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언니, 사은 언니.”
필수 전공 수업을 마치고 학식을 먹기 위해 학관에 온 참이었다. 점심시간에 딱 맞춰 와서 그런지 학관은 각기 모인 학생들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각자 먹을 것을 골라 텅 빈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먹음직스러운 철판 위에 나온 김치볶음밥을 뒤적거리고 있던 나는 호명에 고개를 들었다. 오전 수업을 듣는 내내 나를 보며 의문스레 웃던 지수가 제 몫의 밥을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저번에 그 남자 누구야?”
“남자?”
“왜, 우리 학교 끝나고 나갈 때 정문에서 언니 기다리고 있던 남자!”
지수의 목소리는 활기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저 문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굳이 공강임에도 집을 나서 학교까지 나를 데리러 온 차무겸이었다. 우리 나이에 몰기에는 다소 부유한 감이 있는 차에 기대선 차무겸을 보고 동기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암영에서도 튀었던 얼굴이 서울에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의 세련된 배경 속에서 그 미모는 더더욱이 빛을 발했다.
나는 싱겁게 웃으며 김치볶음밥을 숟가락으로 뒤적거렸다.
“남자친구?”
이런 나의 반응이 모호하게 다가왔는지 지수가 떠보듯이 물었다. 지수는 동기 중 남자관계가 가장 복잡한 아이였다. 1학년 때부터 잘생긴 남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 나는 지수의 모습에서 이따금 전예슬을 보았다. 굳이 차이를 규정해보자면 내게 악의가 없다는 것 정도.
옆에 앉은 가연이는 지수의 탐색 어린 반응이 벌써 질렸는지 탐탁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냐, 친구야.”
나의 대답에 지수의 눈동자가 한층 더 초롱초롱해졌다.
“진짜? 그럼 나 소개시켜주면 안 돼?”
“걔 여자친구 있어.”
지수의 관심이 숨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커지기 전에 얼른 바늘을 들이밀었다. 잘생긴 남자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지수라지만 그녀에겐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바로 임자가 있는 남자는 절대 넘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작 넘보지 않는 수준으로 모자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달 정도로 보이던 관심을 전부 꺼뜨리고는 했다. 흔한 말로 김이 팍 식어버리는 거다.
역시 내 짐작대로 지수는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아, 뭐야. 그래?”
“응.”
“…혹시 언니가 관심 있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야, 사은이가 뭐 하러 그래.”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지 상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가연이가 숟가락으로 접시를 두드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차무겸에 대한 화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라 나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나 사은이랑 대학 다니는 내내 걔 자주 봤는데 진짜 그냥 친구 같더라.”
1학년 신입생 입학식 때 친해져 지금까지 좋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는 가연이가 나를 두둔해주었다. 시간표도 일부러 맞춰 들을 만큼 가까운 친구인 가연이는 차무겸을 이따금 마주쳤었다. 처음에는 가연이도 때깔 번지르르한 차무겸에게 약간의 호감을 내비쳤으나 얼마 안 가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자연히 접어진 관심이었다.
지수는 제게 퉁을 놓는 가연이가 달갑지 않았는지 눈을 뾰족하게 치떴다.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 남녀 관계만큼 모르는 것도 없거든.”
차무겸을 캐내기 위한 지수의 노력은 학관을 빠져나와 교내 카페로 향해서도 계속됐다.
“언니, 나 그럼 친구로라도 소개해주면 안 돼? 응? 응?”
나는 차무겸의 명의로 된 카드를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며 그저 한 번 웃고 말았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데에도 포기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 낯짝이고 배경이기는 했다. 그날 차무겸은 몸만 달랑 등장한 게 아니라 으리으리한 차까지 끌고 왔으니. 대번 포기하기에는 실로 아쉬운 떡이다 이거겠지.
이전에 보았던 차무겸의 여친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윤다정. 차무겸은 그녀와 계속 만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늘 그랬듯이, 클럽에서의 소요 이후로도 차무겸과 아무렇지 않게 자주 만났는데 그때마다 누군가와 심심찮게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던 걸 보면.
동기들과 카페 내 의자에 앉아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징 울렸다. 동기들의 수다를 대충 넘겨 들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가기 싫어]
오늘 아침에 보내놓은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그는 오늘 가족 행사로 학교까지 결석했다. 물론 문제 될 건 없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도 했다. 차무겸은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출결을 조율했다. 결석에 있어서 이유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물론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가기 싫어서’가 전부였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군다고 한들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출석과 시험 성적이 엉망일지언정 학기 말 학과장과 식사 자리를 한 번 가지면 끝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군 면제로 인해 4년간 스트레이트로 다닌 그의 학교 성적이 올 A+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너 군 면제라고? 왜?’
‘어릴 때 일이 좀 있어서.’
‘…….’
‘왜? 나 어디로 사라졌으면 좋겠어?’
실실 웃으며 건네는 질문에는 떠보는 뉘앙스가 강하게 내풍겼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그 ‘일’을 헤아려보았다. 암영에서도 그렇고 서울로 올라와서도 거듭 들은 게 있다면, 차무겸에게 어릴 적 ‘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다.
해운그룹 차무겸, 해운그룹 사건, 해운그룹 사고 등등. 몇 가지의 단어를 조합하여 쳐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좌르륵 펼쳐지는 정보라고는 해운그룹 시가총액 상승, 혹은 차무겸을 통해서 소식만 전해 들은 그의 조부와 친부의 얼굴이 전부였다.
차무겸이 이어받은 핏줄이 괜한 게 아님을 증명하듯 두 분 모두 수려하고 짙은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간략하게 적힌 기사 한 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차무겸에게 보낼 답장을 고민하는데 카운터에서 받아온 진동벨이 지이잉 울렸다. 제가 다녀오겠다는 가연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그래도 가야 하는데 어떡해]
[너 데리고 가고 싶다]
[내가 거기 가서 뭐 해…]
[왜? 우리 아버지 너 예뻐해]
[됐으니까 조심히 다녀와]
[응 수업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가]
오늘 역시 단속을 마친 차무겸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대강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내가 바라보는 쪽으로 난 카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카페로 들어오는 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알아채자마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은 차무겸의 여자친구.
윤다정이었다.
“형준이한테 들었어, 너 여기 학교 다닌다고.”
김형준이 내 학교를 어떻게 아는지는 둘째 치고,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카페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차무겸과 어울리는 무리는 누구 하나 찾아내는 데에 아주 신통방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제대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차무겸이 사귄 여자친구들은 대다수 있는 집 자녀였다. 윤다정이라고 예외는 아니리라.
내 앞에 놓인 길쭉한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커피라고는 편의점에서 파는 값싼 것마저도 입에 대지 않던 내게, 한 잔에 오천 원이나 하는 아메리카노는 사치나 다를 바가 없었다. 길게 꽂힌 빨대를 휘휘 젓자 차가운 액체 안에 담긴 얼음이 절그럭절그럭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윤다정이 오늘 차무겸의 부재를 필시 알 거라고 확신했다. 때마침 점심시간 이후가 공강이라 다행이었다. 티 나지 않게끔 가연이와 동기들을 먼저 보내고 윤다정을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이렇게 날리는 게 아까우면서도 덤덤하게 굴 수 있는 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서였다. 이런 식으로 차무겸의 여자친구가 그의 부재를 틈타 혼자서 나를 찾아오는 것 말이다.
“왜 찾아왔는데?”
윤다정의 시선이 뾰족하게 섰다. 내 딴에는 최대한 담백하게 내뱉었는데 그녀에게는 영 아니게 들린 모양이었다. 빨대를 휘젓는 걸 관두고 윤다정을 제대로 마주했다. 윤다정이 다소 공격적인 태세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라면 알 것 같은데?”
“…….”
“더 이상 무겸이랑 사적으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문득 궁금해졌다. 윤다정이 나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정확히는 차무겸에게서 내가 어디까지 지원을 받는지. 차무겸이 해준 집, 차무겸이 등록금을 내준 학교에서, 차무겸이 준 카드로 생활하는 나를 알면 그걸 단순히 ‘사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텐데.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현실이 이랬다. 어쩌면 나조차도 벗어날 도리가 없는 이 빌어먹게 꼬인 현실이.
오후의 시작에 기습처럼 맞닥뜨린 이런 상황은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하다. 익숙하다고 한들 번거롭고 피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다시금 빨대를 붙잡았다. 입술을 가져다 대는 부분을 손톱 끝으로 꾹 짓누르며 물었다.
“너 오늘 여기 온 거, 차무겸이 알아?”
심상한 나의 어투에 반해 돌아오는 반응은 살짝 민감했다. 역시나 짐작대로인지 윤다정의 어깨가 움찔 말렸다. 차무겸 모르게 나를 찾아왔음이 분명했다. 꾹꾹 짓누르던 빨대를 놓으며 말했다.
“그럼 절대 들키지 마. 저번에 이렇게 찾아왔던 애가 있었는데, 그거 알자마자 헤어졌거든.”
나는 내가 차무겸의 곁에 있는 사이 스쳐 지나간 여자애들을 떠올렸다. 암영에서 지낼 때 연락을 주고받았던 현서라는 여자애를 제외하더라도, 족히 10명은 넘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결같은 차무겸에게는 한결같지 않은 여자친구들이 달라붙었다. 차무겸이 자신과 사귀어준 것만으로 감지덕지인 양 나를 특별대우하는 것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윤다정처럼 기어코 나를 찾아와 손찌검을 한 경우도 있었다. 후자는 하필이면 같은 고등학교라서 더 문제가 커졌었다. 화장실에서 맞닥뜨렸고 나는 지금 윤다정을 대하는 것처럼 최대한, 담담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있지도 않은 기만의 느낌을 최대한 제하는 식으로.
