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logue. (8/13)

Epilogue.

내가 깨어난 건 케이든이 스투라티아 평야에서 나를 데리고 오고 나서도 이틀이 지난 뒤였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다 희미한 인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흐릿한 풍경 속에서 낯선 천장이 보였다.

시야의 적응을 위해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옆에서 다급한 몸짓이 느껴졌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끙 소리와 함께 얼굴을 돌리니 놀라 눈이 잔뜩 커진 케이든이 급히 내 얼굴을 붙잡아 왔다.

괜찮으냐 묻는 그 목소리에 대답해 주려고 입을 벌렸지만 메마른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나왔다. 그 희미한 소리에 케이든이 급히 입가에 물컵을 대 주었다. 상체를 벽에 기댄 채 물을 받아 마시며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니, 케이든을 만나고 나서 긴장이 풀려 그에게 몸을 맡기며 그대로 쓰러졌던 것이 떠올랐다.

어지간히 걱정시켰겠구나 싶어서 어설프게 웃으며 이제 괜찮다고 말하니 내 대답을 들은 케이든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울상인 것도 같고, 화가 난 것도 같은 얼굴에서 내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그가 느꼈던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아무 말 없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조용히 내 어깨에 팔을 감아 왔다. 서로에게 해 주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아주 많았지만, 그 순간의 우리는 고요를 선택했다. 서로가 이곳에 이 시간에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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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라티아 평야를 떠난 것은 내가 정신을 차리고도 3일이 더 지나서였다. 며칠 사이 평야에 가득 내린 눈에 발목이 잡히기도 했고, 내 몸 상태를 진찰한 의사가 며칠은 푹 쉬어야 한다고 케이든에게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케이든은 스투라티아 평야에 며칠 더 머물 것을 자연스럽게 결정하였다. 내 몸 상태는 아주 괜찮다는 내 주장은 당연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덕분에 스투라티아에서 할 일 없이 노닥거리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들을 수 있었다. 계획의 성공적인 마무리와 내가 신과 이야기하던 사이에 평야를 가득 채웠던 빛무리. 그것이 거두어지기를 기다리며 많은 생각을 하였던 케이든.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내 손을 깍지 껴 잡은 케이든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내가 케이든을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해가 지면 밤이 찾아오고 시간이 지나면 동이 트게 되는 자연 현상처럼 너무나 당연한 일.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그저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었던 풍년제 때의 고백은 돌이켜 보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마친 케이든은 그의 말을 듣는 내내 환하게 웃고 있던 내 얼굴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는 핀잔에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내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찰 이후 케이든은 내게 무척이나 관대해져 사소한 어리광 정도는 아무 말 없이 받아 주었다.

덕분에 요 며칠 사이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일이 내가 느끼기에도 부쩍 늘었다. 그는 자신에게 엎어지다시피 기댄 내 등을 별말 없이 토닥여 주다가 불쑥 내 이야기를 해 보라 하였다.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입 다물고 있는 것도 우스워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머뭇거리다가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눈을 떴을 때로 운을 떼자 케이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가 예상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케이든이 내 이야기를 듣다가 헛소리 망상꾼과의 결혼은 재고해 보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케이든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오히려 ‘이야기가 너무 길지 않나?’, ‘이런 추태까지 이야기해야 하나?’ 싶어서 중간을 생략할 때마다 그는 훌륭한 수사관답게 금세 이야기 사이에 허점을 발견해 나를 추궁하였다. 과거를 숨기는 남자와의 결혼은 재고해 봄이 마땅하니 숨기는 것 없이 이야기하라 나를 다그쳐 대는 그의 말에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탈탈 털리다시피 모든 이야기를 쏟아 내야 했다.

덕분에 이건 평생 비밀로 해야지 다짐했던 이야기들을 줄줄 내뱉고 말았다. 예를 들면 세 번째 회귀 무렵 싹수없이 굴다가 케이든에게 얻어맞았던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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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는 원래의 리암 카터의 자아가 강했던지라 뚫린 입이라고 막 내뱉는 경향이 있었는데, 거듭된 회귀 때문에 심기가 잔뜩 비틀린 나머지 일곱 번 정도 연속으로 케이든이 처리했어야 하는 곳에 먼저 가 난장판을 피워 놓고 그를 비웃던 것이 화근이 되었었다.

그때도 한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케이든에게 ‘재주라곤 냄새를 맡는 것밖에 없는 왕실의 개가 사방에 진동하는 악취도 제대로 못 맡으니 어디에 쓰겠냐.’라고 말하는 나……. 아니, 리암 카터를 고개를 기울이며 물끄러미 보던 케이든이 갑자기 수사관 재킷을 벗었다.

