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가을의 수선화 (5/13)

Chapter 5. 가을의 수선화

남자는 흔히 말하는 악당이었다. 이 나라의 주인인 왕조차도 쉽사리 뿌리 뽑지 못하는 뒷골목의 흉악 조직에 몸을 담아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가는 삶.

어릴 때 운 좋게 큰 조직과 연줄이 닿아 그곳에 들어간 남자는 줄곧 남의 삶을 빼앗으며 자신의 삶을 연명해 갔다.

남자는 자신의 삶에 큰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악당이라 비난하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영원한 악당의 위치에서.

그러나 지금, 남자는 처음으로 악당의 자리가 아닌 약자의 위치에 주저앉아 목을 죄어 오는 죽음에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선명하게 들려오는 저벅이며 걷는 소리에 남자는 자신의 숨이 새어 나갈까 봐 두려워 입을 틀어막았다.

간신히 몸을 구겨 넣어 숨은 철제 상자 틈 사이로 보이는 핏빛 광경에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달달 떨렸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모여 낄낄대던 얼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약한 풍선처럼 터져 사방에 살점과 골수들이 흩어져 있었다.

“으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비명이 들렸다. 그러나 비명은 길지 않았다. 목을 옥죄는 것처럼 끅끅거리던 소리는 금세 사그라지며 이미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이 더욱 불어났다.

흘러나오는 피를 본 남자는 끔찍한 죽음의 공포에 대소변을 지리며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몸을 주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든 몸은 주인의 의지를 듣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남자는 눈도 감지 못한 채 바깥의 광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흥건한 피 웅덩이 가운데에 이 모든 학살극의 주인공이 서 있었다. 달빛 아래에 선,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조각상처럼 아름다웠으나, 학살을 저지르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그 모습은 남자가 보기엔 악귀에 가까웠다.

남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듯 가볍게 몸을 돌린 사내는 더 남은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자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상자 속의 악당은 제발 사내가 이대로 물러나기를 빌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남자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듯 사내는 손을 폈다. 손 위에 순식간에 파란 작은 마법진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마법사는 음정,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빙글 돌았다.

“솔로몬 그런디는,

월요일에 태어나서,

화요일에 세례받고,

수요일에 결혼해서,

목요일에 병이 들어,

금요일에 위독해지고,

토요일에 세상을 떠나,

일요일에 장례 지냈다.”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 주는 동요를 고저 없이 흥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마치 죽음의 초읽기 같았다. 남자는 그 노래를 들으며 초조하게 손안의 반지를 굴렸다. 평소 어울려 놀던 조직원이 어렵게 얻었다며 술 마시던 내내 자랑한 마력저항석 반지였다.

정체 모를 마법사의 습격에 앞에서 대기하던 놈들의 머리가 분수처럼 터져 나갈 때, 거기에 휩쓸린 놈의 시체에서 남자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반지를 빼내어 도망쳤다.

남자는 부디 이 반지가 저 악귀에게서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빌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평생을 악당으로 살아온 남자의 기도에 신은 응답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그런디의

일생은 모두 끝이 났다.”

노래를 끝마치는 목소리와 함께 손안의 반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반지 파편으로 피투성이가 된 손의 고통에 저도 모르게 꽥 비명을 지른 남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눈을 돌리자 피 웅덩이 속에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하얀 얼굴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괴기스러워 참을 수 없는 공포가 일었다.

천천히 상자를 향해 다가온 사내는 오만 분비물을 흘리며 자신을 피해 좁은 상자 속에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가는 악당의 몸짓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말을 지껄였다.

“좋은 인생 같지 않아? 순리대로 살고 죽는다는 거 말이야.”

“으, 어, 사, 살려……. 살려…….”

악당의 애걸에 사내는 웃는 얼굴로 유감을 표했다.

“그건 안 되겠는걸. 난 이제 실수하면 안 되거든.”

악당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자의 문을 열어젖힌 사내는 허리를 숙여 장갑을 낀 손으로 남자의 뺨을 툭툭 쳤다.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러나 유감이겠지.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진 마. 너도 이렇게 죽기엔 억울한 인생을 살진 않았잖아?”

조금 전 동료들을 살육할 때 그랬듯, 천천히 손을 펴는 사내에게 남자는 더듬거리며 애걸했다.

“아내가! 아들이, 있습니다. 제발, 제발……!”

남자의 애원에 사내는 눈을 한 차례 깜빡이곤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래? 다음에 참고하지.”

남자에게 그 말을 이해할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말을 마친 사내가 그대로 주먹을 쥐는 순간 악당의 머리는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뭐어. 다음이 있다면 말이야.”

이왕이면 없었으면 좋겠네. 리암 카터는 자신에게 닿기 전 허공에서 멈춘 핏방울들을 한데 모아 상자 바닥에 던져두며 몸을 돌렸다.

피가 실개울처럼 곳곳에서 흐르는 공터 위에선 모든 것을 목격한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때의 달은 언제나 빛으로 가득 찬 보름달이었다. 리암 카터는 더 남은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 보며 이곳에서의 악몽을 떠올렸다.

회귀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큰 줄기는 그대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행동으로 달라질 수 있는 부분들은 그 바뀐 부분을 반영하듯 연쇄적으로 변경되곤 했다.

그때 역시도 그랬다. 트리불라의 수뇌부를 찾아내려는 라비와 케이든을 향한 습격을 옛 기억 그대로 막아 냈던 그때의 리암은 이런 당연한 사실을 잊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심은, 치명적인 희생을 대가로 가져갔다.

“…케이든?”

쿨럭.

리암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위쪽에서 흐르는 피를 맞으며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리암 카터를 감싸 안듯 몸을 돌린 케이든의 왼쪽 가슴에 뒤로부터 쑤셔진 날카로운 검날이 삐져나와 있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는 리암의 시선에 케이든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 나?”

말을 할 때마다 까만 피가 울컥 목구멍에서 솟구쳐 입가로 새어 나왔다. 넋이 나간 리암 카터를 위로하듯 웃은 케이든의 몸이 그대로 떨궈졌다.

리암 카터의 품에 안긴 채 축 처진 팔에서 힘이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리암 카터가 곧 느낄 수 있던 것은 그새 심장이 멈춘, 차갑게 식은 몸이었다. 그 굳은 몸을 붙잡고 리암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아.

이 끔찍한 삶.

어째서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죽은 거지? 이 삶은 얼마만큼의 불행을 내게 안겨 줘야 만족스러운 것일까. 리암은 텅 빈 눈으로 품속 케이든의 몸을 붙잡고 떨다 천천히 손을 내려 여전히 단단히 검을 쥐고 있던 케이든의 손을 맞잡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당신의 삶을 되돌려 줄 테니까.

리암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들어 올려 가슴을 검으로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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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볍게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리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방심했기에 숨어 있던 조직원을 놓치고 말았었다.

지난번엔 아무 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같으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몸을 돌린 대가는 너무나 컸다. 케이든은 조직원의 칼에서 리암을 보호하며 대신 그의 목숨을 내놓았었다.

리암은 여전히 그때 케이든이 왜 자신을 지켜 주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이유를 파헤치는 대신 그는 그때의 일이 떠오를 때마다 다짐했다. 똑같은 악몽을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리암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발아래의 피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원작’ 때문에라도 이곳을 소탕해야 했다.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상 최대한으로 원작을 따라가 주는 것이 좋을 테니까. 하지만, 이 사건 정도는 혼자서 해결해도 괜찮을 것이다.

피 웅덩이에 반사된 핏기 어린 달을 내려다보며 리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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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오늘 새벽 급습 예정이었던 트리불라의 아지트가 이미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케이든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부하의 말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부하에게서 보고서를 넘겨받았다. 보고서를 읽는 케이든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생존자 전무. 사망자 전원 머리가 터진 채 발견됨. 범인의 흔적이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마법사로 추정.]

“우선 트리불라에 원한을 가진 마법사들을 추적하라 명령을 내릴까요?”

“아니, 추적하지 않는다.”

“예?”

상관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뜬 부하에게 케이든이 재차 설명했다.

“우리가 쫓던 것은 어차피 트리불라 쪽 아닌가. 당장 정체를 알 수 없는 관계없는 이를 쫓느라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순 없다.”

그러니, 사태 파악을 우선하고 조직이 숨긴 또 다른 아지트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을 우선하라는 케이든의 말에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례 후 집무실을 나섰다.

부하가 완전히 집무실을 나서는 것을 본 케이든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부하에겐 정체를 알 수 없다 했지만, 케이든은 트리불라의 한 아지트를 몰살한 이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리암은 순한 성격과 다르게 그 손속이 잔인한 면이 있었다. 보고서 속 사망자들의 모습은 리암이 사람을 죽일 때 주로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는 사람의 목숨을 귀히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원한이 없는 이들을 이렇게 몰살시킬 정도의 정성 역시 없었다.

거기다 평소 사용하던 방식을 그대로 쓴 것을 보면 딱히 자신의 짓임을 숨기려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리암에게 물어보면 그는 늘 그렇듯 순진한 눈망울로 생일이 지난 지도 얼마 안 돼서 피곤할 텐데 케이든이 나섰다가 다칠까 봐 자신이 그냥 갔다 왔다, 는 둥 헛소리나 해 댈 것이 분명했다.

