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사이비와 5골드
내가 말없이 혼자 조직에 쳐들어가는 바람에 케이든이 잠시 화냈던 사건 이후로 무척이나 바쁜 나날이 이어졌었다. 이 기간에 사소하게는 연회장에서 짧게 인사를 나눴던 빅터 밀쉐가 한번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왔고, 크게는 아비가일 공주의 추천장을 작성한 일이 있었다.
저택에 온 편지를 모아 온 쟁반 위, 유일하게 수신인이 다른 푸른빛 편지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집사가 건네주는 빅터 밀쉐의 편지를 내가 받아 들자 케이든의 못마땅한 시선이 바로 편지에 꽂혔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편지를 번갈아 보는 행동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운을 폴폴 풍기는 그가 조금 귀여웠다.
편지 내용이야 어차피 한번 가르쳐 달라는 뻔한 내용일 테고, 케이든의 ‘싫어 리스트’에 등재된 사람과 굳이 교류할 필요는 없었기에 편지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 북 찢으니 케이든이 편지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어떡하느냐고 타박하면서도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요즘 일 때문에 바쁜 케이든이 작게나마 즐거워할 만한 일을 만들어 준 빅터 밀쉐에게 조금 고마워졌다.
사실 이때까지의 나는 꽤 한가했었다. 원래도 나는 저택에서 가장 한량처럼 지내는 사람이었고, 조직에 단신으로 쳐들어간 이후 또 독단 행동을 하지 않는지 케이든이 나를 곁에 두고 감시했었기에 그의 곁에서 노닥거리다 심심하면 마법서나 읽으면서 지내는 게 내 생활의 다였다.
그러나 빅터 밀쉐의 편지가 도착한 후 며칠 뒤 저택에 도착한 편지 하나로 내 일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왕비가 나를 궁에 초대한 것이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친목도 다질 겸 이야기를 한번 나누자는 초대장을 읽다가 ‘귀찮은데… 그래도 가야 하겠지……?’ 싶어 케이든을 보니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계산하다가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리암, 정말로 아비가일에게 추천장을 써 줘도 그대는 괜찮은 거지?”
“네에. 근데 어차피 추천장을 받는다고 볼 시험을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사실 왕실에서 왜 이렇게 추천장에 전전긍긍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내 말에 케이든이 신기한 기색으로 더 자세히 설명해 보라 하였다. 마탑은 워낙에 알려진 것이 적고 시험에 관해선 더더욱 유출된 것이 적어서인지 그도 내 이야기가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마탑은 합격자 한 명을 뽑기 위해선 시험관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한 구조예요. 보통은 열 명 정도가 시험관으로 배정되니까 그중 최소 여섯 명의 동의가 필요하겠네요. 추천장을 받은 사람에 한해선 시험관 한 명 몫만큼의 인정을 이미 받았다고 여겨서 한 명만큼의 동의가 부족한 건 봐주죠.”
“굉장히 까다롭군.”
“네에. 마탑의 예산은 여러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채워지니까 수준 미달인 사람을 뽑을 순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짰다고 하더라고요.”
“항간엔 추천장을 받으면 시험 과정이 조금 생략된다고 하던데?”
“추천장을 받았다고 해서 생략되는 시험은 그냥 기초 시험 같은 수준이에요. 이 사람이 마력이 충분한가, 마법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나 같은 시험이요. 하여튼 이런 구조 속에서 합격자를 뽑기 때문에 응시자가 수준 미달이면 절대 못 뽑혀요.”
“그런데 마탑의 마법사들은 유난히 추천장을 써 주길 꺼리던데? 그래서 나도 그대에게 거듭 묻는 것이고.”
“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아비가일 공주가 케이든의 사촌이 아니라면 안 써 줬을 거예요.”
사실 지금도 ‘이걸 써 주면 케이든과의 결혼 과정에 왕이 덜 참견하겠지…….’라는 속내로 써 주는 거니까.
“근데, 그게 아비가일 공주가 수준 미달이라서 안 써 주겠단 의미는 아니에요. 추천장을 써 준 사람이 시험에 떨어지거나 하면 나중에 마탑의 교수직 지원이나 연구비를 요청할 때 감점 요소가 되거든요. 그런데 어지간한 사람은 합격할 확률보단 떨어질 확률이 훨씬 높은 시험이니 그냥 처음부터 안전하게 아예 안 써 주는 거죠. 저야 뭐……. 당장은 저런 거에 지원할 생각이 딱히 없으니까요.”
“흠……. 그대가 보기엔 아비가일이 합격할 것 같나?”
“글쎄요? 제가 시험관처럼 공주의 모든 능력을 확인해 본 건 아니라……. 그래도 시험관으로 이상한 사람만 안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문제는 마탑의 마법사 중엔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신학 교수인 해럴드는 시험관으로 들어가 2년 연속 응시자 전원에게 낙제를 부여했다가 정말로 응시자의 역량을 제대로 측정해 보았고 그에 따른 점수를 부여한 것이 맞는다는 맹세를 제출해야 했다.
그때 그가 분에 차 ‘벨로니는 2년 동안 다섯 명한테 합격을 줬는데 나나 쟤나 다른 게 뭐냐!’라고 성낸 것이 기억난다. 스승님은 해럴드의 말에 코웃음이나 치셨지만 말이다.
케이든이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듯해 생각난 김에 이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더니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의 반응에 의아해져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생각을 마친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당부했다.
“절대 왕비 전하께는 그 이야기를 하지 말게. 은근슬쩍 아비가일의 합격 가능성을 떠보실 텐데 그대는 시험관으로 참여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감이 안 잡힌다고만 말하고. 알았지?”
“네에. 근데 왜요?”
“솔직하게 그걸 전부 말하면 최대한 대가를 받아 내기가 어렵잖나.”
그는 친척 동생의 마탑 합격 여부보단 왕비 전하께 뜯어낼 대가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듯했다.
내가 여러모로 불신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척이나 당당한 태도였다.
“대가라고 하니까 그대가 조금 오해하는 것 같은데, 소소한 성의로 말을 바꾸지.”
“그게 그거 아니에요?”
“추천장에 대가를 받다니 그건 마치 뇌물 같잖나? 성의는 그저 왕비 전하의 호의로 질부에게 보내는 감사 표시지.”
귀족의 기본 소양은 말장난이라더니,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반응을 본 케이든이 크게 웃으며 그제야 제대로 설명해 주었다.
“원래 왕족의 혼인이 있으면 예비 부부와 왕비 전하가 자리를 가지는 게 전통이네. 그 자리에서 왕비 전하께서 그 상대에게 무슨 선물을 하는지가 곧 왕실이 그 사람에게 취하는 호의의 정도를 나타내지. 그 선물의 귀함에 따라 귀족들은 그 사람을 존중할 수준을 정하곤 해.”
“아! 그래서 왕비 전하의 호의를 사야 한다는 것이군요?”
케이든의 말을 들으니 그가 왜 이리저리 재 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국인에 평민인 새로운 아미르 공작 부인이 귀족들 사이에 그나마 수월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왕비가 내게 주는 선물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 내가 국왕 전하를 위해 수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에 더해서 왕비 전하께서는 아비가일의 추천장 때문에라도 그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실 테니 괜히 섭섭하게 구시진 않겠다만, 괜한 불씨는 제공하지 않는 게 좋지.”
“이해했어요.”
“똑똑하기도 하지.”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그가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것에 내 볼이 붉어지자 그가 작게 웃었다.
“추천장의 대가를 금화나 보석 같은 개인 재산으로 받을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 받으면 여러모로 모양새도 좋지 않고, 그대는 나와 오래오래 살 것이니 장기적인 면에선 이렇게 받는 게 좋을 거야.”
“케이든이 보기 좋은 대로 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죠. 부인.”
“으아아…….”
그의 말에 부끄러워 훅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바닥으로 파닥파닥 부채질하며 나는 열심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케이든이 수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게 국왕 전하 때문이었어요?”
내 말에 케이든이 몰랐냐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전혀 몰랐다고 답하자 그가 설명해 주었다.
“하긴, 칼레 내부의 일이니 잘 모를 수도 있지. 원래 수사대는 수도 치안대 내부의 조직이었는데 전하께서 5년 전 수사대를 독립 기관으로 분리하셨지. 다만, 이를 분리한 후 수사관들이 실제 활동을 할 때 수사대의 권위가 부족하여 귀족들을 수사하는 데 난항이 있었어. 전하께서는 수사대에 권위를 실어 주려 하셨고, 그 일환으로 내가 수사관 직을 맡기로 했네.”
“아, 하긴 케이든이 수사관으로 근무하면 수사에 협조 안 하고 뻗대는 귀족들은 줄어들긴 하겠네요.”
“그렇지. 사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는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다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단순 범죄 조직인 줄 알았던 트리불라가 외국과 연관이 있다는 정황들 때문에 수사관 직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지.”
“네에? 정말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단순 범죄 조직이 아니었다고? 내 반응에 케이든이 되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몰랐나?”
“몰랐죠!”
“그런 것치곤 제법 당당하게 트리불라 소탕에 끼워 달라고 했군.”
“아니……. 그거야…….”
원작을 따라가느라 그랬다고 말은 못 하니 말끝을 흐리자 케이든이 피식 웃었다.
“처음엔 정말 막막했지……. 어찌나 철저하게 연관된 흔적을 지웠던지……. 그래도 3년간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지금은 대충 어딘지 짐작은 가고 있네. 현재 수사대 내부에서는 펠튼을 트리불라와 연관된 가장 유력한 국가로 꼽고 있어. 그쪽에서 유통하는 마약이 펠튼에서 생산되는 마약이란 점도 심증에 한몫 거들고 있고.”
