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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어린이는 많이 자고 일찍 잔다 (9/13)

외전 1. 어린이는 많이 자고 일찍 잔다

케이든 아미르의 일상은 규칙적이었다. 시계보다 정확한 하루를 보냈다는 어느 학자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의 일정이 확실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저녁 열 시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 다섯 시에 기상한 후 두 시간 정도 몸을 단련하고 일곱 시에 아침 식사를 한 후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그런 일상. 물론 이건 리암과 밤을 보내면 못 지켜질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될 수 있으면 그는 일상의 계획 중 일곱 시 기상 정도는 최대한 지키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반대로 그의 배우자, 리암 아미르의 일상은 규칙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불규칙적이었다. 별일이 없으면 케이든과 같이 잠자리에 드는 그는 아침에 케이든이 깨울 때야 눈을 비비며 아주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났고, 케이든이 얼른 일어나라 몸을 간지럽히고 나서야 그 특유의 투명한 웃음을 지으며 그제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케이든과 함께하는 아침 식사 후 리암은 케이든이 일하는 옆에서 노닥거리며 털실을 가지고 놀거나 혹은 책을 읽었다. 실내에 있을 기분이 아니면 케이든이 그를 위해 만들어 준 미로 정원이나 온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마정석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하곤 했다. 그러다 가끔 무슨 짓을 하는지 정원이나 온실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였고.

케이든은 이런 리암의 일상에 별 불만은 없었고 자신의 시야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오히려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그에게도 궁금한 것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작 그런 게 궁금합니까?’라고 물을 법한 사소한 고민이었지만 케이든은 꽤 진지하게 이것이 궁금했다. 그 사소한 질문의 정체는 바로,

‘과연 리암은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 잘까?’

…였다. 이 소소한 궁금증이 생긴 계기는 그 궁금증만큼이나 사소했다.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찾아온 후센 백작의 작고 소식에 급히 준비하여 새벽에 나갔던 케이든은 오후 두 시쯤 잠시 시간을 내 저택에 돌아왔는데 리암은 아침‧점심 식사를 다 거른 채 그때까지도 쿨쿨 자고 있었다!

감히 그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던 사용인들을 대신하여 밥 먹고 다시 자라고 리암을 깨웠던 케이든은 그의 손길에 비척이며 일어나 흐아암 하품을 하는 리암의 모습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이 녀석, 아무도 안 깨우면 온종일 자는 거 아냐?’

별거 아닌 궁금증이었지만 어린 신랑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케이든에게는 꽤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래서 오늘 케이든은 그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하였다.

오전 다섯 시, 원래도 리암은 케이든이 아침에 운동하러 나갈 시간엔 눈꺼풀을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케이든은 평소보다 발소리를 줄여서 방을 나섰다.

오전 일곱 시, 취침 후, 아홉 시간 경과.

새벽에 단련을 마치고 돌아온 케이든이 혼자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리암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숙면하고 있었다. 억지로 깨우는 사람이 없으니 살판 난 모양새였다.

사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라, 케이든은 그러려니 했다. 원래도 아침 식사는 더 자려는 리암을 깨워서 먹이던 것이었으니까.

정오, 취침 후, 열네 시간 경과.

평소 두 사람이 점심을 먹던 열두 시경에도 리암이 자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케이든은 혀는 찼지만 그러려니 했다. 혹시나 했지만 전적이 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리암과 함께하던 식사 자리를 연속으로 혼자 지키려니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그래도 이왕 하기로 한 거 결과를 봐야겠단 생각에 그는 리암을 깨우라는 머리 한편의 주장을 억누르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오후 세 시, 취침 후, 열일곱 시간 경과.

케이든은 집무실에서 영지의 범죄 현황에 관한 보고를 들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다 문득 곁이 허전하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때쯤에 케이든의 옆에 붙어서 조잘대던 녀석이 없으니 기분이 허전했다. 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시종을 불러 물었다.

“레리, 리암은 아직 자고 있나?”

“네. 리암 님께서는 현재 취침 중이십니다.”

리암 이 녀석도 참 대단했다. 열일곱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자는 중이라니. 옆에서 시종의 보고를 같이 듣던 잭슨이 시종에게 리암의 수면 시간을 묻곤 감탄했다.

“신생아들이 보통 이 정도 자던데 말입니다.”

“신생아…….”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되뇌었다. 신생아는 배고프면 중간에 밥 달라고 일어나기라도 하지. 저 덩치 큰 아기는 배고프지도 않은지 잠만 자고 있다.