케이든은 리암이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향해 짓는 순진한 표정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헛소리에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리암의 저런 말은 케이든이 질색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잠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내리누른 케이든은 천천히 리암의 학살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내가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도 나에게 말없이 다녀왔다는 건 예의 그 ‘돌아간다.’와 관련 있는 것일까?

케이든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리암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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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을 처음 보았을 때 케이든은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의 그는 울기는커녕 소년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케이든을 향해 눈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케이든은 그 웃는 얼굴에서 가려지지 않은 슬픔을 발견했다.

의아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데 왜 자신을 향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에게만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인지. 그래서였을 것이다. 녀석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오랫동안 추적하던 조직을 쫓는 막바지 과정에서 제법 쓸 만해 일에 합류시켰던 라비 플레어가 데려온 녀석은 첫 만남부터 괴상했다.

조직의 곁가지쯤 되는 놈들의 아지트에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위험에 빠진 라비 플레어를 구해 줬다던 녀석은 내내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다가 현장에 도착한 케이든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만나서 반갑다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조금 괴짜 같긴 하지만 쾌활하고 성격 좋은 사람으로 충분히 여겨질 만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를 데려온 라비 플레어가 어쩐지 쭈뼛거리며 껄끄러운 태도로 리암을 대하는 것이 보여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케이든은 리암을 그저 조금 이상한 녀석, 정도로만 인식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리암 카터가 벌여 놓은 현장을 본 케이든은 그 생각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조금 이상한 녀석에서 미친놈으로.

라비 플레어를 죽이려던 녀석들을 역으로 리암이 처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일 줄은 정말로 예상 못 했었다.

내내 창백한 안색이던 라비 플레어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그곳엔, 머리 없는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단 한 구도 빠지지 않고 그 꼴이 난 시체를 보고 있으니 속이 역해져 리암에게 물었다.

“그대가 한 짓인가?”

“네에.”

“아무리 범죄자라 해도 처리하는 과정이 지나치군.”

“음. 하지만 효율적이잖아요?”

“효율적?”

“애매하게 처리했다가 살아 있으면 어떡해요?”

케이든의 말에 리암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찼다. 저 순진한 낯짝으로 살인에 효율을 따진다니.

리암의 되물음에 절로 표정이 일그러지자 녀석은 되레 자신이 더 허둥거리며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며 케이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갔던 예의 그 슬픈 눈빛이 더해지는 꼴이 보였다.

그 눈을 보니 맥이 풀려 더 놈을 몰아붙일 생각도 가셨다.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순한 얼굴에 케이든은 한숨을 쉬며 논쟁에서 물러섰다. 오늘 처음 본 마법사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우연히 마주친 거겠지, 라는 케이든의 생각과 달리 그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케이든과 얽히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조직을 쫓는 과정이 겹친 그는 세 번째 마주친 때 케이든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자신도 이 일에 끼워 달라고.

케이든은 마탑 소속이란 것을 제외하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과거도 정체도 불분명한 미친놈을 이 일에 합류시키는 것이 맞는 짓인가 고민했지만 이내 곧 승낙했다.

마탑의 마법사니 분명 도움이 되는 전력일 테고 허튼짓하면 그때 배제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케이든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점점 푸른빛을 더해 가며 불안해하는 눈을 보기 싫었다.

그때는 녀석의 불안한 눈빛을 보기 싫은 것에 온갖 논리를 들이대며 정당화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 앳된 얼굴이 슬픔에 물들어 가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 같다.

그렇게 리암 카터와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되며 케이든은 리암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실제와 서류 속 행적이 아주 달랐다.

과거가 불분명하다고 한들 녀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흔적과 목격자가 남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케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암 카터에 대한 서류를 받아 들 수 있었고, 서류 속 리암 카터의 행적에서 판단할 수 있는 녀석의 성격은 냉막함, 그 자체였다.

케이든은 실제의 리암을 파악하기 전 서류 속 녀석에게서 삭막함을 느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마법 외의 것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마법사.

어떤 의미에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법사의 전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서류 속 리암 카터를 보고 있으면 그가 살인에 효율에 따지던 그 모습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이해와 실제는 달랐다. 괴이했던 첫 만남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제의 리암 카터는 싱그럽게 웃을 줄 아는,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케이든에게 곧잘 말을 걸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좋아하며 바다 같은 눈을 한껏 접으면서 웃는 남자는 그의 시선을 금세 앗아 갔다.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리암은 케이든이 자신을 보는 것을 금세 눈치채곤 활짝 웃으며 다가오곤 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어릴 때 키우던 커다란 개를 떠올리게 했다.

어디에 있든 케이든이 보고 있으면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검은 개와 녀석은 매우 닮았고, 그 사실은 케이든을 꽤 즐겁게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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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이었다. 약속 때문에 방문한 가게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녀석은 케이든을 발견하자마자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에게로 서둘러 다가왔다.

그 모습이 유독 그날따라 기억 속의 개와 겹쳐 보였다. 사람에게서 개를 떠올리는 것이 우스워 케이든이 가볍게 웃자 멍한 눈으로 케이든을 바라보다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는 녀석의 모습에 케이든은 순간 깨달았다.

‘아, 이 녀석.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노골적인 감정을 눈치 못 챌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리암 카터의 감정을 깨달은 순간, 케이든은 유쾌해졌다.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란 생각도 잠깐 들긴 했지만, 원래 사랑이란 감정이 마냥 순리에 따라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싶었다. 애초에 그의 부모님도 세 번 만난 후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약혼을 결정하시지 않았나?

리암 카터의 사랑을 알아챈 뒤 케이든에겐 새로운 취미가 생겨났다. ‘리암 카터 관찰하기’라는 정말 쓸데없는 취미가 말이다. 친구들이 안다면 악취미라고 비난할 것이 분명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렇게 즐거운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가끔은 어린 애를 놀리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녀석은 자신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녀석도 이 취미가 그리 싫지는 않을 것이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리암을 관찰하던 어느 날, 케이든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리암을 집착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있을 법한 장소에선 습관적으로 녀석을 찾곤 했고, 그가 없단 걸 깨달으면 살짝 실망감이 일었다.

자신을 내내 바라보며 쫓는 리암의 반응이 우스워서 시작한 일인데 이젠 도리어 리암의 시선이 다른 데 향해 있으면 살짝 짜증이 일었다. 이 감정을 발견한 순간 케이든은 충격에 빠졌다. 아, 젠장.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다더니. 지금의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볕 좋은 한낮에 책상에 앉은 케이든은 퀭한 눈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민했다. 고백할까?

하지만, 먼저 고백하려니 괜히 심술이 일었다. 쟤가 날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되레 넘어가서 고백이라니, 어쩐지 못마땅했다.

유치하고 심술궂은 어른은 생각했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녀석이 고백하지 않으면 그때 내가 하지 뭐. 신중함을 가장한 비겁한 어른은 그렇게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어린 청년에게 멋대로 짐을 미뤄 버렸다.

하지만, 이건 반 정도는 단순한 심술이었지. 이런 상황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케이든은 당혹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눈물범벅이 된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업무 중에 갑자기 찾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술기운에 붕붕거리며 자신의 손을 잡고 고백하는 녀석을 마주했을 땐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내심이 서서히 닳아 가고 있던 비겁한 어른은 만족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눈을 접어 웃으며 녀석의 고백을 받아 주었다.

리암은 자신의 고백이 받아들여질 것이라 예상 못 한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케이든을 바라보다가 세상을 얻은 것처럼 웃었다. 못된 어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도 모르고 말이다.

어린 애를 놀린 못된 어른, 케이든은 그 모습이 귀여워 미소 지었다. 여기까진, 정말로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그런데 대뜸 리암 카터가 케이든과 자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케이든은 그 요구에 정말로 당황했다. 아무리 마음이 통했어도 그렇지, 오후 세 시에?

거기다 케이든은 지금 일하던 중이었다. 지금 녀석을 데리고 침실로 갔다간 상사가 한참 어린 꼬마를 사귀자마자 잡아먹었단 걸 부하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셈 아닌가. 가뜩이나 쉬는 날 부하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상황에서 상사로서 행할 바람직한 짓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리암은 딱 봐도 술기운에 고백하는 것인데, 술이 깬 다음 정신을 차리면 녀석의 생각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술이 깬 뒤에 무르려고 해도 별로 놔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케이든은 아쉬움을 삼키며 정중히 녀석의 조름을 잘라 냈다.

거절을 들은 리암은 알겠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들어 보라 하니 머뭇거리며 고개를 든 녀석이 케이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참지 못하고 그 울먹이는 파란 눈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소리라도 크게 내면서 울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리암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하얗고 잘생긴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된 걸 바라보며 케이든은 조금 곤란해졌다. 생각보다 녀석이 우는 모습이, 사람의 욕구를 자극했다.

어쩐지 쓰레기가 된 기분에 케이든은 한숨을 삼키며 리암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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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서 리암 카터는 생각보다 더 저돌적이었다. 사실 녀석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에 올라탈 때 조금 황당했다. 지금 이 녀석이 나를 깔려는 건가?

술 취한 놈을 뒤엎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기에 잠시 자세를 바꿀까 고민했지만, 관뒀다. 자신이랑 한번 자 보겠다고 끙끙거리는 어린 애를 이겨 먹어서 뭐 하겠는가.