그러나 오히려 그게 더 배알이 뒤틀렸는지 차무겸의 여자친구는 기어이 내 얼굴에 손을 대었다. 후에 소식을 듣고 찾아온 차무겸은 손톱자국이 길게 남은 내 뺨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사라졌다. 다음 날 그 여자애의 뺨에 긴 흉터가 생겼다는 괴괴한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애가 자퇴를 해서였다. 그리고 그날 후로 차무겸은 그 여자애에 관한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차무겸의 전여친은 그렇게 우리 사이에서 흐지부지 잊혀졌다.
열 명을 사귀면 개중 여덟아홉 명 정도는 이런 식으로 이별을 맞이한 경우가 적잖았다. 윤다정은 내가 떠올린 두 경우의 중간에 서 있었다. 대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심하기도 했다. 그것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온전히 차무겸을 향한 마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조언한 것이다.
“너한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도 차무겸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거든.”
차무겸의 고질적인 집착은 그와 내 주변에서 유명했고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모두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모든 건 차무겸의 뜻대로. 그 무리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말처럼 나 역시도 그 기류에 실려 당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걔랑 헤어지기 싫으면 나 신경 쓰지 마.”
차무겸의 곁에 ‘여자친구’로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를 없는 존재인 양 무시하는 것. 차무겸이 내게 베푸는 관용을 꿋꿋이 무시할수록 차무겸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나를 최대한 걸리적거리지 않게 생각했던 여자친구가 가장 오랜 기간 차무겸과 교제를 했었다.
나의 귀에도 퍽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니 윤다정에게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건 비단 속내를 캐보지 않아도 지금 내비치는 표정이 훤히 드러냈다.
제 남자를 공유하는 더러운 기분. 그러나 그 기분을 감내해야지만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삐걱삐걱.
우리는 차무겸이 지휘하는 모순 아래에서 철저히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 * *
차무겸이 참석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린 이유는 이번 행사가 자그마치 3박 4일짜리였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렇게나 예쁨을 받으면서도 유독 그 자리에 가는 걸 꺼려 했다. 그 덕에 나는 간만에 자유를 맛보았으나 실은 반쪽짜리 자유나 다름없었다. 하루에 몇 통씩 걸려오는 차무겸의 전화와 문자-라고 쓰고 응석이라고 읽어도 무방했다-를 받아줘야 해서였다.
“생일 축하해!”
그리고 차무겸이 가족 행사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는 날은 바로 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가연이가 전해주는 케이크와 쇼핑백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함께 다니는 친한 동기들끼리 돈을 모아서 산 거라는 쇼핑백 안에는 반짝거리는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가연이는 가운데에 달린 보석이 내 탄생석이라고 했다.
“고마워.”
동기들에게 생일을 챙김받은 게 벌써 3년째인데 늘 새롭게 울컥했다. 서울에서의 삶, 이곳에서 꾸린 안정적인 인간관계는 나의 과거를 희부옇게 탈색시켰다. 그곳에서의 지옥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나를 천국에 있게끔 한 기분이었다. 환경을 뒤집을 수 있는 계기는 나의 피와 땀이 밴 노력이라기보다는 차무겸의 적선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행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암영에서 받은 게 머리통을 때린 공이나 우유갑, 혹은 수런거리는 말소리뿐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현재의 삶에 대한 욕심이 지반에 뿌리를 두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솔직히 오늘은 놀아야 한다.”
“맞아. 생일날까지 전공책에 파묻히는 건 오바야.”
동기들의 재촉에 결국 오늘은 공부를 일찌감치 접고 대학가 술집으로 향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고 또 축하를 받는 입장인지라 빠지기도 뭐해서 차무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일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문자를 남겨놓고 동기들과 함께 술집으로 들어섰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되도록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다. 가연이를 포함한 동기들은 차무겸과 나를 단순히 친구 사이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준 건 내가 평범한 부모를 두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보통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서임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나에게 술주정뱅이이자 도박꾼인 아버지가 있는지도 몰랐고, 내가 8살 때 집을 나서서 이후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엄마가 있는지도 몰랐다.
입고 다니는 옷은 차무겸이 제 걸 살 때 같이 구입한 비싼 브랜드였고, 식당이나 카페를 가서도 돈을 내는 데에 빼는 일이 없으니 모든 건 물 흐르듯이 이루어졌다.
이 세상은 돈이었다. 돈이 있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무겸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건 자연스레 숨기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퍽 이상한 관계였다. 이렇게나 어린 나이로 동년배의 남자에게 의탁하여 지낸다는 건.
그가 퍼부어주는 돈으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두 시간 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대학교 친구들이다 보니 교수에 대한 고충이나 이후 있을 교생 실습, 그리고 그 한 단계를 넘어서는 임용고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각자 눈여겨본 교생 장소를 입에 올리는 와중에 가방 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소란스러운 술집 분위기에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 차무겸에게서 부재중 두 통이 와 있었다. 그걸 보자 어떠한 위기를 직면한 것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 애들아. 나 이제 가 봐야겠다.”
“벌써?”
“언니네 부모님 엄하실걸. 이런 술자리 가지는 거 엄청 싫어하신대.”
차무겸이 내 삶의 뿌리를 한 번씩 툭툭 건들 때마다 나는 있지도 않은 부모님 핑계를 들먹였다. 차무겸과의 꺼림직한 관계를 숨기는 것의 연장선이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부모와 관련된 거라면 동기들은 한발 물러설 줄 알았다. 가연이가 ‘배웅해줄게.’ 하며 나를 뒤따랐다. 버스 대신 택시에 올라타며 가연이에게 얼른 가보라고 손을 흔들었다.
탁, 하고 문이 닫힌 택시 내부는 고요했다. 핸드폰을 꺼내 차무겸에게 재발신을 했으나 전화는 연결음만 주구장창 이어질 뿐, 바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묘한 초조함이 나의 가슴을 껄끄럽게 긁었다.
‘내가 너한테 이걸 왜 줬는지 모르겠어?’
예전에 한번, 차무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배터리가 없어서 핸드폰이 꺼진 탓이었다. 오늘처럼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중이라 몰랐던 것뿐이다. 뒤늦게야 핸드폰이 꺼진 걸 알았지만 어차피 집에 가서 충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언제 행차한지 모를 차무겸이 오피스텔 문 앞에 기대서 있었다. 비밀번호를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은 건 뻔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때 그는 웬일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을 가면처럼 둘러쓴 채였다.
‘미안해. 배터리가 없어서 꺼졌나 봐. 공부하느라 몰랐어.’
‘네가 공부를 했는지 딴짓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차무겸은 내 손에서 앗아간 핸드폰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가 필요 없는 쓰레기라도 된다는 양 바닥으로 내던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큰 파열음과 함께 매끄러운 액정이 설탕 조각처럼 부서지며 가루를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사람 기분 잡치게 할 변명 지껄일 시간에 행동으로 보여.’
차디찬 송곳 얼음을 귓구멍에 때려 박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차무겸의 연락을 꼬박꼬박 받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정말 실수였다. 그러나 그 실수란 차무겸에게 통하지 않았다. 녀석은 일이 벌어지고 변명을 하기보다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똑바로 행동하는 걸 선호하니 말이다.
걱정과 불안을 가득 담은 채로 집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이전 날처럼 문 앞에 서 있지는 않을까 했으나 복도는 고요했다. 도어 록을 해제하고 들어서기 무섭게 다시 차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통화 연결음이 끊어지며 전화가 연결됐다.
“안녕.”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뜨린 차무겸이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유선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와 현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오버랩처럼 겹쳐 머릿속을 장악했다.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축 내려뜨렸다.
“…언제 왔어?”
“아까.”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가끔씩 차무겸이 공기를 숨 막히도록 일그러뜨리는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할 때면 으레 튀어나오는 반응이었다. 나 스스로를 태연하게 가장해서라도 이 딱딱하게 경직된 기류를 풀어 보려고 애쓰는, 애잔한 습관.
“전화 왔는지 몰랐어. 다시 걸었는데 받지를 않길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가방과 쇼핑백, 그리고 케이크를 내려놓고 뒤를 도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차무겸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무겸의 한쪽 손이 내 뒤로 뻗어져 식탁을 짚었다. 코앞에서 부딪치는 눈빛 속에 쉬이 넘겨짚을 수 없는 난폭한 기운이 도사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이 갈급증으로 쩍쩍 달라붙는 듯했다.
“…화났어?”
“어떨 거 같은데.”
단조로운 목소리는 그 형태에 걸맞지 않게끔 허공을 험하게 갈랐다. 내 얼굴에 처박혀 있던 차무겸의 시선이 어깨 너머로 미끄러졌다.
“케이크 받았네.”
반대로 나의 눈은 조금 전까지 차무겸이 앉아 있던 소파로 가닿았다. 거기에는 매년 생일 때마다 받던 홀케이크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차무겸이 생일 케이크를 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차무겸은 이제 내가 단것에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생일 때만 되면 금가루가 뿌려진다는 저 유명 브랜드 케이크를 한 판이나 사 들고 오고는 했다.
“먹었어?”
“아니….”
“잘했어.”
