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차무겸과 여행을 다닌 나라는 무척이나 많지만, 개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으며 동시에 마음에 들었던 곳은 그리스였다.
짙푸른 해안 도시로 유명한 산토리니에서 지낸 한 달은 나의 인생에 걸맞지 않은 아름다움과 부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오직 차무겸의 동행인이라는 이유로 그곳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호텔을 이용하게 되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 옷이 내가 보기에도 썩 예뻐서 벗기 싫은 마음 또한 공존했다. 항간에서는 그걸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이라고 표현했다.
태양열 아래 에메랄드 빛깔로 퍼지는 지중해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의 평화가 깃들었다. 나에게 있었던 온갖 속 시끄러운 일들이 압축되고 압축되다가 끝내는 소멸되는 것처럼.
‘뭘 그렇게 봐.’
아침 일찍 테라스로 나와 선베드에 앉아 출렁이는 물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차무겸과 나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각자 다른 방을 썼는데 이곳은 두 방의 테라스가 이어져 있어서 상대방 룸의 키가 없어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머무는 공간만 나누어진 한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막 깨어난 듯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로 등장한 차무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꽤 강렬한 뙤약볕에 그는 내가 앉은 선베드 위로 파라솔을 가져다주고는 그 옆 선베드에 걸터앉았다.
‘그냥… 바다 예뻐서.’
‘보면 별거 아닌 거에 좋아하더라.’
‘응?’
‘과일도 그렇고, 바다도 그렇고.’
차무겸은 내 마음이 어떨지 평생 모를 거다. 넌 다 가져봤으니까 일일이 감흥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걸 거야. 반면 난 썩을 대로 썩은 떨이 판매로나 겨우 먹어 보았기에 과일이 특별했고, 일평생 침침한 산과 판잣집 같은 허름한 가옥으로 둘러싸인 암영에서 자라났기에 바다가 특별할 수밖에.
‘예쁘잖아.’
그 특별함을 다소 식상한 이유에 빗대어 설명하며 나는 껴안은 무릎 위에 턱을 걸쳤다. 차무겸은 선베드 위로 길게 누워서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우리가 같은 바다를 눈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흥미로웠다.
어쩌면 바다가 하늘과 땅을 모두 품을 수 있기에 가능한 모순인 걸까.
‘나 있잖아.’
잔잔하게 부는 바람이 바다의 물살을 이리저리 휘저어대는 걸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예전에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거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차무겸의 시선이 내게로 와 꽂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눈빛의 기세가 뾰족해지려는 기색이 언뜻 엿보여 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몸을 옹송그리기 위해 무릎을 모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중학교 때 반장이 스승의 날 선물을 산다고 애들한테 걷은 돈이 사라졌었는데… 어쩌다 보니 정황상 내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 거야. 체육 시간에 잃어버렸다는데 나는 그날 머리가 아파서 양호실에서 쉬었거든. 양호 선생님이 하필이면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자리를 비워서 증명해줄 증인도 없었던 거지.’
‘…….’
‘애들이 그걸 얘기했는지 방과 후에 담임이 날 부르는 거야. 그러더니 아무리 못 먹고 살아도 꼭 그래야 했냬. 훔쳤냐 안 훔쳤냐 물어본 것도 아니었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더라고. 내가 훔친 장면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고요히 부는 바람에 머리칼이 잘게 흩날렸다. 나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기 위해 맞잡은 손을 잠깐 놓았다. 무릎을 안고 있던 힘이 빠지면서 몸이 미약하게 기우뚱거렸다. 그 시절의 나처럼 속절없이 휘청대는 꼴이었다.
‘액수가 엄청 큰 것도 아니고 또 사정이 딱하니까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고 하더라. 다신 그러지 말라면서. 그리고 돌아오니까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난 이미 도둑년이 되어 있었어.’
‘…….’
‘근데 그러고 나서 며칠 후에 범인이 밝혀진 거야. 같은 반 남자애였는데 걔 가방에서 그 돈을 넣어둔 봉투가 나왔거든. 반장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봉투 뒤쪽에 스티커를 붙이고 메모를 해놨었는데 그것 때문에 걸렸어. 당연히 반은 뒤집어졌지.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는 입꼬리를 아주 얕게 휘었다. 그건 미소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는 비소에 가까웠다.
‘아무도 나한테 사과를 안 하더라.’
‘…….’
‘심지어 일방적으로 범인으로 몰고 간 담임마저도. 난… 그런 처우를 받는 게 당연한 존재였던 거야. 잘못하면 손가락질하고, 그게 아니라고 한들 사과를 건넬 필요조차 없는.’
철이 들었다기보다는 미숙한 편에 가까울 나이, 나의 속은 낙인을 덧입힌 시선과 언행으로 자상이 맺혔고 그것에 핏방울이 고인 채 너덜거렸었다.
‘그때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학교 끝나자마자 무작정 마을 밖으로 나갔어.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표 끊고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냥 그땐…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
가진 돈을 다 털어 간신히 구입한 버스표는 죽음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준비물이었다. 외진 암영과 그나마 가까운 강릉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빠져 익사할 곳이야 넘쳐 보이는 그 가파른 물살들.
‘근데 막상 바다를 보니까 또 마음이 달라지더라. 뭐라고 해야 하지… 무서웠달까. 저기 휩쓸리면 정말 끝이구나, 싶더라고.’
‘…….’
‘그때 깨달았어. 아, 나 지금 두려움을 느끼는 걸 보면 아직 살 생각이 있는 거구나. 아직 죽고 싶은 건 아닌가 보다.’
또한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된 면도 있었다.
푸른 계열로 시작하여 지평선으로 향할수록 점점 거멓게 변하는 색채감의 변화, 넓은 면적과 그 위를 동등하게 덮고 있는 광활한 하늘, 내리쬐는 햇살에 밀려오는 파도의 뿌연 포말….
그 웅장하고도 거대한 장관이 내게 있던 일 따위 별것 아니라 위로해주는 것만 같아서. 결국 이 또한 지나가고 말리라고 확언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냥 바다만 보고 돌아왔다. 웃기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당찬 결심이었다.
그래도 그날 이후로 죽음을 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조금 더, 잡초 정도만큼 자라난 것 같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게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까마득하고 아슬아슬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이 뇌리에 팍 박혔기 때문에. 어지간한 각오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 만한 것이었다.
일방적인 푸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차무겸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잘난 이목구비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는 바람에 그 낯이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다시는 하지 마.’
한참의 침묵 끝에 차무겸이 꺼낸 말은 그게 다였다.
언제나 단조로이 말하는 그에게서 좀체 듣기 힘든 묵직한 음성이었다. 얌전한 형태지만, 난 그게 꼭 진저리라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무겸은 내가 죽으려고 했던 과거의 흔적에 그렇게나 치를 떤 것이었다. 그건 아무리 보아도 염려에 상응하는 반응이라서, 당시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동화 같은 풍경의 회상 속에서 나는, 주제넘게도, 조금은 행복했었던 것 같다.
“…….”
한 폭의 그림 같던 꿈에서 깨어나 눈을 가늘게 떴을 때.
나는 내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요동치는 시야 너머로 파도의 색을 닮은 하늘이 드넓게 펼쳐졌다. 그 광경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별안간 아랫배를 누르는 힘에 아-! 하고 탄성했다.
“흣, 깼어?”
두 다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단단한 완력이 내 오금과 종아리를 꽉 그러쥐고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수면 속에서 무채색으로 옅어진 감각이 하나둘씩 색채감을 되찾았다.
그제야 나는 내 위에 올라탄 이가 짐승처럼 뿜어내는 뜨거운 숨결을 인지했다. 더하여 그 주체가 누구인지도.
“으, 흡…!”
“와. 확실히 깨니까, 안이… 하아.”
“차무, 아! 놔…!”
내 위에 벌거벗고 올라타 있는 차무겸의 모습이 눈앞을 허옇게 점멸시켰다. 나는 발버둥을 치며 시트를 긁었다. 어떻게든 기어가려고 이불을 쥐어짜며 상체를 일으켰으나 큰 손이 허리를 바투 감싸 아래로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무용지물이었다. 외려 입구 부근에서 깔짝대던 성기가 눅신눅신하게 풀어진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삽입됐다.
“흐으응!”
내벽의 살점이 함부로 짓뭉개지자 난폭하고 날렵한 감각이 배에 꽂혔다. 근지러운 듯하면서도 무지근한 통증이 따른다. 허벅지 안쪽이 견딜 수 없이 저렸다. 오므라든 발끝이 시트를 위태롭게 문질렀다.
