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3 / 0340 ----------------------------------------------
최종편!
힘의 격류가 아닌, 폭류. 겨우 검에서 내놓는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막대한 마력의 파도가 방주의 중심에서부터 터져나오며 5분지 1에 달하는 영역을 덮어간다. 그 막대한 위력에 레플리카들은 속절없이 녹아내리며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검제. 검제의 일격이었다. 머나먼 옛날에 군대를 몰살시켰다고 일컬어지는 무적, 무정의 일격이 단숨에 적군을 날려버렸다.
전장에 서 있는 열개의 기둥. 그것의 위에서 그 일격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남녀의 얼굴이 급속히 굳어간다. 안색은 창백해져, 이미 말로 형용하기는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거, 우리들은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양 어깨가 드러나는, 타이트한 옷 위에 검은 망토를 입은 여아(女兒)가 어깨에 새겨진 푸른 나비를 강조하듯 몸을 풀며 말했다. 기둥간의 거리는 굉장히 멀었지만, 다른 기둥에 서 있는 남녀들은 바로 옆에서 말한 걸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저 위력은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소리야, 하여. 여기서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할거라고 생각해? 아무도 없어. 게다가 저녀석들은 원래 불사를 상대해야 할 녀석들, 곧 빠져버릴거다. 우리의 차례는 그 다음이야, 하여."
"알고 있어요, 선생님. 하지만 무인(武人)으로서 저런 걸 보면 뭐랄까, 자존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고나 할까......"
그 말에는, 적룡을 그대로 깎아만든 것 같은 붉은 창의 소유주인 윤도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하여와 같은 그 무력감을 겪고 있었다.
방금의 일격은 압도라던가, 승세를 보인다던가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학살, 전쟁자체를 심심풀이로 여기게 할만한 무적의 신위였다. 자신과 같은 컬러나이츠는 백날을 연마해도 도달할 수 없는, 무적의 신공인 것이다. 나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윤으로서도 힘든 것임은 틀림 없었다.
저렇게 강한 자가 있는데, 자신이 필요할까와 같은 그 감정. 일종의 소외감과도 같다. 저런 모습을 보고 누가 자신의 무위를 자신있게 내놓을 수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금과 은의 기사의 무력을 저 무력에 비견한다는 것은 태양과 반딧불을 비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너무 속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수정같은 질감의 주황색의 활, 학이 그려져 있는 각궁을 들고 있는 메이드 복의 여성이 부드럽게 웃는다. 성녀와도 같은 미소에 윤이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거야 그렇지. 헌데 너 그 옷차림은 뭐야?"
"메이드 복이죠. 아, 채봉은 본 적 없던가요?"
존대임이 분명한대도 오히려 깔보여지는 것 같은 화법. 윤은 여전히 익숙한 그 어법을 구사하는 가춘운에게 창끝을 휘둘러보였다.
"내 말은, 이런 전장에서 왜 그 딴 옷을 입고 있냔거야.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윤의 얼굴은 짙은 수심에 깔려 있었다. 하여나 경홍 같은 컬러나이츠 2기생은 모르는, 죽어버린 1기생을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춘운의 눈썹이 잠시 기묘한 감정을 품고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분노, 는 아니었다. 오히려 호의적인 감정, 귀여운 동물을 보았을 때와 표정이 흡사했다.
"어머, 채봉이 설마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최전위에 서는 채봉이 만년 후위에 서는 나를? 어머머."
채봉. 윤의 무기는 창, 전위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 비해 춘운은 활이니 분명히 만년 후위라고 자신을 지칭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윤에게는 그 말뜻이 곧이 들리지 않았다. 어딜봐도 비꼬는 어투가 가득한데, 그런 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삐친 듯이 고개를 돌리는 윤이 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앞으로 있을 전투는 지금까지 겪어왔던 소소한 전투보다 격할 것이 당연했기에, 윤은 지금까지의 사담은 잊기로 마음 먹었다.
훅, 파바바방!
연결되는 창격이 네번이나 공기를 압축, 터뜨린다. 검제의 신공에는 비할바가 아니었지만 어느곳에 가도 꿀리지 않는 무위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 힘드려나."
기둥 위에 쪼그린채로 검은 색의 클로, 흑묘조를 맞부딫이며 시간을 때우던 경홍이 한숨을 내쉰다. 저멀리 보이는 선생님의 무위와, 단단한 대지를 순식간에 갯벌로 만드는 검제의 신위를 보니 방주에 오르기 전까지는 제대로 무력을 익힌 적이 없는 경홍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힘들지. 아, 경홍은 이런 전투가 처음이였지?"
"응....."