왜 내가 케이든의 일을 방해할 때마다 케이든이 엄청나게 화를 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단순한 범죄 조직이 아니라 타국과 연관된 조직의 뿌리를 쫓는 중이었으니 그의 일을 방해하는 것에 케이든이 예민하게 반응할 만했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만행들을 반성하다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그러게, 나는 이걸 왜 몰랐지?
내가 기억하는 내용에선 트리불라의 진짜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어떻게 ‘원작’을 이만큼 기억하고 있지?
갑작스러운 주제에 예전에도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안 나오고 골치만 아파져 덮어 뒀던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리암 카터’가 아닌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에 관한 막연한 느낌뿐이다. ‘리암’에 비하면 태평한 성격이었던 것 같고, 감정이 풍부했지, 아, 얼굴도 괴리감이 없이 익숙한 거 보니까 ‘나’랑 ‘리암’의 얼굴도 같은 것 같아, 이런 막연한 느낌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원작의 내용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기억은 사라졌는데도.
예전에도 이에 대한 의문은 품었지만, 그때는 회귀가 더 급한 문제라 나중에 생각해 보자, 하고 덮어 놨는데 회귀가 멈춘 데다가 ‘나’는 알지 못했던 내용이 내 앞에 들이닥친 지금, 그 문제를 제대로 직면할 시간이 다가온 듯했다.
추측하기론 ‘이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 세계와 관련 없는 기억이 잘려 나간 건 아닐까?’ 하긴 했지만, 내 가설이 맞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사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추측해 봐야 하늘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신들이 아니고서야 진실을 어떻게 알겠나 싶었다. 신들이야 세계의 관리자 같은 것이니 진상을 알 수도 있겠지.
사실, ‘나’의 기억은 아무래도 상관없긴 했다. 회귀 초엔 ‘나’의 기억이 없는 것에 신경 쓰기엔 현실이 너무 따라가기 벅찼고 지금은 ‘나’의 기억이 없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쩌면 ‘리암’의 기억과 함께 그의 인생을 이미 내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별 미련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거기다 지금은 케이든의 옆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해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만 내가 진상을 모름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막고 싶었기 때문에 기억에 대해 파악해 두고 싶을 뿐이었다.
음, 하지만 당장 파헤치기엔 ‘나’의 기억은 아주 급한 문제가 아니긴 했다. 역시, 이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 지금은 현실에 집중하는 게 맞을 듯했다. 나는 다시 의문을 뒤로 미룬 채 앞을 바라봤다. 갑자기 말이 사라진 채 생각에 잠겼던 나를 케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슬쩍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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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만나는 날까지 케이든과 나는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케이든은 원래 바쁜 사람이었고, 나는 그가 내준 숙제 때문에 바빴다는 게 좀 달랐지만 말이다.
왕비의 초대에 영광이라는 답신을 보내자마자 케이든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때아닌 미소에 내가 긴장하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어투로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 공부하자는 놀라운 소리를 하였다.
예고 없던 해일처럼 나를 덮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깜빡이자 그는 오히려 눈을 크게 뜨며 설마 궁에 그냥 들어갈 생각이었냐 되물었다.
“안 돼요?”
“궁은 한평생을 거기서 지낸 사람도 방심한 사이에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네. 그대가 뒷골목 깡패들을 대하듯 거슬리는 사람의 머리를 전부 터뜨릴 게 아니라면 공부를 하고 가야지.”
“네에…….”
내가 보기엔 궁에 들어가는 건 핑계고 이 김에 나를 공부시키려는 속셈이 더 큰 것 같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나는 얌전히 그가 시키는 대로 펜을 들었다.
틈이 나자마자 나에게 계약과 법에 대해 가르치려는 것을 보니 지난번에 케이든과 마탑에 관해 이야기하다 그곳에선 무엇을 배웠느냐는 물음에 내가 한 대답이 내심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리암, 마탑에선 무엇을 배우나?”
“신학과 수학, 천문학과 고대 카레시엔어 그리고 약학을 배웠죠? 주요 과목은 이거였고 다른 것도 꽤 배웠어요.”
“…대부분이 순수 학문이군. 스승님에게선 무엇을 배웠지?”
“스승님껜 좀 더 기초적인 마법을 배우긴 했어요. 흔히 생각하는 뭐 움직이고 불피우고 그런 마법들이요.”
“단순한 궁금증이네만, 그대는 법학이나 회계 등은 안 배운 건가?”
“그렇죠……? 그런 일들은 보통 마탑 소속 법무사나 회계사들이 대신 처리해 주죠.”
“그대의 나이를 고려하면 독자적인 계약 같은 것을 맺어 볼 일도 없었겠고…….”
“그렇죠……?”
그때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케이든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회가 오자마자 잡아챈 그는 활짝 웃으며 내게 계약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법학과 화술은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계약을 하며 손해 보지 않을지, 협상에서 상대방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를 배우기는 쉽지 않았다. 배울수록 머리가 아파져 와 한숨만 푹푹 나왔다. 난 이게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우울한 얼굴로 그가 준 계약서 사본에서 허점으로 추정되는 곳을 표시하고 있으니 케이든이 나를 위로하듯 달래 주었다.
“리암, 생각해 보게. 내가 자리에 없으면 그대가 나를 대신해 아미르가의 일을 처리해야 해. 그런데 그대가 계약서를 읽을 줄 모른다면 어떻게 되겠나? 고용인이 돕는다고 해도 그럴 때 고용인이 그대를 속이려 드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지. 부디 이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해 주게.”
“케이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볼이 달아올랐다. 내가 아니라 케이든을 위한 것……. 그렇게 생각하니 할 마음이 솟구쳤다. 사실 케이든 성격상 그 없이 내가 아미르가의 일을 처리할 상황은 만들지 않을 테니 그가 정말 원하는 건 내가 어디 가서 손해 보지 않는 것이겠지만……. 말이라도 이렇게 해 주니 기뻤다.
“저 열심히 할게요!”
“내 사랑께서는 참으로 열정적이고 사려 깊기도 하지. 부디 부탁하네.”
갑자기 투지에 불타는 내 모습에 케이든은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로 훌륭한 공부 자세라 칭찬해 주어 내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공부하다가 역시 재미가 없어 잠깐 도망치기도 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쏜살같이 흘러가 입궁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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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의 안내를 받아 왕비의 티 룸에 들어서니 왕비와 두 공주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게. 케이든, 리암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가벼운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우리가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우리 앞에 차를 놓아 주었다. 왕비는 차를 한 입 마셨다가 내려놓으며 연회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연회 날 더 오래 이야기를 못 나눠서 아쉬웠어. 몸이 아팠다고 들었네. 지금은 좀 괜찮나?”
“네.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주최자로서 자리를 비웠으니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전하께서 연회의 남은 시간을 이끌어 주셔서 저와 연회의 참가자 모두에게 영광의 시간으로 남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왕비 전하의 은혜입니다.”
“연회의 준비를 철저히 해 두었던 케이든의 노고 덕분에 수월했네.”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빈틈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대화를 듣고 있으니 어째 왕과 대화할 때보다 왕비와의 대화가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물론 왕과 대화할 땐 비공식적인 자리이기도 했다만……. 왕이 왜 왕비에게 잡혀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끼어들 틈 없는 대화의 공방은 라울라 공주가 말을 비집고 들어갈 때야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리암 경께서는 케이든 오라버니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로 대화를 끊고 잇는 것이 잘 짜인 하나의 연극 같았다. 오늘만큼은 이 연극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인 나는 짐짓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주어진 대사를 읊었다.
“케이든이 수사관 일을 하던 중에 사소한 도움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리암은 훌륭한 마법사인지라 큰 도움이 되었지.”
“리암 경께서는 탑의 인장을 받으셨죠?”
옆에서 웃으며 대화를 듣고 있던 아비가일 공주가 기다렸다는 듯 대화에 참여하며 이야기가 본격적인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바로 추천장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먼저 이어졌다. 오기 전에 케이든은 귀족들의 이런 대화법에 대해 일러 주며 딴 이야기에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방심한 사이에 손해를 볼 수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 주었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화에 참여하고 있을 때 케이든이 미리 말한 것과 같이 왕비가 아비가일 공주에 관해 물었다.
“리암 경이 보기엔 아비가일이 마탑의 수준에 걸맞은 인재일지 궁금하군.”
“마탑의 시험은 매번 그 주제가 바뀌고 시험관들 역시 매해 다르게 편성되어 제가 감히 시험관처럼 수준을 측정해 볼 수는 없다만, 공주님께서는 익히 도전해 보실 만한 실력이라 생각됩니다.”
케이든이 미리 일러 준 대로 대답하니 썩 나쁜 답변은 아니었던 듯 왕비가 싱긋 웃었다. 뒤이어 그녀는 살짝 애석한 얼굴빛을 띠며 드디어 본론을 꺼내었다.
“어린 나이에 탑의 인정을 받은 리암 경과 비교하긴 부끄럽지만, 아비가일은 내 친정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비가일에게 시험 운이 따라 주지 않는지 매번 마탑의 문턱을 밟지 못하고 있어 공주도 나도 고민이 많지.”
왕비의 말을 들은 케이든이 잡고 있던 찻잔의 손잡이를 티 나지 않게 쓸었다. 승낙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나는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저런, 공주께서는 훌륭한 인재신데 유감이군요……. 혹시라도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리암 경께서 그리 말해 주시니 참으로 든든하군. 그렇다면, 혹시 리암 경께서 아비가일의 추천인이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겠네.”
