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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꺼진 불도 다시 보자 (4/13)

Chapter 4.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케이든의 생일이 다가오며 저택엔 선물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말 그대로 쌓이기 시작한 선물을 보고 내가 감탄하자 원래 선물은 예년에도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이번엔 결혼 발표가 겹치며 평소보다 그 양이 더 많다고 케이든이 설명해 주었다.

신분이 불분명한 사람이 보내는 선물들은 애초에 받지도 않고 처분하는데도 산처럼 쌓인 선물더미들을 보니 아미르가의 위상을 짐작할 만도 했다.

며칠 외출 금지를 당했다고 심심해 방에서 빈둥거리다가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선물 더미 근처를 기웃거리자, 케이든은 혀를 차며 정 심심하면 선물이라도 뜯어 보라 하였다.

정말로 지루하던 참이라 나는 그 허락에 좋다고 냉큼 선물 검수를 가장한 선물 횡령 시간을 가졌다.

슬쩍할 만한 것은 부지런히 몇 개 슬쩍하던 중 무언가 시킬 것을 대비해 내 옆을 지키던 시녀가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주인님께 들어온 찻잎 선물 중에는 사랑의 묘약이 뿌려진 적도 있었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다음 선물을 향해 뻗던 손을 그대로 멈춘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그녀를 닦달했다.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녀는 침착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래도 공작가에 들어온 선물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마법사의 검수를 한번 거치기 마련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마법사의 검수를 거치던 중 문제의 선물이 발견됐다.

펠튼 왕국의 고산 지대에서 나는 귀한 찻잎 전체에 사랑의 묘약이라 불리는 마법약이 뿌려져 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마법약은 정량보다 적게 뿌려져 있으면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다행히 해당 마법사의 전공이 마법약 쪽인지라 발견해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사랑의 묘약은 이름만 사랑의 묘약이지 정확히는 섭취하는 이를 한순간 감정적으로 들뜬 상태로 만들어 주는 약이었다.

용량만 조절해서 쓰면 커피 같은 미약한 각성제로도 사용 가능한 약인지라 그리 위협적인 마법약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시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약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는가.

그러나 이런 건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아는 것이지 일반인들은 그 이름에 속아 으레 상대의 마음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러니 이게 케이든의 선물에 뿌려져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문제였다!

덕분에 그해 공작가에서는 선물뿐 아니라 저택의 모든 물건을 검수 조사하느라 성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문제의 선물을 보낸 이는 지젤 남작으로 그는 케이든이 선물에 대해 추궁하자마자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하였다. 원래도 심약하기로 유명하다나.

이후 이어진 조사에서 그의 딸이 케이든에게 갈 선물에 사랑의 묘약을 뿌렸던 것이라 밝혀졌다. 심약한 아버지와 달리 참으로 대담한 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레이디나 보호자인 남작에게 책임을 물었어야 했지만, 사고를 친 레이디를 실제로 마주한 케이든은 착잡한 표정으로 약간의 배상금만 받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매사에 철저한 그답지 않게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여서 물음표를 띄우고 시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 내막을 듣고 난 후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시녀가 말해 주기를 그때 사고를 친 레이디는 열 살짜리 꼬마였다는 것이다. 3년 전의 일이니 이제는 열세 살이라나.

어쩐지 허무한 마무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는 몸을 일으켜 쌓인 선물 위에 광역 마법진을 그렸다. 방금까진 좀 대충 한 감이 있었는데 검수를 제대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야 열 살짜리 꼬마 숙녀가 충동적으로 벌인 사고였지만 올해는 어떤 음흉한 속내가 감춰진 선물이 들어왔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인기남을 배우자로 둔 사람으로서 나는 좀 더 철저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올해의 선물에선 이상한 건 발견되지 않았었다.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를 만나느라 잠시 외출했던 케이든은 돌아온 후 내가 열심히 챙겨 놓은 횡령품들을 발견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뺏어 가지는 않았다. 그 드넓은 배포가 참으로 훌륭했다.

잠깐의 흥미진진했던 이벤트 후 나는 저택에서 무위도식하다 지루해지면 마법서를 읽던 평소와 같은 생활로 되돌아갔다.

책상을 앞에 두고선 침대에서 방만한 자세로 책을 읽는 내게 시종이 간식거리가 필요하냐고 물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져다준 한입 크기의 쿠키를 우물거리며 다 읽은 책을 옆으로 치우고 반대편에 쌓아 둔 책 무더기에서 새로운 책을 끌어왔다.

마탑의 인장을 받으면 이로운 점이 여럿 있지만, 체감상 가장 좋은 혜택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에 상관없이 마탑의 소장 도서를 빌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글을 적은 후 찢으면 적혀 있는 내용이 그대로 전송되는 마법이 걸린 종이를 사용해 내가 있는 좌표와 원하는 책 제목을 마탑의 도서관에 보내면 도서관 측에서 간이 포털을 통해 책을 보내 주었다.

이 제도는 누가 고안한 것인지 몰라도 참으로 획기적이고 유익한 제도였다. 덕분에 불의의 사고로 외출 금지를 당한 사람도 집에서 심심하지 않게 책을 빌려 볼 수 있지 않은가?

다만 반납할 때는 간이 포털을 쓸 수가 없고 직접 마탑으로 가서 반납해야 하는 터라 연체가 심심찮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만약 책을 제때 반납하지 않아 연체되면 특별 이벤트로 도서관 담당 사서인 메이 씨의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연체해 본 적이 없어서 받아 본 적이 없지만, 과거 스승님이 책 반납 기한을 넘기시고 편지를 받으신 것을 생생하게 목격한 바가 있어 편지가 어떻게 도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얀 편지 봉투 사이에서 유독 튀는 형광 초록색 편지 봉투를 발견하자마자 스승님은 표정을 와락 구기며 곧장 내 귀를 막아 주셨다.

그러고 스승님이 편지를 뜯지 않자 편지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곧이어 허공에 금색 글씨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씨가 문장을 이루자마자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집 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큰 목소리는 아주 교양 넘치는 어조로 책을 연체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뢰배 같은 행위인지를 나긋한 어조와 어울리지 않는 온갖 비방의 말과 함께 연설하기 시작했다.

끝으로 한 번만 더 연체했다가는 대출 제한 명단에 올려 버릴 테니 당장 반납하라는 으름장과 함께 글씨는 사라지고 편지는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 가라앉아 잠잠해졌다.

내 귀를 막아 주시느라 정작 본인은 메이 씨의 경고를 고스란히 들은 스승님께서 어쩐지 넋이 나간 얼굴로 터덜터덜 나가셔서 책을 반납하시고 돌아오시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도서관 담당 마법사에 대한 묘한 두려움과 편견이 있었는데 후에 마탑에 들어간 후 실제로 만나 뵌 메이 씨는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얌전한 인상의 마법사셨다. 물론 도서관에서 난장을 피거나 규율을 어기는 걸 발견하시면 바로 돌변하셨지만.

만약에 나도 이 책을 제때 반납하지 않으면 그 노호가 담긴 편지를 받게 되겠지. 케이든의 앞에서 그 비난과 우아한 욕설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를 받아드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이 책들을 다 읽어야 했고 말이다. 나는 새로 펼친 책의 목차를 눈으로 훑어 내리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간과 관련된 책들은 신화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시간은 흔히 여겨지기론 신들의 영역이었으니까.

그 소리는 즉, 책 대부분에 허황된 소리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장된 이야기 사이에서 쓸 만한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이번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던 옛 영웅과 그를 지켜보는 신들. 결국, 그 끝에서 영웅은 운명을 바꾸지 못하였고 신들은 용감한 영웅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를 밤하늘의 별자리로 새겨 주었다.

흥미 없는 이야기의 나열 속에 조금이나마 쓸 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여 페이지를 후루룩 넘기다가 정전기가 인 것처럼 손끝이 따끔거리는 감각에 멈칫하였다.

“아.”

책의 특정 페이지에 마법이 걸려 있었다. 손끝의 보호 마법이 흩어지며 검은 연기가 손끝에 두른 막에서 푸스스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내 옆을 지키던 시종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이러고 있냐.”

