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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여러모로 불편한 쇼핑 후에 잔뜩 부려먹힌 다음, 돌아가는 밤거리. 나는 호지와 능파(대화에는 가끔 끼어들었지만 여전히 허리에 묶여있다), 슈와 함께 집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냥 백화점에서 오는 길이었다면 슈와는 금방 헤어졌어야 하겠지만 소화가 빵 만드는 재료를 사고 굉장히 부려먹는 바람에 그녀의 집인 빵집에 들렸다가 오는 길이기에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아, 어깨하고 허리에서 늙은 이의 상징인 통증이 밀려들어온다. 나, 요즘 위험한 게 아닐까. 싸움도 잦고.
"할아버지."
통증이 밀려오는 허리를 투닥거리며 걷고 있는 나에게 허리의 능파가 낮게 날 불렀다.
목소리가 낮고 험악한 것이 또 무거운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능파가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발걸음이 멎었다. 그 덕에 옆에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호지가 균형을 잃고 부서진 돛처럼 잠시 흔들거렸다. 호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날 올려다 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공교롭다. 능파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명히 운과 소누에 관한 것일 터이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으로 모여든다. 그것이 이상하다. 얕게 생각해보면 어제 내가 죽었다고 알려진 것 때문에 모여들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소누는 바다에서부터 불렀으니 넘어간다 치더래도 운은 명백히 '이사'를 끝낸 상태였다. 내가 실종된 시점을 기점으로 해도 너무 빠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 하지만... 알 수 있는 거라곤 소유나 그 '위'에 있는 마수들이 수작 부렸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 걸."
한 때, 소유는 황룡 구소가 참가 했었던 회의 비스무리 한 것에 참가 했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물론, 후인계획 자체가 거짓이니 그 회의도 거짓일수도 있겠지만 있다고 가정한다면 카타스트로피에 대적하는 우리측의 조직이 개입 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나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듣자하니 나는 꽤나 중책인 것 같던데. 설마하니 금방 쓰다 버릴 패는 아닐테고."
"그건 그렇지만..."
유운과 동격으로 놓이는 육왕의 칭호다. 전세계의 인간이 달려들어도 모조리 상대 할 수 있다는 영왕과 동격인데 약한 패는 아니겠지.
말꼬리를 흐리는 능파 덕분에 대화에 비집고 들어온 틈을 잡은 것인지 호지가 빠르게 내 허리가 있는 곳을 손등으로 툭툭쳤다. 시야는 계속 나를 향한 체.
"우우우... 아빠, 요즘은 능파랑만... 아빠는 어린애가 좋아?"
크리티컬 히트. 호지가 몸을 가늘게 떨며 묻는 말에 핵폭탄을 쳐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잠잠히 있던 옆의 슈도 놀란 듯,
"그, 그랬던거야?"
믿지마라. 멋대로 누굴 이상성취향으로 만들고 있어?!
하지만 나의 그런 마음 속 외침에도 무색하게, 그녀는 호지가 점령한 손의 반대편 손을 잡고는 악력을 늘렸다. 그녀의 울먹이는 눈빛과 악력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이에서도 나는 생각했다.
이 악력, 간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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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래저래 당하는 이야기를 하며 집의 문앞에 도착했을 때, 슈는 잊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는지 가벼운 탄성과 함께 손바닥을 마주쳤다.
"... 뭐 잃어버린 것이 있어?"
"아니... 잃은 건 아닌데. 그, 잊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 그게, 에헷."
무언가 말하기 힘든 일인지 우물쭈물거리면서 마지막에 귀엽게 웃었다. 정말 혼절할 것처럼 귀엽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고 상황은 상황.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슈는 부끄러운 듯이 몸을 꼬며 핑크빛이 물씬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나, 요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어."
"말도 안돼! 난 그런 소리 못 들었어!"
나 대신 경악하며 소리쳐준 호지의 말에 나도 안드로메다로 관광보냈던 정신을 다시 회수 할 수 있
었다.
누가 내 집에서 자고 간다고? 난 허락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낸 적이 없...지만, 짐작가는 사람이 있다.
난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며 혹시나하는 질문을 해봤다.
"그거, 어머니가?"
여러가지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잘 이해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고 해서 자고 가래."
혹시나가 역시나로 탈바꿈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의 집 여아(女兒)를 멋대로 남정네가 사는 집에 숙박시키려고 하다니 무슨 생각인거지 이 아줌마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날 보며 슈는 가볍게 덧붙였다.
"내가 요보다 강하다고 했더니 덮치면 패버리라던데."
"하하하. 뭐, 그건 그렇지."
나는 왠지 남자로서 너덜너덜해진 자존심을 마음 한구석에 쳐박아두고 문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도어락의 잠금이 해제했다.
슈는 나보다 강하다. 바다에서 확인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슈는 정말로 나보다 강하다. 처음에는 광진의 갑작스런 성장 덕에 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방학 때 그것은 그저 실력차로 판명이 났다. 물론, 그녀의 시간마법도 만능은 아니라 내가 광진을 사식까지 끌어올린다면 그녀의 시간역행쯤은 견뎌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시간마법은 역행만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방학 때 보여준 그 '광신의 이빨'은 정말 굉장했다. 아마 운과 컨디션만 조금 따라준다면 요연이라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용신화(龍身化)를 하지 않는다는 전재하지만.
문을 밀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옅은 탄 내음이 부엌쪽에서 검은 연기를 꼬리처럼 끌고 있었다. 그 상황만을 보고는 난 깨닫고 말았다.
"헉, 어머니!"
급히 광진을 발동해 부엌으로 달려갔다. 마루바닥에 발자국이 남는 것을 무시한 체 달려가 도착했을 때, 날 맞이하고 있던 것은.
"...죄송합니다.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가스레인지에 꽂혀있는 주작검과 싱크대 옆의 도마 위에 놓인 청룡검. 쓰러진 어머니와 어머니 품의 현무검. 그리고 백호검을 든 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요연이었다.
그 모습이 어째서 일어났는지는 이성과 감성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물어보기로 했다.
"이해는 가지만...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요연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녀는 우리가 쇼핑 겸해서 나간 아침부터 계속해서 어머니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저녁시간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간만에 요리를 한답시고 요리에 나선 것이었다. 마법사의 제자로서 수학하던 당시, 어머니의 요리실력에 대한 것도 들은 기억이 있는 요연은 극구 말렸지만 나름 실력이 늘었다고 주장하는 어머니의 말에 그저 열심히 하라는 건투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능파가 사둔 재료인 호박의 껍질이 단단하단 이유로 식칼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요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청룡검'을 쥐어줬고 그 다음, 가스레인지가 망가졌는지(순전히 그녀의 추측) 화력이 부족하다길래 '주작검'을 빌려드렸다. 그런데 폭발. 어머니를 구하기위해 나머지 두검을 뽑아든 요연은 폭발의 여파가 어머니에게 닿지 않도록 '현무검'을 던졌다.
왠지 길어졌지만 그것이 이 참상의 진상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설마하니 요연도 이렇게 개념이 없을 줄이야.
아무리 화력이 부족해도 주작검 같은 위험한 물건을 주는 인간이 어디 있어?
"이, 이런.... 내가 짬짬이 모아서 산 다마스커스강 식칼이...!"
어느샌가 허리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능파가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녹아버린 식칼을 보고는 절망했다.
그러고보니 저거, 내가 주는 용돈으로 샀던 식칼이랬던가.
뒤이어 계속되는 박살난 주방용구의 폐해에 능파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는 것에 나는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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