“저야말로 그런 영광을 누릴 기회를 얻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계속 긴장을 한 채로 대화에 임하려니 피곤해 죽을 거 같았다. ‘리암 카터’였으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다……. 서로 원하는 바가 뚜렷한데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해야 한다니, 하여간에 귀족들이란…….
연회 때도 귀족들과 대화하는 게 제법 피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대로 겪어 보니 연회 때의 대화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케이든이 결혼 서류를 제출한 이후로 나에게 누누이 자신 때문에 귀족의 법도에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행히 내 대답에 왕비는 만족스러웠는지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곧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가볍게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고 보니 리암 경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시녀들이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왕비의 손짓에 따라 열린 납작한 상자 안엔 큼직한 토파즈 주변을 촘촘하게 다이아몬드가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목걸이, 팔찌 세트가 있었다.
나는 보석이 많이 박혀 있어 화려하단 인상밖에 받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케이든의 붉은 눈이 빛나는 걸 보니 꽤 귀한 물건인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선물에 쏠리자 왕비가 웃었다.
“리암 아미르에게 주는 왕실의 선물이네.”
케이든과 공부한 보람이 있는지 저 말의 뜻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미르’란 말을 굳이 붙였다는 건 내가 케이든과 헤어져 아미르란 성을 쓸 수 없게 되면 저 선물은 내 소유가 아니란 의미였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는 법인가 보다.
“벌써 제 혼약자를 공작가의 일원으로 대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다들 제 혼약자를 리암 카터라 불러 느끼지 못했는데… 리암 아미르라는 이름을 듣고 나니, 마법사로서 쌓아 온 그의 위명이 제 성에 가려질까 봐 새삼 염려스러워지는군요. 걱정이 는 것을 보아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니 금세 리암 아미르가 될 터지. 케이든의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이 빛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군.”
이것도, 케이든은 내가 아미르란 성이 없어도 저 보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카터’란 성을 강조한 거고, 왕비는 둘러 거절한 거다.
정작 나는 케이든과 헤어질 생각이 없으니 별생각이 없는데 케이든은 내게 좀 더 이득이 되도록 왕비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재밌고 고마웠다.
케이든은 왕비의 말에 조언을 주어 감사하다 미소 지으며 말해 놓고도 꿋꿋하게 아비가일 공주의 추천장을 들먹이며 ‘리암 카터’로서의 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슬쩍슬쩍 강조해 대었다. 결국, 왕비에게서 ‘그래, ‘리암 카터’라는 이름 또한 존중받을 필요가 있지…….’라는 대답을 끌어내고 나서야 케이든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선물을 받고 난 후엔 다과회의 목적이 지나가서인지, 대화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간의 대화를 끝으로 다과회는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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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케이든은 들뜬 목소리로 선물이 어떤 것인지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 목걸이와 팔찌는 내 증조모님의 소장품 중 하나로, 생전에 자주 착용하셨던 것이네. 훌륭한 선물이야. 왕비 전하께서 제법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군. 이걸 내주시다니.”
“누구 소장품이고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
“하하! 아무리 나라도 왕실의 보석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 증조모님께서 그걸 착용하시고 초상화를 그리셨을 만큼 아끼시던 것이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네.”
“아하.”
친절히 설명해 주는 케이든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런데 지난번에 국왕 전하께서는 저택에 왔다가 추천장 이야기도 없이 그냥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왕비 전하는 이런 선물까지 줄 정도고……. 왕비 전하가 더 적극적인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아니, 그대의 판단이 옳아. 아비가일이 마법사의 길을 걷는 게 왕비 전하께 더 의미가 있어 더 적극적이신 것이네. …뭐 국왕 전하께서는 그 자존심 때문에 말을 못 꺼내신 것도 있겠지만.”
은근슬쩍 삼촌의 흉을 보는 케이든의 말이 웃겨 작게 입꼬리를 올리자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의 친정은 마법사 가문이지. 아비가일이 마탑의 시험에 합격한다면 가문 자체의 영광이기도 하니 국왕 전하보다 더 열의를 갖고 나서시는 것이네. 그리고 아비가일 역시 본인의 성취를 위해 마탑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학문의 길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자신은 왕위에 신경 쓰지 않겠단 의사 표명을 둘러 하려는 뜻도 있고.”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였군요.”
“그래. 덕분에 왕실에서 그대를 쉽게 받아 주었으니 우리에게는 호재지. 물론 그대는 왕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만 원래 결혼이란 게 개인만 좋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말을 하는 내내 케이든은 목걸이를 내 머리와 몸 이곳저곳에 얹어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목걸이와 팔찌가 귀한 물건이긴 해도 좀 예스럽게 생겼으니 요즘에 맞게 바꾼 후에 남는 보석은 그대의 모자와 허리띠 장식을 만드는 데 보태도 괜찮을 것 같군.”
“엣.”
“싫은가?”
선뜻 좋다는 대답이 안 나가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보석이 어울리는 미인이니 밝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장신구가 어울릴 것 같은데.”
“…좋아요!”
내 망설임이 가득한 대답에 평소였으면 정말 괜찮냐고 거듭 물었을 케이든은 이번엔 되묻지 않고 그냥 웃었다. 귀찮아서 평소에도 결혼반지만 간신히 챙기고 다니는 사람한테 웬 장신구인가 싶었지만 내게 둘러 줄 보석을 구상하는 케이든이 즐거워 보여 나는 그냥 얌전히 순응했다.
말이 나온 김에 며칠 내로 재단사를 부르자 계획을 짜던 케이든은 문득 생각난 듯 내게 주의를 시켰다.
“혹시 누군가가 그대에게 이것을 만져 보고 싶다고 청해도 절대 내어 주지 말게. 왕실의 선물을 내돌렸다고 뒷말이 나올 수 있어. 이것 말고도 주의할 것들이 몇 개 있긴 한데……. 날이 늦었으니 나중에 정리해서 알려 주지.”
“네에.”
케이든이 사는 세계는 정말 복잡한 것 같았다. 말 한마디, 옷에 착용한 보석 한 개에 따라 온갖 말이 나오고…….
나는 볼을 긁적이다가 나를 보며 웃는 케이든과 눈이 마주쳐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세기의 미남과 결혼하는데 이 정도 고난이면 인생이 내 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래, 힘내자. 리암 카터!
…아니다. 힘내자, 리암 아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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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했다. 케이든도 집에 없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그에게 어딜 가냐고 묻자 케이든은 행선지는 이야기해 주지 않은 채 불신에 찬 눈빛으로 오늘은 얌전히 집에 있으라고 내게 당부했다.
그는 지난번에 내게 급습 정보를 미리 말해 줬던 바람에 내가 먼저 가서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딱히 케이든이 이야기해 줘서 내가 그곳에 찾아갈 수 있던 건 아니었지만 대신 변명할 말이 궁색했기에 굳이 해명하진 않았다.
하여튼, 집에 케이든도 없으니 움직일 의욕이 사라져 침대에서 책이나 보며 뒹굴뒹굴하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낮의 밝은 햇빛에 시선을 문득 뺏기었다. 밝네……. 투명한 햇빛을 따라 멍하니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니 맑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케이든의 생일로부터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갔으니, 벌써 12월이었다. 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내 방에서 바로 보이는 정원은 어느새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잎이 떨어져 나간 큰 나무 대신 겨울에도 푸른 관목들로 꾸며진 정원을 보고 있으니 시간의 흐름이 실감이 났다.
풍년제부터 내내 정신이 없었기에 이렇게 계절을 제대로 체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사늘한 겨울 공기가 밀려들었다. 겨울 특유의 서늘하고 상쾌한 향기를 맡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공기를 맡은 게 얼마 만이던가.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겨울 공기 속에 서 있다가 나는 불현듯 몸을 돌려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이 공기를 조금 더 느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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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
10월 이후에는 어쩌다 보니 집 안에서만 생활해서 날씨 감각이 잠깐 어떻게 됐던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실내용 겉옷을 대충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 걸 본 시녀는 내 옷차림에 깜짝 놀라며 그러다 감기 걸리시니 잠시 기다리라 한 후 두꺼운 외투를 가져다주었었다.
그녀가 외투를 가져다줄 테니 나가지 말고 기다리시라 할 땐 빨리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 현관에 잡아 두는 것이 살짝 불만이었는데, 길거리에 나와 보니 그녀가 백번 옳았다. 하마터면 바깥 공기 한번 맡으려다가 감기 걸려서 앓아누울 뻔했다.
몇 달 동안 온화한 실내 생활에 익숙해진 몸이 춥다고 투덜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외투를 좀 더 여미며 주위를 살폈다. 겨울을 맞아 겨우살이로 장식한 가게들과 가을에 비하면 훨씬 두꺼운 옷들을 입고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잎이 다 떨어져 휑한 가로수들. 어쩐지 반가우면서도 낯선 풍경에 나는 가만히 멈춰 섰다.
이 광경이 보기 좋았다.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길거리의 광경에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가만히 서 있는 내 주위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겨울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오갔다. 그것들을 듣고 있으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걸음을 옮겨 그 소리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걸었을까, 익숙한 광장이 나타났다. 겨울이라 꺼진 분수대 주변에선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땅에 떨어진 것들을 쪼아 먹고 있었다. 근처의 벤치에 앉아 광장을 다시 살피니 가을과는 또 다른 풍경이 보였다. 그때는 수확 철을 맞아 길거리 악사들의 공연은 경쾌한 음악이 주였는데 지금은 잔잔하고 구슬픈 음악 소리가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음악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주위의 겨울 풍경을 둘러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시간을 기억 속에 박제하며 하나하나 눈에 담던 중 저 구석에 설치된 수상한 천막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천막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요란한 장신구들을 보니 집시의 천막인 듯했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집시들은 따뜻한 지방으로 옮겨 가기 마련인데 저 집시는 어쩐 일인지 이곳에 꽤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오늘따라 감성적이어서일까? 평소였으면 코웃음을 치고 지나쳤을 집시의 천막에 호기심이 일었다. 딱히 망설일 이유도 없어서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그 안은 꽤 어둑했다. 좁은 천막 한가운데에 앉은 노파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그녀의 앞에 놓인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수정구 속에서 뿌연 연기가 돌기 시작했다.