마탑의 유서 깊은 악습이라고 해야 할까. 마탑의 학생들은 자신보다 마법을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 책에 마법을 숨겨 놓곤 했다.

대놓고 걸어 두면 바로 발각되니 아주 은밀하게 책을 읽는 사람이나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 몹쓸 짓을 처음 시작한 인간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 때도 있었고 스승님께 듣기론 스승님 때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이 짓을 하다가 걸리면 메이 씨의 노호가 그 자리에서 작렬함과 동시에 네가 그렇게 마법을 잘하면 교수들 앞에서 시연해 보라고 메이 씨가 지나가는 교수들을 불러 모아 주는 봉사 정신을 발휘해 주시곤 했다.

그 꼴을 몇 번 보면 나는 저런 짓 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저절로 들기 마련인데 그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고가 ‘저런 짓 하지 말아야겠다.’가 아니라 ‘나는 걸리지 말아야지.’로 튀어서 이렇게 몰래몰래 마법을 거는 놈들이 해마다 꼭 있었다.

덕분에 마탑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보호 마법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습관이 들었다. 그 습관은 마탑의 인장을 받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던 터라 이번에도 보호 마법 덕에 큰 피해는 없었다. 기껏해야 조만간 한번 악몽을 꾸겠구나 싶은 정도?

그래도 불시에 당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기분이 더러워져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어 옆쪽으로 밀어 버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괴며 남은 책들을 쏘아보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독서 중인가?”

“케이든!”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그의 곁에서 알짱거리며 조잘거리고 있어야 할 내가 오늘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있자 직접 찾으러 온 듯했다. 살짝 미소 지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에 나는 방금까지 짜증이 난 것도 잊고 활짝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었네요?”

“손님이 올 예정인지라. 리암, 그대도 함께 가지.”

얼른 나도 손님맞이용 복장으로 갈아입으라 말하던 케이든이 어쩐지 산만한 방 안의 분위기에 멈칫했다.

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기울인 그가 의문이 서린 눈으로 방 안과 나를 훑어보았다. 어쩐지 머쓱해져 그를 향해 뻗었던 손을 슬쩍 접던 찰나, 내 옷 소매에 시선이 닿은 케이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건 무슨 흔적이지?”

내 손목을 잡고 천천히 돌려 보던 그는 마법 간의 충돌로 생긴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내 옷 소매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면서 물었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누군지 알 수 없는 동문의 흔적이라고 말할까 말까 내가 고민하고 있으니 케이든의 눈매가 점점 사나워져 별수 없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케이든은 어처구니가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지식의 집합소라고 불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유치한 행각이라니……. 더없이 멍청한 행각을 목격한 듯한 케이든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시선에서 내가 당한 불행을 가엾어하는 기색이 느껴져 나는 짐짓 눈을 내리깔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마법 충돌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마음껏 엉겨 붙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이유도 없었다. 그의 어깨에 턱을 괴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정한 눈으로 나를 달래듯 내 등을 쓸어 주었다. 그의 한쪽 손에 슬쩍 깍지를 끼며 물었다.

“그런데 저녁에 오는 손님이 누구예요?”

“아, 그대는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이겠군. 며칠 전에 내가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를 만났다 하였지? 그 친구네. 에드거 체이스라는 외교관이자 내 오랜 친구이지.”

“네에?!”

퍽―!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너무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데 하필,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들썩이는 바람에 그대로 케이든의 턱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말 그대로 퍽!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며 삽시간에 주위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그 소리가 들림과 함께 정수리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몸이 굳었다. 주춤주춤 몸을 물리면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드니 뒤늦게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삼키며 앞을 보니 케이든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꾹 감은 채 턱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선 것을 보니 어쩐지 대형 사고를 친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아무 말 없이 턱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삼키고 있는 케이든의 옆에서 눈만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등골이 서늘해지면 정수리의 얼얼한 통증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단 것을 깨달을 수 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몇 분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낸 케이든이 고통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눈을 돌려 매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악문 턱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여 손끝만 만지작거리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크게 심호흡하며 최대한 평소 같은 어조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미안해요……. 케이든.”

“다음부턴 턱은 피해 줬으면 좋겠군.”

농담처럼 덧붙인 말이었지만 또 미안해져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내 반응을 본 케이든이 자신은 괜찮다며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시무룩해진 채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춰 걸으며 내내 에드거 체이스라는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나는 속으로 빼액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거 체이스는 원작에서 케이든을 짝사랑하는 서브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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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룩함과 긴장감이 범벅된 상태로 케이든을 따라가며 나는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연이어 발생한 갑작스러운 내 이상 증세에 케이든이 무슨 일이냐며 거듭 물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별일 아니라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당연히 별일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라비를 넘어섰더니 이제는 에드거 체이스라니.’

에드거 체이스는 케이든의 오랜 친구였다. 상당히 능글거리며 여유로운 성격인 그는 모든 것에 자신만만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원작에서도 케이든이 라비와 이루어진 후 그 소식을 듣고 그답지 않게 넋을 놓고 있다가 끝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케이든에게 축하의 말만 남기며 물러났었다.

사실 에드거의 행적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할 필욘 없을 거 같았지만, 그래도 또 몰랐다. 내가 케이든과 결혼하게 마당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서브공과 메인공이 이루어지는 이 막장 상황에 에드거가 무슨 역할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단 말이다! 그러니 지금 최대한의 경계 태세를 갖추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 어쩌면 이번의 라비처럼 케이든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수도. 그는 예전부터 케이든과 알던 사이라 라비와는 경우가 다르단 걸 알면서도 희망찬 소원을 품으며 케이든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에드거 체이스를 보는 순간 이것이 정말로 헛된 희망이었음을 깨달았다.

케이든과 내가 들어가자 바로 케이든에게 향하는 친애로 가득 찬 눈동자를 보는 순간 속이 헝클어졌다. 그래, 행운이 두 번이나 찾아올 리가 없지.

오히려 저런 눈을 보고서도 에드거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눈치 못 채는 케이든이 더 신기했다. 혹시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가? 싶었으나 순수하게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반가워하는 케이든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 케이든과 반갑게 포옹을 한 에드거 체이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 넘긴 빨간 머리 아래의 단정한 얼굴이 준수하게 잘생긴 사내였다.

나를 보는 그의 녹색 눈에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과 미세한 질투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리암 카터입니다.”

“에드거 체이스 소백작입니다. 케이든이 익히 자랑하던 리암 씨를 이렇게 뵈니 영광이군요.”

활달한 어조로 나를 칭찬한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립서비스로나마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그에게 물었다.

“케이든이 제 이야기를 체이스 소백작님께 했을 줄은 몰랐네요. 혹시 실례지만 체이스 소백작님께선 만나는 분이 계시나요?”

내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는지 에드거는 눈을 크게 떴다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편하게 에드거라고 불러 주십시오. 케이든의 배우자가 되실 분인걸요. 그리고 교제하는 사람은, 제가 일이 바쁜지라 부끄럽게도 없습니다.”

“와! 그렇다면 혹시 소개를 받아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라비 플레어라고 왕궁에서 일하는 유능한 행정관이 있는데…….”

“리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케이든이 버릇없는 어린애에게 경고하듯 내 이름 끝을 길게 불렀다.

그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는 시늉을 하곤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며 악수한 손을 가볍게 흔든 후 손을 떼었다. 에드거는 내 제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나와 악수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원래 사랑을 사수하기 위해선 다소 유치한 수도 다 동원해야 하는 법이었다. 라비가 지금은 케이든에게 별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작은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별로 가능성은 없지만 이루어지면 겸사겸사 에드거까지 한 번에 견제할 방법이라 제안을 해 봤다만 에드거의 얼떨떨한 표정을 보니 별로 효용은 없는 듯했다.

그래도, 지금 같은 어색한 관계에서 한 번 더 몰아붙이면 에드거와 라비와의 만남을 한 번 정도 주선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더 강권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내가 입을 달싹이자마자 바로 손등을 꼬집는 케이든의 손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새 페이스를 되찾은 에드거는 여유롭게 웃으며 지금은 누구를 만날 때가 아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 달라고 예의상 거절을 되돌려 주며 우리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익숙하게 식당까지 걸어가는 에드거의 뒷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1년 넘게 만나지 못했지만, 여전히 집 구조가 익숙할 만큼 친한 사이시다 이건가.