하지만 녀석이 자신의 안에 집어넣을 땐, 불과 10분도 안 지난 결정을 후회하긴 했다. 살면서 이렇게 빨리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큰 물건을 제대로 풀지도 않은 아래에 박아 넣으려는 어린애를 황급히 붙잡으며 비겁한 어른은 지금이라도 위치를 뒤집을까 고민했지만, 한껏 몸이 달아 얼굴을 붉히며 자신을 수줍게 바라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절로 전의가 상실돼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는 술에 취해 평소보다 말을 안 듣는 남자에게 천천히 뒤를 푸는 것부터 시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술 깨고 두고 보자. 리암 카터.

“흣, 리암. 천천히. 읏. 아! 아……!”

“케이든. 케이든.”

케이든이 허락하자마자 구멍을 벌리며 들어오는 남자는 절박한 몸짓으로 케이든에게 달라붙으며 허리 짓을 하였다. 평소엔 어색하게나마 공작님이라고 부르던 놈이 정신을 놓았는지 이름을 불러 대며 그에게 얼굴 곳곳에 입 맞췄다.

천천히 하라며 말리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서툰 몸짓으로 쉴 새 없이 처박는 물건에 케이든은 손에 핏줄이 서도록 침대 시트를 붙잡으며 신음했다.

큰 물건이 빠듯하게 안을 채워 오는 것에 솔직히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녀석과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낯선 쾌감과 어설픈 애무에 발기해 꺼떡이며 단단한 배에 문질러지는 케이든의 것을 느낀 리암은 쾌락에 젖은 눈을 하면서도 용케 그것을 정성 들여 문질러 댔다.

아래와 성기에서 동시에 자극되는 쾌락에 절정에 달한 케이든은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사정했다.

사정의 여운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케이든을 멍하니 바라본 리암은 손에 묻은 케이든의 정액을 핥았다. 붉은 혀가 하얗고 큰 손에 묻은 끈적한 정액을 핥는 모습이 외설적이었다. 당황한 케이든이 하지 말라며 말리자 배시시 웃은 리암은 맛이 없다며 입을 삐죽였다.

술기운이 오른 어린 애인의 심기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케이든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잠시 멈춘 사이에 리암은 어느새 그의 안에 사정한 성기를 천천히 구멍 밖으로 빼내었다.

구멍 안에 질펀하게 싸 놓은 정액이 성기를 따라 주룩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민망하여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곧 이어진 리암의 행동은 더 경악스러웠다.

리암은 자신의 성기를 따라 빠져나온 정액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액이 흐르지 못하게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으며 다른 손으로 제 성기를 문질렀다.

약간만 흔들었는데 어린 청년의 것은 금세 발기해 꺼떡이기 시작했다. 금세 단단해진 그곳을 목격한 케이든은 등골이 서늘해져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이어진 행동에 저지당했다.

리암은 흐르던 정액을 막던 엄지로 입구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구멍 안에 집어넣곤 정액을 펴 바르듯이 문지르며 내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무가내로 제 성기를 들이대며 어떻게 허리를 움직여야 하는지도 케이든에게 물어보던 어린 사내는 배우는 것이 빨랐다.

그는 두꺼운 엄지를 시작으로 손가락을 하나 두 개 넣으며 내벽을 문지르기도 하였고 성기를 박아 넣듯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내벽을 자극했다. 사정 후에 한껏 예민해진 몸이 그 손짓에 금세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몸을 달구는 쾌감이 싫지는 않았지만, 통제권을 뺏기는 기분은 거북하여 케이든은 리암을 달래듯 불렀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리암. 오늘, 은 흣, 처음이니, 여기까지만 하지.”

“그치만……. 내일이면 전 돌아갈 텐데.”

“돌아간다고?”

상대방이 이해 못 할 소리만 늘어놓는 걸 보니, 리암은 술기운에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잘 모르는 듯했다. ‘돌아간다.’고 말하며 울상이 된 얼굴에 케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젠장, 또 저 얼굴.

그가 저렇게 울먹이면 케이든은 어쩐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케이든이 체념하며 몸을 내어 주자 리암은 사양치 않고 재차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시작된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제게 박아 넣는 녀석의 얼굴이 보기 좋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울게 놔둘 수는 없어 케이든은 리암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고 눈가를 엄지로 살짝 쓸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을 느낀 리암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제 얼굴에 닿은 따뜻한 손을 붙잡은 그는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돌아가기 싫어…….”

“안 돌아가면 되지. 내가 그대 하나 책임 못 질 것 같나?”

“아뇨. 아뇨. 케이든. 그치만, 나는.”

케이든의 말에 리암은 서러운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 그러더니 끝끝내 말을 맺지 못하며 거듭 돌아가기 싫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주정뱅이의 이유 모를 서러움에 케이든은 그저 의문을 품은 채로 어린 애인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 낮부터 이어진 격한 정사에 평소보다 느지막이 일어난 그는 집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리암의 행방에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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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독수리도 사냥에서 실패한다더니. 공작님께도 이런 날이 발생하고 말았군요.”

“그 입 다물게. 잭슨.”

케이든은 살벌하게 눈을 치켜뜨며 보좌관을 노려봤다. 심기가 잔뜩 불편한 상사의 윽박지름에 케이든의 오래된 보좌관 잭슨은 어깨나 으쓱였다.

잭슨의 저 심드렁한 태도는 언제나 보는 사람의 화를 해일처럼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탁월했다. 케이든은 이를 갈며 책상 위 잉크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자신이 이 잉크통을 던져 저 유능하지만, 짜증 나는 보좌관의 머리를 깨는 일이 없도록 천천히 심호흡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상사의 인내를 무심한 눈으로 흘려 넘기며 잭슨은 손에 든 서류를 케이든에게 정중히 넘겼다. 케이든은 말을 짓씹듯 천천히 내뱉으며 물었다.

“뭔가?”

“공작님께서 어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느라 미룬 서류입니다.”

“…늘 말하지만, 잭슨, 자네는 자네의 능력에 감사해야 해.”

“충고 감사합니다. 공작님.”

왼쪽 가슴께에 정중하게 손을 올리며 충고 감사하다 빈말을 하는 보좌관의 건방진 행태에 이러다 정말로 잉크병을 던져 버릴 것 같아, 잉크병을 저 멀리 밀어 버린 케이든은 노기가 가득한 손짓으로 서류를 낚아챘다. 영지의 지난 분기 세금에 관한 서류였다.

평소였으면 금세 검토했을 서류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오늘 아침의 참담하기 그지없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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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의 나이 차는 무시할 것이 못 되는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엉겨 붙는 리암 카터를 상대하느라 무리한 바람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잠이 깬 그는 피곤을 이겨 내며 어렴풋이 눈을 떴다가 텅 빈 옆자리에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기 전까지 이어졌던 외설적인 풍경이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일어나다 욱신거리는 몸에 멈칫한 케이든은 무심결에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가 경악했다.

뒤처리가 하나도 안 돼 전날의 액체로 엉망인 다리 사이, 여기저기 뻐근한 몸, 짐승이 물어뜯기라도 했는지 깨문 자국이 잔뜩 자리 잡은 몸.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악인 것은 텅 빈 옆자리였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을 내디뎠다가 이미 온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옆자리를 느낀 케이든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주인의 부름에 들어온 시종은 엉망인 주인의 행색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순종적인 시종에게 곧 주인의 폭발 직전인 목소리가 내려왔다.

“래리. 어제 저택을 찾아왔던 마법사를 데려오게.”

당장!

그래도 차분하게 서두를 뗀 명령은 점점 격해지다 못해 마지막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시종은 알겠다 대답하면서 한동안 저택 분위기가 뒤숭숭하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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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케이든이 알게 된 것은 저택 어디에도 리암 카터가 없단 사실이었다. 저택 전체를 발칵 뒤집은 주인의 명령에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모여 리암 카터란 남자를 봤는지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리암 카터의 인상착의를 들은 신입 하녀 한 명이 자신이 아침에 저택을 나서는 검은 머리의 마법사를 봤다고 알렸다. 저택을 나선 남자가 마차를 잡고 주택가 방향으로 향했단 사실까지 말이다.

주인과 잠자리를 가진 직후 곧장 바람맞힌 마법사가 그 와중에 당당히 정문으로 나갔단 이야기를 전해 주는 잭슨은 조금 즐거워 보여 케이든의 화를 더욱 돋웠다.

아침의 일을 회상하던 케이든은 화로 경직된 얼굴을 손으로 한차례 쓸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사에게 보좌관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리암 카터의 집으로 가겠네.”

“집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장 마차 준비하게!”

보좌관에게 명령하며 일어난 케이든은 걸을 때마다 불편한 아래가 느껴져 이를 갈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에 손을 올려 문을 열려던 그는 잠시 멈춰 고개를 돌려 보좌관에게 명령했다.

“함께 갈 기사들도 따로 추리게. 리암 카터는 솜씨 좋은 마법사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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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탄 케이든은 불편함이 가라앉지 않는 아래에 짜증이 일어 손마디를 연달아 꺾었다. 팔짱을 낀 그는 어색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홧김에 리암 카터를 잡으러 그의 집으로 향하곤 있지만, 슬슬 화를 가라앉힐 필요는 있었다.

리암 카터는 케이든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심기가 불편하단 티를 내면 그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리암 카터가 어느 행동을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일단은 침착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눈치를 볼 거면 애초에 심기가 뒤틀릴 일을 안 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아무튼. 슬슬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케이든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눈을 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으니 아침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리암 카터는 어젯밤 ‘돌아가기 싫다.’라고 했다. 돌아가기 싫다는 것치곤 오늘 아침에 제 발로 훌쩍 집으로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중요한 말을 흘리는 일이 잦았으니까.