뻔한 분위기 잡기였지만 제법 그럴싸했다. 고개를 살짝 까딱이곤 테이블 앞 의자를 끌어 위에 앉자 그녀가 퉁명스러운 말씨로 물었다.
“이렇게 혼탁한 놈은 처음이구먼. 뭐가 궁금해서 왔어?”
“시간을 멈추는 법이 있습니까?”
시간을 그만 되돌아가는 법이 있냐고 물으려다가 질문을 바꿨다. 평범한 집시 노파 같았지만 그래도 어디서 말이 새어 나갈지도 몰랐다. 저런 질문을 했다가 아미르 공작의 예비 배우자가 미치광이란 소리가 퍼지면 케이든이 곤란해진다.
내 질문에 노파는 생뚱맞은 것을 들었다는 듯 험상궂은 얼굴을 더 구겼다.
“뭐?”
“미래는 관심 없고, 시간을 멈추는 법을 아십니까?”
“장사가 안되려니 별 미친놈이 대낮부터 찾아와서 지랄이야.”
말이 심했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 아니 미래를 봐 준다는 집시한테 미래를 보는 법을 물어 집시의 영업 기밀을 알려 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닌데 이런 폭언을 들을 일인가?
욕설을 듣고 있자니 나도 살짝 기분이 상해 삐딱한 표정이 절로 나왔다.
“아니, 미래를 볼 수 있는 법을 응용하면 시간을 멈출 수도 있을 거 아닙니까? 뭐가 궁금하냐고 물으셔서 궁금한 걸 말했을 뿐인데. 모르시면 모른다고 하십시오.”
“미친놈! 꺼져! 당장 나가!”
집시 노파는 그 깡마른 손을 부르르 떨며 목에 핏줄이 서도록 당장 여기서 꺼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귀가 다 아팠다.
박대에 감정이 상해서 별로 그녀의 말대로 해 주고 싶진 않았지만, 여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머물렀다간 화병이 난 삐쩍 마른 노파의 시체 하나를 치우겠다 싶어서 떠밀리듯 천막을 나왔다. 내가 나오는 순간까지 요란한 욕지거리가 천막을 가득 채웠다.
그새 옷에 붙은 먼지들을 거친 손길로 툭툭 털어 내며 천막을 한 번 노려보다 다른 곳에나 갈까 하여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얼마 옮기지 않았을 때 저 앞쪽에서 웬 치렁치렁한 로브를 걸친 긴 머리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천막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저 돌팔이 집시한테 점 보러 가는 호구에게 속으로 잠시 애석함을 표해 준 뒤 갈 길을 가려는데 천막을 향하던 남자가 대뜸 방향을 꺾더니 나를 향해 걸어왔다.
뭐야? 누가 봐도 나에게 용건이 있는 남자의 행동을 보니 말을 섞었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곧 뒤에서 뛰어오더니 나를 부르며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저기! 진짜 이상한 게 아니고! 잠시만요!”
“일 없습니다.”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치고 멀쩡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못 봤다. 애타게 나를 부르는 남자가 서둘러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 나도 뛸지 아니면 그냥 바람으로 저 남자를 광장 밖으로 내보내 버릴지 궁리하던 차에 어느새 내 근처까지 뛰어온 남자가 큰소리로 내게 외쳤다.
“운명이 강하게 느껴지셔서 그래요! 혹시 운명과 시간에 관심 없으십니까?!”
‘뭐야. 저 사이비는.’
초면에 운명과 시간에 관해 관심 있느냐는 놈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물론 몇 번 본 사이에 물어본다고 해서 정상인 건 아니고, 그건 그냥 신중한 사이비일 뿐이다
예전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이비라는 건 그냥 처음에 감이 왔을 때부터 끊어 내야 한다고. 사람이 조금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헛소리가 조금 웃겨서 등등의 이유로 말을 섞기 시작하면 나중에 정신 차렸을 때 자신이 사이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다.
사이비는 처음부터 끊어 내라. 스승님의 말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사이비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강한 바람을 불러일으켜 남자를 밀어내자 남자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나에게 애원하였다.
“한,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이야기가 별로인 것 같으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그쪽한테서 강한 시간의 꼬임이 느껴져서 그래요!”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한 번 들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 좋은 말씀으로 광장에서 점점 밀려나는 자신의 몸은 어떻게 할 수가 없나 보다. 이쪽으로 오려고 하지만 바람에 막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혀를 차고 걸음을 옮기는데 뒤쪽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 큰 어른이 공중에서 엉엉 울며 눈물 콧물 흘리는 모습이 꼴불견이었다.
“헝, 진짜, 진짜 한 번만 들어 보시면 안 크흥, 될까요? 제가 진짜 이번에도 빈손으로 가면 쫓겨나게 생겼, 흑, 어요.”
“저런.”
사이비에서 제 발로 쫓겨나는 귀한 기회를 이참에 가져 보는 것도 괜찮을 거다. 남자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심금을 흔들지 못해 그냥 가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하자 남자가 코 먹는 소리를 내며 내게 눈물로 애원했다.
“선생님. 선행을 흑, 쌓으면 돌아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킁, 제발 한 번만 같이 가 주시면. 일단 마법 좀 풀어 주시고.”
선행.
예로부터 내려오는 격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선행이라고 할 만한 건 딱히 한 적이 없긴 했다. 오래도록 이 세상에 남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지금, 나도 선행이란 걸 좀 해야 할까? 그런데 여기서 선행은 내가 저 남자를 이대로 사이비 집단에서 쫓겨나게 내버려 두는 게 선행 아닐까?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사이비는 이거다 싶었는지 왜 내가 자신을 따라가는 게 선행을 하는 것인지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짜 별거 아닙니다. 선생님. 그냥 가서 강연 하나만 들으시고 설문 조사를 해 주시면 돼요. 별거 아닌 행위로 선생님은 제 인생을 구하시는 거라니까요?”
“사이비가 인생이라니 끔찍하네요.”
“사이비 아닙니다! 운명과 시간의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제시해 주는 훌륭한 모임입니다!”
들을수록 사이비 같았다. 내 질색하는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남자는 자신의 말에 심취하여 자신이 지금 나를 데리고 가려는 모임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자의 말만 들으면 이 세상 최고의 현인이 사람들을 고뇌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집단이 따로 없었고, 정말 사이비 같았다.
그 모임에 내가 자신을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실의에 빠진 자신은 길거리를 전전하다가 비쩍 마른 겨울 나뭇잎을 이불 삼아 덮다가 이 추운 겨울바람에 동사해 버릴 거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앗, 선행을 해 볼까 마음먹은 지 3분도 안 돼서 이런 생각이라니.’
겨울 날씨 같은 삭막한 마음 씀씀이를 조금 반성하며 나는 남자의 몸을 풀어 주었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던 자세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진 남자는 눈을 끔뻑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결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하기 싫어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남자에게 턱짓했다.
“안내해 보십시오.”
단번에 화색이 돈 남자는 벌떡 일어나 이리로 오시라 내게 손짓하였다. 남자를 따라 첫발을 떼는 순간부터 후회가 몰려왔다. 세상에, 이렇게 하기 싫다니. 선행이란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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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의 본부인지 지부인지 아무튼 사이비의 아지트에 도착한 나는 소태 씹은 얼굴로 나를 데려온 사이비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사이비를 따라 들어가자마자 안내 사무실에서 뛰어나와 나를 맞이한 직원은 무슨 팸플릿 같은 것을 꺼내 자기네가 뭐 하는 곳인지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곤 마지막에 하는 말이 오늘 이곳에 온 내가 운이 정말 좋다며, 지금 강당에서 좋은 말씀을 교주께서 전해 주고 계시는데 단돈 5골드만 내면 그 말씀을 청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친 소리였다. 평민 4인 가족 한 달 생활비가 대략 3골드인데 5골드를 내고 사이비 교주의 강의를 들으라니, 미친 거 아냐?
나는 짜증을 못 이기고 나를 데리고 온 사이비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 사이비는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안 보는 것인지 밝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나를 보고 있었다. 짜증 나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은 좋은 말씀이 있다고 했지, 그 말을 듣는 데 돈을 안 내도 된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선 정직한 사이비였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기에 나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5실버밖에 없던 참이라 돌아가겠습니다.”
내가 5실버밖에 없다고 주장하자 직원의 표정이 살포시 구겨졌다. 그 와중에도 내 옷차림을 훑어보며 입은 쉬지 않고 나를 회유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프로의 자세였다.
“정말 좋은 말씀이거든요. 앞으론 교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가 또 안 올지도 모르고……. 저희 교주님이 신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신 분이라 뵙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거든요. 아! 근처 전당포랑도 연결이 되어 있어서 저희가 물건도 받아요. 어떠신가요? 아니면 간단한 심사만 받으시고 우선 저희한테 빌려서 내실 수도 있어요.”
