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몇 개월 전, 녹녹한 봄이 청청한 여름의 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여름의 끝 무렵에 다다른 세상은 어느새 추수의 색으로 변색할 준비를 마쳤다.
일주일 전, 세상을 바다로 만들 것처럼 쏟아붓던 장마가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역대급 규모의 장마를 앞다투어 예상했던 여러 뉴스대로, 암영 마을 내 개천물은 손쓸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이로부터 또 한차례 소란이 일어 야단이었다. 그 여파로, 가만있기만 해도 끕끕하게 눌어붙는 습기가 정말이지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여름철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폭염을 건넜다.
그 가운데, 나와 차무겸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만큼 사소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냥 사소하다고만은 볼 수 없는 연관성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가방 앞주머니에는 고물이 아니라 녀석이 뜬금없이 선물한 스마트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문이 맞지 않아 이음새가 부채꼴 모양으로 벌어지는 엉성한 옷장 속에 깔아놓은 차무겸의 돈 역시도.
그러나 그날 이후, 차무겸이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그랬고 일종의 비밀스러운 접선처럼 느껴지던 이곳 편의점까지도.
오곡이 찬란히 영그는 가을이 성큼 다가와서 그런지, 차무겸과 있었던 일이 꼭 한여름 밤에 꾼 꿈 같았다.
실수했나?
그 생각은 그가 양호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들이찼다. 하지만 이후 녀석을 찾아가 사과를 한다거나, 아니면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다. 인지에 그치고 만 실수였다. 차무겸과의 애매한 관계가 이대로 톡, 하고 끊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솔직히 편하기는 했으니까.
언제 차무겸이 찾아와 또 종잡을 수 없는 언행으로 나를 들쑤셔놓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전예슬이나 문태욱 같은 잡것들과 엮일 일도 최소화할 수 있고.
하지만….
속이 자꾸만 불편했다.
아주 얇으면서도 존재감 분명한 가시 하나가 심장 가운데에 콱 박혔다. 그것은 내가 잘만 하면 삼켜 넘길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또 잘못하면 그대로 심장을 찢어발길 듯 다소 위협적이었다. 그 가시가 틀어박힌 속이 내도록 술렁거린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특히나 심해지는 건 아직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를 볼 때.
유일하게 저장된 번호가 있다.
차무겸이었다.
지난날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더라니, 그사이 잽싸게 저장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저장명도 어쩜 [무겸이]라며 또다시 온갖 친근하고 귀여운 척을 다 해놓았다.
실은 내가 추후 수정할 수 있는 거지만 그냥 놔두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아빠의 번호는 알지도 못했고, 엄마는 굳이 저장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나의 핸드폰에는 가족의 번호조차 없었다. 그 삭막한 풍경을 뚫고 저장된 한 사람이 바로 차무겸이었다. 꼭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람이 흔적 하나 남지 않은 땅에 깃발을 턱 꽂아놓은 느낌과 흡사했다.
“가보겠습니다.”
다음 교대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편의점을 나섰다.
집으로 걷는 동안에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은 희한하기도 했다. 몸이 피곤하면 머리는 가벼워진다고 하지 않던가? 근데 왜 피로한데도 생각은 자꾸만 이렇게 가지치기하듯 뻗어 나가는 건지…. 아니면 만성 피로를 뚫을 정도로 차무겸의 존재감이 거대한 건가. 차라리 그렇게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녀석은 암영을 넘어 내 속에까지 풍덩 하고 던져진 커다란 바위였다. …모양 하나는 기똥차게 예쁜 바위.
바지런히 걸어 마을에 접어드는 찰나였다.
간간이 오감이 기민하게 곤두서는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촉이라는 것. 이건 예고 없이 불뚝 일어났고 그 뜬금없는 적신호는 대체로 들어맞는 편이었다. 한번은 네모난 평상 앞을 지나가면서 그 위에 걸터앉은 노파에게서 이걸 느꼈는데, 다음 순간 머리채가 붙잡혔었다. 또 한번은 골목길 저 너머에서 다가오던 아저씨였는데 앞으로는 재수 없으니 이쪽 길로 다니지 말라며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침을 뱉었었다.
그리고 지금….
외지기도 외졌고, 늦기도 늦은 이 시각.
어느 순간부터 따라붙었는지 알 수 없는 차 한 대를 인지하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뭐지? 누구지?
날 따라오는 건가?
