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2화 (2/24)
  • 2장.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증거처럼 깨어나 확인해본 시각은 고작 새벽 6시였다. 지각이 아니라 차라리 다행인 걸까.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에 뒤척거렸으나 이러다가 또 곯아떨어져 지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몸을 일으켰다. 실상 학교에서 문제를 피운 적이 없는데도 나를 문제아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담임 때문이었다. 괜히 지각하여 또다시 잔소리와 소일거리 폭탄을 맞느니, 잠을 자더라도 학교에서 자는 게 나을 듯했다.

    온수는 사치인 화장실은 그 변변찮은 생김새답게 냉수만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것으로 씻고 나오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관자놀이를 이따금 매만지며 이부자리를 개고 머리를 말렸다. 엄마가 손수 머리를 말려줄 때부터 이 집에 존재하던 헤어드라이기는 금방이라도 맛이 갈 듯 텅텅거리는 소음이 났다. 어째 불안해서 대충 말리고 전원을 뽑았다.

    야광 스티커가 가장자리에 붙여진 거울 위로 비치는 안색이 창백했다. 오늘따라 눈가가 따끔따끔한 게 다래끼라도 도지려는 모양이었다. 몸이 조금만 지치면 불쑥불쑥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양호실에서 약을 받아먹어야 할 성싶었다. 이럴 때면 학생이라는 게 고마웠다. 건강하지 않은 몸은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학교에 있는 양호실은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병원이 따로 없었다.

    동네 변두리에 위치한 암영고는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 새벽 공기를 담뿍 머금은 학교는 꼭 폐가처럼 으스스했다.

    잠겨 있으면 어떡하지 싶었던 게 무색하게 양호실 문은 가분히 열렸다. 조용히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학교에서 적은 돈을 들여 구매한 침대 매트리스는 돌처럼 딱딱한 편이었지만 집구석 차디찬 바닥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똑딱똑딱, 집에는 없는 시계가 귓전을 다소 강박적으로 울렸다.

    눈을 깜박거리자 다래끼가 도지려는 눈가는 누가 꾹 누르는 것처럼 욱신거렸고, 머리를 휘저어대는 두통도 여전했다. 또다시 각성 상태가 지속되는 것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때문에 푹 잠들기보다는 뒤척거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상체를 일으켰다. 양호 선생님은 타지에서 발령을 받아 온 덕분에 그나마 관대한 편이라지만, 아침부터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또 담임에게 무어라 한 소리를 전할지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상황을 지레짐작하고 앞서 행동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건 눈치일까, 비굴함일까.

    닳을 대로 닳은 슬리퍼를 직직 끌며 양호실 밖으로 나섰다.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도 아닌데 머리가 물통에 담갔다가 빼낸 것처럼 먹먹했다. 나서기 전 확인한 시계는 어느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등교를 할 때까지만 해도 어둑어둑하던 하늘은 어느새 환한 빛살로 차올라 새 하루의 아침을 빼꼼 드러내고 있었다.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밟는 찰나였다.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궁금하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계단 난간 너머에서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게 차무겸이라서 무심코 발이 멈추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올라오는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리석처럼 판판한 뺨이 동그란 모양으로 볼록 부풀어 있었다. 입가에는 오늘도 역시 하얀 사탕 막대가 걸쳐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던 차무겸이 제게 닿는 빤한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차무겸은 무척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입매를 시원스레 찢어 웃었다.

    “안녕.”

    새벽잠이 묻어 아직 온 세상이 깨어나지 않은 시각임에도 녀석은 못난 구석 한 점이 없었다. 반듯하고 준수한 이목구비는 굴욕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얼굴이 워낙 잘나서 그런지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칼마저도 무슨 화보를 찍기 위해 배우가 단장을 한 것처럼 멋스러워 보였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차무겸을 응시하다가 걸음을 뒤로 물렸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올라오던 차무겸과 마주 보는 위치에 섰다.

    녀석의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얼핏 보기에도 내가 가지고 다니는 고물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처럼 세련되고 고급졌다. 이 아침에 누가 그렇게 연락을 하는 건지 차무겸의 핸드폰은 계속해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부탁할 게 있어.”

