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사랑으로 한 모든 것
스투라티아 평야는 현재 공식적으로 어느 왕국의 소유도 아닌 중립 지대의 땅이었다. 과거 몇몇 국가들이 이 평야를 욕심내고 차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땅을 차지한 국가는 30년을 넘기지 못하고 쇠락하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사람들은 신들의 평야를 욕심내어 저주를 받은 것이라 말하곤 했다.
정말로 신들이 그들의 땅을 인간들이 차지한 것에 앙심을 품고 저주를 내렸을 수도 있고, 스투라티아 평야의 상징성 때문에 서로 맞닿은 나라들끼리 맞부딪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가 얽힌 것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쇠락을 몇 번 경험한 나라들은 50년 전 공식적으로 스투라티아 평야와 땅이 맞닿은 나라들끼리 협정을 맺었다. 최소한의 관리 인원만 파견하고 이 땅엔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말이다. 내가 현재 지내고 있는 칼레 역시 스투라티아와 땅이 맞닿아 있는 협정 체결국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내가 스투라티아 평야에 볼일이 있어 가 봐야겠다고 알리자 케이든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었다.
나를 그곳에 혼자 보내고 싶지 않은데 케이든은 왕족이라 그가 스투라티아에 가는 것이 자칫하면 타 국가에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단순 방문이 큰일로 번질 확률은 얼마 되지 않지만, 케이든이 이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내가 케이든의 말에 그런 것까지 생각하느냐 감탄하자 케이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 코를 잡았다 놓았다. 그는 잠깐 잡은 것인데도 얼얼해 눈물이 다 나왔다.
그새 빨개졌을 코를 살살 문지르며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눈썹을 까딱이며 나 역시도 내년 4월에 있을 본식 이후로 완전히 왕실의 일원이 되니 머릿속에 제대로 넣어 두라 엄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였다.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그와 결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 볼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소망했다. 그가 말하는 미래가 정말로 펼쳐질 수 있기를.
케이든의 말에 새삼 볼이 붉어진 채 눈을 깜빡이며 알았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든은 영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변장하고 스투라티아에 함께 가는 방안까지 고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오랫동안 세워 온 계획의 끝이자 원작의 끝인 트리불라의 우두머리 검거 계획 날짜와 내가 스투라티아 평야에 가기로 계획한 날짜가 겹쳤다.
케이든은 영 아쉬웠던지 다른 날짜는 안 되겠냐고 내게 되물었지만 나도 원작의 끝이 되는 날 이전에 어떻게든 스투라티아로 가 봐야 했기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케이든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스투라티아 평야에 도착한 내 감상을 한 단어로 요약해 보자면 ‘의문’이었다.
곳곳에 신화시대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스투라티아 평야의 입구엔 신화시대의 유적을 본떠 만든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고증을 지켜 제법 그럴듯하게 만든 이 신전엔 어릴 적 한 번 와 본 적 있었다.
여덟 살 무렵 스승님의 손을 잡고 왔을 땐 어린아이가 잔뜩 고개를 젖히고 볼 정도로 웅장했던 신전에 대한 옛 기억은 과장된 것이었는지, 지금에 와서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그럭저럭 돌아볼 만한 큰 건축물에 불과했다.
신전이라곤 하지만 이곳의 본질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투라티아 평야를 찾는 관광객의 볼거리를 위한 것이었기에 신전은 신의 영광을 찬양하기보단 관광객의 볼거리에 치중한 느낌이 강했다. 하긴 땅을 떠난 허울뿐인 신보다 돈을 들고 있는 관광객이 더 중요한 법이지.
의문의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신전 안팎을 몇 바퀴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더 있어 봐야 시간 낭비라고 판단이 되어 입구 쪽으로 나오자 신전의 입구를 청소 중이던 관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볼일이 벌써 끝났느냐고 웃으며 물었다.
연구 목적이라고 둘러대긴 했어도 갑작스레 찾아온 나를 위해 기꺼이 신전 전체의 사람을 물려 준 관리인에게 조용히 묵례한 후 조용히 헌금통에 금화 주머니를 넣었다. 신전을 나서는 내 뒤로 요즘 스투라티아 평야에 비도 오지 않는데 번개가 내리치는 일이 잦으니 조심하라는 관리인의 말이 따라왔다.
신전을 나온 후 가만 멈춰 서서 앞을 바라보자 넓게 펼쳐진 평야의 모습이 보였다. 겨울을 맞아 갈색으로 시든 평야의 곳곳에 옛 유적의 조각상들과 건물 일부가 흩어져 있었다. 신들이 놀고 마시며 축복을 내리던 곳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땅은 황량했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곳곳을 살피며 바람조차 멈춘 평야를 거닐었다. 무엇이 있어서 나를 이곳에 부른 것일까? 원작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여기에 온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머릿속을 뒤늦은 후회와 번뇌가 뒤흔들었다. 느려지는 발걸음을 의식적으로 재촉하며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찌릿함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가 이곳에 있었다. 급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르는 곳을 바라보았다. 유적도 조각상도 무엇도 없는 평범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저곳에 무언가가 있었다.
멈추어 서 빈 곳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쪽지를 보낸 이가 저기에 있으리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눈에 비치는 황량한 곳으로 반 정도 걷던 중 기이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전신에 두르고 있던 모든 마법이 소멸하는 느낌. 마치 드넓은 바다에 빠진 손톱만 한 소금 덩어리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 가는 내 마법을 느끼는 순간 깨달았다. 신이 이곳에 나타났구나.
마법의 시작은 신의 힘을 흉내 낸 것. 마법의 근원을 직접 겪는 순간에 전신에 짜릿함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사나운 미소를 띠며 앞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던 평야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신의 공간이지만 신의 육체 그대로 이 자리에 직접 현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정도 공간을 만들려면 꽤 힘이 들었을 테니 온전히 현신할 정도의 힘은 부족하겠지. 대신 지상에 있는 신도 한 명의 몸을 빌렸을 것이다.
눈앞의 남자를 가만 뜯어보던 중 그 생김새가 낯익다는 걸 알아챘다. 며칠 전 나를 그 사이비 교단으로 끌고 갔던 그 사이비였다!
