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7화 (7/24)

7장.

톡톡.

책상 칸막이를 두드리는 소음에 얼굴을 들었다. 동기, 가연이가 손을 입가에 대고 무언가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커피를 사러 교내 카페에 가자고 하는 듯했다. 난 구석에 놓아둔 핸드폰 홀드 버튼을 눌렀다. 어느새 오후 10시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잠시 시간을 보다가 가연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리끼리 갔다 올게.’

나처럼 재수를 하여 1년 늦게 입학해 친구가 된 가연이가 입 모양으로 전하는 말에 끄덕거렸다. 무어라 알 수 없는 제스처를 잇따라 취했는데 대충 간식거리라도 사 온다는 뜻 같았다. 커피가 별로 당기지 않아서 나가는 게 귀찮았던 내겐 고마운 호의일 따름이었다.

엷은 미소를 지어주자 가연이가 손을 흔들며 다른 동기들과 함께 자율학습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나는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영어가 꼬부랑 글씨처럼 빽빽하게 새겨진 전공책과 노트를 나란히 두고 핵심이 되는 문장을 따라 옮겨 썼다. 샤프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삼면으로 둘러싸인 책상을 타고 은은하게 퍼졌다. 가연이의 질문으로 인해 깨졌던 집중력이 금세 다시 차올랐다. 오늘치의 몫을 끝내기 위해 눈이 빠지도록 영문자열을 읽어내리던 차였다.

지이잉.

한편에 놓아둔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단단하게 밀집된 집중력 사이에 기어이 균열을 일으키는 소음이었다. 멈칫한 나는 주저하다가 핸드폰을 두드렸다.

[사은아]

[담배가 없어]

달랑 도착한 두 개의 메시지에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 모난 마음이 들어 핸드폰을 쓱 뒤집었다. 못 본 체라도 하는 것처럼. 간신히 되찾은 집중력을 방해받았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뒤집어놓은 핸드폰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마치 핸드폰, 아니, 메시지를 보낸 이의 눈치를 살피기라도 하듯이. 애써 책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신경은 저 네모난 요술 상자에 꽂힌 지 오래였다.

결국 샤프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근처에 편의점 없어?]

비뚤어진 마음을 담아 액정을 꾹꾹 눌러 보냈다. 연락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답은 핸드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왔다.

[응]

간결한 어투가 나른한 목소리를 연상시켰다.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렸다. 오늘, 친구 누구 생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분명….

[클럽이라며. 주변에 있을 거야. 한번 찾아봐]

진동을 아예 무음 모드로 전환한 나는 핸드폰을 뒤집어놨다. 그리고 샤프를 다시 공책에 가져다 댔다. 사각사각, 녀석이 예쁜 필체라고 칭찬을 했던 영어가 길게 길게 이어져 나갔다. 문단 구조를 나누기 위하여 단어 사이 빗금을 싹 긋는데 왠지 모를 초조함이 목 뒤를 간지럽혔다.

기실 연락이 온 시점부터 이후의 계획은 이미 망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샤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뭉툭하게 튀어나온 샤프심이 툭 부러졌다. 노트 위로 지저분한 흔적이 남았다. 그것을 필통에 넣으며 핸드폰을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어 올렸다.

[네가 사다주는 거 피우고 싶은데]

문자 속에는 다섯 살배기의 투정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펼쳐놓은 전공책과 지금 시간과 핸드폰 속 내용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핸드폰을 내려놓고서 책과 필기구를 정리했다.

가방을 메고 자율학습실을 나서며 카페로 향한 가연이에게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닦달을 들은 시점부터 내게는 시한폭탄이 하나 달린 것과 같았다. 그 시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기 위해 버스를 생략하고 과감히 택시를 잡았다. 도착지를 입에 올린 나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이미 누군가는 잠자리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늦은 저녁,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성지는 한낮처럼 바글바글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편의점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며 건성으로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하던 남자 알바생은 곧장 계산대 앞에 와 서는 나를 보고 핸드폰을 화들짝 내렸다. 이후 넋 나간 얼굴을 해 보이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편의 담배 진열대를 살폈다. 무얼 애용하는지 알지만 바라는 대로 따라주고 싶지 않았다.

