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가을은 좋은 계절이다.
봄은 따스해서 좋지만 징그러운 벌레가 너무 많았고, 여름은 폭염의 기승에 말할 것도 없이 싫었다. 겨울은 너무 춥다. 양극단에 선 여름과 겨울. 그 경계를 거니는 가을은 당연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계절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부드럽고 어떤 면에서는 씁쓸한 게 누군가의 취향을 저격했다. 이를테면 나라든지.
“그거 아닌 거 같은데.”
샤프로 공책을 쓱쓱 긁던 내 손이 멈췄다.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그어진 노트 위로 곧고 예쁜 손가락이 쓱 침범했다.
“여기 공식 꼬였네.”
“아, 그러네.”
나는 차무겸의 지적에 지우개를 들어 그 부분을 박박 지웠다.
우리의 관계는 어느새 초겨울에 접어들었다.
가을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계절인 만큼 시작과 동시에 끝을 본 느낌이었다. 아주 짧게 맺음을 지은 까닭에 아쉬움을 느낄 새마저 없었다. 단순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차무겸이라는 관용 속에 잠기는 시간이라 그렇게 후다닥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그날 이후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관두었다.
솔직히 깡패가 마을까지 드나드는 판국에 또다시 그런 위험에 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점장은 알게 모르게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시급을 올려주겠다며 회유했으나 푼돈 벌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연락을 달라는 말로 전화는 그럭저럭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후부터 차무겸네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솔직히 얘가 정말로 순전히 공부할 생각으로 날 부른 건가 싶었는데…. 나의 의심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무해질 만큼 차무겸은 순순히 공부에 몰두했다.
나와 그는 붉은 저택에 오면 소파 앞에 펼쳐놓은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같은 과목의 문제집을 펼쳤다. 차무겸은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실상은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고 보아야 옳았다. 지금처럼, 녀석이 모른다고 가져온 문제를 풀어주다가 내가 꼬이면 차무겸이 대신 알려주기 일쑤였다. 간혹 보면 푸는 법을 이미 아는 것 같은데 왜 물어보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몇 번 떠보듯 꼬집어 봤지만, 그때마다 차무겸은 실실 웃으며 ‘진짜 모르는데?’ 하고 대꾸했다.
정말로 차무겸이 모르는 게 아니라면 나와 공부할 필요는 없을 거다. 그럼에도 이 짓을 그만두지 않는 건 내가 차무겸에게서 공부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편의점에서 그 고생 하며 버는 돈이 얼마인지 알게 된 차무겸은 일일이 시급으로 계산하기 귀찮다며 그냥 한 달에 백만 원으로 퉁치자고 했다. 그게 퉁친다든가 하는 문제로 마무리를 지어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평소 지갑에 몇백쯤은 우습게 들고 다니던 걸 생각해보면 영 말이 안 되는 거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무엇보다도 몸이 편한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할 때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마을을 나서 몇 시간 동안 걸어가고, 거기서 몇 시간 동안 카운터를 지키고 -진상이 많지는 않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 집까지 바지런히 걸어 돌아오는 과정. 너무 피곤하니까 되레 잠이 오지 않는 고단함.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시작되는 일상. 코피가 터지거나 다래끼가 나는 게 습관이던 시절.
거기서 나는 체력으로 모자라 정신력까지 야금야금 깎여나가는 착각이 일었다. 착각일까? 그게 정말 단순히 착각이었을까. 아닐 테다.
난 분명히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차무겸이 내게 쓱 내민 새로운 알바는 당연히 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알바 도중에 꼬박꼬박 쓰고 있어야 했던 모자를 벗어도 되었고, 혹시나 문태욱 패거리가 드나들지는 않을지 매사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이 집에 오기 시작한 이후로 차무겸은 문태욱을 포함한 학교 아이들에게 함부로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 이마저도 나를 위함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 모든 게,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고 싶을 만큼 달콤했다. 매번 오르막길만 올랐으니 조금쯤은 평지를 걸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나를 꼼짝없이 적셨다.
