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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몽롱하면서도 둔탁한 느낌을 상기시킬 수 있을 쯤에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기술적으로 기절시킨 것이 아닌 건지 뒤통수에서 굉장히 따가운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아픔을 인식하고 즉시, 난 주변을 살폈다.
싸늘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검은색의 공동. 학교 지하에 소유가 만들어둔 칙칙한 회색의 공동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색과 소유의 공동에 비해 비좁은 공간, 내가 앉아 있는 의자와 그 앞에 사람 하나가 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의자와 원형의 갈색 목재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어둠을 살라먹는 촛불. 그리고 이상할정도로 쌀쌀한 온도정도.
양손으로 팔을 쓰다듬었다. 손 안에 닭살이 돋은 우둘투둘한 피부의 질감이 느껴졌다.
"...피부?"
난 소매가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 반팔을 입기에도, 긴팔을 입기에도 애매모호한 날씨였지만 옷에는 나 나름대로의 방어술식을 짜넣은 터라 긴팔 옷이 효율성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분명 입고 있었다.
하지만, 손 끝에 느껴지는 것은 내 피부의 감촉 뿐. 그것도 어깨 언저리다. 반팔 옷이라도 나시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까지 짧지는 않을 것이다.
슬며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 안 입었네."
안 입었다. 지금 내 몸의 상태를 말하자면 다른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이 그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었다.
완전히 삼계탕에 들어가는 닭마냥 옷을 홀라당 벗겨놓았다. 하다못해 속옷 한벌 없다. 온도가 묘하게 낮다고 느낀 것은 아마 이 때문이겠지.
이 부조리한 상황에 어째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와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는 도중에 몸의 이곳저곳에서 여러번 비물(飛物)들을 꺼내어 적들을 죽이고, 나아가선 팔대간부 중 하나인 뱀파이어 기레에게 폭약으로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다.
이 정도 대비는 그들로선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인간으로서 알몸은 너무한다고 생각한다. 죄수들에게도 보통 죄수복정도는 주지 않던가? 째째하기 그지 없다.
"마력도 안 움직이나."
탈출할 요량으로 마력을 움직여 보았다. 마력을 전폐(全廢)한 것은 아닌지 존재한다는 것은 느껴졌으나 막아놓았는지 움직이는 것을 거부했다.
구(球)의 형태로 체내에 응축해놓은 마력의 표면에 이상한 술식을 걸어놓았는지 마력을 쓰려할 때마다 기묘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이것도, 예상대로다. 정말이지 사람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없다. 하긴,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내 마력을 멋대로 박살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팀에 배신자를 쑤셔넣어 두었으면서 내가 대비를 해놓았다는 것도 짐작하지 못하면 등신이다.
'탈출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고, 역공도 가능해. 하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이상, 얻어낼 것은 최대한 얻어내야 해. 하지만...'
'바람'의 유동을 보아선 확실히 탈출은 가능했다. 이것은 분명히 100%의 확정사항이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있었다.
케이슨이 이것을 예상하지 못 했을 가능성. 그것이 한 없이 낮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다에게 '그것'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케이슨 본인. 그 물건의 공능을 케이슨이 모를리가 없다. 사용법정도는 알고 있을 터.
내가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희박. 신소누를 지킬 때 그렇게 요란하게 사용했는데 그의 귀에 안 들어갔을리는 없다.
하지만 알고 있다면 어째서 빼앗지 않았는가.
방법이 없어서?
아니다. 대법을 쓰면 못할 것만은 아니다. 조금 귀찮기는 해도 못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인가?'
그렇게치자면 가능성은 있다. 다른 녀석들이 날 노리는 것을 보면 확실히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것 같지만 케이슨만큼은 다르다. 챠이와 유다에게서 얻어낸 정보만 보면 확실히 다른 자들과 차이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팔대간부급에서 협력자도 있다고 들었다.
처음 이곳을 들어왔을 때 보았던 인우(人牛) 프리아가. 그 또한 나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하지 않았다.
데미지를 입는 걸 각오했다면 날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인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케이슨에게 따로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인간에서 마로 됬다고 '알려진' 케이슨의 말을 쉽사리 듣는다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건 그렇고... 춥네. 이곳은 보일러도 안 해주나?"
일단 모르는 것을 기준으로 해야하니 그것을 쓰기에는 뭐하다.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무지 추웠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척을 하면서 빠르게 공동의 벽을 훑었다.
마법협회가 아무리 현세와 동 떨어진, 속세와 닮아 있는 곳이라지만 전류를 사용하는 도청장치나 물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이곳도 인간이 사는 곳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이곳을 단신으로 습격한 내가 있는데 대비가 없을리도 없다.
"없...나? 그럴리는 없을텐데?"