    차무겸의 홍채 속에 부유스름한 여명이 점점이 고여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맞닥뜨려서 다행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만큼 녀석이 벌써 입을 털었을 가능성은…. 아니, 어젯밤 돌아가면서 핸드폰으로 이미 말했을 수도 있나?

    차무겸을 앞에 두고서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놔 봤자 소용없었다. 이건 정면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었다.

    “혹시 말했어?”

    “뭐를?”

    반문하는 녀석의 태도는 아직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자아냈다.

    “어제 나 본 거.”

    “…….”

    “혹시 말 안 했으면… 말하지 말아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갑자기 느슨해지기도 하고 또 갑자기 조여지기도 했다. 양호실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늘어진 실타래처럼 죽죽 풀어진 그것이 돌연 꽉 수축했다. 당장이라도 저 계단을 밟고 올라온 누군가가 이 대화를 엿들을 것만 같았다. 불안감이 목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아니, 어쩌면 불안감은 갑작스럽게 나타날 누군가가 아니라 미지수인 차무겸의 반응이 일으키는 걸지도 모르겠다.

    대꾸를 기다리며 꼴깍 삼켜내는 침이 유난히 썼다.

    “그래.”

    차무겸은 제 핸드폰을 손에서 장난스레 굴리며 답했다. 반응이 돌아왔고, 그게 기대하던 쪽인지라 다행인데 한편으로는 얼떨떨했다. 왜 이렇게 쉽지? 뭐가 이렇게 간단해. 인생사 한번 제대로 풀려본 적 없는 내게는 당혹감만 부추기는 수락이었다.

    나의 눈빛에 깃든 의구심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렇게 봐?”

    “…진짜 말 안 할 거야?”

    차무겸은 생뚱맞은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방금 하지 말아 달라며.”

    어젯밤, 문태욱과 내가 친구처럼 보이냐던 수수께끼 같은 말이 귓전을 쓱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차무겸이 보이던 감정은 명백히 비웃는 쪽이었다. 문태욱과의 관계를 운운하던 내게 향했다기보다는…. 어쩌면, 차무겸은 문태욱을 조금도 친구와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가정이 불쑥 고개를 치들었다.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조금도 없는 가정이었다.

    “그래, 부탁할게.”

    그가 이렇게 나오니 더 말을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눈동자에 커다란 돌멩이를 달고 있는 것처럼 깜박거릴 때마다 묵직한 통각이 뒤따랐다. 아까보다 조금 더 통증이 첨예해진 눈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돌렸다. 향하려다가 만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차무겸의 가벼운 음성이었다.

    “근데 사은아.”

    저번부터 녀석은 나를 지나치게 친근하게 불렀다.

    날 알면 얼마나 안다고 사은이 사은이…. 내가 녀석을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 걸 반추해보자면 다소 일방적인 사교성이었다. 쟤는 원래 여자애 이름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부르나. 민망해서라도 성을 꼭 붙여서 부르는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과는 조금 달랐다.

    이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불리지 않은 이름이라 부쩍 낯설었다. 초등학생일 적에는 ‘김 씨네 딸’이었고 중학생일 적에는 ‘사기꾼의 딸’이었고 이제는 ‘노름쟁이의 딸’로 불리었기에. 난 이름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마을 안에 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키기 싫은 거면 알바를 관두면 되잖아.”

    때아닌 사색을 깨운 건 잇따른 홀가분한 어투였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몰라 얼마간 망연해졌다. 무슨 악의나 꿍꿍이가 있나 싶어 헤아려보자면, 차무겸은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일상을 읊조리듯 평이할 따름이었다.

    정말로 호기심이 들어 물어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퉁명스러운 타박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궁금증에 뾰족한 토를 다는 게 내게 이롭게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들킨 비밀을 꽉 쥐어버리게 된 차무겸.

    결국 일이 우려한 대로 벌어진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직 아니라면 어떻게든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알바 왜 해?”

    차무겸은 내가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한 줄 아는지 거듭 물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주 넓고 광활한 공상의 세상에 빠진 것처럼 나와 녀석밖에 없는 주변을 감지하고서야 입이 열렸다.

    “돈이 없으니까.”

    예전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자존심이 닳는 느낌이었다. 인생이란 풍파 속에 놓인 자존심은 결코 온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멀쩡한 외관 뒤에 숨어서 좋은 일로는 차오르고 나쁜 일로는 깎여나갔다.

