까 이모도 흔들린 모양이야. 두 분, 연애결혼이시거든. 이 바닥에서는 흔치 않지. 어쨌든…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다시 깨끗하게 시작해보자고 마무리를 지었는데… 문제는 이모의 내연남이 이모한테 완전히 푹 빠져버렸다는 거야.”
“…….”
“이모가 자기와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니까 홧김에 애들을 납치해버렸어.”
“애들?”
“진겸이 형하고 무겸이.”
나의 머릿속이 잠깐 꼬여 들었다.
“진겸이… 형이라니?”
한우현은 토끼눈이 되었다가 제 실수를 인지한 것처럼 아, 하고 아득한 탄성을 내보냈다.
“몰랐어?”
“전혀…. 차무겸은 나한테 자기가 삼대독자라고 하던데.”
“그 사건으로 그렇게 됐어. 그때… 진겸이 형이 죽었거든.”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한우현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둥그렇게 문질렀다.
“진겸이 형하고 내연남, 둘 다 죽었어.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건 차무겸 하나야.”
“…….”
“문제는, 차무겸이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을 못 했다는 거지.”
아래로 내리깔린 한우현은 당시의 기억을 반추하듯 흐리멍덩한 시선을 내보였다. 나는 가만 귀를 기울였다.
“유일한 목격자고 생존자인 차무겸이 그 상태라서 사건은 거기서 끝났어. 뭐, 괜한 구설수에 말리느니 그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기도 했고, 뭣보다 범인이 죽었으니…. 그 사건으로 이모의 건강 상태만 악화되셨지. 실제로 얼마 안 가서 돌아가시기도 했고.”
얘기가 흘러 흘러 거기까지 가닿았을 때 의문이 퍼뜩 고개를 치들었다.
“근데 게이라는 얘기는 뭐야?”
흘러가는 흐름을 대강 파악해보아도, 이 사건 어디에서 게이라는 의혹이 지펴질 여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직접 운운한 안진권은 두말할 것이 없었고, 김형준도 ‘차무겸한테 달라붙는 여자애들은 다 골 빈 년 같다’고 이런 쪽으로 여지를 남겼으니까.
한우현의 한숨이 짙어졌다.
“그게… 사실 무겸이 기억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야 많았는데 해운 측에서 강력하게 반대했었어.”
“왜?”
“그 현장에서 콘돔하고 정액이 나왔어.”
지직지직 이어지던 사고회로가 뚝 꺾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무겸이가, 이모를 좀, 많이 닮았거든. 어른들은 무겸이가 내연남한테 안 좋은 짓을 당했다고 여긴 모양이야. 실제로 애가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은 게 아닌가 하기도 했고.”
“…….”
“어쨌든 해운그룹 측에서는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고 사건 이후부터 차무겸을 오냐오냐 대했어. 당시 차무겸을 담당했던 의사가 말하기를, 스트레스를 받으면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나 봐. 혹시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할까 봐 다들 안절부절못했지, 뭐. 특히 걔 할아버지가 유난이셨어. 이제 하나 남은 삼대독자다 보니…. 차무겸이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고.”
“그럼 차무겸 가족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겠지.”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렴풋이 접하게 된 건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 안으로 숨은 면은 더 어마어마한 진실을 품고 있었다.
조금 전, 연회장에서 나를 대하던 차무겸 부친의 태도가 잇따라 떠올랐다.
“차무겸 아버지 말이야…. 나를 전혀 싫어하질 않으시더라고.”
“…….”
“혹시 이것도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걸까?”
“당시에 기사를 그렇게 막았는데도 이런 식으로 하나둘 아는 녀석들이 나오잖아. 그러니 이모부 입장에서는 그 사건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면서 외아들이 게이와 관련된 추문에 휩쓸리는 것보다는… 여자를 끼고 다니는 이성애자로 여겨지는 게 낫다고 판단하신 거겠지.”
짐작대로였다. 이래서 차무겸이 내게 돈을 퍼부으며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굴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거구나. 삼대독자의 온전한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득, 연회장을 벗어난 시간이 꽤 됐음을 자각했다.
“이만 가 봐야겠다.”
지금쯤 대화를 마친 차무겸이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불똥이라도 튄 것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김사은!”
일어나 문가로 다가가는데 한우현이 급히 나를 붙잡았다.
“너… 괜찮은 거지?”