“담배 하나 주실래요?”

“어떤 걸로….”

“아무거나 주세요.”

이런 주문은 처음인지 알바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지않아 그는 중간층에 있는 것을 하나 빼 들었다. 남자 알바생은 고용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지 행동이 굼떴다. 무엇보다 계산을 하면서도 자꾸만 내 얼굴을 힐끔거리는 행동이 유독 거슬렸다. 그게 못내 불편한 와중에도 혹시나 그사이에 다른 연락이 온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핸드폰을 끊임없이 살폈다.

“여깄습니다.”

거스름돈과 담배를 건네받은 나는 급히 편의점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세요!’ 하고 외치는 알바생의 모습이 건성으로 반기던 처음과는 판이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날씨는 제법 싸늘했지만 이곳은 한여름의 폭염처럼 후끈후끈했다. 사방팔방에 자리한 네온사인에 머리가 아팠다. 처음에는 어디에다가 눈을 둘지 모를 심정이었는데 이 짓도 여러 번 하니 이제 무덤덤했다.

바지런히 걸어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도달했다. 실내에 틀어놓은 노래가 어찌나 큰지 두 발을 디딘 땅이 미세하게 둥둥 울리고 있었다. 안쪽에 선 대기줄을 지나 지하 주차장 쪽으로 빠졌다. 그러자 입구 쪽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박승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소리에 고개를 든 박승원이 반색을 표하며 내게로 다가왔다.

“또 학교에 있다가 왔지? 미안해.”

“아냐, 오빠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나는 고개를 젓고는 가방에 넣어둔 담배를 꺼냈다. 그 담뱃갑으로 눈을 내렸다가 들어 올린 박승원이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것만 봐도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떨떠름할 게 뻔한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나 들어가기 싫어.”

“알잖아. 무겸이는 네가 직접 가져다주는 거 좋아해.”

박승원은 달래는 듯한 태도로 나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알고 있었다. 그냥, 말이라도 한번 해본 거다. 혹시 오늘은 조용히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피로한 눈가를 비비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누구 와 있어?”

“뭐… 거의 다.”

박승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며 말했다.

벌써부터 동물원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 꼴이 된 기분이었다. 좀이라도 쑤시는 것처럼 사지를 뒤틀게 된다. 박승원 없이 나 홀로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이대로 고장 나버리기를 바랄 정도로 가기 싫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하여 박승원이 누른 층에서 멈춰 섰다. 열린 문 너머로 내려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길을 걸었다. 난간 형식으로 이루어진 복도 아래로 펼쳐지는 현란한 사이키 조명과 앰프 스피커의 웅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슬쩍 내려다보니, 세상에 이렇게나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이 많은가 싶을 만큼 1층은 인산인해였다.

“어?”

불현듯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거기에는 제법 낯이 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김형준이었나?

“차무겸 하인이네.”

그는 다름 아닌 차무겸의 무리 중 하나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문태욱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질이 나빠 보이는 인상이었다.

“차무겸 하인?”

김형준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는 낯설었다. 오늘 처음 본 이가 김형준의 말에 의문을 표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형준은 담배를 꺼내 삐딱하게 입에 물며 말했다.

“하인, 꼬붕, 시다바리, 따까리… 뭐 별명이야 많지.”

아까부터 고막을 찢을 듯 들리던 노랫소리가 하필이면 잠깐 끊긴 타임이라, 그 말은 몹시도 선명하게 귀를 뚫었다.

“뭔 소리야?”

김형준은 함께 있던 남자를 버려두고 내게로 훌쩍 다가왔다.

“안녕? 오늘도 왔네? 이름이… 김사은? 맞나?”

나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김형준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빙글빙글 웃어대는 태도가 기분 나쁜 조소를 연상케 했다.

“무겸이 보러 왔어?”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그 대답을 해주기 위해 입을 여는 것조차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눈이 아파지는 휘황찬란한 조명과 달팽이관을 일정하게 때리는 소음, 거기에 차무겸의 골치 아픈 지인이 겹쳐지면 나의 하루는 엉망진창으로 피곤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직 제대로 된 건 시작도 안 했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물었다.

“차무겸 어디 있어?”

“따라와.”