차무겸은 옆으로 누운 내 한쪽 다리를 감싸 안으며 안을 음미라도 하듯 나른하게 비벼댔다. 근육으로 옹골찬 그의 상체가 그리는 몸선이 야릇하기 그지없었다. 근육이 꿀렁꿀렁 요동칠 정도로 나의 엉덩이 사이를 후벼 파는 움직임이 끈질기고 집요했다.
희한한 건 내 몸이었다. 분명 정신을 놓기 전만 해도 모래 사이를 가로지르듯 뻑뻑하기만 하던 안이 부드럽게 풀어져 성기를 오물오물 죄는 게 스스로도 인지됐다. 예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아래가 이렇게 흐물렁 풀어질 만큼 녀석이 고삐 풀린 것처럼 박아댔든지, 아니면, 그만큼, 내 안에….
“역시 의식 있는 게 더 좋아. 자는 것도, 후, 나쁘진 않은데 시체랑 하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좀, 별로더라.”
“흐, 무겸아, 그만해… 아, 좀…!”
차무겸이 품에 안아 든 발목의 복숭아뼈를 쭙쭙 빨았다. 등줄기가 간질간질거리는 요상한 감각에 나는 허리를 뒤채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녀석의 것이 깊숙이 치들어와 안을 휘휘 저을 때마다 눈앞에서 별이 반짝거렸다. 온갖 고통만 낭자하던 기절 전이랑은 뭔가 달랐다.
“보니까 사은이 넌 젖꼭지가 예민한 것 같아. 자꾸 움찔거리더라고.”
버둥질을 치던 나는 그 노골적인 전언에 흠칫했다.
“그래서 내가, 후으, 존나 빨아줬어.”
열기가 눅진하게 밴 목소리는 나조차도 모르는 내 몸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나는 차무겸을 따라 내 옷마저도 벗겨져 있는 이 상황에 신물이 났다. 나의 입에서 새끼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소리가 스며 나왔다. 차무겸이 옆을 응시하는 나의 몸을 불시에 돌렸다.
“브래지어 풀고서 놀랐잖아. 너 가슴 원래 이렇게 컸어? 씨발, 진작 좀 만져볼걸.”
다시 정상위의 자세가 이루어졌다. 그가 엉덩이를 양껏 휘돌려 아랫도리를 푹푹 쳐댈 때마다 속옷 하나 걸치지 못한 젖가슴이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그 가운데, 정점이 말도 못 할 만큼 부어오르고 쓰라렸다. 젖무덤 주변으로 벌건 잇자국도 덕지덕지 찍혀 있었다.
다 깨어난 줄만 알았던 감각은 단지 나의 착각이었다. 감각은 지금도 느린 속도로 하나둘씩 깨어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타액으로 젖어 퉁퉁 부은 유두를 이제야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
“여자들은 젖꼭지가 원래 이렇게 예뻐?”
차무겸이 기꺼이 상체를 숙여 오돌토돌 돋은 젖꽃판을 혀로 느릿하게 궁굴렸다. 침칠을 하듯이 찬찬히 펴지는 점성의 체액이 유륜 끝을 뾰족하게 달아오르게 만든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이불에 상기된 뺨을 비비적거렸다.
“내가 보기엔 네 거라 예쁜 거 같아….”
“흣, 아응, 아…!”
“젖통 까자마자 눈 돌아가는 줄 알았잖아.”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물컹한 혀끝이 마침내 유두에 닿았을 때 고개를 뒤로 홱 젖혔다. 언제나 보들보들하게 풀어진 그것에 피가 몰려 발갛게 까진 상태는 그야말로 민감 그 자체였다. 차무겸은 어깨를 밀어내는 나를 손쉽게 깔아뭉개며 젖꼭지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젖 빠는 애처럼 세차게 흡입하는 힘에 숨이 덜컥덜컥 넘어갔다. 와중에도 아래를 왕복하는 속도는 여전했다. 녀석이 허리를 움직거릴 때마다 가랑이 사이에서 찔뻑찔뻑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래를 엿보기 두려울 만큼 난잡하고도 음탕한 소리였다.
제대로 자세를 잡자 그의 성기는 거칠 것이 없다는 양 안으로 쑥 박혀 들어왔다.
“아! 거기, 싫어, 응, 하, 하지 마…!”
삿갓 모양의 귀두관이 깊직이 들어올 때마다 스치는 어느 부분이 뇌를 바짝 조여들게 만들었다. 허리를 타고 전류가 타닥타닥 번지는 이상야릇한 느낌이 본능적인 거부감을 자아냈다. 목구멍이 꽉 틀어막힌 감각과 유사했다. 울음기 젖은 눈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차무겸은 웃으며 제 좆을 착 물어 삼키는 구멍에 대고 계속해서 추삽질했다.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험하게 헤집는 소리가 났다.
“여기?”
“흣…! 싫…!”
“좋아하는 거 같은데….”
얄궂게 지껄인 그가 볼썽사납게 흔들리는 젖무덤을 꽉 움켜쥐고 번갈아 가며 게걸스레 핥아댔다. 나는 천장을 향해 가랑이를 활짝 벌린 채로 그를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감각이 완전히 깨어난 것은, 요철이 또렷한 페니스가 내 안을 장악하려 파헤치고 들어올 때였다. 이미 난 길을, 굴에 머리를 디미는 뱀처럼 부드럽게 가르며 더 들어오는 능폭함에 턱이 다 덜덜 떨렸다.
“사은아. 네 보지에서… 물 엄청 나와. 조이기도 엄청 조이고….”
천박하게 뇌까린 차무겸이 나의 턱선을 타고 쪽쪽거리며 흔적을 남겼다. 입술을 틈 없이 감쳐 문 그가 조붓하고 미끈미끈한 내부로 성기를 가열차게 들이박아댔다.
퍽, 퍽, 퍽!
나의 앙칼진 신음은 죄다 그의 혀에 잡아먹혔다. 내리꽂히는 힘에 침대가 사정없이 삐걱거렸다. 정사의 비린내가 속을 뒤집었다. 심신이 조각조각으로 갈라져 차무겸이라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마는 듯했다. 정신은 다 갈리고 남은 부스러기처럼 바스락바스락 짓이겨져 갔다.
그는 제 걸 쫀득하게 씹어대는 결합부를 벌게진 눈으로 훔쳐보았다. 야차 같은 낯짝이었다. 오래지 않아 차무겸은 내 양손을 끌고 가 제 목에 두르게끔 했다. 그에게 매달리는 그림을 보이고 싶지 않아 부러 손을 물리다가 머리채가 꽉 붙잡혔다. 아프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눈물이 왈칵 샜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목을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차무겸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출렁대는 시야 속, 빌어먹을 만큼 청청한 하늘이 끝없이 이어졌다. 땅을 덮은 바다인 척하는 하늘 아래에서 나는 완전히 으깨지고 있었다.
* * *
주말이 통으로 날아갔다.
차무겸의 강요 아래에 그의 친구 집에 갔던 게 금요일, 그 이후의 주말은 완전히 페이드 아웃이었다. 자다가 깨다가, 자다가 깨기만을 반복했다. 잔재하는 모든 기억 속에 차무겸이 있었다. 옷을 죄다 벗은 채로, 내 위에 올라타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아래를, 그러니까….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음을 삼켰다.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다행히 깨어난 지금, 차무겸은 집에 없었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 부러 고개를 떨구었다.
“아, 으….”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얼얼하고 쓰라렸다. 특히나 갈라진 허벅지 사이로 온수가 파고들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찢어진 건지 퉁퉁 부은 건지, 살짝 벌리기만 해도 저미는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그러나 나는 엉덩이를 잡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래가 견딜 수 없이 미끌미끌한 탓에.
“미친….”
차무겸은 주말 동안 뒹구는 내내 콘돔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녀석이 고삐 풀린 것처럼 날뛰며 싸지른 모든 파정액이 나의 아래를 끈적하게 채우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샤워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에 뭉텅이의 정액이 섞여서 희끄무레해졌다. 그것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고장 난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주말 동안의 기억이 누군가의 끔찍한 포르노그래피를 엿본 것처럼 흑백으로 지지직 끓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나의 눈으로 담은, 나 자신의 시각이었다.
“학교….”
가야 하는데….
물살을 탄 것처럼 이리저리 휘돌던 생각의 목적지는 그것이었다.