‘돌아간다는 건 보통 어떤 장소나 상태로 돌아간다는 상황에서 많이 쓰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 장소라기엔 뭔가 딱 들어맞지 않았다.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 리암은 집에 자기 발로 돌아가지 않았나.

‘아, 혹시 마법에 걸려 있어 강제로 돌아간 건가? 하지만 리암 카터쯤 되는 마법사를 강제할 방법이 흔치 않을 텐데.’

케이든은 명확하지 않은 추리에 우선 다른 가설을 고려해 보기로 했다. 상태를 의미했던 걸까? 상태라 하면, 서류 속 그 냉막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 상태로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이것도 이상했다. 자고 일어나면 성격이 바뀌는 사람이 있다곤 하지만, 리암 카터는 지난 몇 개월간 그런 조짐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싫다기엔, 서류 속의 그 상태가 어떤 면에선 리암 카터가 세상 살기는 더 편할 것이다. 케이든은 종종 리암 카터의 순한 성격을 볼 때마다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저렇게 해맑은 건지 걱정이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선 서류 속 성격으로 살면 적어도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귀엽진 않겠지만.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으며 케이든은 인상을 썼다. 어떤 가설도 명확하지 않았다. 우선 리암을 만나 모습을 확인해 보면 뭐든 하나는 명쾌해지겠지.

케이든은 마침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멈춘 마차를 느끼며 팔짱을 풀었다. 이제 녀석의 변명을 들어 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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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범 수단이라곤 하나 없는 다세대 주택의 입구에서 리암 카터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놈은 5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던 참이었는지 창문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

“공, 공작님.”

놈은 나를 발견했는지 놀라 나를 부르며 입을 떡 벌렸다. 어젯밤엔 잘도 케이든이라고 이름을 불러제끼더니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다.

창문에 발을 걸치고 몸을 바깥쪽으로 내민 꼴을 보니 뛰어내리려는 것 같아 어이가 없었다. 마법사가 5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을 리가 있나. 절반쯤 떨어졌을 때 본능적으로 마법을 써서 바닥에 착지하겠지.

그래도 떨어져서 괜히 어디 다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떨어지면 죽여 버린다는 수신호를 보냈는데 벙쪄 고개만 갸웃거리는 꼴을 보니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다.

우선 손짓을 해 부하들을 먼저 올려 보낸 후 천천히 5층까지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입주민들이 문밖으로 고개를 빼고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니 사람의 손길이 닿은 미모사처럼 고개를 움츠리며 문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막는 이 하나 없는 계단을 올라 활짝 열린 5층의 집 안으로 들어가니 부하들에게 잡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릎 꿇은 리암 카터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침부터 저택을 발칵 뒤집은 놈이라 그런지 사정을 모르는 부하들은 놈이 범죄자쯤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 녀석의 반짝이는 낯짝을 보니 오면서 가라앉힌 화가 다시 들끓어 천천히 검을 뽑아 녀석의 목에 갖다 댔다. 검에 베이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위협이 될 정도로 검날을 들이대며 녀석에게 물었다.

“리암 카터. 변명해 보게.”

“그으게요. 아침에… 그만 너무 놀라서…….”

“술주정뱅이를 받아 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한심한 대답에 내가 탄식하듯 혀를 차자 놈은 되레 울컥하여 내게 덤벼들었다.

“술 때문에 고백한 거 아니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그대가 원래 신의 없는 인간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무어라 한마디 할 때마다 풀 죽는 모양새가 어처구니없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아침부터 이 난리를 피우게 한 건지.

우리의 대화에서 지금 이 사태가 범죄자 검거가 아니라 상사의 치정 싸움임을 깨달은 부하들의 눈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리암과 나를 보는 녀석들을 가볍게 노려보고 다시 리암에게 시선을 내렸다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리암은 어느새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앙다문 채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여 어처구니가 없고 좀, 귀여웠다.

내 생각엔 리암 카터는 위기를 모면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녀석에게 약해질 짓만 이렇게 골라서 할 리가 없잖는가?

리암의 울먹이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괴감이 들어 작은 한숨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놈을 울려 놓고 그걸 또 귀엽다고 보고 있고, 잘하는 짓이다. 케이든 아미르.

내가 검을 거두자 놀랐는지 눈을 연신 깜빡이는 리암의 속눈썹의 움직임에 따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제도 그렇고 녀석이 저렇게 울고 있으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지니 아주 큰 문제였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어젯밤 그랬듯이 녀석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녀석을 달래 주었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지니까.”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리암 카터는 멍하니 나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더니 되레 엉엉 울어 버렸다.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한 말인데 되레 울려 버렸으니 당황스러웠다. 열두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서 그런가, 이 녀석의 심리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결국, 나는 녀석을 좀 더 달래 보다가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순 없겠다 싶어 훌쩍이는 걸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놈을 어깨에 둘러업고 집을 나섰다.

그는 훌쩍이는 중에도 어깨와 부딪친 배가 아팠는지 내게 자세를 바꿔 달라 요청했다. 녀석과 내가 무난하게 내려갈 만한 자세가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 리암을 다시 안아 들었다.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받쳐 안아 든 후 계단을 내려가니 녀석도 편하고 나도 편하니 괜찮은 줄 알았는데 리암은 또 뭐가 문제인지 내게 자세를 바꿔 달라 요청했다.

평소에는 내가 하는 것이면 다 좋다고 웃는 놈이 이상한 데서 까다로웠다. 잠시 멈춰 원하는 자세가 있느냐 물었더니 딱히 그것은 없었는지 고민하던 리암은 내 품 안에서 몸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여 자세를 다시 잡았다.

내 허리에 다리를 감은 뒤 목에 팔을 감은 녀석은 이게 좋겠다며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한 자세를 마다하고 제안한 것이 나무를 붙잡은 짐승 같은 자세라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녀석이 그걸로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녀석을 단단히 잡은 뒤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완전히 허리에 감지 못해서 긴 다리가 덜렁거리는 게 느껴져 정말, 이 자세로 괜찮겠냐 한 번 더 물어보니 녀석은 이게 좋다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기준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마차로 향하던 중 리암이 은근슬쩍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의 눈물 때문에 어깨가 축축해져 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전해져 와 기가 막혔다. 어린애랑 사귀려니 별일이 다 생기는군.

하지만 괜히 이 말을 했다가 녀석을 다시 울릴까 봐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놈이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더 뭐라 안 하실 거죠……?”

“스무 살짜리를 여기서 더 겁박해서 뭐 하겠나.”

진심이었건만 녀석은 뭐가 불만인지 내게 감은 팔과 다리에 힘을 더했다. 하여간에 귀엽게 군다.

아침에 녀석을 찾을 때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사리 구분이 명확히 안 되었는데 지금은 마냥 즐거우니 나도 내 상태가 황당했다.

마차에 리암을 태우고 녀석이 하는 말에 대충 답을 해 주며 녀석을 관찰했다. 오기 전에 ‘돌아가기 싫다.’가 무엇인지 여럿 생각해 봤지만, 지금 리암의 상태를 보니 가설들을 모조리 폐기해야 할 것 같아 골치가 아팠다.

집을 순순히 떠나오는 것을 보니 어딘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도 아니었던 것 같고, 상태도 평소의 그 상태 그대로고. 대체 뭐에 ‘돌아가기 싫다.’라는 거지?

본인이 지은 죄를 아는지 얌전히 눈을 내리깔며 손가락 장난질을 하는 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도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 말한 걸 보니 본인 입으로 말할 생각은 없어 보였고……. 어려운 문제였다.

몸 상태도 별론데 한 문제를 계속 고민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파져 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환하게 웃으며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과 풍요로운 가을 풍경, 예년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풍년제의 광경이었다.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예년? 잠시만.’

나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말도 안 되지만, 만약에.

‘돌아가기 싫다.’라는 게 시간이라면?

바깥 풍경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나도 모르게 일순 헛웃음을 지었다. 말이 돼야지, 이게.

세상엔 놀라운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하지만 그래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법이란 신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불가사의를 마법의 탓으로 돌리곤 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편견과 오해에 기반한 사고였다.

마법사가 제아무리 일반인이 보기엔 놀라운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해낸다고 해도 그들도 결국은 존재하는 것을 변형할 뿐이다.

창조와 시간 같은 세상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영역은 마법사들의 소관이 아니라 흔히 이야기하는 신의 영역이다. 이제는 잠자리에서 어린 애들한테나 이야기해 주는 용도로 쓰이는 신화 속 존재들의 영역.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일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마법이란 학문을 알아 두었기 때문에 방금 든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고 시간이란 선택지를 그냥 제쳐 두기엔 어딘가 걸쩍지근했다. 리암의 지난 행적들을 곱씹어 보면 더더욱 말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언제나 여유롭던 모습. 우리가 쫓는 조직이 언제 어디서 움직일지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던 녀석.

마치 미래라도 미리 보고 온 것처럼 일을 매끄럽게 풀어 가는 놈을 보면서 원래는 녀석이 유능한 정보원이라도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아니면 그가 마법으로 조직들을 염탐했든가.

