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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8월의 털실 대작전 (11/13)

외전 3. 8월의 털실 대작전

나는 무언가에 흥미를 잘 느끼지 않는 대신, 한번 흥미가 생긴 것은 쉽게 손에서 놓지 않았다.

흥미가 생긴 것이 마법 같은 무형의 것이라면 그것은 차곡히 내 머릿속에 지식으로 쌓일 뿐이니 괜찮았지만, 무형의 자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면…….

“리암, 지금까지 뜬 것들을 한번 정리할 생각은 없나? 약간만이라도.”

“…싫어요.”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내 거절에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방금까지 뜨던 토끼 인형을 슬쩍 품에 끌어안았다. 케이든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스웨터를 짜던 대바늘로 옮겨 갔다.

그것도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다가 지금 저것만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방 곳곳에 둥실 떠 인형과 파우치, 목도리 등등을 부지런히 짜고 있던 스물 몇 개의 여러 바늘을 다 내려야 한단 것을 깨달았다.

내 거절에 한껏 뾰족해진 케이든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멍하니 고개를 기울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좀 과한가?

여러 바늘이 공중에 두둥실 떠서 쉴 틈 없이 뜨개질하며 물건을 만들어 내는 광경은 인제 보니 좀… 방직 공장을 방 안에 옮겨 온 것 같았다.

넓은 방의 벽 하나를 가득 채우며 전시된 뜨개 인형들과 여름이란 계절에 입기 부적절해 다른 방에 정리되어 있는 스웨터, 목도리, 장갑 등등. 그리고 실시간으로 짜이고 있는 털실로 된 무언가들.

이 모든 것은 뜨고 싶은 건 많은데 손이 부족하면… ‘마법으로 뜨면 되지!’라는 획기적인 발상이 낳은 참사의 흔적들이었다.

처음엔 분명, 뜨개질하는 목적은 케이든이 내가 만들어 준 걸 입으면 좋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맞았다. 그런데 하다 보니 뜨개질이 너무 재밌는 바람에……. 어느새 본말이 전도되어 뜨개질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뜨다 보니까 저것도 만들고 싶고 이것도 만들고 싶은데 내 손은 두 개뿐인 안타깝고 필연적인 상황에 마주하고 만 나는, 마법이라는 수단을 동원하고 말았다.

작은 공장처럼, 방 한편에선 자동으로 실이 풀어지고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며 부지런히 털실을 뜨고 있는 수십 개의 바늘을 처음 목격한 날 케이든은 아연한 표정으로 방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마법을 왜 이런 데다가.”

하여튼, 그날 이후로 아미르 성의 작은 뜨개 공장은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였다. 기존 다품종 소량 생산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드디어 다품종 대량 생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케이든은 자신의 성에서 벌어진 작은 산업혁명의 시작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하긴, 하루에 스무 개가 넘는 털실 용품이 생산되니 그것을 소비해 줄 유일한 소비자로선 부담감이 느껴질 만도 했다.

하지만 그가 착잡한 표정으로도 내 작품들을 잘 받아 주길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8월에 스웨터를 입으라고 건네주는 행동은 케이든 입장에서 곤욕스러울 만도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뜬 것들을 정리하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정리하라는 케이든의 단호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의 떼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토끼 인형을 품에 끌어안은 채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대의 뜨개질 취미에 내줄 수 있는 방은 네 개까지니 방을 비우든 뜨개질을 그만하든 선택하도록. 이러다 성의 복도까지 그대의 물건으로 가득 차는 날이 오겠어.”

“네에…….”

“방을 비우고 또 뜨면 되잖나. 그대는 절제를 좀 배워야 해.”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말에 나는 슬픈 얼굴로 솜도 넣고 거의 다 떴던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안녕. 털끼야…….”

“설마, 털 토끼의 줄임말이라 털끼인 건가?”

“네에! 귀엽죠?”

“…….”

케이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역시 그도 내 훌륭한 작명 센스에 감탄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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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끼는 케이든의 정중한 거절로 아미르 저택 내에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한 끝에 케이든의 수석 보좌관 잭슨 씨에게 양도되기로 했다. 털끼의 양도 절차에 잭슨 씨의 의사는 딱히 없었고 내가 정했다.

토끼 인형을 받아 든 잭슨 씨는 매사 심드렁하던 그 얼굴을 잠시 흩트리며 좋아하셨다.

“설마, 이 토끼 눈 마정석입니까?”

“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요.”

“원숭이 목에 진주 목걸이 같군요.”

어쨌든 진주 목걸이 같단 소리니까 만족스러웠다.

보통은 귀족들의 인형이나 옷엔 이런저런 보석이 달리기 마련인데 내 전공이 마정석 쪽이어서인지 보석보단 마정석들을 다는 게 더 예뻐 보였다.

그런데 마정석은 하급품이어도 비싼데 이걸 단순 장식용으로만 쓰면 아까우니까 겸사겸사 실생활에서 쓸 만한 마법도 새겨서 달았다. 그래도 이게 나쁘지 않은 것이 인형에 달 마정석들에 마법을 새기면서 실력이 더 늘긴 했다.

잭슨 씨는 털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감사히 받겠단 말과 함께 털끼를 왼팔에 끼워 넣었다. 평소와 달리 빈정거리는 말 없이 챙기는 걸 보니 올해로 여덟 살이 된 딸에게 주려는 모양이었다.

내 뜨개질 선생인 잭슨 씨의 집에 뜨개질 8개월 차인 내 작품이 입성하다니 감개무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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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미르 성에서 뜨개질을 처음 해 보겠다고 끙끙거릴 때 뜨개질을 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성의 시녀도, 시종도 아니었고 바로 잭슨 씨였다!

케이든의 옆에 앉아 하도 풀었다 짰다 해서 헝클어진 털실을 붙잡고 내가 낑낑거리는 걸 본 잭슨 씨는 혀를 차더니 업무 이탈에 대해 케이든의 양해를 구하고 내 옆에 붙어 1:1로 지도를 해 주기 시작했다.