덩치, 그러고 보니 리암은 최근 부쩍 커진 것이 눈에 선명하게 보일 만큼 키가 자라고 있었다. 원래도 장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케이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키였는데 요즘은 케이든과 반 뼘 조금 넘게 차이가 날 정도로 키가 자라 하루가 멀다 하고 재단사를 불러 옷을 다시 맞추는 중이었다.

키가 자라고 있다는 걸 눈치챈 계기는 우스웠다. 1월이 끝나갈 무렵 리암이 결혼반지가 약지에 잘 안 들어간다고 울상을 지었다. 겨울을 나며 안 그래도 잘난 얼굴이 무르익어 더 잘생겨지긴 했지만, 그 외에 눈에 띄는 몸의 변화는 없었는데 녀석의 손에 딱 맞춰 제작했던 반지가 갑자기 잘 안 들어간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무엇이 달라졌나 리암을 가만 살펴보다 더 굵어진 녀석의 손과 더욱 단단해진 사내의 몸을 발견한 케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소년티를 벗은 청년은 몸도 마음도 순식간에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키만 좀 더 크고 금세 멈출 것으로 생각했던 리암의 성장은 생각보다 더 오래갔다. 안 그래도 컸던 녀석이 2개월 동안 10cm가량이 더 컸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리암은 요즘 툭하면 무릎이 아프다, 종아리가 아프다, 어디가 아프다 종알대곤 했다. 투덜거림의 절반은 엄살이었지만 말이다.

원래도 아르안 공국 사람들이 칼레 사람들보다 평균 신장이 좀 더 큰 편이긴 했지만, 그래 봐야 대부분이 케이든과 엇비슷하거나 그보다 약간 큰 정도였다. 케이든보다 작은 사람들도 많았고 말이다. 그걸 고려하면 리암은 아르안 사람 중에서도 유난히 키가 큰 편인 것 같았다.

남자 중엔 성인이 되고도 자라는 사람이 꽤 되긴 했지만, 그것이 리암일 것이란 예상은 못 했기에 케이든은 그가 어느 정도 자랄지 감이 안 잡혔다. 이만큼 자랐으니 슬슬 성장이 멈추겠지? 했는데 다시 키를 재어 보면 또 자라 있어 놀란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래도 쑥쑥 자라는 리암의 키를 측정해 보는 것은 그의 새로운 재미였다. 키가 잘 자라는 걸 볼 때마다 그가 리암을 잘 먹이고 잘 키운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고 말이다.

되레 리암이 부쩍 자란 자기의 키에 불만이 있었다. 그의 불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예전보다 빈번하게 옷을 맞추느라 시간을 뺏기는 점, 안 그래도 큰 그의 것이 성장기임을 증명하듯 더 커지는 바람에 케이든이 잠자리를 가질 때 원래보다 더 힘들어한다는 점-케이든도 이것만큼은 그의 불만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등등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불만 중에서 리암의 가장 큰 불만은 케이든이 리암을 안아 주기가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는 케이든이 자신을 품에 가득 차게 안아 주는 걸 좋아했는데, 요 몇 달 사이 리암의 키와 몸집이 너무 자라 케이든이 리암을 품에 안아 주기가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가끔 리암은 현실을 부정하듯 케이든의 품에 자신의 덩치를 막무가내로 밀어 넣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케이든은 떠날 때가 된 장성한 새끼가 독립은 안 하고 둥지를 점거한 채로 보살펴 달라 떼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도 리암의 요청대로 케이든은 틈이 날 때마다 최대한 리암을 안아 주려 노력했다. 여기서 더 덩치가 커지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런 연유에서 케이든은 리암의 수면 시간이 그가 최근 키가 크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결혼 후 리암 아미르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게 주요 업무긴 했다. 키가 크기 가장 좋은 환경이란 소리였다.

‘그래도 열일곱 시간은 좀 과한 거 같은데…….’

케이든은 리암이 기록한 엄청난 숫자를 되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하루가 아홉 시간이나 더 남은 게 슬슬 무서워졌다. 대체 언제 일어나려고.

오후 여섯 시 무렵.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케이든은 하루의 업무를 대강 마무리 지었을 무렵 케이든의 전속 시종 레리가 바쁜 발걸음으로 와 보고를 올렸다.

“리암 님께서 기상하셨습니다.”

“신생아보다 더하시군요.”