    나는 때때로 나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의 각도로 깎여나갔는지 궁금했다. 채워질 일 없이 갈려 나가기만 하던 삶이었으니 그 모양새는 전혀 예쁘지 않으리라 어림짐작했다.

    이젠 길이 든 건지 아님 닳아버릴 것도 남지 않은 건지 내 스스로의 비관을 끄집어내는 말에도 속은 그저 덤덤했다. 그리고 있는 사실 그대로이기도 하고. 내가 쟤 앞에 어디 부잣집 여식의 행세를 하며 나타난 것도 아니고. 비천한 신세야 진즉 까발려진 지 오래지 않은가.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돈이 없어?”

    차무겸은 굉장히 낯선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그게 어떻게 없을 수가 있느냐는 듯,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깔아뭉개는 도도한 눈빛이다.

    한쪽 손에는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기값만 몇백을 호가한다는 최신형 핸드폰, 다른 쪽 손에는 한국에서 구하기도 힘든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서 말이다.

    “필요해? 내가 줄까?”

    눈살이 무심코 찌푸려졌다.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건네는 말은 여전히 악랄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투명하게 다가와 외려 기분이 나빠졌다. 의도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짓뭉개는 건 권력을 가진 자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닌가. 그러니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얼마 필요한데?”

    얘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어쩌면 이건 한 단계 위의 괴롭힘, 그러니까 고단수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근한 척, 너그러운 척 접근하지만 저 속내에는 결코 문태욱과 다를 바가 없는 경멸과 멸시가 세균처럼 득시글거리는 걸지도.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순간 마음이 홱 비뚤어졌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만약 저 제안에 정말로 나를 엿 먹이고자 하는 고의성이 없다면 통탄을 금할 수가 없는 순진무구였다.

    “네가 가지고 있는 만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빈자의 속내를 조금도 헤아려보지 않는 부자의 마음과 뭐 다를 게 있으랴. 으깨지고 갈라지는 건 늘 그렇듯 가지지 못한 자일 뿐이다.

    그래서 저런 대답이 튀어나갔다.

    나도 딱 네가 가진 만큼만 있었으면 좋겠어. 이 구닥다리 향촌에서 남들 침을 질질 흐르게 하는 웅장한 저택에 살며, 아주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느라 밤낮으로 찬 바람을 맞을 일이 없으며, 새로 나오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체험해볼 수 있는 그런 삶. 꼭대기에서 태어나 남을 대하는 데에 조금도 주눅 드는 게 없으며 그렇기에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애한테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그런 처지. 주변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오만방자함을 지닐 수 있는 배경.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 표현한 거였다.

    조금쯤은 골난 이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고 싶기도 했고.

    나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사탕 막대를 문 녀석의 입꼬리가 일자를 그렸다. 차무겸은 침음을 내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매끄러운 가죽으로 이루어진 그것은 바로 지갑이었다.

    차무겸은 지갑 아가리를 쭉 벌려 흐음, 하고 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는 지갑 안에서 꺼내 든 지폐 수십 장을 내게 내밀었다. 얼핏 보니 수표였다.

    “지금은 이것밖에 없는데.”

    어젯밤 내게 내밀어진 하얀 돈봉투가 떠올랐다.

    “더 필요하면 가져오라고 하고.”

    텅 빈 지갑을 살살 흔들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살면서 기가 막히는 심정은 적잖이 겪어왔다고 자부했는데, 적어도 오늘로서야 그 기분을 제대로 실감했다.

    이게 무슨….

    어안이 벙벙해져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내 손에 녀석이 억지로 수표를 쥐여주었다. 그건 가진 값어치에 비해 너무나 가벼워서 현실성마저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어쩌면 그게 손에 잡히는 물건보다는 어떠한 ‘적선’ 혹은 ‘동정’이라는 감정에 가깝게 느껴져서일지도.

    “…됐어, 다시 가져가.”

    그럴 리가 없음에도 다래끼가 시각에 영향을 준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저 수표가 꼭 내 손을 깨물 뱀처럼 보일 리가 없었다. 상앗빛의 이빨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사특한 뱀 말이다. 아직 이 돈을 쓰지도 않았는데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반강제적으로 쥐어진 돈을 녀석에게 내미는 차였다.