샤프 끝머리를 입에 물고서 비문학 지문을 읽는데 테이블 한편에 그릇 하나가 놓여졌다. 잠시 부엌 쪽에 다녀온 차무겸이 가져온 것이었다. 고급스러운 양각이 새겨진 그릇 속에는 먹음직스러운 체리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몰랐는데 차무겸의 저택에는 상주하는 입주 가정부가 있었다. 그래서 영양소를 고루고루 챙길 수 있는 식사는 물론이거니와 공부를 하는 중에는 먹음직스러운 간식이 끝없이 대령됐다.
마카롱, 마들렌, 조각 케이크 등등. 그것은 약 두 달 전 차무겸이 새벽경 나타난 내게 건네준 코코아와 유사한 맛을 냈다. 혀가 아릴 정도로 단맛. 때로는 오늘처럼 상큼하고 달콤한 과일이기도 했다.
“그만할래.”
돌아온 차무겸은 옆으로 앉는 대신, 내 등 뒤에 놓인 소파로 가 풀썩 누웠다. 내가 누우면 턱없이 남는 소파지만 차무겸이 누우면 한쪽 팔걸이에서 반대편까지 가득 찼다.
예전에는 차무겸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 사지 곳곳에 가시가 박혀 드는 양 불편했다. 절로 몸을 뒤틀게 되거나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를 하려고 애쓰곤 했다.
그러나 두 달간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 이제는 조금쯤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지 이전만큼 거북하진 않았다. 그 증거처럼 나의 손은 차무겸이 놓고 간 접시 위 체리를 향해 서슴없이 뻗어졌다. 동그란 과일을 입에 넣고 꼭지를 똑 땄다. 물컹한 과육을 씹자 상큼한 과즙이 입 안을 적셨다.
“진짜 잘 먹는다.”
한참을 우물우물 씹다가 고개를 쓱 돌렸다. 팔걸이에 머리를 베고 누운 채 핸드폰을 두드리던 차무겸의 눈이 내 볼에 콕 박혀 있었다. 머쓱한 마음에 분주히 씹어 삼키던 저작 행위를 느린 속도로 바꾸었다.
“과일이 그렇게 좋아?”
“맛있잖아.”
어려서부터 식사 하나조차도 녹록지 않았던 인생인 만큼 과일은 사치품에 가까웠다. 미취학 시절, 엄마가 간혹 마을로 들어온 과일 트럭에서 사 온 귤이 생각난다. 가격이 저렴한 만큼, 안이 꺼멓게 썩어 있는 게 대다수인 떨이 판매였다. 그것조차도 벌벌 떨며 구매하는 엄마에게 멀쩡한 과일을 먹고 싶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사라지고서는 뭐, 마땅히 말할 사람도 없었고.
“바람 세게 부네.”
차무겸이 핸드폰을 가슴팍에 올려둔 상태로 창밖을 흘끔거렸다. 나의 시선이 그 방향을 따라 주욱 미끄러졌다. 한쪽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만들어놓은 거실은 채광이 훌륭했다. 지대 역시 높다 보니 하늘의 오색찬란한 변화를 그 어디에서보다 여유로이 관망할 수 있었다. 허름한 가옥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 속, 꺼먼 곰팡이가 낀 누릇누릇한 벽지나 보고 자라온 내게는 호사스러울 정도의 풍경이었다.
“차무겸.”
나는 석양으로 말미암아 벌거스름하게 물드는 하늘에 눈을 꽂은 채 입을 열었다.
“너는 여기 왜 왔어?”
차무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지루해서.”
모호한 답변이었다. 풍경을 담는 데에 여념이 없던 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고도 남을 만큼 아리송했다.
“지루해서 죽겠더라고.”
고작 고등학생밖에 안 되는 나이로 하는 푸념이라기에는 다소 무거운 감이 있었다.
“…여긴 안 지루해?”