생각도 못 한 실력자의 등장에 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군인 출신들은 아주 손재주 없는 놈이 아닌 이상은 이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전장에선 물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을 때가 많으니, 자기 쓸 것 정돈 수선할 줄 알아야죠.”

“군인 출신이었나요?”

“작위를 물려받지 않는 귀족 가의 차남, 삼남들이 사관 학교로 진학해 직업 군인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지금이야 평화 협정을 맺어서 국경 쪽에 큰일이 없다지만 6년 전까지만 해도 국경 쪽에서 칼레와 벨룸 간 국지전이 심심찮게 발생했었고요.”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신기했다. 체격에서 운동한 몸이라는 건 티가 났다만 군인 출신이었다니. 궁금증이 생겨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어쩌다 군인을 그만두고 케이든의 보좌관이 되었냐는 내 질문에 그는 언제나처럼 태연한 어투로 대답해 주었다.

“상관을 폭행해서 군대에서 쫓겨났거든요.”

“예?!”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던 상관이 횡령에 동참할 걸 강요하길래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 후려쳤습니다. 당연하지만 그대로 영창에 갔고요. 다행히 그때 저를 좋게 봐 주시던 노엘 공작님, 아 그때는 군인이었으니, 준장님이었죠. 노엘 준장님께서 힘써 주셔서 큰 징계는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군대 내 입지가 확 줄어든 건 어쩔 수 없었죠. 군은 상명하복이 명확한 조직이니까요. 승진은 글렀고, 딸 아이는 갓 태어났고. 이제 뭐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 중일 때 노엘 준장님께서 케이든 님의 보좌관 자리를 알선해 주셨습니다.”

옆에서 서류를 보며 우리 이야기를 듣던 케이든이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별것 아니라는 케이든의 태도와 말을 하는 내내 담담한 어투에 심드렁한 얼굴인 잭슨 씨를 번갈아 보고 있으니 이 상사와 부관이 몇 년을 으르렁거리면서도 함께 일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잭슨 씨는 내가 뜨개질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틈틈이 지도해 주었다. 그는 맨날 ‘이건 업무 외 노동입니다.’라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내 취미 생활을 도와주었는데 뜨개질을 가르쳐 주면서 함께 말해 주는 칼레의 뒷사정들이 꽤나 흥미진진하였다.

예를 들면 다들 앞에선 쉬쉬하지만, 여전히 노엘 공작이 정통성 있는 후계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칼레에 꽤 많다든가 하는, 외국인은 알기 어려운 이야기 같은 것도 그는 거침없이 내게 말해 주었다.

현 국왕이 즉위한 지 20년이 넘어가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베르너 케슈너가 죽었던 당시 노엘 공작의 나이 때문이라고 한다.

칼레의 국법에 따르면 왕세자로 임명이 되기 위해선 14세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 노엘 공작의 나이가 생일을 2주일 남긴 참인 열셋이란 이유로 왕위가 루벤 케슈너에게로 넘어가서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다나. 더군다나 부친이 돌아갔을 때 기준이 아니라 장례식이 치러진 것을 기준으로 보면 당시의 그는 14세가 넘었었기에 그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거기다가 그는 베르너 케슈너와 벨렌 로르만의 사이에서 태어난 롤렌과의 혼인 동맹의 결실이기도 했으니까, 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고지식한 귀족들 사이에서 주류 의견이었다고.

우리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케이든이 보조 설명 겸 덧붙여 준 말도 흥미진진했다.

“어머니께서 부담감을 이유로 승계를 거절했던 이유도 골치 아픈 정통성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함이었지. 가뜩이나 아버지도 아미르가 내에서 정통성 논란 때문에 매번 시비에 걸리시던 참인데 어머니까지 그런 시비에 휩싸이게 되면 자라는 내내 골치 아팠을 거야. 그래도 어머니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최소한 한쪽 논란에선 한발 물러설 수 있어서 어머니께 꽤 감사하고 있네.”

“케이든은 왕위에 욕심이 없나 봐요?”

“주어진다면 의무를 다하기야 하겠다만……. 그다지 나서서 쟁취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내가 왕위 계승자였다면 그대와 결혼하기 어려웠을걸?”

“앗, 역시 어머님께서 판단력이 뛰어나셨던 거 같아요!”

내가 엄지를 추켜세우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리디아 아미르의 훌륭한 판단에 찬사를 늘어놓자 케이든이 소리를 내 크게 웃었다.

너무 웃어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그가 말했다.

“하여간, 그런 논란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논쟁이기도 하고 노엘 본인도 왕위에 뜻이 없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곤란해하니 노엘에게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게. 노엘이 늦게 결혼한 것도 원래 결혼을 아예 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일체의 논란을 피하려고 했는데 뒤늦게 웬리르 부인에게 반해서 결혼하게 된 거거든.”

그러고 보면 케이든도 원래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가문 내 권력 다툼 때문이라고 했었지. 사이좋은 사촌 형제끼리 엇비슷한 이유로 결혼을 늦게 한 것이 재밌었다.

이외에도 뜨개질하는 내내 케이든과 잭슨 씨는 왕국의 온갖 비화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느 남작과 어디 자작이 불륜 관계고 무슨 자작가 차남이 친구의 약혼녀에게 집적거렸다가 친구에게 결투 신청을 받았는데 결투 당일에 도망을 쳤고, 남부 쪽 어디 백작가는 남편이 아내를 두고 바람이 나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왔는데 몇 달 뒤 아내와 그 여자가 바람이 나서 둘이 야반도주했고 등등.

전직 수사관과 그의 보좌관 입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자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왜 사람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며 뜨개질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했다.

나는 오고 가는 가르침과 왕국의 뒷이야기들을 쑥쑥 흡수하며 열심히 뜨개질을 배웠다. 그리고 약 한 달 만에 가르쳐 줄 것은 다 가르쳐 주었으니 자신은 인제 그만 부르라는 잭슨 씨의 귀찮음 가득한 하산 선언과 함께 나는 본격적인 니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7개월 후, 청출어람의 표본처럼 내 뜨개질 선생에게 훌륭히 짠 뜨개 인형을 선물해 준 나는 잭슨 씨를 시작으로 내 컬렉션들을 주변인들에게 나눠 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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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씨에 이어 두 번째로 내 컬렉션 나눔에 당첨된 사람들은 웬리르 공작가 사람들이었다.