    하얀 교복 셔츠의 팔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빨간 색깔이 도화지 같은 배경 위로 번졌다. 망막 위로 새겨지는 붉은빛이 시야를 아득하게 흔들었다. 콧등이 별안간 시큰해졌다. 사실은 대화를 이어가는 아까부터 조금씩 체감했는데 단순히 감기가 오려나 보다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월례 행사처럼 다가드는 그것.

    수표 다발을 들지 않은 손으로 피가 흐르는 코를 막으려고 하는데, 나보다 앞서 내 코에 닿는 것이 있었다.

    “너 코피 난다.”

    차무겸의 소매였다.

    인중을 타고 흘러 톡 굴러떨어질 정도면 그 양이 범상치 않을 테다. 그럼 녀석이 가져다 댄 소매도 필시 지저분해질 텐데 차무겸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쯧, 하고 혀를 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내가 녀석보다 높은 계단에 서 있는데 차무겸이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모양새를 그렸다. 차무겸의 키가 터무니없이 큰 까닭이었다.

    “괜찮으니까 놔.”

    “휴지 있어?”

    “아니… 화장실에 있겠지.”

    나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차무겸의 눈썹이 삐딱하게 꿈틀거렸다. 천연덕스러운 행색을 곧잘 선보이던 이목구비가 대번 거만한 면모를 풍겼다.

    “원래 자주 나?”

    피로가 먼지처럼 달라붙은 몸이 성할 리가 있겠나. 감기나 다래끼처럼 코피 역시도 숱하게 찾아오는 현상 중 하나였다. 오늘은 특히 잠을 못 자 머리가 핑그르르 돌 정도였으니. 나는 대답 대신 어떻게든 차무겸의 손을 떼어내려고 낑낑댔다. 이상하게도 팔뚝을 잡고 아무리 밀어내도 밀리지가 않았다. 계단 위에서 묘한 고집이 맞부딪쳤다.

    그러던 중이었다.

    “어? 무겸아! 벌써 왔….”

    기척은 예기치도 못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나와 차무겸의 눈길이 동시에 돌아갔다. 녀석이 조금 전 밟고 올라온 계단 아래, 전예슬이 발랄한 얼굴로 올라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수표 다발을 치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금전과 관련된 그 무엇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어서였다. 물론 나는 다시 이것을 돌려줄 속셈이었기에 ‘들키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 나와 차무겸의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웠다. 그것만으로도 타인에게 비치는 그림이 아주 이상할 게 자명했다.

    “놔.”

    차무겸의 팔을 뿌리치듯 내쳤다. 녀석의 소매는 예상대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차무겸은 눈을 내리깔아 제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본 후 전예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휴지 있어?”

    “응?”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눈알만 도르륵도르륵 굴리던 전예슬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해 휴대용 티슈를 내밀었다. 차무겸의 손을 타고 건너온 그것이 내게로 전해지기 전에 등을 돌렸다.

    매정하게 꾸며낸 뒤태로 전예슬의 따끔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지금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게, 저기에 서서 이 말도 안 되는 그림을 이어나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가 떠나간 자리에서 어떤 말이 오갈지 벌써부터 그려졌다. 그것마저도 털어냈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복도를 거닐다가 여자 화장실로 들어섰다. 물때가 겹겹이 낀 거울 위로 나의 모습이 오롯이 비쳤다. 빨간 물감을 마구 번져놓기라도 한 것처럼 인중 부근이 벌그죽죽했다. 한쪽에 놓인 휴지를 잡아빼 벅벅 닦았다. 잘 지워지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묻혀 한 번 더 닦았다. 애매하게 지워졌다.

    한숨을 내쉬다가 결국에는 세수를 했다.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 몽롱한 정신이 냉수에 억지로 깨어났다. 그러고서야 한쪽 주머니가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수표가 가득 든 주머니였다.

    * * *

    오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바윗덩이라도 쑤셔 넣은 것처럼 묵직하게 다가오는 치마 속 주머니 때문이었다. 전예슬의 등장으로 정신없이 챙긴 돈다발은 여전히 내 수중에 있었다.