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보든 말든 케이든과 에드거는 그가 펠튼 왕국에 파견된 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간간이 둘 사이에서 케이든의 사촌 형, 노엘 웬리르 공작의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니 셋이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렸던 듯했다. 노엘 공작의 아내가 산달이 가까워져 오니 어떤 선물을 보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둘이 한창 이야기를 할 무렵 우리는 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으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케이든과 둘만 식사하던 게 몇 달이나 되었다고 식사 자리에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 괜히 어색하였다.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며 에드거와 케이든을 관찰하였다. 케이든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며 그를 재촉하였다.

“펠튼에서 건너오는 찻잎의 관세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며? 국왕 전하께서 굉장히 흡족해하셨어.”

“협상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전하께서 수고했다고 친필 편지를 보내 주셨네. 가문의 영광이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렸다. 누구는 헤어지라고 달달 들볶였는데. 누구는 칭찬이 가득 담긴 편지라니. 차별 대우도 이런 차별 대우가 없다. 괜히 서러워져 뚱한 얼굴로 와인이나 벌컥 들이마셨다.

빈 잔을 채워 주려고 시종이 와인을 들고 다가오자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어느새 이쪽을 본 케이든이 손을 들어 시종을 막았다.

“술은 한 잔만.”

“네에.”

술에 취해 고백했던 날 이후 케이든과 약속했다. 술은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한 번에 딱 한 잔만 마시기로. 입 안에 남은 와인 향이 달아 다음 잔이 아쉽긴 해도 약속은 약속이니 얌전히 대답하며 물로 입을 축이자 에드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케이든에게 말했다.

“보모가 다 되었군. 케이든.”

“그래도 귀엽지 않나.”

귀엽, 술기운이 도는지 귀 쪽이 화끈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케이든이 내게 싱긋 웃어 준 후 에드거에게 마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펠튼의 왕자는 아직도 행실이 엉망인가?”

“어느 왕자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구분할 필욘 없겠군. 넷 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엉망이니까.”

에드거는 펠튼에서 일할 때 제법 고생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간 있었던 일을 케이든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다만, 에드거도 펠튼의 왕자들도 딱히 내 관심사는 아니었기에 그리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느새 이야기에서 튕겨 나온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케이든과 대화를 나누는 에드거 체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살짝 좁은 이마, 눈꼬리가 올라가 민첩하고 영리한 인상을 주는 눈. 전체적으로 오뚝하지만 동그랗게 마무리되는 콧대. 노력하지 않아도 웃는 인상의 입가.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예법을 지키는 몸가짐. 그리고 열정으로 반짝이는 초록색 눈.

가만히 에드거 체이스를 보고 있으니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누군가가 연상되었다. 그러고 보니 라비도…….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불현듯 몰려오는 깨달음에 경악했다. 설마, 케이든의 취향이?!

절로 벌어지는 입가를 슬그머니 손으로 막고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어, 어떡하지? 만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인제 와서 얼굴을 바꾸기는 좀 그런데. 아, 그래. 눈 색. 눈 색 정도면 괜찮을지도.’

생체 마법 쪽 연구하던 놈이 누구지? 루이스? 아니 걘 근육 쪽이니까 눈은 잘 모를 거다.

아 그래, 테일러가 작년에 색조 관련 논문을 썼었지. 그때는 하도 귀찮게 굴길래 읽어 봤던 것이었는데 모처럼 녀석이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 방에 돌아가자마자 녀석한테 편지를 보내고…….

“리암?”

“네에?!”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던 중 들려오는 부름에 지레 찔려 놀라다 보니 대답하는 목소리가 삑사리 났다. 내 대답에 케이든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한껏 온몸으로 결백을 주장하자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거세졌다.

아마 에드거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당장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라며 간소한 취조가 벌어졌을 것이다. 케이든은 끝끝내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으며 내게 말했다.

“식사를 다 했으면 배웅 겸 잠시 걷지.”

“좋아요!”

인제 보니 시종이 어느새 디저트까지 내왔었다.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무의식중에 받아 두고 한 입만 먹은 채 내버려 두었더니 아이스크림이 녹아 그릇에 가득 차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한 그릇과 딴생각했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는 나를 번갈아 본 케이든은 내 태도를 미심쩍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후 소화 겸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는 테일러에게 연락을 취한 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차근차근 완성했다.

우선 방으로 가서 편지를 쓴 다음에 내일 바로 마탑으로 가야지. 녀석은 어디 싸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지금 마탑의 교수직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녀석도 자발적인 실험체를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마탑에서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눈 색을 바꾸는 시술에 들어가면 될 것이다. 좋아 완벽해.

산책을 마친 후, 생일날 다시 보자며 케이든과 인사하는 에드거의 녹색 눈을 보며 나는 방에 돌아가자마자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다가, 문득 그래도 케이든의 의견을 한 번은 물어봐야 한단 걸 깨달았다.

앞으로 계속 얼굴 보고 살 사인데 갑자기 눈 색을 바꿔서 나타나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케이든. 케이든.”

“…리암. 나는 그대가 이렇게 부를 때마다 그대가 무슨 사고를 쳤을까 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네.”

“아직 안 쳤는데…….”

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턱짓했다.

“무슨 일인가?”

“만약에 제 눈 색깔이 바뀌면 어떨 거 같아요? 녹색 같은 거로?”

“인위적으로 바꾸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 마.”

말이 끝나자마자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단호한 대답에 내가 눈을 끔뻑이자 케이든은 내 눈두덩이를 엄지로 약하게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한 적 없던가? 나는 그대의 푸른 눈을 좋아해.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투명한 바닷속에 내가 비치는 것 같거든.”

그 손길을 받는 내 얼굴이 그대로 달아올랐다. 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케이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선을 헤매자 케이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바다를 잃고 싶지 않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네에.”

“대답은 참 잘해.”

케이든의 말에 저녁 시간 내내 세웠던 머릿속의 모든 계획을 폐기 처분했다.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리지 못하고 실실 웃고 있자 케이든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계획이 있으면 지금 당장 말하라고 조곤조곤 나를 구박했다.

평소였으면 억울한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기분이 들떠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웃다가 결국 복도에서 케이든을 껴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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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혼식은 짧은 토론 끝에 4월에 치러지기로 결정됐다. 케이든은 봄이 시작되는 3월에 치르고 싶어 했고 나 역시 케이든과의 결혼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지만, 손님 초빙의 문제와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조금 늦춰졌다.

사실, 3월에 치르려면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내가 3월은 싫고 4월에 하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케이든은 흔치 않은 내 고집에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다가 내 얼굴을 가만 보더니 알았으니 그런 표정 좀 그만 지으라 투덜거렸다.

내가 무슨 얼굴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다행이었다. 3월에 결혼식을 치르면 케이든과 함께 잠드는 밤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익숙한 3월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두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차근차근 준비되어 가는 결혼식을 보고 있으니 날짜를 잘 고른 것 같아 마냥 흐뭇했다. 결혼식에 쓰일 천들이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연이어 들어오는 것을 창틀에 기대어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제 곧이구나.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은 것 같군.”

“케이든!”

내 뒤쪽에서 조용히 다가온 사람의 목소리에 반가워하며 고개를 돌리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미소를 띤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수줍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으라 손을 흔들자 그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익숙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그가 창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를 조금 비켜 주었다. 그가 내 옆에 서서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약한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가자 매끈한 이마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 자리 잡았다. 케이든은 웃으며 내게 물었다.

“이제 곧이군.”

“네에.”

“그대의 스승님은 언제쯤 도착하실 예정인가? 식전에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연락이 없으시군.”

“음, 글쎄요. 사실 본식 때도 제시간에 오시면 다행인 거 같아서.”

내 말에 케이든은 골치 아프단 얼굴을 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를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나도 스승님을 데려다가 케이든 앞에 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분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내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답장하셨으니 분명 오시기는 할 텐데……. 정말 시간 내에 참석하기만 한다는 의미였을까?

리암 카터는 다섯 살 때 강도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때 부모님이 리암을 지하 다락방에 숨겨 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갈 곳이 없어 멍하니 부모님의 시체만 바라보고 있던 리암 카터를 거두어 준 것이 리암 카터의 스승 벨로니였다.