둘 중 어느 쪽이냐 물어도 리암은 눈만 굴리며 답해 줄 수 없다고 해서 추후 일을 진행하다가 녀석과 틀어지는 일이 생기면 한번 심문해야겠단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가 돌아간다는 게 시간이라면…….

걷잡을 수 없이 꼬여 가는 생각의 흐름에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방금 떠오른 가설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여럿 떠올리고 있으려니, 왕궁 수사관의 일을 갓 맡았을 무렵 나를 교육하던 전임 왕궁 수석 수사관 트레버 남작의 말이 떠올랐다.

“케이든 수사관님, 수사를 진행할 때 수사관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위험한 함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정에 휩쓸리는 것 아닙니까?”

“그것 역시 조심해야 할 일이죠. 하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상식에서 우러나오는 편견입니다.”

남작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원론적인 답변이라 내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내게 사례를 하나 들어 주었다.

“과거 블램 조개에서 추출된 향료는 수사에 큰 지장을 주곤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특정 온도에서 블램 조개의 향료는 독약 헤스와 구분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블램과 헤스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시약이 발명되기 전까지 둘을 혼동시켜 수사를 방해하는 수법이 인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 일이 하도 잦아 시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현장에서 블램 조개의 향료가 나오면 수사관들은 이 사건에서 헤스가 사용되었는지에 우선 집중하였습니다. 하지만, 되레 이것을 역으로 이용할 때도 있었죠.”

남작은 가만 웃으며 예전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살인 현장에서 블램 조개의 향료가 발견돼 모두가 헤스를 검출해 내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헤스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아 유력한 용의자를 옭아맬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던 참이었습니다. 다시 현장을 살피던 중 시체에 유난히 노란 기가 돌던 것에 집중한 신입 수사관이 다시 조사해 본 결과, 헤스가 아닌 메스타민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죠. 메스타민은 시간이 지나면 몸속에서 분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블램 조개를 이용해 수사를 지연시키려던 수법이었습니다.”

남작은 그 말을 하며 그 신입 수사관이 자신이었다고 은근히 뻐기듯 말하였다. 그 충고에 작게 웃으며 앞으로 수사관 생활에서 유의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남작의 그 말은 어디까지나 상식을 이용한 속임수를 조심하란 이야기였지, 이렇게 상식을 파괴하는 일에까지 적용할 원칙은 아닌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을 고민하려니 골치가 아파져 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갑자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지금까지 한 모든 생각을 잊고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뭐?”

녀석의 뜬금없는 소리에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리암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가 지금 나의 앉은 자세를 보고 물은 것임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다.

이 자식이 진짜. 누군 지금 자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가설까지 세워 가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아니 애초에 지금 내 자세가 삐딱한 것도 이 녀석 때문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눈을 홉뜨고 리암을 노려보고 말았다. 녀석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자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며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의자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으며 내 눈치를 보는 놈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갈피가 잡힐 듯도 했는데 리암이 중간에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생각의 흐름이 끊겨 버렸다. 한숨을 삼키며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녀석이 말한 ‘돌아가기 싫다.’를 여기서 더 알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상식적으론 장소나 특정 상태가 가장 유력하나, 시간이라는 선택지를 완전히 배제하기엔 지난 세월 훈련받은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가볍게 넘기지 말라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으니, 우선 이것에 관한 판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대신 리암은 왜 ‘돌아가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 속단일 수도 있지만, 리암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재의 리암은 어제와 딱히 변한 부분이 없어 보였다. 이 경우 두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돌아갔지만 내가 눈치를 못 챘거나, 돌아가지 않았거나.

하지만 돌아갔지만 내가 눈치를 못 챘다기엔 지금 녀석은 어제 돌아가기 싫다고 펑펑 운 것치고는 너무 해맑았고 행복해 보였다.

여전히 말실수 때문에 내 눈치를 보는 녀석의 상태를 살펴보다 우선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해 보기로 했다. 애초에 돌아간 상황이면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기도 하니까.

어제는 울면서 돌아가기 싫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자신이 확실하게 돌아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

그러나 아침의 이래저래 혼란스러워하며 엉엉 울던 반응을 보면 어제의 예상처럼 일이 굴러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생각해 볼 만한 것은 예상과 다른 일이 생겨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녀석의 예상과 달라질 일이 어제 뭐가 있었지? 갑작스러운 리암의 고백이 떠올랐다.

매사에 미래를 아는 것처럼 여유롭던 녀석은 어제 내가 고백을 받아 주니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듯 깜짝 놀라 했다.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 준 것이 예상 못 한 일이라면, 그의 돌아갈 것이라는 계획이 여기서부터 일그러졌다고 가정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리암은 잠자리를 가질 때까지만 해도 돌아갈 것이 확정이라 여기는 듯했지. 그렇다면 내가 잠자리를 가진 후 녀석과 아침까지 함께해서 변화가 생긴 걸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애초에 뭐에 돌아간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설을 전개하니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만약에 장소로 돌아간다는 것이든, 상식적으로 말은 안 되지만 시간, 을 되돌아간다는 것이든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 주고 잠자리를 가진 것이 ‘돌아간다.’를 방해한 것이라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건가? 추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감이 있지만 고려해 볼 만한 부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저택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차가 멈춘 것을 느낀 리암은 큰 눈을 굴리며 내 눈치를 살피다 냉큼 마차에서 내려섰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녀석이 나를 에스코트라도 하려는 듯 손을 뻗길래 우스워서 작게 웃으며 그 손을 잡고 내려왔다. 이럴 거면 대체 아침엔 왜 도망갔던 거지?

여러 의문을 뒤로하고 우선 저택에 들어섰다.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리암을 안주인의 방에 데려다주라고 말한 뒤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녀석에게 안주인의 방을 준 것엔 큰 의미는 없었다. 손님 방을 주기엔 애인 사이이기도 했고, 아침에 그 난리를 쳤으니 안주인의 방이라도 주어야 저택의 사람들이 녀석에게 예우를 갖출 테고…….

사실 이런 말들은 제쳐 두고, 그냥 주고 싶었다.

‘돌아간다.’의 주체가 장소일지도 모르니 기사들에게 리암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시킨 뒤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에서 대기하던 잭슨이 상당히 불손한 눈빛으로 아침에 내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끝마치지 못했던 일거리를 쓱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건방진 태도에 무어라 한마디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감정 때문에 또 일을 미룰 순 없으니 참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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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를 향한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불손한 보좌관의 시선을 받으며 서류를 검토하던 중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집중되지 않으니, 바깥의 소리가 신경 쓰여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 잭슨이 대신 창밖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저택 사용인들의 자녀들이 풍년제를 맞아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입니다.”

국가적인 축제가 있으면 사용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저택에서도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저택 일부를 꾸며 놓곤 했다.

그 소리임을 알려 주는 잭슨은 풍년제라고 답지 않게 들떴는지 늘 굳어 있는 얼굴의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벌써 봄의 여신이 저승으로 돌아가는 계절이 되었군요.”

“시간이 빠르긴 하군.”

케이든은 별생각 없이 보좌관의 말에 맞장구치다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봄의 여신?

저승의 석류를 먹은 뒤 저승에 발목이 잡힌 봄의 여신. 아마도 자신 때문에 발목이 잡혀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암. 무언가의 실마리가 그를 약 올리듯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손을 멈춘 케이든은 조용히 이마를 문질렀다. 현재의 허술한 가설대로라면 자신이 리암에게 준 영향 때문에 리암은 ‘돌아가지 못한’ 상태가 된 것일 거다. 무언가 갈피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케이든은 어느새 또다시 손을 멈춘 상사를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부하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턱을 괴었다. 자신이 리암에게 더 큰 영향을 주면 그는 더더욱 자신의 곁에 발목이 잡히는 것일까?

그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리암 카터가 공작님을 만나 뵙기를 원한다며 어찌할지 묻는 기사의 물음에 케이든은 마침 잘되었다 싶어 리암을 여기로 데려와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단,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며 데려올 것을 당부하며 말이다.

몸을 돌려 돌아가는 기사를 보며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린 케이든은 보좌관에게 말했다.

“잭슨, 결혼 서류를 가져오도록. 저택에 예비용으로 갖춰 둔 것이 있지?”

“예? 그야 있기야 합니다만, 결혼 서류는 어째서……?”

“결혼 서류에 다른 용도가 있나?”

“공작님!”

상사의 말에 잭슨은 경악한 표정으로 눈앞의 여우 같은 상사에게 붙잡힌 어린 마법사의 미래를 걱정해 주었다.

“한 번 도망갔다고 해서 결혼이라니.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닐까요? 그는 아직 어린데.”

“잭슨, 두 번은 말 안 하겠네.”

상사의 단호한 명령에 보좌관은 안타까운 얼굴로 왕궁에서 사용되는 모든 서류를 갖춰 둔 서랍에서 결혼 서류 한 장을 꺼내 왔다.

케이든에게 그것을 건네는 보좌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건방진 부하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챈 케이든은 천천히 공란을 채워 갔다.

결혼만큼 타인이 타인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속된 말로 결혼은 인생의 구속이라고도 하지 않나. 그러니 이것만큼 리암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류를 채우는 내내 케이든의 머리 한구석에서 이게 과연 옳은 짓이냐는 외침이 일렁였다. 결혼같이 중요한 일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이 맞을까?