“처음엔 지루했는데.”
“…….”
“이젠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차무겸은 내려둔 핸드폰을 들어 올려 한가득 쌓인 메시지 창으로 들어갔다.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액정을 두드리며 그가 잇따라 말했다.
“다행이야. 가기 전에 재밌어져서.”
“…가다니?”
“돌아간다고.”
띵띵거리는 핸드폰 효과음이 나의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지금 얘… 서울로 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나 흘리는 듯한 어투로? 별것 아닌 일처럼?
체리를 향해 뻗어진 손끝이 둥그렇게 말리고 입 안에 남은 과즙을 씹어 삼키는 움직임이 굼떠졌다.
“처음부터 1년만 있을 생각이었어.”
차무겸은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네 철의 변화를 겪는 1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 것이다. 아마 차디찬 겨울을 지나 봄이 돌아오는 것도 순식간일 테다.
그럼, 그때가 되면 차무겸은 더 이상 암영에 없겠구나.
당연했다.
차무겸은 암영의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었다. 차무겸의 모든 건 이곳이 아니라 서울에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하다못해….
차무겸이 나타난 순간부터 늘, 그가 언제든 훌쩍 떠나갈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복기하듯 담담했다. 차무겸은 고작 여기 묶여 있기에는 범상치 않았으니까. 그라는 인물을 담기에 암영이란 그릇이 터무니없이 좁았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건만….
속이 조금 이상했다. 욕심껏 집어먹은 과일이 뒤늦게 탈이 난 건지. 아니면 대체 이 싱숭생숭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황홀하게 차오르는 경치를 배경으로 삼고서 녀석과 보낸 두 달이 내게 알게 모르게 유의미하게 남아버린 걸까.
애써 문제집으로 신경을 돌려보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읽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지문이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만 가 봐야겠다.”
결국 문제집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꺼낸 내 말에 차무겸이 고개를 쓱 들었다.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문제집과 필기구를 넣은 가방을 메고 집 밖으로 나서니 이미 경호원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지난날 편의점에서 내게 돈봉투를 내밀었던 그 남자였다. 이름은 박승원으로 나와 차무겸보다 4살이 많다고 했다. 이 적적한 마을에 무슨 위험한 일이 있으려고 경호원을 따로 붙이기까지 했나 싶지만 궁금증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의문이 커질수록, 그저 차무겸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높고 고귀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똑똑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 온 후부터, 차무겸은 내가 돌아갈 때 저 남자를 꼬박꼬박 붙여주었다. 다행히 그날 이후로 금목걸이와 같은 깡패를 목격한 적이 없었고, 그 일로부터 벌써 두 달이나 지났으니 괜찮다고 했는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차로 데려다주기엔 거리가 짧기도 하거니와 좁은 골목길 특성상 정차가 어려워 박승원은 늘 걸어서 나를 데려다주었다. 정말이지 갖은 정성이 따로 없었다. 물론 박승원도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차무겸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두 달이라는 시간은 비단 차무겸과의 사이에서만 쌓아진 게 아니었다. 박승원과도 동시에 쌓여진 바였다. 처음에는 어색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던 시절을 지나 이제 안부 인사나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나누는 수준은 되었다.
“형, 이거.”
대문 앞에 서서 박승원과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어디론가 사라졌던 차무겸이 나타났다. 그는 손에 들고 온 쇼핑백을 박승원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무어라고 작게 속삭였다. 그사이 나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정말 모든 게 작게 보이네. 지난날 이곳으로 달려오던 나의 모습도 그렇게 개미처럼 보였을까? 이 붉은 저택은 너무 웅장한 풍경을 선사해서 언제나 쓸데없는 생각을 비눗방울처럼 피워냈다.
“잘 가, 사은아.”
차무겸이 손을 흔들었다. 열린 대문 틈으로 박승원이 먼저 나섰다. 그 뒤를 곧장 따르지 않고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데 그 묻고 싶은 게 뭔지를 모르겠고, 한편으로는 그냥 입을 딱 다물고 있고 싶기도 했다.