문고리를 잡은 채 한우현을 돌아보았다.
“뭐가?”
“저번에 강진모 집에서….”
한우현은 꺼림칙한 주제라도 꺼낸 것처럼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나는 그가 꺼내는 이름이 누군지 몰랐으나, 그 ‘누군가의 집’이라는 말에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이렇듯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는 내 삶에, 누군가 미세한 균열을 발견할라치면 곧잘 예민해지고는 했다.
“괜찮아.”
내가 모르는 척하듯 남들도 몰라야만 했다.
차무겸이 나를 성적으로 짓뭉갠 이후부터 무언가 삐걱대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온갖 애를 써서 모르는 체했다. 왜냐면 아직 내 삶은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차무겸에게 비위를 맞춰주는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거기에 섹스가… 추가된 것뿐이잖아. 그렇게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세뇌를 걸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남들에게는 그게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하나의 수단에 그칠 뿐이라는 합리화를….
“네가 차무겸에 대해서 물어보는 걸 처음 봐서.”
뒷목을 감싸 쥔 한우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사실은.
나조차도 귀를 기울이면서 한편으로 의아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차무겸의 과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걸 굳이 들으려 하는 걸까.
그러나 동시에 불안했다.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차무겸의 어느 구석이 나의 일상에 지금보다 더 선명한 균열을 낼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했고 두려워서라도 알아두고 싶었다. 위태로운 인간관계에서는 되도록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지만 대비가 가능했다. 특히 나처럼 시종일관 기우뚱거리는 시소 같은 관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고마워.”
속에서 우글우글 끓고 있는 속엣말 대신 호기심을 풀어준 데에 고맙다는 인사만 간단히 전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섰다.
휴게실 밖은 히터가 틀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나는 열대야를 거닐 듯 속이 답답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랬다. 폐 속에 불붙은 성냥 하나가 굴러들어온 것처럼 속에 곧잘 열이 올랐다.
연회장으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차무겸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움칠대며 몸을 돌렸다.
“안녕?”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차무겸 친구였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애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은 톡톡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남자의 집에서 차무겸의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변덕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까 한우현이 말한 이름이, 그러니까.
“…강진모?”
“우와, 내 이름 기억하고 있네.”
강진모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세웠다. 차무겸의 친구 중 내게 좋은 인상으로 남은 애는 몇 없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단 한 명도 없다. 강진모는 그런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저 너머를 손으로 콕콕 가리켰다.
“아까부터 봤는데 무겸이 찾는 거 같길래. 무겸이 저리로 갔어. 걔도 너 찾는 거 같더라고.”
“아… 고마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강진모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뒤늦게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강진모가 다른 뜻이 있어서 나를 이쪽으로 보낸 거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순순히…. 이미 한 번 김형준에게 데인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영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장의 다른 입구 부근에 다다라 멈췄을 즈음, 어딘가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아 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구두가 높아서 비척거리기 바쁘던 몸이 금세 기울었다. 하지만 넘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어디 있었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꾹 내리눌렀다. 차무겸이었다. 다행히 강진모는 내게 거짓말을 치지 않았다. 차무겸이 내 뺨을 감싸 쥐고는 반대편 귓불에 입술을 부드럽게 비볐다. 기둥에 가려진 사각지대지만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그 긴장감에 경직된 내 상태를 알아챘는지 차무겸이 옆으로 난 문을 열어 휴게실로 들어섰다.
“없어져서 놀랐잖아.”
차무겸이 나를 벽으로 몰아붙이며 서슴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응, 그, 게….”
변명을 하려고 해도 그럴 새를 주지 않았다. 뜨끈한 혀가 입 안으로 침투해 곳곳을 누비며 점막을 핥아댔다. 내 고개가 뒤로 젖혀져 벽에 쿵쿵 찧을 정도로 혀를 쑤셔 넣던 차무겸이 불시에 입을 떼고 내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하여튼 눈만 떼면 없어져.”
내 엉덩이를 그러쥔 그가 가운데를 벌려 은밀한 틈새로 바지춤을 포악하게 문질렀다.
“하, 씨발… 따먹고 싶네.”
나는 움찔대며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안 돼, 여기선 싫어….”
“안 돼?”
차무겸은 옷을 다 갖춰 입은 상태에서 유사 성행위라도 하듯 허리를 팡팡, 쳐올렸다. 그때마다 엉덩이골에 문질러지는 두툼한 감각이 오감을 오싹하게 휘저었다.
