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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젠...장, 여길 빨리 떠야 하는데..."
공기조차 푸석푸석한 느낌이 드는 사막의 대기를 맛보며 붉은 코트의 백발 남자는 괴로운 듯 팔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그에게 시간이란 것은 의미가 없었다. 먹을 것 또한 의미가 없었다. 그를 붙잡는 것은 상처. 그것도 총상, 화상, 자상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상처들이었다. 문득 바라보면 고문 당하다가 뛰쳐나온 것만 같은 몰골이기는 하지만 그는 싸우다가 도망친 것이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어디가서도 꿇리지 않을 테지만 숫자와 도구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꼴이 된 것이다.
모조리 죽이기는 했으나 상대방은 정보도 빠르니 시체를 찾고 곧 쫓아올 것이다.
"가면을 썼는데도 이꼴이냐... 제길, 폐하를 볼 면목이 없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말이 웃긴지 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언급하는 폐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몰랐다. 나이도, 혈액형도, 성격도.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스승. 아니, '전대 단심검주'의 말만 믿으면서 올곧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미련한 소처럼, 우직하게. 하지만 그런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왕은 그에게 있어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는 자조하는 것처럼 키득거렸다.
"스승님도 바보라고 할만하지. 확실히 과한 면이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정말로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왕은...."
툭, 철퍼덕.
힘 없이 말하며 걷던 그는 발아래에 걸린 딱딱한 은빛의 무언가 때문에 뜨거운 모래사막에 얼굴을 처박아야만 했다.
분쟁지역이니 패잔병의 라이플정도가 발에 걸린 것이리라. 그는 자신을 넘어뜨린 괘씸한 물체를 부러뜨려 주겠다는 일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발 아래에 있는 물체를 바라봤다.
그것은 총이 아니었다. 총치고는 큰 데다가 손잡이는 물론이고 방아쇠도 없었다. 그렇다고 불발탄이라고 하기에는 굴곡진 것이 대포알로는 적합하지 않아보였다. 언뜻 보면 마치 사람의 다리를 철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실제 모습이 다 드러난 것 같지는 않아보였기에 그는 그 은빛 쇳덩이 주변의 모래를 털어냈다. 아래쪽으로 서서히 털어내니 조금씩이지만 접합부처럼 보이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탄력받은 그는 고통도 잊고 모래를 털어내는 것에 전념했다.
이윽고, 그는 아랫부분을 완전히 털어내고 나온 것을 보고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진짜로 다리? 그것도 쇠로 된?"
털어내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 다리였다. 은빛의 금속으로 된, 두말할 것도 없이 다리다. 중세시대의 갑옷 중 한 종류라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앞 뒤의 어디를 살펴봐도 이것은 기계로 된 다리였다.
한번 들어올릴 요량으로 그는 손에 힘을 줬다.
위이잉. 철커덕.
자신의 힘에 반응하듯이 무릎부근에서 튀어나온 총기에 궁금증도 잊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총기는 무릎으로 들어가버리고 다리의 주인이 서서히 모래를 헤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까 자신이 만졌던 다리와 쌍이 되는 다리의 위에 붙은 백은의 몸통. 그리고 여성체로 만들어진건지 튀어나온 은빛의 가슴. 바람에 흩날릴정도의 얇은 철사로 만들어진 긴머리카락. 그리고 투명한 유리구슬로 만들어진 또렷한 눈.
여성형태의 기계인형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그는 자신의 보검이자 단심검주의 상징인 충의의 적색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그 행동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질문했다.
"당신은 고요입니까?"
"...누구야 그건."
그가 모르는 것 같자 그녀는 기계적(실제로도 기계지만)인 어투로,
"질문을 정정. 육왕 고요를 아십니까?"
"..!! 육왕이... 폐하의 이름이 고요인가?"
"아니오. 이름은 요, 성은 고. 전형적인 평균치 남성의 모범형입니다."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는 멈추지 않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굉장히 오랫동안이었다. 300년 동안이나 이 사막을 배회하며, 용병일을 하며, 적을 죽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드디어, 왕의 이름을 알았다. 이름을 알면 어느 나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간 따위는 문제가 안된다.
그는 기쁨에 몸서리치던 정신을 추스르며 검끝을 기계인형 여자의 가슴께에 겨냥했다.
"넌 누구냐. 왕을 찾는 것은 적의인가, 아니면 호의인가."
아까까지의 가벼운 말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위협적인 목소리만이 공기에 산재하자, 기계인형의 몸에서 위이잉하는 기계음이 템포를 높이는 것 같았다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인간과 달리 얼굴 근육이 없는 그녀에게서 감정변화를 읽어낼 수 없자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기계음이 차츰 들리지 않게 되자 그녀는 말했다.
"검에서 살기를 감지. 허나 대화가 가능. 후자 선택...완료."
그녀는 숨을 고르는 것처럼 말에 갭을 두더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요의 아군입니다. 현주인은 삼대 대마법사이자 고요의 누님이 되는 고소야님. 현재 본 기체
는 주인님의 명을 따라 고요의 우군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용병생활을 하면서 여러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온 그로서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컴퓨터를 두뇌로 쓰는 기계가 저런 대답을 내놓는다는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육왕이 이곳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말투가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그는 그녀를 다그쳤다.
"여기 계셔? 폐하가?"
그의 질문에 기계음이 살짝 불규칙한 소리를 냈다.
"...모호. 이곳에서 생명파동이 느껴졌으나 강대한 마력으로 인해 파동이 소멸. 사망은 아니며 그저 탐지방해계의 마법이라 추정됨. 막 이 사막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이곳에 목적이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해의 자신은 정말로 최고의 행운을 얻은 남자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연속적인 행운(이름을 알게 된 것, 곧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일어날리가 없을 것이다.
"좋았어, 이제 찾기만 하면 되는건가!"
그는 다친 것도 잊고 생명의 불씨를 활활 태워올렸다. 그런 그의 어깨를 기계인형이 붙잡았다. 그가 무슨 볼 일 더 남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름, 무엇입니까?"
"아하. 그러고보니 너도 왕을 찾는다고 했었지. 내 이름은 우르카. 왕을 받드는 삼검주 중 최고의 활동력을 가진 적색의 검이다. 너는?"
기계인형은 금속으로 된 자신의 볼을 툭툭 쳤다. 쇳소리가 나는 그곳에는 마치 상표명처럼 '앤트로아'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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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심검주와 현 기계장치의 대마법사가 등장!
그래도 잠시 동안은 별 등장이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