단지 한 가지, 지금 빙글거리며 웃는 차무겸의 얼굴이 어쩐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는 것.
그러던 중 차무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다. 녀석은 인사를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어, 현서야.’ 하고 전화를 받으며 등을 보였다.
나는 그게 바라 마지않던 인사인 것처럼 꿋꿋이 버티던 곳에서 발을 돌렸다. 대문을 빠져나왔는데도 차무겸의 가벼운 어조가 귓전을 맴돌았다. 바깥에서 박승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언덕을 내려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비좁고 구저분한 골목길에 좀체 적응을 못 하는 듯 보였던 박승원은 이제 잘도 나를 이끌었다.
“이거.”
우리 집 대문은 협소한 길목에서도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야만 나왔다. 박승원은 그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제동이 걸린 양 멈춰 서고는 했다. 오늘 역시 맡은 바 소임을 다한 그는 웬일로 바로 등을 보이지 않고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차무겸이 집을 나서기 전 그의 손에 들려준 쇼핑백이었다.
“무겸이가 전해달라고 하더라.”
차무겸은 박승원을 형이라 부르며 그에게 말을 놓았다. 두 사람은 돈으로 얽힌 갑을 관계치고는 사뭇 가까워 보였다. 얼핏 듣기로는 아주 어릴 적부터 봐온 사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렇게나 스스럼없이 구는 모양이었다. 차무겸의 금전 관련 사안 역시 전부 박승원이 도맡아 처리했다. 내게 월급 형태의 금액을 전해주는 것 역시도 박승원의 역할이었다.
박승원은 편의점에서도 그랬고, 다시 만난 후까지 내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4살이나 많은 걸 알고, 또 차무겸도 반말을 하는데 나에게만 높여서 말하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서 말을 놓아도 괜찮다고 수차례 말했다. 그는 매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말을 놓았는데 그건 이제 고작 사흘 된 일이었다.
박승원이 건넨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뛰어다녀도 무리가 없을 만큼 광활한 공간에 있다가 좁아터진 집구석으로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꿈에서 깨어난다. 단순히 깨어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바각거리는 균열이 일어나다가 끝내 예쁘지 않은 모양새로 산산이 조각나버린다. 돌아온 나를 반기는 적막이 그 느낌을 한층 더 고양시켰다.
이 집은 암영에서 내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오면 어항 속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나는 낡아빠진 앉은뱅이 탁자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다물린 사이를 벌려 안을 확인하는 순간, 눈동자가 싱그러운 적색으로 물들었다. 꽤나 묵직하기에 무어가 들었나 했더니 다름 아닌 체리였다. 커다란 바구니에 담아도 넘칠 듯한 양으로 담겨 있었다.
‘진짜 잘 먹는다.’
‘과일이 그렇게 좋아?’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차무겸이 내게 건넨 말이 떠올랐다. 체리를 한 움큼 쥐어 개수대 앞으로 다가갔다. 수도를 틀자 물이 졸졸졸, 시원스럽지 않게 흘렀다. 체리 하나를 뽀득뽀득 소리가 날 만큼 닦으며 조금 전 대문 앞에서의 장면을 반추했다.
‘어, 현서야.’
나를 챙기던 음성으로 차무겸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차무겸은 서울에 여자친구가 있고, 아직도 헤어지지 않고 잘 만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차무겸은 내 앞에서 여자친구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에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잘만 통화했고, 잘만 문자 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차무겸에게 내가 조금도 특별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되새겼다.
물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남은 아닐 테다. 남에게 이리도 신경을 쓰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유별나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특별’이라는 정의는 사사로우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깃들어야지만 성립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마음 정도가 존재한다든지.
차무겸과 나의 관계에 대한 명명은 단지 ‘친구’ 수준에서 그치리라. 서울로 돌아갈 거라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태도 역시 그에 한몫했다. 차무겸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우 한철. 암영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 그 기간 동안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일 테지.