“하, 하지 마.”
“진짜 안 돼? 응?”
“안, 돼…! 그만해.”
“왜 안 되는데?”
“누가, 누가 들어오면….”
퍽, 퍽, 퍽. 차무겸은 또다시 반쯤 맛이 간 것처럼 아랫도리를 정신 사납게 놀리기 시작했다. 평상시처럼 성기끼리 닿기는커녕 몇 겹의 옷으로 막혀 있는 상태임에도 정말 섹스를 하는 것처럼 몸이 둥둥 흔들렸다.
그러던 중 차무겸의 세찬 동작이 멎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덜미 위로 뱀의 비늘같이 서늘한 손가락이 휘어 감겼다. 윽, 하고 신음이 나올 만큼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차무겸이 내 목덜미에 코를 처박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너 누구랑 있었어.”
손바닥이 움찔 말려들었다. 어느새 맺힌 땀 때문에 손이 미끌미끌했다.
“왜, 왜?”
“향수 냄새 나.”
“…….”
“남자 거 같은데….”
향을 판별하는 조향사처럼 높고 아름다운 콧대가 진득하게 문질러졌다. 목덜미 위로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지나가다가 부딪쳐서… 그런가 봐.”
차무겸은 그게 누군들 내가 남자와 있는 꼴을 못 봤다. 오늘 한우현을 붙잡은 건 나였다. 이전부터 간직해온 의문이 있었고, 어쩌면 그 실마리를 가장 또렷하게 아는 인물이 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결과적으로 짐작이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므로 한우현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러니 차무겸의 서슬 퍼런 레이더에 걸리지 않게 해야만 했다.
“한우현 향 같은데, 이거?”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이 나의 각오를 잘게 다졌다. 기를 써서 숨기기도 전에 정체가 발각됐다. 그 집요함에 새삼스럽게 오한이 들었다.
차무겸의 콧날이 목덜미에서 머리카락으로 이동했다. 그 감촉이 피를 차게 식혔다. 그토록 짧은 틈을 타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 향기가 밴 건가. 기다랗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피부보다 더 선명하게 향을 담아낸 모양이었다.
“아…!”
머지않아 머리채가 붙잡혔다.
“한우현하고 지나가다가 부딪쳤어?”
“읏, 아파!”
“고작 부딪쳤는데 향이 이렇게 진하게 남는다고?”
비꼬면서 떠보는 의도가 명백한 질문이었다. 나는 옅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해.”
그런 내 태도가 답답했는지 차무겸은 머리카락을 더 잡아당겼다. 침을 꿀꺽 삼켰다. 또다시 칼날 위에 서 있는 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차무겸은 요즈음 왈칵 들솟은 화를 난폭한 섹스로 풀고는 했다.
눈앞이 위기감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여기서는 안 된다.
“사, 사실 네 얘기, 물어보느라… 아…!”
“내 얘기?”
차무겸이 꽉 움키고 있던 머리칼을 슬슬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성의 없는 손길로 쓸어주며 계속해보라 채근했다. 나는 불규칙적인 호흡을 내쉬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쩌다가 알게 됐어. 너, 그, 과거 일….”
“과거 일?”
“…….”
“아, 나 납치당했다는 거?”
한우현의 짐작대로 차무겸은 그것을 까발리는 데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너무 당당하고 태연해서 아침에 먹은 식사 메뉴를 복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오히려 나는 그게 언짢음의 표출 같아서 목을 움츠렸다.
“미안….”
“왜 사과를 해?”
차무겸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기억도 못 한다고 들었고, 그리고… 그냥… 좋지 않은 일이니까.”
피식 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차무겸은 슬쩍 뒤를 돌아본 내 고개를 원상태로 돌린 후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놀란 내가 흠칫하자 그가 귓불에 입술을 찰싹 붙여 속살댔다.
“안 넣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흣, 그럼 손은 왜….”
“너 여기 안쪽 살 부드러워서 좀 만지려고.”
차무겸이 말하는 안쪽 살이란 허벅지 안쪽을 일컫는 것이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그 부위를 연신 주물럭대며 차무겸이 내 어깨에 턱을 걸쳤다.
“사은아.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하나 알려줄까?”