나는 간신히 다리를 바로 세워 몸에 온수를 끼얹었다. 이런 와중에도 학교에 가려는 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태로는 가만히 있는 게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내가 아직 일상을 잃지 않았다는, 차무겸의 질 낮은 변덕이 나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그건 확신이 아니라 하나의 주문 같았다. 텅 빈 욕실에 나의 음침한 음성이 괴괴히 울렸다.
하루는 고통 속에 저물어 갔다.
평소에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던 강의실 의자가 오늘은 잠시도 착석해 있기 힘든 불량품이 따로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근본적인 문제는 나의 몸 상태에 있었다. 진종일 허리가 저리고 허벅지 안쪽이 쑤셔서 수업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낸 오늘, 남은 수업은 겨우 하나였다. 그 수업 시간 전 공강을 이용하여 정신을 차릴 겸 동기들과 교내 카페에 들른 참이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커피를 받아 드는 나의 손이 움찔했다.
“응?”
가연이가 손가락으로 자기 눈 밑을 쓱 쓸었다.
“다크서클 여기까지 내려왔다.”
“아….”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쓱 웃어 보였다. 실제로 입 밖에 꺼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 집을 나설 때, 한순간 수렁처럼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짙은 자괴감에 빠졌었다. 차무겸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한들, 녀석이 마련해준 집에서 녀석이 내준 물세로 씻고 나와 녀석의 돈으로 구매한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오는 그 몰골이….
일상의 한 겹 한 겹에 차무겸의 돈이 처발리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썩였다.
“어? 뭐야. 오늘 휴강이래.”
테이크아웃잔에 꽂은 빨대를 물며 핸드폰을 보던 가연이가 말했다. 잇따라 꺼내 든 핸드폰 속에 나 역시 같은 내용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몸 상태도 이런 마당인지라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다음 순간 움찔했다.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주말 일의 잔상이 눈앞에 일렁인 까닭이었다. 그 기억을 애써 털어내려고 고개를 저었다.
별안간 손안에 들린 핸드폰이 징 울렸다. 내리깐 시선에 차무겸의 이름이 둥둥 떠다녔다. 찰나간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아득함이 일었다.
“…래? 솔직히 이런 날 아니면 언제 술 마셔!”
“맞아.”
“그럼 거기로?”
주변은 때아닌 휴강 소식에 복작복작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커다란 얼음 속에 갇힌 사람처럼 쩍 굳어 있기만 했다.
“사은아, 너도 갈 거지?”
차무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하는 내게 별안간 질문이 와닿았다. 고개를 드니 공강이라 모여 있던 동기들의 시선이 죄다 내게 꽂혀 있었다.
“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해? 휴강했으니까 술 마시러 가자고!”
“오늘 거기 술집 무슨 이벤트 한다더라.”
동기들은 이미 마음이 술집으로 달려간 양 부산스럽게 짐을 싸고 있었다. 가연이가 내 의향을 묻듯 가만 바라보았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전화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고 있었다.
만나고… 싶지가 않다.
차무겸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싫어하고, 내가 제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건 더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엄습했다. 피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방식인들 이용하고 싶을 만큼.
내가 그간 차무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노력한 건 우리의 관계에 주말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우리의 선은 지워져 버렸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형태로. 그러고 나니 치미는 건 역겨움과 회피심뿐이었다.
현실은 냉혹했고, 나는 차무겸의 금전적 지원 없이 살아 숨 쉴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은….
“그래.”
나는 핸드폰을 가방 속으로 미끄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뒤따르는 통증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 *
차라리 시끄러워서 다행이었다.
만약 동기들의 제안을 쳐내고 혼자 집으로 향했다면 그 적막에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소리가 존재함으로써 나는 악몽 같았던 주말이 끝났음을 시시각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여의치 않은 몸 상태를 인지할 때마다 누가 내 머리채를 잡고 다시 그 주말의 기억 속에 퐁당 담가버리는 것만 같았으니까. 차무겸을 기어이 피했다는 안도감,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여 마음을 얼룩덜룩한 곰팡이처럼 좀먹었다.
“얘들아, 내 남친 여기 오고 싶다는데 불러도 돼?”
술자리가 이어지던 중 가연이가 의견을 구했다.
다들 그러라며 흔쾌히 반응했다. 그게 삼십 분 전의 일이었다. 가연이가 전화 한 통을 받고 부리나케 입구로 달려나갔다. 그러고서 웬 남자와 함께 등장했다.
“안녕.”
가연이의 남자친구는 가연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가연이가 없는 자리에서 전해 듣기로, 전 여당 국회의원의 손자라고 했던 것도 같다. 부친 역시 국내 금융권을 꽉 쥐고 있는 대표 은행의 은행장이라며, 꽤 만만찮은 집안이라고….
안진권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가연이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정면에서 마주한 남자는 좋게 말하자면 트렌디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날티가 났다. 김형준과 동류인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풍겼다. 단아한 편인 가연이와는 딴판인 인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진권을 향해 웃음꽃을 피우는 가연이를 보며 그 생각을 고이 접었다.
“진권아. 이쪽이 사은이. 내가 전에 말했던 나랑 제일 친한 동기!”
동기 이름을 하나씩 알려주던 가연이가 이윽고 나를 소개했다. 안진권이 나를 쓱 훑어보았다. ‘사은이?’ 하며 피어싱을 한 눈썹을 삐죽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그래.” 하고 간단한 대답으로 반응을 마쳤다.
안진권이 등장하자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이런 술자리가 익숙한지 그는 주도권을 잡고서 판을 잘도 이리저리 흔들었다. 나는 피로한 심경에 대화에 낄 때도 있었고 끼지 않을 때도 있었다. 끼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 푹 꺼지기 직전인 사람처럼 아래만 내려다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등 뒤에 놓인 가방,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안에 든 핸드폰이 미칠 듯 신경이 쓰였지만 부러 무시했다. 그로부터 깃드는 농축된 긴장감을 나름대로 숨겨보려 물을 자꾸 마셨더니 얼마 안 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동기들이 피해준 자리를 넘어서서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왔다. 물기가 남은 손을 옷자락에 닦던 나는 화장실 입구 쪽에 선 안진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녀석은 아까처럼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려세운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기억났어.”
“뭐?”
“그 이름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너 차무겸이 끼고 다닌다는 걔지?”
후미진 구석에 달린 조명 불은 희붐했다. 그리하여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럼에도 안진권의 동공에 깃든 흥미는 똑똑히 읽혔다. 나는 저런 개 같은 눈깔을 하고 있던 자들을 지금껏 너무나 많이 만나봤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인내를 다지며 참는 게 상책이라는 것 역시도.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차무겸의 연락을 무시하고, 집에도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내게 안진권의 질문은 두 발로 디딘 지반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다.
“…차무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김형준 너 때문에 차무겸한테 씹창났다며?”
첫인상부터가 김형준과 동류의 느낌이 진하게 난다 싶더라니,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미 차무겸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안진권의 말은 그렇지 않아도 두통이 끊이지 않는 머릿속을 헤집기에 충분했다. 지난 금요일의 기억이 불시에 파도처럼 괴어올랐다. 미지근하게 식은 속이 기묘한 박자로 울렁댔다.
“벌써 애들 사이에 소문 자자하더라고.”
나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멈칫했다. 아까 전 핸드폰을 매만지던 안진권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에서였다. 순간 알싸한 불안감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무겸한테 나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마.”
“응?”
안진권은 뜬금없는 지시에 눈을 과장되게 치켜떴다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미안. 이미 연락했는데.”
녀석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마음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아니, 내가 기억력이 좀 안 좋거든. 긴가민가해서 차무겸한테 먼저 물어봤지.”
순식간에 시궁창에 처박힌 듯 눈앞이 캄캄해진 나를 앞에 두고 능글맞게 휘어지는 입꼬리를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은 아찔한 충동에 휩싸였다.
“듣던 것보다 예쁘장한 거 보니까… 너 진짜 위장용인가 봐?”
“뭐?”
“차무겸이 너 끼고 다니는 이유 말이야. 걔 게이라서 그러는 거라며.”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위급하게 돌아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나는 다소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게이? 위장? 누가? 차무겸이? 나는 내가 곁을 지키는 동안 스쳐 지나간 차무겸의 여자친구들을 떠올렸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었다.
지난밤 차무겸이 나를 보며 성기를 세운 것만 떠올려도….
아, 이 회상만큼은 괜한 짓이었다. 나는 입술을 아플 정도로 짓씹으며 그 기억의 파편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김형준이 그러던데? 뭐,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는 없을 테니….”
