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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육아일기-116화 (116/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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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정

한 껏 무게를 잡은 유운은 다시 한번 블랙커피를 목너머로 흘려넣으며 목을 축이곤 입을 다물었다. 괴롭다고 느껴질정도의 긴 정적이 이어지기를 약 2분. 커피를 모조리 마시고 나서야 유운은 입을 열었다.

"불패, 삼왕, 성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아십니까?"

겨우 존대의 유무를 물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질문의 무게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였다. 그가 말하는 지금의 화제는 내가 바랬던 답과 거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물어볼대로 물어보기로 했다.

"누나와 너, 나, 소누. 나머지 하나는 미정. 그렇게 알고 있다만."

나의 발언에 모두가 이야기의 진도를 따라오지 못 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이나 알게 된 것은 루그로가 스스로 가르쳐준 것이고 그 상태의 루그로를 만났을 때는 일 대 일 이었으니.

생각외로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유운은 손뼉을 마주치며 긍정했다.

"맞습니다. 불패의 소야씨. 영왕의 저. 육왕의 고요. 성녀의 소누. 여왕은 이쪽에서도 발견하지 못 했죠. 그런데 제가 어째서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줄 아십니까?"

이미 단 둘만의 대담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나는 고개를 휘이 저었다.

모르겠다. 짚히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감상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일이 안풀린다고 산제물을 바치는 녀석이 그런 감정으로 우릴 생각했다고 보긴 힘들다.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버리는 듯한 가벼운 미소가 유운의 입가에 걸리면서 그는 소화가 들고 있는 커피잔을 빼앗아 들고는 그대로 원샷했다.

"앗, 야 임마!"

퍽.

탁자의 아래라서 타격하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풍백의 능력 덕에 그녀의 주먹이 정확히 간장을 가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놀라운 정밀도를 가진 펀치에 유운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유운은 그런 타격에도 아랑곳않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까 전에 소화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앗, 야 임마!'라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마 '알고 사귄다'는 부분이리라.

나는 거기까지 생각을 진행시키다가 말도 안돼는 예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어째서 그랬는지를 설명 할 수가 없다.

바다에서 전화했던 그의 대답으로는 분명 사랑한다고 했다. 그것도 내가 낯 뜨거워질정도로 말이다. 그 말을 진실이라 가정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로 디밀려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유운은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입을 열었다.

"후후후. 그것 덕에 저와 소화는 처음에 많이 싸웠죠."

"긍정이냐... 너 어쩌자고 이야기를 한 거야?"

쩌적.

내가 시킨 아이스 티의 유리잔에 금이가면서 나의 분노를 대신 표현해주기 시작했다.

생각을 읽어낸 것인지 짐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녀석은 내 판단에 긍정을 표했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그 당시, 사랑한다는 낯 뜨거운 대답을 들었을 때는 '뭔가 방법이 있겠지'하고 물렁하게 넘어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준비는 하지도 않았다(이사장실 패밀리에 편입시킨게 대비였을지도)는 것을 듣고도 어영부영 넘어 갈 수 는 없다.

"유운. 내가 너에게 실망하기 전에 진의를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게다."

나의 분노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한 주변인들은 유운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대답이 나온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바로, 소화였다.

"그 대답, 내가 하지."

".... 넌 제대로 된 실전을 안 겪어서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걷는 세상은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다. 애인이란 핑계로 보호 할 생각은 버려."

"그게 아니....!

나의 경고에 소화가 되받아치려는 순간, 그녀의 입을 유운의 손이 가로막았다. 그는 누가봐도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하하하... 아~. 정말, 이것 참. 소화. 솔직히, 대답 할 말 없잖아? 애인이란 핑계는 말이야."

유운의 말에 소화는 고개를 갸우뚱하는가 싶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탁자위에 엎드려 버렸다.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를 따라잡지 못 한 친우들은 고개를 갸웃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소화의 왼팔을 들어올리더니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 팔에는 검으로 길게 베어버린 듯한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의도를 짐작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은 있으시다?"