평소처럼 찾아온 사촌 부부를 반겨 주는 웬리르 공작 부부는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이 평소와는 달랐다.

하인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 집 안까지 들고 온 큰 가방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하는 안젤라 웬리르 공작 부인에게는 가방에서 담요 몇 장을 꺼내 주었다. 노엘 공작에게는 공작 부인과 한 쌍으로 만든 장갑을, 대부인에게는 털실로 만든 롤렌의 국기를 선물해 주었다.

이왕 만드는 거 벽면을 꽉 채울 만큼 크게 만들었다가 케이든에게 이 크기면 롤렌 왕국을 다 덮고도 남겠다고 한 소리 들은 역사가 있는 털실 국기를 받아 든 대부인은 그 크기에 좀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이 집의 가장 어린 구성원이자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9개월이 조금 안 된 아기, 베른 웬리르에게는 특별히 지금까지 만들었던 인형 중 손꼽히게 잘 만든 것들을 스무 개 정도 엄선하여 가져다주었다.

한여름에 발생한 때아닌 털실 이벤트에 이들은 잠시 선물을 받아 든 채 눈을 깜빡였지만, 곧 이벤트의 진상을 들은 후 푸핫 웃었다.

공작 부부는 지금은 아무래도 좀 이르지만, 겨울철에 잘 사용하겠노라 약속하였고 대부인은 털실로 짜진 롤렌의 국기를 즐거운 기색으로 살펴보다 정성에 고맙다며 선물로 롤렌의 사탕을 내주었다. 물엿에서 뽑아낸 하얀 실타래가 똘똘 뭉쳐 있는 사탕인데 입 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것이 꽤 맛있었다.

다들 좋아하며 내 선물을 받아 주었지만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여 준 것은 베른이었다. 아기 침대에 앉아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인형을 받은 베른은 인형을 받자마자 활짝 웃으며 인형들을 휙휙 흔들며 온몸을 동원해 손뼉 치며 좋아했다. 그 열렬한 호응을 보니 매우 마음에 든 것 같아, 주는 입장에서도 매우 흡족했다.

즐거워서 몸을 들썩이는 아기를 보고 있으니 이 녀석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지난겨울 스투라티아 평야에서 돌아와 아미르 영지로 내려갈 때만 해도 갓 태어난 아기 때문에 외부 손님을 받지 않던 웬리르 공작가는 우리가 다시 수도로 돌아올 즈음에는 가까운 사람들의 방문 정도는 받기 시작해 케이든이 나를 데리고 웬리르 공작가로 찾아갔었다.

이날 처음 본 안젤라 웬리르는 예전에 들었던 것처럼 활달한 사람이었다. 케이든과 나에게 와 주어서 고맙다고 반갑게 인사한 그녀는 이왕 방문한 것 아기를 보고 가라며 아기방으로 우리를 데려갔었다.

그리고 도착한 아기방에서 본 베른은 내게 너무 신기한 생명체였다. 어머니를 닮은 밀색 머리에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기는 아직 어렸지만 제 어머니를 닮은 외모가 뚜렷했다.

살면서 아기와 마주할 기회가 몇 없었기에 어색함에 눈에 띄게 굳은 내게 안젤라 공작 부인은 웃으며 아기의 손에 손가락을 갖다 대보라고 하였다. 그녀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갖다 대자 아기가 손을 오므려 내 손가락을 쥐었다!

너무 신기해서 눈을 크게 뜨고 지금 보았냐고 케이든을 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다만, 그의 시선이 아기가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기에 조금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베른을 시작으로 살면서 봤던 모든 아기를 이야기하던 내게 케이든은 내 어린 신랑이 원하는 건 뭐든지 주고 싶으니 오늘 밤 노력해 보자는… 희롱을 던졌다. 그냥 희롱하기 위한 음담패설인 줄 알고 볼만 붉혔던 나는, 그날 밤 귀부인들에게 아기가 잘 생기는 체위로 유명하다는 몇몇 가지 자세로 케이든에게 덮쳐졌다.

대체 무엇에 꽂힌 건지, 혹은 계속 아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건지……. 그날 밤 내내 나는 생각도 못 해본 각종 말로 희롱해 대는 케이든의 언행에 부끄러움이 역치를 넘겨 버린 나는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고……. 케이든은 내 눈물을 닦아 주면서 즐거워했다…….

케이든은 평소 단정함을 지향하는 그의 성격상 자제하긴 했지만, 가끔 작정하고 나를 희롱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로선 그를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

역시 허우대 멀쩡하고 잘생긴 서른둘의 젊은 남성을 거꾸러뜨리려던 귀부인들의 독한 희롱을 태연하게 이겨 내었던 전직 독신남의 경험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하여튼, 성황리에 내 컬렉션을 웬리르 공작가에 배부한 후의 행선지는 왕궁이었다. 왕궁은 내가 직접 가지 않고 케이든이 왕궁에 갈 일이 있는 김에 주고 왔다.

그래도 내가 만든 건데 직접 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은 했지만, 가고 싶진 않아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케이든이 내 입에 비스킷을 물려 주며 그대가 좋아하는 과자나 먹으며 놀고 있는 것이 훨씬 유익한 시간이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의 말대로 집에서 잘 먹고 잘 놀다가 돌아온 케이든에게 선물 반응은 어땠느냐고 물으니 케이든은 웃으며 다들 좋아했다고 말해 주었다. 하긴 싫어할 것도 없었다. 그래 봬도 하나하나에 다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덧붙여 말해 주기를 다들 마력 저항석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내가 갔으면 불편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거라나? 원래는 아비가일 공주가 성에 있을 땐 다들 그녀를 배려해 마력 저항석을 빼고 지내는 편이었지만, 그녀가 마탑에 간 지금은 그냥 착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잠깐 궁에 갔을 때도 평생을 붙어 다니던 아비가일 공주가 사라져 살짝 우울해 보이던 라울라 공주도 예전에 만났을 땐 없던 마력 저항석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케이든의 이야기를 들으니 안 가길 잘했다 싶었다. 원래는 마력 저항석이 근처에 있어도 조금 짜증만 나고 말았는데 작년 겨울 스투라티아 평야에서의 일 이후 마력의 흐름이 막히는 느낌이 정말 싫어졌기 때문에 마력 저항석이 한자리에 여럿 있었을 왕궁에 갔다면 표정 관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 후로도 꽤 많은 사람에게 내 완성품들을 나눠 주었다. 아미르 성과 저택 사람들한테도 나눠 줬고, 트리불라 소탕 이후 수사대 쪽으로 자리를 옮긴 라비를 찾아가는 김에 겸사겸사 수사대 사람들한테도 반쯤 강제로 쥐여 줬다.