    세수를 마친 나는 벼락에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급히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남은 물기를 교복 조끼에 대충 닦아내고서 그것을 꺼내 보았다. 액수가 다양한 수표였다. 그 양이 상당한 탓에 한 장 한 장 세는 데에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렇게 빛 한 줄기 드나들지 않는 냄새나는 칸막이에서 세어본 결과….

    ‘삼백만 원….’

    차무겸은 미친 게 틀림없었다. 대체 어떤 학생이 이 정도의 돈을 지갑에 넣고 다닌단 말인가. 내가 3개월 동안 뼈 빠지게 일하여 번 돈보다도 많은 액수를, 녀석은 한낱 용돈처럼 들고 다녔다. 아니, 이걸 머뭇거림 없이 내어주던 걸 보면… 용돈이라 칭할 만큼의 값어치가 있기는 한 건가? 혹시 바닥에 버려도 문제가 없을 푼돈인가? 그 가정에 맥이 축 빠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놀라움은 잠시였다.

    이건 내 돈이 아니었다. 순간 자존심을 짓이기는 녀석의 행태에 신경질이 나 내지른 오기일 뿐이다. 진짜 돈을 얻으려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가 필요하다고 한 건 돈이 아니라 녀석의 배경이었는데, 차무겸이 멋대로 지갑을 열고 내게 돈을 준 게 아니던가. 명백히 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이 돈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가 더 시급한 문제였다. 이 돈은 여전히 내게 삼키면 급체할 무언가로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고민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었다.

    “김사은.”

    1교시가 끝나고 차무겸이 있는 반에 찾아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책상 앞으로 누군가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슬쩍 고개를 들자 팔짱을 낀 전예슬이 보였다. 무언가에 심기가 틀어진 듯 실로 언짢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새벽에 보인 광경을 따지러 온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너 무겸이랑 무슨 사이야?”

    전예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저마다 할 것을 하던 아이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차무겸한테 말을 붙일 때의 사근사근하던 태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걔 앞에서는 요염한 꽃송이 같은 면모만 내비치더니, 내 앞에서는 줄기의 가시만 날렵하게 세워댔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럼 아침에 왜 그러고 있었는데?”

    이목이 조금 더 따갑게 꽂혀 들었다.

    내 인생 속에서 운수가 좋았던 순간이 없지만, 유독 불운이 연속적으로 다가들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이 바로 그 진 빠지는 날인 모양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손에 쥐게 된 돈다발로 심경이 복잡한데 얘까지 와서 이러니 정말 기력이 실시간으로 쇠했다.

    “아까 봤을 거 아니야. 내가 코피가 나서 걔가 도와준 것뿐이야.”

    “너 그거 수작이지?”

    “뭐?”

    “무겸이랑 엮여보려고 개수작 부린 거잖아. 아니야?”

    말 속에 박힌 가시는 나를 매도하려고 작정한 양 첨예했다. 내 앞에 선 전예슬을 가만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만큼 건수를 잡은 것처럼 지독하게도 굴었다.

    전예슬과 틀어지게 된 데에는 사건이 있었으나, 이 역시 나의 잘못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졸업한 두 학년 위의 남자 선배가 내게 호감을 보인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게 고백을 했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가끔가다가 인사를 하거나 그랬을 뿐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예슬이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는데 전예슬의 남자친구에게 -분명히 말하자면 전예슬은 그 선배와 사귄 적이 없다- 꼬리를 친 여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예슬은 1학년 때 문태욱과 같은 반이었다. 둘은 나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서 친해진 유형이었다.

    “그런 거 아니고… 진짜 도와준 게 다야. 평소에 말 섞은 적도 없어. 너 걔랑 붙어 다니니까 알 거 아니야.”

    차무겸과 엮이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따금 입에 올리게 되는 상황이 훨씬 더 자주 들이닥쳤다. 아침의 그 소요를 전예슬, 그리고 이쪽에 관심을 꽂는 아이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변명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내 주변으로 난 불은 가만 놔둘수록 더욱 맹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그러니 뭐라도 하는 게 나을 땐 마땅히 나서는 게 옳았다.

    전예슬은 내 대꾸에 할 말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대로 오늘을 제하고서 나는 차무겸과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전예슬은 수업 종만 치면 차무겸이 있는 3반으로 쪼르르 달려가기 바빴으니 그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때마침 다음 교시의 과목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덕분에 전예슬의 서슬 퍼런 눈길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딴에는 최대한 알아듣게 설명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그게 나만의 착각임을 깨달은 건 오후의 체육 시간이었다.