차무겸은 몸을 돌려 소파에 놓인 케이크 박스를 들고 왔다. 그가 개수대로 향해 손을 씻고 와 케이크 박스를 오픈하는 동안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나를 잡아채는 건 무엇도 없었는데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니, 여기서 멋대로 행동하면 지난번처럼 종잡을 수 없는 난폭한 일면을 보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을 쉬이 간과하지 못했다.
돌아온 차무겸은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떠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까부터 묘하게 따끔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포크 따위는 입에 올릴 수도 없었다.
내게 내리꽂힌 차무겸의 표정은 날카롭게 벼린 칼날을 연상시켰다.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벌렸다. 생크림을 덜어낸 손가락이 그대로 파고들었다. 혀를 짓누르는 힘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자 그의 손가락이 치아에 닿았다. 차무겸의 동공 속 이채가 난폭하게 비틀렸다.
녀석은 눈을 뗄 수 없는 것을 담는 것처럼 내 입술에서 시선 하나 돌리지 않았다. 잇새로 파고든 손가락이 입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녀석이 듬뿍 퍼담은 크림이 잇새로 삐죽 샐 정도였다. 결국 혀를 움직여 입 안을 감도는 크림을 핥아 먹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차무겸의 손가락까지 핥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질척한 이물질을 혀로 다 쓸어가고서야 손가락은 스르르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입술과 손가락 사이로 번드르르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차무겸의 반대편 손이 떨궈지려는 나의 턱을 제대로 고쳐 쥐었다. 그러고서는 조금 전 쑤셔 넣은 검지가 아닌 중지로 입술에 묻은 크림을 쓱 앗아갔다.
“한우현이 네 안부 묻던데.”
차무겸은 내 침으로 젖은 손가락을 자기 입가로 가져다 댔다. 나는 그 손가락을 혀로 할짝이는 녀석의 행동에 반쯤 넋이 나가서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우현이라면, 차무겸의 사촌이 아니던가. 암영에 있을 적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개를 받았고 서울에 올라온 후로도 종종 보았다. 대체로 차무겸과 함께 있을 때였다.
“친해?”
반응이 없는 내게서 무얼 느낀 건지 질문이 잇따라 달라붙었다. 차무겸은 속내를 낱낱이 파헤쳐볼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을 핥는 걸 멈추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간신히 삼켜내는 숨이 크림으로 인해 지나치게 달았다.
“…안 친해.”
“근데 네 안부는 왜 물어.”
“나야 모르지.”
“…….”
“내가 누구랑 친한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리 대꾸하자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기색이 뾰족뾰족하게 돋아나 있던 동공이 살짝 누그러졌다. 차무겸의 눈길이 그 말을 뱉은 내 입술을 맴돌다가 슬그머니 밑으로 떨어졌다. 애매한 각도지만 나는 어디서 녀석의 시선이 덜컥 멈춘 건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오늘 동기들에게 선물로 받은 목걸이였다.
이상하게 숨기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내가 숨거나. 차무겸이 퍼부어주는 물질로 말미암아 풍요롭게 사는 내가, 마치 그게 나의 권력인 양 떵떵거리며 사는 위선자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러나 수치심의 정도는 아주 얄팍했다. 이제는 길이 들 대로 들어 별 타격도 입지 않는 자괴감이었다.
차무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머리칼을 파고들어 목 뒤에 닿았다. 헛손질 몇 번 끝에 조여져 있던 목걸이의 고리가 툭 풀어져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발치에 은색 줄이 물처럼 고였다.
“이딴 싸구려 하지 마.”
이건 대체 무슨 투정일까. 헤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무겸은 내 몸에 걸치는 것이라면 뭔들 자기 돈으로 마련한 것이어야 허락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물로 받은 건데.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절로 시선이 갔다. 차무겸은 목걸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내 턱을 가분히 쥐어 올렸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차이가 나는 키가 그를 올려다보게끔 했다. 차무겸은 크림이 남았든 화장이 번졌든, 여러모로 엉망일 내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눅진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
그러다가….
“흡!”
고작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일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차무겸이 상체를 기울여 내 입술을 제 입술로 덮은 것이다.
저돌적인 기세에 나의 상체가 뒤로 기울며 다급히 아일랜드 식탁을 붙잡았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고, 차무겸 역시 매한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나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녀석은 예견한 일을 맞닥뜨린 것처럼 고요하다는 것뿐.
우리는 서로의 눈을 지척에서 들여다보며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조금 전 손가락을 쑤셔 넣어 점막을 헤집던 것보단 담백하고 건조했다.
차무겸은 도장이라도 찍듯이 짓눌러 비비던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촉,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맞닿았다가 떨어진 숨결에 미약한 술 내음이 배어 있었다. 제법 멀쩡한 행색이라 몰랐던 것뿐, 차무겸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
“너… 취했지.”
“아니.”
마지막 보루처럼 변명거리를 내밀었으나 차무겸은 그 배려를 단번에 내쳤다. 식탁을 움켜쥔 나의 손이 오므라들었다. 확실히 술 냄새가 난다지만 저 명료한 눈빛엔 결코 취기가 엿보이지 않았다.
차무겸이 방심한 틈을 타 재차 나의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을 비웃듯 이번엔 물컹한 혀를 서슴없이 내민다. 식탁을 움켜쥔 손이 무심결에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내가 고개를 비틀려 하자 차무겸은 턱뼈가 삐걱댈 만큼 그악스러운 힘으로 고정시키며 혀를 쑤셔 박았다. 꼼짝없이 당해야만 하는 키스였다. 단내와 술내가 함부로 뒤엉킨 입맞춤에 정신이 몽롱하게 비틀렸다. 나까지 그의 취기에 버무려지는 느낌이었다. 차무겸의 혓바닥이 나의 잇몸을 함부로 간지럽혔다. 몹시 생경하여 온몸의 솜털을 수직으로 세우는 촉감이었다. 너무나 내밀한 바람에 그 행동을 헤아려보기도 싫어지는.
이윽고 두 번째 키스가 끝났을 때는 이마를 함부로 비벼대느라 그의 앞머리가 있는 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우리 둘은 키스가 아니라 한바탕의 전쟁을 치른 양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나만큼이나 아득하게 호흡을 늘어놓던 차무겸이 곧 내 이마에 이마를 붙이고는 속삭였다.
“어떨지 자주 상상했었는데….”
“…….”
“생각보다 더 좋네.”
아득한 감상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긁었다. 무언가 자각자각 깨지는 이명이 뇌리를 에워쌌다. 5년간 넘을 생각도, 넘으리라는 예상도 할 수 없었던 금기가 고작 한순간의 충동으로 깨졌다.
“사은아, 생일 축하해.”
그의 모순 아래에서 피어나는 불협화음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 * *
그 예감은 단순히 나의 기우가 아니었다.
차무겸은 그날 이후로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디서든 입술을 들이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 집에 오는 건 일상다반사였으므로 굳이 남들의 시선을 피할 곳을 찾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초반에는 쪽쪽대며 가볍게 부딪치는 정도로 끝나던 게 어느 순간부터 턱을 비틀고 혀를 섞으며 제법 음탕한 기류를 띠었다. 차무겸은 내가 거부할수록 더 거칠고 막 나갔다. 혼돈 아래에서 발하는 스킨십은 덜그럭덜그럭, 맘속에 이상한 소음을 낳았다.
“읍!”
그나마 다행인 건 키스로 그친다는 걸까.
아직까지 옷 속으로 손이 파고든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 점이 나를 조금 더 망설이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차무겸은 쉽게 흥미를 가지고 원하는 걸 취하면 빠르게 질린다. 그러니 단순히 키스에 불이 붙은 거라면, 이 호기심만 해결되면 여기서 더 나아갈 리는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아…!”
차 뒷좌석에서 이루어지는 키스가 오늘따라 격했다. 이미 집을 나서기 전 한바탕 빨려 얼얼하게 부은 입술을 녀석은 사탕 빨아 먹듯 쭉 잡아 물었다. 나의 머리통이 차가운 유리창에 닿아 비벼졌다. 뭉근하게 파고든 혓몸이 입 안 여기저기를 할퀴었다.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혀가 교미 중인 뱀처럼 뒤섞인다. 갈피를 잡지 못해 엉거주춤한 나의 혀를 감싸 빨아들이는 힘이 거셌다. 혀뿌리가 찌릿하는 통증이 일어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응, 차, 무….”
나는 호흡이 달리는 것처럼 헐떡이며 빈 운전석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박승원이 운전석에서 내려주고서야 달려든 걸 고마워해야 할지. 차무겸의 물컹한 혀가 내 입 안에서 매끄럽게 활개를 치는 동안 나의 눈길은 어디론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순간 떡 벌어진 어깨를 쥐고 있던 내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선팅된 차창 너머로 윤다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잠…!”
다급한 만류를 하기도 전에 입술이 또 깊이 맞물렸다. 이번엔 양 입술 사이에 내 아랫입술을 끼워 쪽쪽 빨아대기 시작한다. 나는 차오르는 숨결을 있는 대로 빨리며 감전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움찔움찔 떨었다. 차무겸의 여친이 보이는 자리에서 그와 입을 맞추고 있는 이 상황이 아주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을 부추겼다.
그러던 차 머리채가 아프게 잡혔다.
“씨발… 집중 안 해?”
차무겸은 상황 가리지 않고 진득하게 접붙을 때마다 내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걸 두고 보지 못했다. 어느새 다시 혀로 입술을 벌리고는 안쪽을 싹싹 긁어낸다. 제대로 삼키지도 못한 침이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는 그것마저도 차무겸이 죄다 빨아 먹는 형국이었다. 흠빨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내 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연신 쿵쿵댔다. 윤다정은 나란히 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찰나, 차가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게 평소 차무겸이 타고 다니는 차라는 걸 깨달았는지 반색을 표하며 다가왔다.