안진권의 어조는 묘했다. 안개 같은 의혹을 짙게 까는 목소리. 김형준이라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김형준이 지난 금요일, 내가 있던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건넸던 의아한 말이 있었다.
‘그런 정신병자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너 차무겸 어릴 때 무슨 일 있었는지 모르지?’
‘딱 보니까 모르네. 그거 들으면 너도 걔 옆에 못 있을걸. 그래서 난 차무겸한테 달라붙는 년들 다 골 빈 년들 같아.’
김형준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잘도 혀를 놀렸다. 내가 보기에 차무겸 앞에서는 조금도 꺼내지 못할 얘기 같은데…. 적어도 지금 안진권이 입 밖으로 내미는 저 ‘게이’가 김형준이 내게 지껄인 망발과 연관이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애초에 제 입으로 김형준에게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너도 차무겸 과거 얘기하는 거야?”
“과거?”
나는 모르는 시절 속의 차무겸.
김형준처럼 그도 그때를 일컫나 싶어 물었으나 외려 안진권은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을 하느냐는 듯 눈가를 찡긋거렸다.
대화가 연신 삐걱삐걱거렸다. 아무리 봐도 저건 장난스레 모르는 척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김형준과 안진권은 차무겸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건 단편적인 부분에 국한되었다. 겹치는 부분조차 사소하다. 나는 혹시 그 이유에 해운그룹의 권력이 개입된 건 아닐지 의심했다.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건 확실한 듯한데, 그게 사실이라면 재벌가 사회에서 그게 새어 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해운그룹의 힘으로라도 사람들의 입을 모두 막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테니 적어도 그 얘기를 통째로 알지 못하도록 조각조각 내놓는 정도만….
나의 상념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딸랑,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학가에 위치한 술집은 밤이 되어 더더욱 붐비며 손님들이 끝없이 들락날락했다. 그러나 지금 막 다가온 기척은 유독 의식 속에 강하게 쑤셔 박혀서….
“오, 진짜 왔네.”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안진권이 휘파람 불듯 경쾌하게 속삭였다. 하필이면 화장실이 입구 쪽과 가까워서 내가 차무겸의 눈에 띄는 건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뭇하게 번지는 불길함으로 말미암아 손끝이 저릿거렸다.
우리 중 먼저 행동을 보인 건 안진권이었다. 차무겸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깨뜨릴 만큼 태연자약했다. 이 순간,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럼 억지로 발을 옮기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내게로 쏟아지는 차무겸의 눈길이 내 몸에 실을 엮어 확 끌어당기는 듯했다. 마지못해 발을 그쪽으로 내디뎠다.
“안녕, 차무겸. 우리 직접 인사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나는 안진권의 말에 모순을 느꼈다.
오늘 처음 인사한다면서 차무겸의 번호는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지. 그제야 다른 이들처럼, 안진권 역시 차무겸과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부류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분 관계를 쌓기 위해 던져진 나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을 테고.
차무겸은 제 앞으로 다가온 안진권에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운운할 정도가 아니라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안진권이 쓱 내비친 관심을 깡그리 무시하고 내게로 다가왔으니까. 등 쪽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조금 더 분명한 형태가 되었다.
“전화 왜 안 받아?”
차무겸은 헝클어진 내 앞머리를 넘기고 이마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걱정했잖아.”
당연히 오늘 안에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최악 중 최악의 형태일 줄은 몰랐다.
연락을 받지 않는 나, 행방이 불분명한 나, 그런 나에 관한 소식을 다른 이로부터, 심지어 남자로부터 전해 듣는 것. 번잡한 테이블, 조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소주와 맥주병들, 요란한 소음, 싸구려 식용유가 잔뜩 밴 질 낮은 음식.
여긴 차무겸이 싫어하는 잡다한 것들 천지였다.
그렇기에 솔직히 내 팔목을 붙잡고 당장 술집 바깥으로 끌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차무겸은 그러는 대신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테이블 어디야?’ 하고 살갑게 물었다. 굳은 내가 반응이 없으니 뒤편에 병풍처럼 선 안진권에게 대신 물었다.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인 무시를 당했으나 안진권은 싹싹하게 굴며 차무겸을 테이블로 이끌었다. 차무겸에게 어깨가 붙잡힌 상태이기에 나는 반강제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
“누구…?”
동기들이 모인 테이블은 차무겸의 등장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 어깨를 쥔 차무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등 뒤에 꽂힌 태엽을 억지로 감아 돌린 인형처럼 입꼬리를 과도하게 올렸다.
“내 친구야.”
“안녕, 사은이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데, 나도 앉아도 돼?”
차무겸은 내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동기 몇 명이 그 기품 있는 낯에 꼼짝없이 함락된 것처럼 볼가를 발그레 붉혔다. 자리는 금세 마련되었다. 정식으로 의견을 구하고 이 자리를 찾아온 안진권의 경우보다도 빠르게.
안진권이 가연이의 옆자리에 앉은 것처럼, 차무겸은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과도하게 달라붙는 듯해 몸을 뒤로 빼는 순간 어깨를 감싸 쥐고 있던 차무겸의 손이 팔뚝을 타고 내려와 허리를 매만졌다. 피아노를 치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행방에 반사적으로 주춤했다.
일행이 꽤 많은 우리는 술집 내부의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 중이었다. 개중에서도 내가 앉은 자리가 가장 외졌다. 나의 옆으로는 낙서가 한가득인 기둥이 있었고, 불빛도 가장 약한 조도를 유지하여 어두침침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이 가시지가 않았다. 금요일부터 시작되어 자그마치 이틀 넘게 이어졌던 차무겸과의 노골적인 행위를 떠올리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렇지 않아도 번잡한 속이 안진권의 말, 그에 이어 차무겸의 등장으로 완전히 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무겸은 동기들과의 대화에 어색하지 않게 끼어들었다.
“어디 학교예요?”
“한국대.”
“와, 공부 잘했나 보다.”
“별로. 돈 주고 입학한 거라서.”
동기들은 차무겸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는지 까르르 웃었다. 저게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건 적어도 이 자리에 나와 안진권뿐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혹시 저번에 사은 언니 데리러 우리 학교 오지 않았어요?”
“맞아. 나도 본 거 같은데.”
차무겸은 동기들이 신이 나 말아준 소맥을 한 입 마시며 웃었다. 긍정이나 다를 바가 없는 태도였다. 누군가 양옆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금 전과 달리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혹시… 사귀어?”
동기들이 보기에도 지금 나와 딱 달라붙어 앉은 차무겸의 태도가 수상쩍은 모양이었다. 내가 멀어지고 싶어도 차무겸이 아닌 반대편은 벽이라 이 이상 거리를 벌리기는 무리였다. 나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이 말이었다.
“응.”
차무겸이 등장한 이후부터 맥없이 굴던 나는 순간 혀를 깨물 뻔했다. 나의 시선이 휘둥그레진 채 돌아갔다. 때마침 잔을 입술에 갖다 붙인 차무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동기들의 틈에 물처럼 섞여들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냉각의 느낌이 설설 피어오르는 눈동자였다. 고작 저 눈길 하나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꽉 내리누른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꾹 말아쥐었다.
“사은이가 부끄러워서 아직 말을 못 했나 보네.”
차무겸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고백을 받은 적도 없고 그런 과정도 없었던 우리 사이는 어느새 그러한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것이 차무겸의 변덕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차무겸의 변덕이야 한두 번이 아니지만 문제는 도처에 깔린 이목이었다. 동기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역시나 동기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왜 이제야 알려준 거냐는 둥, 언제부터 사귄 거냐는 둥 테이블이 대번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고만 있다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냉수라도 마시지 않으면 잔뜩 비틀리고 짓이겨진 이 속을 달랠 방도가 없었다. 문득 맞은편의 가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가연이 역시 동기들 사이에서 나름의 서운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니야, 사귀지 않아. 사귀기는커녕….
그러나 차무겸이 내 곁을 딱 달라붙어 지키는 이상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가연이의 옆자리, 안진권이 실실 웃으면서 핸드폰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에게 급하게 메시지라도 보내는 것처럼. 바삭거리는 미약한 이명이 귓전을 때렸다. 내가 지키려고 아등바등하는 나의 일상에 미세한 금이 가는 소리와 유사했다.
나도, 차무겸도 교제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자 -애초에 거짓 교제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주제는 금세 돌아갔다.
“……!”
