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3화 (3/24)

3장.

바야흐로 중간고사의 계절이나 다름없는 봄이 지나갔다.

기말이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이었다. 차무겸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무더위이기도 했다. 암영의 하계는 극심하고 모질며 지독한 면이 있었다. 살갗을 녹일 듯한 뙤약볕에 지글지글 끓어가기 바쁜 나날을 펼쳤다.

엊그제 마을 외딴집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실신했다고 들었다. 이 마을에서 연세가 가장 지긋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나의 부친에게 돈을 뜯긴 또 다른 피해자로 나만 보면 잡아먹기 바쁜 노파이기도 했다. 지독한 여름은 다행히 나에게만 지독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거라도 공평함에 감사를 느껴야 하는 건지.

금요일 밤, 여느 때처럼 편의점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알바라도 해서 다행인 게 어차피 지금 시간에 집에 있어 봤자 더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게 뻔했다. 고장 난 선풍기는 세기를 조절하는 세 개의 버튼 중 무얼 눌러도 가장 약한 바람만 탈탈 흘려보냈다.

지금껏 나의 여름 나기는 대체로 얼린 얼음을 입에 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빠져 있는 것이었다. 낡은 냉동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밴 얼음은 호흡조차도 달갑지 않게 만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력이 쉽게 떨어지는 여름철에는 식사를 거르는 게 일쑤라서 살이 부쩍 내리고는 했다.

그에 비해 알바를 구하고 난 지금은, 이토록 늦은 시간임에도 에어컨 빵빵한 가게 내에서 쾌적하게 공부를 하고 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더군다나 며칠 전부터 폐기 처리가 애매하니 남는 게 있으면 먹어도 괜찮다는 점장의 허락이 떨어져서 끼니도 그럭저럭 때울 수가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었다. 방학 도중에는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자율학습반을 시행했다. 그러나 신청률은 적은 편이었다. 암영고에서 학업에 몰두하는 학생은 극소수였다. 장차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나 농업을 이어받으려고 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여서였다.

부모가 아득바득 수도권으로 보내고 싶어도 후미진 시골 마을에서 자라 교육의 질과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는 판국인지라 그쪽 동네의 학생들과 비교할 수준도 못 되었다. 출발선부터 다른 현실이었다. 설렁설렁. 이 마을의 시류는 현세대에 동떨어진 것처럼 대체로 그렇게 흘러가는 편이었다.

딸랑.

“아, 더워.”

모자를 고쳐 쓰던 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여름의 밤공기는 낮만큼이나 눅눅했다. 그 지글지글함에 녹아가는 이들의 옷차림은 가벼워졌다. 오늘 역시 느닷없이 얼굴을 들이민 차무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복 셔츠 안에 받쳐 입으면 어울릴 까만 티셔츠에 슬랙스를 걸쳐 입은 차림새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성인 같았다.

송골송골 땀이 맺힌 머리칼을 쓱 넘기는 태도는 별것 아님에도 묘하게 이목을 잡아끄는 면이 있었다. 그 밑으로 펼쳐지는 이목구비 때문일지도. 차무겸은 음료수가 진열된 코너로 향하기 전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쓱 웃어 보였다.

그대로 멀어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잠시 후 다시금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지갑을 두고 가면 어떡하냐.”

누군가 빠르게 차무겸의 뒤로 따라붙었다. 워낙 순식간인지라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혹시 암영고 애 중 하나인가? 돌연히 조우한 불길함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뒤 한쪽에 내려둔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차무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인물은 처음 보는 이였다. 뭣보다 암영 마을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차무겸을 처음 보았을 때와 상당히 유사한 인상이었기에.

그러니까, 이런 촌구석에서 썩어간다기에는 분위기가 다소 도회적이랄까. 세련된 느낌이 있달까.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옷감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웠고 손목에 찬 시계 역시 차무겸이 차던 것처럼 부유한 낌새를 절로 내풍겼다. 혹시 쟤도 서울 애인가. 생각은 금세 거기까지 뻗어갔다.

“안녕, 사은아.”

차무겸은 여느 때처럼 살갑게 인사를 했다. 계산대에 탄산음료 두 개가 놓아졌다. 그리고 계산대 옆에 걸린 막대 사탕 세 개도 연달아 놓였다.

리더기로 바코드를 찍고 ‘삼천팔백 원입니다.’ 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차무겸을 뒤따라온 남자는 갑작스러운 알은척에 1차로, 반응 없는 나의 모습에 2차로 당황했는지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았다. 나중에 가서는 차무겸의 팔뚝을 툭 치며 ‘아는 사람이야?’ 하고 슬쩍 물어보기까지 했다.