김형준이 웃으며 앞장섰다. 그는 룸 형식으로 이루어진 복도로 들어섰다. 이렇게 은밀한 구간만 나오면 움츠러드는 나와 달리 김형준은 여유로운 태세를 보이며 걸었다. 차무겸과 같이, 태생적으로 높게 태어난 이들의 특성이었다.

이내 그가 제일 안쪽에 위치한 룸의 문을 열었다.

내부는 뒤엉킨 인파로 소란했다. 나는 당당하게 들어서는 김형준의 뒤를 따라 발을 안으로 디밀었다.

“무겸아! 누구 왔게.”

나를 볼 때는 기분 나쁘게 실실 쪼개던 김형준이 과도하게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꽤나 많은 머리가 모여 있어서 소란스럽기 그지없던 내부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룸 내부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뚫려 있어서 조명이 사정없이 내리쬈다. 그게 시야를 아릿하게 찌르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사이, 무언가 내 손을 홱 가로챘다.

놀란 내가 토끼눈을 해 보이는 것과 동시에 김형준이 나를 끌고 테이블 근처로 다가갔다. 그제야 조금쯤 맑아진 시야로, 상석 가까이에 앉은 차무겸을 발견했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펼쳐지는 이목구비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냈다. 검은 레더 재킷에 흰 티를 받쳐 입은 차무겸은 이 모임 속에 군림한 왕 같았다.

이런 일이 하도 자주 있다 보니 차무겸에게로 가는 길이 자연히 열렸다. 이목 역시도 집중됐다. 속에서부터 돋아난 불쾌함이라는 가시가 목구멍을 콱콱 찔렀다. 나는 김형준에게 붙잡힌 팔을 비틀어 빼낸 뒤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부터 손에 꾹 쥐고 있던 담뱃갑을 차무겸에게 내밀었다.

“자.”

주위에서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걸 부러 무시하며, 얼른 받으라는 것처럼 담뱃갑을 흔들었다. 술을 꽤 마셨는지 표정이 살짝 풀린 차무겸은 원하던 담배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나를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대뜸 손을 뻗었다.

담배를 가져가리라고 예상했던 손은 그대로 나의 손목을 감싸 쥐어 제 옆자리에 앉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기도 했다.

“나 가야 해.”

“왜?”

“이거 주려고 잠깐 들른 거야. 그니까….”

차무겸은 귀담아듣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태도로 내 손목만 만지작거렸다. 그리 집요하게 확인하는 부분이 조금 전 김형준이 붙잡은 곳이라는 걸 한 박자 늦은 타이밍에야 깨달았다.

“무겸아, 누구야?”

여린 미성이 불시에 끼어들었다.

나와 차무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차무겸의 반대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셔츠에 바지, 그러니까, 이곳과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차림새의 나와 달리 몸에 착 달라붙으면서 어깨와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아슬아슬한 니트 원피스를 입은 여자.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라니, 차무겸의 새로운 여자친구였다. 나도 모르게 혀끝을 깨물었다. 얘 또 여자친구 있는 자리에서…. 벌써부터 골이 아프게 당겨왔다.

“응, 사은이.”

차무겸은 나의 우려심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소개했다.

“사은이? 친구야…?”

여자친구의 눈동자가 아닌 척 요동쳤다.

그래, 너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적어도 이 짓을 몇 번이나 당한 나와 차무겸의 지인들은 익숙했다. 저번 여자친구도, 그리고 저저번 여자친구도 이딴 거지 같은 식으로 마주친 전적이 있으니까. 또한 오늘의 자리가 끝나고 나면 차무겸의 새 여자친구는 내게 칼 같은 적대감을 세울 것이다. 그리될 것이라는 데에 내 손목을 걸 수 있었다.

“차무겸 암영인가, 거기 깡촌 내려갔을 때 만난 친구래.”

어느새 소파 저 끝에 걸터앉은 김형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아, 하고 탄성을 내뱉은 차무겸의 여친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한쪽으로 비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저 자신감 찬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에도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그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 버려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액정 위 숫자가 11로 변해 있었다. 이 망나니들이 파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낭패감이 깊게 스며들었다.

“그거….”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차무겸의 여자친구가 말을 걸었다.

“무겸이랑 같은 케이스야?”