“너는…….”
“만나기 어려운 얼굴이 드디어 걸음 했구나.”
나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는 사이비의 눈을 보는 순간 저것의 몸에 신이 들어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밤하늘에 매달려 빛나는 별처럼 남자의 검은 눈 곳곳에서 별 같은 반짝임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니, 내 시선이 닿은 순간부터 남자의 전신에서 찬찬히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 땅의 존재가 아님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다 내가 아는 가장 단단한 사람을 따라 자세를 꼿꼿이 세우며 그를 흉내 내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단번에 나와 만나지 못했던 걸 보면 날 만나는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나 보지?”
녀석은 굳이 자기 신도를 보내 나와 접촉을 한 후 쪽지를 통해 이곳으로 불러내 두 번째 만남을 유도했다. 신들의 힘이 과거보다 쇠하였기에 지상의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조건이 복잡한 것이다.
“나와 접촉하기 위해선 동일한 신도를 통해 한 번은 미리 만나야 했나 보군. 빅터 밀쉐도 그대의 신도인가 보지?”
저것이 나를 불러내는 과정을 추론해 보니 최근 저 사이비 신도 말고 나를 굳이 한 번 더 불러내어 만나고자 했던 외부인. 빅터 밀쉐가 바로 떠올랐다. 케이든의 생일 연회에서 만났던 어수룩한 마법사. 그가 며칠 후 편지를 보냈을 때 가르침을 청하는 뻔한 내용이 예상되기도 했고 케이든이 편지가 온 것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길래 그대로 찢어 버렸는데 인제 보니 그것이 이자의 초청장이었던 모양이다.
하여간에 그놈도 마법사라는 게 고대의 신한테 홀려서 신도 같은 거나 되니까 성취가 그 모양인 거다.
내가 혀를 차고 있을 때 눈앞의 신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이전에도 초청장을 보냈었지.”
“그전에도?”
이건 짐작 가는 바가 도통 없어 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녀석을 보자 그는 얄밉게 웃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니킬, 빅터 밀쉐, 그리고 클로에.”
“클로에?”
“길드 사무소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신실한 신도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충격이 강타했다. 미친! 이상하게 마탑의 인장 반지는 안 되고 마탑의 증명서를 떼 와야 한다고 주장하던 그 직원! 마탑의 인장 반지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한 번 더 불러내기 위해 수를 썼던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깨닫자마자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너 때문에 내가!”
“네가 보인 추태가 어째서 나 때문이니?”
녀석이 태연한 어조로 얄밉게 팔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였다. 얄밉기 그지없는 행동에 녀석을 노려보다가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하며 뒷짐을 지었다. 그래, 지금 저 녀석과 다퉈서 내게 좋은 것이 없다. 진정하자. 리암 카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하며 녀석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알고 있지?”
“전부.”
“전부라고? 신들은 인간 세계에 그리 깊이 관여할 수 없을 텐데. 무슨 수로?”
내 말에 녀석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운명의 실 자락을 엿봐 세계의 운명을 고정한 인간의 이야기라면 다르지 않겠니?”
“운명을 엿봤다고?”
녀석에게 되물으면서도 무언가 머릿속의 퍼즐이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한 어린 마법사. 자신의 운명에 나를 끌어들인 리암 카터. 특정한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돌아가던 세계의 시간.
드디어 맞춰지기 시작하는 단서들을 정리하며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리암 카터가 이 세계의 운명을 엿봤나?”
“그래. 원래 세계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단다. 세계는 그 길을 따라 어디로든 향할 수 있지. 하지만, 리암 카터가 그중 한 갈래를 엿본 순간 그것은 이 세계의 미래가 되었단다. 고정된 것이지. 고정된 미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바꿀 수 없어. 세계는 자신의 길을 정했으니 그 길이 엇갈릴 때마다 그 바뀐 길을 용납하지 않고 원래의 길을 가기 위해 다시 시간을 되돌아가게 된단다.”
리암 카터는 세계의 운명을 엿봤고 그것 때문에 이 세계의 미래는 고정되어 버렸다. 하지만 녀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운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꾸고 싶어 했다.
리암 카터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 봤지만, 세계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는 일탈을 용납하지 않고 그때마다 시간을 되돌아갔다. 이 정도로 정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교활한 과거의 꼬마가 지운 채 넘겨준 기억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리암 카터는 무엇 때문에 운명을 바꾸려 들었을까? 내가 아는 ‘원작’이 떠올랐다. 그의 실패한 사랑을 보고? 아니, 딱히 이것 때문은 아닐 것 같았다.
리암 카터는 성공하지 못한 사랑을 엿봤어도 당장 와 닿지 않은 미래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대신 생각의 방향을 조금 바꿔 보았다. 그가 자신만큼 아끼고 사랑하던 것. 마법과 그의 스승 벨로니. 아.
리암이 무엇 때문에 운명을 바꾸려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가 엿본 운명에서 벨로니 스승님에게 일이 생겼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싸해졌다. 녀석의 모호했던 행보가 이해가 된 나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뒷말을 이으라고 턱짓하자 내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신은 건방지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흔쾌히 말을 이었다.
“모든 세계는 어떤 형식으로든 얽혀 있기 마련이지. 한 세계의 운명의 한 줄기가 다른 세계의 누군가에게 이야기의 영감으로 떠오르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적어 낸 한 세계의 운명을 함께 본 누군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의 인연을 맺게 되지”.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의 한 갈래가 적힌 이야기를 읽어서 이 세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말을 들으니 내가 ‘원작’을 알고 있었지만, 조직이 타 국가와 연관된 사실은 몰랐던 것이 이해가 갔다. 내가 아는 ‘원작’은 이 세계의 온전한 미래가 아니라 있을 수 있던 미래 중 하나였다. 더해서 내가 본 건 그것을 떠올린 이의 손에 의해 옮겨 적어지며 편집된 형태였으니 어느 정도 생략된 부분도 있었을 테고. 신은 내 질문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암 카터는 운명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이 세계에 속한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지. 세계에 속한 아주 작은 이가 무슨 수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를 바꿀 수 있겠니? 우리 역시 녀석이 시간을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헛된 발버둥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그 녀석이 예상외의 선택을 하더구나.”