심장을 검게 둘러싸는 불안에, 평소 자주 다니던 길목이 아닌 곳으로 발을 틀었다. 그러자 차는 내가 나아가는 방향대로 쫓아왔다. 신경을 콕콕 찌르는 알싸한 오한이 한층 더 강렬하게 엄습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키패드로 112를 쳤다가 지웠다. 파출소 하나 없는 암영 마을인 만큼 순경이 오려거든 족히 십 분은 넘게 걸릴 테다. 저들의 존재를 너무 늦게 알아챈 나의 실책이었다.
가빠진 숨을 고르고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느 틈에 차는 정차해 있었다. 곧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얼굴에 칼자국이 흉흉하게 자리한 남자가 야밤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쳤다.
“이봐, 아가씨.”
깊게 휘어지는 입술 안쪽 은니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김사은, 맞아?”
손에 쥔 핸드폰을 구명줄처럼 움켜쥐며 한 발 물러났다. 주변은 너무나 적요하여 내가 소리를 질러 봤자 듣는 이라고는 저들밖에 없을 듯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쓸데없는 자극이 되겠지. 나는 조용히 가방 옆주머니 지퍼를 열어 늘 가지고 다니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냈다.
사내가 내 쪽으로 뚜벅 다가왔다. 단추를 두셋 푼 검은 셔츠와 그 사이로 비치는 번뜩거리는 금목걸이. 난폭한 인상과 더불어 저 시정잡배 같은 차림새가 이들이 다소 위험한 인물임을 일깨워주었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발이 직, 뒤로 끌렸다.
“김규태 딸. 맞지?”
“…저 아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김사은 맞긴 한가 보네.”
깔깔한 남자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나를 콕콕 찔러댔다. 나도 발을 물리고 있었지만 성큼성큼 다가드는 사내의 걸음에 주저함이 없었으므로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아무리 봐도 깡패 같은 금목걸이는 어느새 두 보폭 정도를 남겨두고 있었다. 누르면 스프레이를 발포할 수 있는 상단에 엄지를 올려두고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금목걸이가 나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흐음….”
“…….”
“자기 딸 엄청 예쁘장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김규태가 믿는 구석이 있기는 했네. 그치? 하긴. 네 애비도 호리호리한 게 기생오라비같이 생기긴 했더라.”
금목걸이가 동의를 구하듯 자동차 쪽을 향해 물었다. 어느새 운전석에서 내려 문에 기대서 상황을 관전하던 또 다른 사내가 ‘그러게요.’ 하고 수긍했다. 개기름이 번들대는 듯한 두 쌍의 눈동자가 속을 거북하게 꼬았다.
“보자, 아가씨. 아가씨 애비가 우리한테 빚지고 튀었거든?”
“…그걸 왜 저한테.”
“담보랍시고 내놓은 게 너밖에 없어. 자기가 돈 못 갚으면 자기 딸 데려다가 우리 관할 업소에라도 팔라던데?”
뭐…?
여름은 분명 끝났는데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기도를 틀어막았다. 나의 눈자위가 선연한 공포심을 드러내듯 파르르 요동쳤다.
아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를 나에게 전해진 소식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형태였다. 그저 어디서 어떻게든 살겠거니 싶어 남처럼 여기며 지냈다. 이미 아빠는 부모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지 오래였다. 그에 따라 아빠를 향한 일말의 기대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런 절망을 떠안겨서도 안 될 일이었다.
히죽 웃는 금목걸이의 은니가 동공을 아프게 찔렀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고.”
잔털이 숭숭 돋은 팔뚝이 다가왔다. 그게 꼭 내 목을 조일 올가미처럼 보였다. 나는 등 뒤에 숨겨놓은 스프레이를 꺼내 금목걸이의 얼굴에 칙- 뿌렸다.
“아악!”
비명이 얄미우리만치 한적한 마을 입구를 쩌렁하게 울렸다. 금목걸이가 얼굴을 쥐고 비틀거리자마자 등을 돌려 내달렸다.
“저 썅년이!”
뒤에서 한차례 요란이 일었다. 그들이 차를 가지고 있는 걸 인지하고 서둘러 모퉁이를 돌고 돌아 복잡한 골목길로 진입했다. 암영은 폐쇄성이 유난히 짙었는데 그 이유는 이 마을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인 골목 때문이었다.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걸음이 불붙었다 싶을 만큼 다급했다. 변변찮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암영에서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집까지 쫓아오면?’
보아하니 편의점에서부터 나를 쫓아온 모양인데, 바로 집으로 찾아오면 될 걸 어째서? 혹시 내가 암영 마을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자세한 집 주소를 모르는 건 아닐까. 아빠가 마지막 양심으로 집 주소까지는 넘기지 않은 걸지도…. 이곳에 학교라고는 암영고 하나뿐이니 그 뒤에서부터 제 발을 밟은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집으로 향하는 순간 꼬리가 잡힐 수도 있다. 집이 노출되면 붙잡혀 끌려가는 건 시간 문제가 될 거다.