차무겸은 이런 내 반응이 익숙한지 실실 웃으며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을 마친 카드를 돌려주며 녀석을 힐끔 보았다. 때마침 차무겸이 상체를 수그리는 바람에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얘가 물어본다, 너 아는 사람이냐고.”

차무겸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알은척하는 미친 짓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녀석의 옆에 서 있는 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봉투 드릴까요?”

“아, 네. 주세요.”

대답은 차무겸 옆에 선 남자에게서 나왔다. 봉투에 음료 두 개를 담는데 막대 사탕 한 개가 쓱 내밀어졌다.

“이건 너 먹어.”

길쭉길쭉한 차무겸의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차무겸 옆에 선 남자를 제대로 눈에 담았다.

“야, 너 왜 그….”

그만하라는 듯 차무겸의 팔뚝을 툭 치던 남자는 내 얼굴을 제대로 직시한 순간 술술 내뱉던 말을 멈추었다. 나는 흘끗 보낸 눈길을 거두고 차무겸에게 봉투를 쓱 내밀었다.

“자, 그리고 사탕은 됐어.”

“왜?”

“단거 싫어해.”

사실은 좋아한다. 없어서 못 먹지.

그러나 차무겸이 주는 건 폐허 속에서 발견한 보석처럼 썩 달갑지 않은 인상을 떠안겼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먹으면 체할 무언가로만 다가왔다. 지난번 보였던 적선에 가까운 행동이 기도를 꽉 옭아매서 그런 걸지도.

차무겸을 마주할 때마다 늘 다리 한 짝이 무거워졌다. 녀석에게 아직도 건네주지 못한 돈이 원인이었다.

그날, 어디 둘 데도 없는 돈다발을 가지고 끙끙대다가 결국 그걸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액수가 액수이기도 하고, 또 학교에는 이목이 워낙 많다 보니 영 기회가 나지 않았다.

노릴 수 있는 때라고는 차무겸이 하교 후 밤늦게 편의점을 찾아올 때뿐인데 문제는 그때까지 그 큰돈을 가지고 있기가 무서워서 도통 가지고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 전에 집에 들렀다가 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아빠가 사기를 치고 나에게 어떠한 시선이 와닿는지 깨달은 이후로, 그만큼의 액수를 잃어버리는 건 상상만으로도 삼켜낼 수 없는 중압감을 끼쳤다.

결국, 언젠가는 돌려주자는 마음으로 집 안 구석, 옷장 아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중이었다. 그 돈을 안 쓰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조금도 액수가 비지 않게 유지했다가 돌려주면 되니까….

“그럼 뭐 좋아해?”

차무겸은 꼭 이성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자처럼 상체를 기울이며 속살댔다. 나는 모자챙 아래로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짓 안 하는 거…?”

차무겸의 입에서 ‘오….’ 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성이 나왔다. 녀석은 대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만개한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바로 섰다. 그러고서야 이 상황을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목도하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내 사촌.”

궁금하지도 않은 대상에 관한 소개가 이어졌다.

관심이 없다는 걸 티 내듯이 그쪽을 돌아보곤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야로 커다란 손이 쑥 내밀어졌다. 곱상하고 예쁜 편인 차무겸의 것과 달리 마디가 굵고 튼실해 보이는 손이었다.

“한우현이라고 해요.”

“아, 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악수를…. 속으로만 떠올린 생각을 날름 삼킨 후 손을 맞잡아 대강 흔들고 놓았다. 남자, 한우현은 나 역시도 이름을 말해주길 원한 듯 보였으나 모르는 척 무시했다. 이런 내 태도에 무안했는지 그가 볼가를 긁적였다.

차무겸은 어색한 기류가 팽배한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으며 나섰다.

“여기는 사은이, 내 학교 친구.”

소리 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학교 친구라니…. 나와 차무겸은 그런 정다운 관계로 묶일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알은체도 잘 안 하는데 친구는 무슨. 앞서 문태욱과 제가 정말 친구처럼 보이냐는 녀석의 의미심장한 질문이 떠올랐다.

도대체가 차무겸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렇게 말하고 문태욱을 언덕 위 동백나무 붉은 저택으로 스스럼없이 초대했다고 했다. 또 학교에서 늘 붙어 다니는 문태욱과의 관계에 물음표를 남기는 수수께끼를 떠안기고서, 나는 거리낌 없이 친구라고 소개한다. 봄에서 여름이 지날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녀석은 도통 알 수 없는 괴생물체였다.