나는 급히 차무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차무겸은 내 혀를 빠는 데에 눈이 돈 것처럼 머리칼을 움킨 손에 힘을 더 줄 뿐이었다. 집중하라는 윽박질 대신이었다. 다가오는 윤다정, 붙잡힌 머리카락, 혀로 피스톤질하듯 입 안을 끈적하게 쑤석거리는 움직임. 모든 게 나의 뇌리를 엉망으로 꼬았다.
무겸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윤다정이 뒷문을 똑똑 두드렸다. 차가 선팅이 짙어서 안쪽의 상황이 보이지는 않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안쪽에서는 바깥 상황이 눈에 그리는 듯 훤히 펼쳐졌다. 차무겸은 여자친구의 부름에도 요지부동으로, 어떻게 하면 내 입 속에 더 파고들 수 있는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법 강한 흡착력으로 입술이 먹히는 나의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차 밖에 선 윤다정과 한 번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차게 식어내렸다.
얼마 안 가 차무겸이 붙들고 놓아주질 않던 입술 사이로 살짝 틈새를 벌렸다.
“사은아.”
“차, 무겸. 이제 그만, 좀….”
“너 혀 존나 말랑말랑하고 달다. 설탕 같아.”
그러나 그건 제 아득한 감상을 뱉기 위한 술수일 뿐이었다.
“차무겸, 진짜 그만해. 윤, 윤다정 뒤에…….”
“선팅 진해서 어차피 못 봐.”
그는 어중간하게 벌어진 나의 다리를 제 허리에 두르며 더욱이 나를 압제하려 들었다. 그보다 나는 녀석이 윤다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대체 얘한테 여자친구는 무슨 존재일까. 그의 눈꺼풀이 그려내는 음영이 나의 얼굴을 뒤덮었고, 곧 내 입술이 가지런한 치아에 꽉 깨물렸다.
내가 아, 하고 다시 한번 비음을 토해내자 그 부위를 매끄럽게 할짝이며 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내 자지도 물려보고 싶다.”
나의 눈동자 속 초점이 쩌걱 갈라졌다.
“쫀득한 게 감싸주면 뒤지게 좋을 거 같은데…….”
“…야.”
똑똑, 무겸아?
부름이 한 번 더 이어졌다. 나는 차무겸의 입술 위로 번진 내 립스틱을 소매로 빨리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무겸은 괴상망측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또한 녀석의 손은 여전히 내 머리칼을 붙잡아 살살 흔드는 채였다. 여차하면 시트에 처박지는 않을까 아슬아슬한 느낌을 자아내는 손속이었다.
립스틱 자국이 그의 입술에서 그럭저럭 지워진 걸 확인하고 반대편 소매로 내 입술을 마저 문질렀다.
“너… 이런 거, 윤다정이랑 해. 나한테 이러지 말고.”
“왜?”
“윤다정이 네 여자친구잖아.”
차무겸은 차에서 내리기 싫은 나른한 표정으로 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 문질렀다. 키스 이후 녀석은 조금 더 내밀하게 접촉하는 방식을 깨달은 것처럼 서슴없이 굴고는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우리 사이로 그려진 선이 흐려졌다가 다시 생겨났다가 하는 혼동이 일었다. 그 선을 어떻게든 살려두고 싶은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 문제를 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거스를 수 없는 문제가 될 테다. 그러므로 나는 미약한 두려움을 품고서 언제나 이 입맞춤을 별거 아닌 양 치부했다. 정신이 들면 해프닝쯤으로 넘길 수 있게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하고 그칠 줄 알았던 차무겸의 치근댐이 심해질수록 그 두려움은 어째 무럭무럭 자라기만 했다.
“다정이랑 헤어지면?”
차무겸은 가끔씩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혀끝에 신랄한 독을 품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자존심 다 억눌러가며 날 찾아온 윤다정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그 음성은 악독의 경계를 거닐었다.
“그럼 내 좆 빨아줄래?”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나는 오늘 역시도 별일 아닌 걸로 치부하듯 퉁을 놓으며 창밖을 보았다. 윤다정의 표정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굳어져 있었다. 그러던 차 잠시 자리를 비운 박승원이 돌아와 그녀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전했다.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윤다정은 나와 차무겸이 탄 차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오늘의 약속 장소인 누군가의 집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 됐어?”
“…정말 나도 꼭 가야 해? 너만 놀다 오면 되잖아.”
나는 오늘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자리에 걸음 한 건 늘 그렇듯 차무겸의 변덕이었다. 내가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연락을 해 호출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오늘 같은 경우가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임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경우 말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또 어느 부잣집 망나니의 집에서 벌이는 파티일 게 뻔했다. 노을이 오색찬란하게 펼쳐지는 하늘이 지금의 시간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했다. 밤, 나는 차무겸과 그 지인들이 꾸리는 밤이 늘 거북하고 껄끄러웠다.
그러나 차무겸은 내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반드시 나를 오늘의 자리에 동행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양 자비를 베푸는 일 역시도 없었다.
결국, 차에서 내려 기다란 담벼락을 따라 그를 쫓아야만 했다. 으리으리한 부촌 한가운데에 위치한 타인의 집은 암영에서 내가 곧잘 가고는 했던 차무겸의 저택을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 갖기 어려운 탁 트인 정원, 그 잔디밭 위에는 이미 사람이 몇 명 보였다.
붉은 노을은 눈 깜짝할 새에 스스로의 몸을 태워 먹색으로 물들었다. 내려앉는 어둠을 따라 정원에 심어둔 나무들 사이로 대롱대롱 걸어놓은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어….”
아가리를 쩍 벌린 지옥 같은 곳으로 들어서기 전, 누군가와 맞닥뜨렸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계단 중간에 서 있던 한우현이었다. 담배를 피우려고 나와 있었는지 라이터를 꽁지 끝부분에 가져다 대고 있던 한우현이 우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정확히는, 나를 발견하고서였다.
차무겸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건넨 한우현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너도 왔구나.”
그러고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응.”
대화는 싱겁게 끝을 맺었다.
“의사 한다고 담배는 입에도 안 대던 놈이 꼴초 다 됐네.”
담배를 문 한우현에게 가벼운 핀잔을 남긴 차무겸이 녀석을 쓱 지나쳤다. 한우현의 아버지가 국내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라는 얘기를 언뜻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그 역시 집안의 계보를 잇듯 자연스럽게 의대에 입학했다고.
문득 떠오른 정보를 곱씹으며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한우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름날,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첫날을 상기시키는 눈빛이었다.
저마다 흩어져 자유롭게 놀던 분위기는 차무겸의 도착으로 막을 내렸다. 차무겸의 주위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술을 곁들인 진정한 파티는 테라스처럼 조성된 곳에서 벌어졌다. ㄷ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옥외용 소파 중 나는 어디 도망갈 수도 없이 차무겸의 곁에 착석해야만 했다. 그 반대편에는 당연히 윤다정이 앉아 있었다.
귀를 아우르는 왁자지껄함에 벌써 머리가 지끈댔다. 이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전공책을 독파했을 것이다. 차무겸의 곁에 인형처럼 앉아 있는 시간은 늘 낭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야야, 우리 그거 하자.”
호박빛의 술잔을 든 누군가가 대뜸 분위기를 갈랐다. 차무겸의 전언에 따르면, 이 집의 주인이자 오늘 파티를 연 주인공인 남자애였다.
그가 히죽 웃으며 제안한 건 다름 아닌 진실 게임이었다. 룰은 간단했다. 술병을 돌려 주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에 앉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기. 대답하지 못하면 온갖 술을 섞어 만든 벌주 마시기. 나는 할 마음이 없었으나 거절할 권한 따위 없었다. 이 소파에 앉은 모두가 게임에 참여해야 했다. 차무겸에게 좀 말려보라는 심산으로 눈짓했으나 그는 의외로 즐거운 듯 눈가를 찡긋거리고 말 뿐이었다.
테이블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술병이 요란하게 돌아갔다. 누가 이랬네, 누가 저랬네.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세상 속 이야기가 죽죽 이어졌다. 어떤 타이밍에서는 과도한 웃음이 터졌고 어떤 타이밍에서는 과도한 야유가 쏟아졌다.
그 분위기가 불똥이 튄 것처럼 화르르 달아오른 건, 술병의 길쭉한 입구가 차무겸을 가리켰을 때였다.
“나, 다음은 나!”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번쩍 손을 치켜든 이가 나와 차무겸을 번갈아 보는 행색을 눈에 담고 있노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광대 부근은 술기운으로 인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둘이 진짜 친구 맞아?”
이번엔 야유의 차례였다. ‘야, 다정이도 있는데.’ ‘너무한다.’ ‘근데 솔직히 안 궁금한 사람 없잖아.’ 따라붙는 군소리가 소란스러웠다. 나는 목 끝이 쩌적 달라붙는 느낌에 물이 든 잔을 쥐었다. 한 모금 마시다가 맞은편에 앉은 한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친구지, 그럼.”
차무겸은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 진실 게임은 타인의 노골적인 밑바닥을 까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제외한 참가자 전원이 타인의 진솔된 속을 까뒤집지 못해 안달이었다. 거짓말을 간파하는 눈치 역시 귀신이었다. 다른 이의 차례일 때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잘만 욕지거리를 하던 아이들이 입을 합 다문 채 눈치만 봤다.