그녀의 눈길은 내가 손에 쥔 핸드폰에 꽂혀 있었다. 아차 싶었다. 어차피 펑, 하고 폭발할 폭탄이지만 그 시기를 지나치게 앞당길 필요는 없었는데. 차무겸의 여자친구는 이 어두운 풍경 가운데서도 내 핸드폰 케이스가 차무겸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응, 예쁘지.”

차무겸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는 상황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말본새였다. 여자친구와 할 법할 행동을 다른 여자와 해놓고서 웃는 낯이 아주 번지르르했다.

주위에서는 이 상황을 하나의 유희거리처럼 관망하는 중이었다. 광대처럼 기이하게 올라간 입꼬리들은 덤이었다. 나는 손에 쥔 핸드폰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행동은 누군가의 사족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겸이 핸드폰 바꿀 때마다 김사은 거도 같이 바꿔줄걸? 맨날 강제 커플폰 만들잖아.”

“맞아.”

맞은편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 차무겸 여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안에 박힌 예리한 가시는 허공을 헤매다가 결국 내게 발사될 것처럼 와닿았다. 경각심을 인지한 반응. 라이벌로 의식하는 태도. 상황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 아주 짜증 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들이 나누는 대화가 사실이기는 했다. 차무겸은 심심할 때마다 핸드폰을 바꾸는데 그때마다 내 것도 같이 바꿨으며 언제나 같은 기종, 같은 색깔, 심지어 케이스를 쓴다면 그것마저 같은 걸 끼기를 고집했다. 나한테 ‘할래?’ 하고 의향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보면 바뀌어 있었다.

“아, 응. 예쁘다. 나도 하나 사주면 안 돼?”

당찬 요구였다. 그걸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주변에서 ‘오-’ 하며 질 낮은 호응을 보였다. 차무겸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여자친구를 응시하는 눈빛이 술기로 인해 얼근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내가 왜?”

“응?”

“내가 너한테 왜 사줘야 하는데.”

나는 눈앞에 있는 술을 입에 들이붓고 싶은 아뜩한 충동이 들었다.

“아, 아니. 예쁘다고 하길래….”

“사은이랑 해서 예쁜 거지.”

그럼 구토가 치민 척하고 여기에서 도망이라도 갈 텐데.

착실하게 꼬여가는 상황을 관전하는 나의 심중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주변에서는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당황한 차무겸의 여자친구, 당당하고 뻔뻔한 차무겸,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 이 사태를 관망하는 이들 속에서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따로 없었다.

차무겸의 이 못된 장난에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난 그렇다 치고, 여자친구는 영 면역이 없었는지 침침한 이곳에서도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그러니까, 여자친구를 두고 나와 특별한 관계라도 되는 양 구는 고약한 짓거리로 인해 말이다.

눈을 내리깔았다. 지나친 피로감에 눈가가 욱신거렸다. 또 다래끼가 도지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집에 상비해둔 다래끼 약이 간절해졌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 따끔거리는 듯 불편한 기류 가운데 폭탄의 시한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술자리는 그로부터 1시간가량은 더 이어지고서야 끝났다. 평소를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그래도 나름 일찍 끝난 편이었다.

룸을 나설 때에 차무겸 여자친구의 표정은 치욕을 당한 것처럼 경직된 채였다. 1시간 내내 차무겸이 들었다 놨다 농락을 한 결과였다. 누구에게도 유익할 게 없는 시간이었다.

그 한 시간 동안 내가 알게 된 거라고는 차무겸의 새 여자친구 이름이 윤다정이라는 것과 밝은 데서 보니 그 미모가 범상치 않은 수준이라는 것뿐이었다. 물론 후자는 그간 차무겸을 스쳐 지나간 여자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무겸아, 나 데려다줄 수 있어?”

그래도 윤다정은 용기가 가상했다. 나라면 이 기막힌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어질 텐데, 주차장으로 내려오자마자 차무겸의 팔뚝을 감싸 쥐며 그리 물은 것이었다. 우윳빛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진 걸 보니 취기가 부추긴 용기 같기도 했다.

그러나 차무겸의 농락은 룸을 벗어나서도 이어졌다.

“사은이 데려다줘야 하는데.”