살짝 비꼰 말이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 부정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요, 제가 만든 겁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죠."

"아아악! 하지마!!!!"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유운의 얼굴로 소화의 주먹이 작렬했다. 단신으로 세계조차 뒤집을 수 있다는 남자를 한번에 때려 눕힌 그녀는 유운의 멱살을 잡아채서 흔들어댔다.

멱살을 잡힌 유운은 굳건한 의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으전에 마아알이죠(예전에 말이죠)........... 거어엄제(검제)."

유운이 이 상태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듯 짧게(소화 덕에 늘여졌지만) 읊조린 그 말에 소화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니, 발버둥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이지 않는 것에 붙잡힌 것'처럼 보였다. 현신을 쓰지 않고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랑 소화는, 이전까지는 친한 친구.. 정도 였죠.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특이한 인간인 것을 알고 있다는 정도. 알게 된 이유도 제가 습격받을 때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고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만남에는 우연이 많았죠. 저의 맹우(영혼)들은 운명이라고들 하지만요."

러브스토리인지 서사시인지 분간되지 않는 분위기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대충 얼굴의 표정을 가다듬고는 유운을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는 소화못지 않게 붉은 기운이 잔뜩 올라 있었다.

유운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듯, 가려버리며 이야기를 느릿하게 진행시켰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같이 있고, 웃고, 슬퍼하고. 그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죠. 예에... 괜찮았습니다."

이제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팔다리도 시뻘겋게 붉히고 버둥대는 소화의 난동이 더욱 커지면서 유운을 방해하려했지만 이제는 팔다리도 다른 영혼에게 잡힌 듯,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난 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저 그것뿐이었다면 상관 없었을 겁니다. 제가 '영왕'만 아니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죠."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는 태도로 그는 말을 끊었다. 묵직한 공기가 정적이 되어 주변을 휘감았다.

지금조차 불만인 것으로 보이는 그 태도에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지금 이야기 할 터. 쓸데없이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유운은 분위기를 바꾸 듯, 화제를 바꿨다.

"삼왕, 성녀. 이들에게는 각자가 가신이 있습니다. 육왕에게는 세명의 검주가, 저에게는 군신이, 성녀에게는 컬러나이츠와 백색아성, 천리안을. 각자가 가신을 가졌고, 그것에 대해서는 예언이 있었죠. 군신에 대한 예언은, 굳이 말하자면 영왕이 '일생의 사랑을 바칠 자'. 처음에는 조금 과장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후후."

처음에는 무슨 소릴 하나 싶었지만 마지막에서는 그가 말하는 모든 의도를 이해했다.

자조하는 듯한 그 태도. 그의 말을 기반으로 유추해보면 '유운은 소화를 이 마법사들의 세상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유운은 빙그래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귀었죠.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찼죠. 비 오는 날에. 하지만.... 안되더군요. 너무 억지라."

억지? 나 뿐만이 아닌 모두가 소화를 돌아봤다. 소화는 더이상 발버둥 칠 수도 없는지 축 늘어진 상태로 유운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유운은 모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대담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소화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아아, 그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유운은 그녀의 분노어린 눈빛조차 무시해버리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는 일단 찼습니다. '나 같은 것의 어디가 좋으냐'라고 말하면, 그녀는 '몰라!'라고 답하고 제가 저의 안 좋은 점만을 열거하며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했지만 안됐죠. 그래서, 그녀의 팔에 생채기를 내고 죽이겠다 위협했습니다."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안 통하더라구요. 운명인지, 단 한사람의 오기인지... 저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원제로 돌아와서."

이미 삼천포로 빠졌던 화제를 원상복구한 유운은 소화를 품에 넣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들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참가 한 사람은 자신에게 책임을 물고, 모르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책임을 물어줄 필요가 있죠. 그러기에 일종의 보상차원으로 당신들에게는 존대를 해왔습니다만..."

그가 말을 흐리면서 하나밖에 없는 팔로 턱을 받치며 우리를 지긋이 바라봤다.

"당신들은 여기서 손을 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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