손의 위치가 사타구니와 가깝다 보니 몸이 절로 둥글게 말렸다. 그러나 차무겸의 손길은 끈덕졌다. 여차하면 속옷과 속바지를 젖히고서 구멍을 뚫고 들어올지 모른다. 섹스에 있어서 특히나 정신이 회까닥 돈 것처럼 구는 차무겸이라면 충분히 그 짓을 하고도 남았다.
“나 있잖아.”
그래서 내 귓속으로 뜨거운 숨을 밀어 넣는 차무겸의 행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밀어진 말이 허공을 부유하는 나의 정신을 그러쥐어 현실에 강렬히 메다꽂았다.
“사실은, 그 일 다 기억한다?”
벽을 짚은 나의 손끝이 동그랗게 휘감겼다. 한순간, 아래로 파고드는 무엄한 손이고 뭐고 뒷전으로 미뤄졌다. 온 신경이 그가 한 말에 쏟아졌다. 애써 정면으로 고정시킨 고개가 절로 그를 향해 돌아갔다.
“네가 나한테 관심 가진 게 예뻐서 알려주는 거야.”
“지금, 뭐라고….”
“다 기억한다고, 나.”
차무겸이 불시에 맞댄 하복부를 한 번 쳐올렸다. 또다시 몸이 덜컹 흔들렸다. 나는 때아닌 고백으로 사고가 혼곤하게 꼬여 들었다.
“그럼 왜… 왜 기억이 안 난다고 했어?”
“처음에는 별로 말하기 싫어서 안 했고.”
다시금 아랫도리를 맞부딪치는 허릿짓이 이어졌다. 차무겸은 섹스를 모방한 행위에 취한 노곤한 낯으로 음습하게 지껄였다.
“그 후로는 다들 내 눈치 보면서 설설 기길래 그냥 입 다물었어.”
“너, 다들 얼마나 널 걱정…!”
속 편한 소리가 터무니없는 정도를 넘어서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걱정? 걱정을 왜 해.”
“읏, 아! 좀, 그만해…!”
“아, 나 그 새끼한테 후장 털렸을까 봐?”
끝 간 데 없는 천박한 언사에 나의 동공이 휘청거렸다. 차무겸이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킥킥댔다.
“사은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옷을 다 갖춰 입은 엉덩이를 향해 피스톤질은 멎지 않고 계속되었다. 외려 갈수록 세기와 박자가 빨라지고 있었다. 정말 아래로 합을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엉덩이 부근이 마찰열로 후끈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새끼한테 후장 따여서, 그 뒷맛 뚫리는 거에 넘어가기라도 해서, 게이가 된 건지도 모른다고?”
“아, 멈, 멈춰 봐, 좀…!”
“걱정 마. 게이 됐으면 너한테 이렇게 발정하지도 않았겠지.”
차무겸이 혼잣말처럼 뇌까리고는 내 뺨을 스리슬쩍 핥았다. 피부에 닿는 히터 바람과 겹쳐진 끈적한 촉감이 잔 소름을 유발했다. 나는 무의미한 허릿짓이 멈춘 사이 급히 몸을 틀어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차무겸은 여느 때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왜 돌아. 마주 보고 해달라는 거야?”
“너 진짜로 다 기억한다고…?”
“응.”
“…그 일로 네가 밖에서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는 알아?”
고작 제 마음이 그러하다는 이유로 입을 닫고 있는 탓에 외부에서 정신병자라느니, 게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이었다. 차무겸은 내 허리를 끌어안아 벌어진 거리를 다시 좁혔다. 나와 잠시라도 붙어 있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미친놈 같았다.
“별로 상관없는데.”
차무겸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번드르르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만 지랄이지, 내 앞에서는 입도 뻥끗 못 하잖아.”
그건 사실이기는 했다. 김형준만 봐도 세 치 혀를 잘만 놀리다가 차무겸이 나타나자마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쏙 다물지 않았던가. 안진권 역시 만만한 내 앞에서나 그 주제를 꺼내 들었고….
“근데 어떤 개새끼들이 우리 사은이한테 쓸데없는 개소리를 지껄였을까?”
왈왈, 하고 작게 덧붙이는 의성어가 실로 장난스러웠다.
“그럼… 거기서 나온 콘돔하고 정액은 뭐야.”
“아, 한우현이 자세히도 나불댔네.”
