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2 / 0340 ----------------------------------------------
목적
자신이 날린 말을 의도한 대상과는 다른 사람이 받아버리자 용왕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조화를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정점에 있는 용종이, 조화를 일그러뜨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좋게 대할리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유운에게 불을 뿜어버릴 기세지만, 정작 당사자는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권력, 무력. 그 두가지 전부 용왕은 유운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강렬한 기파(氣波), 누님에 비견갈만한 무력의 증명이다. 반론은 불허 하겠다는 기백이, 그곳에 있었다. 살을 베어버리는 것 같은 기파에 대상이 아닌 마수들조차 몸을 움츠린다. 저 기파를 정면으로 받아내는 용왕은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연기라고 생각하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유운이 화가 났다고 할만한 모습을 본 것은, 운과 처음 만나서 담담한 어투로 협박할 때다. 하지만 그 때조차 유운이 화를 낸다기보다는 어른이 아이를 겁 주려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렇게까지 힘을 드러내면서 감정을 실는 건, 이례적이다.
"네놈. 넘겨 받아야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거라. 힘으로 억누른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
콰아앙!
번쩍거리는 녹색비늘이 붙어있는 몸이 순식간에 벽에 틀어박혔다. 마력이 아닌, 영적인 힘. 때문에 대비하지도 못 하고 벽에 자국을 남긴 용왕에게 유운이 한심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정말이지, 되도록이면 말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그건 저희 인간측뿐만이 아니라 당신들, 마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살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원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문을 상징하는 물음표가 세워졌다. 심지어 나조차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에 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조금 나을 것이다. 하지만 유운이 말하는 상황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유운이 내 대신 거짓말을 해주려고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도대체 어떠한 추문이기에 우리뿐만이 아니라 마수들에게조차 추문이 된단 말인가? 이해 할 수 없었다.
고민하던 차에, 유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은 깊은 한숨. 이곳에 있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다.
"머나먼 옛날, 우리에게는 전설이라 취급받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종족들이 서로 상부상조하고 살며, 함께 울고 행복해 했던 낙원이.... 존재했다고 말합니다......만, 진실을 알고 있는 당신들은 후손들에게 아직도 거짓된 말을,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체 후대에 넘길 생각이냐고 묻는 겁니다. 그 추문을, 직접 제 입으로 들춰야만 하겠습니까?"
모두의 안색이 나빠진다. 이해 하는 것이 늦은 나지만 이들의 반응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 있던 일은 대개 자동서기로 파악해둔 바였다.
유운이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다종족 국가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것도 유운이 데리고 있던 삼신장 중 하나에게.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에 국한해야 하지만 유운은 물론이고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마수들의 개입이 없었던 것이 현 카타스트로피의 외주인 케이슨의 조작이라는 것을. 마수들도 누가 했는지는 몰라도 조작 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리라.
그들에게도 불명예인 사건인 것이다. 낙원이 참담하게 무너진 것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유운의 목소리가 격앙된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드디어 기회가 온 겁니다! 대지는 좁을지언정, 이곳은 지구 최강 최대의 영맥지대인 한국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으면 됩니다. 우리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낙원의 재건을 거둔 사람이 될 기회를, 여기서 놓칠겁니까? 저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선동가가 될거라고 하더니 진정한 선동가는 이곳에 있었다.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순식간에 띄운다. 능파와도 비슷하지만 다르다.
용왕의 얼굴도 크게 변했다. 적의가 담겼던 얼굴은 이미 명예의 회복에만 전념하겠다, 그런 의지로 가득했다. 조화를 주관하는 용종으로서는 선동일지라도 참고 넘어가기 힘든 먹이임에는 틀림 없으리라.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도중에 고릴라 같은 몸집에 늑대의 얼굴을 한 마수가 손을 들었다. 기뻐하는 얼굴이지만 약간 근심이 어려 있었다.
"허나, 그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계획은 좋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어찌할 생각이오?"
"그것에 대해서는 낙원의 관습, 법규를 토대로 새로이 법을 개정할 생각입니다. 달라진 점은 그 실리에 맞게 고쳐야 하겠지요."