수사대에서 라비의 옆자리가 그때 사이비 교단에서 만났던 노라 수사관의 자리길래 그녀와도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아? 노라 수사관님의 할아버지가 알버트 백작님이셨나요?”

“네. 외할아버지십니다.”

작년에 길거리에서 알버트 백작을 만났을 때 손녀의 선물을 사러 나온 것이라더니, 그 손녀가 노라 수사관인 모양이었다. 의외의 인연이 너무 신기해 알버트 백작에게도 하나 전해 달라고 노라 수사관에게 백작을 닮은 회색 부엉이 인형도 하나 더 쥐여 줬다. 노라 수사관은 알버트 백작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내가 인형을 주자 좀 당황해했다.

수사대까지 작품을 뿌리고 나니 슬슬 취미 방 하나는 비울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처음 방 정리를 위해 취미 방을 모처럼 열었을 땐 산더미처럼 쌓인 털 뭉치들의 행렬에 언제 다 정리하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더운 여름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뜨개질 작품들을 나눠 주기로 정해진 장소는 마탑이었다. 마지막 행선지를 마탑으로 정한 데는 큰 이유는 없었고, 내가 책을 연체해서 당장 책을 반납하라는 메이 씨의 노성이 담긴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뜬 것들을 나눠 주느라 정신없어서 책을 반납하는 것을 깜빡했었다. 한동안 바쁠 것 같아 기간을 최대로 연장해서 대출했더니 저것이 내 책 같다는 착각이 일었던 것도 문제였다.

침대 위에서 케이든과 시시덕거리며 뒹굴던 중 침대 근처 선반에 놓인 책 위로 갑자기 형광 초록색 편지 봉투가 나타났다. 낯익은 봉투를 목격하는 순간 저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나타난 편지에 의문이 가득 담긴 잘생긴 얼굴로 나를 보는 케이든의 양 귀를 다급히 두 손으로 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편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곧이어 허공에 금색 글씨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 스승님이 그러했듯 겸허한 자세로 연체자의 몰상식함을 비난하는 메이 씨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삼켰다. 케이든의 앞에서 이 편지를 받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케이든이 오늘따라 더 귀엽다고 입 맞춰 주는 게 너무 좋아서 그에게 들러붙느라 오늘은 꼭 반납해야지 결심했던 것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당장 책을 반납하지 않으면 경고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으름장과 함께 편지가 마무리되었고 나는 무릎걸음으로 침대에서 기어 나와 책을 챙겼다. 손으로 귀를 막아 주긴 했지만, 그 정도로 다 막히는 음량이 아니었기에 내용을 함께 잘 들은 케이든은 무슨 일인지 알 만하단 얼굴로 혀를 차며 얼른 다녀오라 손짓했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가 마탑으로 가는 포털을 만들던 중 이왕 가게 된 것 방이나 비우게 마탑 사람들한테 뜨개질한 것들을 나눠 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탑 사람들한테도 나눠 주면 방 하나를 완전히 비울 수 있었다!

안타까운 사연으로 성사된 오래간만의 방문이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급히 네 번째 취미 방에 남아 있던 것들을 죄다 자루에 쑤셔 담아 마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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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은 처음 지어졌을 땐 하늘에 닿을 지식의 전당이라는 의미에서 높다란 탑의 형태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며 근처에 탑이 아닌 여러 건물이 생기긴 했지만, 도서관은 그 중요성 때문에 첫 건물인 탑 안에 있었다.

도서관에 가려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는 얼굴들이 오랜만에 본다며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지나갔다.

그렇게 인사를 던지며 지나가는 사람 중엔 결혼식에서 본 얼굴도 있었고, 그때 못 본 사람들도 있었다. 결혼식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실감이 안 났는데 이렇게 얼굴을 다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회귀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대한 끊어 냈었다. 새로운 인연은 만들지 않았고, 옛 인연은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회귀할 때마다 그 사람과의 일이 없던 것이 되는 경험들이 유쾌하지 않아서였다.

인연에 그리 연연하는 편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거의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못 봤던 사람들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순간에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도서관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일렁이는 기분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던 때, 누가 갑자기 내 등을 퍽! 치며 반갑게 인사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어? 리암 아냐? 리암, 결혼 축하한다.”

“짜식, 이거 결혼하더니 살맛 나나 봐? 키 큰 거 봐라. 원래도 큰놈이 더 컸네. 리암 카터 씨, 위 공기는 어떠십니까? 좀 상쾌한가?”

“시끄러워. 테일러, 루이스. 그리고 이제 리암 아미르야.”

몸을 돌리니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단정한 인상의 남자와 활달한 인상의 갈색 머리 남자가 신난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여간에 사람이 잠깐 감동할 틈을 안 주는 인사들이다. 순식간에 가시는 감동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뾰족한 어투로 이름을 정정하자 루이스가 크게 웃었다.

“네네. 2년 동안 우리 편지는 다 무시해 놓고 대뜸 하객석이나 채우라고 결혼식에 부르시던 아미르 부인. 마탑에는 어인 일로 납시셨습니까?”

“이거 나눠 주려고. 잘 만났네. 너네도 가져가.”