진짜 독하다. 지금까지 여러 사이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물건까지 뜯어 가려는 놈들은 처음이었다. 선행을 베푼답시고 따라올 게 아니라 그냥 사이비를 경비대에 끌고 갔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여기를 경비대에 신고해야겠단 다짐을 하며 나는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제가 가진 물건은 다 장물이라서 안 될 거 같고, 대출은 제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안 되겠군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걸치고 있는 외투며 셔츠며 신발이며 전부 다 케이든이 마련해 준 것이니, 소유자는 엄밀히 따지면 케이든이고 대출도 뭐, 나는 직업도 없고 집도 없으니 아무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내 말에 직원의 표정이 웃는 채로 일그러졌다. 직원은 짐짓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시면 안타깝.”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청강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교주님 말씀을 들으러 여기까지 오신 분인데!”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이비가 직원의 말을 끊고 필사적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정말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이 사이비부터 신고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이비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실적인 내가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직원에게 제발 들여보내 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이비의 애원에 직원은 선심 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원래는 안 되지만 이번 한 번만 니킬 신도님의 정성을 봐서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무슨 선심 쓰는 어조로 허락한 그녀는 경건한 표정으로 헌금통을 가장한 수금함을 내 앞에 들이댔다. 갑작스러운 두 사이비의 연계 공격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수금함과 잘됐다고 웃으며 손뼉 치고 있는 사이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영업 수법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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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선행을 베푼다고 나서면 안 된다는 교훈 값 5실버를 떨떠름하게 수금함에 집어넣은 후 들어온 지하 강당은 놀랍게도 사람으로 빼곡했다. 하여간에 말세였다. 사이비에 현혹된 사람들이 왕국에 이렇게 많다니.
나는 혀를 차며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도록 강당 한구석 벽에 기대었다. 이왕 여기까지 들어온 거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지 들어나 보자.
은갈치 비늘 같은 장신구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로브를 걸치고 마법 처리를 해 놨는지 요란한 빛을 뿜는 전등 아래에 선 교주는 나이가 50대쯤 되어 보였다. 얼굴에 주름살이 눌어붙은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번쩍이는 로브에 빛이 반사돼 눈이 따가웠다.
“사람들은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과거의 자신에게 현재를 알려 주고! 미래의 나에게서 미래를 듣는 그런 일이 시간의 신 템푸스 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는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미친, 진짜 사이비네.”
시간의 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기고 말았다. 언제 적 신 이야기야.
과거, 아주 먼 과거. 이 땅에선 신들의 시대가 실존했었다. 이것은 여러 유적과 기록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현재의 마법도 과거 이른바 신화시대의 인간들이 신들의 힘을 모방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마탑에서 마법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신학과 고대 카레시엔어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화시대는 남겨진 기록을 통해 보면 상당히 번성한 시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과 인간이 직접 맞닿아 있던 시대였으니 신들의 비위만 잘 맞추면 농사와 사냥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을 테니까. 물론 한편으론 변덕스러운 신들 때문에 강성했던 왕국이 순식간에 몰락한 일들 역시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어떤 화려한 꽃이라도 그 끝에선 시들기 마련이듯 신화시대 역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저 깊은 바다에 나타난 이계의 생명에서 잉태되어 탄생한 괴물 콜루나들이 땅 위로 올라오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들이 대륙을 독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오랜 세월 그들이 닿을 수 없는 바다 깊은 곳에서 힘을 쌓았다.
그리고 그들이 신들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만한 힘을 쌓았을 때 신화시대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땅으로 기어 나온 콜루나들과 자신들의 영역을 넘겨줄 수 없던 신들은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그 끝에서 신들은 가까스로 승리하였지만, 그 피해는 복구할 수 없었다.
결국, 땅 위에서 머무를 힘조차 잃어버린 신들은 이 땅을 떠나 하늘로 돌아갔고 신화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신화시대는 떠돌이 음유시인들이나 노래하고 아이들의 잠자리 동화로 전승되는 단순한 이야깃거리 정도로나 여겨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 땅을 떠난 신들은 더는 인간들에게 별 영향을 줄 수 없기에 그 정도 흥밋거리면 족하였다.
다만, 신들이 지상에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기에 종종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 발생하긴 했다. 그 기적이 있기에 지금 여기처럼 옛적의 존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끊기지 않는 것이고. 그러나 몇십 년 혹은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기대하는 일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 교주가 하는 말은 죄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는 것이다. 애초에 땅에 내려올 힘도 없는 신이 무슨 시간을 움직여 과거와 미래의 자신과 메시지를 주고받게 해 주겠는가?
‘운명을 아는 게 뭐 그리 좋은 거라고. 바보들.’
마음 깊은 곳에서 비웃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 말에 공감하며 나는 몸을 돌렸다. 저런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더는 여기 있을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혹시나 했던 내가 바보였다.
하여간에 돈은 한 길로 들어오고 나갈 땐 여러 길로 나간다더니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일로 돈을 낭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5실버는 아깝긴 해도, 그냥 선행에 썼다고 생각하고 신경 꺼야지……. 젠장, 신경이 꺼지지가 않았다. 아까워.
감성에 젖어 기분 좋게 외출했는데 돈도 뜯기고 사이비 같은 연설이나 들어 버린 스스로에게 위로를 보내며 들어왔던 문을 열려던 찰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두꺼운 문 뒤에서 여러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안으로 들이닥치려 하고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막는 듯한 소리였다.
덜컹거리는 문 너머의 상황이 심상찮아 문에 귀를 대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깥소리를 엿들으니 수사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곳을 수사대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이 바깥에서 몸으로 밀어붙이는지 문이 덜컹거렸다. 괜히 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부딪히지 않게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교주가 있는 앞쪽에선 아직 뒤쪽의 조용한 소란을 눈치채진 못한 듯 큰 목소리로 교주가 여전히 헛소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나는 앞쪽과 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급히 걸음을 물려 문가에서 사선으로 비켜났다. 내가 걸음을 물리자마자 쾅! 소리가 나며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여러 사람이 바깥에서 강당 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경비대원들과 수사관들이 섞여 있었다.
순식간에 강당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신도들이 지르는 고함이 귀가 찢어지도록 강당을 메웠다.
무슨 일이냐 소리 지르며 경비대원과 다투는 사람들과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도망치려는 사람들, 그 신도들을 막으려는 경비대원들이 엉켜 눈 깜짝할 사이에 강당이 엉망이 되었다.
교주와 그 부하들은 경비대원들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은색 로브도 내던지고 강당 앞쪽에 마련된 비상 통로로 도망가려 했지만, 그곳에서 미리 대기하던 경비대원과 수사관들에게 잡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 사이비들 대놓고 영업하더라니, 누군가는 신고할 줄 알았다.
막장으로 돌아가는 강당 꼬락서니들을 보고 있자니 내심 통쾌했다. 내가 신고하지 못했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은 구경이었다. 하지만 좋은 구경은 좋은 구경이고 슬슬 돌아가야 했다. 여기 계속 있다가 잘못 얽히면 나도 곤란해졌다.
은신 마법을 걸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몸을 주변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일 때, 사람들로 북적이는 소란스러운 문가에서 군중을 헤치며 장신의 미남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
짧은 진남색 재킷에 왕궁 수사관을 의미하는 금색 배지가 왼쪽 가슴 편에 달린 수사관 제복을 입은 익숙한 금발 미남의 옆태에 놀라 나는 강당을 나가려던 것도 잊고 얼뜨기처럼 그 자리에 서서 눈만 깜빡이고 말았다.
“아, 세상에. 케이든…….”
나는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침에 어디 가느냐고 물어봐도 말 안 해 줄 때 조금 더 캐물어 볼걸…….
당연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르는 남자는 엉망진창인 강당의 상황을 침착한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강당을 빙 둘러보는 남자의 시선이 제법 빠르게 그러나 꼼꼼히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올수록 나는 초조해져 케이든한테 알은척하고 싶은 감성과 이대로 도망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우선 도주 루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강당 앞쪽에서 누군가가 몸부림치며 자신을 붙든 경비대원을 밀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앞쪽을 본 케이든이 멈칫하였다. 동시에 강당 안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요란한 총격이 향한 방향은 강당의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수사관이었다.
총성이 들림과 동시에 정적이 가득 찼던 강당에는 곧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개인의 총기 사용이 금지된 칼레에선 듣기 어려운 총소리였기에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굳어 있던 사람들은 급히 고개를 들어 총알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던 사람이 한 구의 시체가 되어 있을까 봐 두려움에 찬 시선들이 발견한 것은 다친 곳 하나 없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였다.
케이든의 앞을 이중으로 된 푸른 보호막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의 손목에 자리 잡은 얇은 금색 팔찌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분석하는 눈으로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또 다른 보호막에 시선을 두었다가 눈을 내려 첫 번째 보호막도 뚫지 못하고 힘없이 땅에 떨어진 총알을 보았다.
동시에 강당의 앞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악!!”
경비대원들의 구속이 허술한 틈을 타 케이든에게 총을 쐈던 교주가 배배 비틀린 손을 붙잡고 땅을 뒹굴고 있었다. 둥근 공처럼 말린 총 한 자루가 그의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며 땅을 구르는 교주에게 시선을 던진 케이든은 그가 아직 살피지 않았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은신 마법을 풀었다. 내가 은신 마법을 풀자마자 나를 발견한 그는 할 말이 무척 많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의 반응에 머쓱해져 손을 엉거주춤 들어 인사하자 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중에 보자.’라는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조금 억울해져 울상을 지은 내게서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린 그는 땅을 뒹구는 교주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리암, 총은 기종을 확인해야 하니 다시 펴 놓도록.”
“앗! 네에.”
케이든이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교주가 다시 총에 손을 대길래 못 쏘게 하려고 총을 망가뜨려 놨는데 저것도 쓸 데가 있었나 보다. 일단 그가 시킨 대로 총을 펴긴 했는데 부서지고 구깃구깃해진 것이 다시 사용하긴 그른 것 같았다.
‘교주 손도 펴야 하나?’