살면서 아이는커녕 동물조차 키워 본 적 없는 벨로니였다. 덕분에 그녀의 지인들은 모두 벨로니가 곧 리암 카터를 어디 보육원에 보내 버릴 것이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리암 카터가 마탑에 들어가는 열다섯 살 때까지 벨로니는 그럭저럭 리암 카터를 키워 냈다.

리암이 열다섯에 마탑에 들어간 이유도 벨로니가 연구를 위해 마탑의 교수직을 승낙한 후, 이제 마탑에서 생활해야 하니 시험을 보라 해서 봤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벨로니는 리암이 마탑의 인장을 받고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열아홉 때까지 리암을 키워 낸 스승이자 부모 같은 이였다. 그래서인지 리암 카터 역시 벨로니에게만큼은 뚜렷한 친애의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말이다.

리암 카터의 기억이 있어서일까, 나 역시 내가 직접 마주치고 인식이 바뀔 만한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면 그의 감정을 대부분 물려받았다.

이런 것을 자각할 때마다 내가 원래의 리암 카터와 섞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초반에 회귀할 때는 리암 카터의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을 고려하면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만.

케이든은 스승님을 만날 일이 부담스러운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스승님은 내가 케이든 때문에 마법을 그만두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딱히 반대할 생각 없을 텐데.

하지만 내가 그의 삼촌 앞에서 긴장했듯이 그 역시 내 스승을 마주할 생각에 긴장하는 것이 묘하게 즐거웠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활짝 웃었다.

“뭐! 안 오시면, 안 오시는 대로 진행하면 되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말이 끝나자마자 볼이 꼬집혔다. 아픈 볼을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나를 보고 케이든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져 나 역시 따라 웃었다. 아,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이제 곧이었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맞는 시간을 지나, 그의 옆에 온전히 서게 되는 날이.

나는 가슴 전체로 번져 나가는 심장 울림을 느끼며 가볍게 흥얼거렸다. 노래가 엉망이라는 핀잔이 옆에서 들려와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케이든?”

“리암? 왜 그러, 지?”

“케이든!”

나를 바라보던 웃음 띤 얼굴 그대로 깨진 유리처럼 그가, 아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나와 맞잡은 손이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일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나는 다급히 떠나는 파편들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내 손과 맞닿은 조각들은 더욱 잘게 쪼개져 이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곧 내 곁의 온기는 산산조각이 나고 발끝까지 조각난 그와 이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조각들을 붙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은 조각을 붙잡기 위해 손을 쥔 그 순간, 내 발아래의 공간마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 틈새로 고꾸라지며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안 돼!’

그러나 허공을 부유하던 몸은 절규에서 서서히 유리되어 곧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등에 와 닿는 익숙한 감각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얇은 커튼 사이로 비치는 따뜻한 아침 햇살. 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 익숙한 봄의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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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번쩍 눈을 뜬 나는 숨을 거세게 헐떡였다. 끔찍한 악몽을 꾼 몸이 긴장으로 발발 떨리고 있었다. 급히 손을 들어 내 뺨을 때렸다.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꽉 닫히지 않은 커튼 틈새로 옅은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급히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꾹 누른 채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내 옆에서 깊이 잠든 케이든이 보였다. 떨리는 손을 그의 몸 위에서 배회하다 몸에 손을 대는 대신 말아 쥐었다.

이불을 걷어 침대 밖으로 걸어 나오자 카펫을 뚫고 올라오는 냉기가 느껴졌다. 현실감을 일깨워 주는 그 차가움이 차라리 반가웠다.

천천히 걷다가 멀리 가지 못하고 침대의 각진 모서리 부분에 무너지듯 기대앉았다. 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니 떨리는 몸이 차츰 진정되어 갔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이제야 사태 파악이 돼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를 헝클였다.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다.

행복했던 몇 달을 질투하듯 꿈은 내가 억지로 파묻었던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비추어 강제로 내게 보여 주었다. 꿈속의 익숙한 봄을 떠올리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시 그 봄으로 돌아갈 바에야 그냥 이 시간, 이 순간에서 죽고 싶었다.

“리암?”

가만히 숨죽여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위쪽에서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사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젖은 얼굴을 손으로 급히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이 내 얼굴을 가려 주길 바랐으나, 유감스럽게도 약했던 달빛은 그사이에 더 강해져 그와 나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케이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왔다. 그 짧은 사이에 어느새 잠기운을 날려 보낸 남자는 우아한 손길로 내 얼굴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어느새 다시 젖은 얼굴이 그의 손을 적시었다.

염려가 담긴 눈으로 내 얼굴을 살피던 그가 천천히 물었다.

“악몽을 꾸었나?”

악몽, 그래 악몽이었다. 나는 또다시 떠오르는 꿈의 내용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껏 물기를 닦아 준 보람이 없이 그의 손은 또다시 흐르는 눈물에 젖어 들어갔다. 대답 없이 그만 바라보는 나를 위로하듯 케이든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창 악몽에 울 나이긴 하지.”

“…그렇게 어리진 않아요.”

“왜? 고백하던 날 밤에도 여러모로 울지 않았었나.”

여러모로, 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에 울던 것도 잊고 몸을 굳히자 작게 웃은 그가 다 울었느냐며 내 이마에 입 맞춘 뒤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카펫이 깔렸다곤 해도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그가 앉는 것이 싫어 그를 말리자 되레 그가 나를 붙잡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

“하지만 케이든……. 침대에 앉아요. 네?”

조르듯 그의 팔을 잡고 흔들자 그가 코웃음을 치곤 내 눈에 손을 올리며 억지로 눈꺼풀을 내렸다. 내가 그의 손 아래에서 억지로 눈을 깜빡이자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눈꺼풀이 요란하군.”

“그치만…….”

가벼운 핀잔에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꾹 감았다. 내가 얌전히 눈을 감은 것을 느낀 그가 눈에서 손을 떼며 자장가를 불러 주듯 느리고 부드럽게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네 곁에 계속 있을 테니 안심하고 자.”

내 곁에 계속.

속으로 그의 말을 몇 번 따라 읊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어떤 마법보다도 더 강하게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 말을 되뇌고 있으니 밤중에 놀라 강제로 일어난 데다 울어 혼곤해진 몸이 정신과 함께 차츰 가라앉았다.

천천히 잠이 드는 와중에 그와 맞닿은 손에서 익숙한 온기가 느껴져 설핏 미소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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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잠든 지 모르게 케이든의 어깨에 기대 까무룩 잠들었던 다음 날 아침, 거울을 봤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잠에서 막 깨 몽롱한 상태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긴 목소리로 잘 잤느냐 아침 인사를 했더니 들려온 것은 풍선에서 바람 새듯 참지 못하고 쉼 없이 흘러나오는 작은 웃음소리였다.

의아함에 눈을 비비며 케이든을 보는데 눈이 뻐근하고 잘 안 떠지는 것이 어째 느낌이 이상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확연히 부은 눈두덩이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내 얼굴을 보는 케이든의 표정이 요상했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장면을 목격했는데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필사적으로 참는 듯 확장된 동공, 입술을 잘근거리며 웃음을 억누르는 입가.

기묘한 불안감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거울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우당탕 뛴다고 들려오는 핀잔도 없었다. 달려간 내가 거울을 확인함과 동시에 뒤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꺽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본 나는 쉰 목소리로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게 뭐야!”

여전히 벌건 흔적이 남은 눈두덩이, 눈물 자국이 선명한 뺨에 평소의 두 배가량 퉁퉁 부은 얼굴. 최악이었다!

간신히 진정했다가 내가 거울을 붙잡고 이 현실을 부정하는 꼴에 한 차례 크게 웃은 케이든은 결국 언제까지 웃을 거냐며 내가 울먹일 때야 웃음을 추슬렀다. 그러나 여전히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종을 부른 그는 부은 얼굴을 가라앉힐 얼음과 주머니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급히 찬물로 세수를 했지만 부은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초라한 걸음걸이로 욕실에서 나오자 케이든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 나를 침대에 다시 눕혔다. 내 얼굴에 얼음주머니를 올려 주며 그가 즐겁게 말했다.