사실 케이든과 생활하면서 어쩌다 보니 경어를 사용할 일이 많아, 옛 인연들을 만나면 경어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저절로 옛 말투가 튀어나왔다. 어쩐지 리암 카터의 자아가 ‘저 녀석들한테 무슨 경어야?’라 주장하는 것 같았다.

“짜식……. 갑자기 결혼한다고 해서 어디 아픈가 했더니 열 살이나 많은 형한테 반말하는 말본새는 여전하구나. 이 형은 안심이다.”

“루이스, 늘 말하지만, 동기 사이에 무슨 존대야.”

“선배한테는 존대하는 것처럼 말하네?”

“나랑 같은 해에 인장을 받았으면서 무슨 선배라고…….”

“여전한 싹수에 선배도 정말 안심이다.”

둘이 맨날 붙어 다니더니 말하는 것도 비슷했다. 내가 질색하며 품에 든 자루를 열어서 이거나 가져가라고 핀잔을 주자 둘은 자루 안의 내 작품들을 보고 잘 짰네, 못생겼네, 시끄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씩 자루에서 꺼내 가져갔다.

“둘 다 마탑에는 웬일이야?”

“나는 딘 교수님 뵈러 온 거고 테일러는 여기가 직장이니까.”

“너랑 딘 교수님은 진짜 무슨 관계냐?”

“영혼의 짝꿍?”

“퍽이나.”

루이스의 말에 테일러와 나는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루이스는 우리의 반응이 억울한지 어깨를 으쓱였지만, 사건의 전말을 아는 우리로선 그 동작이 우스울 뿐이었다.

마탑의 인장을 받기 전, 나도 루이스도 테일러도 아직 마탑의 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마탑은 매년 50명도 안 되는 사람을 뽑지만, 그 과정을 모두 끝마치는 이는 그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소리는 즉, 시험 때마다 학생들이 열심히 죽어 나간다는 소리였다.

덕분에 다들 시험이 다가올 때마다 교수님 혹시 어디 안 아프신가? 천재지변이 발생해서 시험 날짜 좀 미뤄졌으면 좋겠다……. 정도의 소망은 품기 마련이었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그 소망을 직접 실행에 옮겨 마탑의 기기괴괴한 일화 중 하나로 남은 사람이었다. 과도한 공부량에 빙글 돌아 버렸던 당시의 루이스는 시험 시간이 코앞에 다가오자 교수를 기절시켜 빈 창고에 감금했다.

그러나, 세상엔 권선징악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교수를 기절시켜 안 쓰는 창고에 가두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철저하진 못했다. 아무도 안 오던 창고에서 밀회를 즐기던 커플이 기절한 교수를 발견하고 의무실에 데려간 것이다.

덕분에 시험도 정시에 치러졌고, 노발대발한 교수의 손에 두들겨 맞은 뒤 루이스는 벌로 한 달간 탑 1층에서 꼭대기까지 마법 없이 청소하는 벌을 받고 말았다. 빗자루를 들고 1층부터 77층까지 죽상으로 걸어 다니는 놈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었다.

웃긴 건 루이스의 졸업 논문에 승인 도장을 찍어 준 사람이 루이스가 감금 시도했던 딘 교수란 것이다. 심지어 논문의 주제도 그때 루이스가 딘 교수를 감금할 때 사용했던 마법약의 다양한 활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괴상한 사제 관계를 보고 있으면 루이스 녀석도 발 뻗을 자리를 보고 드러누운 거였구나 싶긴 했다.

자신과 딘 교수님의 우정에 대해 설파하는 루이스를 무시하며 테일러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교수직 오래 하고 있네?”

“말도 마라. 그만둔다고 말한 게 1년 전인데 후임자가 안 구해져서 아직도 하고 있었어……. 그래도 몇 주 전에 후임자가 구해져서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드디어 그만둔다. 난 역시 교육 쪽은 잘 안 맞는 거 같아. 수업 준비하느라 연구할 시간 부족한 것도 싫고.”

그 말을 하는 테일러의 안색이 빛났다. 일을 그만둔 것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이렇게 교수직에 맞지 않아 얼마 지내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만둘 거라고 8년째 욕하면서도 계속 교수직에 머무는 벨로니 스승님은 사실 교육 쪽이 적성에 맞는 것 아닌가 싶었다.

두 사람도 일이 있는지라 오래 이야기는 못 나누고 곧 헤어졌다. 도서관까지 자루를 지고 가다가 이러다 어느 세월에 나눠 주나 싶어 그냥 복도에 있던 책상 하나에 줄 사람들이 정해진 것들 빼곤 전부 부어 버렸다.

[자유롭게 가져가시오.]

책상 위에 대충 휘갈겨 쓴 종이를 올리고 나니 큰 짐을 던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해 뒀으니 다들 알아서 가져가겠지. 앞으로 케이든이 방을 비우라고 하면 이렇게 적당히 어디 복도 책상에 부어 버리고 가져가라 하는 것도 괜찮겠다.

훨씬 가벼워진 자루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에 가자 드디어 메이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가 책 반납하러 왔다고 하자 나를 알아본 그녀의 검은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 사늘한 눈총에 어쩐지 식은땀이 흘렀다.

책과 함께 메이 씨에게 털실로 만든 실내화를 조심스레 건네니 메이 씨는 내 뇌물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한 번만 더 연체했다간 이번보다 심한 경고의 메시지가 갈 테니 조심하라는 말은 덤이었다. 연체할 만큼 열심히 책을 읽었을 테니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 보라고 할까 봐 좀 떨었는데 무사히 보내 주셔서 다행이었다.

무사히 도서관을 나와 복도를 걷다 보니 마침 보고서를 쓰는 데 필요한 책을 찾으러 도서관을 향해 가던 아비가일 공주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시험이 다가오는지 퀭한 얼굴을 한 그녀는 시중 들 사람을 데려올 수 없는 마탑의 특성 때문인지 왕궁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단출한 차림이었으나 여전히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입을 열자마자 공부 때문에 죽겠단 소리가 먼저 튀어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진짜……. 죽겠어요. 진짜로… 합격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요샌 그냥… 아, 나 졸업할 수 있을까? 이 생각밖에 안 들어요.”