    교실을 나선 게 이토록 불안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당연했다. 전전긍긍하느라고 여전히 차무겸의 돈은 나에게 있었다. 옷을 갈아입어야만 하는 체육의 특성상 불길함을 쉬이 떨쳐낼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 사물함 자물쇠가 잘 잠겼는지 이중 삼중으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행여나 그걸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가는…. 고작 상상인데도 눈앞에 시커먼 먹물이 쫙 퍼졌다.

    원치 않아도 고개가 자꾸만 교실 쪽으로 돌아갔다. 혹시 평소에는 나타나지도 않던 도둑이 오늘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닐지…. 아니면 다른 반 아이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고 내 사물함 주변을 빙빙 도는 건 아닐지….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몹쓸 상상이 자꾸만 이어질 무렵.

    퍽!

    별안간 뒤통수로 강렬한 충격이 엄습했다.

    내 머리를 강타한 피구공이 바닥으로 떨궈져 통통 튕겨 나갔다. 얼얼한 머리통을 감싸 쥐고서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전예슬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안.”

    건네는 사과에 비해 낯은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는, 잘 모르겠다. 공이 사방팔방에서 달려든 것 같다.

    기본적으로 교사의 소임에 열의가 없는 체육 선생은 늘 자유시간을 주고 담배나 피우러 교정 뒤편으로 향하기 일쑤였다. 관리 감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학생들의 악행은 곧잘 벌어졌다.

    고개를 돌리다가 공이 다시금 날아왔고, 이번의 타격은 제법 거셌다. 순간 뇌하수체가 다 흔들리는 아찔함에 몸이 갈대처럼 비틀거렸다. 두통이 심해지고 오감이 물속 깊숙한 곳에 처박히듯 멍멍해졌다.

    그러다가 질끈 감은 눈을 떴을 때, 아침처럼 흙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피를 발견했다.

    주위의 몇몇이 피를 발견하고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라는 인형을 세워두고 이리저리 판을 흔들기 바쁘던 아이들마저도 멈칫했다. 먼지가 이는 운동장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순간 잿빛깔의 환멸이 손과 발끝을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심장 끝이 갉아 먹히는 게 심했다.

    나는 아침처럼 빨갛게 번졌을 게 뻔한 코를 체육복 소매로 틀어막고서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올려다본 교내, 반사된 빛줄기 너머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턱을 괸 채로 나를 내려다보는 묘연한 눈빛, 턱 부근에서 사락대는 소매 끝자락에 번진 말라붙은 핏자국.

    차무겸이었다.

    * * *

    “좀 누워 있다 갈래?”

    콧속에 돌돌 만 휴지를 쑤셔 넣고서 선생님이 내민 빈혈약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서 양호 선생님의 배려하에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이어 오후에도 피를 쏟아서 그런지 빈혈이 꽤 심했다. 누워서도 허공이 빙글빙글 돌았다. 도는 게 내 눈인지 내가 누운 침대인지 모르겠다. 힘 빠진 손길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물과 함께 삼켜냈음에도 잔재하는 약 맛이 입 안을 깔깔하게 적셨다.

    잠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편하게 머리를 뉘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나를 괴롭혔다. 하다못해 새벽 2시만 되면 쳇바퀴 굴리듯 반복되는 엄마의 그리움조차도 불면증을 일으키는 형국이니 말이다.

    부러 눈을 꾹 감았다. 머릿속이 암전으로 물들자 교내로 막 들어오기 직전 마주쳤던 눈이 떠올랐다.

    ‘…….’

    그때, 난 아주 잠깐 멈춰 섰었다.

    남이 보았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찰나. 오연한 자세로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차무겸의 눈이 꼭 묻는 느낌이라서였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아?’

    …라고.

    나는 녀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단지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런 반면 잘 모르기 때문에 저게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후자가 맞다면, 나는 미련한가? 내 너절하고 볼품없는 삶은 미련으로 가득 차 있는 건가? 한 번도 되짚어본 적 없는 근본적인 질문이 퐁퐁 피어올랐다.