육안에는 이곳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운사(평소라면 풍백이지만 그것은 티가 많이 나고 벽 내부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찾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를 탐색으로 돌렸건만 흐름에 이상이 나타나는 곳도 없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건가?
덜커덩. 위이이잉....
정면의 벽이 십자모양으로 갈라지면서 사람의 두배정도 되는 크기가 들어와도 넉넉할 '문'이 생성되었다. 밖의 태양빛을 후광처럼 등지고 들어오는 자들의 숫자는 다섯.
라이칸스로프 그라드.
뱀파이어 기레.
파괴신 시바.
아수라들의 제왕 아수라왕.
흑기사단의 단장 케이슨.
팔대간부. 그들 중 다섯명이 내가 있는 이 공동으로 친히 납셨다.
"몸은 어떠십니까?"
케이슨이 낯도 두껍게 안부를 물어온다. 하도 기가차서 숨도 쉬기 힘들정도라 대답하는 것은 조금 숨을 고른 뒤였다.
"춥다 임마. 변태도 아니고 내 옷가지를 어디로 가져간거야?"
"아, 그거 말입니까. 당신이 들고 있던 암기류들이 하도 많아서 옷채로 빼앗았습니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에 두죠."
케이슨은 꽤 센스가 있어보이는 검은 상의와 하얀 하의를 고이 접은 상태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옷을 벗겨두기는 했지만 몸을 결박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케이슨이 내려놓은 옷을 집어들어 빠른 속도로 입었다.
남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속옷도 없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였지만 그 이상으로 알몸으로 있는다는건 더욱 수치스러웠다.
운사로 옷에는 어떠한 영적장치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입어도 상관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느끼는 수치심에 나는 머쓱해져서 일단 화제를 하나 꺼냈다.
"그래... 일단 뭔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여기에 가둔 거지? 이유를 설명해 주실까?"
"당신의 몸과 이곳을 포위한 폭탄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는 모르겠더군요. 뭐가 목적입니까."
확실히 이유를 말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앞뒤를 모조리 잘라먹고 대답할 줄은 몰랐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케이슨은 애초에 그 말만으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나긋나긋한 어조로 뒷말을 덧붙였다.
"육왕 고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당신의 정보에 특기는 '지략'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현재까지는... 그리 본 적은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전투는 지략을 걸 수 있는 맞승부가 아니라 기습, 혹은 습격이라고 부를만한 것. 지략이 끼어들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알고 있다는 것. 배신자는 확실하게 우리팀에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소한 말에 정보를 얻은 것도 잠시, 케이슨의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당신이 이곳에 혼자서 왔다는 건 말이 안되죠. 하물며 그만한 전력을 데리고 말이지요. 게다가 유다도 있으니 우리를 쓸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텐데요?"
"거짓말은 적당히 해. 너희를 쓸어버려? 웃기는 소리. 지금의 우리들로 너희는 이길 수 없어. 누님.... 불패가 있지 않은 이상. 아니, 불패가 있더라고 힘들겠지. 안 그래? 아마 이곳의 지하에는 불사가 잠들어 있을테니 말이야."
케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뒤에 서 있는 다른 간부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저 반응. 불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어째서, 라고 반문할 틈도 없이 백은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그라드가 케이슨에게 물었다.
"잠깐!? 진짜로 있는거야?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
".... 지금은 없으니까요. 현재는 '무덤'으로 옮겨둔 상태입니다."
'무덤...?'
케이슨의 말에 그라드는 못 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수긍한 기색을 보이며 물러났다. 케이슨은 다른 자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언뜻 보기에, 축객령으로 보였다.
"일단 나가주십시오. 육왕과는 따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케이슨의 말에 다른 간부들은 천천히 밖으로 발을 옮긴다. 이내 문으로 흘러나오는 빛이 점점 사라져가고, 케이슨이 마주 앉았다.
그의 눈빛에 살의는 없다. 적의 또한 없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지대한 '관심'
적의나 살의는 아니지만 호의 또한 아니다. 도대체가 종 잡을 수 없는 형태의 감정, 짧은 선분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마물'의 형상.
이 '인간'은 소유와도 다른 자다.
'시대'가 다르다. 걸어온 역사는 내가 봐온 자들 중에서 가장 길 것 같았다.
허나, 그것은 이미 예상한 일. 당연한 것이다.
나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으며 깍지를 꼈다.
"그래, 따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지 케이슨? 아니..."
숨을 고르고, 그의 진정한 이름을 불렀다.
"황룡 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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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슨 등장! ...구소입니다.
황룡 구소. 예, 치우회파의 최강자로 유명했던 그분입니다. 요연의 할아버지이며, 자비나타의 은인, 용종의 족장쯤 되기도 하는 분으로 무지 '강하셨습니다'.
예상하신 분은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