“저런…….”

“새언니,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마탑에선 교수가 행방불명 돼도 시험을 보나요?”

“예전에 교수를 감금 시도한 인간이 나온 이후로 교수가 사라져도 다른 교수가 대리로 시험 진행하게 바뀌었어요.”

“하, 역시.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요즘 공부가 힘든 모양이었다. 언젠가 루이스를 아비가일 공주에게 소개해 주면 기뻐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또 새언니라고 불렀어! 알고 지낸 시간이 좀 되었다 싶어졌을 무렵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를 새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케이든도 나를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어린 신랑, 부인, 내 사랑 등등 별별 호칭으로 부르곤 했고, 대체로 다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새언니란 호칭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쯤 맛이 간 퀭한 눈으로 시험 전에 교수를 감금해 줄 백마 탄 동기를 찾는 시동생에게 호칭을 정정해 달라 요청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나는 그냥 그녀의 품에 니트를 안겨 주고 힘내라 응원을 한 뒤 후다닥 자리를 비켰다. 시험 기간의 학생을 오래 붙잡아 두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탑을 내려가다가 스승님의 연구실이 있는 층을 지나게 되어 혹시나 계실까 해서 스승님의 연구실에 들러 보았다. 슬쩍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들이밀어 보니 모처럼 관찰 연구를 가시지 않은 스승님이 보여 옳다구나 들어갔다.

스승님 드리려고 떴던 트리큘라 인형도 여럿 챙겨 왔는데 마침 계시니 정말 다행이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웬일로 무거운 발걸음을 다 했냐는 질문이 날아와 도서 연체에 얽힌 오늘의 슬픈 사연을 구구절절 읊으며 연구실 한편에 놓인 모카 포트로 커피부터 끓였다.

우러난 커피를 스승님과 내 몫의 컵에 따른 후 스승님께 다가가 건네니 스승님은 마침 졸렸는데 잘됐다며 흔쾌히 받아 드셨다. 마침 졸렸다는 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닌지 검은 눈엔 피곤함이 가득하였다.

연구지에서 오늘 새벽에 도착해서 한 시간 자고 수업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스승님은 올해 안으로 교수직을 때려치우겠노라고 재차 다짐하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올해도 그만두시지 못할 것 같았다. 굳은 결심을 다지고 계시길래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여전히 여러 기록으로 어수선한 책상은 오랜만에 보니 정겨웠다. 결혼식 이후로 뵙지를 못해 쌓인 이야기들을 나누다 그동안 내가 잘 지냈다는 증거로 자루를 열어 인형들을 선보였다.

“안 그래도 네가 뿌리고 다니는 것 때문에 바깥이 어수선하더라. 뭐……. 마정석 배포를 통한 마법의 실생활 보급 확대가 목적이라도 되니? 단순 취미 생활로 보이기는 한다만.”

“짐 정리 겸 나눠 준 거긴 한데……. 이왕 여기저기 나눠 주고 다닌 거 다음 논문 주제는 그걸로 할까요?”

“그러렴. 나눠 주려고 발품 판 게 아깝잖니.”

그냥 나눠 준 뜨개질 작품들을 가지고 어떻게 논문을 적어야 그럴듯해 보일지 이야기하며 남은 인형을 스승님에게 건네었다. 나 때문에 트리큘라 개체 관찰 연구를 가시지 못한 게 안타까워 떠 왔다고 말하자 매사에 담담한 그 얼굴에 울적한 기색이 떠오르셨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까 네 결혼식에 참석하고 얼마 안 돼서 트리큘라 서식지에 일이 생겼단다.”

“무슨 일이요?”

“거기가 휴화산이었잖니. 몇백 년 동안 화산 활동 기록이 없어서 화산 활동을 완전히 멈춘 줄 알았는데 5월에 화산 활동이 일어났더라고……. 덕분에 지금 트리큘라 연구가…….”

“저런.”

스승님은 이어 우울한 얼굴로 지금 섬에 접근도 안 돼서 혹시라도 생존했을 트리큘라 개체 수 파악도 못 하고 있다고 한탄을 하셨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웃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환희가 퍼져 갔다. ‘리암’은 그가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로써 소원하던 모든 것을 쟁취한 것이다.

나는 스승님의 손을 맞잡고 즐거이 위로했다. 스승님은 자신이 내 결혼식 덕분에 화를 안 당한 걸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트리큘라 연구에 난항이 생긴 걸 슬퍼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며 투덜거리셨다.

아무래도 전자에 기뻐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나도 연구하려던 마정석 광산이 가 보지도 못했는데 무너지면 슬플 것 같았기에 괜히 입을 놀리지 않고 스승님 말이 다 옳다고 그냥 맞장구쳤다.

다행히 스승님은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것에 오래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탄을 늘어놓던 스승님은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뭐, 중얼거리신 후 그 슬픔을 대체하듯 이어 본인이 흥미롭게 읽으신 마탑의 최근 논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기존에 활용하던 증기 에너지 보존 방식은 에너지 보관 중에 에너지 유출이 심했는데 그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 칭찬하시며 그것에 대해 첨언하셨다.

“대규모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건 중요하지. 우리야 마법사라 그 필요성을 직접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상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다각화하면 그 사람들에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비용이 기존 방식보다 훨씬 많이 필요한 건 조금 더 개선이 필요할 것 같더라.”

“그래도 최근엔 마력과 마정석 외의 에너지에 관한 연구랑 사용이 활발해진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는 탄광촌이어도 석탄보다 마정석 광산 채굴에 훨씬 집중됐었는데 요새는 펠튼하고 발도맹 쪽 제철소가 활발하게 운영 중이라 그런지 석탄 채굴량이 옛날보다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제철소 때문인지 열에너지 이용 효율도 높아졌고.”

“긍정적인 현상이지. 자, 리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말해 준 논문 다섯 개를 읽고 다음 달 이날까지 비평과 보완점을 분석해서 제출하렴.”

“네?”