“본인이 세계에 속해 있어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나를 불러들인 거군.”
“네 짐작대로란다. 녀석은 세계와 인연이 맞닿은 존재 중 자신과 가장 파장이 맞으면서 힘이 강한 존재를 억지로 불러들였지. 신선한 선택이었어. 그랬다간 자신도 잃기 마련인데 녀석은 기어코 해내더군. 그 후에 다른 세계의 인연과 동화되어 가는 과정도 흥미롭더구나.”
그는 희귀한 구경거리를 보는 눈으로 나를 훑었다. 그 시선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내 곱지 않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마다 새싹이 돋았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내 바로 앞에 다가온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왜 네가 현재의 시간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는지 아니?”
“글쎄 짐작 가는 바로는 케이든이 변수가 되어 나를 이 세계에 잡아 두었다고 추측 중이긴 하지.”
“그래. 그가 너를 돌아가는 운명에서 빼내어 이 세계에 붙잡아 두었지. 지난 시간 동안 그는 의도치 않게 시간이 되돌아가는 중심축이 되었고 그만큼 그가 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비대해졌단다. 그의 선택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지. 그가 너를 선택한 순간 세계가 이 시간에 네 자리를 마련한 거란다.”
케이든이 내게 내어 주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의 옆자리, 그가 제시했던 결혼, 그의 사랑. 그 모든 것이 나를 이 세계에 자리 잡도록 해 주었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 사랑, 내게 벌어진 모든 기적이 당신이 나를 바라봤기에 일어날 수 있었어요.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내리누르기 위해 잠시 아래를 바라봤다가 다시 눈을 들어 올려 신을 바라봤다. 케이든이 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소리는 정말 기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야기였지만, 저 녀석이 내게만 좋은 이 이야기를 해 주려고 나를 찾았을 린 없었다. 어쩐지 이어질 이야기가 예상이 가,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거겠지?”
“그래. 그가 아무리 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해도 결국 이 세계의 존재지. 세계가 돌아가려는 흐름은 개인이 발버둥 쳐도 결국 바꿀 수 없단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보기엔 다시 돌아갈 때가 머지않았구나. 네가 아는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까지나 버틸 수 있으려나?”
그의 말대로라면 길어 봐야 오늘, 혹은 내일이었다. 그동안의 악몽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주먹을 움켜쥐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나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 말이 짓씹듯 내뱉어졌다.
“본론을 말해. 고작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그 번거로운 짓까지 해 가며 나를 부른 게 아니잖아.”
“급하긴, 침착하렴.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단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말로 이루어짐으로써 세계를 재구성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니.”
아무래도 저 녀석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선 대략적인 것을 내게 설명해 주고 내 허락을 구하는 과정이 필요한 듯했다. 저 혼자만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녀석을 노려보자 놈은 천천히 연주를 이끄는 지휘자처럼 우아하게 손을 움직여 빛 무더기를 일으켰다.
그의 손을 떠난 빛은 둘로 나누어져 여름 계곡물의 색과 푸른 가을 하늘의 색을 가진 두 무더기로 분리되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빛 무더기는 곧 일정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움을 안겨 주는 푸른 계곡의 빛을 하늘의 색이 점점 덮기 시작하다 이내 한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곳엔 비대해진 하늘빛 무더기만 남아 버렸다.
가볍게 손을 내저어 빛 무더기를 없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리암 카터의 자아는 점점 약해지고 있지. 네가 이대로 더 시간을 돌아가다 보면 그의 자아는 약해지고 네 자아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란다. 몇 번까지 갈 것도 없지. 한 번만 더 시간을 되돌아가면 네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이 세계에 남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단다. 원래 모든 존재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속성을 지녔으니까. 지금 네가 이 세상에 남고 싶어 하는 것도 리암 카터의 자아가 뒤섞여 이 세상을 네 세상으로 여기는 영향도 분명 있지.”
그는 장난스레 덧붙여 물었다.
“네가 왜 이번 시간에선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봤니? 그동안의 시간과 뭐가 달라서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눈썹을 올리며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내 반응이 즐거운지 잠시 뜸을 들이며 흥얼거리다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그건 네가 42번의 시간을 이 세계에 지내면서 리암 카터가 이 세계에서 살아왔던 시간을 넘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단다. 드디어 리암 카터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거지.”
이번 시간에서 유난히 ‘나’의 충동이 자주 튀어나왔던 이유가 그것이었나. 그의 설명이 놀라운 한편, 제법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암 카터의 자아보다 내 자아가 더 강해지는 시기지만 리암 카터의 흔적으로 내가 붙들려 있는 시간대였기에 내가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다니.
기분이 묘해져 손과 손을 깍지를 껴 만지작거리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눈앞의 것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네가 내 사랑이 스쳐 가는 찰나의 순간이 얽혀 이루어진 기적 같은 일이란 걸 찬양해 주려고 왔을 것 같진 않은데.”
내 말에 녀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놈은 서운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좀 더 진지하게 들어 주길 바란단다. 내가 기껏 여기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게 해 줘야지 않겠니?”
“너도 어차피 자원봉사가 아니라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내려왔을 텐데 바라는 게 많네.”
“너나 리암 카터나 귀엽지 않기는 매한가지구나. 하여튼 말을 계속해 보자꾸나. 말했다시피 네 자아는 시간을 되돌릴수록 강해져 가고 있단다. 당연한 거지. 세계가 시간을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이방인을 내보내기 위해 네 이질성을 찾아내고 부각하고 있으니까. 너는 지금 기억이 제대로 없지? 시간을 몇 번만 되돌아가면 그 기억도 돌아올 거란다. 그렇게 하나씩 되찾아 가고 이 세계를 떠날 준비를 하게 되는 거지.”
말을 잠시 멈춘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두 팔을 허공에 펼쳤다. 신관들 특유의 소매가 긴 옷자락이 팔을 따라 늘어지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녀석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대로 원래처럼 시간이 지나간다면 너는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다. 언제 심술궂은 어린아이가 네게 장난을 쳤냐는 듯, 원래 네가 있었던 그 자리로 말이야. 그런데도 이 시간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니?”