“사은이 예쁘지?”

차무겸이 대뜸 한우현에게 물었다.

나와 한우현의 눈이 각자 휘둥그레졌다. 나는 ‘얘가 뭘 잘못 처먹었나’ 하는 시선으로 보았고 한우현은… 쟤는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 예쁜 애 하나 있다고.”

그 말의 장본인인 나는 쑥스럽다기보다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차무겸을 바라보았다. 쟤가 저렇게 굴 때마다 문태욱이 낄낄대며 화제의 도마에 올려놓았던 차무겸의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쟤 여자친구는 쟤가 여기서 이러는 거 알까…. 이 역시도 입 밖으로 올리지 못할 한탄이었다.

나는 적당히 눈을 내리깔았다.

한우현이 그런 나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이만 가자. 시간 늦었어. 아, 그보다 벌써 밤인데 이 친구는 알바 언제까지….”

“왜, 관심 있어?”

차무겸의 한마디에 한우현의 얼굴이 더욱 벌겋게 물들었다. 3월경, 언덕 위 저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백꽃잎을 연상시키는 색이었다. 한우현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관심은 무슨 관심이냐며 편의점을 박차고 나섰다. 경박스러운 행동을 따라 문 상단에 달린 벨이 요란하게 짤랑거렸다. 귓가를 쨍 울리는 소리가 나와 차무겸의 사이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멀어진 한우현의 자취를 따라가던 차무겸의 눈길이 내게로 돌아왔다.

“사은아. 쟤 너한테 관심 있나 봐.”

풀다 만 비매품 문제집 사이에 끼워둔 샤프를 들며 ‘응.’ 하고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바라는 대로 대답을 해줬는데도 문제집 위로 드리운 음영이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재차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차무겸은 대답만치나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웃었다.

“잘 모르겠네.”

“뭐?”

“이런 일이 워낙 자주 있어서 그런 건지, 진짜 흥미가 없어서인지….”

내게로 꽂힌 눈길이 그 안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어느 때는 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낼 만큼 투명하다가도 또 어느 때는 야밤보다 어두운 장막을 잘도 드리웠다. 곧 녀석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그 애매모호한 기색은 멀끔히 흩어졌다.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온 것이다.

“내일 뭐 해?”

내가 필요 없다고 한 막대 사탕을 문제집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차무겸이 물었다.

“시간 있으면 우리 집 와.”

“…거길 왜?”

“파티할 거거든. 한우현도 놀러 온 겸.”

“네 친구들도 오잖아.”

“내 친구? 누구?”

나는 정말이지 얘를 모르겠다.

“문태욱이랑 걔 친구들.”

“아, 태욱이 불편하다고 했지.”

차무겸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음, 하고 침음을 냈다. 머지않아 기발한 방안을 생각해낸 것처럼 과장되게 물었다.

“걔네 오지 말라고 할까?”

“…….”

“네가 원하면 오지 말라고 할게.”

“무슨… 아니, 됐어. 그럴 필요 없어. 나 안 갈 거니까.”

“왜?”

“왜긴 왜야….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 시작이야.”

차무겸의 눈길이 쭉 미끄러져 내가 펴고 있는 문제집을 스쳤다. 꼭 공부 안 하냐는 잔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녀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걸 몸짓으로 표출하듯 문제집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차무겸이 제가 내려놓은 막대 사탕을 들어 내 손등을 콕 찍었다.

“그럼 나 네 번호 줘.”

나는 멈칫한 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손등을 찍은 사탕에 점점 힘이 실렸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사탕이라도 꾹 누르면 제법 아팠다. 살갗이 사탕의 표면에 짓눌리는 걸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번호는 왜?”

“가지고 싶어서.”

목소리가 가까웠다. 어느새 차무겸이 내 쪽으로 다시금 거리를 좁혀온 탓이었다. 나는 짓눌리지 않은 쪽 손으로 사탕을 붙잡았다. 녀석이 들어온 후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터졌다. 그걸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차무겸은 사탕을 놓고 순순히 떨어졌다.

번지르르하게 휘어진 입꼬리가 어딘지 모르게 얄미웠다.

“나 핸드폰 없어.”