스승님이 갑자기 내준 숙제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놀러 와서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예고도 없이 이런 숙제를 내주시는 건 불합리하다 항변하였지만, 언제부터 인생에 예고된 일만 닥쳐왔었냐는 핀잔만 얻어들은 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음에 올 때 숙제를 해 오겠노라고 스승님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엔 스승님은 교수가 천직이었다. 아마 내년에도 못 그만두실 게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던져진 막대한 양의 숙제에 눈물을 삼키며 스승님의 연구실을 나왔다. 분명 챙겨 왔던 자루는 다 비웠는데 이상하게 올 때보다 어깨가 무거워졌다.

집에 갈 포털을 만들기 위해 터덜터덜 포털 생성 승인 장소로 걸어가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리암! 오랜만이다!”

“해럴드?”

“넌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걸걸한 목소리로 크게 나를 부를 땐 언제고 말을 주고받는 그 짧은 사이에 텐션이 낮아진 덩치 큰 남자가 내게로 걸어왔다. 대충 깎은 수염에 피곤함에 찌든 기색의 남자는 방금까지 담배를 피우다 왔는지 진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담배 냄새에 내가 코를 막으며 불평하자 그는 사내놈이 까탈스럽게 군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휘저어 담배 냄새를 지워 냈다.

해럴드 바이스, 벨로니 스승님의 동기이자 신학 교수였다. 어릴 때 스승님이 관찰 연구를 가실 때 리암을 종종 해럴드에게 맡겨서 나와 꽤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야, 네에♡ 해 봐라. 네에♡.”

그 덩치로 갑자기 교태를 부리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말 한마디를 마칠 때마다 공중에 붉은 연기를 피워 올려 작은 하트 모양을 만드는 모양새가 어처구니없고 열 받았다. 결국,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그에게 쏘아붙였다.

“미쳤어?”

“어휴 말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결혼식에서 네가 신랑한테 ‘네에♡’ 하면서 쫓아다니길래 네가 미친 건가……. 아니면 정신 마법에 걸렸나, 한참 고민했다. 살던 대로 살아, 인마.”

충격이었다. 나도 내가 케이든 앞에 서면 본능적으로 아양 떤다는 자각 정도야 있었지만……. 저 정도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이 심했다. 불퉁해져 해럴드에게 투덜거렸다.

“살던 대로 사니까 해럴드가 결혼 못 하는 거야.”

“난 안 하는 거야, 꼬맹아.”

그가 내 말에 잠시 발끈했다가 내 사늘한 시선에 급히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아니 근데, 넌 뭐가 그렇게 급해서 스무 살밖에 안 된 게 서른두 살이랑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냐? 벨로니가 청첩장 받고 양심 없는 도둑놈이라고 어찌나 욕을 해 대던지.”

“스승님이?”

내게 보내신 편지에서도 나이를 언급하기는 하셨지만 크게 별말 없으셔서 몰랐는데 그러셨구나……. 어쩐지 케이든이 스승님과 대화할 때 과하게 긴장하는 것 같더라니……. 뜻밖의 사실에 놀라 입을 떡 벌린 나는 내버려 둔 채 해럴드는 말을 이었다.

“너 인마, 감금당하면서 살고 그런 거 아니지? 지난번에 스투라티아에서 벌어진 기현상 해결 협조 공문 왔을 때 증언도 들을 겸 너 좀 만나겠다니까, 아미르 공작이 너 몸 상태 안 좋다고 너한테 접근도 못 하게 하더라. 결혼식 땐 너 정신이 없어서 대화도 제대로 못 하고.”

“난 잘 지내고 있어.”

“오늘 뜨개질한 거 뿌리고 다니는 거 보니까 그래 보이더라. 안 그래도 큰 놈이 거기서 더 큰 거 보니까 잘 먹고 잘 지내는 거 맞나 보네. 하여간에 앞니 빠진 거 보여 주기 싫다고 말 걸면 손으로 입 막고 뒤돌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결혼을 한다고…….”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과거 회상에 내가 질색하자 해럴드가 낄낄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려다가 내가 그 손을 노려보자 혀를 차며 다시 집어넣었다.

“스투라티아 때 이야기는 여전히 비밀이냐?”

“개인적인 이야기야.”

“그래라. 뭐 끽해야 평야에 신이 나타난 거 말고 더 있겠냐.”

“다 짐작하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맞나 봐? 찍어 본 건데.”

“…짜증 나네.”

내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해럴드가 경박하게 웃었다. 해럴드는 어릴 때부터 늘 이랬다. 좋은 사람이긴 한데 은근히 사람 열받게 한단 말이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침 그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여기서 만났으니 잘되었다.

“혹시 콜루나를 만들어 볼 생각 없어?”

“…뭐?”

그가 멈칫했다. 순식간에 웃음기가 가시며 진지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겨울의 그 날 이후 신들에게 남아 있는 앙금은 없었다. 이름을 걸고 맹세했으니 그들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약속을 지키겠지.

하지만 케이든은 나와 달랐다. 그는 여전히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반응하고 분노하였다. 케이든은 그가 스투라티아에서 말했듯이 죽는 날까지 그날을 잊지 않고 그 분노를 간직할 것이다.

그것이 싫었다. 케이든이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그 분노가 종종 나를 홀로 그곳에 보낸 그 날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다면 내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오래지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맹세한 대로 나는 이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끝낼 것이지만, 우리의 끝에서도 신들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자.

“스투라티아에서 신한테 꽤 데였나 보다?”

해럴드가 언제 정색했냐는 듯 장난스럽게 피식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튕겨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자 조용히 담배를 입에 가져간 그는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해럴드는 예전부터 언젠가 신들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때 인간들이 쌓아 온 지식의 시대가 끝을 맞이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종종 농담처럼 ‘신들이 다시 땅에 내려온다면 하늘 높이 지어진 이 탑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의 언어를 갈라놓을걸? 그렇게 인간들의 영광은 끝나는 거지.’라 말하며 그날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곤 했다. 맹세 때문에 내가 직접 콜루나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해럴드만큼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한참 아무 말 없이 줄담배를 피우던 해럴드는 마지막 한 개비를 입에 물기 전 나를 바라보았다. 그 고동색 눈이 빛났다.