의미 없이 물잔만 기울이던 나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린 건 그때였다. 아까부터 은근하게 허리춤을 지분대던 차무겸의 손가락이 빙 돌아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어졌다. 발끝에서부터 뱀이 똬리를 틀며 기어 올라오듯 전신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눈알을 굴렸다.
아직까지 테이블에 있는 이 중 이쪽의 의미심장한 기류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용한 행동으로 차무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눈에 띌까 싶어 단번에 뿌리치지 못했다. 그 머뭇거림이 그에겐 여유이자 기회였다. 차무겸은 검지와 중지로 사타구니 부근을 부드럽게 짓눌렀다. 아래로 빠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손길이었다. 술과 안주가 지저분하게 늘어진 테이블의 높이가 상당한 탓에 어느 정도 가려지겠지만 누군가 의심을 품는다면 당장 들키고도 남을 일이었다.
“왜 오늘은 화났냐고 안 물어봐?”
차무겸이 내 귓가에 대고 아주 미약하게 소곤댔다. 그 순간 손을 오므려 허벅지 안쪽을 꽉 쥐어짠다.
“나 화났으니까 빨리 물어보지 그래.”
무언의 압박이 실린 손길이 숨통을 틀어막는다. 그가 이 구저분한 자리에 몸소 행차한 건 나를 이렇게 곤궁에 처넣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둥둥, 가슴 안짝을 두드리는 심박수가 빨라졌다. 나는 차무겸의 손을 신경 쓰랴, 테이블에 모여 앉은 일행을 신경 쓰랴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차 맞은편의 안진권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게 왠지 모르게 형용할 수 없는 께름칙함을 떠안겨서, 나는 곧장 기둥 옆에 세워둔 내 가방을 붙잡았다.
“우린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산송장처럼 내내 기운 없이 굴며 자리만 지키던 내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다들 하나같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이건 바라던 바였는지 차무겸은 허벅지를 매만지던 손을 치워주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내가 손에 쥔 가방을 대신 가져가면서 길을 비켜주기를 종용했다.
“가볼게.”
“잘 가, 사은아!”
“연락해!”
활달하고 왁자지껄한 배웅을 뒤로하고 차무겸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섰다. 차무겸이 내 손목을 붙잡고서 제법 너른 보폭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나는 지은 죄를 아는 사람처럼, 혹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고개를 푹 떨구고만 있었다.
도망갈까 하는 생각은 그 사이로 안개처럼 자우룩하게 깔렸다. 그러나 금세 꼬리를 말 포부였다. 도망가 봤자 잡히는 건 결국 시간문제다. 차무겸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는 고분고분하게 구는 게 최선이었다.
차무겸의 차는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주차되어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갓길에 댄 차는 약간 비뚜름한 각도를 유지했다. 나를 조수석에 쑤셔 넣은 차무겸은 당장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핸드폰 꺼내 봐.”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 몇 통 왔는지 봐.”
무거운 손짓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화한 빛과 함께 알림이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다. 부재중 26통. 어지간하면 미련을 보이지 않는 차무겸에게서 보기 드문 조급함이었다. 차무겸은 신호가 걸린 틈을 타 내 손에 들린 핸드폰과 가방을 뒷좌석으로 집어 던졌다. 나에게 손찌검을 할 수 없으니 대신 화풀이하듯 난폭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나한테 강간당했다고 시위라도 해, 지금?”
그게 강간인 걸 인지는 하고 있었구나.
나는 대답하게 싫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차창 쪽으로 돌렸다. 얼마 안 가 원피스의 하의를 들추는 무례한 손길에 움찔했다. 한 손은 핸들 위에 둔 차무겸이 다른 손으로 내 아랫도리를 헤집고 있었다.
“읏.”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이기 무섭게 모여든 가랑이 사이로 기름한 손가락이 쑥 미끄러졌다. 차무겸은 속옷 위로 가려진 질구를 집요하게 문질렀다. 길을 내듯 위아래로 쑤석거리다가 손바닥 전체로 덮어 끈덕지게 문질렀다. 나중에 가서는 아예 손가락에 침을 발라 집중적으로 둥글게 비볐다. 간밤의 고통이 남았는지 그의 손길이 스치는 부분이 쓰라리고 따끔거렸다. 그 탓에 시종일관 움찔거리며 그의 팔뚝을 가랑이 사이에서 빼내려고 낑낑댔다. 말 한마디 없이, 차 속에서 벌이는 사투가 따로 없었다.
“팬티 벗어.”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차무겸이 팬티의 고무줄을 손가락에 걸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서 서릿발 같은 명령에 불복종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을 움켜쥐고 탈탈 흔드는 두려움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언제 목덜미를 덥석 물지 모를 포악한 짐승과 한 공간에 놓여진 것만 같았다. 곧 운전석 쪽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차게 식히는 소리였다.
“여기서 쑤셔 박히고 싶다는 거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몇십 년간 가뭄이 온 땅처럼 쩌걱쩌걱 갈라졌다. 비단 입술뿐일까. 마음이 그렇게 잘게 조각나고 있는 듯도 했다.
나와 차무겸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뜻을 고수했을 것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회유를 했든지. 그러나 지난 주말간 겪은 시간이 나에게 너무나 또렷한 악몽으로 잔재해 있었다. 차무겸은 선 따위 그려놓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이었다. 아니, 그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선이 그려지고는 했다. 그러니만큼 여차하면 정말로 여기서 나를 깔아뭉갤지 모른다.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문 채로 더듬더듬 다리를 들어 올렸다. 팬티를 벗으라는 건 속바지도 함께 탈의하라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엉덩이를 살짝 들어 속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걸어 아래로 벗어냈다.
여유롭게 핸들을 돌리던 차무겸이 그것을 앗아갔다. 속바지는 뒷좌석으로 던져버린 그가 조금 전만 해도 내 아래를 감싸던 팬티에 코를 박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는 변태 같은 행위였다. 곧 속옷마저도 가분한 손길로 내던진 차무겸은 다시 나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었다.
“안 내려오게 잡고 있어.”
“흣….”
아직도 아플 정도로 땡땡 부은 음순을 가르고서 도톰하게 드러난 돌기를 살살 긁는다. 고통보다도 빠르게 퍼지는 홧홧한 감각에 배 속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차무겸은 잘 젖지 않는 구멍을 인지하고 혀로 검지를 핥고서 다시 가져다 댔다.
“여기가 여자들 성감대라던데.”
마치 예습이라도 해온 부분을 읊조리듯 통상적인 목소리다. 그러나 나는 그에 신경을 기울일 새가 없었다. 차무겸이 반복적으로 짓뭉개고 손톱 끝으로 뭉근하게 비비는 부위로부터 야릇한 열감이 번졌다.
“아, 하지, 마….”
“보지 좀 젖는 거 같아?”
상스러운 말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다. 목구멍이 바짝 졸아붙었다. 나는 차무겸의 팔뚝을 밀어내야 할지 아님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미약하게 헐떡거렸다. 차무겸은 발갛게 충혈된 음핵을 슬슬 쓸어올리다가 아래로 빠져 구멍 속에 검지를 질금질금 밀어 넣었다.
“아흣…!”
또렷한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샜다. 고개를 휘젓다가 문득 차무겸 쪽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바지춤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솟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다리 더 벌려.”
“차무겸, 여기서는….”
“네 의견 안 궁금해.”
몸 곳곳에 흥분감이 어린 와중에도 그의 음성은 냉기를 뚝뚝 흘려보냈다.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을 삼키며 다리 사이를 조금 더 벌려보았다. 날렵한 침입자처럼 파고드는 차무겸의 손이 이전보다 더 원활하게 활개 치기 시작했다.
“흣… 아….”
검지의 첫 마디를 간신히 삼키던 구멍이 살그미 벌어져 두 번째 마디까지 우물거리며 빨았다. 조금 전만 해도 뻑뻑한 감이 있던 추삽질에 물먹은 스펀지를 쑤시는 것처럼 질척거리는 물기가 뱄다.
“윗입으로는 싫다더니, 아랫입으로는 질질. 이렇게 따로 놀 수가 있어? 둘이 합을 좀 맞춰 봐.”
“흐, 응, 여기선, 하…!”
안쪽에서 새는 물을 구멍 주름에 묻히며 아래를 이완시키던 손가락이 마침내 끝까지 파고들었다. 예민한 구석이 곧장 긁히는 바람에 헉, 하고 숨을 삼켜야만 했다. 밭은 호흡을 내쉬면서도 이러다가 차무겸이 사고를 내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벌게진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면서도 내 아래를 음탕하게 쑤석대던 차무겸이 불시에 손을 빼냈다. 나는 벌어진 다리를 얼른 오므리고 납작한 배를 내보일 만큼 말려 올라간 원피스 자락을 내렸다.
