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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피서지에서 모험을 즐기는 법 (13/13)

외전 5. 피서지에서 모험을 즐기는 법

언니랑 저는 저어기, 칼레의 제일 남쪽이라는 페트라에서 왔어요. 어? 어딘지 알아요? 신기하다. 수도 사람들은 우리 살던 데 잘 모르던데.

네! 맞아요. 오렌지 농장 있어요. 근데 우리 동네는 오렌지 말고도 체리도 많이 키워요. 호두나무도 많고요. 페트라 체리 먹어 봤어요? 안 먹어 봤구나. 다음에 꼭 먹어 보세요. 시지 않고 맛있어요.

살던 데를 좋아하냐고요? 당연하죠! 겨울에도 따뜻하고, 과일도 많고 친구들도 많은데 당연히 좋죠. 아저씨는 고향 안 좋아요? 아……. 고향 기억이 별로 없다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언니가 그러는데 마음 붙이고 살면 거기가 고향인 거래요.

그런 기준이면 고향이 있다고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아저씨 고향은 어디예요? 아미르요? 와! 저 거기 알아요. 찰스 무어의 ‘자바르 샤키’의 배경이 아미르 영지에 있는 가문비나무 숲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걸 아냐고요? 그야 전 똑똑하니까요!

…사실은 언니가 알려 줬어요. 언니는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하거든요. 그래서 고향에 있을 때 영주 성에 하녀로 들어갈 기회도 있었어요. 좋은 기회라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도시로 나오기로 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네? 아저씨도 성에서 시종 일 한 적이 있다고요……? 시종은 아니었지만 옷시중을 든 건 뭐예요? 그 일만 하는 사람도 뽑아요? 귀족들이란.

아. 언니랑 저랑 여기엔 왜 왔느냐고요? …아저씨가 잘생기긴 했는데 얼굴만 보고선 그런 사적인 정보를 막 알려 줄 순 없어요. 언니가 도시엔 여자 등쳐 먹으려는 제비들이 많아서 조심해야 한댔다고요. 아? 아저씨는 결혼했다고요? 어……. 그러면 알려 줘도 괜찮나……?

아, 안 괜찮아요? 그런 말 하는 거 보니까 아저씨한텐 알려 줘도 괜찮겠다.

언니랑 저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요. 엄마 아빠가 저를 늦게 낳았거든요. 몇 살 차이냐고요? 열두 살이요. 전 열 살이고 언닌 스물둘이에요. 응? 아저씨, 표정이 왜 그래요? 익숙한 나이 차라 그렇다고요? 아저씨도 언니 있어요?

아무튼, 전 고향이 좋았는데 언니는 별로였나 봐요. 하긴 그럴 만도 했어요.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3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한 1년 전쯤부터 언니한테 툭하면 마을 사람들이 40 넘은 아저씨 세 번째 부인 자리는 어떠냐고 권하곤 했거든요!

다들 그 아저씨한테 돈 받고 그런 소리 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물론 마을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제가 나무 위에서 호두를 던져서 내쫓아 버렸지만요!

제가 얼마나 호두를 잘 던지는데요. 던지는 대로 그 사람들 머리통을 다 맞춰 버렸다니까요? 그러다 언니한테 잡혀서 이러다 사람 머리 터뜨리면 곤란해지니까 그만하라고 혼나긴 했지만요……. 네? 호두 정도로는 사람 머리 안 터진다고요? 아저씨, 되게 사람 머리 많이 터뜨려 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여튼, 그런데 한 달 전쯤 언니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메리, 언니랑 도시로 가자. 페트라 내에서 마을을 옮겨 봤자 저 사람들을 떨쳐 내기 힘들겠지. 하지만 도시처럼 사람이 많은 곳은 이야기가 달라. 거기로 가면 저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안 볼 수 있을 거야.’

사실 저는 마을을 떠나곤 싶지 않았는데 도시 이야기를 하는 언니 얼굴이 너무 밝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요. 마을보단 언니가 더 좋으니까요.

언니는 준비를 미리 다 했었는지 말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떠날 준비를 마치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는 닷새가 걸려 여기! 레이거니스에 도착했답니다! 와아! …아이 참, 얼른 손뼉 치세요, 아저씨.

언니는 그럼 지금 어딨냐고요? 일 구하러 길드 사무소에 갔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지금 여기 혼자 있는 거예요? 결혼했다면서요. 아, 아저씨 부인도 외출 중이에요? 네? 부인이 아니라고요? …네? 아저씨가 부인이라고요? 뭔지 잘 모르겠어요……. 도시는 뭔가 되게 복잡하네…….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저씨 신랑이 아주 잘생겼고 목소리도 좋고 자상하고 잘난 사람이란 거죠? 그만 말하세요. 언니가 유부남한테 관심 가지지 말랬어요.

네? 저기 저 험상궂은 아저씨요? …모르는 아저씨예요. 저 아저씨가 왜요? 모르는 사람이야 늘 조심하고 있죠.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건 그냥 여기가 뚫린 공간이니까, 그냥 안심하고 말하고 있는 거죠! …사실 언니가 방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긴 했어요. 근데 너무 심심했단 말이에요! 여기서 언니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별일 없었는데, 괜찮지 않아요?

아, 맞아. 아저씨, 저 하고 싶은 거 있는데 해 봐도 돼요? 잠시만요. 아, 이 가방이요? 예쁘죠? 언니가 만들어 줬어요. 아저씨도 뜨개질할 줄 안다고요? 그래도 우리 언니가 더 잘할걸요. 억울하시면 뭐 아저씨가 짠 거라도 보여 주시든가요.

…주머니에서 바로 꺼내실 줄 몰랐는데. 뭐어, 잘 만드시긴 하셨네요. 근데 왜 하필 쥐 인형이에요? 아, 이거 전에 고양이 인형을 만들어서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고요? 고양이는 좋겠다. 쥐 친구도 있고. 근데 쥐 눈이 단추가 아니네요? 이건 뭐예요? 유리? 네?! 마정석이요? 워, 비싼 거 아니에요? 그거?

우와. 아저씨네 고용주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옷 시중드는 사람을 따로 뽑고 마정석도 아무 말 없이 사 줘요? 아미르 공작은 돈이 많다더니 진짜구나……? 하하! 아저씨가 공작님 돈을 제일 많이 뜯어 가는 사람일 거라고요? 농담도!

네? 쥐 인형 저 준다고요? 갑자기요? …아니 뭐. 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긴 한데. …근데 마정석이면 귀한 거 아니에요? 그런 거 막 줘도 되나? 아, 마정석도 급이 여러 개라고요? 그으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회털이라고 외치라고요? 왜요? 그나저나 회털이란 거 설마 회색 털 쥐라 회털이에요? 이름이 그게 뭐야! 아이, 좀 놀렸다고 다시 가져가기 없기.

그나저나……. 앗 찾았다. 이게 뭐냐고요? 히히. 짜잔! 화장품입니다! 네에? 해 봐도 된다면서요. 아저씨, 고개 좀 숙여 보세요. 아저씨는 키가 커서 숙여 주셔야 한다고요. 근데 저 아저씨만큼 큰 사람 처음 봐요. 어떻게 그렇게 크세요? 잠을 많이 자면 된다고요? 몇 시간이나 자면 되는데요? 네? 스무 시간이요? 그건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붙은 돌덩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아, 칼레 사람이 아니었구나. 어라? 그러면 아저씨 신랑도 아인스 사람이에요? 외국인 부부? 아하, 아저씨는 아인스 사람이고, 신랑은 칼레 사람. 그럼 신랑 따라서 칼레에 정착한 거예요? 아이참.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좀 계세요. 아, 이거 언니 화장품 아니에요. 언니가 저한테 나눠 준 거라고요.

어허! 움직이지 마시고! 블러셔 이상한 데 문지를 뻔했잖아요! 그래요. 그렇게 멈춰 있으세요.

근데 웬 화장품이냐고요? 그냥요. 재밌잖아요? 몇 번 언니 걸 만지니까 언니가 자기 거 망가뜨리지 말라고 아예 제 몫으로 나눠 줬어요.

근데 언니한텐 비밀인데 언니는 제가 바르려고 언니 화장품 만진 줄 알아요. 사실 친구들 발라 준 거였는데. 저는 제가 바르는 것보다 남 발라 주는 게 더 재밌어요.

근데 아저씨는 피부가 진짜 하얗고 좋으시네요. 솔직히… 우리 마을 왔던 영주님네 딸보다 아저씨 피부가 더 하얀 거 같아요. 더 좋기도 하고. 네? 피부 좋아지고 싶으면 많이 자면 된다고요? 아저씨, 아까부터 계속 수면이 중요하단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래도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고 스무 시간을 자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아이, 잠시만요. 입술 바르잖아요. 그만 말하세요. 네. 그렇게 가만히요. 하! 진짜 잘 발렸다! 아저씨, 이따가 꼭 거울 보세요. 진짜 잘 발렸어요. 어라? 아저씨, 갑자기 왜 울상이세요?

별거 아니라고요? 그렇게 울상으로 별거 아니라 하셔 봤자… 설득력이 없는데. 알았어요. 별일 아니라니까 그만 물어볼게요.

…헉! 아저씨! 저기 보세요! 저기! 여관 입구 쪽! 지금 들어오시는 금발 머리 신사분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요? 와……. 엥? 아저씨, 왜 얼굴을 가리세요?

제가 저 신사분을 잘생겼다고 해서 민망해지신 거예요? 아저씨도 잘생겼어요. 그냥 저 신사분이 제 취향일 뿐이에요. 아저씨 취향도 저 신사분이라고요?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될 것 같아요. …엇, 잠깐만! 그런데 아저씨는 결혼했다면서요! …아아, 아저씨 신랑이 저 신사분처럼 생기셨어요? 좋겠다!

그나저나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친구가 돼서 이름도 모를 순 없잖아요.

“음. 윌리엄. 윌리엄 카터.”

“윌리엄이요?”

“응. 근데 편하게 리암이라고 불러 주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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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가씨들께서도 이 도시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네. 윌리엄 씨와 에밀 씨도 좋은 여행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메리를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잘 들어가세요! 리암 아저씨!”

길드 사무소에 다녀왔다는 꼬마 아가씨의 언니에게 인사를 한 후 또랑또랑한 갈색 눈을 빛내며 인사하는 꼬마 아가씨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옆에서 내가 인사를 마치기를 기다려 주던 케이든의 손을 잡고 방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던 중 케이든이 내게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온 동네에 본명을 알려 줄 거면 가명을 지은 의미가 없지 않나?”

“하하하……. 뭐어. 가명에 큰 의미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야 하지……. 그나저나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뭐 하고 있었나?”

“그냥… 자고 일어났는데 케이든이 외출하고 온다고 적어 놓은 쪽지를 봐서 1층에서 기다릴까 해서 나갔다가 꼬마 아가씨를 봐서 잠깐 이야기하고 있었죠.”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항구 근처라 어린아이 혼자 두면 위험하긴 하지.”