나는 이번에야말로 급히 차무겸에게 말했다.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적어도 주차장으로 나온 지금은 룸보다 시선이 덜했기에 내 뜻을 관철하는 게 가능했다.

차무겸이 서서히 나를 돌아보았다. 흐려진 눈빛 속에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내가 이렇게 구는 걸 차무겸이 싫어하는 걸 알지만, 지금 윤다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야. 넌 다정이 챙겨야지…. 김사은은 내가 데려다줄까?”

누군가 불쑥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김형준이었다.

가끔씩 차무겸이 그리는 동공의 궤적은 묘한 소름을 유발했다. 누군가는 행동으로, 누군가는 말로, 또 누군가는 표정으로 드러내는 기백을 차무겸은 고작 눈알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잘도 표출했다. 녀석에게는 동년배의 아이들도 쉽게 넘어서지 못할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있었다. 김형준을 지그시 응시하는 현재의 태도에서도 느껴지듯이.

“너 사은이한테 관심 있어?”

잠이라도 오는 양 눈을 굼뜨게 깜박거린 차무겸이 김형준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늘어진 실타래처럼 나른하던 음성이 약간 달라졌다. 얼핏 듣기에 나른한 건 비슷하지만 이상하게 서릿발을 연상시켰다.

자기가 묻고서, 차무겸은 김형준이 답하기도 전에 픽 웃었다.

“어쩌냐. 사은이는 자기 좋아하는 남자 싫어하는데.”

그건 꼭 패자를 향해 보내는 비틀린 조소와 흡사했다.

이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 심경으로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차무겸은 성격상 주눅이 드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더하여 멀쩡한 분위기를 죄다 깨부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상해진 분위기를 헤집은 건 이만 차에 타라는 박승원의 채근이었다.

차무겸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손목을 붙잡고 차로 이끌었다. 윤다정의 눈이 맞닿은 그 부분에 길게 꽂혀 들었다. 저 시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걸 표출하는 것마저도 결국에는 윤다정에게 기만이 될 걸 알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솟아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차에 올라탔다.

“김형준하고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차가 도로로 매끄럽게 진입하는 순간 차무겸이 물었다. 슬금슬금 새는 숨결은 알코올의 향에 흠뻑 젖은 채였다. 창밖을 보던 내가 녀석을 돌아보았다.

“안 친해.”

“근데 너한테 말은 왜 걸어.”

“내가 어떻게 알아….”

“혼자 찝쩍대는 거야?”

“…몰라. 너랑 아는 사이니까 그랬나 보지. 네 친구들 다 그러잖아.”

“다? 또 누가 너한테 말 걸었어?”

가끔씩 차무겸과의 대화는 도돌이표 같았다. 분명 진행이 되고 있는데 끝에 다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착지가 없는 마라톤에 임하는 것처럼.

나는 맥없이 늘어지는 대화를 차단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꼴을 보기 싫은 것처럼 우악스러운 손길이 턱을 그러쥐었다. 반대편으로 휙 돌아간 얼굴이 차무겸 쪽으로 고정됐다.

“똑바로 대답 안 해?”

턱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악력이었다. 깜짝 놀라 차무겸의 팔뚝을 붙잡았다. 미간을 설핏 찌푸린 내가 ‘아파…!’ 하자 손힘이 조금은 약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을 함부로 돌릴 수 없을 만큼 굳건한 힘이기는 했다.

차무겸은 평소에도 이런 집요한 면모를 곧잘 보이지만 특히나 술을 마시면 그 성향을 숨기질 못했다. 코앞까지 들이댄 얼굴에 위태로운 기류가 짙게 뱄다. 눈을 굴리다가 룸 미러로 상황을 걱정스럽게 힐끔대는 박승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호흡을 고르며 차무겸의 손등을 감쌌다.

“아냐, 나한테 말을 걸었다는 게 아니라… 네 친구들 너한테 스스럼없이 말 걸잖아. 그거 얘기한 거야.”

차무겸이 나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조금 전만 해도 술기가 올라 흐리멍덩하던 홍채가 첨예하게 빛났다. 심장을 조여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차무겸의 손가락에서 힘이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나는 알알한 느낌이 그대로 남은 턱을 떨떠름하게 만지작거렸다.