사귄 지 하루 된 마법사를 붙잡기 위해서? 심지어 그에게 영향을 주면 그가 돌아가지 않을 거란 가설이 확실하지조차 않은데? 결혼이 예상외로 효과가 없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은가.

케이든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멈추었다. 그의 오랜 이성은 지금 하려는 짓이 미친 짓이라며 그를 만류하였지만, 지금이라도 그만두려니 첫 만남에 눈물을 흘리던 소년 같은 남자가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래, 리암과 결혼 좀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이 없어 약혼도 맺지 않은 상태였으니 자신의 옆자리를 리암에게 준다고 해도 내 인생 계획만 조금 바뀌는 것일 뿐이었다.

가장 큰 문제를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케이든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결혼하자고 해도 리암이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거절하면 조금 짜증은 날 것 같긴 했지만.

케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마저 손을 움직여 서류를 채워 나갔다. 그래, 늘 그랬듯 해 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단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리암 카터와의 결혼은 그에게 끼치는 영향을 떠나서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을지도 몰랐다.

케이든이 막 서류를 작성한 후 보좌관에게 조만간 왕궁으로 갈 준비를 하라 지시하던 찰나, 때마침 리암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케이든은 방금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생각들을 내려놓고 능숙한 어른의 가면을 쓰며 리암에게 손짓했다.

“마침 잘 왔네. 그대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도 몇 있거든.”

“제 서명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오는 리암 카터를 보며 케이든은 긴장한 속내를 삼키었다. 이제 그의 가설이 맞았는지 천천히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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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의 긴장이 무색하게 서류를 받아든 리암은 그의 제안을 좋다고 받아들였다. 너무 흔쾌히 받아들여서 케이든은 그가 어디 가서 사기당할까 봐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달 동안 그와 살며 케이든은 몇 가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리암의 ‘돌아간다.’는 3월과 관련되어 있는 듯했다. 리암은 매사에 큰 관심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케이든과 마법뿐이었다.

그렇기에 케이든이 무엇을 제시해도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나오던 놈이 유일하게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며 거절한 것이 3월의 결혼식이었다.

3월에 결혼식을 제시한 것 자체엔 결혼식을 빨리 치르려는 것 외의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리암은 케이든의 제안을 듣자마자 그답지 않게 바로 싫다는 대답을 내뱉으며 결혼식을 4월에 하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케이든은 그 순간 이것이 중요한 단서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물었으나 리암 카터는 대답 대신 그날 밤의 얼굴을 내비쳤다.

‘돌아가기 싫다.’고 서럽게 울던 그때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케이든은 강한 희열을 느꼈다. 이거구나!

동시에 그는 리암의 얼굴에 떠오른 그 얼굴을 다시 보기가 싫었다. 나 외의 것으로 녀석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케이든은 그를 좀 더 추궁하여 그의 비밀을 캐내 볼 수도 있었지만 결국 리암의 얼굴에 떠오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알았으니 그런 표정 좀 그만하라 투덜거리고 말았다.

케이든은 몇 달 동안 리암이라는 허술한 마법사가 생각 없이 흘리는 단서들을 꼼꼼히 주워 모았다.

리암이 종종 악몽까지 꾸는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 3월에 대한 거부감, 생전 처음 보는 게 분명할 케이든의 친구 에드거에 대한 격한 반응, 나이답지 않게 살인엔 능숙하면서 동시에 성적으론 어수룩한 모습. 이 외에 이상하도록 익숙하면서, 또 어딘가 허술한 행동들.

케이든은 단서들을 정리하며 리암의 ‘돌아간다.’가 장소가 아니란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여러 가설 중에 가장 말이 되지 않는 시간을 대입했을 때 더 그럴듯해지는 단서들을 보며 케이든은 조금 심란해졌다. 내 인생에 내가 뭘 들여놓은 건지 원.

그래도 리암과의 결혼은 나쁘지 않았다. 녀석은 생각한 것 이상의 사고뭉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당기는 사고들을 자주 쳐 대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랑스러웠다.

다시 리암 카터에게 결혼을 제안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케이든은 기꺼이 그를 또다시 자신의 인생에 들여놓을 것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리암이 사랑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그가 치는 사고들은 골치가 아팠다. 케이든은 리암이 그에게 말도 없이 사고를 쳐 억지 논리로 수습해야 했던 오늘의 사건이 다시 떠오르자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러 폈다.

리암의 뜬금없는 학살 현장은 아마도 ‘돌아간다.’와 연관된 것일 거다.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케이든의 손에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런 짓을 하라고 미리 급습 정보를 알려 줬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기가 한 짓이 엄연한 공무 집행 방해란 건 알고 있긴 한지. 리암이 한 짓을 떠올리자 케이든은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 와 손목으로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 저택에 도착했을 허술한 마법사에게서 새로운 단서를 캐 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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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을 맞이한 허술한 마법사는 예상과 달리 아주 의기소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그를 맞이하리라 생각했지,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던 케이든은 그 모습에 살짝 놀라 물었다.

“리암. 나는 아직 입도 안 열었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나?”

“케이드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리암은 울적한 얼굴로 케이든의 이름을 길게 부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애처로운 소년 같은 얼굴을 보고 누가 방금 수십 명의 범죄자를 몰살하고 온 학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케이든은 내심 한숨을 쉬며 팔을 벌려 주었다. 리암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 엉겨 붙었다.

케이든은 품 안에 안겨 오는 리암의 푹신한 곱슬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하였다.

“이래서야 원. 혼내지도 못하고.”

“…혼내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내가 그대를 제대로 한번 혼내 보기라도 했다고 생각하겠어.”

실상은 여태 똑바로 화도 한번 못 내봤는데. 케이든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차면서도 그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하였다. 품 안에 파고든 리암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기대오는 것을 느끼며 케이든은 힘없이 안긴 소년의 등을 쓸어 주었다.

“왜 이렇게 풀이 죽었을까?”

“미안해요……. 케이든이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늘 말하지만, 그대는 위기를 모면하는 능력이 뛰어나. 내가 그대에게 약해질 짓만 이렇게 골라서 하고 말이야.”

케이든의 말을 들은 리암은 대답 없이 케이든을 붙든 손에 힘을 더하였다. 소리 없이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기만 하는 리암의 몸짓이 귀여워 케이든은 살짝 웃으며 생각했다.

또 말을 피하는 것을 보니 추측한 대로 ‘돌아간다.’와 관련 있는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입을 꾹 다문 채 풀 죽은 비밀 덩어리를 여기서 더 파고들어 그가 숨긴 비밀을 캐낼지 고민하다가 축 처진 어깨가 가여워 한 번만 더 양보해 주기로 하였다.

그는 말없이 리암을 더욱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품 안에 완전히 끌어안기엔 버거운 덩치였지만 케이든은 최대한 팔을 벌려 빈틈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품 안의 소년을 가만히 안고 있으니 그에게서 꽃향기가 올라왔다. 리암에게선 수선화 향이 났다.

그와 몸을 아주 가까이 겹쳐야 나는 이 희미한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케이든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봄의 향기가 나는 스무 살 남자애라니, 터무니없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리암도 자신에게서 나는 향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져 슬쩍 물어봤을 때, 리암은 자신이 무슨 비누와 향수를 쓰는지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서 자신에게서 수선화 향기가 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리암에게서 나는 봄의 흔적은 케이든만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케이든은 오직 그만 아는 이 향기가 사랑스러웠다.

그가 자신의 것을 만끽하며 다독이고 있을 때 품 안의 소년이 꿈틀거리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케이든. 저 하고 싶어요.”

“…정말 뜬금없군.”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 리암의 얼굴엔 살짝 홍조가 띠어 있었다. 이번엔 갑자기 뭐에 동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도 리암은 자주 케이든에게 이렇게 조르곤 했다.

어린 애를 이겨 먹어서 뭐 하겠냐는 심정으로 위를 양보해 준 첫날 밤 이후, 케이든은 여러 고민 끝에 리암이 자신의 위에 계속 올라타도록 허락해 주었다.

‘돌아간다.’가 무엇인지, ‘왜 돌아가지 않은 거인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선 상황에 변화를 주기보단 현상 유지가 중요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관계 초반에야 리암의 것을 받아 내는 데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리암은 배우는 것이 빠르고 배움에 열의가 넘치는 학생이었기에 오래지 않아 케이든이 어떻게 해야 느끼고 좋아하는지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현재는 케이든 역시 그와의 관계를 즐기는 편이었기에 그는 리암이 하고 싶다고 졸라 오면 순순히 응해 주는 편이었다. …가끔은,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그가 리암을 먼저 덮치기도 했고.

다만, 이렇게 조른다고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옳은 것일까? 라는 의문은 늘 있었기에 케이든은 리암의 어깨에서 올린 손가락을 까딱이며 잠시 고민하였다.

더군다나 리암은 오늘 케이든의 일을 망쳐 놓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오늘따라 엄격한 배우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리암이 고개를 숙여 케이든의 바지 앞섬의 단추를 이로 물었다.

이와 혀를 움직여 단추를 차분히 풀어 내리는 리암의 행동에 케이든은 몸을 굳혔다. 앞섬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움직임이 자극적이었다.

그 와중에도 흘끔흘끔 위에 시선을 두며 케이든을 보던 리암은 당황한 케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 눈웃음을 바라보던 케이든은 입을 달싹이다가 리암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침대 위에서 홍조 띤 얼굴로 그를 올려 보는 리암의 흐트러진 몰골을 보며 그는 불가항력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대로 몸을 숙여 봄에게 입 맞추는 몸놀림이 다급하였다.