“맨날 눈물을 흘리는데도 매번 멀쩡한 얼굴이길래 나는 그대가 붓지 않는 재주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군.”

“놀리지 마세요…….”

역시 울다가 바로 잠든 게 문제였나 보다. 나는 오늘의 수치스러운 일화를 머릿속 일기장에 꼼꼼히 기록했다. 다음엔 악몽을 꾸더라도 꼭 찬물 세수까지 마치고 침대에 눕자.

내가 다음 기회를 다짐하며 그에게서 냉찜질을 받고 있을 때, 방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겠다는 케이든의 말에 따라 시종들이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는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케이든은 여전히 부은 내 얼굴을 즐겁게 보며 나를 일으켰다.

“밥을 먹고 마저 하지.”

“아니에요.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아요.”

케이든의 손길이 떨어져 나간 건 아쉽지만 여전히 거울 속 내 몰골이 추하기 그지없었으므로 빨리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얼굴 쪽에 가벼운 냉기 마법을 걸자 위쪽의 공기가 초겨울의 길거리처럼 차가워졌다.

내 얼굴에 잠깐 손을 올린 케이든이 그러다 감기 걸린다며 혀를 쯧쯧 찼지만 어떻게든 한 시간 내에 붓기를 가라앉히겠다는 내 완강한 태도에 좋을 대로 하라며 내 입에 빵을 물려 주었다.

식사 시간 동안 케이든이 내 얼굴이 아침 식사로 나온 흰 빵처럼 부풀었다고 놀려 울컥하는 소소한 일이 있었지만, 식사가 끝날 때쯤엔 그럭저럭 얼굴도 평소처럼 돌아오고 괜찮아졌다.

드디어 멀쩡해진 상태에 안도한 나는 침대에서 뒹굴면서 사용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며 저녁에 있을 연회를 지시하는 케이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 손에는 전날 침대 아래에 숨겨 두었었던 케이든의 생일 선물이 들려 있었다.

드디어 케이든의 생일이었다. 원래 계획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케이든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 환상과 함께 선물을 건네주려고 했는데, 선물은커녕 아침부터 추한 꼴만 연속으로 보이고 말았다.

하필 새벽에 악몽을 꾸는 바람에…….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는 법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입술을 삐죽이며 옷을 고르는 케이든의 뒤태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암, 그대도 슬슬 준비해야지. 얼른 일어나도록.”

“케이든. 잠시 손 좀 주세요.”

“손?”

케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이제 늘 빼놓지 않고 끼고 다니던 투명한 파란빛 마력저항석 반지 대신 나와 나누어 낀 반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손목에 팔찌를 끼워 주었다.

“생일 축하해요. 케이든.”

케이든의 시선이 팔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꼬리를 문 뱀처럼 맞물린 얇은 금색 팔찌의 양 끝에는 알알이 투명한 흰 빛의 마정석 다섯 개가 박혀 있었다.

물끄러미 팔찌를 보던 케이든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늘 여유롭던 그답지 않게 무슨 말을 할지 고르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다 마정석이군.”

“그 정도로 제련하느라 힘들었어요.”

원래는 시원시원하게 팔찌를 주고 멋진 척하려 했는데 저 팔찌를 만들기 위해 했던 고생들이 스쳐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구질구질하게 한탄하고 말았다. 말을 뱉고 나니 아차 싶어 입을 다물자 그가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뭘 만들려고 돈을 그렇게 받아 가나 했더니.”

“케이든한테 주는 선물인데 허투루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민망해져 이불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숙이자 이마에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살짝 고개를 들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날렵한 코끝에서 흩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햇빛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남자는 눈을 휘며 내게 말했다.

“맘에 드는군.”

“정말요?!”

칭찬에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팔찌에 대해 말해 주고 싶은 게 많았다.

“이건 보호막 마법이 새겨져 있고, 이건 바람, 여기는 해독, 이거는 해주, 가장 끝에 건 근거리 이동 마법이에요.”

“이 정도면 전쟁터 한가운데에 떨어져도 살아남겠군.”

“그러라고 주는 거예요! …케이든이 나 때문에 마력저항석을 빼 두고 다니니까,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뭐, 그대가 늘 내 곁에 있을 테니, 굳이 대체할 거리가 필요한가 싶긴 하다만. 고맙네. 리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말하는 케이든의 말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부끄러워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위에서 부드럽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좋아 나는 눈앞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허리를 당기며 침대에 눕자 서 있던 케이든이 내 위로 무너져 내렸다.

무슨 짓이냐는 가벼운 타박이 돌아왔지만,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자 곧 기분 좋은 침묵과 함께 헝클어진 내 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

“너무 긴장한 것 아닌가?”

“그치만…….”

몇 번이나 케이든에게 조심할 것들을 묻긴 했지만, 실전이 다가오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긴장으로 차가워진 내 손을 잡아 주며 케이든이 속삭였다.

“정 어려우면 몸이 아프다고 말하고 중간에 빠져나가. 그래도 돼. 말하기가 어렵다면 나를 잡고.”

“일단 한번 최선을 다해 볼게요.”

케이든은 영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나를 보다가 어느새 그에게 인사하러 다가온 손님을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케이든 공작.”

“루퍼트 후작. 오랜만이군요.”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노년의 신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케이든에게 악수를 청했다. 케이든은 마주 웃으며 남자와 악수를 하였다. 그 옆의 귀부인과 청년이 나에게 눈인사를 하길래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걸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밀쉐 후작 부인.”

“어머, 만나서 반가워요. 음, 아미르 부인?”

“그냥 리암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아직 작위가 없고 안주인의 지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아미르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모양인데, 이 어정쩡한 호칭을 듣고 있으니 소름이 돋았다.

부인. 언젠간 익숙해지겠지. 알버트 백작이 나를 ‘리암 경’이라고 부를 땐 별 감흥이 없었지만, 부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그 칭호가 더없이 그리워졌다. 하루라도 빨리 ‘경’ 칭호를 받고 싶었다.

귀부인의 옆에 서서 흘끗흘끗 나를 보고 있는,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청년은 두 노부부의 손자인 듯했다.

아들이 마약 후 방화를 한 뒤 가문에서 내치다시피 하고 대신 손자를 후계자로 키우는 중이라 하였지. 내 또래라고 들었는데 또래 맞나? 수염 때문인지 케이든보다 겉늙어 보였다.

내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화색이 돈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안, 안녕하십니까. 리암 님. 저는 빅터 밀쉐라고 합니다. 저, 저 리암 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귀족이 극존칭에다가 무슨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만난 것 같은 태도로 나오자 의아해 상체를 슬쩍 물렸다. 뭐지? 내가 경계를 하든 말든 이미 자신의 세계에 빠진 빅터 밀쉐는 잔뜩 흥분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저도 마법사입니다. 제가 마탑에 관심이 많아서 리암 님의 이야기도 익히 들었습니다.”

“아하. 영광입니다.”

마법사라 하니 그의 태도가 이해 갔다. 1년에 50명도 안 되는 이들만 받아들이며 그 교육 과정을 전부 견디고 인정까지 받는 자는 그중 절반도 되지 않는 곳. 대륙의 마법사들이라면 마탑을 으레 동경하기 마련이었다.

수염이 무성한 사내가 내게 표하는 동경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런 이들을 한두 번 만난 것이 아니기에 웃으며 입을 열 때였다.

“실례지만 곧 국왕 전하께서 도착할 시간이 되어 마중을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내 배우자를 빌려 가겠네.”

케이든이 불쑥 내 허리에 손을 감으며 나를 뒤쪽으로 빼내었다. 그 말에 빅터 밀쉐의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이 나를 좇았지만, 왕족을 마중하겠다는데 막을 핑계가 있을 리 없었다.

“리암 님. 다음에 부디 꼭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기회가 되면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응하겠습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내 허리에 닿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케이든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 지금 빅터 밀쉐가 새롭게 케이든의 ‘싫어 리스트’에 등재되었구나. 나를 보며 눈을 빛내는 그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빅터 밀쉐에게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 주는 일은 없을 듯했다.