“네에. 안 그래도 꼬마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어슬렁거리더라고요.”

어슬렁거리던 남자는 이곳 투숙객 같긴 했지만, 꼬마한테 아는 사람이냐 물으니 모르는 사람이란 답이 돌아왔다. 내가 계속 아이와 대화하니 얼굴을 구기고 가 버린 걸 보니 좋은 의도로 어슬렁거리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내 추측을 케이든에게 말해 주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대는 생각보다 어린아이에게 친절하단 말이지. 베른한테 잘 대해 주는 것도 그렇고.”

“나쁘게 굴 이유도 딱히 없으니까요. 그리고 베른은 귀여우니까……?”

이제 세 살이 되는 웬리르 공작 부부의 외아들 베른은 아기 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나를 잘 따랐다. 녀석을 볼 때마다 저 작은 몸에 자기주장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던지.

여행 오기 전에 웬리르가에 들렀더니 베른이 나 준다고 주워 놨던 조약돌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왔던 일화를 한창 말하고 있는데 케이든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리암. 그대 얼굴에 때아닌 봄이 피었군.”

“으악!”

잊고 있었다! 꼬마 아가씨가 도화지 위에 그림 그리듯 각종 화장품으로 죽죽 그어 놓은 얼굴 몰골을 대화하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나는 급히 얼굴을 다시 가렸다. 내 반응에 옆에서 케이든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웃었다.

“웃지 마세요…….”

“왜? 어울리는데.”

“아이. 놀리지 마세요.”

“정말이야. 꼬마 아가씨가 색감에 제법 재능이 있군.”

웃느라 눈물이 고인 눈가를 닦으며 그런 소리를 해 봤자다. 아까 케이든이 여관에 들어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던 것도 그렇고, 꼬마의 언니가 들어와 내 얼굴을 보고 손으로 입을 가린 것도 그렇고……. 거울은 아직 안 봤지만 분명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게 분명했다.

꼬마 아가씨의 취미 생활에 얼굴을 내어 준 걸 딱히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케이든 앞에서 이런 몰골을 한 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눈을 내리깔며 셔츠 깃을 당겨 얼굴을 힘써 가리자 케이든이 더더욱 소리 내 웃었다.

결국, 내가 불퉁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자 그제야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힌 케이든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턱을 붙잡고 미술품을 감정하듯 얼굴을 훑어보았다.

“흠. 그대는 얼굴이 하얗고 선이 지나치게 굵지 않게 잘생겼으니 햇볕을 받은 여름 장미가 어울리는 미모지. 꼬마 아가씨께서 그대의 입술을 적절한 색으로 칠해 주었어. 볼도 입술과 비슷하지만 진하지 않게 옅은 색으로 잘 칠해 주었군. 말이 나온 김에 돌아가면 성에 장미 정원을 가꾸라 할까?”

예전에 케이든이 내게서 수선화 향이 난다고 속삭이며 끌어안을 때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는데 이번엔 여름 장미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굳이 볼에 화장품을 바를 필요가 있을까? 케이든이 몇 마디만 하면 어차피 얼굴이 이렇게 달아오르는데.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케이든이 내 턱을 붙잡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내가 그의 눈을 피하며 내 손만 만지작거리자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던 케이든이 나를 끌어당겨 입 맞췄다.

반항 없이 그에게 끌려가며 눈을 슬쩍 감자 곧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맞닿았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벽 쪽에 붙어 그에게 정신없이 매달렸다. 그의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끼워 넣으며 슬쩍 문지르자 그의 입에서 달뜬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응, 흣, 응…….”

“하아…….”

키가 커져서 불만스러운 점은 여럿 있었지만, 전보다 키스하기 편해진 건 마음에 들긴 했다. 내 다리에 비벼진 케이든의 것이 단단해지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내 등에 감은 팔에 힘을 더하였다. 그와 정신없이 입술을 비비며 붙어 있다가 숨을 더하기 위해 떨어졌더니 보인 광경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케이든의 모양새 좋은 입술에 내가 문질러 댄 것이 분명한 붉은 색이 잔뜩 번져 있었다. 이 순간의 케이든을 제목 없는 그림으로 남긴다면 분명 후대 사람들은 그림의 제목으로 ‘매혹’이란 단어 외엔 아무것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케이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더듬더듬 내 입가 주변을 엄지로 문질렀다. 케이든의 입술에 저렇게 번진 걸 보면 내 얼굴은 지금 엉망일 텐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 내 꼴이 어떤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내 멍청한 꼴을 가만히 보던 케이든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가 손을 들어 내 입가를 만지작거리다 속삭였다.

“복도에서 끝까지 하려고?”

“…방까지 걸을 수 있을 거 같나요?”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닐 것 같군.”

그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무릎 뒤에 손을 넣어 그를 안아 들었다. 마음이 급한 와중에 하필 방이 복도 제일 끝에 있어 갈 길이 멀었다. 뛰다시피 걷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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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쳐진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손길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를 깨웠다. 잠결에 느껴지는 손길에 배시시 웃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암, 일어나야지. 아침 바다에 가 보고 싶다며.”

“흐아암. 가야죠……. 바다…….”

“이대로 나가면 모래사장에서 넘어진 김에 잘됐다고 그대로 자겠군.”

“음음……. 그럴지도…….”

“이럴 때는 부정을 좀 해 봐, 리암.”

“으응. 모래사장에서 넘어지면 바로 일어날게요.”

“좋은 자세야. 자, 이제 일어나자.”

케이든이 재차 일어나라 재촉하자 더는 버틸 수 없어 잠을 깨기 위해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날 그와 여러 번 몸을 겹친 후 더운 여름밤에 굳이 옷을 걸치고 잠을 잘 필요성을 못 느껴 그대로 잤더니 그나 나나 얇은 이불 아래에는 걸친 것 없는 맨몸이었다. 주섬주섬 상체를 일으키자 이불이 주룩 떨어지며 맨몸이 드러났다.

먼저 일어나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 앉아 나를 보던 케이든이 드러난 내 몸을 보고 장난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침부터 당하는 희롱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하지만 나도 이제 그와 함께 산 지 3년 차였다. 이 정도 희롱으로 방방 뛰지 않는단 소리였다.

“아침부터 열렬하기도 하지, 목에 립스틱 묻었네, 리암.”

“허억!”

아, 아닌가? 케이든의 놀림에 의연하게 대처하려면 3년이 아니라 30년을 같이 살아도 부족할지도……. 케이든의 말에 반사적으로 오른쪽 목을 가리다가 케이든이 반대편이라고 손짓해 주어 손을 옮겨 다시 립스틱 자국을 가렸다. 새벽에 케이든 먼저 씻겨 주고 내가 씻을 땐 졸려서 대충 샤워하고 나왔더니 제대로 다 안 지운 채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목덜미를 가리고 쭈뼛대고 있으니 립스틱 자국을 나에게 남긴 범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더 묻은 곳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말을 보탰다.

그 모습이 얄미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가 몸을 움직여 그의 위로 올라탔다. 대뜸 자신 위에 올라탄 내 행동에 케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가볍게 내 등을 두드렸다.

“이제 막 일어나 놓고 또 누우려고. 일어나, 리암.”

“싫어요……. 생각해 봤는데 침대가 좁아서 아무래도 이렇게 붙어 있어야겠어요.”

겸사겸사 립스틱 자국이 더 묻지 않았나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홑이불을 당기는 손도 막고 말이다.

내 얄팍한 술수를 금세 파악해 낸 케이든이 피식 웃었다.

“좁기는. 잘만 자 놓고서.”

“좁죠. 원래는 이 방만 한 침대를 썼는데.”

“그러게 이왕 휴양 오는 것 별장으로 가자니까 갑자기 일반 여관 체험을 하고 싶다고 우기던 윌리엄 씨. 여관 체험은 즐거우십니까?”

“…그치만, 로망이었단 말이에요.”

“그래. 그대는 아직 침구와 시중의 편안함보다 로망을 추구할 나이긴 하지.”

나는 대답 없이 케이든의 빗장뼈와 가슴 사이에 이마를 문질렀다. 내 노골적인 대답 회피에 케이든이 웃는 울림이 붙은 몸을 통해 전해졌다. 그 반응에 나도 즐거워져 킥킥대며 웃었다.

얼마나 그렇게 붙어 있었을까, 가만히 몸을 붙이고 있으려니 슬금슬금 딴 마음이 드는 것이 금방이었다. 손을 움직여 케이든의 갈비뼈 위를 쓸자 아래에 깔린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엉켜 있는 아래에서 그가 슬쩍 다리를 빼내려 해 내 다리에 힘을 주어 그를 붙잡으니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에게 말했다.

“동틀 때까지 했으면서 더 할 마음이 드나?”

“네에.”

“리암……. 아까도 말했지만 부정하는 척이라도 좀 해 봐.”

“싫어요…….”

“그대는 안 그런 척하면서 고집이 세.”

그의 타박에도 내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젓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쓰다듬는 손길이 부지런했다.

그가 나를 설득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럴 때 케이든이 하는 말은 보통 나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는 것에 가깝다.

“나가서 바닷가도 구경해야지.”

“오후에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침에 가면 백사장이 더 예쁘단 말에 내일 꼭 가 보자고 방방 뛴 건 그대였잖나.”

“그건 내일……. 내일 또 가요.”

“하여간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케이든의 말이 느려졌다. 생각에 잠겼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멈췄길래 그의 손등에 내 손을 덧대어 머리를 문질렀다.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손을 대신해 머리를 쓰다듬게 만드는 또 다른 손길을 느낀 케이든은 결국 푸핫 웃고 말았다. 그는 내 머리를 헝클이며 다리를 벌렸다. 그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일도 이러면 정말 화낼 거야.”

“우리 내일은 꼭 아침에 백사장 가요. 새벽부터 준비할게요.”

“그대가 새벽에 일어나는 것보다 내가 새벽에 잠든 그대를 안아 들고 해변으로 가는 게 더 빠를 거 같은데.”

맞는 말이라 나는 대답 없이 얼굴을 내려 케이든의 이마에 내 이마를 살살 맞부딪쳤다. 그가 웃으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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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 아미르 성에서 평소처럼 지내던 내 앞으로 갈색 봉투에 담긴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올리버 그라함, 얼굴 정도나 알고 지내던 마탑의 마법사였다.

성에 오는 편지 대부분은 케이든의 것이었기에 편지가 담긴 쟁반을 보지도 않고 스콘에 잼이나 바르던 나는 케이든이 ‘이건 그대가 봐야 할 거 같은데.’라며 건네준 편지에 눈만 깜빡였었다.