━━

리암이 잠자리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케이든을 통해 익힌 것이다.

목덜미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입질하는 습관, 그의 어깨에 입 맞추며 손은 귀중한 악기를 만지듯 배를 쓸어내리다 케이든의 성기를 긴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비비는 행위, 부드럽게 오가다가도 케이든이 사정할 기미가 보이면 허리 짓에 힘을 더하여 그의 깊은 곳을 쑤셔 박는 버릇.

이외의 모든 것이 케이든과 밤을 보내며 그의 몸으로 익힌 것들이었다. 케이든은 자신에게 맞춰진 리암의 이런 행동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가 못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리암이 케이든에게서 배워 나갔듯 케이든 역시 리암과 관계를 맺으며 변해 가며 그에게 맞춰 가는 부분들이 있었다.

자신의 위를 차지하는 묵직한 몸의 부피감과 온도. 자신에게 매달리며 허리 짓을 하는 몸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며 그를 당기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케이든은 놀라움을 느끼곤 했지만, 가장 변화가 체감되는 것은 이런 부분이었다.

“흐읏, 아! 리암. 읏. 살살. 으응.”

“케이든. 가슴을 빨 때마다 당신 안이 좋아서 내 걸 꽉꽉 베어 물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같을 때 말이다. 케이든은 달아오른 얼굴로 서슴없이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순하게 웃는 리암을 흘겨보다 그의 머리에 팔을 감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그의 손길에 좋다고 얼굴을 숙여 오며 그의 유두 주위를 베어 무는 리암의 행동에 케이든은 몸을 움찔거렸다.

분명 리암과 관계를 맺던 초기에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곳조차 성감대가 되어 그가 애무할 때마다 자극이 올라왔다.

리암과의 관계는 늘 이랬다. 느끼지 않던 곳을 느끼고, 살면서 생각도 못 했던 것을 내어 주는 것의 반복. 이것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았다.

“그, 만. 흣!”

바짝 선 돌기를 혀로 뭉개며 핥는데 재미가 들렸는지 리암은 케이든의 말을 못 들은 척 되레 탄탄한 가슴을 붙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 곳곳을 깨물며 얼굴을 문지르는 리암의 잘 뻗은 콧대에 유두가 문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묘한 감각에 허리를 떤 케이든은 리암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이미 자신의 안에 들어온 그의 것을 더욱 깊이 끌어들였다.

“읏…….”

그가 가슴을 빨아올릴 때마다 세게 조여 오는 내벽에 약한 신음을 흘리며 리암은 케이든의 허리를 잡아 몸을 자신에게로 당겼다.

이미 한 차례 사정으로 질척해진 케이든의 성기가 리암의 배에 문질러지며 꺼떡였다. 리암의 단단한 뱃가죽에 문질러지는 성기가 자극되며 올라오는 쾌감에 케이든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응, 읏! 아, 리암. 아! 더, 흣!”

리암의 몸에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자신이 느끼는 곳을 더 쑤셔 달라 조르는 케이든의 움직임에 가슴에서 입을 떼 고개를 든 리암은 쾌락으로 찌푸려진 케이든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욕정으로 흐려진 푸른 눈과 그의 앞에선 잘 짓지 않는 사나운 미소의 조화가 사랑스러워 케이든은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 맞췄다.

혀가 얽히며 입 안 구석구석을 탐색해 나가는 움직임 속에서 케이든의 얼굴 옆에 놓인 리암의 팔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케이든의 움직임에 맞추듯 더욱 힘을 더해 그의 안에 물건을 박아 넣었다. 성기를 느릿하게 빼내었다가 케이든의 엉덩이와 부딪쳐 퍽! 소리가 나도록 힘껏 쑤셔 박을 때마다 케이든은 허리를 떨며 속절없이 신음하였다.

“아! 응, 흐읏. 아, 천, 읏 천히……! 아읏.”

“하아……. 케이든 안이, 좋아서 저를 놔주지 않아요.”

리암의 움직임이 거세질 때마다 아래를 풀며 넘치게 사용했던 젤과 리암이 한차례 사정했던 흔적들이 질척이며 구멍에서 흘러나와 그의 움직임에 질퍽이는 소리를 더했다.

리암의 허리 짓에 맞추어 흔들리던 케이든의 몸이 굳었다. 그의 배 아래에서 아까 전부터 발기해 까딱이던 성기가 사정할 기미를 보이자 리암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큰 손을 뻗어 케이든의 성기를 잡아 위아래로 흔들어 주며 동시에 뒤로 몸을 쭈욱 빼내 성기를 귀두만 남기고 밖으로 꺼내었다.

“아, 아아! 잠, 잠시만. 손, 을. 아흣!”

“흣, 아. 좋아요. 케이든. 읏.”

아래에서 올라오는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쾌감에 케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리암의 목덜미에 손톱을 세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케이든이 느끼는 깊은 곳에 물건을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전신에 퍼지는 온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에 케이든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신음하며 정액을 내뱉었다. 끝까지 집어넣은 물건을 조여 오는 따뜻한 몸의 움직임에 리암 역시 그의 안에서 사정하고 말았다.

사정 후 쉽사리 쾌락의 잔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몸에 전기가 통한 듯 움찔거리며 숨을 헐떡이던 케이든의 위에서 숨을 고르며 여전히 몽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리암은 물끄러미 케이든의 얼굴을 바라보다 홀린 듯 고개를 내려 케이든의 얼굴 곳곳에 입 맞췄다.

그 온기가 나쁘지 않아 밀어내지 않고 입맞춤을 받으며 케이든은 손을 올려 리암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의 후희는 리암이 케이든의 몸을 닦아 주겠노라고 몸을 일으킬 때쯤에야 일단락되었다.

그냥 마법으로 정사 후 더러워진 몸을 닦아 주면 빠르고 간편할 텐데 리암은 매번 부드러운 천으로 케이든의 몸을 닦아 주겠노라 우기곤 했다.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리암이 그의 손으로 케이든의 수발을 들며 몸을 닦아 주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아 케이든은 그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의 몸을 닦아 주며 잔뜩 신이 나 조잘대는 모양새가 배우자의 깃털을 골라 주는 앵무새 같아 귀엽기도 했고 말이다.

리암이 성기를 빼내자 그가 사정한 흔적이 몸 안에서 조금씩 흘러나왔다. 언제 겪어도 이상한 감각에 케이든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 리암의 동선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몸을 닦을 천을 찾는다고 정리된 천 무더기를 들추면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니 아까 전의 침울한 기색이 사라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음정, 박자가 다 빗나가는 리암의 엉터리 노랫소리를 들으며 케이든은 천천히 이리저리 움직이는 리암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태가 좋은 넓은 어깨,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보기 좋게 따라 움직이는 도드라진 날개뼈와 그 아래로 곧게 쭉 뻗은 등줄기, 그리고 엉덩이와 척추 사이에 움푹 들어간 선명한 보조개까지 샅샅이 훑어보며 케이든은 갈증이 일었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생기를 두른 듯 활기차게 움직이는 리암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허기가 졌다. 갈증과 허기가 동시에 그를 덮쳐 와 입 안이 말랐다. 케이든은 헛웃음을 지었다. 식욕과 성욕은 한 끗 차이라더니.

“리암.”

케이든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린 듯한 눈웃음으로 그를 덮친 기갈을 숨기며 케이든은 태연한 척 리암을 불렀다. 케이든의 부름에 마침 적당한 천을 고른 리암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리암에게 이리 오라 손짓한 케이든은 그가 흔쾌히 침대로 다가오자 그에게 손을 뻗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을 잡은 리암의 행동에 씩 웃은 케이든은 손에 힘을 더해 그를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그를 당기는 힘에 맥없이 침대로 넘어지는 리암을 피하며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려 리암의 위에 올라탄 케이든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깜빡이며 케이든을 올려다보던 리암은 케이든의 손이 뒤로 향해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며 흔들자 놀라 딸꾹질을 하였다.

흐끅거리며 가쁘게 가슴팍을 오르내리는 리암의 모습이 귀여워 크게 웃은 케이든은 금세 다시 발기한 리암의 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자신의 아래로 손을 뻗어 구멍 안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어 구멍을 벌렸다.

방금까지도 관계를 맺어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구멍은 무리 없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리암이 싸 놓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딸꾹질도 멈춘 채 두 팔꿈치로 몸을 받쳐 상체를 약간 일으킨 리암이 케이든의 아래를 타는 듯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 파란 눈에서 조금 전 자신을 뒤덮었던 갈증과 허기를 엿본 케이든은 소리 없이 웃었다. 동시에 그는 허리를 내려 리암의 성기를 몸 안에 받아들였다.

“읏. 아! 케이든. 흐으, 좋아요.”

“으응. 아, 리암. 하아…….”

케이든이 천천히 허리를 내릴 때마다 리암의 단단한 성기가 안을 버겁게 벌리며 파고들어 왔다. 성기를 짓씹는 내벽의 움직임에 리암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달뜬 신음에 입꼬리를 올리며 뿌리까지 몸 안에 삼킨 케이든은 리암의 배 위에 손을 올려 그의 무게를 실으며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으응! 아! 리, 암. 흐읏…….”