“아, 새끼들. 질문 존나 재미없게 하네.”
정적을 깬 건 오늘의 자리에도 빠지지 않은 김형준이었다. 소파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던 놈이 일어나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리고 가벼이 술병을 돌렸다. 핑그르르 돌아간 술병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끝에 차무겸이 걸렸다. 다른 이들의 흥미가 머리끝까지 달아오르는 게 피부로도 전해져왔다.
김형준은 그 자리에서 다리를 굽혀 앉아 나와 차무겸을 한눈에 담았다.
“차무겸.”
“…….”
“솔직히 김사은 따먹고 싶었던 적 있지?”
질문의 천박함이 급물살을 탔다. 생각보다 더 노골적인 공격에 아까와는 달리 다들 숨을 죽이고 차무겸의 눈치를 살폈다. 쉽사리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도 궁금하기는 한 모양인지 눈알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들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차무겸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김형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침묵이 긴장감을 유발했다. 이 자리는 질이 낮았다. 지금 이건 꼭, 나와 윤다정 중 누가 먼저 뛰쳐나갈지 판돈이라도 걸려 있는 저급한 도박 현장 같았다. 선수 중 의지로 오른 자는 없었다. 그만큼 끔찍했다. 머리를 작은 해머로 두드리는 것만 같은 두통이 자잘하게 이어졌다. 나나 윤다정이나, 너저분하게 번진 상스러운 호기심 가운데에 무참히 깎여나가는 모난 돌이 따로 없었다.
그러던 차였다.
차무겸이 픽 웃더니 테이블에 있던 벌주를 가져가 들이켰다. 모두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 그 의미를 알아챈 이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진실 게임에서 대답을 회피하고 벌주를 마신다는 건 그 질문에 대한 긍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를 뛰어넘어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손목이 콱 붙잡혔다.
“앉아.”
차무겸이었다.
내 손목을 붙잡지 않은 쪽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건네는 말은 단칼과 같았다. 거부하는 즉시 써걱, 잘려버릴 것만 같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문득 내다본 시야 속에 윤다정이 걸렸다. 나만큼이나 모욕적인 일을 당한 윤다정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나는 여기서 이딴 일로 쓸데없이 시간을 버려야만 하는지.
그러나 그 생각은, 머지않아 돌아온 차무겸의 눈빛에 점점이 갈라졌다.
차무겸은 당장이라도 내뺄 듯이 선 나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엉덩이가 푹신한 시트에 닿았다. 한 발 제대로 떼지도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끼고 앉아서는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빙글 굴렸다. 술병의 주둥이가 이번엔 완전히 반대편에서 멈추었다. 여전히 주저앉은 채인 김형준의 얼굴을 가리킨 것이다.
“내 차례네?”
차무겸의 웃음은 때로 뒷골 서늘한 감각을 유발했다. 그는 여차하면 던질 기세인 유리잔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김형준과 눈을 맞추었다.
“너 진짜 사은이한테 관심 있어?”
조금 전 김형준이 꺼낸 질문의 농도보다는 얕았으나 그 도마 위에 올려진 게 나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모두가 생각보다 시시한 질문에 미처 터뜨리지 못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 때에도 차무겸은 홀로 진지했다.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장난 하나도 쉽사리 걸지 못할 만큼 냉혹한 기색이 겹겹이 껴 있었다.
김형준은 그 얼굴을 잘도 마주하다가 입아귀를 깊이 휘었다. 녀석의 손이 무언가를 쥐었다. 그새 새로 제조된 벌주였다. 김형준이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자 차무겸 때와는 달리 주위에서 귀 따가운 환호가 터졌다. 이쪽도 긍정, 심지어 대상이 명확한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당사자인 나는 골이 띵할 만큼 아플지언정 도처에 깔린 망나니들에겐 안중에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기분에 나는 재차 벌떡 일어섰다. 이목이 쏠렸다. 다행히 차무겸이 이번엔 붙잡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정원을 벗어나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 권한까지 주어지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적한 집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누가 물건을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문을 죄다 열어놨는지 모르겠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아주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 빼고는 다 잘사는 애들이다. 훔쳐 갈 바에야 자존심에라도 새로 사고 말 그런 녀석들.
“김사은.”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는데 별안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난간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내 맞은편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다 지켜보던 한우현이었다. 전구가 이곳저곳에 널려 환한 바깥과 달리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나의 얼굴 위에도 그와 비슷한 무채색의 음영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너 괜찮아?”
한우현은 너른 보폭으로 금세 계단 앞까지 다가왔다.
“뭐가?”
예상보다 담담한 내 모습이 당황스러웠는지 한우현이 “아니….” 하고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흐릿하고 침침한 배경 속 잘 잡히지 않는 형상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괜찮아.”
“…….”
“쟤가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나의 푸념에는 의지가 없었다. 차무겸이 어떻게 행동한다고 한들 거기에 내 의지가 개입될 일 따위는 없음을 실로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이 설사 조금 전보다 더 모욕을 준다고 한들 나는 꼼짝없이 맞고 있어야 했다. 그게 내가 그에게 받는 물질의 대가라면 말이다.
지이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꺼내 든 액정이 어둠에 걸맞지 않은 빛을 발산했다. 나는 [홍가연]이라는 저장명을 보고 한우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 잠시 전화 좀.”
“아, 그래.”
“그리고 한우현.”
“어?”
“어지간하면 이렇게 나 따라오지 마.”
나는 더 말을 이어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대로 발을 옮겼다. 뒤에서 한우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라도 이건 꼭 해야만 하는 얘기였다. 차무겸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들에게 경계의 날을 뾰족하게 세우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한 키스의 발단이 나를 향한 한우현의 관심이었다. 나의 바보 같은 실수에, 녀석의 쓸데없는 흥미가 겹쳐 건조한 심지에 불씨를 붙여버린 것이다. 타닥타닥, 하고 타오르는 심지 끝에 있는 게 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조금씩.
무언가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체감했다.
“응, 가연아.”
나는 2층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빈방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 가연이가 전화를 건 목적은 별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일상에 가장 큰 주축을 이루는 대상과의 통화라서 그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렁이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가연이는 남자친구와 만나기로 했다가 일이 생겨 약속이 쫑났다며 나에게 칭얼거렸다. 대화의 흐름은 끊이지 않고 바뀌었다. 나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고 가연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약 이십 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서야 내가 들어와 있는 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게, 손님방으로 내어주는 침실 같았다.
이만 나가려고 문가로 향하는데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더하여, 느닷없이 나타난 인물이 조금 전 나를 보기 좋게 조롱거리로 만든 김형준이라서 말릴 새도 없이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야?”
무심코 퉁명스러운 소리가 나갔다. 그러나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는지 김형준은 실실 쪼개며 기어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 공간에 놓이니 메스꺼운 술 내음이 진하게 풍겼다. 부디 내가 아니라 이 방에 볼일이 있기를 바라며 그를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팔목이 붙잡혀 발을 옮긴 보람도 없이 도로 질질 끌려 들어왔다.
“너 차무겸하고 잤지?”
나는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녀석에게 잡힌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문은 몇 센티가 열리기 무섭게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김형준이 손바닥으로 문을 힘 있게 민 것이다.
“왜 대답을 안 해?”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으니까.”
“아… 앙칼진 거 존나 내 스타일.”
김형준은 문가에 등을 대고 섰다. 나는 녀석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자연히 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출구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악수이기도 했다. 김형준은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쓱 물었다.
“차무겸이 그렇게 좋아?”
마음은 아까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를 조금도 못 느끼겠다. 그래서 침묵을 고수했다. 김형준이 붉게 충혈된 눈을 끔벅거리며 잇따라 말했다.
“차무겸 말고 나는 어때?”
“비켜.”
“그런 정신병자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어?”
원색적인 비난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게서 생동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게 그리도 기뻤는지 김형준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 미소가 적어도 나에게는 야비하게만 다가올 뿐이었다.
더 듣고 있을 마음이 없어서 재차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런 내 행동을, 문에 몸을 기대는 식으로 방해하며 김형준은 들어 보라는 듯 고개를 디밀었다. 거북한 알코올 냄새에 발이 뒤로 직 끌렸다.
“너 차무겸 어릴 때 무슨 일 있었는지 모르지?”
예상치 못한 화제에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이 한순간 휘청댔다. 그게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나버렸다. 김형준은 제 낚싯대에 걸려든 물고기를 보듯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딱 보니까 모르네. 그거 들으면 너도 걔 옆에 못 있을걸. 그래서 난 차무겸한테 달라붙는 년들 다 골 빈 년들 같아.”
“난 아니라는 거야?”
“넌 좀, 특별하잖아.”
“아냐. 나 하나도 안 특별해.”
왠지 모르게 지글지글 끓는 듯한 김형준의 기대감을 얼른 잘랐다. 그러나 취기에 얼근하게 풀어진 동공은 내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왜 술 처먹고 날 찾아오고 지랄이야. 진심으로 치미는 짜증에 문을 못 열게 막는 녀석을 밀치려고 했다. 그러나 김형준이 외려 나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맞닿은 피부를 타고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했다. 불쾌감과 상응하는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차무겸이 하도 끼고 돌아서 궁금했는데….”
귓바퀴를 긁는 어조가 뭉근했다. 그게 오싹한 소름을 유발해서 나는 김형준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쳐냈다.
그 순간, 나와 녀석이 물고 늘어지던 문고리가 제멋대로 돌아갔다. 그 장면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박혀 들었다. 그래서 나는 김형준이 다시 내 팔목을 휘어잡는 힘을 미처 떨쳐내지 못했다.