집 쪽으로 향하던 발이 급히 비틀렸다.
그렇다고 한들 달리 향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버려진 존재나 진배없었다. 도움의 손길을 뻗어 봤자 내쳐지고야 말. 이미 알고 있던 뼈아픈 사실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는 현실이 미치도록 서글펐다. 이럴 때 도움 하나 청할 사람이 없다니. 그간 아득바득 살아온 18년이 땅바닥을 구르는 먼지보다도 못해지는 순간이었다.
목을 따갑게 적시는 침을 연신 삼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별안간이었다.
이미 야음이 깊게 내려앉은 밤임에도, 그 위용이 가려지지 않는 붉은 저택이 눈에 들어온 건.
밀물처럼 몰려든 망설임에 주저하던 차였다. 부르릉,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고요하던 흐름을 깨는 소음이 들렸다. 차의 시동 소리가 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짐승의 포효처럼 들렸다.
갈등은 금세 끝자락에 닿았다.
나는 골목길 구석구석을 밟아 언덕으로 달려갔다. 아까부터 손에서 놓지 않던 핸드폰을 꺼냈다. 업소, 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물기로 어룽지기 시작하던 시야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아무 곳이나 마구 터치해 유일하게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시도했다.
신호음이 혼란스레 귓전을 맴돌다가 끊어졌다.
“나, 흐, 나 좀, 도, 도와줘.”
통화가 연결된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자, 잠깐만 숨겨주면 돼. 잠깐이면…. 부탁, 부탁할. 헉. 할게.”
고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저 넓은 저택 안이라면 내 한 몸을 숨기기에 충분할 터다. 물론 오늘 밤만 넘긴다고 능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당장으로서는 맞닥뜨린 위기를 헤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뻔뻔함을 안다. 지금껏 멀쩡한 손가락 하나 놀릴 생각 안 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고 이렇게 손을 바짝 내미는 게.
그러나 나라고 달리 방도가 있나?
이 마을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적어도 차무겸밖에 없었다. 적어도.
-내가 왜?
한참 반응이 없던 건너편에서 다소 쌀쌀맞은 반응이 돌아왔다. 꽁꽁 언 얼음 위를 휘젓는 바람처럼 서늘한 음성. 언덕을 부지런히 올라가던 나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널 왜 도와줘야 하는데.
이따위의 상황에 처한 나와는 너무도 판이한 여유로운 목소리라서, 순간 발밑이 푹 꺼지는 듯했다. 도무지 자비를 빌어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한편으로는 철저히 남 일 대하듯 차분하기 그지없다. 이 새벽, 미묘한 요란을 뒤로한 채 적적함을 즐기는 태연함은 실로 잔인했다.
어쩌면 차무겸이 골을 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 지금 나한테… 화난 거지.”
-…….
“왜? 내가 저번에… 그렇게 말해서?”
-응.
녀석은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연해지는 마음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쓱 묻어났다. 조금 전 골목을 쏘다닐 때 나를 스쳐 간 자동차 소리가 사방에서 달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이 늦은 새벽, 어둠처럼 다가온 깡패들의 위협이 숨통을 틀어막았다. 돈을 챙기기 위해 나를 고깃덩이처럼 무참하게 팔아넘길 무뢰배를 뒤에 둔 채로는 못 할 것이 없는 심정이었다. 차무겸이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냉큼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전 금목걸이와 대치하던 상황은 그만큼 어영부영 넘길 수 없는 두려움을 나의 속에 내리꽂았다.
-나랑 엮이고 싶다고 해 봐.
“…뭐?”
-나랑 엮이고 싶다고 말해보라고.
일순 그가 어딘가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심정대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이제 몇 발자국 남지 않은 붉은 저택 옥상 위, 핸드폰을 귀에 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차무겸을 발견했다.
녀석의 입에는 학교에서 보던 것처럼 하얀 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지난날에는 볼 수 없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비탈길 위에 서 있는 반면, 녀석은 안정적이면서도 드높아 무엇이든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서서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뭐 해?
“…….”
-안 해?
그건 네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자는 으름장처럼 들렸다. 거리가 조금도 가깝지 않은데, 차무겸의 두 눈이 내 입술에 콕 박혀 움직이지 않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 옷에 가려진 솜털마저도 쭈뼛 세우는 눈길이었다.
차무겸은 넋이 나간 나를 바라보다가 슬금 고개를 틀었다.