하여의 걱정스런 물음에 경홍이 동의를 표했다. 씁쓸하다는 것을 느끼기 이전에 엄청난 실력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전투. 그 제대로 된 실전을, 경홍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레플리카 한뭉텅이와 싸우기는 했었고 실전과 비슷한 대련도 해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진짜 실전과 같을리가 없었다. 이미 대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공기가 달랐다.
꽤 멀리 있는데도 아래에 송풍기를 튼 것처럼 피냄새가 확 올라온다. 그리고 영화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명소리와 칼이 살을 베어내는 소리.
거짓은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이길 수 없듯이, 공포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느껴졌다. 게다가 전장에서 느껴지는 광기, 한명의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저 광기의 하나가 되지 않는 이상 벗어나는 것은 무리다.
"윽....."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아도.
느껴졌다. 전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세가 어떤 상황인지. 이기고 있어도 본질적인 공포가 극복되지 않는다.
"경홍, 괜찮겠어? 잠시 안에서 쉴래?"
"아니야. 괜찮아."
하여가 안위를 묻지만, 매몰차게 뿌리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기 혼자만 관제탑의 침실에서 누워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들은 피를 흩뿌리면서도 적 하나를 베어내기 위해 달겨드는데 혼자서 쉰다니, 원망 받아도 할말이 없지 않은가.
그런 경홍의 모습을 보며 은색의 장총, 은오포의 소유자이며 컬러나이츠의 쌍익(雙翼) 중 하나인 민초가 혀를 찼다.
"이런 이런. 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나 있으려나요...."
이런 대규모 전쟁은 그로서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민초는 긴장하지 않았다.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은 전쟁에 끼어드는 것이 아닌, 단순히 '맞상대'를 하면 그만이었다.
컬러나이츠에게 내려진 명령은 숭배받던 돌, 옴팔로스의 고렘이다. 다른 잡병들은 영왕의 군세와 마수의 혼합병들에게 맞기면 그만. 걱정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에 민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요.'
이미 전장에 한번 서 보았다. 이렇게 '전장'이란 느낌이 물씬 드는 곳에 난생 처음 서 본다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이었다. 이런 집단광기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장하다고 해야할 정도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민초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 스스로는 이렇게 현실과의 격차가 큰 싸움을 당장에 해버린 것이 아니었다. 작은 전투부터 차근 차근. RPG의 주인공이 조금씩 레벨업을 하는 것처럼 강도를 높여갔기 때문에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경홍, 지금 상황 정도에 꺾여서야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잠... 치지 언니!"
금색의 호랑이가 음각된 도, 금호도의 주인이자 컬러나이츠의 쌍익(雙翼) 중 하나인 치지를 하여가 작게 힐난한다. 하지만 치지의 반응은 매몰차기만 했다.
어쩌면 삼검주와 같은 자들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경홍의 마음을 모르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에 하여가 슬쩍 이야기했다.
"치지 언니. 경홍은 아직 제대로 된 경험이 없다구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시면....."
"그녀가 저러는 것은 전쟁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만이었다면, 호승심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치지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은 광기에 휩쓸려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 정상이다. 일반적인 인간은 물론이고, 어지간히 단련된 군인이라도 이렇게 압도하고 있는 전세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뭔가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검제. 그것의 일격을 보아버린 탓이다.
압도하더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일격의 거대함. 필요하다는 인식을 잃어버리고 광기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으니 갑자기 겁을 집어먹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라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게 왜 '지금 상황 정도에 꺾여서야'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거야?"
오히려 치지쪽에서 왜 모르느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너무나도 당연한 눈빛이라 하여가 절로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보지말고 대답해주세요, 언니."
"불패와 불사의 싸움이 있습니다."
"아."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싸움이라면 검제를 아득히 뛰어넘는 무력으로 서로를 맞상대할 것이다. 겁을 먹는다면 그 둘에게 먹는 것이 정상이다.
"옵니다."
투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방주의 위로 핵미사일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폭음, 존재만으로도 세상 만물을 무릎 꿀리게 하는 무적의 괴물이 방주의 방어를 꿰뚫고 내려오고 있었다.
오싸악!
전율.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본다는 것만으로도 개세무적이란 단어가 떠오르고, 공포심보다는 존경심이 들게 하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죽지 않기에, 불사.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을 지배했다.
"흐응. 네가 불사냐?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검푸른 일격이 불사의 위에 내려꽂힌다. 달을 그대로 낙하시킨 것만 같은 에너지의 방대함. 불사는 어렵사리 한손으로 받아낸다.
지지 않기에, 불패.
카타스트로피의 불사를 상대하기 위한 치우회의 비기, 고소야가 등장하고 있었다. 불사 못지 않은 위압감이 전장에서 상충한다.
"내 동생을 죽이시겠다고?"
작은 목소리임이 분명한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방주의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대치한 불사의 행동 또한 또렷하게 보였다.
컬러나이츠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