교류 없던 사이에 갑자기 무슨 편지일까 싶어 스콘을 조심히 베어 물며 편지를 펼쳐 보니 꽤 흥미진진한 제안이 적혀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말없이도 움직이는 마차를 구상 중이었는데 이번에 마탑의 교수직에 임용이 되며 본격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행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였다. 각 분야의 정교한 술식들이 필요한 프로젝트라 여러 사람이 필요해 참여할 인원들을 모으고 있는데 나도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마탑에서 사람들에게 나눠 준 인형을 그도 받았었는데 다섯 가지의 인형이 연결된 판 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정석에 새겨진 진에 따라 순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고 내가 그의 프로젝트에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나.

보통 마탑의 후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연구는 한 명이나 두 명 정도의 협업으로 이루어지거나 같은 분야 내에서 이루어지는데 나 외에도 전공 분야가 다른 여섯 명 정도가 함께 참여할 예정이라니 꽤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다.

제안이 제법 흥미로웠다. 안 그래도 매번 아미르 성과 수도의 저택을 오갈 때마다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좀 불편하게 여겨지던 참이기도 했고 말이다.

더욱이 ‘리암 카터’는 마탑의 인장을 받자마자 미래를 바꾼다고 연구는 뒤로하고 대륙을 떠돌며 여러 정보를 수집하였고 회귀를 멈춘 후엔 딱히 흥미를 끄는 제안이 없어서 참여하지 않았던지라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흥미가 생긴 김에 올리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답신을 보낸 나는 머지않아 꽤 인상 깊은 답변 몇 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말 대신 마정석을 이용해 움직이는 기계면 마정석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효용성이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어차피 말 유지 비용이나 마정석 유지 비용이나 그것이 그거다.’라는 답변을 돌려주어 무릎을 치게 했다.

하긴 어떤 면에선 비용이 좀 더 든다고 쳐도 말보다 마정석을 사용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최소한 마정석은 휴식 시간은 필요 없으니 말이다.

올리버 그라함이 나를 스카우트하려던 이유도 이 부분에 있을 것이다. 같은 질의 마정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진을 새기는 마법사가 누구냐에 따라 효율의 차이가 크게 나는 법이었고, 나는 마정석의 효율을 최대로 운용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이 외에도 흥미로운 답변 몇 가지를 더 받은 후 나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자마자 케이든에게 달려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말했다.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그는 내 말이 마치자마자,

“소유 말 필 단위로 세금을 부과하는 현행 과세 제도에 수정이 필요하겠군.”

이런 답변을 돌려주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 멍한 표정을 본 케이든은 푸핫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흐트러뜨렸다.

“뭐, 난 이야기만 전하께 언질을 드리면 그만인 문제고 언제부터 시작되는 프로젝트인가? 바빠지겠군. 설마 마탑에 아예 머물면서 진행해야 하는 건가?”

“에이, 설마요! 그랬으면 제가 절대 참여 안 했죠.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밤샘 작업은 몇 번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예 상주하면서 진행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나마 다행이군. 마탑에 상주하면서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였으면 프로젝트 말기엔 하마터면 내가 도시락을 싸 들고 마탑을 오갔을지도 모르겠어.”

“앗.”

“뭐가 앗, 이야. 도시락이 먹고 싶은 거면 지금 내오라 할까?”

“아, 케이든이 만든 도시락이 아니었군요?”

“전문가가 괜히 있는 게 아니네, 리암.”

맞는 말이긴 한데……. 내 떨떠름한 얼굴에 케이든은 장난스레 웃으며 달력을 넘겼다.

“3월 시작이면 1월부터 심심찮게 바빠지겠군. 그러면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여행이나 갈까? 그대는 추위를 많이 타니 여행은 여름에 가는 게 낫겠군. 바다는 어때?”

“좋아요!”

말이 나온 김에 우리 둘은 곧장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케이든이 레이거니스의 바다가 내 눈동자 색 같으니 꼭 보여 주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여행지는 레이거니스로 정해지게 되었다. 우리의 피서 계획을 들은 노엘 공작이 자신의 별장과 개인 해변을 흔쾌히 빌려주겠노라 한 것도 결정에 한몫했고 말이다.

하지만, 순조롭게 정해지던 우리 계획은 떠나기 며칠 전 나에게 테일러의 편지가 도착하는 바람에 조금 바뀌게 되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연구 시간이 부족한 것이 싫어 교수직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던 테일러는 2년이 지난 지금, 연구는커녕 자기 혼자 무슨 모험 소설 한 편을 쓰고 있었다.

칸돌 해협 쪽에서 나는 해초에서 노란빛과 보랏빛이 동시에 도는 파란 염료를 얻을 수 있다고 들어 직접 확인해 보고 실제면 대량 생산을 위한 방안을 알아보고자 해협으로 가기 위한 배를 탔는데 그게 해적선이 민간선으로 위장한 배였다는 것이다!

그의 편지에 따르면 승객들이 도망갈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정체를 밝힌 해적들은 승객들을 다른 대륙에 팔아 버리겠다고 비웃으며 승객들을 노끈으로 꽁꽁 묶어 버렸다. 그는 이쯤에서 지레 찔렸는지 편지에 변명 같은 말을 써 놨다.

[‘넌 그때 뭐 했는데?’ 같은 생각을 할 걸 알지만, 나를 너무 욕하지는 말아 줘. 난 그때 뱃멀미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스무 번이나 토했던 터라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거든.]

그래서 나도 스무 번만 욕해 주며 편지를 마저 읽었다. 뱃멀미에 머리와 속이 엉망이라 마법을 제대로 못 썼다고 해도 테일러 역시 마탑의 마법사였다. 육지였으면 바로 제압했겠지만, 변수가 너무 다양한 바다 위라 언제쯤 해적들을 제압해야 할까 눈치를 보다가 해적들이 그들에게 항의하는 노신사 한 명을 바다에 내던지려 하여 더는 참으면 안 될 것 같아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그때 용맹한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해적들에게 품속에 숨겨 둔 칼을 뽑아 들더라고, 언제 풀었는지 몰라도 밧줄은 청년이 일어나자 제 역할을 못 하고 우수수 떨어졌지.]

그렇게 해적들을 향해 ‘이 비겁한 것들아!’라고 외치며 덤빈 청년은 그에게 달려든 해적들에게 작신 두들겨 맞았다. 자신만만하게 일어나 놓고 그대로 얻어맞는 청년의 작태에 어처구니가 없어 그냥 테일러가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해적들을 제압했다고 했다.

그리고 단단히 미쳤는지 그대로 드러누워 ‘육지에 가느니, 여기서 다 같이 수장당하자!’라고 뻗대는 해적들을 친절히 설득해-해적 한 명 한 명을 시금치 데치듯 바다에 담갔다가 꺼내는 걸 반복하는 게 친절한 설득인지는 차치하고- 가장 근처의 육지에 상륙한 테일러에게 아까 전의 청년이 혹시 마법사시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청했다.

[알고 보니 그는 배가 출발한 도시의 제일가는 부잣집의 셋째딸과 결혼하기로 한 사이였는데 이상하게 결혼식 전까지 한 번도 신부를 보지 못했다더라고. 아무리 어른들이 정한 결혼이라도 그렇지 결혼 전에 신부 얼굴 한번 못 보는 건 정상이 아니지 않나? 싶어서 몰래 그 집에 잠입했대. 그런데 몰래 잠입한 집에서 길을 헤매 지하실에 가고 말았는데 거기서 보고 만 거지, 인신 공양의 흔적을 말이야!]

미친, 이즈음엔 나도 몰입해서 편지에 코를 박고 읽어 내렸다. 그 길로 결혼이고 뭐고 도망친 청년은 홧김에 멀리 도망가기 위해 배를 타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전부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면 안 될 것 같아 목적지에 내리자마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일이 이렇게 풀리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데 혹시 선생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는 청년의 부탁에 테일러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하긴, 인신 공양의 시도가 진짜라면 가만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긴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편지에선 그 도시에 다시 돌아가 몰래 그 부잣집을 수색해 보니 청년의 말이 진실이었고 그 집에 숨어 있던 사이비 스무 명과 격렬한 전투도 있었다고 했다.

현재는 그 집에서 포착한 단서들을 기반으로 열심히 인신 공양을 교리로 삼는 사이비들의 본부를 쫓고 있다는 근황을 끝으로 테일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그래도 너는 연락 좀 하고 살라는 핀잔과 함께 조만간 다시 편지하겠다고 글을 마무리 지었다.

하여간에 어딜 나다니기 싫어하는 주제에 일복 하나만큼은 원 없이 넘치는 인간이었다. 그래. 열심히 일해라 나는 그냥 집에서 편하게 쉬다가 피서나 가련다,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덮었지만 어쩐지 가슴이 감동으로 울렁거렸다. 평범한 여행이었으면 별거 아니려니 머리에서 지웠을 텐데 너무 흥미진진해 보였다. 바다, 해적, 모험…….

나는 결국 케이든의 집무실로 뛰어가 우리 이번 여행에서 배를 타면 안 되겠냐고 외치며 문을 열어젖혔다.

갑자기 집무실에 들이닥쳐 배에 타자 외치는 내 말에 우리의 여행 일정을 담당하던 막내 보좌관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는 차마 내게 말은 못 하고 케이든만 흘끔거리기만 하였는데 정작 케이든은 내 말에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기울이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유람선을 말하는 건가?”

“아뇨! 배! 나라 간 이동하는 거로!”

내 말에 멍하니 나를 보던 케이든은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폭소한 그는 눈을 빛내며 그를 보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대신 유람선은 일정에 넣지.”

“배…….”

“안 돼. 대신 다른 걸 말해 보게.”

너무 단호한 대답에 더 우기기가 어려웠다. 하긴, 케이든과 함께 가는 여행에서 해적이 나타나도 곤란하긴 했다. 그럼 배 말고 뭐 하지?

“으음……. 그럼 여관에서 자 볼래요!”

그럼 차선책으로 보통 모험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여관에서 자 보고 싶었다. 내 말에 케이든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리암, 그대는 자신의 젊음과 체력을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는데 지난 3년간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들로 그대를 감쌌음을 잊지 말도록.”

“그래도요! 바닷가에서 여관에서 자 볼래요!”

그러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물론 케이든이 있으니 별일이 생기면 안 되지만……. 그래도!

“그래, 그래. 또 뭘 해 보고 싶지?”

“가명도! 가명도 써 볼래요!”

“그래. 내 고집쟁이가 해 보고 싶다는데 들어줘야지.”

케이든은 해가 쨍쨍한 여름날 코트를 걸치고 장화를 신은 채 외출하겠다는 아이를 말리지 않고, 저러고 나가 더위를 겪어 봐야 정신 차린다고 말하며 해탈한 미소를 짓는 부모 같은 얼굴로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때는 그냥 가명을 쓰고 여관에서 묵는다는 사실이 두근거려 마냥 신났는데 막상 여관에 묵은 지금은 케이든이 왜 자연스럽게 별장과 개인 해변을 쓸 계획을 세웠는지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생뚱맞게 남의 모험에 설렌 내가 바보지…….