-저기 뒤에 누구 온다.
망연해진 나의 정신이 돌아온 건 그 말을 듣자마자였다. 시야가 좁은 나에 비하여 차무겸은 마을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벌써 쫓아온 건가?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처럼 사지가 다 떨렸다.
“엮이고 싶어!”
-…….
“너랑 엮이고 싶다고….”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녀석은 왜 이리도 집요하게 구는 것이며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처럼 뱉어내게 되는 건지….
먹물 같은 자괴감이 속을 스멀스멀 잠식해올 즈음 차무겸이 얕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굳건히 닫힌 대문이 소리 하나 없이 스르르 열렸다.
뒤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달려갔다.
대문의 틈새는 아주 사소했지만 원체 크기가 여간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쏙 들어오고도 남았다. 원격으로 다루기라도 하는지 내가 들어오기 무섭게 빽빽하게 채워진 나무 대문이 닫혔다. 여기까지 달음박질을 하느라 대문에 기대서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목구멍에서 옅은 피 맛이 났다. 삼켜내는 게 숨이 아니라 울음기에 젖은 감정인 것처럼 부단히 고역스러웠다.
그러던 중 걸음 소리가 들렸다.
물기로 얼룩진 시야에 누군가 들어찼다.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는지 처음 전학을 왔을 때보다 조금 더 큰 키, 부드럽게 사락거리는 흑발, 여느 때처럼 깔끔하면서 맵시가 있는 차림새.
담배를 꼬나문 채 다가온 차무겸이 얼굴을 가린 내 손을 치우고 턱을 쥐어 올렸다. 아까는 다급함에, 이제는 안도감에 펑펑 쏟아진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차무겸은 그 난잡한 꼴에 의미심장한 눈길을 던지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진득한 물기가 차무겸의 손가락을 타고 옮겨갔다.
“우는 거…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지금이 어두운 새벽이라 그런가, 그의 목소리는 도무지 넘볼 수 없는 감정이 겹겹이 껴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 감정이 상당히 위험한 결이라는 것도.
그러나 차무겸의 말을 제대로 듣고 반응하기에는 아직도 정신이 혼미하게 꼬여 있었다. 새벽경 나에게 닥친 기습은 그만큼 나를 곤경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차무겸의 엄지가 나의 턱선을 느리게 훑고는 떨어져 나갔다.
“안녕, 사은아.”
그러고는 태연하게 인사했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선 차무겸이 왠지 모르게 칠흑처럼 어두워 보였다.
* * *
‘무슨 드라마 세트장 같더라.’
나는 젠체하는 문태욱의 감탄을 이곳에 들어오고서야 체감할 수 있었다. 여긴… 뭐지? 암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갑자기 별천지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많은 이들의 짐작대로 붉은 저택은 광활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막 여름을 지났음에도 정원에 자라난 풀은 봄의 시간에 고정된 것처럼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웠다. 대문 쪽에는 쨍한 장미가, 그 옆으로 펼쳐지는 정원은 학교 운동장을 방불케 하는 크기였다. 대문에서부터 저택 앞까지 커다란 돌판이 일정한 거리로 땅에 박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물이 차지 않은 수영장과 적당한 규모의 데크 위, 파라솔과 선베드가 놓여 있었다. 문태욱이 말한 농구대는 보이지 않았으나 아직 건물의 앞마당만 본 상태였다. 저 뒤편으로는 뭐가 더 있을지 몰랐다. 농구대도 거기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했다.
실외 수영장 옆으로는 볕 좋은 오후 야외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듯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제법 되는 규모의 에어쿠션 의자가 존재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정원 둘레에 설치된 은은한 조명등에 전부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이리 와.”
눈물을 닦아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인지, 한참이나 내 뺨을 만지작거리던 차무겸이 손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붉은 입술 사이에 문 담배에서 연기가 포실포실 피어올랐다.
멀리서 볼 때도 웅장하던 규모의 건물은 가까이서 보니 잡아먹힐 듯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깔끔한 아이보리빛 톤으로 칠해진 문틀을 넘자 그리 길지 않은 길이의 복도가 나왔다. 복도가 끊기는 부분에는 전시회에 어울릴 법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차무겸이 내어준 푹신한 슬리퍼를 신고 모퉁이를 돈 나는 무심코 입을 벌렸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거대한 샹들리에였다. 크리스털 무더기로 이루어진 그것은 아주 약한 세기로 불이 들어와 있었는데도 보석의 광채로 말미암아 한낮의 태양처럼 번쩍거렸다. 엔틱한 분위기를 내려는 목적인지 한편에 자리 잡은 벽난로 위로 영화관 스크린 크기는 돼 보이는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반대편이자 거실의 중심에 놓인 소파는 어두운 갈색 톤으로 붉은 벽돌과 그럴싸한 조화를 이루었다. 내부 벽면은 바깥처럼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꽤 오래전에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느 휴양지의 별장처럼 아늑하면서도 고즈넉한 품격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피곤하겠네.”