“김형준하고 놀지 마. 걔 걸레야.”

“…….”

“치마만 두르고 있으면 좆 세우면서 사족을 못 써.”

차 속에서의 대화는 김형준을 향한 노골적인 비방으로 끝을 맺었다.

박승원이 모는 차는 내가 머무는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분명 이곳은 내가 사는 집이지만 늘 그렇듯 차무겸이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다. 어느새 술이 다 깼는지 녀석의 걸음걸이는 한 번의 비틀거림 없이 멀쩡했다. 룸을 나설 때만 해도 못 걷겠다며 나에게 몸을 실어왔으면서 말이다. 불행하게도 윤다정은 그 꼴불견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문 앞에 도착한 차무겸은 도어 록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벌써 머문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이곳은 아직도 내게 낯설었다. 그와 달리 차무겸은 이 집의 실소유자가 자기임을 아는 것처럼 휘적휘적 걸어 소파에 앉았다.

“물 좀 마실래?”

“응.”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게 영 심상치 않아 보여 묻자 냉큼 답한다.

나는 거실로 곧게 나아가는 대신 발을 틀어 주방으로 들어섰다. 하얀색 컵에 물을 따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것 중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차무겸의 돈, 차무겸의 물질로 채워진 것들이었다. 하다못해 이 오피스텔마저도.

그 깨달음은 가끔, 차무겸의 소유물 사이에 놓인 나마저도 그의 것이 되어버린 듯한 아찔한 착각을 일게 했다.

가득 채운 물잔을 건네주자 차무겸은 그것을 한입에 다 비웠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연신 꿀렁이는 걸 보다가 팔을 들어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댔다. 아까부터 클럽에서 맡았던 냄새가 계속 뒤따라온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술과 담배 냄새가 밴 모양이었다.

“나 씻고 올게.”

한번 자각하니 어서 빨리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온종일 책상에 앉아 있느라 진 빠진 몸이 피곤하다 아우성을 쳤다. 벌써 차무겸과 지낸 지 5년인 만큼, 녀석을 두고 샤워를 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머리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씻고 잠자리에 들고 싶단 욕구뿐이었다.

차무겸은 어느새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욕실로 향해 샤워기와 연결된 수도를 틀자마자 김이 포실포실 올라오며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예전에 수도꼭지를 아예 왼쪽에 치우치게끔 꺾어놔도 한 방울 보기 힘들었던 온수가 이곳에서는 유별날 것이 없었다.

실은 암영을 떠난 이후로는 이런 사치가 당연스러운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5년, 그리 적지 않은 시간임을 표하듯 암영의 기억은 아주 먼 일처럼 흐릿해졌다.

그사이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온 차무겸은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지원했다. 머물 수 있는 집부터 하다못해 용돈까지. 그가 내민 카드 하나면 어지간한 걸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솔직히 초반에는 자신의 돈이 아닌 부모님의 돈일 텐데 저렇게 펑펑 써도 괜찮은가, 싶은 염치없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차무겸의 집안은 차무겸에 한하여 모든 것이 수용되는 천국이었다. 녀석이 꾀죄죄한 암영 마을에서 데려온 보잘것없는 여자애 하나 후원하는 셈 치며 간이고 쓸개고 바치든 말든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다. 차무겸의 태도와 함께, 박승원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헤아려보자면 그랬다.

심지어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방학 때마다 녀석을 따라 해외까지 가는 형국이었다. 그 누구 하나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차무겸이 원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차무겸의 옆에 있을 정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다 챙겨입은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은 채 바깥으로 나섰다.

욕실로 들어가기 전 널브러져 있던 모습이 떠올라 자고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차무겸은 멀쩡히 일어나 통화를 하고 있었다. 더웠는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레더 재킷이 소파 팔걸이에 걸쳐져 있었다. 그것을 단정하게 개어놓고서 고개를 들었다. 흰 티에 감싸진 너른 등판이 그 안으로 오밀조밀 짜인 근육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네, 그럼요.”