놈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녀석이 무엇을 바라고 나를 불렀는지 깨달았다. 나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이었기에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었지. 아무 방해 없이 케이든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고, 그가 받아 줄 수 있던 이 유일한 시간을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나는 이 시간에 머물고 싶어. 방법을 알려 줘.”
한 번 더 시간을 되돌아가 원래의 세계에 대한 미련이 강해진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의 나는 여전히 리암 카터였다. 케이든을 사랑하고 그가 나를 받아 준 이 시간을 사랑하는 리암 카터. 내가 어떻게 이 시간을 떠날 수 있을까.
내 대답에 신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한 대답을 얻어 낸 듯 녀석은 빛으로 일렁이는 손을 내게 뻗었다. 그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보호자처럼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제안했다.
“그래, 네 짐작대로 방법이 있단다. 원래의 리암 카터는 할 수 없었지만 너는 이 세계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외부의 존재니까 가능한 방법이. 네 힘은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만 해도 세계를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질 것이란다. 아직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세계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는 충분하지. 그 힘을 우리에게 주렴. 그것으로 운명의 수레바퀴를 멈춰 주마. 어차피 지금의 너는 가지고 있어도 쓰지 못하는 힘이란다.”
길고 긴 위장 끝에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뱉어낸 녀석의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녀석이 나를 위하는 척 속살거린 수많은 기만의 말 사이에서 갈피를 잡으며 내 사랑을 떠올렸다. 지난날 세상의 이치에 미숙한 나를 붙잡고 계약과 사람에 대해 가르쳐 주며 그가 끊임없이 내게 해 주었던 말들을.
“모든 것이 그대를 위하는 척하는 이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닐 테니.”
‘내 사랑. 이번에도 당신이 옳았어요.’
그가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면 그를 끌어안고 입 맞추며 끊임없이 속삭였을 텐데. 당신의 말이 옳았노라고.
나는 단 하나의 아쉬움을 삼키며 천천히 눈웃음을 지었다.
“네가 맹세 하나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넘겨주지.”
“맹세?”
내 말에 녀석이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녀석의 반응 같은 건 못 본 척 조금 전의 녀석이 그랬듯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힘을 넘겨받은 직후 너희는 나와 케이든이 순리대로 죽는 순간까지 이 땅에 내려오지도 않고, 어떤 영향력도 절대 행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라. 그렇다면 얼마든지 넘겨주지.”
말을 들은 신은 언제 웃고 짜증을 냈냐는 듯 모든 표정이 지워진 얼굴을 하였다. 마치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나를 바라보는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제대로 짚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의 지워진 표정을 삼키듯 더욱 짙게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네 이름을 걸고 맹세해. 그러면 너희가 원하는 힘을 넘겨줄 테니까.”
녀석은 무기질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간을 흉내 내는 것을 그만두기라도 했는지 오르내리기를 멈춘 가슴팍과 단 한 번을 깜빡이지 않는 눈이 이질감을 자아냈다. 그는 꾸며 낸 다정함을 지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건방지구나.”
“나는 이제 실수하면 안 되거든.”
예상은 했지만, 뻔한 답변을 내놓는 녀석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신화시대의 끝이 맺어진 것이 천 년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그 시절의 영광 속에 머무르고 있구나. 나는 녀석의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했다.
“쉽지 않아? 너희가 땅에서 떠나간 지 천 년이 넘어갔는데, 인간의 생애는 길어야 백 년이지. 백 년만 더 지금처럼 지내면 그만인 일이잖아? 괜찮은 거래 아닌가? 고작 백 년간의 기다림으로 너희가 땅으로 다시 내려올 힘을 얻어 가는 건데.”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내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깊은 물 속에 잠겨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온몸의 숨이 빠져나가고 호흡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목을 붙잡고 급히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나 숨쉬기가 편안해지기는커녕 숨을 삼키는 순간마다 불과 재를 삼킨 듯, 목구멍이 불타오르는 고통이 엄습했다. 어떻게든 그 고통에서 도망치고자 나는 손톱을 세워 내 목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내 목을 긁는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몸 안이 불타오르고 물에 잠긴 듯 숨이 막히는 미지의 고통에 어떤 통증도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보호하던 내 몸과 같던 마력은 이 일대에서 모조리 소멸한 듯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눈이 뒤집히는 충격에 나는 목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어떻게든 감각을 되찾아 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흘러가는 액체의 희미한 감각이 느껴질 때야 나는 쇠 긁는 듯한 목소리나마 간신히 꺼내 올 수 있었다. 육체를 가득 채운 고통에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 처참한 목소리로 나는 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힘, 만 주면 된다고? 운명이 특이해서 주목했다고? 거짓은 아니겠지만 완전, 한 진실도 아니잖아?”
“참으로 건방져.”
“너, 희가 나를 주목한, 건 내가 콜루나처럼 너희를 공격할까 봐서였겠지!”
깊은 바다에 어느 날 나타난 이계의 생명에서 잉태되어 태어난 괴물 콜루나들. 이계의 생명이 배어들어 세계 속에서 날로 존재감이 커지는 리암 카터. 신들의 머릿속 생각이야 뻔했다.
‘저것이 완성되는 날 천 년 전 괴물들이 그랬듯 신들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면 어떡하지?’
왕성했던 그 영광의 시대에서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했던 괴물들이었다. 그때보다 쇠락한 신들의 힘으론 새롭게 탄생할 이계의 생명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 리암 카터를 주목한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도전하는 어리석지만 용감한 옛 영웅 같은 인간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리암 카터가 이계의 생명을 이 땅에 데리고 온 순간, 그들은 더는 구경거리를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저 이계의 생명을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죽여야 하나?’
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젯거리가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이계의 존재는 시간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신들이 아무리 저것을 죽여 봤자 저것은 세계의 보호 속에서 다시 시간을 되돌아가고 그렇게 저것은 죽지 않은 채 이계의 힘은 더욱 커질 뿐이었다.
그들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결책이 나타났다. 사랑, 흔하지만 언제나 놀라운 기적의 이름이었다.