손안에서 굴리던 체리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치아로 씹어 터뜨린 과즙이 입 안에서 물큰하게 터졌다. 아까처럼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체리를 꾸역꾸역 삼키며 옷장을 돌아보았다. 이제 더 이상 저게 차무겸에게서 받은 유일한 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음 받게 된 삼백만 원은 도통 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 놔두었고, 차무겸이 떠난다면 저걸 마땅히 돌려줘야 했다.
이제 남은 약 두 달. 차무겸을 보낼 준비를 해야 했다. 방류하는 계절처럼 이렇게 또 저렇게 스쳐 지나가는 연일 뿐이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뭘.
* * *
기말고사가 끝난 며칠 후였다.
중간고사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기말고사는 그것보다 아는 문제가 배로 나왔다. 쓸데없는 알바로 진을 빼는 일 없이 학업에 몰두한 결과였다. 특히나 차무겸이 내게 물었지만 외려 내가 그에게 설명을 듣게 된 파트에서 많이 출제가 되었다. 낯익은 단어와 문장의 조합을 발견할 때마다 이런 기분으로 공부를 하는구나 싶을 만큼 신경이 쭈뼛 서는 쾌감이 일었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암영에는 겨울비가 내렸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이 잎사귀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게 꼭 얼음 결정 같았다. 암영의 이로운 점은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자연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이었다. 어느 계절이 돌아오든 티 없이 맑은 공기가 곳곳에 내려앉아 마음을 휘감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산뜻한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퍽!
화장실에 들렀다가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거니는 도중이었다. 뒤에서 무언가 날아와 뒤통수를 강타했다. 꽤나 힘이 실린 타격에 속절없이 비틀거렸다. 비리고 불쾌한 냄새가 머리 근처에서 진하게 풍겼다. 축축하고 끈적한 감각이 그 뒤를 따랐다.
휘청댄 몸을 바로 세운 나는 더듬더듬 손을 들어 올렸다. 미끌미끌한 백색의 액상이 손에 묻어났다. 우유였다. 나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추락한 우유갑이 바닥에 질척한 흔적을 그려냈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수군거림이 불씨처럼 번졌다.
뒤를 돌았다. 시선의 끝자락에는 짝다리를 짚고 선 문태욱이 있었다.
“야, 거지.”
그럴듯한 상승선을 그리던 기분은 금세 고꾸라져 바닥을 쳤다. 아무래도 상한 우유였던 건지 젖은 머리칼과 발치에서 역겨운 냄새가 스멀스멀 퍼졌다. 문태욱은 나를 이따위 꼴로 만들고 잘도 입꼬리를 찢어 웃고 있었다.
“너 몸까지 대냐, 이제?”
이마를 타고 흐르는 우유를 소매로 닦아내며 문태욱을 노려보았다.
“뭐?”
“전예슬한테 들었어. 너 차무겸 집에서 나오는 거 봤다고.”
대체 이 황당한 소행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고민하던 사고회로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지했다. 혈관 속을 멀쩡하게 휘돌던 피가 차게 식었다. 문태욱은 마치 고함이라도 치는 것처럼 목소리를 키우고 있어서, 그 말을 주변에 퍼뜨리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주위 학생들의 숙덕공론이 이명처럼 고막을 괴롭혔다. 문태욱은 멈칫한 나의 반응에 확신을 얻은 것처럼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전예슬 말이 딱 맞았네. 너 차무겸 꼬셔서 한탕 해볼라고 완전 꼬리 살랑거린다며.”
문태욱이 뒤에 선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존나 걸레.”
저급한 비난을 입에 올린 녀석이 제 무리와 얼굴을 맞대고 키득거렸다. 딛고 선 바닥이 다시 물렁거리기 시작했다. 균형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어지는, 아찔한 느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했지만 사람이 너무나 많이 모여든 까닭에 몸이 경직됐다. 그렇다고 도망을 갔다가는 저 질 나쁜 말에 시인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행동을 취해야 눈 깜짝할 새에 나를 둘러싼 이 불길이 잦아들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퍽-!