차가 급격히 코너를 돌았다.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마찰음이 요란하게 귀를 찔렀다. 몽롱한 정신에 나는 우리가 어디쯤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곧 지붕의 존재로 말미암아 차 속에 지독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피스텔 주차장은 야외에 있기 때문에 거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무겸은 어딘지도 모르겠는 건물 주차장의 구석진 자리에 차를 세우고서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밀었다. 신경에 불똥을 튀기는 불길함을 감지한 나는 서둘러 조수석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잠금장치가 걸려 덜컥거리기만 했다. 그걸 수동으로 해제하고 내리기도 전에 허리가 붙잡혀 끌려갔다.
“차무겸…!”
완력에 의해 무릎을 세운 채 그의 위로 엎어졌다. 차무겸은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로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이미 진즉 고개를 쳐든 성기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지난날 정신이 없기도 하고 또 애써 외면해오던 흉기 같은 페니스를 처음으로 눈에 담았다. 이미 어느 정도 짐작했으나 제대로 살펴본 그것은 가히 생수통의 크기와 비슷해 보였다. 핏줄이 팽팽하게 부풀어 배꼽까지 올라붙은 채 꺼떡이는 모양새가 실로 무작스러웠다.
그 포악한 흉기를 눈으로 마주한 순간, 흐릿하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아, 안 돼. 무겸아. 집, 집에 가서….”
“거기까지 못 가.”
차무겸은 한 손으로 제 성기를 감싸 쥐어 자위를 하듯 위아래로 자극했고, 다른 손은 내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어 갈라진 살점을 비벼 벌렸다. 누가 보아도 쇠몽둥이를 방불케 하는 저 살덩이를 내 안에 집어넣으려는 밑작업이었다.
“그러게, 전화 받고 진작 집에서 떡치고 있었으면 여기서 이럴 일도 없잖아.”
“잠시만, 잠…!”
“가만 보면 너는 늘 매를 벌더라.”
“흐으읏…!”
투명한 물기로 번들거리며 그의 큰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리던 귀두가 질구에 닿았다. 쓱쓱, 전혀 섬세하지 못한 움직임으로 살점을 문지른 성기가 포악하게 안을 벌리며 진입했다. 귀두부터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다 보니 구멍 주름이 판판히 벌어지며, 간밤의 정사로 생겨 아물지 못한 살점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지랄.”
넌 좋으면 아프다고 하잖아.
차무겸이 내 투정을 악스럽게 쳐내며 키득거렸다. 지금만큼은 그 반응을 예민하게 인지할 새도 없었다. 수직으로 솟구쳐 들어오는 기둥의 기세가 견딜 수 없이 버거웠다. 고통과 함께 장기가 죄다 밀어올려지는 듯한 압박감에 헉, 하고 몸을 굳히며 차무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차무겸은 제 허벅지 위에서 흔들리는 나의 엉덩이를 좌우로 잡아 벌리며 계속해서 성기를 꾸역꾸역 디밀었다. 불구덩이에 떨어진 것만 같은 홧홧함이 또다시 다리 사이를 포악하게 장악했다. 이미 한 번 겪어봤기에, 그 고통을 알기에 두려움이 덜컥 들어 반사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으, 흐윽…!”
“다 네 잘못이야.”
“읍, 흑, 아앗….”
“그니까, 하, 전화는 왜 안 받아… 응? 내가 연락 안 되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면서.”
차무겸이 내 골반을 틀어쥔 채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며 차게 지껄였다. 나는 옅게 심호흡을 하며 어느새 탁 터진 눈물을 서투르게 닦았다. 차무겸은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쏟는 나를 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내 뺨을 쫙 빨아 먹으며 뇌까렸다.
“난 하루 종일 네 생각밖에 안 했는데.”
“으흥, 응… 아, 깊… 흣…!”
“내가 다른 새끼들한테 어떻게 해야 여자가 잘 느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씨발, 꼴사나운 짓이라는 짓은 다 하고 다녔는데 정작 너는 연락도 안 받고.”
차무겸이 손바닥을 펴서 나의 엉덩이를 짝! 후려갈겼다. 손속에 어찌나 자비가 없던지, 전방 쪽을 향한 엉덩이가 출렁대는 게 느껴졌다. 아이를 혼내는 듯한 매서운 손길에 무심코 뜨겁게 고여 오른 숨을 흠뻑 터뜨렸다. 아프기도 아팠고 수치심도 적잖았다. 그런 이유로 훌쩍이는 나를 껴안은 채로 차무겸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왜 구멍 쪼여… 이런 게 취향이야?”
“아냐…! 아니니까 그만….”
“좀만 더하면 싸겠는데?”
“아윽, 아, 깊, 어, 흑…!”
“가만히 있어 봐….”
“무겸아… 나 힘, 힘들어. 집 가서, 응… 흣….”
“집 가서도 해줄 거니까 보채지 마.”
차무겸이 나의 엉덩이를 틈 없이 움킨 채로 허리를 녹신하게 흔들어댔다. 좁은 차 내부에서 욕심껏 잘도 움직거렸다. 질 속으로 쭈르륵 미끄러져 들어온 흉기가 민감하게 달아오른 내벽을 제멋대로 할퀴고 쓸었다.
차무겸의 성기는 곧게 이어지다가 선단 부근에서 살짝 휘어진 형태였는데, 그리하여 콱콱 때려 박을 때마다 깊게 맞물리는 부근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주말 내내 마구 두드리던 그곳을 오늘은 여의치 않은 자세로 말미암아 농밀하게 문질러댔다. 전자가 강렬했다면 오늘은 여운이 짙었다.
그를 사이에 두고 활짝 벌린 다리로, 발가락을 접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차무겸과 달라붙은 살갗이 절절 끓었다. 방향제의 은은한 내음만 감돌던 차 내부에 정사 특유의 비린내가 스멀스멀 얽혀들었다.
차무겸은 피스톤질에 맞춰 움찔움찔 떠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흘러내린 원피스를 쥐어 올린 그가 타액이 묻은 그것을 결합부 쪽으로 내렸다. 까슬까슬한 음모를 헤치고 들어서 바짝 도드라진 돌기를 긁는 움직임에 나의 무릎이 절로 모아져 그의 복부를 조였다.
“읏…!”
“여기 진짜 기분 좋은가 보다. 만지자마자 씹어 먹는 게 장난이 아닌데.”
“하, 거기, 하, 하지 마…! 이상해…!”
“좋으면서 내숭은.”
차무겸은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려 그 부위를 진득이 비비적거렸다. 마찰로 벌겋게 익은 살점을 벌려 음핵을 지긋하게 관망하기도 하고, 또 접합부 부근에 인 시뿌연 거품을 덜어서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융기한 음핵이 괴롭힘을 받을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꽉 조여들며 좆을 한껏 머금은 내부도 제멋대로 경련했다.
“잘 문지르면 여자도 사정 같은 거 한다던데…. 한번 해볼까?”
“아으, 싫, 싫어…!”
“여기선 잘 안 보여서 별로겠네. 집 가서 해보자.”
나의 저항에도 제멋대로 결정한 차무겸은 내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가 놓으며 피스톤질에 집중했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묻어둔 이마를 들며 벌써부터 몰아치는 탈력감에 눈을 내리깔았다.
“너, 흡, 내가 이런 건, 응… 윤다정이랑, 하, 라고… 아!”
그와 접붙고, 그 치근댐을 말리지 못할 때마다 나를 찾아왔던 윤다정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잔상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미안함인지 짜증인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
“아!”
이전 날 고통으로 점철되어 차마 꺼내지 못한 이름을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지금에야 꺼내는 순간, 차무겸이 내 머리채를 아프게 휘어 감았다. 그는 얼굴을 바짝 디밀어 버드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이 스치게 속살댔다.
“섹스 중에 다른 여자 이름 말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흐, 아파, 머리, 아아…!”
“아님 질투라도 해?”
두피가 당겨지는 무자비한 악력에 인상을 찡그렸던 나는 그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둘러 고개를 저으려 했으나 차무겸이 안을 부드럽게 찔러 올리는 타이밍이라 고개가 맥없이 젖혀졌다.
“하아, 안쪽 진짜 보들보들해….”
“으응, 흑…!”