    적어도 내 삶이 그렇다고 한들 그걸 차무겸이 꼬집을 자격은 없었다. 난 내게 주어지는 선택의 상황에서 늘 최선을 다했으니까. 때마다 머리를 굴려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지를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력했고, 애써왔다. 그렇게 골라 골라 만들어진 인생이 이렇게 생겨 먹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고작 녀석의 눈길 하나 가지고 상념이 이리도 깊어지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까이서 마주쳤을 때는 기이한 부담감을 일으키고, 멀리서 볼 때는 불필요한 타박이라도 들은 것처럼 속절없이 불쾌해지는 눈빛.

    그보다 차무겸이 무얼 안다고. 태어나 원하는 거라면 손가락질 한 번에 뭐든 소유할 수 있었을 게 뻔한 놈이.

    “무슨 일이니?”

    생각의 바닷속에 넘실넘실 잠겨갈 즈음.

    양호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등장했다. 꾀병이라도 부리듯 과도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음성이 낯설지 않았다.

    “쌤, 저희 배가 너무 아파서요.”

    “너희 둘 다?”

    “네. 한 시간만 누워 있다가 가도 돼요?”

    양호 선생님은 누구 하나 편애하는 법 없이 두루두루 친절했다. 낮잠 자기 딱 좋은 시간 찾아온 남학생들에게도 약을 건네주고 침대로 이끌었다.

    “미리 와서 자는 친구 있으니까 조용히 하고.”

    “네.”

    등 뒤편에서 들리는 커튼 소리에 몸을 경직시켰다. 한 명은 잘 모르겠지만 한 명은 모를 수가 없었다. 문태욱이었다. 나는 벌써 녀석이 내 존재를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추격자를 코앞에 둔 도망자처럼 심장이 알싸하게 두근거렸다.

    문태욱이 커튼을 열어젖히고 나를 발견하면 또다시 피로한 일이 벌어질 거다. 아침부터 쌓게 된 고역만 해도 숱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멈췄으면 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시니 함부로 굴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으나 다음 순간 낭패가 벌어졌다. 수업이 없는 교사 하나가 양호실로 찾아와 커피 한잔하자며 그녀를 꼬드긴 것이었다. 체육부터 양호까지, 암영고에는 열의를 찾아볼 수 있는 교사가 어쩜 이리 없는지 모를 일이다.

    양호 선생님의 공석에 커튼이 쳐진 침대 옆자리가 시끄러워졌다.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던 문태욱의 목소리가 아주 쌩쌩해진 걸로 보아 분명한 꾀병이었다.

    “진짜? 진짜로 어제 그 집 가봤어?”

    부산스러움이 신경을 콕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다니까. 씨발, 전예슬이랑 나랑 티는 못 냈는데 눈 뒤집히는 줄 알았다. 무슨 드라마 세트장 같더라.”

    문태욱이 찬사처럼, 감격에 겨운 말을 다소 거칠게 표현했다.

    “치사하게 혼자만 가보냐. 존나 부럽다.”

    “너도 나중에 무겸이한테 데려가 달라고 해.”

    젠체하는 음성이 커튼 너머로까지 물씬 전해져왔다.

    무겸이…? 그제야 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차무겸의 집이라는 걸 깨달았다. 언덕 위 붉은 동백나무 저택 말이지. 문태욱이 어제 거길 가봤나 보구나. 이렇게 아닌 척 꺼드럭거리는 걸 보면 거긴 마을 주민들이 예상한 대로 여간 으리으리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마당에 수영장이랑 농구대 있고. 그리고 집 안에 방도 많고 넓더라. 위아래층 각각 10개는 넘어 보이던데.”

    “거기서 차무겸 혼자 살아?”

    “누구였지, 경호원 형이었나… 그 사람하고만 사는 모양인데 거기 자세히 보니까 건물이 두 개더라고. 그 형은 뒤쪽 건물에 산대. 내가 어제 들어간 데서는 차무겸 혼자 사나 봐.”

    “와… 죽이네.”

    “나라면 그 집에서 평생 안 나올 수도 있을 듯. 솔직히 걔 시계나 차 보고 말 많았는데, 집 가보면 그런 건 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정도라고?”