이계의 생명이 사랑에 빠져 처음으로 운명의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신들은 이것이 기회임을 깨달았다. 저 이계의 생명이 더 커지기 전에 잠재울 유일할 기회. 동시에 그들은 아쉬움을 느꼈다. 저 이계의 생명이 가진 힘은 그들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천 년 전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기회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접근하고자 하였고, 나에게 기만을 속삭였다. 눈앞의 기만자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들과 손을 잡아야 하지만, 절대 이들에게 힘을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됐다. 지난날의 공포에 잠식된 기만자들은 결국 끝에선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수천 개의 바늘이 혀를 찔러 대는 것 같은 고통이 일었다.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쾌한 목소리를 내고자 혀를 움직였다.
“너는 시간의 끝에서 내 힘이 극, 대화 됐을 때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만 말했지만, 그, 게 아니잖아? 너희도 할 수 없는 세계와 세계를 오가는 힘을 가진다는 건 너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진, 윽, 존재가 이 세계에 새롭게 탄생한다는 소리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해서 그 쇠락, 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현신한 거고.”
말을 할 때마다 입 안에서 피가 터져 나와 땅바닥에 피가 주룩 흘러 대었다. 온몸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입 안을 가득 채운 비릿한 향이 역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지? 네 이름조차 내게 밝히지 않은 채로 힘을 가져가려 드는 너를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다! 너희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로 증명해!”
내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녀석이 손을 뻗었다. 좁고 험준한 계곡 사이로 바람이 빨려 들어가듯 내 몸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끌려갔다. 그것이 내 목을 붙잡자 인간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미끈한 비늘 같은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건조한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 보여 우스웠다.
그가 이렇게 나올 것은 맹세하라 제안했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었다. 신들은 강했기에 오만했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들을 용서치 않았다. 힘을 잃었다고 해도 나 같은 마법사는 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름을 건 맹세를 하라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해내야만 했고, 해낼 수 있었다. 이깟 몸의 통증은 시간을 되돌아갈 때마다 느끼던 절망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쯤 되니 시간을 되돌아갔던 과거의 고통이 이 순간을 위한 예행연습 같아 고맙기까지 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우스워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휘자 내 꼴을 보던 그의 얼굴에 더욱 선명한 노기가 떠올랐다.
“건방지구나. 어린 것아. 정신을 차리렴.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너란다. 네가 지금 이후로 시간을 멈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니? 네가 가진 건 그저 가능성일 뿐이야. 우린 네가 가진 가능성을 보고 기회를 제시해 줬을 뿐이지.”
그 말을 듣고 있으려니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입 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 내며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목을 붙잡은 것은 잘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 같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미지의 것에 시선을 두며 입을 움직였다.
“아쉬운 건 나라고? 사실 그렇지.”
말을 늘어놓을수록 흐려지는 눈앞에 반항하듯 나는 다시 한번 소리 내 웃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명심해 둬, 네가 지금 맹세하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반복될 시간 속에서 절대 힘을 건네지 않을 거다. 네가 지금 나를 죽이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겠지. 앞으로 계속될 시간 속에서 네가 날 죽이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일 거다.”
다시 한번 온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이 일었다. 이 순간이 실패하면 앞으로 반복될 시간 속에서 실수로라도 이 고통을 잊지 않도록,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뼛속 깊은 곳에 새기며 나는 악을 썼다.
“하지만 지금 네가 날 죽이면 시간의 끝에서 내가 온전히 힘을 얻은 순간 신화시대의 종말을 재현할 거다! 가장 깊은 바닷속에 너를 처박고 이 세계의 가장 높은 산 위에 너희의 심장을 내걸 거다. 콜루나들이 그랬듯이. 영광의 시대 같은 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도록!”
말이 끝마치자마자 온몸이 찢겨 나갔다. 팔이 힘없이 땅에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조차 꿇어 버티지 못하도록 난자된 전신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을 적셔 갔다. 현실이었다면 수백 번은 죽고도 남았을 상처지만 이곳이 녀석의 공간이기에 아직도 숨을 부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조차 우스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죽이기엔 꺼림칙하고 살리기엔 건방지다는 건가.
희미한 숨을 몰아 내쉬는 내 위로 그림자조차 없는 기만자가 다가왔다. 지금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시간의 끝에서 자신들을 가장 비참하게 죽이겠노라 맹세하는 어린 이계의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으며 확신이 들었다. 이것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부정하는 그 약간의 가능성이 두려워서.
잠시간의 대치 끝에 그가 손을 뻗었다. 내 몸이 천천히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산산이 찢겨 나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살갗이 서로 달라붙고 근육 위로 새로운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듯 피로 젖은 흙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에 천천히 힘이 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연약하기 그지없는 힘이었으나 몸을 조금이나마 일으킬 정도는 되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손으로 땅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팔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휘청거리며 간신히 일어서자 여전히 잘 만들어진 사람 형태의 인형에 가까운 얼굴로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말을 시작하자 인형이 입을 움직이는 것 같은 꺼림칙함이 들었다. 녀석이 신화시대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건방진 것아. 네가 이겼다. 네 부탁을 들어주마. 나 유스타스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이계의 힘을 받아 가 세계의 운명의 굴레를 멈추어 주며 힘을 받는 직후부터 모든 신은 리암 카터와 그의 반려 케이든 아미르가 순리대로 죽기 전까지 지상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 또한 맹세하라, 이 세계의 이 시간에서 완전한 끝을 맺을 것을.”
녀석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공중에 금빛으로 글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옛 언어로 쓰이는 글씨를 차분히 읽어 나가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 카터 역시 맹세한다. 그대들에게 힘을 넘겨준 이후 이 시간 속에서 내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계약은 체결되었다.”
내가 한 맹세 역시 마찬가지로 허공에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끝낸 순간 하얗게 빛나는 글자 속에서 녀석의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동안 느껴 본 적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나와 함께했던 힘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던 힘.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그것 하나만이 사라졌는데도 이유 없이 허기가 졌다. 나는 허전함에 명치께를 문지르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나와 함께 있던 신은 힘을 가져간 순간부터 이곳에서 존재가 사라졌다. 신을 받아들였던 신도의 몸조차 함께 사라진 채였다.