아침에 그와 한차례 뒹군 이후 케이든이 내려오면 아침 겸 점심을 바로 먹을 수 있게 음식을 주문해 두려고 먼저 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 험상궂은 남자와 어깨가 부딪쳤다. 어제 만났던 꼬마 주변을 수상하게 어슬렁거리던 그 남자였다. 계단이 좁다고 한들 서로 피해 갈 공간 정돈 충분했는데 굳이 내 쪽으로 와 어깨를 부딪친 남자의 행패가 어처구니없었다.

갑자기 걸린 시비에 내가 인상을 쓰자 잘됐다는 듯 계단에 침을 뱉으며 아니꼽냐고 고함치는 남자와 멱살잡이까지 갔다가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식당으로 내려오던 케이든이 싸움판을 발견해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내 멱살을 잡은 남자를 보자마자 남자의 손목을 꺾어 제압하는 케이든의 속도가 놀라웠다. 그 솜씨를 보니 왜 그가 빈둥거리며 누워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무조건 마법에 의지할 게 아니라 호신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연무장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갔다. 본인이 저런 실력자니 내가 요령 없이 힘쓰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케이든이 합류하니 2:1로 확연히 불리해진 전세에 남자는 눈치를 보다가 마치 자신이 물러나는 것처럼 소리를 뻥뻥 치며 물러났다.

사실 불리하지 않은 척, 한 번만 자신이 봐주는 척 도망가려는 남자를 열이 잔뜩 받은 케이든이 곱게 안 보내 주려 해서 내가 케이든의 허리를 붙잡은 틈에 도망간 것에 가까웠다. 남자를 동정한 것은 아니었고 여행의 시작부터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자신이 받은 무례는 차분하게 대해도 내가 당한 무례는 참지 않았다. 그의 허리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간 당장 남자의 방까지 쫓아가 도망간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 놓을 것 같아 그를 살살 달래어 식당까지 내려가는 길은 제법 고되었다.

그래도 그는 화를 오래 바깥에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식당에 도착할 때쯤엔 차분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원래 고난은 연이어 온다고 이번엔 식탁이 문제였다.

식당의 식탁이 우리 키에 비해 너무 작았다……. 나는 반쯤 울상으로 내 옆에 앉은 케이든에게 칭얼거렸다.

“으……. 케이든은 안 불편해요?”

“당연히 나도 불편하기야 한데……. 그대는 이러다 무릎에 멍이 들게 생겼군.”

조금만 움직여도 식탁 밑에 무릎이 부딪혀 너무 불편했다. 케이든도 사정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다리를 쭉 펴지 않았는데도 다리가 반대편으로 삐져 나간 것이 안 맞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몰골이라 좀 웃겼다.

그동안 저택과 성 어디에서도 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슬슬 케이든이 말한 ‘그가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감쌌다.’가 무슨 뜻인지 확연히 와닿았다.

“케이든……. 우리 밥 먹고 별장으로 옮길까요?”

“너무 포기가 빠르시군요. 윌리엄 씨.”

“윌리엄은 힘들어서 도망갔어요. 이젠 리암만 남았어요.”

“저런 리암 씨, 에밀은 아직 견딜 만한데 조금 더 힘내 보시지요.”

그렇게 말했지만, 케이든은 곧 작게 웃으며 여기서 바다가 가까우니 이왕 하룻밤 묵은 거 바다에 들렀다가 별장으로 향하자 하였다. 별장에 딸린 개인 해변도 좋지만, 이왕 사람들과 어울리기로 한 것 공용 해변도 한번 가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포크로 뭉개 놓은 베이크드 빈을 크게 한 입 떠먹은 후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케이든도 딱히 더 먹을 생각은 없는지 반도 안 비운 접시 위에 포크를 올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야 어차피 나중에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면 되니 그대로 여관을 나가려던 차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리암 아저씨!”

“어?”

아이 특유의 높은 음역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고개를 내려 보니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어제의 꼬마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음, 메리?”

“네! 아저씨, 어제 주신 인형 진짜 완전 멋있어요!”

“사용했니?”

“네!”

혹시나 해서 준 것이었는데 사용했단 걸 보니 한숨이 나왔다. 흥분에 휩싸인 아이는 열심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 그 아저씨 있잖아요. 그 눈이 막 이렇게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아저씨요.”

“응. 기억나.”

아침에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놈이었다. 내가 기억한다 하자 아이는 그 남자의 흉내를 내듯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으며 아침의 일을 이어 말했다.

“언니랑 아침에 복도 지나가는데 그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한테 오더니 막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무슨 약효가 어쩌고, 기분이 좋아진다느니 알 수 없는 소리 늘어놓는데 언니가 싫다고 하니까 갑자기 막 언니 팔을 잡으려는 거예요!”

아이의 설명을 들으니 마약상이었나 보다. 아이의 말을 같이 듣던 케이든이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놈을 끌고 나올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제가 막 그 아저씨 다리 깨물려다가 아저씨가 준 인형이 생각나서 그냥 혹시나 해서 회털이! 외쳤더니 막! 막! 그 이따시만 한 파란 막이 갑자기 우리 주변에 나타나서 그 아저씨를 저 멀리로 밀어내는 거 있죠!”

“회털이가 자기 데려가 줘서 고맙다고 은혜 갚았나 보다.”

“아저씨, 저 바보 아니거든요? 아저씨, 마법사죠?”

“아니야. 들어 봐봐. 원래 사람이 정성을 다해서 물건을 만들면 생명이 깃들거든? 회털이도 그런 거지. 근데 아저씨가 보기엔 회털이는 몸이 작아서 그만한 일을 앞으로 한 네 번 정도 해낼 수 있겠다. 횟수 잘 기억해 두고 앞으로도 데리고 다니면서 잘 보살펴 주고, 위험하면 회털이 부르고 그래.”

옆에서 케이든이 코웃음 치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꿋꿋이 아이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아이는 내 설명을 불신 어린 눈으로 듣긴 했지만 말이다.

꼬마가 아저씨 마법사 맞지 않냐고 추궁하는 것을 피하고 있으니 뒤에서 꼬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 실례야. 그리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니?”

“아! 감사합니다아.”

제 언니의 말에 아이가 허리를 꾸벅 숙여 우리에게 인사했다. 별거 아니라 손 저어 주고 시선을 돌려 아이의 언니를 바라보았다. 피곤과 긴장으로 지친 얼굴이었다. 케이든이 살짝 염려하는 기색으로 그녀에게 권했다.

“여관을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안 그래도 지금 남은 여관비를 환불받아 온 참이에요. 규정 핑계로 다 받지는 못했지만……. 인생 교훈을 얻었다고 치려고요.”

“피서철이라 다른 여관을 구하기 어려울 텐데 봐둔 곳은 있나?”

“아직 이요. 체크아웃 시간까진 짐을 여기다 두고 찾아보려고요. 못 찾으면 음……. 어디든 있겠죠. 뭐!”

“흠.”

케이든은 무언갈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대화까지 나눈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갈 만큼 냉정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오늘 내로 그치에 대해 조치해 놓을 테니, 다른 여관에 방을 못 구하면 4층 오른쪽 끝방을 사용하게. 말을 해 놓을 테니 자유롭게 써도 되네.”

“네? 거긴 여기서 제일 좋은 방……. 저, 어제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정말 괜찮아요!”

“우린 오늘 다른 곳으로 갈 거고, 어차피 돈을 지급했으니 누군가는 쓰는 게 낫지. 신경 쓰지 말게. 다만, 나도 이곳 사람이 아니라 피서 온 터라 그대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다는 남자의 처분에 끝까지 신경을 써 주긴 어려우니 가장 최우선으로 여관을 옮기는 걸 추천하네.”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꼬마의 언니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인사하는 것에 케이든은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문을 나섰다. 뒤에서 꼬마가 여행 잘하시라 인사하는 맹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관을 나서자 아침 일찍 우리를 마중 나왔지만, 우리가 예상 시간보다 한참 늦게 나와 죽상으로 우리를 기다리던 보좌관이 바로 달려왔다.

이번 피서에 동행한 보좌관이 잭슨 씨였다면 벌써 온갖 가시 돋친 말로 우리를 비난해 댔을 텐데, 막내 보좌관은 그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케이든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마약상이 저렇게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이 도시의 치안이 우려스럽군.”

치안대에 마약상을 신고하란 말로 지시를 마무리한 후 마차에 올라탄 케이든은 혀를 찼다. 확실히 칼레의 다른 도시들보다 레이거니스의 치안이 별로인 것 같긴 했다.

나중에 수도에 가게 되면 시장 교체의 건을 왕에게 말해야겠다고 한숨 쉬는 케이든을 보니 풍년제 때 저택에 틀어박혀 일하던 일 중독자가 생각나 반가워 웃었다가 이게 웃을 일이냐며 볼이 꼬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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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거니스의 바닷가에 도착하니 왜 케이든이 나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어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다 근처에서부터 시원한 바닷바람이 우리를 휘감았다. 살짝 비린내가 섞인 바닷냄새가 담긴 바람을 느끼자마자 들떠 케이든의 손을 잡고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니 케이든이 뭐가 그리 급하냐고 웃으며 타박하면서도 순순히 함께 와 주었다.

순식간에 뛰어 도착한 푸른 바다는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얀 모래사장 곳곳에선 양산을 든 사람들과 수영에 지쳐 의자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키가 커서 그런지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수도를 돌아다닐 때와 비교하면 훨씬 적은 시선이라 이 정도는 괜찮았다. 누군가는 우리를 알아봤을 수도 있지만, 가문의 문장도 없는 일반 마차를 탔기에 그런 사람은 몇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케이든이 너무 잘생겨서 다들 한 번씩 바라보는 거겠지.

원래 케이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시선을 뗄 수 없는 게 당연한 거니까, 저런 거 다 신경 쓰면 사람이 바깥에 못 돌아다닌다.

바다를 손으로 가리키며 케이든에게 조잘거렸다.

“와아! 케이든, 저기 봐요! 파도쳐요! 파도!”

“예쁘지?”

“네에!”

모래사장도 신기했다. 신발을 벗으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러운 하얀 모래가 발을 간지럽혔다. 내가 신이나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바다의 초입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으니 시원한 바닷물이 모래를 걷어 갔다가 그대로 발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감각이 너무 재밌었다.

케이든도 들어와서 놀았으면 해서 고개를 돌리니 내 뒤에서 케이든이 즐겁게 웃으며 영상석으로 나를 찍고 있었다. 저건 언제 챙겨 온 거지?

“케이든! 케이든도 들어와요!”

“나는 괜찮으니 리암 그대가 내 몫까지 맘껏 놀게. 나는 여기서 그대를 보는 게 더 즐겁군.”

인제 보니 케이든은 신발도 안 벗었다. 피서지 복장답게 복장 자체는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지만, 바짓단을 걷지도 않았고 셔츠의 단추도 목까지 잠근 상태였다. 온몸으로 자신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피력하고 있는 차림을 보니 장난기가 돋았다.