번호를 주고 싶지도 않았고, 몇십 년은 된 고물을 차무겸 앞에서 꺼내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게 나와 차무겸의 처지를 비교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번쩍거리는 최신형 핸드폰 앞에서 나의 고철 덩어리는 시궁창에서 주워온 것처럼 비참해질 게 뻔했다.

내 말에 차무겸이 토끼눈을 해 보였다.

“핸드폰이 없다고?”

“응.”

그가 나를 빤하게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를 간파해내는 심판자의 눈길처럼 묘하게 사납고 예리하다. 나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곧이어 녀석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서 큭큭 웃어댔다. 정말이지 예상도 못 한 곳에서 맞닥뜨린 진기함에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는 반응이었다.

“하여간 여기 사람들은 진짜 골 때린다니까.”

차무겸이 드디어 뒤로 물러났다. 녀석이 비켜서자 가려진 에어컨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쓱 불어왔다. 이래서 답답했던 거였구나. 뒤늦게야 어림짐작했다. 나의 양 뺨을 우스운 수준으로 쥐고도 남는 차무겸의 손이 대뜸 다가왔다. 내 손에 들린 샤프를 앗아간 녀석은 나의 문제집 상단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열한 자리의 숫자.

제 번호를 유려하게 휘갈겨 쓴 뒤, 뒤편에 [무겸이 번호] 하고 친근하기 짝이 없는 메모까지 남겼다.

자기를 이렇게 삼인칭으로 쓰기도 하는구나….

차무겸은 그렇게 사라졌다.

여름에 걸맞지 않은 찬 바람이 휘도는 공간 속에서 녀석이 쓰고 간 열한 자리의 번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차무겸이 끄적대던 부분의 반대편, 문제집 하단부에 그 번호를 하나하나 따라 썼다.

마지막 번호를 쓰고 꾹 찍어누르니 연약한 샤프심이 뚝, 끊어져 종이 위에서 지저분한 흔적을 그려냈다. 문제집 위를 나뒹굴던 막대 사탕의 포장지는 연분홍빛이었다. 샤프를 고쳐 쥐며 그것을 치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꺼내 쓰레기통 속에 처박았다.

* * *

기말고사는 맥없이 지나갔다. 시험은 학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할 행사겠지만 막상 넘기면 홀가분함을 넘어 허무할 정도였다. 길고 험난한 시간을 고작 저 몇 가지의 문항으로 판별하는 게 약간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공부는 늘 이랬다.

목요일, 기말고사가 끝난 밤 여느 때처럼 카운터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웬 택배기사가 들어왔다.

“김사은 씨 맞으시죠?”

“맞는데….”

“이거 배달이요.”

내 손에 들어온 네모난 상자를 가만 바라보았다. 나한테 이게 왔다고? 이걸 누가? 수상함에 찬 눈빛으로 상자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상자 위에 가지런히 붙은 송장 스티커에는 수령자인 내 이름과 이곳 편의점 주소만 적혀 있었다. 나는 찜찜한 마음을 품고 테이프를 뜯었다.

“…….”

이윽고 열어젖힌 상자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핸드폰이었다.

그것만 보고도 이 느닷없는 소행이 누구의 짓인지를 깨달았다. 매끄러운 비닐에 감싸인 핸드폰 박스. 겉면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핸드폰은 차무겸이 늘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기종이었다. 심지어 색깔까지도.

일단 비닐을 뜯지 않은 채로 그것을 데스크 밑 서랍에 넣었다. 이게 설마 나에게 보낸 깜짝 선물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어떠한 이유로서든지 대신 받아달라고 보낸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그럼 알바 시간 동안 찾아올지도 모른다. 괜히 헛다리를 짚어 이 비싼 것을 넙죽 받아먹으려는 무뢰한처럼 보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루한 집과 어울리지 않는 최신 기종의 핸드폰 박스를 가만 주시했다.

하아. 터져 나온 숨이 탈탈거리는 고물 선풍기의 바람 소리에 가려졌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나와 핸드폰 박스가 알 수 없는 대치를 벌였다. 얼마 후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구석에 놓인 가방을 끌고 왔다. 기말고사 대비 문제집과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둔 고물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이전에 적어준 번호 11자리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차무겸은 전화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통화 연결음이 채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어? 이거 내가 준 핸드폰 번호 아닌데.

유선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실제보다 조금 더 깊고 그윽한 파동을 그렸다. 꼭 녀석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 달팽이관이 다 간지러웠다.

“네가 보낸 거야?”

-안녕. 사은아, 인사부터 좀 해줘.