하긴, 평범한 인간이 신을 받아들이고서 멀쩡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신을 받아 낸 순간부터 저 육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니킬이라는 저 신도가 그것을 알고 신을 받아들였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가 있던 공간이 무너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신이 세계와 분리하기 위해 세워 둔 장막이 허물어지며 그 사이로 차가운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멍하니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차갑단 느낌은 있었지만, 자세한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손끝의 감각이 아쉬웠다. 처음으로 겪는 시간의 눈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는데 그것은 어려울 듯했다. 케이든이 보고 싶어졌다. 그가 있는 곳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어서 케이든을 보고 싶었다. 그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이 사랑으로 한 모든 것이 나를 구했노라고. 나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을 품으며 완전히 사라진 장막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에게로 돌아가야지.
황량한 평야 위로 끊임없이 내리는 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조금씩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평야의 초입으로 가는 길이 제법 험했다. 발을 뻗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와 몸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차가움이 낯설었다. 그러나 이 낯섦조차 기꺼웠기에 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첫눈이 기꺼운 것과는 별개로 이 상태로 당장 칼레까지 돌아가는 것은 무리겠단 확신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힘을 넘겨주면서 마법도 못 쓰게 될까 봐 내심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내 주위를 흐르는 마력의 흐름은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마력으로 몸을 보조해서 걷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몸 상태가 워낙에 별로라 까딱했다간 눈밭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지도 모르겠단 위기감이 들었다.
우선 급한 대로 스투라티아의 초입에 있는 신전에 몸을 의탁하게 거기까지만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억지로 몸을 이끌어 가던 중 흐릿한 시야로 말을 탄 누군가가 이쪽으로 서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눈밭 위를 달리는 전신이 까만 말은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길거리 화가가 멋들어지게 그려 낸 풍경화 같기도 하였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말 위에 탄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누군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찌푸리던 찰나 평야에 그이의 다급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암! 리암! 그대, 괜찮은 건가?!”
“…케이든?”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느릿하게 이어지던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고 서 있자 말을 탄 남자는 곧 내가 있는 곳에 도달하였다. 급히 말에서 내리는 남자의 얼굴이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이곳에 그냥 오면 안 되니 변장이라도 해야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케이든은 정말로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한 채로 나타났다. 평소와는 달리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근사한 그림 같아 눈을 깜빡이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내 몰골을 본 그가 비명 같은 경악을 내뱉었다.
“대체 누가! 너를 이렇게!”
“아. 괜찮아요. 보이는 것만큼 심하지 않아요.”
“피가 이렇게 났는데 심하지 않다고?”
케이든의 손이 내 몸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살짝 허공을 헤매다 내 어깨를 아주 살짝 붙잡았다. 그가 내 뒤편과 나를 번갈아 보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살짝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자리마다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하필 하얀 눈 위에 묻은 것이라 상처가 더 심해 보이는 듯했다. 녀석이 나를 치료해 주긴 했지만 이미 흐른 피는 없애 주지 않아서 걸으며 흘러내린 것이지 지금도 상처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 괜찮은데 케이든이 보기에는 아니었나 보다.
그가 걱정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오늘은 기쁜 날이니 웃었으면 했다. 나는 얼굴만큼은 봐 줄 만하길 속으로 빌며 될 수 있는 한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등에 손을 올려 나를 마주 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자랑하듯 속삭였다.
“이젠 다 괜찮아요. 전부 다요.”
“네가 평야에 들어가고 일주일이 지났어. 나는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그가 말끝을 천천히 흐렸다. 소리 없이 나를 꽉 끌어안는 몸짓에서 그가 느꼈던 두려움이 느껴졌다. 신의 공간 속에서 시공간이 흐트러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체감으론 하루도 안 된 것 같은데 바깥은 일주일이 지나 있었으니, 케이든이 놀라 달려올 만도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명하는 대신 그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체온을 느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고,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한 모든 첫 순간을 그와 함께하게 될 것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나는 단 한마디만을 간신히 내뱉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케이든.”
━━
리암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색색거리는 리암의 볼에 아주 조심스럽게 손등을 올려 본 케이든은 여전한 열기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루가 꼬박 넘어가도록 열이 내려갈 기미가 안 보였다.
의사를 불러 놓은 상태지만 스투라티아와 근처 마을 간엔 거리가 있는 편인 데다가 눈까지 내려 의사가 도착하려면 몇 시간은 더 필요했다.
급한 대로 해열제를 한 번 더 먹이기로 한 케이든은 나무 수저에 해열제를 따라 리암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다 삼키지 못할 걸 고려해 정량보다 더 많이 따른 그의 판단이 옳았다. 해열제를 반은 넘겼으나 반은 삼키지 못하고 흘려버린 리암의 얼굴을 닦아 주며 케이든은 리암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케이든이 왕족치곤 유별나게 잔일은 스스로 하는 편이라고 해도 그는 본디 시중을 드는 것보단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에게서 당연하다는 듯 병간호를 끌어내다니 리암 카터는 참으로 재주도 좋았다. 사실, 이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리암이 당장 일어난다면 시중 따위야 백 밤도 더 들어 줄 수 있었다.
열이 올라 한낮의 햇빛에 달아오른 사막의 모래처럼 뜨거워진 몸과 창백한 앳된 얼굴이 오늘따라 연약해 보였다. 객관적으로 리암은 건장한 사내였고 열이 좀 올랐다고 해서 그 덩치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지금의 리암은 건들면 부서질 것처럼 가냘파 보였다. 케이든은 리암이 걱정스러운 와중에도 돌이킬 수 없는 제 눈의 콩깍지에 탄식을 금치 못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떠도 침상 위 리암의 연약한 자태는 변하지 않아 케이든은 한숨을 삼키며 눈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신전이 스투라티아를 찾는 관광객들의 여관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쓰러진 리암을 수습하는 것도 한세월이었을 것이다.
리암이 당장 깨어날 것 같지 않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방을 살펴보기로 했다. 원래대로면 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상한 것이 없는지 살폈어야 했는데, 밤새 고열이 올랐다가 들판의 눈처럼 한순간에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는 리암의 몸을 돌보느라 그럴 정신이 없었다.