케이든의 말에 아깝지만 수긍한 척 뒤를 돌았다가 그가 방심했을 무렵 휙 뛰어가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케이든이 비명 지르듯 내 이름을 외쳤다.

“리암!”

“아하하!”

내가 크게 웃으며 모래사장에 누운 그의 가슴팍에 볼을 비비니 케이든이 손을 올려 아프지 않게 내 등을 때렸다.

“어떡할 거야. 옷이 모래 범벅이 됐잖아.”

“저랑 같이 바다에 들어가면 되죠!”

“난 물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기서 그대를 보는 게 더 즐겁대도…….”

케이든이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엎어진 그 짧은 사이에 그의 손에 모래가 묻었는지 잠깐 만졌다고 내 머리에도 모래가 묻었다며 그가 웃었다. 그러곤 모래를 털어 주는 건지 더 묻히는 건지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손길이 규칙적이었다.

가만히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긴 채 모래사장에 누워 있는데 바닷가가 소란스러워졌다. 공용 해변이니 여러 사람이 오는 만큼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건 새삼스레 신경 쓸 거리가 아니라 케이든의 가슴팍에 기댄 채 그의 몸 위에서 손장난이나 마저 쳤다.

그런데 케이든의 숨결이 살짝 거칠어졌다. 곧이어 내 머리 위쪽에서 뿌드득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케이든의 변화에 놀라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키면서 그를 불렀다.

“…케이든?”

“리암, 얼른 청결 마법을 걸어 주게. 모래 한 톨 남지 않게. 그대에게도 걸고.”

평소였으면 이유를 대충이나마 설명해 줬을 텐데, 내 질문엔 대답 없이 어딘가를 보며 이를 가는 케이든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급히 우리 두 사람에게 청결 마법을 걸며 복장을 정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든은 언제 나와 웃으며 해변을 뒹굴었냐는 듯 그 특유의 예의 바르게 사람 깔보는 얼굴을 하며 뒷짐을 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급히 그에게 따라붙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펠튼의 3왕자야. 뱀 같은 자니 말을 섞지 말게. 대화는 나한테 맡기고 저쪽에서 말을 걸어도 무시해. 어차피 사람 신경 긁으려는 목적으로 거는 말일 테니까.”

“헉, 그 사람이요?”

트리불라의 정체를 밝힌 후 칼레 측에서 펠튼에 항의했지만, 펠튼에서 2왕자의 단독 소행으로 꼬리 자르기를 한 후 두 나라 간 관계는 살얼음판이었다. 그러던 중 올 초에 펠튼 쪽에서 관계 회복을 요청하며 3왕자를 필두로 한 교류단을 파견하였다.

트리불라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게 3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뻔뻔한 작태 아니냐 하여 칼레 쪽에서도 저걸 받아들여야 한다, 만다 말이 많았는데 국왕은 교류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이 친선 교류단이지 처분을 전적으로 칼레에 맡긴다는 둥, 펠튼 쪽에서 교류단 파견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 볼모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칼레는 역사적으로 벨룸과도 사이가 안 좋은 상황이라 벨룸 쪽을 견제해 주던 펠튼과 완전히 단교하는 것도 곤란했고 말이다.

케이든의 말에 의하면 펠튼의 1왕자 측에서 2왕자를 잘라 내고 3왕자도 잘라 내기 위해 볼모처럼 칼레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마디로 권력 다툼이라는 것이다.

그가 칼레에 머무는 동안은 짧지만 펠튼의 대사로 근무하여 나름 그쪽의 문화에 정통한 에드거가 그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만 볼모라 해도 엄연히 왕자의 신분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지라 에드거가 골치 아파하며 케이든에게 눈물 젖은 편지를 몇 번 보낸 것을 곁에서 본 적이 있었다.

케이든은 3왕자가 칼레에 온 후 얼굴만 봐도 복장이 뒤집히는 작자라며 수도에 최대한 가지 않아 그를 직접 마주한 적은 몇 번 없었다. 난 아예 마주해 본 적도 없었고.

케이든이 작게 턱짓하는 쪽을 보니, 확실히 칼레의 복장은 아닌 일행이 있었다. 통이 훨씬 넓은 소매라든가, 얇은 옷을 여러 개 겹쳐 입은 복장 등이 칼레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우리가 그쪽을 향해 가고 있으니 왕자 쪽 일행 역시 우리를 발견했는지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케이든은 누가 펠튼의 3왕자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일행을 보자마자 누가 왕자인지 감이 왔다. 당연하다는 듯 맨 앞에 서서 이쪽을 향해 웃는 남자가 보였다. 한여름의 햇빛 아래인데도 창백한 얼굴,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남자는 요사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볍게 말해도 서로의 목소리가 닿을 거리에서 걸음을 멈춘 케이든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나름 친선 교류단으로 왔으니 칼레의 피서 문화도 한번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나? 과연 여름이 펠튼보다 무더워. 칼레 사람들이 왜 여름만 되면 피서를 가려 하는지 알겠더군.”

“하긴, 저 역시 칼레 사람인지라 매해 피서를 떠났었죠. 3년 전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바쁘지 않았을 무렵만 제외하고요.”

“3년 전쯤이면 공작이 연애로 바쁠 때군. 그래도 결혼식을 잘 치르고 피서를 배우자와 보내니 감회가 색다르겠어?”

서로 한마디를 지려 하지 않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렸다. 역시 몇 번을 들어도 귀족들의 서로 빈정거리는 대화는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펠튼 일행들은 살짝 불편한 티를 내는 사람도 있고 빙긋빙긋 웃는 사람도 있고 반응이 다양했다. 그래도 정치 좀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 정도 대화 정돈 대부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나저나 의외군. 케이든 공작이 이렇게 한가로이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랑놀음 중인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결혼을 세 번이나 하신 낭만주의자 하멜 왕자님의 기준으론 이 정도는 애정 행각 축에도 들지 않으실까 우려스러웠는데 다행히 우리 부부의 금술이 그 기준을 만족시킬 정도는 되는 듯해 안심입니다.”

거침없는 인신공격적인 발언에 왕자의 일행 쪽에서 불편한 듯 헛기침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최대한 반응하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안 그러면 케이든의 말마다 뜨악한 표정으로 반응할 것 같았다.

왕자는 케이든의 말이 딱히 모욕적이진 않은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칼레 사람들이 펠튼 사람들보다 대체로 사랑꾼인 모양이야. 에드거 소백작도 어찌나 사랑꾼이신지 매번 내게 이런 결혼 생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그의 말대로 결혼 생활을 끝내니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발뺌하던데 그의 친구로서 변명해 줄 의향이 있나?”

“친한 친구라 하여 모든 발언을 공유하진 않으니 제가 함부로 무슨 변명을 해 주겠습니까?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중대사를 남의 말에 좌지우지되어 결정하는 버릇은 좋지 않다는 것 정도겠군요.”

“아하, 옛적에 어머니들의 치마폭에 무산된 케이든 공작과 노엘 공작의 혼담처럼 말이지?”

이 이야기라면 나도 알았다. 잭슨 씨에게서 뜨개질을 배울 무렵 들었었다. 옛날에, 케이든과 노엘 공작 둘 중 한 명과 왕자를 혼인시키자고 펠튼 쪽에서 혼담이 들어왔었는데 리디아 전 공작 부인과 웬리르 대부인이 난리에 난리를 치며 국왕을 압박해 무산되었다지.

사실 그때 말이 좋아 둘 중 한 명이었지, 혼담의 주인공은 거의 케이든이었다고 했다. 롤렌 왕국과 펠튼 왕국은 거의 철천지 원수지간에 가까웠기 때문에 롤렌의 왕족이기도 한 노엘 공작을 펠튼에 보내면 롤렌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 분명해 둘 중 한 명을 펠튼과 혼인 동맹의 주인공으로 사용한다면 케이든이 될 게 분명했다고…….

덕분에 그때 공작가의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다고 회상하며 케이든은 혀를 찼다. 잭슨 씨가 말해 주길 그 무렵 왕궁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리디아 공작 부인이 동생인 국왕에게 고함치며 윽박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했다. ‘내가 너를 아껴 왕위도 양보해 줬더니 원수로 갚으러 드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공작도 신발 밑창이 닳도록 의원들을 만나고 다니며 이 혼담의 무용성을 설파하며 전체 회의에서 거절에 한 표 보태 달라고 부탁하느라 집 안에 거의 들어오질 못했다고 했다. 최종 결정이야 국왕이 하지만 의원들의 의견도 무시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펠튼은 분명 중요한 동맹이었지만 자식의 인생을 생각하면 사돈으로선 절대 두고 싶지 않은 종류의 집안이었다. 이를 인정한 국왕과 의원들 그리고 자식의 인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다닌 공작 부부의 노력 덕에 혼담은 결국 무산되긴 했다.

잭슨 씨는 그때 국왕이 고민만 하며 쉽게 혼담을 거절하지 않자 케이든이 웃으며 ‘혼례복은 작은 칼 하나 정도는 숨겨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나머진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했던 걸 말해 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담 일화가 떠오르자 걱정이 되었다. 저 3왕자와 케이든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길 것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케이든이 왕자를 주먹으로 때려눕히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말이다.

“부모가 하는 일 중에 자식을 위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마땅히 모친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미덕이지요. 왕자께서도 모친의 뜻에 순응해 칼레에 오신 것 아니십니까?”

다행히 케이든은 웃으며 ‘우리 집안은 괜찮은데 너희 집안은 콩가루지?’ 같은 말로 그 말을 넘겼다. 왕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긴, 그대는 부모께서 한창 총명하실 때만을 기억하니 그것을 미덕으로 여길 만도 하지.”

그 말에 케이든의 여유로운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 여유를 흡수하듯 3왕자는 미소를 지었다. 패륜적인 언사를 사이좋게 주고받은 두 왕족 사이에서 잠시 대화가 사라졌다. 3왕자가 케이든에게서 살짝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결혼했단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만 공작 부인과 인사는 나누질 못했군, 케이든 공작이 워낙에 부인을 아껴 집 안에 꽁꽁 싸 두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네.”

왕자와 대화하지 말라는 케이든의 당부를 명심하며 대답 대신 케이든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금세 표정을 수습한 케이든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화를 낚아챘다.

“소중한 것을 품 안에서 아끼고 사랑해 주지 않고 바깥에 내돌리는 짓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행동이지요.”

“저런, 누가 들으면 공작 부인이 애완동물인 줄 알겠어? 공작, 소중한 것을 그렇게 품에 싸고돌기만 해선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법이네.”

그런 나름의 사랑관도 있는 사람이 어쩌다 이혼을 세 번이나 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져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난 3년간 이럴 땐 가만히 있어야 한단 걸 잘 배웠기에 조용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케이든은 왕자의 말에 가만 웃으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요. 그건 우리 부부간에 합의해 갈 일이니 왕자께서 참견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지 3년이 돼 가던가? 충고 하나 하자면 일반적인 부부지간에도 3년 차가 위기인 경우가 많은데 품 안에서 옥죄기만 하는 한참 연상인 남편께서는 슬슬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하물며 저렇게 매력적인 배우자라면 더더욱.”