그가 저렇게 온순하게 통화에 임하는 상대는 둘밖에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서울에 올라오고서야 차무겸이 국내 굴지의 재벌가 중 하나인 해운그룹의 후계자라는 걸 알게 된 바였다. 실상 그는 암영고 애들이 우스갯소리로 꺼내던 수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직접 전해 듣기로 저 몸이 그 유명한 삼대독자…. 나는 암영에 있을 적 사고를 일으킨 후 그에게로 쏟아진 염려를 그때가 돼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차무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승계와 관련하여 해운그룹 내부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는 거나 진배없으니 여러모로 안달을 낼 수밖에.

숙취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주무르던 차무겸이 대뜸 고개를 치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유리창의 반사를 통하여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한 눈빛이 오싹하게 느껴지는 건 유리를 타고 흐르는 윤기 때문인 걸까. 우두커니 서 있던 차무겸이 등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내 손목을 감싸 쥔 차무겸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내가 할게. 너 통화….”

차무겸은 내 만류에도 꿈적하지 않고 나를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결국 나는 애매하게 걸터앉아 있던 의자에 제대로 엉덩이를 붙였다.

“아뇨. 가야죠. 할아버지 또 저만 기다리고 계실 텐데.”

차무겸은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서 화장대와 이어지는 서랍을 익숙하게 열었다. 그 안에 든 드라이기를 꺼낸 그가 핸드폰을 고쳐 쥐며 말했다.

“네. 끊을게요. 이만 쉬세요.”

동년배의 아이들에게는 썩 발견하기 힘든 곰살맞은 구석으로 인사를 마친 차무겸이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화장대 위로 던졌다. 저러다가 고장이 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차무겸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핸드폰도 질린다는 이유로 갈아치우기 일쑤인 녀석이니.

그가 드라이기의 콘센트를 연결하는 걸 거울을 통해 지켜보며 머리를 꽁꽁 싸매던 수건을 풀었다. 곧이어 위이잉, 하는 소음이 귀를 찔렀다. 제 손바닥에 대고 따듯한 바람이 나오는지를 확인한 차무겸이 내게서 수건을 받아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려주었다.

푹신한 화장대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양 무릎을 끌어안고서 나른하게 풀어진 눈을 해 보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두피를 부드럽게 긁는 차무겸의 손길은 잠기운을 불러일으킬 만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머리 위에 요정이 내려앉아 무언가를 솔솔 뿌리는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처음으로 차무겸이 내 머리를 말려준 게 언제더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까마득한 일이라는 소리다. 차무겸은 나에 한하여 꼭 하는 행동이 몇 가지 있는데 머리를 말려주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숙취로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도 손만큼은 유연하게 놀렸다.

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즈음 드라이기 소리가 멎었다.

“집에 안 가?”

“가야지.”

대답과 달리 차무겸은 침대로 가 눕는 나를 쫓아왔다. 이불을 덮고 누우니 차무겸이 ‘핸드폰 어딨어?’ 하고 물었다. ‘가방 안에 있을걸.’ 하고 답하며 잠기운이 들러붙은 눈을 깜박거렸다.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난 차무겸의 손에는 내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꺼지는 게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차무겸의 등판이 널따랬다.

차무겸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손길로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전화기록부터 메시지까지 전부 하나하나 들어가 보기 시작했다. 나는 졸음에 가득 찬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어찌 보면 나의 사생활이나 다를 바가 없는 그것을 죄다 뒤집어 까보는데도 이토록 침착하게 굴 수 있는 건, 이러한 상황에 이골이 날 대로 났다는 방증이었다.

“한재희 남자야?”

“여자야….”

정정하는 답을 했으나 차무겸은 기어코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미성을 확인했는지 그는 통화를 성의 없이 끊었다. 중성적인 이름이면 닥치는 대로 확인하는 바람에, 저런 기이한 짓을 해명하는 건 언제나 나의 몫으로 남겨졌다.

한참 동안 핸드폰만 눈이 빠져라 보고 있던 차무겸은 이내 흡족할 만큼 탐구했는지 홀드 버튼을 누르며 핸드폰을 내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내일 수업 일찍 끝나지? 같이 밥 먹자. 데리러 갈게.”

“너 내일 공강 아니야?”

“맞아.”

“그럼 그냥 집에 있어. 귀찮잖아.”