뜬금없는 행동에 이죽거리며 수사관을 지금이라도 그만둘 생각이냐고 비웃던 리암의 눈앞을 곧 그 재킷이 덮쳤다. 케이든이 재킷을 던져 시야를 막은 것이었다. 그리고 곧― 머리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짐과 동시에 배를 가격하는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케이든이 리암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붙잡은 채 복부를 무릎으로 찍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리암의 턱을 연이어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날 나는 싸울 때 반지를 낀 손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앞서 난장을 부렸던 여섯 번 정도에선 케이든이 말로 경고를 하고 넘어가 방심한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마법사가 육탄전에서 기사를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주먹에 잔뜩 얻어맞은 후 바닥을 짚고 콜록대면서 눈만은 사납게 뜨고 그를 노려보는 리암을 내려다보며 상냥한 눈웃음을 지은 케이든이 말했다.

“왕실의 개가 냄새는 제대로 못 맡아도 무는 재주는 제법 훌륭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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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좋은 추억은 아닌지라 말 안 하려 했는데 실수로 흘려버려서 어쩔 수 없이 자백하는 심정으로 이런 일도 있었다 말하자 이야기를 들은 케이든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기선 제압 용이었던 것 같군. 그쯤에서 한번 기를 꺾어 놔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모양인데.”

기선 제압. 저 때 케이든의 기선 제압이 통했던가? 회귀를 거듭하면서도 두고두고 기억하는 걸 보면 통한 것 같긴 하다.

자신이 나를 팼었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던 건지, 원래의 리암 카터의 말버릇에 기함한 것인지 케이든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가 위로 차원에서 저 때의 리암 카터는 워낙에 말버릇이 험했으니 이해한다고 케이든을 토닥거리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토닥이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리암 카터와 그대가 섞였다고 말했으면서 그대에게 불리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원래의 리암 카터와 그대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군.”

뭐어. 인생이 원래 그렇다. 잘한 건 다 내 덕이고. 나쁜 건 다 쟤 탓 아니겠는가?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체하자 케이든은 실소를 흘리며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 턱짓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나는 모든 수치스러운 과거를 탈탈 털리고 말았다.

그래도 좋은 점도 있었다. 케이든은 행동할 때 ‘그냥.’이란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그는 이야기를 듣다가 간간이 이때는 아무래도 이런 생각으로 이런 일을 했던 모양인데, 라며 첨언을 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없어진 시간의 퍼즐 조각을 함께 맞춰 가는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현재의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 심문 덕에 지금 시간의 이야기를 꺼낼 때쯤엔 정신이 살짝 혼미해졌었다. 힘들어 눈이 핑핑 도는 기분에 잠시 이야기를 쉬었다 하면 어떻겠냐고 쉬는 시간을 요청했지만,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무슨 소리냐는 듯 자세를 바로잡으며 얼른 이야기하라 재촉하는 케이든에게 쉬는 시간 요청은 그대로 거절당했다.

결국, 정신없는 통에 케이든에게는 평생 숨기려 했던 구걸 사건의 전말까지 어쩌다 보니 다 이야기했다가 케이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과거를 숨기는 남자와의 결혼은 재고 대상이지만 거지와의 자리싸움에서 진 남자는 결혼 재고 대상이 아닌지, 케이든은 어째 이 이야기는 파낼 때마다 숨겨진 것이 계속 나온다며 혀를 차곤 가볍게 내 볼만 꼬집고 넘어가 주었다. 나중에 생각이 닿기론, 어쩌면 케이든은 내가 이때쯤 혼미해질 것을 의도하고 날 몰아붙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흘러 흘러 며칠 전 평야에서의 일까지 닿았다. 평야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티 나게 어두워진 케이든은 내가 신과 협상을 하던 부분을 들을 때쯤엔 내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나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분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분노로 떨리는 눈동자, 피가 비치도록 악문 입술.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나를 압박했던 신에게, 나를 지키지 못했던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 내 볼에 갖다 댔다. 갑자기 손에 닿은 감촉에 그가 손가락을 주춤 물리려는 것을 붙들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케이든, 나는 괜찮아요. 당신이 나를 위해 화내 주는 건 기쁘지만 그 화를 당신에게로 돌리지 말아요.”

“…그대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나.”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뇨. 당신은 내가 머무를 수 있도록 모든 걸 해 줬고 지금도 저를 위해 화내 주고 있잖아요. 그리고 앞으론 제가 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 있어 줄 거고. 케이든은 내게 모든 걸 해 주었어요.”