왕자의 말에 내가 더 깜짝 놀라 급히 케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모욕적인 말에도 여전히 케이든은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의 손을 잡으니 단단히 힘이 들어간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내게 튄 불똥에 좀 울고 싶어졌다.

케이든은 나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면 그건 천하에 다시없을 멍청이였다. 혹시라도 케이든이 왕자에게 주먹질할까 싶어 그의 손을 살살 펴 깍지 껴 맞잡으며 왕자에게 말했다.

“불필요한 충고군요. 왕자님께서 위기를 많이 겪으셔서 충고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우리 부부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걱정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들 막상 닥치기 전엔 그렇게 말하곤 하지.”

그는 빙긋 눈을 접어 웃으며 내게 헛소리를 했다.

“뭐, 그대는 이제 피어오르는 쪽이니 상관없겠지, 지루해지면 언제든 찾아오게. 그대 정도로 매력적인 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니.”

“3왕자께서는 혓바닥 간수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셔야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가 받아치기도 전에 케이든이 왕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가 사방이 트인 해수욕장이 아니었으면 당장 3왕자를 때려눕혀 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3왕자는 무슨 배짱인지 당장 그를 죽일 듯 바라보는 케이든의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긴, 3왕자가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라고 해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그를 폭행할 순 없었다. 그는 크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와 케이든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예민하게 굴기는, 아무 일 일어나지 않으면 어린 배우자의 신의를 칭찬해 주면 될 일 아닌가?”

“말을 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신 걸 보니.”

“―다시는 에드거에게 그대의 일을 맡기지 말도록.”

케이든이 버럭 화를 내려던 차 3왕자가 그와 가까이 붙은 케이든에게나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케이든은 왕자의 속삭임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에드거가 그대가 부탁한 일을 하고도 무사히 칼레에 돌아간 일은 어디까지나 내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심해. 호의가 두 번이나 반복되지 않을 테니.”

“…왕자께서는 무엇이 무례인지 칼레의 문화를 다시 익히셔야겠습니다.”

“저런, 칼레의 문화는 지나치게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서 말이지.”

3왕자의 말을 들은 케이든은 왕자를 주목하고 있는 펠튼의 일행을 의식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 할 말을 마친 왕자는 언제 속삭였냐는 듯 케이든의 말을 맞받아치며 몸을 돌렸다. 제대로 된 인사 없이 손을 휘젓곤 바닷가를 떠나는 왕자의 뒷모습을 케이든은 화가 덕지덕지 붙은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깍지 낀 손이 자연스레 나를 끌고 갔기에 그와 발걸음을 맞추어 걷다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케이든? 저건 무슨 소리인가요?”

“…예전에 에드거한테 펠튼에서 나는 마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거든.”

아, 트리불라와 펠튼과의 연관성을 잡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던 그 마약.

왕자가 한 말 때문에 케이든은 생각이 복잡한지 마차로 가는 내내 말없이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탈 때가 돼서야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 해적을 만나고 싶어 했지?”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만나면 만나는…….”

“해적같이 무도한 자는 만났으니 엇비슷하군.”

“…미안해요. 괜히 여관에서 자자고 해서…….”

“됐어. 내게도 유익한 경험이었으니.”

“네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가 평소답지 않게 한마디 하는 것부터가 이미 심기가 꼬인 걸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케이든의 말에 얌전히 수그리며 조용히 마차에 올라타자 우리를 실은 마차는 별장을 향해 천천히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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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시간은 많이 흐르지 않았다. 점심 무렵에 해변으로 가서 한 시간도 채 못 놀고 별장으로 출발한 것이라 별장에 도착해 대충 구경을 마치고 거실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네 시 무렵이었다.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었고 일정 중간중간 케이든이 비스킷이나 쿠키를 입에 물려 주어 배도 고프지 않아 좀 쉰 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확실히 지금 우리에게는 식사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건너편 소파에 앉은 케이든을 보니 그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곱씹듯 미간을 찌푸린 것을 보니 왕자가 한 말이 어지간히 그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내 부탁대로 해 주었다가 그의 감정만 상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그의 기분도 풀어 줄 겸 케이든을 불렀다.

“케이든, 케이든.”

“…그대가 이렇게 부를 때마다 무슨 사고를 칠까 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대도.”

내 부름에 천천히 눈을 뜬 케이든의 타박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 그런 거지, 시무룩하지 말고. 무슨 일인가?”

“케이든, 있잖아요. 저 수염을 길러 볼까요?”

“뭐?!”

내 말에 케이든이 편안히 소파에 기대었던 몸을 떼며 상체를 급히 내 쪽으로 기울였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열렬한 반응이라니.

“생각을 해 봤는데, 제가 수염을 기르면 어리단 시비에 덜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기르면…….”

근처에 있던 검은색 담요를 접어 하관을 다 덮도록 감싸자 케이든이 아무 말 없이 탁자에 놓인 물을 들이마셨다. 점심이 짰나?

“리암, 내 생각엔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군.”

“왜요? 저 길러 볼래요.”

“시비는 핑계고 그냥 길러 보고 싶은 거지?”

“핑계…까진 아니고…….”

겸사겸사이긴 한데 그래도 한번 길러 보고 싶긴 했다.

‘수염 기르면 나 좀 멋있을 거 같은데.’

몇 달 전, 해럴드를 만나러 갔더니 그는 마흔이 된 기념이라면서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인정하긴 싫지만, 꽤 멋있었다. 거기다 최근엔 잭슨 씨도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염을 기르는 것이 요즘 유행인 것 같았다. 나도 이 유행을 따르고 싶었다. 내가 수염을 기르면 좀 더 중후해 보이고 멋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든의 생각은 다른지 그는 물컵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왜요?”

담요를 끌어안으며 절로 튀어 나간 내 투정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테이블을 손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키스할 때 불편할 거 같군.”

“그럴까 봐 남편이나 애인이 수염을 기른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대부분이 괜찮댔어요.”

“수염을 기른 그대가 키스하는 상대가 나지 그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 의견이 왜 필요하지?”

맞는 말이긴 했다. 납득가는 반박에 나는 순순히 담요를 내려놓았다. 대답에 짜증이 스며든 것을 보니 케이든은 내가 수염을 기르는 게 영 싫은 모양이었다. 수염을 기르고 싶긴 하지만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싫다면 참는 것이 배우자의 미덕이겠지……. 케이든은 내가 담요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나서야 안도한 얼굴로 몸을 다시 소파에 기대었다.

수염 소동이 마무리된 후, 시간이 애매하게 뜨는데 저녁 먹기 전에 별장 근처 해변을 걷고 식사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럼 해도 좀 졌겠다 지금 나가 보자고 둘 다 몸을 일으키던 찰나, 여행에 따라온 케이든의 보좌관 중 한 명이 급히 노크하였다. 의아한 얼굴로 케이든이 들어오라 하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을 연 보좌관은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저렇게 서둘러 들어올 일이 뭐가 있지? 우리 둘 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숨을 급히 고르며 말을 꺼냈다.

“리암 님이 지금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셔서, 시장에게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자세히 설명해 보게.”

갑작스러운 소리에 케이든이 귀를 의심하듯 되물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보좌관과 케이든만 번갈아 보며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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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며 보좌관의 설명을 들어 보니 우리가 묵었던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자매가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방을 처리해 놓으라는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케이든의 부하들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두 시 무렵, 여관에서 살인 사건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그 여관에 머물던 마약상으로 아침에 우리와 시비가 붙었던 남자였다. 목에 남은 자국으로 미루어 봐선 낚싯줄에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특이 사항으론 피해자의 반항의 흔적이 미미하단 것이 있었다.

보좌관들은 남자가 우리와 시비가 붙었던 남자란 건 몰랐지만 케이든이 마약상을 경비대에 신고하라 명령한 것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 여관에 조금 더 머물렀다고 했다. 겸사겸사 자매에게 우리 방을 그대로 쓰게 하는 게 나을지 다른 여관에 방을 잡아 주는 게 나을지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관의 주인이 갑자기 마약상이 우리와 다투었단 이야기를 꺼내며 마약상을 살해한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더란 것이다.

마약상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여관에 남아 있던 것은 여관 주인과 그녀의 친구뿐이었는데 둘 다 몸집이 작은 여자들인데 저 덩치 큰 마약상을 어떻게 목 졸라 죽였겠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며 그녀는 검은 머리 남자가 마법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 덩치에 마법을 쓸 줄 알면 저 마약상의 목 졸린 자국이나 반항 흔적이 미미한 것도 말이 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

그런데 살인 현장을 살피러 몸소 출두했던 시장이 여관 주인의 주장이 타당하다며 곧장 내 몽타주를 만들라 지시했다는 것이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어딨느냐며 부하 한 명이 항의하여 몽타주 배포를 막는 틈에 이 보좌관은 우리에게 사건을 알리러 온 것이었다.

이야기의 전말을 들은 케이든은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일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도 안 풀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냥 치기로 여관에서 하룻밤 자자고 했을 뿐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차 바닥을 보자 케이든이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별거 아냐. 가서 대화 좀 하면 해결될 문제네. 애초에 그대는 범인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그댄 이제 왕실의 일원이라 이런 증거 하나 없는 상황에서 용의자로 지목할 수 없어. 살다 보면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 날은 늘 있는 법이니 의기소침해하지 마.”

“그냥요……. 일이 왜 이렇게 됐나 싶어서요…….”

“그대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제나, 그런데 왜 시장이 살인 사건 현장까지 온 것이지? 이런 도시에 범죄가 한두 개 벌어질 리도 없고, 일반적이진 않은데.”

“네. 시장이 그 마약상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장이 전부터 이 도시 마약상들의 뒤를 봐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 마약상 살인 사건에서 시장이 빠른 일 처리를 보여 자신과 연관이 있는 다른 마약상들에게 믿음을 주려던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개판이군.”

케이든이 인상을 쓰며 이를 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도시의 시장은 조만간 시장직에서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상황 보고를 받는 사이 시청에 도착하여 마차가 멈추었다. 미리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들었는지 마차가 멈추자마자 시장으로 보이는 머리가 헐벗겨진 남자 한 명이 급히 다가오는 것이 창문으로 보였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는 허리를 반쯤 숙이다시피 케이든에게 거듭 인사하였다.

“아미르 공작님을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케이든의 말에 시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왜 케이든이 자신을 불렀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숙박인 명부엔 윌리엄 카터로 되어 있어서, 아미르 공작 부인이신 걸 제가 알지 못했…….”

“윌리엄 카터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수배를 내려도 되는 모양이지?”

“아뇨. 아뇨.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여…….”