“왜 보냈어?”

-선물. 그보다 이 번호는 뭐야?

서로가 다른 언어로 말을 하는 것처럼 대화가 삐걱거렸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푹푹 찌는 무더운 공기가 폐부를 팽창시켰다.

“이거 다시 가져가.”

-왜?

“내가 이걸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돌려줘야 할 게 하나 더 생겨버렸다. 지끈대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유 있는데?

“뭔데.”

-내가 너랑 연락을 하고 싶으니까.

숨을 다시 한번 들이마시는 찰나였다.

-근데 너 나한테 구라 쳤나 보네.

“…….”

-핸드폰 있으면서 없다고 했어?

저 너머의 목소리가 약간 삐딱해졌다. 매끄럽던 거죽 위로 가시가 삐죽빼죽 돋은 것처럼. 아무래도 숨겨둔 핸드폰이 있었다는 것에 빈정이 제대로 상한 모양인지 차무겸은 그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별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사실은 애물단지 같은 이 최신 기종 핸드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 전화기로 걸 걸 그랬다.

낭패였으나 어찌하랴.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지금 쓰는 핸드폰 어차피 인터넷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나 원래 핸드폰 잘 하지도 않아.”

-그럼 내가 주는 거 받으면 되겠네.

“왜 말이 그렇게 되는데?”

-네가 안 받으면 버릴 거거든, 그거.

핸드폰 박스를 쥔 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의 상판처럼 매끄러운 비닐 위로 예쁘지 않은 주름이 졌다. 차무겸은 가끔 내가 맥도 추지 못할 방향으로 찔러 들어오고는 했다. 얼핏 봐도 비싼 게 뻔히 보이는 핸드폰이었다. 며칠 전에 전예슬이 가지고 싶다고 칭얼거리던 그 기종 같은데….

-사은아.

박스를 쥔 나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받아, 그냥.

건너편에서 나긋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위압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데도 위압감을 끼친다. 푹푹 찌는 무더위라서 그런가? 생각이 좀체 이어지질 못하고 뚝뚝 끊겼다.

나의 입술이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달싹거렸다. 네 여자친구는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 자꾸 그 말이 목구멍을 따갑게 치고 올라왔다.

그건 내가 보기에도 차무겸이 나를 향해 취하는 태도가 굉장히, 그러니까, 그런 쪽으로 애매하다는 걸 알고 있단 방증이었다. 하지만 괜한 김칫국을 마시는 꼴이 될까 봐 쉽사리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얘는 정말 별 뜻 없이 베푸는 적선일 수도 있으니까. 거지한테 별 의미 없이 동전 하나 던져줬는데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품는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핸드폰이 없다는 말에 녀석이 눈가를 가리고 큭큭거리며 웃던 모습이 의식 위로 일렁였다.

-내 번호 제일 먼저 저장해.

차무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홀로 남은 나는 뚜, 뚜 하고 끊긴 고물과 비닐에 포장된 핸드폰 박스를 보았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솔직히, 한 번도 가지고 싶은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사실은 언제나….

비싸고, 핸드폰 매장도 주변에 없다는 이유로 늘 모른 체하며 억누르기 바빴던 사사로운 욕심은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존재를 드러냈다. 시대가 발전하며 핸드폰은 이제 단순히 연락의 용도로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저걸로 인터넷에 검색도 할 수 있고, 동영상도 볼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그 외에도….

손안에 쥔 고물의 온도가 뜨겁다. 겨우 1분 남짓에 가까운 통화 한 번 했다고 발열하여 뜨끈뜨끈해진 거다. 이래서 여름에는 먹통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리하여 피해를 본 경우도 적잖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나의 손은 미끄러운 비닐을 뜯고 있었다.

폭서 같은 탐욕에 잠식된 여름밤이었다.

* * *

밤을 꼬박 새웠다.

별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난생처음 가지게 된 최신식 핸드폰을 구경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늦었던 만큼 적당히 살펴보고 일찍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 손아귀에 들어온 네모난 건 요술 상자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신기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이른 동이 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살펴보지 못한 게 수두룩해서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그 후폭풍은 수업 시간 도중 찾아왔다.

다행히 기말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수업은 대체로 자습으로 변경되었다. 담당 교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양호실로 향했다. 퀭한 나의 눈 밑만 봐도 많이 피로한 걸 알아차렸는지 선생님은 쉽게 침대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자기는 성교육 수업이 있어 자리를 비운다고 말했다.