“그리고 윤다정이랑 헤어졌으니까, 앞으로 걔 얘기 꺼내지 마.”
나는 다시금 토끼눈이 되었다. 차무겸은 흥분에 잔뜩 젖은 채 물기로 얼룩진 내 눈망울을 깊이 파헤쳐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차무겸은 혀를 내어 그것을 단물 삼키듯 할짝거렸다.
“뭐, 언, 언제…?”
얼굴이 그의 침으로 축축해지는 와중에도 머리가 멍해졌다.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알싸하고도 기묘한 불안감이 나의 뇌를 톡톡 두들겼다.
윤다정과의 연인 관계는 지속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차무겸의 이 짓이 변덕이라는 게 입증이 되니까. 며칠 하고 질리면 그만두고야 말 변덕. 변덕이어야만 했다. 잠시 잠깐 흥미를 가졌다가도 늘 그렇듯 언제 관심을 보였느냐는 것처럼 픽 하고 돌아서야 마땅했다. 그게 주말부터 이어져 온 불안한 나의 심리를 그나마 달랠 수 있는 위안이었는데.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주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저변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무엇이. 차무겸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몸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서 삼키기엔 다소 암울한 감이 있는 체감이었다.
차무겸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나 너한테 아다 떼인 날.”
눅진하게 답한 차무겸은 이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내 허리를 움켜쥐고서 제멋대로 위아래로 철퍽철퍽 흔들어댔다. 다리 사이로 번지는 홧홧한 따가움이 강렬해졌다. 안을 반복적으로 긁어대며 질 주름을 펴는 성기의 횡포 역시도.
“사은아, 그거 알아? 카섹하면 바깥에서, 큿, 다 알아챈대. 우리 차도 지금 존나, 흔들리고 있겠지?”
“흣, 응, 아아…!”
“지나가는 사람 있으면 우리 섹스 중인 거 다 알겠다.”
짓궂은 음성이 귓전을 아스라이 스쳐 지나갔다.
아까 전부터 슬금슬금 배 안쪽을 긁어대기 시작한 요사한 자극이 뇌를 비트는 듯했다. 아득함에 호흡마저 뚝뚝 끊어진다.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자지러지듯 떨며 차무겸에게 기대야만 했다. 좁아터진 차 속에서의 정사는 그로부터 한 시간이 족히 흐른 뒤에야 끝을 보았다.
* * *
“사-은아.”
눈꺼풀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그리고 몸 위로 내려앉은 차무겸의 팔다리는 그것보다 배는 묵직했다. 여러 가지 운동으로 다져진 밀도 높은 근육질의 몸은 때때로 내게 도무지 짊어질 수 없는 바윗덩이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건 옷을 다 빨가벗은 알몸이 되어 아랫도리를 격렬히 부딪치기 시작한 이후로 더 빈번히 느끼고는 하는 무게감이었다.
“학교 간다며. 안 가?”
학교라는 단어에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늘어진 몸을 일으키기 위해 팔다리를 휘적거렸으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무언가에 고정된 양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피로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표정으로 깨어났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은인같이 굴 때나, 악인같이 굴 때나 변함없이 준수한 얼굴이 꽉 채워졌다.
차무겸은 나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선 내 몸에 애벌레처럼 감긴 이불을 풀어주었다. 속옷 하나 걸치지 못한 상태라서인지 집 안의 훈훈한 공기에도 미약한 소름이 돋았다.
“밥 먹자.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차무겸은 침대 바깥 의자에 걸쳐져 있던 셔츠를 내 어깨 위로 둘렀다. 아빠 걸 뺏어 입은 것처럼 소매며 기장이 질질 끌리는 그것은 차무겸의 옷이었다. 체격 차이 때문인지 차무겸의 셔츠는 내 허벅지를 덮고도 남았다. 그 행색이 웃겼는지 그가 작게 키득거리며 앞 단추를 두어 개 정도 채웠다. 그러고는 훌쩍 일어나 침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방만큼이나 정갈하기 짝이 없는 이곳은 차무겸의 집이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겨우 평수를 줄인 단출한 오피스텔보다 훨씬 넓고 좋은 곳. 나는 학교라는 단어 하나만 곱씹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내린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래도 욕실로 끌려갔을 때 사정사정하여 정액을 빼낸 덕분인지 지난번처럼 가랑이 사이가 못 견디게 찝찝하지는 않았다.
갈지자의 형태를 그리는 걸음새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탁 트인 형식으로 조성된 2층 복도가 오늘따라 헤아릴 수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1층 주방으로부터 풍기는 고소한 내음이 2층까지 다다랐다. 나는 찌르르한 허리를 부여잡고서 조심조심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이런 나의 굼뜬 태도가 언짢았는지 얼마 안 가 차무겸이 다시 등장했다. 살결이 다 비치는 얇은 셔츠 하나 걸친 나와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히 준비를 마친 그는 주저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내려달라고 말할 힘도 없어서 얌전히 기댔다.
이윽고 나는 거대한 식탁 앞에 앉혀졌다. 처음 차무겸의 집에 왔을 때는 이리도 웅장한 식탁에 적응을 못 했다. 한쪽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덜컥거리는 낡은 앉은뱅이 상에서나 밥을 먹던 내게 그건 현실감을 심어주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적어도 5년 전에는 말이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조기와 계란말이, 된장국, 그 외의 반찬이 소담한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차무겸은 요리에 소질이 없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시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솜씨일 게 분명했다.
입맛이 없었지만 억지로 젓가락을 들었다. 물을 한 잔 떠 온 차무겸이 그런 내 곁에 앉았다.
“다음에 전화 안 받으면 일주일이야.”
물잔과 함께 들고 온 여분의 젓가락으로 조기의 가시를 발라주며 차무겸이 말했다. 미적미적 움직이던 손이 움찔 말려들었다.
오로지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무시하고 외면했던 연락의 후폭풍은 가히 엄청났다.
차무겸은 나의 인생의 뿌리를 움켜쥔 인물답게, 내가 무얼 가장 두려워하는지 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차에서 일을 치르고 곧장 차무겸의 집으로 온 뒤 사흘간 나는 이곳에 거의 갇혀 지냈다. 학교도 가지 못했고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간 영위해온 일상이 그의 심술 한 번에 삐걱거리며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졌다. 학교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인 것도 그래서였다. 3년 가까이 이어진 학교생활이 그나마 나의 일상을 정상적인 사이클 위에 올려놓았다. 남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인간다운 삶으로 말이다. 그건 나로 하여금 원동력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반면, 찌르면 무참히 쓰러지고 말 약점이 되기도 했다.
사흘간 차무겸 역시 모든 일정을 미뤄버리고 내 옆에만 붙어 있었다. 정확히는 ‘붙어만’ 있던 게 아니었다.
악몽 같던 주말의 연장선이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헐벗은 차무겸이 내 위에 올라타 있는 것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자지러지고, 신음하다가 다시 기절했다가….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된 것 같았다. 회상과 함께 애써 무시하던 허리의 통증이 다시 스며 올라왔다.
“…응.”
간신히 내뱉는 목소리가 성대 끝을 똑 꺾은 것처럼 까칠하게 쉬어 있었다. 차무겸이 발라낸 조기의 포실포실한 살을 내 숟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한입 가득 밀어 넣는데 입 안에서 느껴지는 건 음식의 맛이 아니라 떫은 모래 맛이었다. 그래도 그냥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네 오피스텔 그냥 정리할까 봐.”
정가로운 손길로 조기를 난도질하던 그가 말했다. 음식을 씹어 삼키는 나의 저작 행위가 느려졌다. 혀끝을 굴러다니는 밥알이 식욕을 뚝뚝 떨어뜨렸다. 나는 긴장이나 두려움의 기색이 보이지 않게끔 억누르며 차무겸을 돌아보았다.
“…왜?”
“같이 살 때 된 거 같아서.”
“…….”
“어차피 이제 침대도 같이 쓰는데.”
차무겸은 내가 흥분하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수록 더욱 고약한 성질머리를 발휘했다. 그러므로 지금,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치는 걸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굴어야 그에게 미치는 자극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나는 고작 숟가락질 한 번으로 목이 턱 막혀오는 듯해 물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차무겸이 그보다 한발 앞서 물잔을 치웠다. 항변의 눈길을 보내기도 전에 차무겸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비위가 상하지도 않는지 음식을 먹던 나의 입술을 잘도 물었다. 쭙, 하고 가벼이 빨아들였다가 놓은 그가 속삭였다.
“겁먹었어?”