방은 신전에 딸린 것이라 그런지, 청소가 잘되어 있긴 해도 가구의 구성이 단출했다. 외투 두 벌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작은 옷장과 덩치가 있는 성인 남성이 눕기엔 조금 빠듯한 크기의 작은 침대 두 개와 벽에 달린 거울이 다였다. 수상한 걸 숨겨 놓기도 어려운 구조였지만 혹시 몰라 샅샅이 뒤져 보던 케이든은 거울에 비친 낯선 모습에 순간 흠칫했다가 곧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한 거울 속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스투라티아에 오면서 부러 머리카락 색을 바꿨었다. 자신의 밝은 금발이 꽤 튀는 종류의 것임을 케이든 역시 알고 있었다. 칼레에서야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머리카락 색을 바꿀 생각을 한 적 없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무슨 꿍꿍이를 품고 온 것도 아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런 땅에 칼레의 방계 왕족이 방문했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확률은 낮았지만, 문제란 건 생기려면 어떤 작은 부분에서도 얼마든지 터지는 법이었다. 철저히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바뀐 머리 색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피 칠갑이면서 눈은 정직하게 자신의 머리를 보며 빛나던 리암이 생각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녀석은 그 와중에도 내 머리를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신경이 참 굵었다.
그의 염색에 순수하게 감탄하던 리암을 떠올리다가 전날의 그 처참한 몰골이 덩달아 떠오르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케이든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어 갔다.
스투라티아의 볼일이 금방 끝날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리암은 그 장담이 무색하게도 케이든의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보다 늦어지는 귀가에 온갖 걱정이 다 들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설마 ‘돌아간 건가?’ 하는 걱정부터 ‘이 녀석이 설마 도망갔나?’ 하는 실체 없는 망상과 분노까지 일기 시작하자 케이든은 결국 직접 스투라티아로 오기로 했다. 모든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본인의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트리불라의 잔당 처리 및 후속 조치 또한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만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작전의 지휘자나 마찬가지인 케이든이 며칠간 몸을 뺀다고 하니 수사대에서 반발이 제법 있었다.
케이든 역시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리암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비합리적인 결정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를 재촉하는 불길한 느낌이 그를 기어코 스투라티아 평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은 이해를 뛰어넘는 법이었다. 스투라티아 평야에 도착한 케이든이 마주한 것은 평야 전체를 가득 채운 오묘한 빛의 장막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짙고 옅은 형형색색의 빛이 평야 전체에 일렁이는 장면은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에 당혹스러워 스투라티아의 입구에 있는 신전의 신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물으니 그는 황홀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신께서 이곳에 임한 것이 분명하다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 평소였으면 허황하다 넘겼을 단어가 그날따라 유독 신경 쓰였다. 리암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과 더불어 생각하니 저 빛의 장막이 신이 임재했다는 증거라는 신관의 소리를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신관에게 리암에 관해 물으니 신관은 나흘 전 리암 카터가 신전을 살펴보았고 그가 스투라티아 평야로 들어간 직후 평야에 빛의 장막이 임했다 진술하였다. 그러며 리암 카터가 신께 선택받은 것이 분명하다 늘어놓는 소리가 불쾌해 케이든은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관의 진술을 들은 후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평야를 수색해 보기로 했다. 나흘 전 평야로 들어간 리암과 나흘째 이어지는 빛, 분명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수색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야를 가득 메운 빛의 장막 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잠시간은 앞으로 향하는 듯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평야의 입구로 나와 있었다. 마치 스투라티아가 그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수색에 진전은커녕 부하들의 불안감만 커져 케이든은 수색을 잠시 중단하였다. 저 수상한 빛의 장막이라도 거두어져야 수색이 가능할 것 같아 마탑에 협조를 구하는 임시 공문을 보내고, 부하들을 주변 마을에 보내 정보를 알아보면서도 케이든은 평야를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부하들은 난처한 얼굴로 케이든에게 우선 돌아가서 준비를 다시 한 후 돌아오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하였다. 하지만 케이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금만 더 살펴보지.
언제까지 이 텅 빈 평야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는 해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고 빛은 언제 거두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빛이 거두어진다면? 저 속에서 리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쩌면’이라는 가정이 케이든의 발목을 잡았다.
하루, 이틀, 사흘. 온종일 평야를 바라보며 피가 마른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원치 않게 체험하며 케이든은 많은 생각을 하였다. 돌아가면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수사대 일을 다른 수사관들에게 분담해 놨긴 해도 그가 최종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 같았으니까.
영지의 일도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겨울철에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산에 조치를 취해 놔야 했다.
그동안 수사대 일이 바빠 리암을 아미르 성에 데려가지 못했다. 리암에게 아미르 성을 구경시켜 주고 그 김에 다른 친척들과도 인사시켜야 했다. 리암, 리암이 돌아간 것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저 빛 속에 리암이 없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나는.
생각의 끝은 언제나 리암이었다. 리암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혹시라도 죽었으면 어떡해야 하지? 이런 종류의 미지는 그로서는 낯선 것이었다. 케이든은 빛이 거두어지기를 기다리며 자신이 맞닥뜨린 새로운 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죽는 것은 케이든과 아주 거리가 먼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무책임한 행위였다. 그렇다면 평생을 지금 같은 절망스러운 감정을 안고 살아가야 하나?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끔찍한 삶 아닌가.
케이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리움에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감정적이며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새삼스럽게 놀랐다. 뭐든지 겪어 봐야 안다더니, 아버지도 이런 감정이셨을까.
그가 본인도 모르게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낭만적 기질에 감탄하면서도 우습다 자조하던 그때, 평야를 가득 메웠던 빛의 장막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평야의 초입에서 빛을 바라보고 있던 케이든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급히 말에 올라타 평야로 달려갔다.
지난 며칠간 케이든을 거부하던 평야는 드디어 그의 출입을 허락해 주었다. 이레 동안 평야에 떠올라 있던 것이 꿈속의 광경이었다는 듯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빛 속에서 케이든은 다급히 한 사람을 찾았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야를 헤매던 케이든은 지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듯 원하던 것을 결국 찾아내었다.