홀로 남은 양호실에서 쪽잠 수준으로 눈을 붙였다.

깨어났을 때는 침대 머리맡이 살짝 낮아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하얀 커튼이 비눗방울처럼 부풀었다가 꺼지는 배경 위로 누군가가 보였다. 한차례 눈을 깜박거린 후에야 그게 차무겸이라는 걸 알아챘다.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은 잠기운에 시야가 뿌옜다. 이불에 파묻힌 손을 빼내 눈가를 비비적거리자, 핸드폰을 쥐고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차무겸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녕.”

얘는 맨날 왜 이렇게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추가 달린 것처럼 축축 처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었다.

“쉬는 시간에 너 찾으러 갔는데 여기 있다고 하길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내게서 벌써 ‘여긴 왜 왔냐’는 따짐조를 들은 것처럼 술술 불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온 지 20분은 지났는데 한 번을 안 깨더라.”

“응.”

“왜? 핸드폰 보느라?”

차무겸이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그가 손에 쥐고 이리저리 건들고 있는 게 내가 밤새 구경하던 핸드폰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번호 저장해놓으라고 했잖아.”

녀석의 앞이니 이렇게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걸 아는데도 누가 위에 올라탄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그냥 그 자세를 유지했다. 아직 수면에서 제대로 건져 올려지지 못한 정신이 비몽사몽의 경계를 걸었다.

“저장 안 할 거야.”

그래서인지 속에만 고여 있던 말이 가릴 것 없이 튀어나갔다.

“왜?”

미적지근한 바람을 뿜어내는 벽걸이 에어컨의 소음이 시끄러웠다. 눅진하게 녹아든 정신이 그 소음으로 자각자각 갈라져 속이 껄끄러웠다.

기운 없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빳빳하게 다려진 녀석의 교복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보인다. 전예슬이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팔을 끼고는 하던 그 강건한 팔뚝. 그게 마치 두툼한 쇠창살처럼 내 앞에 드리웠다.

“차무겸, 너랑 엮이면… 피곤해져.”

차무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그 쇠창살 같은 형태를 인지하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없는 반에 가서 나를 찾았다고. 차무겸이 찾아온 걸 보고 전예슬이 반응하지 않았을 리가. 분명 전예슬은 반색을 표하며 녀석에게 부리나케 달려갔을 것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홍조를 띠는 걔 앞에서 차무겸은 내 이름을 입에 올리며 태평한 소리나 지껄였겠지.

차무겸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딱 잘라 뗀 나의 변명을 아주 우습게 만드는….

차무겸의 배려 없는 태도가 그랬다.

“그래서 너랑 엮이기 싫어.”

이 일이 차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상상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차무겸과 얽힐 때마다 번잡하고 속 시끄러워지는 일이 쑥쑥 늘어갔다. 나의 의지나 바람과는 별개로. 정작 차무겸이 나를 가만 놔둔다고 해도, 차무겸의 주변이 나를 물고 들들 볶으며 도통 놓아주질 않았다.

문득, 공기가 몇 도 내려간 느낌이 들었다.

기이한 흐름의 변화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순간 움찔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차무겸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열이 가해져 펄펄 끓는 무쇠 위로 찬물을 칙 뿌리고 난 이후처럼. 기분의 고저 변화가 그토록 잘 드러날 수가 없는 눈이었다.

이윽고 차무겸이 픽 웃었다.

깊게 팬 입꼬리의 궤적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식혔다. 차무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나의 베개 근처로 내리꽂히듯 떨궈졌다. 자칫했다가는 내 볼을 퍽 하고 후려쳤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나는 어떤 것으로도 제재를 받고 있지 않은데 이불에 가려진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속박감이 전신을 칭칭 감아 침대 저 아래로 처박는 느낌이었다.

차무겸이 그대로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녀석이 그려내는 늦여름의 음영이 나의 몸을 투박하게 가로질렀다.

“그딴 소리나 들으려고 사준 게 아닌데.”

얼굴께로 내려앉는 호흡에서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기색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동공에는 한 점 요동이 없었다. 고고하거나 부담스럽거나. 언제나 둘 중 하나이던 눈빛이 지금만큼은 두 가지를 모두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둘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차무겸은 언제 웃음을 지었느냐는 듯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고 바깥으로 나섰다. 잠깐의 발소리 후 문이 드르륵 열렸다 닫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더듬더듬 손을 들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잔 소름이 우둘투둘 일어나 있었다.

마치, 실수를 인지한 직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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