차무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짐을 인식하고 나의 어깨가 둥그렇게 말렸다. 실수였다. 차무겸의 태도가 너무나 심상해서 무심결에 뭉쳐진 의문의 타래가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차무겸은 수십 번 들은 얘기를 또 들은 것처럼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웬 여자 신음을 들었어.”
“여자?”
“창녀 불러서 떡이라도 쳤나 보지. 몰라. 어쨌든 나한테 쓴 거 아니야, 그거.”
솔직히 나 역시도 차무겸이 게이라는 둥 하는 말은 결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 관하여 퍼진 피해 사실이 결코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모르니까. 진실은 차무겸만 알 텐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거야?
그 내연남도, 제 형도 목숨을 거둔 비참한 현장 속에서.
차무겸은 나의 의구심을 눈치챈 듯 눈꼬리를 요염하게 휘었다. 도회적인 구석이 군데군데 묻어나는 그의 눈가는 때때로 선득한 느낌을 부추기고는 했다. 차무겸은 벽에 있던 나를 끌고 소파로 가 앉았다. 좀 거리를 벌려서 앉고 싶었으나 대번 허리를 휘어 감아 제 다리에 앉히는 바람에 무리였다.
차무겸이 슈트 재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냈다. 길고 곧은 손가락에 담뱃갑과 지포라이터가 딸려 나왔다. 그는 나에게 라이터를 쥐여주고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찬찬히 눈을 깜박거리는 태도로 나른하게 종용한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으며 라이터 휠을 돌렸다. 일렁이는 불길이 끄트머리로 다닥다닥 옮겨붙었다. 그는 볼이 홀쭉해질 만큼 깊이 빤 담배를 빼내며 속삭였다.
“어떻게 나 혼자 산 거냐고?”
첨예한 눈빛이 내 속내를 통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정확하게 꼬집을 수가 있을까. 나는 라이터를 손에 꾹 쥔 채로 숨을 죽였다.
“간단해. 난 그 납치범 새끼가 하라는 대로 했거든.”
“…….”
“형은 질질 짜면서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고.”
언젠가 차무겸에게서 느꼈던 짙은 위화감이 다시 내풍겼다. 악의성에 가까운 천진난만함으로 하잘것없는 벌레를 꾹꾹 밟아 죽이는 아이처럼 다가오던 묘한 잔혹함. 투명하게만 보여서 더욱 살갗을 오소소 일어나게 하던 당시의 께름칙함이….
“나랑 차진겸, 납치당한 내내 옷장 속에 있었어.”
“옷장…?”
“응. 납치범이 거기다가 가뒀거든.”
“…….”
“근데 그 새끼 정말 별짓 안 했어.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밥도 꼬박꼬박 주고, 화장실도 가게 해주고 그랬거든.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러고 있으면 됐고….”
“…….”
“근데 차진겸은 그걸 버티지를 못하더라고.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고, 틈만 나면 도망가려고 하고…. 가만히만 있으면 별문제도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형은 납치범한테 맞기도 존나 맞았어.”
유년 시절의 기억이라기에는 뉴스 어느 면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참혹했다. 나는 형이 구타를 당했다는 소리를 심상하게 늘어놓는 차무겸을 아연하게 응시했다.
흡사 얼음덩어리를 연상시켰다.
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니까, 어찌 보면 참담하기 짝이 없는 가정사를 읊으면서도 감정의 농도를 얼추 엿볼 수조차 없었다.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얘기를… 뭐 저렇게 담담하게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아무리 제대로 된 가족도 가져보지 못한 처지라지만, 차무겸이 보이는 태도가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어? 뭐가 더 궁금해?”
차무겸이 아량을 베풀 듯 물었으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상 질문을 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기심에 발을 들였다가 그대로 쭉 빠져버릴 습지를 앞에 둔 기분이라서.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차무겸의 태도와 더불어 내가 이 일에 굳이 신경을 써야만 한다는 합리화가 자꾸만 어그러졌다.
이렇게 자꾸 신경을 쓰는 건 어쩐지, 그를, 내가, 그러니까 차무겸을….
“궁금한 거 생기면 언제든 물어봐, 사은아.”
“…….”
“너라면 다 대답해줄 수 있어.”
저의 잔혹한 유년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태도가 괴이하다. 그러나 시궁창처럼 검고 축축한 요소로 뒤덮인 차무겸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용기 따위는 내게 없었다.
그건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역치를 벗어난 지 오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