저 멀리서 천천히 비틀거리며 눈 위에서 걸음을 옮기는 검고 붉은 사람, 그 모습을 인지하자마자 저 사람이 리암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급히 그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간 케이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리암의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다그침이 흘러나왔다. 피투성이에 생채기가 가득한 얼굴,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몸. 고문의 흔적이 분명했다. 대체 누가!
말에서 급히 내려 리암을 붙잡으려 했지만,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힘주어 잡는 순간 리암이 그대로 쓰러져 내릴 것 같아 망설이다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이 벌벌 떨렸다.
그가 걸어온 흔적마다 피가 흘러 새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데도 리암은 자신은 괜찮다며 활짝 웃으면서 케이든에게 매달려 왔다. 그대로 그가 품에 고꾸라져 숨을 멈출 것 같은 착각에 케이든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리암에게서 짙고 비린 피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망설이다 그를 마주 안자 그는 케이든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이 순간에도 어리광을 부리는 리암의 모습에 우습게도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속삭였다.
“이젠 다 괜찮아요. 전부 다요.”
이 몰골을 하고선 이젠 전부 괜찮다고 하는 말에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너는 이렇게 난도질당하고도 웃을 수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를 붙잡고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아픈 그를 붙잡고 그간 있었던 일을 캐묻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네가 평야에 들어가고 일주일이 지났어. 나는 네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순간적으로 내뱉어진 말은 어쩌면 지난 3일간 리암을 기다리며 초조했던 시간에 대한 어리광일지도 몰랐다. 케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서 느껴지는 연약함에 입술을 다물었다. 이렇게 다쳐서 돌아온 리암에게 자신의 걱정을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대신 그는 리암을 끌어안은 손길에 힘을 더하였다.
리암이 품 안에서 작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케이든을 마주 안은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 몸을 움직여 케이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든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그사이에 소년의 얼굴이 가시고 어엿한 청년의 얼굴을 한 리암이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년의 굴레를 탈피한 어린 연인은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케이든.”
케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비겁한 어른은 어린 연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재차 끌어안았다. 이제는 그를 어디에도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민망해져 실소를 지었다. 순간의 감성에 취해 그 생각을 리암에게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분명 리암은 좋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붕붕 끄덕였을 테지만 별로 바람직한 어른이 할 행동이 아니잖은가.
그러고 보면 리암은 나다니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녀석이 어쩌다 나갈 때마다 큰 사고를 치고 돌아오곤 했다. 부디 이번의 외출이 그가 치는 사고의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아미르 공작이 어린 신랑을 집 안에 구속하고 지낸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케이든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려 리암을 뉜 침대로 되돌아갔다. 방 안에 이상한 흔적은 없는 것 같으니 리암이 언제고 깨어나면 볼 수 있도록 그의 곁에 있을 차례였다.
사랑한단 말 이후 헤실거리며 웃던 리암은 자신을 붙든 케이든에게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 잠시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후 정신을 잃었다.
케이든은 자신의 품 안에서 힘없이 늘어진 리암의 몸을 붙잡은 채 그 자리에 멈추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떨리는 손으로 리암의 맥박을 확인한 케이든은 리암이 잠시 기절한 것임을 파악한 후 불덩이 같은 몸에 기함하여 곧장 그를 말에 태우고 이곳으로 되돌아왔다.
신전에 돌아와 눈과 피로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히며 케이든은 이상한 점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리암의 몸은 피범벅이었지만 몸에는 그만한 피를 남길 만한 상처는 없었다. 상처였던 것은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관리를 잘해 주면 사라질 생채기 수준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해친 후 상처를 낫게 한 것이 분명했다.
케이든의 예리한 눈은 그것과 동시에 몸에서 보이는 몇몇 자상의 흔적들과 약한 화상 흔적들, 그리고 찢어졌던 흔적들을 찾아내었다. 그의 몸의 상처들을 훑으며 케이든은 리암이 며칠간 평야에서 펼쳐졌던 빛의 장막 속에서 무슨 일을 당했을지 유추해 보다 눈을 감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리암은 엄살이 심한 녀석이었다. 케이든이 보고 있으면 종이에 베인 작은 상처에도 울상을 짓던 녀석이 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고도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
케이든은 신관이 그렇게 황홀하게 이야기하던 신이란 녀석이 저주스러웠다. 리암이 신에게 선택받은 게 분명하다고? 그의 앞에서 한 번만 더 그딴 이야기를 했다간 그 입을 찢어 버리겠노라 다짐하며 케이든은 리암을 붙들고 울었다.
케이든은 리암이 언제쯤 눈을 뜰지 가늠하며 그의 창백한 뺨을 매만졌다. 늘 건강하게 혈색이 돌던 뺨은 간데없고 그저 시체같이 창백한 모습이 가여웠다.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케이든은 조심스럽게 리암의 왼손을 끌어다가 깍지를 꼈다. 그가 깨어났을 때 혼자가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리암의 손을 마주 잡은 케이든은 그치지 않고 지루하게도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리암이 깨어나도 눈 때문에 한동안은 여기 머물러야겠군. 이번 일만 마무리 짓고 수사관 일은 잠시 쉬어야겠어. 원래 계획대로 그만둬도 괜찮을 테고. 겨울 동안은 영지에 내려가서 이래저래 방해받지 않고 리암의 회복에만 전념하는 게 좋겠지.
흘러가는 잡념 속에서 케이든은 작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암이 사라졌다면, 이라는 두려움으로 시작하는 잡념이 그사이에 사라진 것이 느껴져서였다.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중에 다 알려 준다고 했던가. 그 말에서 느껴지는 리암의 희망이 케이든에게도 꽤나 감명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해열제의 효과가 도는지 아까보단 열이 내린 리암의 체온을 느끼며 깍지를 낀 리암의 손등에 입 맞췄다.
“이제 추리는 지쳤으니까, 어서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의 입으로 말해 줘.”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곧 일어날 것을 알리듯 한결 평온해진 숨소리를 들으며 케이든은 눈을 감았다. 어서 이 말썽꾸러기가 일어났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