이건 조금 헷갈려 케이든을 봤는데 교주의 손에 대해선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그냥 내버려 뒀다. 그나저나 총이라니…….
“칼레에서는 허가받은 사람 외의 총기 소지는 엄벌 사항이지.”
교주에게 다가간 케이든은 즐거운 기색이었다. 몸을 숙여 총을 주워 살핀 케이든은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중요한 증거이니 보존해 두라며 부하에게 넘겼다.
그는 무척 감사하다는 어투로 교주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군. 그대의 성급함 덕분에 일이 빨라지겠어.”
“으으……. 네, 놈……!”
안타깝게도 교주에게는 타인이 보내는 감사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미덕이 없는지 그는 이를 갈며 충혈된 눈으로 케이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허락하지 않은 타인의 무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교주의 입에서 당장 그가 원하는 정보가 나올 것 같지 않자 그는 냉정한 눈으로 교주의 상태를 훑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구속하도록. 심문 전까지 자살하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
“네!”
그의 명령에 따라 모두 일사불란하게 교주와 일대에 있던 사람들을 제대로 구속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하게 총이 등장해서 그런지 몸 검사가 철저했다.
교주가 구속되는 것을 확인한 케이든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주변은 체포하려는 사람들과 체포당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비명과 고함 그리고 물건이 부서지고 발에 치이는 소리로 요란했지만, 우리 둘 사이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어쩐지 그의 숨소리도 들릴 듯한 적막이 부담스러워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지만, 곧 이게 별로 좋지 않은 선택임을 깨달았다.
교주를 상대하며 싸늘해졌던 케이든의 눈이 어느새 어두운 밤 중에 피어오른 사막의 모닥불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시선이 내빼려다가 미수에 그친 내 발을 바라봤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올라왔다. 그 눈동자에 밴 명확한 짜증과 분노에 나는 슬그머니 그의 눈을 피하며 몸을 움츠렸다. 애석하게도 내 몸이 좀 움츠린다고 해서 어디 숨겨질 덩치는 아니었기에 내 행동은 그냥 케이든만 더 어처구니없게 만든 듯했다.
케이든은 그의 근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만 보고 있던 부하에게 무어라 지시를 한 뒤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엉망이 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가득 메웠다. 절도 있는 발걸음은 미묘하게 평소보다 여유가 없었다.
“내 어린 신랑께서 참으로 공사다망하여 행적을 종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지는 오래지만, 매번 잘도 내 예상을 벗어나는군.”
듣기만 했는데 없는 죄도 자백해야 할 것 같은 스산한 목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으게요. 어쩌다 보니…….”
“아침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얌전히 놀고 있던 사람이 어쩌다 해가 지기도 전에 사이비 교주의 연설을 듣게 된 건지 참 궁금하군. 그대의 반응을 보니 내가 여기 올 줄은 몰랐던 것 같은데?”
“아니, 저도 억울해요! 그냥 오랜만에 선행을 베풀고 싶었던 건데 그 사람이 대뜸 날 여기로 데려왔단 말이에요!”
내 말에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난해하단 얼굴을 하는 것 보니 이대로 집에 가면 낯선 사람 따라가지 않기 훈련이라도 받을 것 같았다. 젠장.
예정된 미래에 우울해져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가 흘끔 눈을 올려서 그를 살펴보았으나 나를 향한 케이든의 살벌한 시선은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곧 펼쳐질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나는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케이든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트리불라의 돈세탁 및 자금줄 역할을 하는 집단의 교주 및 증거물 확보를 위해서지.”
“아.”
젠장. 여기가 거기였구나. 케이든이 쫓던 조직의 자금줄 중 하나인 사이비 종교 집단. 조직을 완전히 소탕하기 직전에 있던 사소한 에피소드였다. 원작에서도 지나가듯이 언급이 되고 지난 회귀 동안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던 일이다 보니 나랑은 관계없는 곳이라 생각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랬더니 지금 이 모양이었다. 아침에 케이든에게 어디 가냐 물었을 때 내가 오랫동안 준비한 급습 일정을 또 망칠까 봐 일부러 어디 간다고 말 안 했을 텐데, 여기에서 날 발견했으니 그도 꽤 허망할 것이다. 그나마 내가 교주의 총격을 막았으니 이 정도 추궁에서 멈췄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케이든은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절차대로면 나도 일단 현장에 있었으니 체포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내가 주요 인물 체포를 돕기도 했고 말이다.
매사에 날카로운 검처럼 임하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물론 그 전에 그의 공사 구분을 어렵게 만드는 내 행동을 반성해야 한단 자각이 있긴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팔을 뻗어 케이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수사관 제복을 입은 케이든의 모습은 오랜만이었고 여전히 멋있었다. 짧은 재킷을 힘주지 않고 살짝 당기며 그를 최대한 애처롭게 바라보자 케이든이 물끄러미 내 얼굴 곳곳을 바라보다가 곧 헛웃음을 지었다.
“반성은 안 하고 자꾸 불쌍한 척 넘어가려고 굴어.”
“그렇지만 이번 건 저도 억울해요, 케이든.”
“면식범에 의한 유괴만 걱정했는데 수상한 사람도 제 발로 졸래졸래 따라갈 줄은 몰랐지.”
“그치마안…….”
내가 괜히 우는소리를 내곤 그의 옆에 슬그머니 서며 몸을 웅크리고 그를 올려다보자 케이든은 가볍게 내 이마에 딱밤을 때리곤 내가 좋을 대로 달라붙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행동을 보니 어느 정도 그의 화가 풀린 것 같았다. 어쩌면 사실 별로 화는 안 났는데 모르는 사람을 졸래졸래 쫓아가는 내 버릇을 잡으려고 화가 난 척했던 걸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케이든에게 좋다고 붙어 있을 무렵 그의 후배로 보이는 수사관 한 명이 두꺼운 책 몇 권을 들고 케이든을 찾아왔다.
“케이든 수사관님. 장부를 찾았습니다. 현장 증거로 보존 처리해 둘 예정인데 별도로 진행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분은……?”
수사관은 케이든에게 확인해 보라 장부를 넘기며 못내 수상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해서 얼굴이 별로 알려진 편이 아니었지. 하긴, 조금 전까지 총을 맞니 안 맞니 했던 선배가 몇 분 사이에 옆구리에 남자 하나를 끼고 알콩달콩하고 있으니 수상할 법도 했다. 거기다 그 선배가 최근 결혼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유명하다면 더더욱 말이다.
괜히 뻐기듯 가슴을 펴며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케이든이 선수 쳐 후배에게 말을 했다.
“내 혼약자 리암 카터입니다. 방금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협조 차원에서 미리 잠입했었습니다. 비밀리에 잠입하느라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이 장부는 빠진 부분이 있는지 내가 살핀 후 보존 처리해 두겠습니다. 노라 수사관님께서는 이 집회 관련 협조자가 적힌 문서가 있는지 추가로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추가로 발견한 사항이 있다면 공유하겠습니다.”
케이든이 타 수사관들과 공조해서 일하는 모습은 처음 봐 눈을 빛내며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들었다. 수사관들끼리는 서로 동등한 지위라는 의미에서 연차에 상관없이 서로 존댓말을 쓴다고 듣긴 했지만 직접 보니 신기했다.
케이든의 말이 끝나자 즉시 대답한 수사관은 내게서 시선을 돌려 왼쪽 가슴께를 주먹으로 살짝 두 번 치는 수사관들 특유의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이제 슬슬 정리되어 가는 난장판으로 다시 향했다.
분주한 꼴을 보니 오늘 철야 작업은 예약해 둔 경비대와 수사관들에게 소소한 위로를 보내며 다시 케이든을 보는데 장부를 보고 있을 줄 알았던 케이든은 장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수습됐던 케이든의 눈꼬리가 다시 굳어져 있어 나도 덩달아 몸을 굳히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나요?”
“여기 들어오려면 헌금을 내야 했을 텐데. 그대, 얼마나 냈나?”
“아.”
그래도 사이비에게 큰돈 뜯기지 않고 5실버만 냈다고 이번만큼은 자랑스럽게 활짝 웃으며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내가 여기 비밀리에 잠입한 거로 처리됐으니 내가 낸 돈은 경비 처리돼서 돌려주겠구나? 나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을 바꿔 당당히 대답했다.
“5골드요!”
“5골드?”
내 대답을 들은 케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선 것을 보니 내가 대답을 잘못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농담이었다고 말을 바꾸려고 입을 열자마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입을 막아 버렸다. 흥분 상태의 대화를 피하고 스트레스의 원인을 우선 차단하여 심신을 안정시킨 후 대화하려는 자세가 참으로 훌륭했다.
그가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킨 그는 가장 최신의 것으로 보이는 장부를 찾아 들어 올렸다. 휙휙 장부의 마지막 장을 찾아 종이를 넘기는 그 손길이 거칠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편 케이든의 손길이 공중에서 멈췄다. 가만히 장부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장부를 다시 한번 바라보더니 잠시 입을 달싹거렸다. 그는 곧 혼란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부에는 5실버를 받았다고 돼 있는데?”
조직의 자금줄이라 해서 장부 조작은 예사로 할 줄 알았는데 사이비들이 생각보다 장부 관리는 또 제대로 했나 보다. 아니면, 뭐 나는 조금 낸 경우라서 그냥 적었을 수도 있고. 사실을 고백하려던 찰나, 케이든이 드물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나는 장부 위에서 배회하고 있는 그의 손을 가져와 볼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음. 장부 조작도 하나 봐요! 원래 나쁜 놈들은 하나만 하지 않는다더니. 정말.”