케이든은 모든 걸 해 주었다. 그가 있기에 나는 이 세계를 간절히 원하였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평야에서 그에게 웃어 보였듯이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케이든은 엉거주춤 내 볼에 닿은 그의 손을 펴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시선이 얼굴에 아직 약하게 남은 생채기들에 닿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상처들을 안타깝다는 듯 훑었다.

“리암, 너는 화가 나지 않아? 너는 어떻게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웃을 수 있는 거지?”

“화내기엔 너무 하찮은 일이니까요.”

더없이 소중한 작품을 만지듯 내 얼굴을 쓰다듬는 상냥한 손길이 기분 좋아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내 말에 그의 풍성한 속눈썹이 오르내리며 의아함을 표했다.

“날벌레에 물렸다고 백날 밤을 화내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번 일도 그런 것뿐이에요. 녀석은 화를 내며 나를 상처입혔지만, 이제는 내게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상처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고, 신들은 더는 내 인생에 개입할 수 없어요. 내게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존재들은 날벌레보다도 못하죠. 신경 쓰기엔 너무 하찮은 존재들에게 감정을 소모할 필요 없잖아요.”

신들을 향한 감정 소모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그자가 내 제안을 거절하여 내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저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쏟아 냈을 테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 저것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게 아무 영향도 줄 수 없고 나 역시 영향을 줄 수 없는 이들을 향해 분노를 불태워 봤자 무엇할까. 이미 그렇게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 버린 옛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에 내 사랑을 한 번 더 눈에 담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이것은 내 생각일 뿐이었는지 케이든의 얼굴에는 약간 혼란이 일렁였다.

“…그대는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가요? 꽤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효율적이기야 하지만 그걸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지.”

케이든은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그대가 말한 ‘섞였다’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가끔 궁금했거든,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이런 밝음과 무신경함이 동시에 느껴지는지.”

“네에?! 어디서 티가 나나요?”

케이든의 말에 내가 깜짝 놀라 되묻자 그는 씩 웃으며 답해 주지 않았다. 억울했다. 그야, 성격이 원래의 리암 카터 같다는 말이 그렇게 칭찬으로 쓰일 만한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입술을 삐죽이든 말든 케이든은 덕분에 나중에 사기당할 걱정은 그나마 덜었다고 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그야 이제 어디 가서 사기를 당하진 않겠지! 케이든이 나를 그렇게 훈련시켜 놨는데!

내가 괜히 볼에 바람을 넣으며 삐진 티를 내자 케이든은 소리 내 웃으며 내 볼을 장난스레 쿡쿡 찌르다 문득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리암, 피부 관리에 아주 열심인 사람들은 날벌레에 물린 일로 백날 밤을 화내곤 한다네.”

“앗.”

“그리고 그대가 아주 잘 아는 어느 귀족은 천성이 고약한 데다 끈질기기까지 하여 어느 귀족이 25년 전에 사촌과 사소한 잡담을 방해했단 이유로 그이를 몇십 년째 싫어하고 있지.”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 케이든이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누구를 싫어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심지어 싫어하는 티를 내면 사회생활이 귀찮아지는 인간과 다르게 저 위에 있는 신은 이제 내려오지도 못하니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도 별일이 없다!

이 얼마나 가성비 넘치는 희생양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니 신을 싫어해도 될 이유가 너무 그럴듯하여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다 갑자기 궁금해져 근데 방금 나온 사촌과의 대화를 방해한 사람이 누구냐고 슬쩍 물어보았다.

그러자 케이든은 짙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대답을 안 해 주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인 듯했다. 누구지? 케이든과 웬리르 공작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내가 아는 사람……. 설마 알버트 백작? …에이, 설마.

그가 대답해 주지 않으니 더 궁금증이 일어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고 있자 케이든이 내 손등을 툭툭 치며 그가 지금까지 내 상태에 대해 추리했던 바가 궁금하지 않으냐고 유혹하였다.

말을 돌리려는 기색이 훤히 느껴졌지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그는 내 반응이 기꺼운지 쿡쿡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볍게 손장난을 치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팔에 소름이 돋았다. 케이든은 빙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정황과 내가 흘린 몇 가지 말들로 거의 사실에 가깝게 추측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침묵하며 가만히 앉아 침대보만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내겐 강한 확신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같이 살면서 케이든을 속일 생각도 딱히 없었지만, 속이려 해도 절대 이 사람에게 거짓말은 안 먹히겠구나, 하는 그런 확신이.

소름이 돋아 팔을 쓸어내리는 내 반응을 본 케이든은 장난스럽게 더 숨긴 것이 있으면 봐줄 때 이야기하라 으름장을 두었다. 정말로 숨긴 것은 이제 없었지만 어쩐지 뭐라도 털어놔야 할 것 같아서 잠깐 고민을 해 봤다.