후작 일행과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리자 때마침 문가의 시종이 국왕 부부의 입장을 큰 소리로 알려 왔다. 케이든과 이야기하며 잠시 풀어졌던 몸이 순식간에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케이든을 따라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할 수 있다! 리암 카터!’

위대한 칼레의 수호자시자, 북 보리스 연방의 군주. 스투라티아의 세 번째 기둥이신 어쩌고로 이어지는 기나긴 인사말 끝에 국왕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국왕 부부가 가장 앞에서 입장하였고 그 뒤로 두 공주 그리고 노엘 웬리르와 웬리르 대부인이 뒤따랐다. 왕비를 제외한 나머지 왕족들은 전부 키가 장대같이 큰 편이었다.

그 장신 중에서도 보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국왕의 덩치는 도드라졌다. 며칠 전 저택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말끔하게 꾸며 놓은 얼굴에선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왕비는 당당하고 우아한 몸짓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평균에 속하는 키였으나 몸집이 큰 국왕의 곁에 있으니 키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큰 덩치를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 철저히 맞추어 움직이는 국왕의 몸짓에서 부부가 사이가 좋다는 것이 잘 드러났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여인과 금발에 붉은 눈의 곰 같은 사내는 얼핏 보면 미녀와 야수같이 섞이기 어려운 이미지였으나 남색으로 맞춘 비슷한 복장을 한 두 사람은 함께 산 세월을 증명하듯 서로를 돋보이게 하며 어우러졌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쌍둥이 공주들은 사전에 차이점을 듣지 않았다면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오른쪽 볼에 점이 있는 쪽이 아비가일 공주라 했지, 케이든이 이야기해 준 차이점들을 되뇌며 공주들을 살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의 공주들은 전체적으로 어머니를 닮은 얼굴이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둥근 코끝에 얇고 날렵한 입술.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 전체적으로 활기가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니 두 사람은 미세하게 다르게 생기긴 했다. 케이든의 말로는 라울라 공주 쪽이 좀 더 키가 크다고 했다.

어릴 땐 둘을 구분할 방법이 아비가일 공주의 볼에 있는 점밖에 없어 라울라 공주가 볼에 점을 찍고 장난치면 정말로 곤란했다며 그래도 지금은 둘을 구분하기 쉬운 편이라 하였다.

아비가일 공주와 라울라 공주는 친밀함을 과시하듯 비슷한 남색 드레스에 같은 분홍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찬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인제 보니 공주들도 국왕 부부와 복장을 맞춘 듯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웬리르 대부인과 노엘 웬리르 공작은 앞선 가족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두 사람에게선 척 보기에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키와 탄탄한 체격에서 우러나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임신 막달이라 참석하지 않은 웬리르 공작 부인 역시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이라지.

롤렌 왕국의 삼왕녀였던 웬리르 대부인은 롤렌 왕국민의 특징을 그대로 갖춘 외모였다. 그녀는 건강한 갈색빛 피부에 검은 머리, 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움푹 팬 눈두덩이로 진 그늘 속 빛나는 금안은 사냥 직전의 독수리 같은 매서움을 풍기었다. 동시에 단단히 닫힌 입술 아래로 각진 하관에선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실제로 남편 베르너가 죽은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외국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낸 대부인은 단단한 성격이라고 케이든이 귀띔해 주었었다. 그래도, 무례하게 굴지만 않으면 상냥하신 편이니 너무 겁내지는 말라고 했지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들어오는 노엘 공작은 어머니를 닮은 갈색 피부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키가 크고 단단한 체격의 남성이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강인한 인상을 풍겼는데 외모 곳곳에서 어머니를 닮은 것이 느껴졌다. 그의 날렵한 콧대와 도톰한 아랫입술은 케이든을 닮아 있어 그래도 이들이 혈육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무표정일 땐 어머니와 같이 엄격한 인상을 가진 노엘 공작은 그 인상과 달리 어려서부터 다정한 성격이라 들었는데,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눈웃음을 짓는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나저나 저 가족 중에서 케이든과 가장 닮은 것이 국왕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잠시 애석함을 표하며 다시 정신을 집중하니 케이든이 나를 데리고 국왕의 앞으로 나아갔다.

“칼레의 태양께서 친히 이 자리를 빛내 주시니 더 없을 영광입니다.”

“생일 축하한다. 케이든.”

사실 친척이라고 해도 공주 정도면 몰라도 국왕 부부가 파티장까지 직접 참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원래는 생일 전후로 왕궁에 케이든을 불러 따로 축하의 말을 해 주는 수준에서 마무리되는데 이번에는 케이든의 결혼 발표 때문에 이렇게 전부 참석했다지. 졸지에 모든 왕족이 모일 장소가 된 저택은 요 몇 달 내내 비상이 걸렸었다.

국왕은 짐짓 근엄한 얼굴로 케이든에게 의례적인 축하의 말을 해 준 뒤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본 국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떫어졌으나 왕비의 작은 손이 국왕의 팔뚝을 꾹 죄는 순간 국왕은 빠르게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리암 카터. 그대 역시 만나서 반갑군. 좋은 시간 되시게나.”

성의 없는 인사말에 왕비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국왕에겐 기별도 안 갈 힘이었으나 국왕은 올무에 사로잡힌 사냥감처럼 움찔하여 몇 마디 상투적인 축하의 말을 덧붙였다.

축하의 말이 덧붙여지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케이든은 파티장 안쪽을 향해 손짓하며 왕족들을 에스코트하였다.

안쪽으로 걸어가는 왕족들의 주위를 자연스레 호위들이 감쌌다. 케이든은 국왕 부부의 한 걸음 뒤에서 걸으며 사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들.”

“결혼할 때 돼서야 얼굴 비추고. 지난번에 혼인 신고서도 행정부에만 제출하고 가 버렸다면서요?”

“일이 바빴단다.”

“노엘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예요. 다들 수도에 머물고 있으면서 뭐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렵담?”

“그야 너희가 여름 내내 수프리아에 피서하러 가 있었으니 그렇지.”

자기는 달에 한 번은 안부 차 꼬박꼬박 궁에 들렀다며 노엘 웬리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주들은 그의 말에 대답 대신 까르르 한번 웃곤 말을 돌렸다.

그녀들은 두 사촌 오빠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을 본 그녀들은 활기찬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리암 경? 처음 뵙겠습니다.”

다행이다. 케이든이 미리 말해 준 공주들의 성격을 들었을 때는 초면에 새언니, 같은 호칭으로 부를까 봐 조금 겁먹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녀들에게 맞인사하자 이어서 노엘 공작이 미소 지으며 내게 인사하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노엘 알탄 웬리르라고 합니다. 케이든이 결혼 상대를 저한테도 꼭꼭 숨기길래 어떤 분인가 했더니 매력적인 분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노엘 공작은 외할아버지인 롤렌 왕국의 왕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삼았다고 하였지, 케이든도 풀네임은 그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케이든 에밀 아미르였다. 평소엔 대충 케이든 아미르라고만 자기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리암이 태어난 아르안 공국은 미들 네임 문화가 없어서 이렇게 풀네임을 들을 때마다 조금 어색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저도 웬리르 공작님에 대해 익히 들어왔는데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으니 영광입니다.”

“편하게 노엘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미 가족이잖습니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왜 케이든이 이 사람을 두고 다정한 성격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던 차에 앞쪽에서 킁! 못마땅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왕은 우리 사이에서 오순도순 오가는 대화가 못마땅한 듯 은근슬쩍 우리 쪽을 보며 눈치를 주고 있었다. 소리가 난 곳에 우리의 시선이 몰리자 왕비가 왕의 손을 한 차례 꾹 잡았다 떼었다. 입 닥치라는 그들만의 은밀한 수신호인 듯 손이 잡힌 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문 왕 대신 왕비가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지? 우리는 잠시 볼일을 볼 테니 다들 이야기 나누게나. 만나서 반가웠네. 리암 경.”

“저도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왕비 전하.”

내 인사에 미소로 화답하며 왕비는 왕의 손을 잡아끌었다. 왕을 잡아끌며 동시에 웬리르 대부인에게 말을 거는 그녀의 행동에선 친밀감이 묻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왕비와 웬리르 대부인이 친하다 들었다.