케이든이 내 목소리에 밴 장난기를 눈치챘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장부 앞쪽을 다시 넘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노로 경직되어 있던 몸이 천천히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장부에 적힌 다른 사람들의 헌금 내역을 보며 내 거짓말을 확신한 듯했다.
장부를 순식간에 거의 훑은 후 덮은 케이든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5골드를 냈다고?”
“네에.”
“하여간에 나쁜 건 안 가르쳐도 빨리 배우지.”
케이든은 비뚜름히 웃으며 노는 손을 가만히 둬서 뭐 하냐며 자신은 이제 다른 일들을 봐야 하니 장부나 들고 잘 따라오라 하였다. 그 웃음기 밴 목소리에 슬쩍 따라 웃으며 장부를 받아 들고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경쾌히 발걸음을 옮기자 여전히 소란스럽지만, 급습 초반보단 정리된 강당에 구속된 사람들이 보였다. 경비대의 감시를 받으며 잡혀 있는 면면 중에는 아까 입구에서 나에게 돈을 뜯어 갔던 직원이 보였다.
수사관의 뒤를 따라가는 나를 보고 믿기지 않는단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한 직원의 얼굴을 보니 기운이 났다. 직원과 눈이 마주친 김에 턱을 치켜들고 최대한 얄밉게 웃어 주다가 케이든에게 이상한 데 한눈팔지 말고 잘 따라오기나 하라고 한 소리를 들었다.
감성적으로 시작했고 난장판으로 끝난 하루는 전체적으로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나쁘진 않은 성과를 남기며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수사대에서 내가 사이비 집단에 가기까지의 일을 진술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광장에서 내가 봤던 집시 노파는 사이비와 한 패였다고 한다. 집시의 천막에서 고민을 상담받은 사람들을 사이비가 밖에서 대기하다가 낚아채 이곳으로 꾀어 오는 수법이었다고 했다.
경비대가 광장을 찾아갔을 때 집시는 그사이에 천막을 수거해 도망간 뒤였고, 현재 그 집시는 수배 중이라고 하였다. 어쩐지 나를 내쫓을 때 노파가 시간이 어쩌고 하며 내 상담 거리를 밖에까지 들리도록 자세히 이야기하더라. 아, 나를 직접 데려왔던 사이비도 용케 도망갔는지 안 잡혔다고 했다. 아쉬웠다.
하루라도 빨리 그 사기꾼 집시와 사이비가 잡히기를 빌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케이든은 내가 교단에 뜯긴 돈이라며 5골드를 손에 쥐여 주었다. 내 짐작이긴 한데 이건 아마도 케이든의 사비일 것이다.
수사대에서 진술 후 잠시 쉬고 있을 때 케이든의 보좌관, 잭슨 씨가 이건 업무 외 노동이라고 투덜거리면서 수사대에 찾아와 케이든에게 건넨 것 중에 짤랑이는 소리가 살짝 나는 돈주머니가 있는 걸 봤다.
아무래도 이 돈은 실수로도 쓰지 않도록 금고에 따로 보관해야겠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으며 활짝 웃었다. 케이든은 내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따라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헝클였다.
내가 그의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맡기고 있으니 맘껏 내 머리를 헤집은 그가 사고 좀 그만 치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 말에 억울한 척 몸을 움츠리며 입을 삐죽이니 케이든이 소리 내 웃는 소리가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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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교단 사건 이후 나는 한동안 정원 산책을 제외하고는 바깥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별일은 아니었고 내가 멍하니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어쩐지 케이든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 따뜻한 실내에 익숙해진 몸이 춥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서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케이든은 굉장히 바빴다. 너무 바빠 피곤이 얼굴에 완연한 그를 걱정하자 케이든이 살짝 웃으며 그래도 트리불라의 완전한 소탕이 코앞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벌써 원작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누군가는 잘 시간도 없이 바쁘고 누구는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때에 저택에 반가운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벨로니 스승님에게서 도착한 편지였다. 아무 장식 없는 흰 봉투에 담긴 편지는 그 내용이 제법 길었다.
그동안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한 번도 답장을 안 하시더니 이번에 몰아서 답장을 주신 모양이었다. 편지를 펼쳐 보니 첫 줄부터 미소가 지어졌다.
[전조도 없이 결혼을 알려 온 제자에게.
결혼했다는 편지는 잘 받았단다. 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1차 서류를 제출했고 본식에 참여해 달란 편지여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네가 괜찮은 놈을 골라서 결혼했으리라 믿는다. 참고로 해럴드는 네가 사기 결혼을 당한 것 아니냐고 걱정하더구나. 사기 결혼이 맞으면 답신에 하트를 그려 달라는데 이건 또 무슨 신호니?
그나저나 배우자로 스승의 동년배를 데려온 건 좀 파격적인 선택이구나. 그래도 스승보다 조금이라도 어린 사람을 데려와서 제자의 배우자와 덜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 준 점은 고맙단다.
그런데 결혼식을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결혼식 날짜는 4월이 최선일까? 네 결혼식이니 당연히 참석하겠다만 내년 4월은 관찰 연구를 진행하려는 트리큘라 개체들의 짝짓기 시기란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그 섬은 뱃길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터라 관찰 연구를 위해선 3월에 그 섬에 들어가 5월에나 나올 수 있단다.
어쩔 수 없이 관찰 연구를 내후년으로 연기한 상황인데 혹시 결혼식 날짜를 바꿀 의향이 있다면 일정을 다시 잡을 수 있게 최대한 빨리 말해 주면 고맙겠구나.
네가 부탁한 영상석은 편지와 함께 보낸다. 네게 보내 줄 걸 고르느라 나도 오랜만에 영상석을 틀어 봤는데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네 모습을 보니 즐겁더구나. 세월이 참 빠르지. 엊그제 너와 만났던 거 같은데 어느새 네가 널 처음 만났던 당시의 내 나이가 돼서 결혼하겠다고 청첩장을 보내다니.
내가 늘 말하지만, 그날 널 거둔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단다. 리암, 잘 자라 줘서 고맙고 네가 늘 행복했으면 한다.
이번에 영상석을 꺼내는 김에 짐 정리를 했으니 혹시 다른 영상석이 필요하다면 편지를 보낼 필요 없이 센버스 쪽의 별장에서 알아서 챙겨 가렴.
그나저나 저번에 네가 말했던 여러 세계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잘 진행돼 가고 있니? 난해한 주제라 쉽진 않을 것 같다만 혹시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논문을 제출하렴. 워낙에 미지의 주제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을 거란다. 논문 실적을 잘 쌓아 놔야 나중에 연구비 요청할 때 편할 테니 귀찮다고 미루지 말고 성실하게 써 두고.
어느 전공이든 제대로 연구를 시작하면 연구비가 많이 드는 법이지만 네 전공은 마정석이라 특히 연구비가 많이 드는 축에 속하잖니. 절대 귀찮다고 미루지 말렴.
아마 한동안은 또 편지에 답장하기가 어려울 거란다. 비르엔 쪽에서 룸펠들이 작물을 다 망치니 당장 퇴치해 달라고 얼마나 닦달인지. 이 편지를 보내자마자 그쪽으로 가야 한단다. 그러게 봄에 약을 똑바로 뿌려 뒀어야지. 귀찮아서 정말.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줄이마. 네 결혼식에는 늦지 않게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프지 말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스승 벨로니가.]
평소였으면 그동안 있었던 일 위주로 보내셨을 편지가 내 결혼 소식 때문인지 약간의 감성적인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스승님의 이런 편지를 오랜만에 받아 봐서 그런지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다.
스승님이 편지에서 케이든을 자신의 동년배라 칭하신 부분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스승님이 내 나이일 때 나를 거두셨으니 올해로 서른다섯이셨지. 어쩐지 케이든이 스승님의 연세를 들으시고 많이 당황하더라. 그래도 스승님보다 케이든이 어리니 괜찮지 않나?
그나저나 내가 갑자기 결혼을 알려 와서 놀란 건 이해하지만 사기 결혼이냐니…….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내 사정을 다 말하지 않았으니 케이든 입장에선 사기 결혼이긴 했다……. 답신에 실수로라도 하트는 그리지 말아야지.
스승님이 한참이나 내 결혼식 일정에 관해 써 놓으신 걸 보다가 조금 민망해졌다. 웬만하면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안 하시는 분이 편지에 이렇게까지 투덜거린 것을 보니 괜히 죄송하기도 하고.
트리큘라는 머리에 세 개의 뿔이 난 흡혈 도마뱀이었는데 몰페라는 무인도에 주로 서식하는 종이었다. 해당 종은 4월 무렵에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무렵의 트리큘라들은 무척 예민하여 번식 과정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서식지가 뱃길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무인도라는 것도 연구의 어려움 중 하나였다. 전공이 희귀 생물 쪽인 스승님도 당연히 트리큘라의 생식에 관하여 연구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으셨다.
이번 연구를 위해 올해 초부터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 결혼식 때문에 1년간 준비한 연구 일정을 통으로 취소하게 생기셨으니 날짜를 바꾸면 안 되냐고 투덜거리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날짜를 바꿀 순 없으니 이번은 스승님이 양보하셔야 할 것 같았다.
룸펠은 옛 동화에선 난쟁이로 묘사되기도 할 만큼 큰 과일 두더지들이었다. 이 두더지들은 과일나무들의 수액을 유난히 좋아해 제대로 처치해 두지 않으면 한 해의 과일 농사를 무참히 망치는 범인들이었다.