하지만 역시 이젠 털어놓을 게 없어서 그의 어깨에 재차 이마를 문지르며 나중에 생각나면 고백할 테니 그때 봐 달라고 하자 그는 크게 웃으며 나를 붙잡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시 침대에서 손장난을 치다가 자연스럽게 엉겨 붙으며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도 곧 케이든의 입술에 삼켜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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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에 돌아간 후에는 언제 스투라티아 평야에서 종일 둘이 붙어서 노닥거렸냐는 듯 정말 바쁜 일상이 펼쳐졌다. 내가 아니라 케이든한테.

수사관 일과 영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는 케이든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렇게 한가하게 놀아도 되나?’ 싶어서 나도 돕겠다 나섰지만, 케이든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리암, 그대는 집에서 잘 놀고 있는 것이 가장 나를 돕는 일이네.”

“네에.”

아무래도 케이든은 내가 밖에 나가는 것에 여러모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다. 케이든의 안 좋은 추억을 자극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나도 집에서 노는 것이 더 좋았으므로 그렇게 ‘리암 카터 손 빌려주기 작전’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케이든이 자다가 조용히 눈을 떠 옆에서 자는 내 심장 소리를 확인하지 않을 때쯤에 다시 한번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스투라티아 평야로 가기 전에 스승님이 보내 주셨던 영상석은 잘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들키고 말았다. 그는 영상석 상자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하나하나 친히 틀어 보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손으로 가린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영상석을 더없이 진지하게 보다가 마지막 영상석까지 다 본 후 아주 즐거워하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미감이 빼어나시군.”

진짜 동년배끼리 통하는 뭔가가 있나?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미감이 빼어나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도끼눈을 뜨고 영상석 무더기를 노려보고 있자 케이든은 영상석이 담긴 상자를 슬쩍 발로 밀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 버렸다. 그런 케이든의 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 얄미웠다.

그는 내 어린 시절이 담긴 영상석 모두를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것은 여섯 살 무렵의 내가 스승님과 수확 철 밀밭 옆에서 마법 연습을 하던 영상석이었다.

거기에는 근처에서 쉬던 농부들이 어린 나에게 술안주로 먹던 메뚜기볶음을 먹어 보라 권하자 안 먹겠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농부들이 계속 메뚜기를 들이대니 결국 빼액 울어 버리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앞니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크게 입을 벌리고 울었는지…….

그때 스승님이 우는 나를 도와주시기는커녕 흥미진진하게 보시던 것이 서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날을 찍은 영상석을 보내 주시다니, 약간의 배신감까지 들었다.

잭슨 씨에게 전해 듣기로 케이든은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지겨워지면 그걸 감상한다는 모양이었다. 특히 텅 빈 앞니를 드러내고 엉엉 우는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아니, 그런 걸 대체 왜 보내 주신 거고 케이든은 또 그걸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언젠간 케이든이 가져간 영상석을 내가 몰래 없애 버리리라 다짐하였지만, 그날이 오는 것보다 내가 겨울철 아미르 영지에 내려가게 되는 것이 더 빨랐다.

칼레 쪽에서 트리불라에 대해 펠튼 쪽에 항의하자 그쪽에선 트리불라와 펠튼 왕실과의 전면적인 연관성을 부인하며 2왕자의 단독 소행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자국의 큰 범죄 조직과 타국이 관련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국가의 위신 때문에 공개적으로 말할 만한 것이 아니라 칼레 쪽에서 대대적으로 항의하지 못하니 뻗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꼬리 자르기이긴 했지만, 실제로 변명을 들으니 열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든은 펠튼 쪽 꼬리 자르기를 전해 들으며 이를 갈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남은 일들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외교부 쪽으로 트리불라에 관한 공이 넘어간 후 케이든은 남은 일들을 얼추 마무리 짓고 수사대에 곧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인지 일 처리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일을 그만둔 후 케이든은 홀가분한 기색으로 나를 데리고 영지로 향했다.

케이든과 나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사와 시종들까지 동행하는 대규모 이동이라 포털을 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그래도 영지로 가는 동안 케이든과 온종일 붙어 있는 건 좋았다. 아미르 영지로 가는 동안 그는 내가 알아야 하는 아미르 가문 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차남이라 공작가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아니었는데 공주와의 혼인을 통해 왕실의 비호를 받아 계승권 다툼에서 이겨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가문의 비화를 들을 땐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이것도 정확히는 케이든의 큰아버지는 장남이지만 공작 부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케이든의 아버지는 차남이지만 공작 부인에게서 난 적자라 가능한 것이었다곤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장남이 사생아였던 건 아니고 정식 약혼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데 그녀가 결혼 전에 죽었던 것이고……. 뭐가 되게 복잡했다.