케이든이 그를 노려보자 그는 몸을 움츠리며 살살 눈치를 봤다. 그는 침을 크게 삼키곤 나름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수배령은 연락받자마자 철회하였습니다. 제 실수로 왕실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편안히 돌아가셔도 됩니다. 부디 제 실수를 관대하게 넘어가 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듣자 하니 불쾌했다. 내가 범인이 아니라 수배령을 철회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일원이라 수배령을 철회한다는 듯한 말이……. 결국엔 나에게 혐의가 남아 있는데 내 신분 때문에 봐준다는 말 아닌가? 그리고 이 사람, 아까부터 나한텐 사과 한마디 없이 케이든에게만 고개 숙이고 있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나와 케이든이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 됐는데도 내 원래 신분이 평민이란 이유로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 3년 전에 케이든이 내가 왕비에게서 받는 보석에 굉장히 신경 쓸 때는 그 의미를 머리로만 이해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 왕가에서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는데도 이런 사람이 가끔 나오는 판에 나쁜 대접을 받았으면 얼마나 피곤해졌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내가 느낀 것을 케이든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시장의 태도에 케이든의 하관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린 케이든이 시장에게 말 똑바로 하라 경고하려던 찰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살인 사건 현장을 내가 직접 살펴보고 싶군. 그리고 시장께서는 내게 사과 한마디 없군?”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미르 부인. 그런데 현장은 시체도 지금은 경비대로 옮겼고 어수선한데 굳이 보셔야…….”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원하시는 대로 조치해 놓겠습니다!”

“처신 똑바로 하게! 로버트 시장.”

내가 직접 요구했는데도 무례한 소리를 늘어놓는 시장에게 결국 케이든이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채 성난 목소리로 경고했다. 시장은 안색이 새파래진 채 거듭 죄송하다 하였지만, 케이든에게는 그 사과가 와닿진 않은 모양이었다.

시장의 사과에도 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케이든의 표정이 살벌했다. 이제야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 미안하다 사과하는 시장을 바라보는 케이든의 시선이 사나웠다.

수배령에 대한 볼일도 마쳤고 시장과 더 말을 섞는 것이 쓸모없다 싶었는지 케이든은 안에 들어가 차라도 한잔하며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는 시장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나를 데리고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에 타 흘끔 창을 통해 시장을 보니 시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조만간 자신의 자리가 날아갈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자업자득 아닐까 싶었다.

거듭된 악재와 무례에 심기가 잔뜩 비틀린 케이든이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하다가 여전히 시무룩한 나를 발견하고 아차 하는 얼굴을 하였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리암, 네겐 아무 일 없을 테니 굳이 현장에 나가 살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시장이 저러는 걸 보니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을 것 같지도 않군.”

“그래도요. 음, 그리고 제가 왕실의 일원이라 면책되었다는 식인 건 기분 나빠요. 어쨌든 그 꼬리표는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게 될 테니까요.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하고 싶어요.”

“누구 신랑이길래 이렇게 기특할까?”

나는 대답 없이 케이든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작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사건들 때문에 가라앉았던 케이든의 기분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생각했다.

역시 난 모험보단 소소한 일상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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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은 생각보다 더 어지럽혀져 있었다. 수사 인원만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오간 흔적이 역력한 방에 한숨이 나왔다. 마약상과 관련 있는 지역 유지들은 다 한 번씩 드나들어 아닌 척 방을 뒤져 봤다더니, 현장 보존이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시장도 어제 마약상의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지. 그 속내가 뻔했다.

있던 증거도 난리 통에 다 사라졌을 방의 모습에 조금 막막해져 팔짱을 낀 채 방을 훑었다. 여관에 시체가 있으면 벌레가 꼬인다는 여관 주인의 항의로 시체도 도시의 경비대 측에서 옮겨 방에 남아 있는 것은 마약상의 개인적인 짐 조금과 원래부터 여관의 것인 물건들뿐이었다. 어쩌면 경비대에서 보관하고 있는 마약상의 시체가 가장 멀쩡하게 보존된 흔적이 아닐까 싶었다.

원래는 흔적 탐색 마법을 쓰려 했는데 이 정도로 오간 사람이 많으면 범인의 흔적은 지워졌을 게 뻔해 의미가 없었다. 오기 전에 들렀던 경비대에서 확인한 시체에서도 마땅한 범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좀 막막했다.

케이든은 같이 오려다 보좌관이 국왕께서 보내신 연락이 있다고 그를 잡아 우선 나 혼자 이곳에 왔는데 이 현장을 보니 그와 같이 올 걸 싶었다. 하지만, 그나마 빨리 와서 현장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긴 했는데……. 어려운 문제다.

한숨만 푹푹 내쉬며 방 구석구석을 살피며 눈여겨볼 것이 있나 찾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케이든 공작께서는 품에 감싸 어르는 것이 사랑이라 말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부인을 이렇게 내돌리는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절로 표정이 굳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목을 까닥여 인사하며 말했다.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 왜 여기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시장을 만나러 가다가 레이거니스 사람들은 다 한 번씩 와 보는 명소가 있다길래 나도 한번 들러 봤지. 피서지의 명소치고는 보잘것없군.”

“원래 관광지가 다 그런 법이죠. 보실 것은 다 보셨으면 저는 마저 일을 봐야 하니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내 축객령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박대하는군. 그런 면은 케이든 공작과 똑 닮았어?”

“배울 게 많은 사람이죠.”

내 대답에 왕자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살폈다. 그 시선을 무시하고 몸을 숙여 침대 밑을 살피고 있는데 왕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왜 케이든 공작이 그대를 끼고 사는지 알 것 같군.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성미에 거스르지 않는 순종적인 성품의 미인이라니……. 공작은 운이 좋군.”

“그가 저를 사랑과 인내로 대했으니 저 역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왕자께서는 지나치게 본인의 관점으로 사람 간 관계를 판단하시는군요.”

“그런 점까지 빼어나군. 공작이 질리면 내게 오도록 하게. 언제든 환영하지.”

“그럴 일 없습니다.”

아 진짜. 나는 몸을 숙여 바닥의 먼지를 살펴보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저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나중에 나 혼자 있을 때의 일을 케이든에게 말해 줘야 하는데, 저런 말을 케이든이 들으면 화가 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왕자가 뭐라고 있었던 일을 생략해 말하는가. 골치 아팠다.

내 사랑은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데다 내게 관심이 많았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그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알아챌 것이다. 사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내게 있었던 일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이 세계에 붙잡아 주었으니 그가 선물해 준 내 시간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다.

왕자와 말을 섞을수록 케이든의 화만 돋울 말만 나오는 것 같아 나는 왕자가 무슨 말을 하든 대꾸 없이 마약상의 소지품이나 살펴보았다. 딱히 성과는 없었지만 저치와 말을 나누는 것보단 유익했다.

내가 그를 무시하든 말든 제 할 말을 늘어놓던 왕자는 내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살피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는 항간에 능력이 과대 평가되었나 보군? 그의 권세면 부인이 이런 수고할 필요 없이 이 정도 사건은 수습이 가능할 텐데?”

“…짜증 나네.”

왕자의 이번 말엔 정말로 짜증이 올라왔다. 손가락을 까닥임과 동시에 그의 왼손 검지에 자리 잡은 투명한 푸른색 광석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왕자의 몸이 붕 떠 벽에 처박혔다.

왕자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동시에 탕! 소리가 여관을 울리도록 퍼져 나갔다. 내 앞에 만들어진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도르륵 땅을 굴러가는 총알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왕자를 바라봤다.

“칼레에선 허가받은 자 외의 총기 소지는 금지야.”

갑자기 벽에 처박힌 충격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거푸 기침하는 왕자의 손에는 작은 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사이비 교단에서 봤던 총과 비슷하지만 다른 디자인이었다. 위협이 느껴지자마자 옷 속에 숨겨 둔 총을 꺼낸 것을 보니 총 사용법에 익숙한 듯했다.

왕자는 자신을 벽에 고정한 무형의 힘에 반항하듯 바르작거리다가 자신의 힘으로 뚫지 못할 것을 직감했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못 막아 내던데……. 궁금하군, 그대라서 막은 것인가? 아니면 마탑의 마법사들에게는 안 통하는 건가? 마탑의 인장을 받은 마법사들에게는 도통 시험해 볼 기회가 나질 않아서 말이지.”

“마법사 여럿 죽여서 만들어 낸 총인가 보군.”

“죄인 몇이 죽기 전에 국가에 이바지했을 뿐이지.”

사지가 구속된 상태에서도 입은 살아 잘도 움직여 댔다. 홧김에 그를 벽에 처박긴 했지만 어쩌는 게 좋을까 고민돼 잠시 팔짱을 끼며 손가락을 까닥이자 왕자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를 죽이기라도 하게? 감당할 수 없어지기 전에 푸는 걸 추천하지.”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아미르 공작의 권세는 사소한 사고 정도는 쉽게 수습할 수 있다고.”

“하하하!”

왕자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 재꼈다. 매사 창백하던 얼굴에 열이 올라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았다. 한참이나 광소를 멈추지 않던 남자는 양껏 웃고 나서야 웃음소리를 멈추었다. 사지가 구속되고도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는 남자의 모습이 미친 사람 같았다.

“이거 참, 케이든 공작이 이렇게 절실하게 보고 싶은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내가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줄 테니 풀어 주는 건 어때? 너도, 아니지, 케이든 공작도 배우자의 손에 내가 죽으면 곤란해질 테니 무례는 이걸로 서로 주고받은 셈 치지.”

“당신이 무슨 수로?”

확실히 왕자를 죽여도 뒤탈이 없었다면 케이든이 먼저 이 남자를 처리했을 것이다. 여전히 남자가 못마땅했지만 이쯤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내 퉁명스러운 질문에 왕자는 빙긋 웃으며 구속이나 풀어 보라 속살거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를 풀어 주자 땅에 발이 닿자마자 남자는 옷 안에서 은색 철제 담뱃갑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나를 흘끔 보길래 뭔가 싶어 노려보니 남자는 픽 웃음을 흘리며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센스 없기는.”

“지랄도…….”

왕자의 타박에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는데 방 안에 퍼지는 담배 냄새가 조금 이상했다. 해럴드가 애연가인 탓에 담배 냄새를 의도치 않게 여럿 맡아 본 편인데 이건 내가 아는 담배 냄새가 아니었다.

“너 이거……. 담배 아니지?”

“펠튼은 약이란 단어가 붙은 모든 분야가 타국보다 우수하지. 단순 제약뿐만이 아니라, 마약도 화약도.”

“총에 마약에 아주 가관이군.”

“마약은 중독성이 강한데 정작 마약을 취급하는 마약상들은 생각보다 제법 멀쩡하게 생활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그는 연기를 후 내뱉으며 담배 케이스에서 작은 환단을 꺼내 내게 던졌다. 내 앞으로 던져진 녹색 환단을 잡아채 가만 살펴봤으나 용도를 알 수 없어 그를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억제제네. 마약을 하기 전에 복용하면 중독될 만큼 강한 쾌락을 얻지 못하게 막아 주지. 뭐, 핀 후에 섭취해도 약간 효과는 있지만 먹기 전보단 강하지 않긴 해. 마약상들에게는 그 환단이 필수품이지. 사는 놈이면 모를까 파는 놈이 정신을 놓으면 안 되잖아? 하지만 그 환단에도 약점은 있어.”