낄낄대던 문태욱의 머리통이 날아온 무언가에 맥없이 꺾였다.
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놈의 발치로 나를 강타한 것과 같은 우유갑이 떨어졌다. 저열한 빛으로 물들어 있던 문태욱의 눈에 대번 가시가 섰다. 뾰족해진 눈동자가 저를 공격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매섭게 돌아갔다.
이윽고 그는 제 뒤편에 선 차무겸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태욱아.”
차무겸은 조금 전 우유갑을 던진 게 저인 걸 선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손목을 빙글 돌리고 있었다.
“뭐 해?”
나는 낭패에 가까운 기분을 느꼈다. 일이 착실히 꼬여가고 있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지금 순식간에 엉망이 된 이 상황에, 차무겸의 등장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너, 씨이발…. 나한테 지금 우유 던졌냐?”
차무겸이 모여든 무리를 헤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나에게 가까이 오는 대신, 문태욱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문태욱도 어지간한 장신이 아닌데 차무겸과 함께 있으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였다.
“너도 던졌잖아.”
차무겸은 태생적으로 여유로운 태도를 선보이며 상체를 수그렸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주는 어른처럼.
“넌 던져도 되고, 나는 안 돼?”
“차무겸!”
“그리고 씨발…?”
차무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한 바퀴를 굴렀다. 간단히 흘러나온 어투가 바닥에 깔리듯 은근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백을 양껏 품고 있었다. 그걸 나만 느낀 건 아닌지 문태욱의 어깨가 움칫 말려들었다.
“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
빙그르르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맴돌던 눈알이 문태욱에게 가닿은 순간, 문태욱이 한 발 물러났다. 난색에 젖은 낯빛으로 추측건대 저조차도 모르게,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행한 회피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등 쓸모없는 짓이었다. 차무겸이 양손을 교복 바지에 찔러넣고서 곧장 문태욱에게로 한 발 더 다가갔으니까. 조금이나마 벌어진 거리는 금세 원상태로 돌아갔다. 차무겸의 음영이 문태욱을 덮었다.
“나한테 욕했냐고.”
“…그, 그래. 씨발. 했다! 어쩔래?”
차무겸은 혀로 느릿하게 볼 안쪽을 쓸었다. 동그란 사탕이 들어가면 어울릴 법한 판판한 뺨이 느리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 상황을 가지고 노는 듯한 거만함이 몸소 전해져왔다.
“너네 그 집에서 뭐 했냐, 둘이? 떡이라도 쳤어?”
더듬더듬 물러나다가 어느새 벽에 등을 댄 문태욱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쩌렁하니 외쳤다. 그건 질문의 의도라기보다는 자신이 꺼내는 이야기를 주변에 떠벌리고 싶어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걸 눈치챘는지, 차무겸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로 피식 웃었다.
“우리? 공부했는데.”
문태욱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잘도 킥킥댔다. 온갖 기를 써서 임하는 비웃음이었다.
“공부는 지랄.”
“진짜야, 태욱아. 왜 안 믿지?”
“누가 믿어? 김사은 저 걸레가 너 하나 잡아서 인생 펴보려고 접근한 거 뻔히 아는데.”
주변에 귀가 많았다. 그 많은 이목 속에서 문태욱은 상스럽고 저속한 의구심을 국수 가락처럼 길쭉하게 뽑아냈다. 주위의 수군거림이 예고도 없이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미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어쩐지 저번에 전예슬이 쟤한테… 거기서 뭐 했대…. 차무겸 집…. 그 언덕 위의 집?… 거기서 둘이…. 아까 문태욱이 나오는 거 봤다고….
누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테이프를 귓전에다 대고 틀어놓은 것만 같았다. 속이 불쾌하게 젖어간다. 사방팔방에서 뻗어져 나오는 불필요한 관심과 거북한 눈길이 속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토록 요란한 소음을 뚝 멎게 한 건, 차무겸의 다음 행동이었다.