길을 잃은 미아처럼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자니 어딘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차무겸이 다가왔다. 녀석의 손에는 하얀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건네받아 홀짝 들이켰다. 달콤한 코코아였다. 단걸 좋아한다지만 혀가 아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바탕의 소동에 당이 저 바닥까지 떨어졌는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액체를 삼켰다. 혀끝에 단맛이 끈적하게 휘감겼다. 차무겸은 그런 나를 가만한 눈으로 보다가 빈 잔을 받아갔다.
맥없이 앉아 있던 나는 정원 방향으로 난 창을 바라보았다. 초봄만 되면 저택 바깥에서 몇 번이고 올려다보았던 동백나무가 그 창 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더듬더듬 몸을 일으켜 창 앞으로 다가갔다.
“뭘 그렇게 봐?”
희미한 어둠의 경계에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어깨 위로 포근한 담요가 얹어졌다.
“어? 아… 나무.”
“나무?”
“저기, 동백꽃… 피잖아.”
내 옆으로 다가온 차무겸은 감상을 방해하지 않은 채 위쪽으로 난 창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를 동백나무집이라고 부른다며.”
차무겸은 제가 머무는 집이 이곳에서 지닌 별칭을 이미 아는 눈치였다. 점막에 들러붙은 단맛을 혀로 미적미적 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래?”
“응….”
싱거운 어조로 답한 후 슬쩍 옆을 곁눈질했다. 차무겸의 입에는 여전히 구름을 만들어내는 하얀 막대가 물려 있었다. 투명한 머리창에 관자놀이를 기댄 채로 시야를 휘젓는 발간 불씨를 응시했다.
“너도 피우는지 몰랐어.”
열어놓은 창틀을 고정하던 차무겸의 고개가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부옇게 흐려졌다. 벌어진 잇새로 새는 연기 때문이었다.
집 안에서 피우면 냄새가 밸 텐데. 그러나 살짝 젖힌 창으로부터 스며들어오는 갈바람을 맞으며 그 생각은 점점이 소멸하고야 말았다. 내 옆자리에 착석한 차무겸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웠다.
“매번 사탕만 먹고 있길래….”
“원래 잘 안 피워.”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퍽 부적절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부적절한 것도 안개가 자우룩하게 끼는 이곳 암영에서는 은밀하게 가려지기 마련이었다. 문태욱부터가 그러지 않는가. 걔를 볼 때마다 폐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지는 않을까 의심이 들 만큼 뻑뻑 흡연을 해대고 있었으니.
“냄새 배는 거 싫어하거든.”
“문태욱 옆에 있으면 네가 피우지 않아도 밸 텐데.”
“그래서 걔 싫어.”
답지 않은 투정이었다.
나는 창가에 머리통을 기댄 채로 힘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저 말이 허울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건 지금껏 차무겸에게서 흡연의 기류를 발견한 적이 없어서였다. 문태욱 무리와 달리 차무겸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만 났던 것 같은데….
창 쪽도, 그렇다고 집 안쪽을 향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로 앉은 나와 달리 차무겸은 뜨듯한 실내를 향해 돌아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손가락 사이에 걸쳐둔 기호품을 입에 물었다가 빼내는 태도에서 어쭙잖은 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견 문태욱보다도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너도 피워 볼래?”
나의 빤한 눈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 건지 차무겸이 대뜸 물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차무겸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문태욱이나 그의 친구들이 교사에게 걸릴 때마다 귀가 뜯어질 정도로 잡히고는 하던 담뱃갑이었다.
가벼이 흔들어 멀쩡한 막대기를 툭 꺼내 든 차무겸이 내게 그걸 쓱 내밀었다. 손길이 먹을 거라도 건네듯 가분했다. 싫다고 쳐낸들 별말 하지 않을 것처럼.
지금껏 저 손이 내게 쥐여준 것들을 기억한다. 어느 때는 수표 다발, 어느 때는 핸드폰, 이제는 담배까지. 뭐랄까, 차무겸을 통해 때 묻은 속세를 배우는 느낌이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질 나쁜 충동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엄청 지치는 기분이니까.