“아, 케이든……. 읏!”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자신이 느끼는 곳을 리암의 성기로 쑤시던 케이든은 애달픈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애원하듯 보는 리암의 모습에 그를 놀리듯 허리를 들어 올려 리암의 것을 거의 내뱉었다가 내려앉아 한 번에 삼키기를 반복하였다.

케이든이 움직일 때마다 팽팽하게 벌어졌다 조여지는 붉은 살의 움직임에 리암은 목울대를 울리며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자극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배가 꿈틀거렸다. 리암은 더 깊이 박고 싶다고 조르듯 작게 허리 짓을 하며 케이든의 골반을 붙잡았다.

“흣, 아……. 리, 암 응……! 더……. 읏!”

케이든은 리암이 자신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안을 쳐올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자신 아래서 속절없이 신음하며 애원하듯 자신을 조르는 리암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가 결국 참지 못해 자신에게 달라붙어 허리 짓 하는 순간도 좋아했고.

리암이 그의 골반을 붙잡은 채 몸을 조금 더 일으키자 케이든의 다리가 더욱 벌어졌다. 평소처럼 리암이 만져 주지 않았는데도 그의 것으로 안을 쑤시는 사이에 발기한 성기가 벌어진 다리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꺼덕였다.

케이든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은 리암이 케이든의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성기를 박아 넣었다. 평소 틈만 나면 약한 체하며 케이든에게 매달리는 사내는 이럴 때는 제힘을 숨기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몸이 겹쳐질 때마다 땀과 여러 액체로 젖은 몸이 맞부딪치는 살 소리가 침실에 퍼졌다. 리암이 케이든의 몸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의 성기가 안을 긁어내렸다가 찍어 누르기를 반복하였다. 그때마다 케이든은 밭은 숨을 몰아 내쉬며 신음을 흘려 냈다.

“…아!”

성기의 윤곽이 배 위로 얼핏 보일 정도로 격하게 이어지던 삽입 중, 리암이 케이든의 골반을 꾹 잡아 누르며 제 것을 깊이 박아 넣을 때 케이든은 몸을 굳히며 짧고 달큰한 신음을 내뱉었다. 온 신경을 앗아 가는 자극이 일었다.

아랫배의 근육이 조여들었다. 아까부터 사정의 기미를 보이던 그의 물건이 결국 참지 못하고 울컥 휜 액체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사정을 가리듯 성기를 잡았으나 계속된 정사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은 사정을 막지 못하고 성기를 스치며 더욱 사정 중의 자극을 가할 뿐이었다.

리암은 제 것을 사정없이 조여 오는 내벽에 이를 사리물며 좁은 내벽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에게만 허락된 깊숙한 곳에 성기를 박아 넣으며 자신의 것을 감싼 따뜻한 안에 쏟아 내듯 사정하였다.

배 속에 퍼지는 뜨거운 감각에 케이든은 지친 숨을 내뱉으며 명치께를 문질렀다. 살다 살다 허기를 이런 식으로 채우다니.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실소를 흘리던 케이든은 자신을 보는 리암과 눈이 마주쳤다. 사정의 여운에 헐떡이던 리암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짓더니 케이든을 잡아끌어 그의 위에 눕혔다.

앉아 있던 자세에서 침대에 드러누운 리암의 몸 위로 엎어지자 리암의 성기가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가는 감각과 구멍 안에서 정액이 주룩 흘러나오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져 케이든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리암은 이 순간이 마냥 즐거운 듯 케이든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만족스러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제게 얼굴을 부벼 오는 앳된 청년의 온기를 느끼다 문득 케이든은 그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목덜미에서 둥근 귓바퀴, 관자놀이에 연달아 입 맞추다 리암의 이마에 꾹 입 맞춘 케이든은 리암을 끌어안았다.

언제 그의 몸을 들어 올리며 제 것을 박아 넣었냐는 듯 품에 안기자마자 몸에서 힘을 빼고 얌전히 안겨 있는 녀석의 행동이 우스워 케이든은 작은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처음 녀석을 볼 때는 약간의 즐거움과 흥미로 시작했었다. 봄에 흩뿌려졌던 즐거움과 흥미는 이내 호감이 되었고, 호감은 그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몸을 부풀려 사랑이 되었다. 그렇게 부풀어진 사랑은 리암을 붙잡을 수 있게 결혼을 제안하도록 케이든을 충동질하였다.

케이든이 사랑이라 정의 내린 감정은 신기한 것이었다. 그의 인생을 좌우하던 공고한 관념을 아주 쉽게 뒤엎기도 하였고, 시시각각 흐름이 바뀌는 감정의 바다에 그를 던져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신기한 것은 사랑이란 감정이 나날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이미 가을의 초입에서도 그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던 마음은 리암을 마주하는 매 순간 더욱 몸집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이렇게 제멋대로인 것은 감정의 대상을 닮아서일까.

리암을 끌어안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케이든은 문득 그의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다른 온기가 있단 것을 깨달았다. 난로를 틀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온기라면…….

케이든이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살짝 상체를 들어 아래를 보자 동그랗게 눈을 뜬 리암이 갑자기 움직인 케이든을 바라봐 왔다.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리암은 곧 케이든이 왜 그를 바라봤는지 깨달은 듯 배시시 웃었다.

“곧 겨울이라 날씨가 추우니까요. 감기 걸릴까 봐 보온 마법을 쓴 거예요.”

“고맙군. 다만, 나한테만 쓰지 말고 그대한테도 쓰면 좋을 텐데 말이야.”

추위도 많이 타면서. 케이든이 혀를 차자 리암은 멋쩍게 웃다가 슬쩍 제게도 보온 마법을 둘렀다. 리암은 종종 이렇게 자신한테는 마법을 안 쓰고 케이든에게만 써 주곤 했다.

왜 본인에게는 안 쓰나 궁금해서 물어보니 평소 이런저런 보호 마법들을 몸에 두르고 있으므로 그 위에 다른 마법을 추가로 걸려면 약간의 수고가 필요해서 귀찮으니 가벼운 건 그냥 참는다나.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였다.

케이든이 그 대답에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으니 리암은 잠시 고민하다 사람들이 방바닥에 있는 물건을 치워야 하는 건 알지만 귀찮으니 내버려 두곤 하는 심리와 비슷하다고 했다.

신경에 거슬리는 건 바로바로 치워 버리는 케이든으로선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지만 그 이상 가는 비유를 찾아내지 못해 쩔쩔매는 리암의 모습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자기한테 거는 건 귀찮아하면서도 케이든이 조금만 불편해 보여도 얼른 챙겨 주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이런 리암의 모습 역시 케이든의 사랑이 주인의 허락 없이 부풀어 나가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케이든은 이렇게 제멋대로 확장되어 가는 자신의 감정을 발견할 때마다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리암은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과 머뭇거림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한 대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타인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의심과 싫증은 케이든의 천성이었으며 평생에 걸쳐 위장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 온 그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리암을 보고 있으면 케이든은 자신의 천성을 수그린 채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받아 주고 오래도록 보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것은 케이든에겐 미지에 가까운 낯선 감정이었다.

리암은 케이든과 다른 점 때문에 그로선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쳐 대곤 했고,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으로 울고 웃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런 리암 카터가 사랑스러웠다. 그에게만은 수그러지는 자신의 천성조차 기꺼워질 정도로.

아까부터 모든 생각의 종착점이 리암의 사랑스러움이란 걸 깨달은 케이든은 어이가 없어 작게 웃으며 리암의 이마에 입 맞췄다. 연인의 입맞춤에 리암이 눈을 빛내며 여기도 저기도 입 맞춰 달라 졸라 대었다.

케이든이 그의 조름에 눈을 크게 뜨며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짐짓 의뭉을 떨자 입술을 삐죽 내민 리암이 그의 등 뒤에 두른 팔에 힘을 더하더니 그대로 몸을 반 바퀴 돌았다.

쉽사리 케이든의 위를 차지한 그는 씩 웃은 후 고개를 내려 연신 케이든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아하하! 그만, 간지러워.”

“안 돼요. 케이든이 안 해 준 만큼 제가 더 할 거예요.”

그 간지러운 감촉에 케이든이 크게 웃으며 리암을 말리자 리암은 새침한 표정으로 연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곧이어 눈가와 콧방울에 내리 앉는 입술을 장난스레 피하며 케이든은 리암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을 가둔 리암의 팔 안에서 피해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기껏 피한 보람 없이 자신의 얼굴에 거침없이 닿는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에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은 케이든은 그대로 리암의 머리를 내려 당겨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 호응해 오는 몸짓이 적극적이었다. 입 안에 들어가고 싶다 조르며 혀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어린 연인에게 입을 열어 주어 혀를 섞으며 케이든은 생각했다.

역시 리암은 사랑스러웠다. 그가 돌아가기 싫다 울던 그날 밤에도, 그 이전에도. 어쩌면 첫 만남에서도. 케이든은 이 사랑스러움에 혹해 그에게 시선을 뺏겼었다. 인식은 이성보다 빨랐고 뒤늦은 이해가 이제야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었다.

케이든은 어린 마법사의 눈물에 현혹돼 무모하게 리암을 붙잡았던 과거의 자신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짐했다. 리암을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그답지 않게 무모하고 막연한 다짐을.

그가 좋다고 달라붙어 오는 어린 연인에게서 봄의 향기가 올라왔다. 때아닌 가을에 피어난 수선화를 끌어안으며 케이든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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