“아악!”
차무겸이 문태욱의 정강이를 발로 후려 찼다. 놀란 문태욱의 몸이 중심을 잃고 무너지는 순간, 차무겸은 바로 녀석의 오금을 걷어차 아예 무릎 꿇게끔 앉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졌고 또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는 난폭한 행동에 이를 관망하던 모두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머지않아 차무겸의 손이 문태욱의 짧은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말릴 새도 없이 허공으로 뻗어진 손바닥이 문태욱의 뺨을 매섭게 내려쳤다. 짝! 하고 울리는 소리가 허공을 궤궤하게 갈랐다.
그리고 그건 비로소 시작이었다.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짝, 짝! 악! 짝! 퍽, 억…! 내 눈동자 속에 들어차는 장면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만큼이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문태욱의 친구 하나가 얼른 등을 돌렸다. 교무실이 있는 쪽이었다.
나는 뿌리를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발에 애써 힘을 주어 다급히 차무겸에게로 다가갔다. 문태욱을 후려갈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차무겸의 팔을 잡아챘다.
“그만해!”
거칠게 뒤집어진 나의 음성은 그만큼의 조급함을 담고 있었다. 누가 붙잡아도 말릴 수 없을 것처럼 광폭하게 굴던 차무겸이 다행히 멈춰주었다. 그제야 여기저기 피가 터져 엉망이 된 문태욱의 얼굴을 확인했다. 동네 불량배를 만나 구타라도 당한 양 끔찍한 몰골이었다. 중간부터는 손바닥이 주먹으로 바뀐 탓인지 문태욱의 콧대가 기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 아래 두 개의 구멍으로 붉은 피가 질질 흘렀다.
차무겸은 제 팔을 붙잡은 나의 손을 떼어냈다. 뿌리쳤다기보다는 얌전히 손목을 감싸 내려놓는 편에 가까웠다. 그러고서 천천히 다리를 굽혀 앉았다. 어느새 벽에 찰싹 달라붙어 바르르 떨던 문태욱이 움찔했다.
“태욱아… 적당히 기어올라.”
“…….”
“너 그러다 죽어.”
그 말은 온전히 문태욱에게로 향해지고 있는데, 꼭 내게로 와닿는 것처럼 등줄기가 오싹했다. 어떠한 허세나 욕설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문장.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여차하면, 여차하면 정말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차무겸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며 말했다. 문태욱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움츠러들며 ‘뭐, 뭐를….’ 하고 어렵사리 반문했다. 문태욱이 입을 열 때마다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너 김사은 좋아하잖아.”
혹시 선생님이 온 건 아닌가 살펴보던 내가 멈칫했다.
“아, 아니야! 내가 저걸 왜….”
“지랄, 맨날 나한테 사은이 얘기하면서 반응 떠봐 놓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
“아니면, 내가 그것도 눈치 못 챌 병신 같아?”
일방적인 폭력으로 깔아뭉갠 상대를 앞에 두고 짓는 미소는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대체 얼마나 힘을 들여 때린 건지 벌겋게 까진 차무겸의 손등을 바라보던 내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 미소가 눈동자에 콕 박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숨길 수 없는 태연함에 찰나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사은이가 거지야?”
“…….”
“나한테는 시계 달라고 역겨운 아양이나 떨던 네가 더 거지처럼 보이는데….”
차무겸은 피투성이가 된 문태욱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시계를 그의 복부 부근으로 던졌다.
“거기, 뭐야!”
싸늘함이 내려앉은 복도 가운데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 기다란 매를 든 학생주임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차무겸은 소란을 떨며 다가오는 선생을 힐끗 보고는 문태욱을 향해 속삭였다.
“자, 먹고 떨어져. 거지새끼야.”
그건 아마도 문태욱과 둘의 가까이 서 있던 나만이 들었을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