케이든이 말해 준 바에 의하면 국왕 부부는 결혼하기 전에는 꽤 많이 다투었다고 하였다. 그래도 금방 화해하는 편이었는데 한번은 평소보다 유난히 심하게 싸우고 이대로 헤어지느니 마느니 했다고 한다.

그때 레이디 루이제를 설득해 루벤 케슈너 이왕자와 화해하는 데 도움을 줬던 사람이 당시 왕세자비였던 웬리르 대부인이라고 했었다.

20년 전 베르너 케슈너가 죽은 뒤로 루이제 왕비와 웬리르 대부인, 두 사람의 신세는 크게 뒤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교류는 자주 하는 편이라나.

왕실의 웃어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떠나자 노엘 공작이 낮게 웃으며 못 말린단 투로 말하였다.

“전하도 여전하시군.”

“그러고 보면, 네 결혼 과정도 꽤 험난했지.”

그의 옆에서 케이든이 피곤함이 배어 나오는 얼굴로 말했다. 노엘 공작은 시종에게서 와인을 하나 건네받으며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난 그래도 어머니께서 안젤라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전하께서 그나마 더 나서지는 않으셨지.”

“대부인께서 두 사람이 어울리는 한 쌍임을 한눈에 알아보셨던 거지.”

안젤라 웬리르, 현 공작 부인은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무능한 아버지 대신 집안과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평민처럼 길거리 화가로 활동하던 그녀의 그림에 반한 노엘 공작이 그녀를 찾아간 것이 만남의 계기였다지.

이쪽도 격에 안 맞는 결혼이라며 국왕이 꽤 많이 투덜거렸다고 들었었다. 메이어가는 귀족이긴 귀족이었으나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던 집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노엘 공작의 어머니인 웬리르 대부인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기에 국왕이 대놓고 어깃장을 두지는 못하였다고 케이든이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놓고 나서지 않은 것치곤 꽤 들쑤셨던 것 같지만.

노엘 공작은 다사다난했던 결혼 준비 과정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저었다. 몇 년 전의 일이건만 여전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모양이었다.

사촌 오빠들의 결혼 과정에서 아버지가 행하셨던 패악이 옆에서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지만, 공주들은 태연하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불쑥 케이든에게 그녀들이 보낸 생일 선물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케이든이 받은 선물로 바뀌었다. 공주들이 이번에 함께 보낸 선물은 보석을 깎아 만든 체스 세트였다.

하얗고 검은 다이아몬드를 교차해 만든 체스판과 어두운 빛 도는 푸른 크리스털로 검은 말을, 하얀 크리스털로 흰 말을 만든 체스 세트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화려했다. 내가 그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으니 케이든은 웃으며 체스나 한판 두지 않겠느냐 제안했었다.

내가 이기면 체스 세트를 주겠다는 제안에 냉큼 자리에 앉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체스에 문외한이었고 케이든은 굉장한 실력자였기에 세 판을 내리 지고 말았다.

계속 지는 바람에 내가 불퉁해 있자 케이든은 즐겁게 웃으며 언제든 자신을 이기면 체스 세트를 내게 주겠노라 약속을 해 주었다.

…사실 체스 세트 자체는 별로 탐나진 않았지만, 내가 잠깐 시선을 두었다고 해서 가족에게 받은 선물을 내게 주겠다고 선뜻 약속해 주는 것이 좋아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여튼, 공주들의 물음에 케이든은 멋진 선물이었다는 답변을 돌려주며 그녀들의 안목을 칭찬해 주었다. 이야기는 곧 노엘 공작의 선물로 흘러갔다. 노엘 웬리르는 이번 생일에 케이든에게 말 한 마리를 보내었는데 케이든은 그것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달리기도 빠르고 온순하기까지 하더군. 훌륭했어.”

“어미와 아비 양쪽 혈통이 다 훌륭한 놈이지. 네가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다.”

구하느라 힘들었다고 으스대는 노엘 공작의 말에 케이든이 가볍게 웃었다. 케이든이 웃으며 와인을 들어 입을 축이자 그가 손목에 찬 팔찌가 화려한 연회장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보란 듯이 팔을 든 그의 태도에 부응해 주듯 아비가일 공주가 부채를 살랑이며 팔찌에 관해 물었다.

“리암 경이 선물해 주신 팔찌인가요?”

“한눈에 알아보는구나?”

“그야 다섯 가지 고위 마법이 그 정도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팔찌는 만들기 어려우니까요. 이 정도로 만들려면 마탑의 마법사 정도는 돼야…….”

아비가일 공주는 말끝을 흐리며 본격적으로 팔찌를 살피는 데 집중하였다. 케이든은 간식 앞 고양이처럼 머리를 들이대며 눈을 빛내는 사촌 동생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가만히 손목을 내어 주었다.

팔찌를 꼼꼼히 살핀 아비가일 공주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붉은 눈을 반짝였다.

“리암 경. 혹시 추후 시간이 되시면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그래서였구나. 어쩐지 나를 마주한 직후부터 내 눈치를 살피며 슬쩍슬쩍 말을 거는 공주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케이든의 말로는 아비가일 공주가 마탑의 시험에 거듭 떨어지는 중이라 했었지.

케이든은 지난번에 국왕이 나를 만나러 왔던 날 아비가일 공주의 추천장 요청 건도 겸해서 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없이 그냥 가긴 했었지만.

케이든이 알려 준 정보와 아비가일 공주의 말을 결합하니 초대의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 주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케이든이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아비가일 공주가 내게 추천장을 부탁할 것이라 미리 귀띔해 주며 싫으면 안 써 줘도 된다고 했었으니, 그는 지금 내 대답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상황에 휩쓸려 나온 것인지 살펴보는 듯했다.

물론, 원래도 누군가에게 써 줄 생각이 없던 추천장이었던 터라 그녀에게 줘도 상관없어서 한 대답이긴 했지만, 그가 나를 우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실실 웃으며 케이든의 곁에 다가서자 나와 눈이 마주친 케이든이 갑자기 웃는 낯을 지우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라도 묻었나? 내가 의아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이자 케이든은 실소를 흘리며 아프지 않게 살짝 내 볼을 꼬집었다.

“아무 데서나 웃고 다니지 말고.”

“저 케이든 앞에서만 웃는데요?”

“말은 잘해.”

우리가 티격태격하건 말건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아비가일 공주는 라울라 공주를 붙들고 뭐라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노엘 공작은 제각기 사이좋은 시간을 보내는 사촌 동생들을 웃음기 어린 눈으로 보며 술을 훌쩍이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드거! 자네도 왔군. 이리로 오게나.”

“오랜만이야. 노엘.”

노엘 공작의 부름에 상대가 반가운 목소리로 답하며 다가왔다. 에드거 소백작이었다.

노엘, 케이든, 에드거 이 셋은 어릴 때부터 곧잘 함께 놀던 사이라고 들었었는데 노엘 공작의 태도를 보니 둘 사이도 케이든 못지않게 친밀한 관계인 듯싶었다.

“귀국했으면 곧장 나를 찾아왔어야지, 에드거. 너나 케이든이나 소식을 남한테서 먼저 듣게 만드는군.”

“하하. 미안, 너무 오랜만에 귀국해서 쌓인 일들을 먼저 처리하느라 이리저리 불려 다녔거든.”

“그래, 소식은 들었네. 관세 협상을 잘 해냈다면서? 전하께서 아주 많이 흡족해하셨다지.”

“뭐어. 내가 좀 뛰어나지 않나.”

“잘난 체하는 솜씨도 몇 년 새 더 늘어 왔군.”

콧대를 세우며 으스대는 에드거에게 케이든이 웃으며 타박했다. 곧 세 사람은 그가 없었던 사이에 국내에 있었던 이야기, 발도뱅 왕국과의 무역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연회장 곳곳으로 눈을 돌렸다. 반 정도 돌아보았을 때, 어색한 얼굴로 벽에 딱 붙어 눈치만 보고 있는 라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케이든이 라비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더니 참석했구나.

라비는 원래 연회에 초대될 만한 지위가 아니었지만, 케이든이 그의 능력을 좋게 보아 초대장을 보냈었다. 그는 이런 곳에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편이었지만, 케이든과는 어쨌든 일 때문에라도 계속 얼굴을 보아야 하는 사이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연회에 참석한 듯했다.