    머리끝까지 올라가 있던 이불이 스르륵 걷혔다. 나의 고개가 슬금 뒤로 향했다. 얇은 커튼 너머 어느새 상체를 일으킨 문태욱이 말도 말라는 것처럼 경망스레 손을 휘젓고 있었다.

    “어제 물어보니까 거기 언덕 위가 걔 할아버지 땅이라더라. 어차피 그 집 안 쓰고 버려둬서 이번에 차무겸이 잠깐 내려오게 된 거래.”

    “근데 걔는 여기까지 전학을 왜 온 거야?”

    “몰라. 그건 말 안 해주던데. 근데 뭔가 냄새나지 않냐?”

    “무슨 냄새?”

    “아니, 좀…. 걔 있는 집안이기도 하고. 서울에서 사고 쳐서 내려온 건 아닌가 하고.”

    “그런가?”

    “아, 맞다. 그리고 씨팔. 어제 존나 웃겼다니까. 전예슬 걔한테 차여가지고….”

    “어? 예슬이가 차무겸한테 고백했어?”

    “고백 안 해도 관심 있는 거 누가 몰라. 같은 반도 아니면서 맨날 찾아오고 따라다니고…. 근데 어제 차무겸이 아주 빵 터뜨렸잖아.”

    “뭘?”

    “차무겸 서울에 여자친구 있다고 하더라고.”

    이불을 움켜쥔 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헉, 진짜?”

    “그렇다니까. 어제 진짜 배 찢어지는 줄 알았는데. 네가 그때 전예슬 표정을 봤어야 해. 우리 전예슬 씨 높은 콧대 바짝 눌렸지, 뭐.”

    “전예슬 귀찮아서 거짓말한 거 아니고?”

    “아예 스피커 폰으로 인사시켜주던데? 전예슬 억지로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진짜 입꼬리 파들파들 떨리더라.”

    문태욱은 꼴좋다는 것처럼 킬킬댔다.

    “그리고 어제 통화할 때 이름 부르는 거 듣고 슬쩍 찾아봤거든? 여자친구 존나 예쁘던데. 무슨 연예인 지망생인 줄.”

    “진짜? 봐봐.”

    핸드폰 화면을 공유하는 모양인지 두 개의 인영이 가까이 맞붙는 게 보였다. 그 음영을 지그시 보다가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뜻밖의 소식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퍼졌다. 여자친구 있었구나. 그것도 서울에. 모두가 나와는 다른 세상에 놓인 이야기였다.

    자꾸만 귀를 기울이는 게 내게 득이 될 게 없을 듯하여 눈을 억지로 감았다. 하지만 오후의 양호실은 너무나 조용했고 교사가 사라진 곳은 수다의 장이 되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듣고 싶지 않아도 문태욱의 입방아가 자꾸만 커튼을 넘나드는 것이었다.

    “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다고. 나도 가보고 싶다. 거기 우리 엄마도 요즘 맨날 얘기하잖아.”

    “데려가 달라고 하면 데려가 줄걸? 자기 심심하니까 아무 때나 와도 괜찮다고 하던데.”

    “진짜?”

    “어.”

    문태욱은 여전히 생일 선물로 그럴싸한 로봇을 받은 다섯 살배기 사내아이처럼 거들먹거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차무겸’이 그의 자랑거리라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짙은 회의감에 잠겼다. 저러면서 문태욱과 친구 같아 보이냐는 말은 왜 한 거지. 아무리 봐도 문태욱과 동등한 수준의 친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한바탕 쏟아진 정보에 속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나도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듣게 된 이야기만으로 기분이 저조해진 거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 하나만 내세우기에는 오늘 내게 벌어진 일이 영 녹록지 않았으니까.

    차무겸의 적선 내지는 동정? 전예슬의 시기와 질투? 문태욱의 거들먹거림? 아니면….

    치마 속에 넣어둔 돈은 잘 있나? 있어야만 한다. 문태욱만 없었더라도 일찍 교실로 돌아가 봤을 텐데.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온갖 잡다한 상념이 머릿속에 눌어붙었다. 내 안에 내가 수십 명은 있는 기분이었다.

    새벽에도 아침에도 찾아오지 않던 잠기운은 불현듯 몰아쳤다. 까무룩 잠들기 전 떠오른 건 나를 내려다보던 차무겸의 오묘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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