나는 코앞에서 반질대는 녀석의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일자를 그리던 차무겸의 입꼬리가 유려한 호선으로 휘어졌다.
“아직 안 뺄 테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
“…….”
“물론 그것도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연락 잘 받을게.”
냉큼 답하자 차무겸이 흡족하게 웃었다.
정원을 바라보는 쪽의 벽면을 죄다 통유리창으로 설계해놓은 탓에 집 안으로 화한 아침 빛이 잔뜩 스며들었다. 찬연한 햇살에 반사된 차무겸의 얼굴은 좋은 혈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나른한 모습은 오래도록 굶주리고 있다가 간만에 포식한 짐승을 떠올리게 했다. 반면 차무겸이 그려내는 음영에 꿀꺽 삼켜진 듯 나의 위로 드리우는 건 짙은 어두움뿐이었다.
“귀여워.”
차무겸은 대체 내 모습에서 무얼 보는 걸까. 적어도 색채감 없이 잿빛으로 물든 걸 안다면 저렇게 뻔뻔하게 말하지는 못했을 테다. 그 불만을 표출하기에는 지난 삼 일간 침대 밖으로 한 발도 나서지 못한 나의 악몽이 심장을 꽉 옭아매고 있었다.
암영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평지 위에 서 있나 싶었는데, 거니는 지반이 언제 이리도 아찔한 비탈길이 되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턱을 괸 차무겸의 시선이 어딘가로 미끄러졌다.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나는 그가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골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목 뒤를 쭈뼛하게 만드는 긴장감에 한술 더 뜬 밥알을 씹어 삼키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이윽고 차무겸이 손가락으로 앞섶을 잡아 죽 당겼을 때는 아예 움직임이 멈추었다.
“젖꼭지 부었네.”
고작 눈으로 봐주는 건 이제 고마운 정도였다. 그러나 차무겸은 역시 나의 예상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단추가 걸린 부분을 손가락에 걸어 툭 풀어냈다. 앞섶이 조금 더 벌어지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젖가슴이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그가 나의 상체를 자신의 쪽으로 살짝 돌리며 불그스름하게 곤두선 유두를 머금었다. 얇은 천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저릿저릿 울리는 부위가 뜨끈한 점막에 둘러싸여 세차게 빨렸다. 나의 손에 들린 숟가락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하여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읏…!”
나는 급히 차무겸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안 건드려도 딱딱하게 뭉쳐 있다. 만져달라고 칭얼대는 거 같아.”
혀를 돌리느라 어눌해진 발음으로 그가 뇌까렸다.
이게 다 제가 밤새 씹고 뜯은 결과물이라는 걸 모르나.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입에 올릴 자신도 없었다. 반발을 꺼내기에는 차무겸의 심기가 불편했을 때 당한 일이 뇌 속에 잔뜩 고여 있었다. 나는 결국 차무겸이 유두를 양껏 물고 빨다가 만족스레 고개를 들 때까지 얌전히 굴어야만 했다. 아예 젖무덤을 쥐어 올려 게걸스레 흠빤 탓에 양쪽 유륜이 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이후의 식사는 그나마 고분고분 이어졌다. 바지런히 숟가락질했는데 밥공기에 밥은 여전히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밥알을 허망하게 들여다보다가 옆을 힐끔거렸다.
차무겸은 어느새 가져온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액정을 성의 없이 두드리는 걸 보니 메시지라도 보내는 모양이었다. 내 핸드폰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다.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처럼 이 집으로 들어온 즉시 나는 내 소지품은 물론 옷과 속옷도 보지 못했다. 사흘간 짐승처럼 박혀 울고불고 소리 지른 기억밖에는….
“무겸아.”
간신히 끄집어낸 목소리는 다행히도 그리 떨리지 않았다.
고작 한 번으로 그칠 변덕이라 치부하기에는 요 며칠간 눈이 뒤집힌 것처럼 구는 차무겸의 행태를 간과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질리게 되겠지만, 결코 아직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맹하니 휩쓸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녀 간의 정사는 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유발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차무겸이 살가운 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그….”
“왜.”
“하는 건, 괜찮으니까.”
“…….”
“콘돔… 좀, 껴주면 안 될까.”
어차피 당장으로서 말릴 도리가 없다면 향후 따라올 부수적인 문제라도 말려야 했다. 차무겸이 흥미가 꺼지면 이 짓도 관둘 테지만 문제는 섹스로 인해 생기는 치명적인 결과였다. 피임, 다른 말로 임신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적막이 우리 사이로 내려앉았다. 나는 조금 전 말을 꺼낸 혓바닥에 가시가 돋치는 심정이었다. 머뭇대는 기색으로 내미는 청탁이 너무나 비굴하고 노골적이라서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질 정도였다.
머지않아 차무겸의 입에서 미약한 탄성이 샜다.
“나 지금 설 뻔했어.”
“…….”
“무슨 말을 그렇게 야하게 해.”
나의 망설임 속 대체 어느 구간이 그렇게 보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아 숨기며 대답을 구하듯 빤한 시선을 보냈다.
“근데 콘돔 끼면 젤 묻잖아. 그래서 싫어.”
“…….”
“난 네 물로 젖는 게 더 좋더라고.”
단어 하나하나에 눈살 찌푸려질 만큼 적나라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싫다’는 의사 표현이 나의 뇌하수체에 깊숙이 처박혔다. 차무겸은 그 누구보다 호불호가 확실했다. 저 녀석이 싫다면 정말로 싫은 거고, 고로 앞으로도 콘돔을 착용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만약 임신이라도 하면?”
나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차무겸의 집안. 해운그룹은 어중이떠중이 같은 일가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재벌가를 줄 세웠을 때에 20순위까지 잘라도, 10순위까지 잘라도, 심지어 5순위까지 잘라도 그 안에 드는 게 해운그룹이었다. 보통 그렇게나 품격 있는 집안에서 근본도 모르는 나 같은 여자가 후계자의 아기를 가지길 바라지는 않을 테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고이 자라난 차무겸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차무겸이 콘돔을 쓰기 싫어한다면 그건 차후 아기가 생기든 말든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는, 아기가 생기면 지우면 되지 쪽의 안일함과 잔혹함에 더 걸맞으리라.
“임신?”
실타래처럼 꼬여 복잡한 나의 마음과 달리 차무겸은 눈빛에 햇살 같은 영롱함을 담았다. 까만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눈이 번들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나의 얼굴에서 배 쪽으로 미끄러졌다. 당장 무얼 동원해서라도 저 시야에서 배를 가리고 싶어지는 검측측한 눈길이었다.
“귀엽겠는데?”
“뭐?”
“내 애 배서 뒤뚱뒤뚱.”
“…….”
“와, 존나 보고 싶다.”
입아귀를 깊게 휘며 짓는 웃음이 천진난만하여 더욱 끔찍했다. 조금의 장난기나 놀리려는 기색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진심이라는 게 보여서. 등줄기를 벌레처럼 엉금엉금 타고 오르는 오한을 감출 수 없었다.
이 터무니없이 흘러가는 대화를 강제로라도 끊기 위해 나는 이만 씻겠다고 말했다. 차무겸은 반 정도 남은 밥공기를 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야 핸드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기존에 쓰던 것도 아니고 새로운 핸드폰이었다. 당연히 사흘간 내게 온 연락을 확인할 수 없었다.
“던져서 액정에 금 갔길래 그냥 새거 하나 샀어.”
이번엔 반대로 내 것을 바꾸는 김에 제 것까지 바꾼 차무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학교 앞에서 정차한 그가 안전벨트를 풀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턱을 그러쥐고서 혀를 밀어 넣는 키스가 잠시간 이어졌다. 충분히 타액을 섞었다 싶을 즈음 입술을 뗀 그가 내 손안에 들린 핸드폰을 툭툭 두드렸다. 연락 잘 받으라는 의미가 훤히 읽혔다.
이윽고 차에서 내린 나는 차무겸이 떠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부쩍 다가온 여름의 뙤약볕이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그 잠깐 서 있었다고 땀이 송골 맺혔다. 매연과 함께 사라진 흔적을 맥없이 좇다가 그가 내려준 정문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작은 규모의 약국이었다. 딸랑, 울리는 벨소리에 하얀 가운을 입은 약사가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저기… 피임약 있나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나는 나의 얼굴이 굉장히 비장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무겸이 대비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했다. 이 상황을 온전히 나의 힘으로 떨쳐낼 수 없다 한들, 나락으로 차근차근 떨어지는 과정을 고이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