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생의 육아일기-112화 (112/340)

0112 / 0340 ----------------------------------------------

그녀'들'과의 재회

요연에 대한 일은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진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능파가 집 전화의 수화기를 부숴버린 것을 추궁하고 있을 때, 나의 발은 어느 덧 백화점 가까이에 있는 인도를 딛고 있었다.

높디 높은 백색의 건물은 옛날 호지와 데이트랍시고 왔던 그 백화점이다. 우리집과 거리가 조금 있어서 보통은 버스를 타고 가는 이곳에 나는 능파와 대화를 나누며 걸어온 것이다. 짧은 대화라고 생각했건만 실제로는 상당히 길었던 모양이었다.

백화점 근처라 하던 대화를 멈추고 건물로 들어서려던 나는 입구 옆에서 부채처럼 손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에 발걸음을 돌려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짙은 남색의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적당히 추운 이 날씨를 대비해 갈색 재킷을 차려입은 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옷을 저렇게 입는 사람은 난 알고 있다.

"여~ 흉터남. 여전하군 그 옷차림."

진 우. 나의 오랜 친구녀석 밖에 없다.

"이 근처에는 아이들이 많으니까. 어린 날의 트라우마를 만들어줄 수는 없지."

상처에 관한 것은 이미 옛날에 극복했을 텐데도 버릇이 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는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고쳐쓰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입구 옆의 엠보싱 모양의 울퉁불퉁함을 가진 돌에 기대면서 시계를 바라봤다. 그녀석의 얼굴에서 미묘하게 초조함이 드러났다.

나는 어째서 '초조함'이 드러나는지 깨달았다.

"'그녀석'도 오기로 했어?"

그녀는 분명히 해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지원차 그녀를 불렀을 수도 있을 터. 일은 끝났지만 놀고 가라는 의미에서 불렀을 수도 있다.

우는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운 것인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가면처럼 앞으로 내렸다.

"뭐... 일이야 끝났지만 말이지. 어차피 직종도 버린 참이겠다, 같은 또래와 함께 노는 것이 좋지 않겠어?"

"나도 그 아가씨에게는 그 편이 좋다고 생각은 하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모르겠거든? 별로 시간도 없는데 어떤 수로 꼬신거야?"

분명히 그녀와 우가 알게 되고 난 뒤부터는 친해지기에는 시간이 꽤나 부족하다. 그럼에도 우녀석은 나와 슈정도 만큼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 마법보다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만일 세상에 알려진다면 상당한 쇼크일 터. 오늘 그녀와 우의 사이를 알게 될 친구들의 얼굴이 궁금하다.

우는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꼬, 꼬신 것 아냐! 그저 펜팔로 조금...."

그날 밤에 화냈던 우의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반발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친구의 순수함을 재확인 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것도 특히나 외모에 안어울리는 순수함이라면 더욱.

내가 웃으며 우의 감정을 돋구고 있을 때, 등짝에 가벼운 일격이 작렬했다.

"야 또 이런다. 거기 있는 우도 그리 반응을 보이지 말라 안그랬나. 그러니 요가 계속 그러제."

뭔가 미묘한 사투리의 억양에 나는 고개를 돌려봤다.

그곳에는 땋아내린 갈색의 머리카락에 범생이 같은 안경을 쓴 우리 또래의 여성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는 이런 녀석 없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봐선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녀석, 마력이 느껴진다. 인간이 순수하게 타고난 것이 아닌, 단련하고 단련해서 쌓은 고도의 마력.

등에 닿은 손을 크게 밀어내며 그 여자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와그러노? 뭐, 솔직히 내도 우의 흉터를 보지 않았으면 못 알아챘을테니께..."

말을 끌며 그녀가 내놓는 단어에 나는 좀 더 기억에 있는 인간목록을 확장시켜야만 했다.

우의 흉터. 그것은 근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래전에 생긴 것이다. 근래의 인간만을 예상 범위에 뒀으니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몇초, 나는 의외로 빨리 그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운... 이구나?"

그녀의 이름은 해 운. 우리처럼 외자인 이 여자는 우가 엄청난 흉터로 나름 왕따(내가 어떻게든 처리했다. 기억은 안나지만)였을 때 친구라고 칭할 수 있었던 단 두사람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나다).

"그래, 내도. 이곳으로 이사한 김에 집들이나 할까~ 싶어서 여기에 왔제."

어렸을 적, 친구를 늘리기 위해 썼던 방편인 '가짜 사투리'가 입에 배었는지 여전히 사투리로 대답하는 그녀는 어렸을 때와 외모외에는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참고로, 그녀는 도시 토박이다.

"여기는 왜 왔어?"

나의 질문에 운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화를 냈다.

"니가 여기 전세냈나? 그리고 내는 집들이를 하려고 준비물을 사러 왔다안카나."

운은 뾰족한 목소리로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오히려 나무라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목적어를 좀 빼먹기는 했지만 내가 묻는 것은 '왜 하필 이곳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었다.

요즘은 정말로 이곳에,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이 많이 꼬인다. 그것도 마력을 가진 사람들만. 아마도 운은 후인계획의 일원 중 하나. 이사온 이유도 그것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

혹시나해서 떠보기로 했다.

"그럼 어느 학교를 다닐건데?"

"그러니께.... 수상고. 우리 할애비가 그기 이사장이랑 아는 사이라 카던데."

아직 떠보려고 준비해둔 말이 많이 남았는데도 술술 불어버리는 운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다른 평범한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마법에 대해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은 수상고에 무엇이 있는지 쯤은 안다. 한국에서는 '대외적'으론 절대적인 안전지대라 별 상관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의 대비는 해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무고경주씨는 잘 있어?"

그날 밤, 흑룡은 우리나라에 정작 남아있는 마수들은 소유와 무고경주 밖에 없다고 말했다(아쥴이야 육지로 나올 수 없는 몸이고). 흑룡의 발언으로 보아 각자의 사명을 띄고 해외에 출장 중. 그렇다면 현재 후인계획의 종주일 사람은 무고경주밖에 없다.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 스승님은 잘 계신.... 켁?"

내가 다짜고짜 종족명으로 물어본 것을 깨달았는지 기묘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 해 안절부절하는 운의 머리를 손등으로 툭 쳤다.

"수상고등학교 이사장 양소유의 후인계획 참가자. 그게 우리다."

그녀는 동그랗게 벌린 입을 하늘로 향하더니 이윽고 뒤로 넘어갈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부축하려던 나는 갑자기 상체를 바로 세워 손가락으로 우릴 가르키는 그 행동과 박력에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니니니니니, 니들 뭐꼬? 나중에 찾아서 자랑하려고 재맸는 소식을 가져왔더니 내는 뒤북인기가!?"

후인계획은 나름 비밀주의인데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나 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