차무겸은 공부에 특출난 타입은 아니었다. 못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제법 비상한 면이 있는 걸로 보아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성과를 거둘 법한데 영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런 녀석이 현재 한국대에 재학 중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입학하고 싶어 하는 꿈의 대학 말이다. 공부에 흥미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거길 입학했느냐 한다면, 교내에 매끄러운 잔디를 깔아주는 방식으로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전형적인 재벌가의 입학 루트였다.

처음에 차무겸은 나 역시도 그곳으로 입학시키려고 했다. 그가 뽐내는 재력은 맞닥뜨릴 때마다 새삼스레 놀라웠지만, 솔직히 이거야말로 아연해져 입이 떡 벌어졌었다. 그 위상 높은 학교에 차무겸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입맛대로 입학시킬 수 있는 정도라는 말인가. 손에 꼽히는 재벌가의 위력을 코앞에서 맛본 기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뻔뻔히 다 받아먹고 이제 와서 뭐가 그러느냐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마음속 한편에 차무겸에게 받은 걸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부채감이었다. 내가 무슨 수로 지금껏 차무겸이 해준 걸 갚느냐는 말이다. 아빠가 비 오는 날 쳐들어와 죄다 훔쳐 간 삼백만 원도 아직까지 제대로 갚지 못하는 판국에.

그럼에도 한국대 한 학기 등록금을 전해 들으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의식주와 관련된 다른 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지만 그래도 학교 정도는 고를 수 있지 않은가. 더하여 공부에 머리가 그리 유별나지 않은 내가 거기서 어떻게 성적을 유지하고 졸업을 하겠는가. 기껏 거액을 들여 봤자 나는 적응도 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나가떨어질 낙오자가 될 게 자명했다.

그리고 사실은… 재력이나 권력은 둘째 치고, 차무겸과 대학까지 같으면 정말 질식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몰아쳤었다. 그건 이미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수험생 시절만 돌아봐도 그랬다.

그래서 작정하고 버텼다. 차무겸과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이 문제를 두고 상당히 오랜 기간 냉전을 유지했다. 나와 녀석 모두 팽팽하게 맞섰다. 수능에 가까워졌을 때까지 그가 좀처럼 굽힐 태세를 보이지 않아서 나는 아예 수능을 포기했다. 어차피 지금의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망설임은 크게 없었다. 아무리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대학 입시를 위한 뒷배에 어느 정도 필요한 기준은 있을 터. 수능 점수가 아예 부재한다면 어떻게든 꽂으려고 해도 힘들 터였다. 그쯤 되니 차무겸이 먼저 꼬리를 말았다.

‘그래, 알겠어. 대신 내가 다니는 학교랑 가까운 곳으로 가.’

그리하여 1년의 재수 후, 내가 입학하게 된 곳은 근처 국립대의 영어교육과였다. 이렇게 불시에 핸드폰 검사를 하는 차무겸을 볼 때면 학교라도 갈라진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다고 한들 그의 이런 행동에 정면으로 반발한다거나 하는 건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암영을 떠나 서울로 온 나는 지난 5년간 분에 넘치는 호사 속에서 살았다. 차무겸과 함께 지내면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언제 몰아치든 한 몸 보전할 수 있는 튼튼한 집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 안락함과 어느 정도의 자유를 맞바꾼 셈이었다. 이 안락함을 유지하는 대신 차무겸에게 내 삶을 통제할 권리를 주었다. 애초에 이 자유 역시 차무겸이 만들어준 그늘임을 부정할 수 없기도 했다.

“가야겠네.”

머리칼을 말려주고, 핸드폰 검사를 끝낸 차무겸은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기 전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잠시 지분거렸다. 그것은 머리칼을 넘어 그 아래까지 만지작댈 것처럼 길게 이어졌으나 끝내 살갗에 닿아오지는 않았다.

함께 보내온 5년 동안 그랬다.

내가 차무겸 앞에서 스스럼없이 샤워를 하고 또 이렇게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이유.

“잘 자, 사은아.”

차무겸은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불을 껐다. 탁 하고 꺼지는 소등이 나의 뇌리마저 어둑하게 물들였다. 점점 닫히는 문을 보다가 등을 돌려 누웠다.

차무겸은 지난 5년간 내게 스킨십을 시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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