조금 무뎌진 경향도 없잖아 있었다. 학교 애들이 후미진 구석에서 술이나 담배를 취하는 모습에 너무 자주 노출된 까닭이었다.
내 손이 쭉 뻗어 나갔다. 곧 나는 내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는 백색의 막대를 내려다보다가 입에 물어보았다. 혀끝에 닿는 맛이 깔깔했다.
“아, 라이터….”
차무겸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2층 난간 쪽을 힐끗 보았다. 라이터는 아무래도 저 위에 있는 모양이었다. 귀찮음이 물씬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녀석은 꽁지를 가만 물고 있는 나를 응시하다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빨아들여 봐.”
어눌한 발음으로 속삭인 그가 자기 담배를 내가 문 그것의 끄트머리에 가져다 댔다. 생각지도 못한 농밀한 접촉에 담요를 쥔 손가락이 둥글게 말려들었다. 서로의 입에 막대기가 물린 채 그 끝이 닿은 것뿐인데, 꼭 입술이 겹쳐진 것만 같았다. 호흡이 느껴질 만큼 밀접한 거리라서 그런 걸지도.
아주 잠깐 몸을 경직시켰다가 차무겸의 지시하에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맞닿은 끝에서 끝으로, 화한 불씨가 다닥다닥 조심스럽게 옮겨붙었다.
톡 쏘는 듯 알싸한 향이 후각을 버겁게 찔렀다.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기 무섭게 꾸깃꾸깃 접은 종잇장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콜록, 입술에 걸쳐둔 담배를 꺼내고서 한차례 기침을 토해냈다. 조금 전 단것을 먹은 영향일까? 내게는 너무나 쓰고 독한 맛이었다. 폐부가 낯선 고통에 절여져 한차례 바동거렸다.
“맛없어.”
짜증 섞인 불평에 차무겸이 킥킥거렸다.
녀석은 손을 쭉 뻗어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재떨이였다. 불이 꺼지지 않은 담배를 황망한 손길로 지져 껐다. 허공을 가르던 두 갈래의 연기 중 하나가 사그라들었다.
“이런 걸 왜 피우는 거지?”
“버릇이지, 뭐.”
이 안에 든 니코틴이 강력한 중독 현상을 유발한다고 했다. 문태욱이나 그의 친구들이 이걸 쉽사리 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아주 좋지 못한 식으로 사람을 길들이는 기호품이었다. 나는 고작 한 입 피우고서 재떨이에 버려진 담배 토막을 바라보았다.
“문태욱은 아마 폐암 걸려서 죽을 거야.”
차무겸이 아까보단 바람 빠진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코앞에서 피우고 있는 사람을 두고 폐암 얘기를 꺼내네.”
다소 잔인하다는 힐난이었다.
“너 말고 문태욱.”
“문태욱이 그렇게 싫어?”
“너도 싫다며.”
“응.”
“…근데 넌 왜 싫어? 둘이 잘 노는 거 같던데.”
가만 보면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족을 못 쓰는 건 언제나 문태욱이었다. 하지만 관계는 쌍방으로 마음이 있어야지 유지가 가능한 것 아닌가. 내가 알기로 문태욱은 누울 자리도 보지 않고 다리를 펼 인물이 아니었다.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척 굴어도 강한 자 앞에 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곧잘 비굴해지는 치였다. 물론 녀석의 세상에서 ‘강한 자’로 정의될 만한 인물이 몇 없기는 하지만.
차무겸은 그 소수 중 하나였다.
“빌붙어서 싫어.”
차무겸은 반쯤 태운 담배를 내려 재떨이에 꾹 눌렀다. 내가 꽂아놓은 담배의 필터에 딱 맞붙여 비비는 모양새가 묘하게 난잡하게 느껴졌다.
“내 시계 볼 때마다 침 질질 흘릴 기세라 못 봐주겠던데. 저번엔 아예 하나 줄 수 없냐고 묻더라.”
나는 쉽게 웃을 수 없었다.
속 편하게 웃기에는 나 역시 여태까지 차무겸에게 받은 게 적지 않으니까. 오기를 내질렀다가 대뜸 내밀어진 삼백만 원이나, 단지 연락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받은 핸드폰이나…. 혹시 나 역시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철썩 달라붙어 피를 쪽쪽 빨아 먹을 거머리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아주 잠깐 우려가 되었다.
그나저나 얘한테 돈은 언제 돌려주지?
“그래서 언제 말할 거야.”
“…….”
“무슨 일인데.”
대화는 언저리만 빙글빙글 돌다가 별안간 핵심으로 꽂혀 들었다. 서행으로 나아가던 차를 급 유턴한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건가. 창에 기대고 있어 시원시원해진 이마를 매만졌다. 조금 전 맞닥뜨린 위급한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빠가… 사채를 쓴 것 같아.”