“…….”
문을 열고 들어온 차무겸이 맞붙은 나와 김형준을 보았다.
눈길이 그리는 궤적이 느릿하다. 내 얼굴에 닿았다가, 내 팔목으로 미끄러졌다가, 그것을 포악스레 움켜쥔 김형준의 손아귀에, 그리고 취기가 오른 게 확실한 김형준의 얼굴에.
모든 것을 느른히 훑은 시선의 종착지는 내 얼굴이었다.
차무겸은 파도 속에 던져진 바위처럼 등장했다. 눈을 한 바퀴 굴리던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와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조금 전 김형준과 같은 행동인데도 다른 느낌이 났다. 아까 전은 짜증만 났다면 지금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바짝 조여들었다.
김형준은 예기치 못한 차무겸의 등장에 놀랐는지 잠시 굳어 있다가 붙잡고 있던 팔목을 놓으며 ‘뭐야?’ 하고 물었다. 팔짱을 끼고 선 차무겸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뭐 해? 계속해.”
“……?”
“사은이랑 뭐 하고 있었나 궁금해서.”
그는 이런 상황에서마저 살갑기 그지없는 형태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애들 다 아래에 있는데… 단둘이 이 좁은 방에서 뭐 하고 있었는지 존나 궁금하다고.”
휘어지는 차무겸의 입꼬리가 뇌리를 아득하게 휘저었다.
“계속해 봐. 손목 잡고 있던데.”
술독에 빠진 김형준은 다소 기이하게 흘러가는 기류를 인지했는지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김형준을 응시하는 차무겸의 눈은 고작 찰나에 서릿발처럼 차게 변했다.
“안 해? 하는 게 좋을 텐데.”
“…….”
“안 하면 내가 너 팰 거거든.”
고작 가연이 전화 한 통 받겠다고 방에 들어왔다가 대관절 상황이 왜 이렇게 흘렀나 알 턱이 없다. 아니, 상황은 이해해도 그 가운데에 놓인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김형준은 왜 이러고, 차무겸은 왜 또 이러는지. 적어도 분명한 건 하나. 지금 차무겸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것이다.
실컷 들이댈 때는 언제고, 그나마 이 정도의 눈치는 살았는지 김형준은 선뜻 행동하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었다. 저렇게 주눅 들 거면서 잘도 정신병자를 운운….
“꺅!”
내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무겸이 순식간에 김형준의 머리통을 휘어잡아 벽에 처박은 까닭이었다. 김형준은 물에 빠진 것처럼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으나 취하기도 취했고 또 차무겸의 힘이 여간 센 게 아닌지 도통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의 손바닥 위로 퍼런 핏줄이 투둑 튀어나온 걸 보면 힘도 어마하게 싣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무겸은 그 상태에서 못질하듯 기계적으로 머리통을 벽면에 쾅쾅 내려쳤다. 끔찍한 마찰음이 연신 귀를 울렸다. 결국 살갗이 찢어지며 피가 나기 시작했는지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벽에 붉은색이 번져갔다.
그 잔혹한 장면에 반사적으로 물러났던 나는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급히 차무겸에게 달려갔다.
“차무겸!”
팔목을 붙잡는 순간 차무겸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김형준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내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뒷머리가 벽에 퍽 부딪쳤을 때 ‘다음이 내 차례인가’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무겸은 내 머리통도 한 손으로 붙잡아 으스러뜨릴 듯 내리박는 대신 내 입술을 삼켰다. 사막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을 연상시킬 만큼 갈급한 키스였다. 코가 함부로 비벼지며 숨결이 난잡하게 뒤섞였다. 입보다 더 빠르게 닿은 혀가 입술을 험하게 갈랐다.
“흡, 응, 무….”
비처럼 쏟아지는 키스였다. 평소에도 뒤에서 누가 쫓아오나 싶을 만큼 갈급한 느낌이 팽배한데 지금은 그보다 더했다. 차무겸은 입술을 떼면 죽어버리리라 믿는 것처럼 정신없이 나의 입 안을 감빨았다. 숨이 막혀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차무겸의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단단히 붙잡아왔다.
“둘이 여기서 뭐 했어.”
차무겸의 잇새로 새는 난폭함에 신경이 움푹 수축했다.
“흣, 아, 아무것도, 안, 읍.”
턱을 비튼 녀석은 나의 양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츄읍, 쯥, 빨아당겼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입술이 그의 치아에 물려 늘어났다가 제자리를 찾기를 반복했다. 입술을 곤죽이 되도록 빨다가도 틈을 주지 않고 달라붙어 혀를 진탕 섞었다.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호흡에 폐부가 다 욱신 조여들었다. 입 안을 점령한 두툼한 혀가 천장을 즉- 긁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야릇한 신음 소리를 냈다. 차무겸은 내 혀를 게걸스레 빨며 불현듯 손을 밑으로 내렸다.
“무, 차, 차무겸…!”
그 손이 움켜쥔 건 내 엉덩이였다.
기겁한 나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러나 차무겸은 내가 간신히 밀어낸 입술을 목덜미로 미끄러뜨리며 기어이 원피스 자락을 들췄다. 은밀한 허벅지 안쪽을 쓱 쓸어올리는 손길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쭈뼛하게 섰다.
나의 치맛자락 속에 녀석의 팔뚝이 들어와 있다는 게 생경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더 나아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심지가 기어이 터지려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함으로 말미암아 속이 시큰거렸다.
나는 발버둥을 치다가 사타구니 쪽에 닿아오는 묵직한 감각에 돌이 되었다. 차무겸이 입술을 오므려 목덜미를 세차게 빨아들였다.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거센 흡착력이었다. 이후 혀를 내어 개처럼 싹싹 핥아대며 나의 속옷과 속바지에 손가락을 걸었다.
“지금 뭐, 뭐 하려는 거야. 무겸아…?”
최대한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평소 좋아하는, 성까지 떼고 부르는 방식을 사용했으나 차무겸은 완전히 눈이 빙글 돈 것처럼 굴었다. 녀석의 손길은 도통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나의 하복부를 헤집었다. 불안한 눈길로 그의 어깨 너머에 쓰러진 김형준을 힐끔댔다.
“씹질.”
드디어 차무겸이 입을 열었으나 그건 적어도 내가 바라던 결말이 절대적으로 아니었기에 동공이 휘청 꺾여나갔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손의 떨림을 숨기려고 애쓰며 옅게 심호흡했다.
“아냐,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일단 쟤, 쟤 좀 어떻게 하고….”
“김형준 얘기 한 번만 더 꺼내면 진짜로 저 새끼 멱 따버린다.”
숨결은 뜨거운데 그 숨결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냉동고에 집어넣었다가 빼낸 것처럼 냉혹하기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나는 이윽고 쓱, 벗겨져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지는 속바지와 속옷에 등줄기를 굳혔다. 솔직히 손가락을 걸 때까지만 해도 조금 센 경고를 하려나 보다 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어쩌면 모르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한 걸지도.
“무, 무겸아. 차무겸!”
“응.”
“진정해 봐, 어? 잠, 이러면…!”
“사은아, 좀 닥쳐 봐.”
벗어나고 싶어도 차무겸처럼 거대하고 튼실한 사내의 힘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토록 비는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차무겸이 눈과 귀가 죄다 틀어막힌 듯 벽창호처럼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까부터 철컥거리는, 벨트를 푸는 특유의 소리가 귀를 아스라이 긁어댔다. 착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씻을 때가 아니라면 내 손으로조차 만져본 적이 별로 없는 밀지를 쓱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감에 나의 두 눈이 크게 홉뜨였다. 뭉툭하고 딱딱하다. 그러면서도 미끈한 게 영 껄끄럽기 그지없는 촉감이었다.
눈을 아래로 하기가 무서워서 나는 바짝 굳은 채로 정면만 응시했다. 도망가기에는 늦었다는 알싸한 감각을 몸소 떠안기도 전에 무언가가 곱게 다물린 구멍을 찢어발기듯 벌리며 삽입됐다.
“으…! 아! 싫…!”
생살을 흉포하게 벌리는 느낌은 통증과 같았다. 나는 허리를 떨며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차무겸은 제 가슴팍을 밀치고 발버둥을 치며 난리를 피우는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서 계속해서 엉덩이를 벌렸다. 비부 사이로 몽둥이 같은 무언가가 조금씩 쑤셔 박혔다. 차무겸이 혀를 쯧 차더니 뺨을 씰룩대다가 맞닿은 부위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고는 이미 넣은 부분만큼만 자잘하게 앞뒤로 흔들었다.
발끝이 반쯤 허공에 뜬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젖혔다. 배 속을 쥐어짜는 통증에 적응할 길이 없었다. 젖혀진 고개 아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리쬐는 형광등 불빛이 조악하게 망막을 찔러 들었다.
“찢어져, 이러다. 그니까 힘, 빼, 후우….”
“으으응, 아파, 싫, 아, 좀…!”
벽에 달라붙은 나와 차무겸은 파렴치한 짐승 같았다. 그건 격통으로 눈앞이 일그러진 상황 가운데서도 발치에 쓰러진 김형준이 시야에 걸린 까닭이었다. 묵사발이 된 누군가를 두고 흘레붙고 있는 이 꼴이 어떻게 짐승이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 우려도 얼마 안 가 흐려지고 말았다.