“집 가기 전에 연구실 들렀다 가라.”

“안 돼.”

“싫은 거냐, 안 되는 거냐?”

“안 되는 거.”

“하……. 이놈 자식, 진짜 도움 안 되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참견은 ‘이 시간에서 내 모든 걸 끝내겠다.’라는 맹세를 깨트리게 될 위험이 있었다. 콜루나를 내 입으로 언급한 것도 좀 아슬아슬한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내 말에 머리를 벅벅 긁다가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서서히 석양이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해럴드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머지않아 케이든에게 줄 근사한 선물이 준비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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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납하러 마탑에 갔다가 정작 책 반납보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아미르 저택의 정원에 도착하자 마중을 나온 케이든이 웃으며 나를 반겼다.

“잘 갔다 왔나? 생각 없이 연체나 하는 무뢰배 씨.”

메이 씨의 편지 내용을 인용하며 나를 놀리는 케이든이 너무 즐거워 보여 그를 살짝 흘겨보았지만, 그의 웃는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놀림에 꽁했던 기분이 좀 풀렸다.

케이든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그를 졸졸 쫓아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마탑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해 주자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가기 싫어서 죽상으로 출발했던 것치곤 잘 놀다 왔군.”

“억울해요. 제가 거기서도 케이든이 보고 싶어서 얼마나 슬펐는데요. 포털 만들다가 너무 오래 걸리는 게 슬퍼서 울 뻔했다니까요?”

“누굴 닮아서 1년 새 이렇게 능청이 늘었을까?”

“당연히 내 사랑이죠.”

“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내 대답에 케이든이 투덜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라 나는 배시시 웃으며 슬쩍 그의 정수리에 내 볼을 비볐다. 정리해 둔 머리가 망가진다고 질색하는 케이든의 말을 모른 척하며 나는 오늘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존경받는 마탑의 마법사란 인간들이 학창 시절에 저질렀던 온갖 괴상한 짓들을 연이어 말해 주자 케이든이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식의 전당이란 곳에서 별일이 다 일어나는군.”

“그러니까요. 그래도 전 온순한 축이었죠.”

내 말에 걸음을 멈춘 케이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나는 당당했다. 왜냐면 진짜였으니까! 나는 해럴드가 따로 키우던 오렌지 서리 정도만 했지 그 이상의 극악무도한 짓은 하지 않았다.

“…첫 만남에 사람 머리를 터뜨리는 짓을 했지만,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진짠데…….”

내 항변에 케이든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방 하나를 비운 셈인가?”

“네에!”

그렇다. 마탑에 다녀옴으로써 나는 드디어 취미 방 하나를 비울 수 있었다! 인생의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라 너무 후련했다.

내 환호성을 들은 케이든은 자신이 그렇게 힘든 일을 시켰었는지 되돌아보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간에 지난 일주일간 처분하느라 수고했다며 그가 내 팔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고생이 많았었기에 나는 겸양의 말 없이 그의 칭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 진짜 고생했다. 리암 아미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머지않아서 내가 네 번째 취미 방을 새로운 작품들로 다시 채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다음 날 저택에 들어온 선물로 인해 완전히 방향을 틀어 버렸다.

노라 수사관을 통해 보낸 부엉이 인형을 받은 알버트 백작이 선물의 보답으로 발도맹 산 원두를 보내온 것이다.

귀한 선물을 줘서 고맙고 내가 커피를 좋아한단 이야기를 들어 발도맹 산 원두를 보내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단 편지를 받고 나는 눈을 껌뻑였다. 뭐야, 알버트 백작,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잖아?

신이 나 원두가 봉인된 봉투에 코를 들이대어 킁킁 냄새를 맡으니 좋은 냄새가 났다. 기분이 덩달아 좋아져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바로 그 원두로 커피를 우려내니 원래 먹던 원두보다 묵직한 맛이 나는 것이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 예상 못 한 선물에 신이 난 것도 잠시였다. 알버트 백작의 선물 이후 내가 나눠 준 선물에 대한 답례품이 저택에 속속들이 도착했는데 당황스럽게도 답례품 대부분이 원두였다. 가끔 생두나 가공하지 않은 커피 체리도 있긴 했다. 그래 봤자 다 커피란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다들 짜고 보낸 듯한 선물의 구성에 내가 멍하니 케이든을 바라보자 그도 이 상황이 웃기는지 낮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칼레의 귀족들은 커피보단 차를 즐기는데 그대는 결혼 초부터 한결같이 차는 취급하지 않고 커피만 주로 마시니 다들 그대의 취향을 유념해 두었던 모양이군. 물론 이 상황은 좀 웃기긴 하는데…….”

당황스러웠다. 내 음료 취향에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이 많다고?

이게 바로 잘난 남자와 결혼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미남의 무게인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주섬주섬 선물 받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답례품을 보낸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 아니랄까 봐 원두도 좋은 것들만 골라서 보낸 것이 포장부터 티가 났다.

어쨌든 선물 받은 것이니 성의를 봐서 시음은 해 봐야 했다. 그 핑계로 부지런히 커피를 하나하나 내려 마시기도 하고 여러 방식으로 블렌딩도 해 보고 로스팅도 해 보다가…….

그렇게 나는 새로운 취미에 입문했다.

생기는 취미마다 경제성은 딱히 없고 돈은 많이 드는 취미인 걸 보면 역시 내 천직은 백수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새로운 취미를 들은 케이든은 취미가 여러 개면 심심하지 않고 좋은 거 아니겠냐고 웃으며 방 하나를 새롭게 꾸며 주었다. 커피가 아무리 좋아도 적당히 마시라는 애정이 어린 핀잔은 덤이었다. 역시 뜨개질한 것들에 마정석을 달고 있을 때도 뭐라 타박하지 않던 내 배우자는 배포가 남다른 듯했다.

이렇게 몇 개월간 이어졌던 저택의 작은 산업 혁명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장되었지만, 겨울철이 되면 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겨울이든 여름이든. 봄이든 가을이든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사랑은 한결같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니, 아무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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