“조용히 하게, 잭슨.”

오후 여섯 시, 취침 스무 시간 경과, 리암 아미르 기상.

일어나자마자 씻고 식당으로 먼저 갔다던 리암은 케이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 왔다. 원래도 안색이 좋은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얼굴이 환하고 뽀얀 것이 아주 잘 잤구나 싶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하루 치 밀린 수다를 몰아서 하듯 식사하는 내내 케이든에게 조잘거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평소보다 열심히 식사하는 모습이 잘 만큼 잔 것보단 배고파서 깬 것 아니냐는 의심에 불을 지폈다.

깔끔하게 식사를 마친 녀석은 하인이 가져다준 커피와 디저트까지 전부 먹어 치웠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시긴 해도 저녁 시간대는 알아서 피하던 리암이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는 걸 보며 케이든은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커피를 마시다니, 오늘 밤을 새울 생각인가?’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스무 시간을 잤는데 밤에 잠이 오겠는가? 밤새워서 책이라도 읽으려는 모양이었다.

케이든이 홀로 납득을 하든 말든 깨어난 이후로 줄곧 신난 리암은 식사를 마치고 케이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종알거렸다. 한 손에는 시녀가 챙겨 준 설탕이 듬뿍 묻은 비스킷이 잔뜩 담긴 종이봉투를 야무지게 든 채였다.

이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이 녀석은 하루치 식사를 저녁에 몰아서 하려는 모양이었다. 케이든이 비스킷 봉투를 든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암은 혹시 먹고 싶냐며 비스킷을 봉투에서 하나 꺼내 그의 입에 대 주려 하였다. 케이든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비스킷을 거절하자 그는 ‘맛있는데…….’라 꿍얼대며 자연스럽게 손을 돌려 제 입에 집어넣었다.

전에도 녀석이 먹는 걸 받아먹었다가 너무 달아 간신히 삼킨 적이 여러 번 있던 케이든은 아무 말 없이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더해지자 종일 허전했던 일상이 여러 빛깔로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상 네 시간 경과. 오후 열 시. 케이든이 평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려다가 그를 따라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익숙한 존재에 흠칫했다.

“리암?”

“네에?”

리암과 케이든은 리암이 옷시중을 든다는 핑계로 케이든의 방에 입성한 이후 함께 잠들곤 했다. 리암의 방이 따로 있긴 했지만, 그는 따로 할 일이 없는 날이면 꼬박꼬박 케이든의 방으로 와서 잤다.

그래, 잠을 잤다. 케이든은 리암이 이 시간에 자신의 방으로 왔다는 사실에 잠시 아찔해졌다. 그는 당연히 리암이 오늘 늦게 잠들 테니, 리암의 방으로 갈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리암이 세운 앞으로의 일정을 반쯤 확신하였지만, 혹시나 해 물었다.

“지금 자려고?”

“네에!”

“…그대. 아까 커피도 마셨는데 잠을 잘 수 있겠나?”

“한 잔이야, 그냥 맛으로 먹는 거죠.”

저 당당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하지만, 케이든은 잠시 이마를 짚으며 순진무구한 낯에 되물었다.

“그대, 몇 시에 일어났지?”

“여섯 시요!”

“그리고 지금은 몇 시지?”

“열 시죠?”

저 태평한 목소리와 뭐가 문제냐는 순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 한마디 할 의지도 사라졌다. 케이든은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 어린이는 많이 자고 일찍 자는 법이지. 그래. 아니. 하지만.

“…리암, 내일부턴 일곱 시에 일어나도록.”

“에.”

에는 뭐가 에야. 케이든은 눈을 가늘게 떠 일곱 시에 기상하라는 말에 금세 억울한 얼굴을 한 리암을 흘겨보았다. 리암은 케이든의 흘겨봄에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케이든의 결정을 꺾지 못할 것 같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평소 기상 시간도 일곱 시인데 이 녀석은 뭐가 억울해 입을 삐죽거리는 거지?

반응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리암은 오늘의 숙면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케이든은 앞으로 녀석을 아침 일곱 시마다 꼬박꼬박 깨울 생각이었으므로 오늘의 방탕한 수면 시간은 앞으로 다시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케이든에게는 궁금증 해결이라는 성과와 리암에게는 숙면이라는 달콤함을 안겨 준 하루는, 달콤한 방탕함의 대가로 약간의 쌉싸름함을 리암에게 안겨 주며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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