또 사고를 친 모양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사채까지 쓴 모양인데…. 어떡하지? 사채업자들은 마을 사람들처럼 욕 몇 번 들어주는 걸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 잔혹한 성질이 있지 않은가. 뜯긴 만큼 반드시 돈을 받아내려 할 거다.
어릴 적 건너 건너 집에 살던 아저씨가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살다가, 모친마저 돌아가 혼자가 된 남자였다. 어느 날부터 그 아저씨를 도통 볼 수가 없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사채를 썼다가 그걸 갚지 못해 야밤 깡패들에게 꼼짝없이 끌려갔다고 했다. 그 이후로 암영에서 그 아저씨를 본 기억은 없었다. 파출소 하나 존재하지 않는 으슥한 암영 마을에서 사람 하나가 사라지는 건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근데 널 왜 찾아와.”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게, 아빠가 담보로 나를 걸었대. 돈을 못 갚으면 나를 업소에 팔라고….”
내가 뱉고 있는 게 말인지 독인지 모르겠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속이 욱신 조여들었다. 느릿느릿 기울던 나의 몸이 창에 닿았다. 차무겸의 시선이 대각선을 그리는 나의 몸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커다란 손이 또다시 나의 턱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가끔 보면 차무겸은 남을 품평해도 되는 물건쯤으로 여기는 구석이 있었다.
“너 일단 좀 자야겠다.”
“어?”
“저번처럼 코피 쏟기 직전인 얼굴이야.”
차무겸의 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치우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무렇게나 꽂아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3이라는 숫자가 눈 위로 어른거렸다.
나는 그렇다 치고 얘는 지금까지 안 자고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생각을 깊게 이어나갈 수 없었다. 차무겸의 말이 주문처럼 내려앉자 잠기운이 스멀스멀 밀려와서였다. 새벽바람을 막아주는 튼튼한 건물은 도피처로서 완벽했다.
차무겸은 중심을 바로 잡지 못하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2층도 1층 못지않게 드넓었으나 비몽사몽 한 내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고서 자리한 방의 바로 옆방에 눕혀졌다. 뒤통수에 닿는 베개가 푹신했다. 우리 집에 있는 것과 달리 포근하고 좋은 향만 났다. 온몸을 감싸는 침대는 또 어떠하고. 이렇게나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학교 양호실에 있는 딱딱한 매트리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산뜻함 속에서, 가물거리던 눈동자가 금세 잠겼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알람을 대신했다.
침대 위로 파고드는 눈부신 빛살이 의식 너머까지 기어들어 와 자취를 남겼다. 깨어나기 무섭게 낯선 풍경이 망막을 채웠다. 어디지, 여기…. 눈을 뜨면 언제나 보이는, 빛바래 곰팡이가 스민 벽지도 아니고 허접한 야광 스티커가 붙은 천장도 아니었다.
이파리가 떨어진 울창한 나무 몇 그루가 명화처럼 새겨진 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인지 깨닫자마자 상체가 벌떡 세워졌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침대 한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액정을 두드리자 화한 빛이 새어 나왔다. 7시임을 확인하기 무섭게 그 옆으로 뜬 토요일이라는 글자에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주말이구나.’
어제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오늘이 토요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입고 잔 교복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방 내부에 거울이 없어서 핸드폰 액정을 비춰 대강 모습을 점검했다. 머리는 아예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어서 손목에 끼워둔 머리끈으로 대강 묶었다. 문 근처에 놓인 가방을 메고서 방을 빠져나왔다. 내부는 인기척 하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일단 집에 가야겠다.’
어젯밤에는 경황이랄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급했고, 그래서 선뜻 발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곳에서 잠까지 잤다. 간만에 취한 휴식에 머릿속이 맑아지자 이 상황이 다소 거북하게 다가왔다.
그냥,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경이었다. 차무겸의 집에서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졌다는 게. 거북함이 드니 조급함도 엄습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휘어 감았다. 벗어나야 했다. 어젯밤 골목길을 쏘다니며 나를 찾아다니던 깡패들도 지금쯤이면 사라졌을 테다.
야밤의 저택과 아침노을로 차오른 저택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아주 넓은데, 개미 새끼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적요했다. 벽돌과 결이 아름다운 나무로 이루어진 건물이라서일까, 깊은 산장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시간이 이르니만큼 차무겸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와 현관 복도와 이어지는 중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
기묘한 것이 등 뒤를 덮쳤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시선이라든지. 그게 오감을 알싸하게 쑤시는 바람에 문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2층 난간에 기대선 차무겸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른 아침부터 샤워라도 했는지 머리칼 끝이 젖어 있었다.