하여튼, 케이든까지야 어머니가 직계 왕족이니 그가 공작위를 물려받는 데는 큰 분쟁이 없었지만, 만약 그가 자식을 낳아 그의 자식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려고 한다면 사정이 또 달라졌다. 왕실의 눈치를 덜 봐도 되는 상황이니 상속법에 따른 분쟁과 정통성 논란이 발생할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케이든은 결혼을 해 한평생 자리다툼에 휘말릴 후계자를 생산하는 대신 그의 후계자 자리를 가문 내 다툼의 패로 사용하기로 결심했고, 독신으로 살 것이라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와의 결혼에 대해 아미르 가문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건 내가 후계자를 만들 수 없는 남성이었기 때문이겠단 생각이 들었다. 새삼 우리 결혼은 상황이 여러모로 잘 맞았구나 싶었다.

이 외에도 케이든은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원래 그는 1년에 절반 정도는 영지에서 지내는데 올해는 유독 수사관 일이 바쁜 해라 영지를 도통 들르질 못했다고 하였다. 이미 첫눈도 내린 겨울이라 예년보다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가서 영지 구경도 하고 그 김에 겸사겸사 결혼식 전에 그곳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자며 케이든은 그가 세운 계획을 내게 열심히 속삭였다.

또 다른 케이든의 친척들을 마주할 생각에 내가 마차에서부터 자세를 뻣뻣이 하며 긴장하자 그는 작게 웃으며 결혼 전에 인사는 한번 해 두어야 하니 내려가는 것이지, 굳이 애써서 잘 보일 필요는 없다고 내 등을 쓸어 주었다.

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굳은 몸을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케이든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영지에 도착한 이후 그가 왜 굳이 애써서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왕실의 사람들처럼 까다로운 사람들이 드물기도 했거니와 이곳에선 내가 그들보다 웃어른이었다. 인간관계니만큼 잘 지내면 좋기야 하겠다만 잘 보이려 호구를 자처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간의 무관심함과 거만함을 장착한 태도가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 케이든의 조언이었다. 그건 다행히도 내가 아주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지로 온 가장 큰 이유는 눈도장, 영지 시찰 등이 아니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영지에 온 후 나는 2주 정도만 바쁘게 돌아다니며 그의 친척들과 가신들을 만났고 그 후론 곧장 성에 틀어박혀 그와 노닥거리기만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성의 집무실에서 천천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케이든의 옆에서 나는 발을 까닥이면서 최근 취미가 생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원래 뜨개질 같은 것엔 별 흥미가 없었는데 영지에 와 길을 익힐 겸 돌아다니다 눈 내리는 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목에 맨 목도리를 본 순간 케이든의 목에 내가 직접 만든 목도리를 둘러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길로 성에 돌아오자마자 하나 떠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제법 재미있었다. 거기다 회귀가 완전히 멈추고 세상이 나를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 때문인지 내내 멈춰 있던 키가 몰아서 크기 시작해서 다리가 아픈 상황이었는데 앉아서 할 수 있는 뜨개질은 꽤 괜찮은 취미였다.

덕분에 겨우내 목도리도 떠 보고 장갑도 떠 보다 이제는 큰 도전을 할 차례란 생각이 들어 가방을 뜨는 중이었다. 케이든은 내 새로운 취미에 떨떠름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내가 다 뜬 후 그의 손에 쥐여 주는 새로운 물건들을 군소리 없이 착용해 주는 좋은 모델이었다.

그날도 케이든의 옆에 의자를 갖다두고 뜨개질을 하던 중에 뻐근한 목을 풀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당기던 중, 창밖의 나뭇가지가 보였다. 아직은 2월이기에 나뭇잎 하나 없이 휑했다.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예고하듯 아주 맑은 하늘이었다. 그 하늘을 보던 중 나는 이제 곧 3월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봄은 언제나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시작이자 반복된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계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아함이 담긴 부드러운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 주는 사랑을 바라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계속될 봄에서 내 곁에는 이 사람이 있어 줄 테니 더는 봄은 내게 공포가 될 수 없었다. 곧 다가올 봄을 넘어서 새로운 겨울이 와도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이 사람과 함께하겠지. 언젠가 악몽을 꿨던 밤에 그가 나에게 속삭였고, 평야로 가기 전에 내가 소망했던 미래처럼.

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케이든의 손을 잡았다. 당연하다는 듯 맞잡아 주는 손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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