"그것도 그렇다만..."
아직도 걸리는 점이 있는 듯, 마수가 말을 흐렸다. 뭐가 문제 되는 것인지 의아한 유운이 되물었다.
"아직 문제 되는 것이라도 있는지요? 비."
그 마수의 이름이 '비'인듯 했다.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름을 가진 마수는 거대한 앞발로 원탁을 쓰다듬는 것처럼 긁었다. 집체만한 몸집에 비해 굉장히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반응이다. 비는 보는 사람이 짜증날정도로 시간을 끌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다.
"딱히 그것이 나쁘다 하는 건 아니오."
"...도대체 그것이 뭡니까?"
"'왕'의 설정이오만."
"아아. 그것말씀이십니까."
과거, 낙원이라 부르는 그곳에는 분명히 왕이 있었다. 그 왕은 현재 영왕인 유운의 선조로, 유운은 직통왕자라고 볼 수 있었다. 이번 대에 낙원을 재설립하게 된다면 이번에도 왕이 되겠느냐고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
낙원에서는 물론이고 앞으로 만들 나라는 인간과 인외의 존재가 함께한다. 그런데 인외의 존재라는 것들은 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신적 계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성가셨다.
문자 그대로 '정신적' 계율이기 때문에 도저히 특정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다른 인외존재들과 마찰을 일으키니 정신적계율이 없는 존재, '인간'이 왕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라도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유운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주변을 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의외로 원탁에 둘러앉은 마수들 중에서 그것을 썩 내켜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적통이기 때문이거나 유운의 그 유령군단 때문이겠지.
"그쪽에 모두의 이견은 없어보이는군요. 자세한 것은 따로 전달할테니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했던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마수들이 사라져간다. 과연 세포에 필수적요소는 마력이라고 할만큼 마법과 가까운 존재들이다. 돌아갈 때도 마법은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 일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하지 않은 나는 왠지 허무한 감정을 느끼며 돌아서는데, 왠지 목을 조여오는 듯한 위험무쌍한 감각이 느껴졌다.
살기!?....가 아니라 정말로 조여오고 있다. 내 목에 걸린 능파가 이죽거렸다.
"거짓말쟁이."
"...?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능파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유운이 웃었다.
"전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분위기로 선동해서 묻어버렸으니 거짓말이야. 할아버지도 알고 있으면서 묵비하지 말아요."
"하하..."
무슨 소린지 모르는 슈와 요연, 호지가 갸웃하는 것이 보였다. 능파는 그녀들을 힐끗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만들어질 '나라의 왕은 유운이 아니다'란 이야기에요."
정확하다. 이유는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줄리는 없을테니 묵비했다. 유운은 그 점을 제대로 지켰지만 능파마저 속여넘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마수들의 경우에는 우리들의 사망플래그를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 유운은 죽는다. 그것이 운명, 뒤집어야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0이라고 봐도 무방하지는 않으리라.
슈들에게는 나와 함께 죽어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녀들에게 한정한다. 다른 녀석들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고, 오히려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 중심에는 세현이 존재하고 있다. 나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세현이었다. 최소한 다시 살아난 미래에서만큼은 걱정없이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호지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에, 응.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아? 왕 같은 것. 아빠면 좋기는 하겠지만 나랑 같이 있을 시간도 부족하고."
"공적인 일보다 사적인 일을 우선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만, 저도 호지의 말에 동감합니다."
"에, 나도 요랑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은 쪽이...."
한결 같은 그녀들의 반응, 능파가 이를 갈았다. 그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크게 들렸다.
분노가, 소용돌이가 되어 흔들린다. 목에 느껴지는 감각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등신들이....!"
"능파. 너무 그러지마라. 나도...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능파가 입을 다물었다. 나도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소한의 발버둥조차 치지 않는다면 살아있을 의미 따위는 없다. 앞으로 있을, 미래 왕의 배정은, 세현을 위한 것. 하지만 현재는 아직 우리의 것이다. 쉽사리 놓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
연재횟수를 늘립니다.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