스승님이 편지에 적으신 비르엔은 아르안 공국의 최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남쪽 지방이었다. 봄철에 룸펠 방지 조치를 해 두면 가을 무렵에 별 탈이 없는데 이번 봄 무렵 아르안 공국은 대공위 계승 문제 때문에 공국 전체가 정신이 없었다더니 비르엔 지방 쪽에서 약을 제대로 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년처럼만 했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을 봄에 제대로 안 하고 가을에 해결해 달라 징징대니 스승님이 짜증이 나신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탑은 대륙의 여러 국가에서 재정과 물품을 지원받기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쯤 연구 일정 취소와 룸펠들을 상대할 생각에 짜증이 잔뜩 났을 스승님께 유감스러움과 감사를 담아 마음속으로 인사를 보내며 함께 보내신 소포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영상석 열 개 정도가 잘 포장되어 담겨 있었다.
웬 영상석이냐 하면……. 2주 전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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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볼 것이 있어 서재의 소파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뭐 하나 찾아왔던 케이든이 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영상석으로 나를 찍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촬영에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니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의 얼굴은 하늘이 내린 것 아닌가 싶어. 살면서 베푼 선행은 돌아온다더니, 내가 살면서 열심히 쌓아 온 덕을 리암, 그대로 돌려받은 걸까?”
“네, 네에?”
갑작스러운 감탄에 당황스러워 목소리가 삐끗했다. 이것도 그가 말한 ‘배우자의 의무’의 일환인 듯했다. 홧홧해진 얼굴을 들고 있던 책으로 가리며 주제를 돌리려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 그 뭐냐. 케이든은 영상석 찍은 거 없어요? 어릴 때라든가?”
“있긴 한데……. 수도 저택엔 없고 아미르 성에 보관되어 있네. 다음에 영지에 가면 보여 주지.”
내가 꼭! 보여 줘야 한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 손을 물끄러미 보던 케이든은 어색한 손짓으로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나와 엮은 새끼손가락을 살짝 당겼다 풀며 그가 말을 돌리듯 물었다.
“그대는? 그대도 몇 개 정돈 있지 않나?”
“저한테는 없고, 스승님의 서재에 있을 거예요. 보내 달라고 해 볼까요?”
“소중한 제자의 예비 신랑이 부디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게.”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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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상석은 딱히 내 어린 시절을 보존하기 위해 찍은 것은 아니었고, 마법을 연습하는 과정을 찍어 놨다가 다음번 연습에 참고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 수가 꽤 되니 몇 개 정도는 어릴 때 모습이 잘 담겨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스승님한테 편지를 바로 보냈었는데 이번에 답장하시면서 편지와 함께 보내 주셨다.
영상석을 오랜만에 마주하니 스승님이 무슨 영상을 보내 주셨을지 몰라 조금 떨렸다.
시험 삼아 하나를 틀어 보니 영상석에 저장된 환상이 현실에 나타나 그때의 모습을 비추었다. 나타난 환상 속에서는 열 살 무렵의 꼬마가 뭐가 그리 골이 났는지 팔짱을 끼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꼬마를 바라보는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건조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었다.
- 리암, 네가 아무리 삐져 있어도 첼로라 서식지에 널 데려가 줄 순 없단다.
- 안 삐졌어요.
- 그러니? 그럼 심술 난 다람쥐처럼 구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 스승님이 절 첼로라 서식지에 데려가 주면요.
- 저런.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다람쥐랑 수업하는 수밖에.
- 이익.
영상 속의 꼬마는 스승님의 말에 잔뜩 심통이 나 파란 눈을 치켜뜨고 스승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투정이 조금도 통하지 않은 채 단호한 거절만 되돌아오자 꼬마는 결국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바닥에 훼딱 드러누워 팔다리를 휘저으며 온갖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까칠한 꼬마가 온몸으로 바닥의 먼지를 청소하며 떼를 써도 스승님은 익숙하다는 듯 꼬마의 투정을 무시하고 마력 운용법을 읊어 주며 마법을 시연해 주었다.
스승님께서 꼬마가 짜증을 내며 징징거리든 말든 운용법을 다 읊은 후 따라 해 보라 하자, 눈을 치켜뜨며 위를 올려다본 꼬마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씩씩거렸지만 그래도 행패를 잠시 멈춘 후 몸을 주섬주섬 일으켰다. 자리에 털썩 앉은 꼬마는 스승님이 말한 그대로 마력을 움직여 공중에 작은 빛 무더기를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굳이 이 영상을 골라 보내 준 스승님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역시 결혼식 날짜에 대한 복수인가? 물론, 스승님이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보내셨을 리는 없고 물어보면 ‘왜? 귀엽지 않니?’라고 답하실 게 분명했다. 가끔 스승님의 미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첼로라는 잎이 두 개가 달린 유선형 몸체를 가진 식충 식물이었다. 이 무렵에 잎이 세 개인 첼로라를 발견하면 행운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한동안 첼로라 서식지에 데려다 달라 떼를 썼었는데 그때의 영상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떼를 써도 스승님은 절대 넘어가 주시지 않았다. 이후로도 한참 있다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데려가 주셨지 아마? 이때 잎이 세 개인 첼로라를 찾겠다고 서식지를 다 뒤지다 돌아가기 직전에 구석에 핀 세 잎짜리 첼로라를 발견해 신나서 스승님께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나머지 영상들도 확인할까 하다가 다 이런 영상일 것 같아 조용히 소포 상자를 다시 덮었다. 아무래도 케이든한테 이 영상들을 보여 주는 것은 재고해 봐야 할 듯했다.
소포 상자를 구석에 밀어 넣고 기지개를 피던 중 정면에 걸린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영상 속에서 떼를 쓰며 투덜거리는 꼬마가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여전히 앳된 인상의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굳혀 보았다. 거울 속에 리암 카터가 나타났다.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접어 웃어 보았다. 거울 속에 내가 나타났다. 천천히 미소를 풀고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시 조금 전의 꼬마가 나타났다. 꼬마가 내게 물어왔다. 너는 누구야?
‘나?’
“리암 카터.”
꼬마의 말에 대답하는 순간 거울 속 청년의 모습은 하나가 되었다. 그는 되바라진 꼬마였었고 신경질적인 리암 카터였으며 동시에 나였다.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자연스럽게 리암 카터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인 때가.
거울 속 청년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놀랍도록 익숙한 모습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직후 리암 카터와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지 않은 이유에는 기억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이 외양도 한몫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이 세계에 잡아 둔 것은 외양뿐만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직후 첫 번째 회귀를 겪은 나를 채운 것은 리암 카터의 자아였다.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의 자아는 첫 번째 회귀 직후 내가 실패할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나를 처음부터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에 막 도착한 이방인을 가르치듯 그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겪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볍게는 물건을 사는 법부터 무겁게는 살인하는 법까지.
“봐. 이렇게 하는 게 효율적이야.”
리암은 그의 스승이 그러했듯 내가 직접 해낼 때까지 하나하나 시범을 보이며 나를 가르쳤다. 그 순간의 나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러했다. 그리고 절반 정도의 회귀를 거쳤을 무렵부터 그의 자아는 ‘나’에게 자리를 넘기며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혼자만의 세월 끝에 나는 리암 카터가 되었다. 그렇다고 리암 카터의 자아가 사라졌느냐고 한다면, 느껴지기론 그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서로 섞여서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 과정에서 누구의 자아가 더 강한지의 비중이 달라졌을 뿐이었고 이제는 서로의 자아를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섞인 상태였다. 지금의 나는 ‘리암 카터’라고 하기엔 너무나 밝았고, ‘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타인에게 냉정했다.
사이비 교주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지껄였던 말은 대부분이 헛소리였지만 하나 정도는 건질 말이 있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리암 카터는 무엇을 위해 나를 그의 운명에 끌어들인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 기억은 없었다. 교활한 과거의 나는 자신의 기억을 일부 지운 채 현재에 넘겨주었으므로. 아마 내가 알았으면 그의 공고한 자아를 이겨서라도 도망가려 할 기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나를 끌어들여 미래를 바꾸고자 하였다. 내가 도망가지 않도록 20번 가까이 되는 회귀의 충격을 그가 감당해 가면서까지 말이다.
그런 과거가 얄미웠으나 한편으론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손뼉을 쳐 주고 싶었다. 이제 ‘리암 카터’의 과거는 기억하지만, ‘나’의 과거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느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가 이겼다. 나는 이제 리암 카터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며 내가 아는 미래를 바꾸려 발버둥 치는 중이었으니까.
“에휴.”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며 카펫 위에 드러누웠다. 깊이 생각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울컥 화가 일었지만 그래 봤자 과거의 내가 나한테 한 짓인데 스스로한테 화를 내봤자 뭐 하나 싶었다.
복잡하지만 심경이 그랬다. 맥없이 누워 있던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쪽지 한 장을 꺼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갇힌 자여. 스투라티아로 오라.]
사이비 교단에서 누군가가 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쪽지였다. 저택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다가 쪽지를 발견한 후 지금까지 언제, 누가 넣었는지도 모르는 이 수상한 쪽지를 버리지 못한 것은 이 쪽지에 적힌 장소 때문이었다.
스투라티아. 또 다르게는 신들의 평야로도 불리는 이곳은 대륙의 중심에 있는 평야였다. 여전히 신화시대의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 과거 신들이 사랑하던 평야인 이곳에선 신들의 힘이 여전히 조금이지만 나타나고 있었다.
신의 영역인 시간, 신들의 평야로 오라는 쪽지. 두 개의 조합이 결코, 우연일 리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읽어서 해진 쪽지를 만지작거리다 상체를 일으켰다. 더 이상의 고민은 쓸데없었다.
지금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곧 ‘원작’은 끝이 나고, 나는 여전히 방법을 찾지 못했다. 더는 내가 처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되는 때가 도달한 것이다. 내가 마주할 진실이 무엇이든지 이제 부딪쳐 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