그는 손을 움직여 술을 마시는 시늉을 했다.

“환단을 섭취하고 그 효과가 도는 동안 술을 마시면 얼마 가지 못하고 정신을 잃거든. 누가 건드려도 정신을 못 차리지. 안 그래도 원한 산 것이 많은 마약상이 정신을 잃으면? 볼만한 일이 벌어지겠지?”

왕자의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졌다. 자기 손으론 술을 마시지 않았을 마약상에게 억지로 혹은 몰래 술을 먹일 수 있었을 사람. …투숙객들의 식사를 담당했던 여관 주인.

생각에 빠진 나에게 왕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때? 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 넌 여기 왜 온 거지? 그걸 알려 주려고?”

“그대를 공작에게서 훔쳐 가려고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군?”

“그런 것치곤 내 기분이 상할 말만 골라 하던데. 누가 배우자에 대한 모욕을 기꺼워하겠어.”

“아하하! 절절하군. 절절해.”

내 대답을 듣자마자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은 왕자는 손을 까닥여 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아직 불씨가 붙은 꽁초를 서슴없이 바닥에 던지는 행동에 질색하며 공중에서 모은 물기로 물을 만들어 불을 끄자 왕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광차 왔다가 사지가 구속되고 범인을 잡을 단서까지 줬는데 더 대답해 주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 것 같군. 내가 왜 왔는지는 그대 좋을 대로 생각하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곤 몸을 돌려 방을 나가는 왕자의 뒷모습을 가볍게 노려봤다. 벽에 처박힌 충격이 아직 남았는지 다리를 살짝 절뚝이며 방을 나서는 왕자는 그새 총을 숨겨 빈손이었다.

3왕자 같은 사람은 본심을 별것 아닌 것처럼 숨겨서 사람이 방심한 틈에 보여 주곤 한다. 왕자가 아까 총을 막아 낸 나에게 마탑의 마법사이기에 막을 수 있던 것인지 개인의 재량이 뛰어나 막은 것인지 물었었지……. 그는 알아서 생각하라며 돌아가 버렸지만, 그것이 왕자의 용건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그들이 개발한 총기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일까? 그로선 내가 죽으면 죽는 대로 이득이었겠지. 마탑의 마법사에게도 그들의 총기가 통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데다가 내가 위협을 했으니 자기방어 차원에서 쏘았다고 하면 됐을 테니까. …그리고 케이든이 슬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테고.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무척 불쾌해졌다. 왕자를 너무 쉽게 풀어 줬나?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죽여야…….

“아저씨!”

“어어? 메리?”

갑자기 나를 부르는 아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사라진 왕자와 선수 교체라도 하듯 아침의 꼬맹이가 큰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며 문가에 붙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니? 아직 여관 안 옮겼어?”

“옮겼어요!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여관에 누가 예약을 취소해서 빈방이 있더라고요. 아이참,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제 짐을 가지러 돌아왔다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제 사건이 터진 게 두 시쯤이라고 했으니 여관을 완전히 옮기기 전에 마약상이 죽은 이야기를 아이가 들었나 보다. 주위를 보니 아이의 언니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이 혼자 나를 찾아온 듯했다. 마정석 인형을 가지고 있어도 아이 혼자 다니긴 위험한데, 겁도 없었다.

“혼자 다니면 안 돼. 그나저나 여기 올라오면서 이상한 아저씨는 못 봤니?”

“이상한 사람은 모르겠고, 예쁜? 잘생긴? 아저씨는 봤어요. 옷 입은 거 보니까 외국인 같던데.”

“다음에 그 아저씨 보면 그냥 피하렴. 이상한 아저씨니까.”

“네! 그나저나 리암 아저씨, 저 어제 봤어요.”

“뭘?”

내 물음에 아이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내게 속삭였다.

“범인이요!”

“뭐?!”

예상 못 한 말에 내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아이가 젠체하듯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뻐기듯 말했다.

“제가 그제 말했잖아요. 제가 호두를 아주 잘 던진다고. 그런데 어제 암만 생각해도 그 험상궂은 아저씨가 언니한테 못된 짓 하려 한 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호두나 한번 던져 줘야겠다 싶어서 저기, 저 나무를 타고 올라갔었거든요?”

아이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창문 너머에 큰 나무 하나가 자라 있었다. 오래된 나무인지 가지도 굵고 여름이라 이파리가 무성한 것이 이런 어린아이 하나쯤은 넉넉히 몸을 숨길만 했다.

“근데 그 아저씨가 침대에서 그냥 자고 있어서 호두를 던질 최적의 각도가 안 나왔어요. 그래서 가지 위에서 움직이면서 안쪽을 살펴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방에 들어오더라고요!”

“설마 그 사람이 자던 사람을 해치는 걸 봤니?”

아이가 씩씩한 걸 보니 다행히 사람이 죽는 장면 자체는 못 본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 물으니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호두를 던지기도 어렵고 언니가 저 찾는 소리도 들려서 그냥 내려갔어요. 근데! 놓고 간 짐 찾으러 여관에 다시 들르니까 그 아저씨가 죽었다는 거예요! 덕분에 언니랑 저랑 사건이 벌어졌을 때 뭐 했는지 말하느라 저녁에나 돌아갔다니까요. 아무튼! 전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았죠. 아! 내가 본 그 사람이 범인이구나! 근데 다들 제가 계속 말해도 꼬마가 뭘 알겠냐면서 다 무시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아저씨를 찾아와 봤죠! 여기 앞을 지키는 경비아저씨들이 아저씨 이야기하길래 회털이 보여 주면서 마법사 아저씨 심부름 왔다니까 들여보내 주던데요?”

“보안 참……. 혹시 방에 들어왔던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니?”

“네! 체격은 보통이고 눈은 이렇게 찢어져 있었고요. 코는 좀 휘었고…….”

급히 근처에 있던 종이를 집어 꼬마의 설명대로 범인의 생김새를 따라 그리자 꼬마가 왜 이렇게 못 그리냐며 타박하곤 종이를 가져가 자신이 그려 주었다.

얼마나 실력이 좋길래 타박을 주나 지켜봤는데 잘 그리긴 했다. 꼬마의 그림 솜씨가 훌륭해 길 가다가 이런 사람을 마주치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관의 주인과 이렇게 생긴 사람을 찾아 집중적으로 조사하면 될 듯했다.

여관에 올 때까지만 해도 범인을 찾는 건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덕분에 이 여행이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림을 받은 나는 눈을 빛내며 꼬마에게 손을 뻗었다. 꼬마가 자신만만하게 손을 뻗어 내 손에 짝! 손뼉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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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상 살인 사건은 여관의 주인과 그녀의 남동생이 공모해 벌인 일이었다. 여관의 주인이 술을 섞은 음식을 마약상에게 먹인 후 마약상이 약의 부작용으로 정신을 잃은 사이, 여관의 뒷문을 따고 들어온 그녀의 남동생이 마약상의 방에 몰래 들어가 낚싯줄로 교살한 것이었다.

처음 심문할 때만 해도 자신들의 혐의를 극구 부인하던 두 사람은 하나둘 발견되는 증거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백하였다.

두 사람의 살인 동기는 그들의 늦둥이 동생이 그 마약상 때문에 마약 중독에 빠져 밤새 길거리를 헤매다 수렁에 넘어져 기절하는 바람에 저체온증으로 죽고 만 것이었다. 남매가 그 마약상이 자신들의 동생을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외치며 울었다던 보고를 받은 케이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국가 차원에서 마약 단속을 나서야지, 원…….”

“…케이든이나 저나 내년에 진짜 바쁘겠어요.”

어쩌면 케이든이 아니라 내가 도시락을 싸 들고 그의 일터를 쫓아다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은데? 혹시 모르니 성에 돌아가면 요리를 배울 계획을 세우며 나는 쭉 기지개를 켰다. 우리의 주변은 짐마차에 짐을 싣고 혹시 빠진 짐이 있나 확인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피서를 갔다가 범죄에 휘말려 이런 사건까지 벌어지니 레이거니스에서 마저 휴가를 보낼 기분이 들지 않아 케이든은 사건이 해결되자마자 아미르 영지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기에 우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며칠 이 도시에 머물렀다고, 돌아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아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케이든을 찾아온 레이거니스의 귀족들도 상대해야 했고, 범인을 찾는 데 도움을 준 꼬마에게도 사례해야 했고, 해변도 다시 봐야 했고…….

진범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준 꼬마의 이야기를 들은 케이든은 꼬마의 언니에게 사례금과 함께 추천장 하나를 써 주었다. 케이든이 직접 써 준 추천장이라면 어디든 취업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만약 그녀가 아미르 공작가에서 일하기를 희망한다면 하녀장이 없던 자리도 만들어서 채용할 테고 말이다.

그리고 펠튼의 3왕자는 우리가 범인을 찾느라 정신없던 틈에 돌아가 버렸다. 그래 봤자 수도로 갔을 테니 보려면 볼 수야 있겠지만……. 케이든도 나도 그 작자를 별로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한동안은 만날 일 없을 성싶었다. 이제는 에드거가 펠튼의 왕족들 때문에 우는소리를 할 때 깊은 공감을 해 줄 수 있다는 것 말곤 왕자를 만나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떠나기 전 레이거니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복기해 보고 있으니 케이든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암, 곧 출발할 테니 마차에 타지.”

“네에.”

그의 말에 냉큼 그에게로 손을 내미니 그가 내 손을 잡아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 주었다. 마차에 앉아 케이든도 얼른 앉으라 내 옆자리를 팡팡 치자 그가 경망스럽다고 한마디 하면서도 내 옆에 앉았다.

“이번 여행은 엄청 피곤했던 거 같아요. 그죠?”

“맞아. …전부터 생각했는데 그대는 사건을 몰고 다니는 편인 거 같아.”

“제가요?”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내가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으니 그가 작게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대가 훌륭한 마법사라 다행이야. 그대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대만은 무사할 테니까 말이지.”

“케이든도 무사할 거예요.”

“아무렴. 리암, 네가 있는데 내가 다칠 리가.”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조금 우스웠는지 키득거렸다. 그가 웃으니 기분이 좋아져 나도 따라 웃으며 몸을 편안히 등받이에 기대었다. 볼과 목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우리가 서로 속닥거리며 손장난을 치는 사이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뒤늦게 몰려오는 피곤함에 작게 하품하며 그의 손을 꼭 쥐자 당연하다는 듯 힘주어 맞잡는 손길에 미소가 지어졌다.

천천히 잠이 든 우리를 실은 마차는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우리의 집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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