불꼬챙이로 아래를 쑤셔대는 것처럼 홧홧한 감각에 나는 결국 콜록, 기침까지 토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저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으리라고만 여긴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잡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나 그건, 차무겸의 기분만 잘 맞춰준다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한순간의 소란으로 나의 삶에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여전히 내 아래를 벌리며 진입하는 차무겸의 거대한 성기가 바로 그 변동의 주범이었다.
“흐으윽…!”
“아, 뻑뻑해….”
차무겸이 투정 부리듯 뇌까리고는 나의 엉덩이를 좌우로 쫙 벌렸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개폐하듯 벌름대는 아래로 무언가가 자꾸만 쑥쑥 꽂혀 들어왔다. 그때마다 간신히 버티고 선 두 다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구멍 주름이 천천히 펴지며 안쪽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삽입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페니스의 크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어마어마한 부피감이었다. 이러다가 목 끝까지 닿아오는 건 아닌가 싶은 터무니없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아득한 팽만감이 사지를 비틀었다.
그러다가….
“악!”
차무겸이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그 순간 반쯤 파고든 페니스가 완전히 내 안을 장악하고 들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부위가 사특한 성기의 대가리와 부딪쳐 낯선 존재감을 깨웠다. 좁디좁은 안을 억지로 벌려 꾸역꾸역 파고들었으니 나에게 전해지는 압박감이란 심히 고통스러웠다.
“흐으으, 흐….”
나는 거의 흐느끼다시피 굴며 몸을 늘어뜨렸다. 차무겸은 그런 나와 달리 멀쩡히 서서 힘이 바짝 들어간 엉덩이를 조금 더 잡아 벌렸다. 어디선가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아, 아아, 벌리지 마. 아파, 응, 아프다고…!”
“존나 쫀득거리네…. 내 거, 후, 들어간 거 느껴져?”
차무겸이 눈물로 얼룩진 내 눈가를 혀로 할짝거리며 물었다. 대답할 정신도, 그 상스러운 언사에 혀를 내두를 새도 없었다. 그저 짧은 텀의 심호흡으로 내 나름대로 통증에 적응하려고 애쓰기 바쁜 시간이었다.
“하, 흐으… 아!”
차무겸이 밀도 있게 차오른 살점 사이에서 성기를 조금씩 뺐다가 엉덩이가 요동칠 만큼 격렬히 부딪쳐왔다. 그의 어깨만 간신히 잡고 있던 나는 발작하듯 떨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파! 아파… 하지 말라고, 으, 응, 흑…!”
“…….”
“빼, 얼른. 무겸, 하읏, 무겸아… 지금이라도….”
“빼긴 뭘 빼. 여기에 좆 꽂을 날만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녀석은 마치 벌을 주듯 대차게 아랫도리를 튕겼다. 안쪽을 후끈하게 긁고 나간 것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차무겸의 두 손이 나의 볼기짝을 쥐어 단단히 안아 올렸다. 몸이 살포시 허공으로 뜨며 내부로 꽂혀 드는 중압감이 배가됐다.
나는 자지러지게 울며 고개를 저었다. 연신 아프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건 기필코 엄살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이 방에 풍기는 피 냄새는 전부 김형준의 머리통에서 쏟아진 피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겼는데, 그러기에는 나의 아래를 꿰뚫은 격통이 만만치 않았다. 더하여 그가 엉덩이를 잡아 벌려 회음을 늘릴 때마다 따끔따끔한 게 그 부분에 상처가 난 걸지도….
“아읏! 윽!”
“예쁜 말 안 할 거면 그냥 입 다물어.”
“흐, 제발, 무, 아, 아아…!”
차무겸은 사람 하나를 온전히 든 상태로 허리를 잘도 움직거렸다. 그는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리며 도리질을 하는 내 얼굴을, 혼탁하고 몽롱한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가 울면서 애원하니까 꼴려….”
그건 결코 분위기를 타 뱉는 말이 아니었다. 정신을 아득히 점멸시키는 잔혹한 말 뒤로 구멍 속에 꾹 박힌 살덩이가 더 커지려는 것처럼 흉포하게 꿈틀댔다. 헉, 내 입에서 목구멍이 조여드는 기겁이 터졌다. 나는 다급히 그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무, 흑, 무겸아. 그럼 내, 내려줘. 나 너무 아, 흑, 아픈데….”
“왜… 지금 보기 좋은데.”
“아프다고. 나 진짜 아파….”
그간 어지간한 통증에는 죄다 노출이 되어본 바이기에 참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가랑이 사이, 함부로 내보일 길이 없는 성기가 무참히 침습 당한 아픔은 그런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쑥 들이찬 페니스가 속을 빠듯하게 긁는 바람에 자꾸만 오금이 저릿했다. 당장 어디든 등을 대고 눕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정말 기절할 것 같아서….
차무겸이 다행히도 이번 부탁은 들어주었다. 그러나 결코 내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기절한 양 축 늘어진 김형준의 머리가 있는 쪽이었다. 나는 싫다고 한차례 발버둥을 쳤지만 내 발목을 쥐고 활짝 벌린 차무겸이 허리를 방만하게 쳐올리는 순간 모든 상념이 희끄무레하게 사라졌다.
“흐으응…!”
차무겸의 눈동자가 채신없이 벌어져 그와 아랫도리를 치대는 나의 가랑이 사이로 꽂혀 들었다.
“사은아… 아픈 거 맞아? 걸신들린 것처럼 빨아재끼는데.”
구멍이 그의 성기에서 나오는 물인지 내 아래에서 새는 물… 혹은 피인지 모르겠는 무언가로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그에 따라 점성이 생기며 조금이나마 움직임이 윤활해졌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조금이나마’지, 여전히 나에게는 버겁기 그지없었다. 삼켜내는 호흡은 숨이 아닌 고통 같았다.
“끕, 흣, 아, 좀… 그만…!”
“하아, 귀두 오물오물 씹는 거 돌아버리겠네. 씨발, 왜 이제야 따먹었지.”
차무겸은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귀가 희롱당하는 수준의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나를 짓뭉개는 데에 여념이 없는 걸 보니 말이다.
나는…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반사적으로 신음하면서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까지도 현실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이렇게 끔찍한데도 그 현실감을 뚫을 정도의 아득함이 꿈결처럼 인지됐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 꿈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보다 안락함이 배는 컸던 차무겸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옷자락 하나 벗지 않은 채 성기만 내놓고 비비는 이 꼴이 결코 우리를 전과 같은 궤도로 이끌 수 없음을 잘 안다는 증거였다. 한쪽의 의사만 존재하는 섹스로 말미암아 우리 사이에 그려진 선은 흐지부지 흐려지다가 끝내 불쾌한 모양새로 지워졌다.
차무겸의 손이 나의 머리맡을 짚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정사의 흥에 취하여 일렁이던 시선이 첨예하게 변모해 있었다. 그것이 혼탁하게 흐려진 나의 동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무슨 생각 해?”
그건 성기가 깊숙이 꽂혀 들어와 헐떡대는 와중에도 등줄기에 우둘투둘한 소름을 자아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별안간이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둔탁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냉수라도 착 부어진 양 퍼뜩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차무겸이 문을 잠갔나? 자각자각 어질러진 나의 마음이 위태로이 기울었다.
“차, 무겸, 문, 문… 아, 앗…!”
“문 왜.”
“문, 흑, 잠, 잠갔어…?”
“몰라.”
불확실성과 두려움은 일란성 쌍둥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마음속에 먹구름처럼 차오르는 두려움에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런 내 불안정한 심리를 눈치챈 듯 차무겸이 실실 웃었다. 손가락 끝이 움푹 들어간 오금 안쪽을 부드럽게 긁었다. 그가 움켜쥔 오금을 조금 더 높게 고쳐잡았다. 거기서 조금만 더 힘을 실으면 내 무릎과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을 정도였다.
“바깥에, 소리 들리면, 하아, 누구 하나는 들어오겠다. 그치.”
“으, 응, 싫….”
“그럼 우리 떡치는 거 다 보겠네…?”
까슬한 음모가 회음을 근질근질하게 긁을 정도로 깊숙이 쑤셔 박은 차무겸이 안쪽에서 나른히 문질러지도록 허리를 둥그렇게 돌렸다. 나는 배 속에 번지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발가락을 쥐락펴락하며 문과 그를 불안하게 번갈아 보았다.
“사실 나는 우리 이러고 있는 거 보여도 좋지만… 사은이 넌 싫어할 것 같으니까.”
“흡, 아흥…!”
“안 들키게 잘 참아 봐.”
이윽고 차무겸이 허릿심을 실어 퍽퍽- 피스톤질했다. 오금을 고쳐잡아 자세를 더 진득하게 맞물린 건 요란한 방아질을 위한 수작일 뿐이었다. 나는 폐부에서부터 고여 오르는 날 선 교성을 참기 위해 죽기 살기로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으로 얼얼한 내벽이 엉망으로 짓이겨지고 있었다. 안쪽을 후려치는 힘에 맞추어 전신이 찡하니 울렸다. 아래에서 대체 뭐가 흐르는지 철퍽철퍽대는 소리가 끝없이 귀를 울렸다.
차무겸은 혀로 입술을 느릿느릿 축이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고 덜덜 떠는 나를 끈질기게 주시했다. 아차 하는 틈에 깊이 꿰뚫리는 감각에 나는 물고 있던 입술을 놓쳤다. 고작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아아!”