“사은아.”
나는 잠깐 몸을 숨기게 해달라고 했고 차무겸은 그걸 들어주었으니 우리 사이에 남은 건 뭐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녀석이 나를 저렇게 부르니까 꼭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망칠 이유도 없는데.
아니, 정말 없나?
“편의점 그만둬.”
내가 공에 맞아 코피를 쏟았던 날, 창가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볼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그는 그렇게 지껄였다. 평평한 직선을 떠올리게 하는 예사로운 말투였다. 문고리를 쥔 나의 손에 땀이 났다. 이렇게 가끔가다 한 번씩, 무덤덤한 태도로 고압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차무겸은 감당하기 벅찼다.
“…나 돈 벌어야 하는데.”
“내가 줄게.”
또다시 의미를 읽을 수 없는 적선이 내밀어졌다. 차라리 양껏 비웃으며 노골적인 태세를 보인다면 이렇게 맘이 복잡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야 무시하고 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차무겸은 언제나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게 정말 나를 불쌍하게 보는 동정인지 아니면… 형용하지 못할 관심의 발로인지 구분할 수 없게끔.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2층으로 향하는 나의 음성이 약간 뾰족해졌다. 아마 녀석에게 닿으면 고작 긁힌 자국 정도 낼 가시겠지만 그래도 세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나의 자존심이 알게 모르게 짓눌리고 있단 걸 알아챈 듯 차무겸이 입매를 유려하게 휘었다.
“그냥 준다는 거 아니야. 나 공부나 가르쳐줘.”
“공부?”
성적이야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누굴 가르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다른 애들이 이리저리 놀 때 알바를 하며 문제집 들여다보는 게 일상의 전부이니 그 정도의 고만한 성적이라도 유지하는 거고. 차무겸은 척 보기에도 서울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라왔을 것 같은데. 내가 그런 녀석에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거다.
“나 공부 못하는데.”
하지만 차무겸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보다는 잘하겠지.”
차무겸의 성적을 모른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제안은 너무나 솔깃했다. 어젯밤 입 안을 가득 적신 코코아의 단맛이 떠올랐다.
“가르치는 게 싫으면 같이 하든가. 나 혼자 있기 외로워.”
“…다른 친구들 있잖아.”
“다 꺼지라 그래.”
쏙 파여 드는 입아귀가 개구쟁이의 것처럼 천진했다.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그를 물끄럼 올려다보았다. 어제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높낮이다. 차무겸은 언제나 저리 고고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목 뒤가 뻐근해질 정도로 올려 봐야만 했다.
나는 그 상층으로 올라갈 생각이 없는데, 아니, 사실은 올라갈 기회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데 차무겸은 아주 손쉽게 제 옆자리를 내어줬다. 이제는 저게 동정인지 아니면 바람처럼 지나가는 사소한 관용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일까, 차무겸은.
옷장 속에 꼭꼭 숨겨둔 돈 삼백만 원이 떠올랐다.
“빌붙는 거 싫어한다며.”
새벽, 문태욱의 구질구질함을 꼬집으며 했던 말이 나의 속에도 뻑적지근하게 고여 있었다. 그 대상은 문태욱이었음에도, 내밀어진 면박에서 온전히 나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나의 비천함을 잘 알고 있었다. 구질구질함은 언제나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차무겸은 꺾인 손등 위에 제 턱을 기댔다. 비스듬히 기우는 고개의 각도가 아무런 악의 없이 개미를 짓밟아 죽이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처럼 아득했다.
“네가 그러는 건 좋아.”
“…….”
“어디 한번 빌붙어 봐. 혹시 알아? 내가 밑천이고 뭐고 다 내줄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에 솔깃함을 들게 하는 한편, 발을 집어넣으면 그대로 끌려가 머리끝까지 잠식할 깊은 늪을 떠올리게 했다. 적어도 힘든 나날을 반추하면 후자보다도 전자가 더 가슴 깊숙이 꽂혀 들었다. 당장만 해도 새벽에 경험했던, 거품 위에 누운 듯 푹신한 침대가 뇌리에 뭉근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기회가 없어서 몰랐던 것뿐이지, 나는 생각보다 더 속물에 염치를 모르는 존재였다.
바닥을 향하던 시선이 동아줄을 움켜쥐어 엉금엉금 기듯 위로 가닿았다. 다시 마주친 차무겸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욱 짙게 드리워 있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다 안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