한번 어긋난 입가에서 교성이 산발적으로 튀었다. 헤벌어진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 무엇도 거머쥐지 못했다. 제대로 신음을 참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입술을 지키지도 못했으니. 팡팡 쳐올리는 힘에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차무겸이 혀를 내어 그런 내 얼굴을 이리저리 핥았다. 결국 종착역은 입술이었다. 꿰뚫린 아래처럼 혀가 입 안을 벌리고 파고들어 점막 이곳저곳을 누볐다. 혀를 빼내고도 차무겸은 입술을 입꼬리에 붙인 채로 살근댔다.
“너 신음 소리 진짜 듣기 좋다… 막 앙앙대.”
“흑, 흐응…!”
“더 해 봐. 누구 들어오면, 후으, 내가 눈알 후벼 팔게.”
“으, 그냥… 빨리, 아, 끝, 끝내줘….”
“끝내? 뭘 끝내는데?”
맥을 못 추는 나와 달리 차무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신명 나게 내 안에서 자맥질을 했다. 요령이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무 방향으로나 찌르고 들어오는 탓에 나는 도무지 이 추삽질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배 속을 저미는 듯한 고통이 초 단위로 몰아쳤다.
“이거, 으, 아, 앗, 하읍…!”
“귀엽게, 섹스라고 말도 못 하냐….”
차무겸은 제가 말을 꺼내놓고서 현실 감각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개기름 같은 정욕이 그 위를 맹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찌나 노골적인지 일견 징그러울 정도였다. 이윽고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붙이며 낮게 소곤댔다.
“사은아… 우리 지금 섹스하고 있는 거야.”
“흑, 흡, 아응… 응…!”
“사실 난 우리가, 흣,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너 처음 봤을 때부터, 매번, 생각했다고.”
철썩철썩. 동그랗게 올라붙은 고환이 활짝 벌어진 회음부를 끝없이 때렸다. 사지를 아우르는 모든 감각이 통각과 연결된다. 머릿속에 손 하나가 들어와 뇌하수체를 헤집어대는 듯했다. 언뜻 토기가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흔들리는 시야는 조금만 돌아가도 널브러진 김형준을 담아냈다. 새빨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곁에 둔 채로 임하는 섹스는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공포 영화도 차마 이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거품 맺힌 거 봐… 씹물 때문에 그런가?”
“흐으응, 으으…!”
차무겸이 바닥을 휘젓는 내 팔을 끌어다 제 어깨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스퍼트를 조금 더 높였다. 박자와 힘이 한 단계 상승하며 몸이 흔들리는 게 한층 더 격렬해졌다. 거대한 몽둥이를 문 엉덩이가 정신 사납게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꽂히기를 반복했다.
차무겸의 머리통이 내 가슴께에 닿았다. 녀석은 젖꼭지가 있는 부근을 입술로 부드럽게 비볐다. 꼭 빨아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라도 하는 듯한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다. 나는 바들바들 경련에 떨며 허리를 깊게 휘었다. 차무겸의 손바닥이 그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오물쪼물 조이는 아래를 연방 찍어 내렸다. 뱃전이 징징 울리는, 아프고 자릿자릿한 감각이 난잡하게 퍼졌다.
머리가 지나치게 어질거렸다.
술 한 잔 걸치지 않았으니 이건 현실이 깨부숴진 충격으로부터 기인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를 깔아뭉개는 몸 아래에서 신음하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후….”
차무겸은 구멍 안쪽 깊숙이 음경을 쑤셔 박은 채로 허리를 털었다.
탈력감에 가까운 사정감이 머릿속을 몽롱하게 녹였다. 하아, 씨이발. 이런 느낌이구나. 뒷골이 찡하니 울릴 정도로 환상이었다. 그는 왜 그간 친구들이 여자와의 하룻밤에 목을 매며 죽고 못 사는지 깨달았다.
차무겸은 그대로 몸을 숙여 늘어진 사은의 뺨과 목덜미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별안간 따끔거리는 게 느껴져 살펴보니, 팔뚝 부근에 손톱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사은이 발버둥을 치다가 낸 것이었다. 어떤 상처는 얕고, 또 어떤 것은 피가 비칠 만큼 깊숙이 베인 상태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모든 게 사은을 확실히 가졌다는 증거밖에 더 되나.
“사은아.”
차무겸은 눈을 감은 그녀를 부르며 뺨을 탁탁 두드렸다. 사은은 첫 번째 사정 직전 기절했다. 그는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 듯 파리하게 질린 그녀의 뺨을 쪽쪽 빨았다. 뽀얀 살결이 찹쌀떡처럼 단맛을 내는 듯도 했다. 첫 사정을 하면 멈추려고 했는데, 제 좆을 쥐어짜는 안이 극락에 가까울 정도라서 좀처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로부터 두 번은 더 사정에 임하도록 허리를 정신없이 튕겼다. 사은은 정신을 놓은 채로 흔들리는 몸을 내어놓기만 했다. 섹스는 분명 둘이 하는 행위인데, 방 내부에는 차무겸의 나른한 신음만 떠돌아다닌 지 한참이었다.
그는 깨물리고 짓물러져 기어이 피를 비치는 사은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점액질과 핏물이 애매하게 뭉쳐져 연분홍 빛깔을 띠었다. 그는 사은의 두 다리를 감싸 안은 채로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아직도 발기가 풀리지 않아 핏줄이 팽창해 있는 페니스가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아쉬운데….
빼기가 아까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귀두관이 걸쳐질 만큼 빼냈다가 다시 매끄럽게 진입했다. 이미 한차례 싸지른 정액으로 내벽은 거품에 가져다 문지르는 것처럼 보드라웠다. 자궁을 칠 정도로 깊이 밀어 넣자 기절한 사은의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렸다.
“아, 존나 귀엽다.”
기절한 채로도 느끼는 모습이 뇌리에 쾌락을 직격으로 꽂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좁아터진 방에 사은의 체액과 체향이 떠돌아다니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여기 집주인 새끼가 그거에 발정이 나 좆 잡고 자위라도 하면 어쩔 건데. 사은으로부터 유발한 것이라면 체액 한 방울, 체향 한 자락까지 전부 다 저만이 거머쥐어야 했다.
기실 여기서 일을 치를 생각은 아니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공들이고 있었는데…. 차무겸의 언짢은 시선이 반대편으로 널브러진 김형준에게 가닿았다.
그는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 성기를 빼 대강 닦고 매무새를 갈무리했다. 바닥에 떨어진 사은의 속바지를 주워다가 흠뻑 젖은 가랑이 사이를 닦아주고 제 셔츠를 입혀 안아 올렸다. 방을 나가기 전 휘늘어진 김형준에게로 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밟았다.
“깬 거 다 알고 있거든. 관음증 변태 새끼야.”
세 번의 사정에 가까스로 멈춘 건 저기 드러누운 김형준의 탓도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양껏 숨죽이고 있었던 듯한데, 애석하게도 손가락을 움찔대는 게 들통나버렸다. 차무겸이 마지막으로 사은의 안에 파정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사실 저번부터 패고 싶었는데, 네가 알아서 맞을 짓을 하더라고.”
차무겸은 조금 전 김형준이 사은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발힘에 무게감이 더욱 실렸다.
“형준아… 오늘 나 동정 뗐으니까 이쯤에서 봐주는 거야.”
“…….”
“다음은 없어. 한 번만 더 사은이한테 껄떡대면….”
어떻게 하지.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삼켜진 뒷말에서 그 무자비한 일면을 어렵지 않게 들여다보았는지 김형준의 손가락이 아까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오늘 일, 함부로 입 털고 다녀도 마찬가지인 거 알지?”
“…….”
“아, 나 동정 뗀 건 소문 내도 상관없고.”
간결하게 말을 마친 차무겸은 품 안의 사은을 어르듯이 조심스레 고쳐 안고는 문을 열고 나섰다. 아직도 야외 파티가 한창인지 집 안은 썰렁했다. 차무겸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저와 사은만의 은밀한 파티를 벌일 생각이니까. 그 기분에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계단이 있는 쪽으로 발을 뻗는데 돌연 어둠 속에서 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네.”
그는 제 얼굴과 품에 안긴 사은을 번갈아 보는 한우현에게 어깨 너머의 방을 턱짓했다.
“안에 있는 놈 좀 치워줘. 부탁한다.”
“김사은 왜 이래?”
곧장 계단으로 향하려던 걸음이 뜻밖의 장애물에 걸려 멈춰 섰다. 짙게 내려앉은 암흑의 장막 속에서 차무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거슬려.”
뚜벅뚜벅 다가오던 한우현이 그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알지?”
“.......”
“요즘 너도 거슬린다고.”
조금 전의 건조함이 무색하게 거칠고 사나운 기류가 발치로 넘실댔다. 한우현은 차무겸의 품에 안긴 사은을 보다가 아랫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저 꼴 되기 싫으면 적당히 해.”
문이 닫혀 있기에 그가 가리키는 ‘저 꼴’이 무얼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영 좋지 않은 모습일 건 자명했다. 지금껏 겪어온 모든 경우가 그랬으니까. 암영에서 코를 부러뜨렸다는 웬 남자애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 때 사은에게 치근덕거린 동급생 남학우,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대학교 선배… 등등. 아마도 김사은이 알고 있는 케이스는 개중 절반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 차무겸은 제 심기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우는 데에 아주 유능했다. 그것도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한우현은 그에게 안긴 사은의 다리 사이로 흐르는 질척한 백탁액을 희미한 눈길로 응시했다. 차무겸은 그의 눈길이 사은에게 닿는 것조차 싫은 양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너른 등판은 조금씩 어두움에 잠겨갔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