호감형 미인인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말을 거는 이들을 억지로 받아 주는 라비의 웃는 얼굴에서 순간순간 울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비, 케이든, 에드거 그리고 나.

가만히 서서 속으로 넷의 이름을 조용히 읊어 보다가 문득 발밑이 허물어질 듯한 두려움이 일었다.

내가 아는 원작의 모습은 헝클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동안 나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행복이 눈을 가리고, 내가 외면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게 바뀐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으니 두려워졌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당장 내일이라도 그 저주스러운 봄이 내게 되돌아오면 어떡하지.

급히 눈을 돌려 케이든을 바라봤다.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누구보다 아름다운 남자가 즐겁게 미소 지으며 오랜 친구들과 대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전날의 꿈속처럼 곧 반짝이는 유리 조각처럼 깨어 흩어질까 봐 조바심이 일었다.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꿈속의 그처럼 산산조각이 날까 봐 옷 끄트머리만 살짝 잡으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매가 당겨진 그는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몸을 돌린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근처의 시종을 불러 들고 있던 잔을 건네준 후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미안하군.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아. 주인이 먼저 자리를 비우다니 민망하지만, 부디 좋은 시간 보냈으면 하네.”

“그래.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푹 쉬게.”

그 말을 하는 노엘 공작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케이든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를 데리고 휴게실로 향했다. 그에게 기댄 채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 풍경이 전부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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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어떤 씨앗은 자라 훌륭한 열매를 맺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싹은 틔웠지만 비실비실하게 자라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씨앗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땅속에서 썩어 버리곤 하였다.

에드거 체이스는 자신의 사랑은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썩어 버린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에드거는 리암 카터를 데리고 나가는 오랜 친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진 리암 카터를 보자마자 자리를 내팽개치고 나가는 케이든의 모습이 낯설었다.

저렇게 사랑에 헌신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사람을 오래도록 알아도 그 깊이를 절대 알 수 없다더니.

“에드거, 괜찮나?”

가만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에드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괜찮지. 노엘.”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에드거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친구에게 짐짓 허세를 떨며 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노엘은 참 다정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의 다정함에 방심해 노엘이 알고 있는 풋사랑은 사실 아직도 미련을 완전히 덜어 내지 못하고 이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웃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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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이 에드거의 짝사랑을 알아차린 것은 한창 피가 들끓던 시기의 15세 무렵이었으니 벌써 17년이 지난 일이었다. 17년이나 이어지는 짝사랑이라니, 하는 입장에서도 징글징글했다.

에드거는 그 나이대의 소년들을 모아 둔 왕실 주관 달리기 시합에서 당당히 우승해 월계관을 머리에 쓴 채 활짝 웃던 금발의 소년을 기억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던 그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은 에드거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추억 속에서 빛날 것이었다.

우승하지 못한 것이 분해 내내 땅을 차던 것도 잊은 채 그 소년을 홀린 듯 보던 에드거는 이내 소년에게 뛰어가 이름을 물었었다.

갑자기 다가온 또래를 수상하게 바라보던 소년은 에드거의 물음에 픽 웃으며 대답했다. 케이든 아미르. 어리고 미성숙했던 소년의 인생을 뒤바꾼 이름이었다.

그때부터 케이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때는 자신이 하는 게 사랑인지도 몰랐었다. 그저 케이든을 더 자주 보고 싶었고 그가 가는 곳에 나도 있었으면 했다.

어렴풋이 이게 동경이란 건가? 생각하던 그에게 어느 날 노엘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혹시 케이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부정하려던 찰나 몰아닥친 깨달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았다. 멍청한 선택을 한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열다섯의 약삭빠른 소년은 눈치 빠른 다정한 친구 앞에서 한차례 울고 난 뒤에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열심히 궁리해 보았다.

케이든은 적당히 사람을 사귀고 그동안엔 섭섭하지 않게 대해 주었지만, 누군가를 오래 사귀진 않는 녀석이었다. 에드거는 케이든의 그런 성향이 누군가를 쉽게 싫어하고 질려하는 성격과 관련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실이야 케이든만 알 테지만 케이든이 몇 번 지나가듯 했던 말도 그렇고, 아마 맞을 것이다.

반면, 그는 친구로 곁을 내어 준 사람들에겐 정성을 다하였다. 어린 날의 에드거는 애인과의 약속을 깨고 지금 당장 사냥을 하러 가자는 둥 자신이 봐도 창피한 억지를 들어주는 케이든의 행동에 짜릿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 어리고 약았던 소년이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서른둘의 에드거는 열다섯 소년을 그리 탓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열심히 고민하다가 이게 최선이라며 자위하던 소년을 탓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에드거의 어머니, 마리아 체이스는 아미르라면 질색을 하셨다. 정확히는 리디아 아미르에 관련된 모든 것에 도끼눈을 뜨셨다.

그건 리디아 아미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체이스라면 매사에 여유로운 그 공작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본다는 것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버지들조차 부인들만큼은 아니어도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든과 에드거 두 사람이 친구를 맺은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리디아 아미르와 마리아 체이스의 악연은 두 사람이 아미르와 체이스가 되기 전, 리디아 케슈너와 마리아 켐벨이던 시절부터 이어지던 것이었다.

원래의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16세가 되던 해, 두 사람은 동시에 한 남자와 사귀게 되었다.

그래, 사귀게 되었다. 이 과정에 두 사람의 동의가 있었다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관계에 두 사람의 동의는 없었고, 두 분은 그걸 6개월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이 뭐라고, 진실을 깨닫고 남자를 쥐잡듯이 잡은 두 분은 그걸로 모자라 서로의 머리채까지 잡고 말았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공주와 후작가의 금지옥엽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벨즈가 삼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난투극은 결국 절친했던 두 사람 사이를 끝장내고 말았고, 이것은 베르너 왕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아 트로이 벨즈는 근신을 권유받았다.

그런데 정작 트로이 벨즈는 근신차 갔던 아인즈 지방에서 평민 여자와 사랑에 빠져 성인이 되자마자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으니 그 때문에 싸웠던 리디아 케슈너와 마리아 켐벨만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사랑은 잊어도 원수는 잊지 않는다는 옛 고언을 그대로 실천하시는 두 분은 그 후 몇십 년이 지나 자식들이 당시의 자신들만큼 자란 후에도 서로라면 이를 가셨다.

케이든과 친구를 하기로 했단 소식을 전해 드렸을 때 어머니가 늘 자랑하시던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만큼 얼굴이 벌게져 성내시던 것을 기억하는 에드거 체이스는 무의식중에 케이든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디 가서 말하기도 쪽팔린 불화 사유였지만 당시 두 가문은 꽤 진지하게 서로를 싫어했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곱게 자란 순종적인 열다섯 소년에겐 케이든 아미르에게 우정 외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밝히면 돌아올 후폭풍을 견뎌 낼 용기가 없었다.

나중에, 리디아 아미르가 폐병으로 죽고 난 뒤 그녀의 장례식에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보며 두 분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증오와 미움으로 점철된 관계가 아니었겠단 사실에 뒤늦게 생각이 닿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여러모로 늦은 후였다.

생각만큼 집안 간의 관계가 파국이 아닌 걸 깨달은 후, 잠시 고백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긴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까지 잃은 케이든이 텅 빈 얼굴로 부모님의 묘비를 바라보다 가까이 온 에드거에게 약하게 미소 지으며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그 순간, 에드거는 케이든이 자신에게 바라는 관계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그리고 에드거는 잠깐이나마 피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감정의 씨앗 위로 흙을 더 부어 버렸다. 절대 밖으로 피어나지 못하도록, 그 안에서 썩어 죽어 버리게.

그 후, 에드거는 도피하듯 외교관 업무를 핑계 삼아 해외를 전전하였다.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 보기도 하고, 일에 치여서 사랑이고 뭐고 다 잊고 지내보기도 하고, 남들 하는 만큼은 다 해 보면서 지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던가. 이래저래 일 때문에 몸은 피곤했지만, 감정에 양분이 더해지지 않는 생활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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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날이었다. 유독 아침부터 일진이 나쁘긴 했지만 에이, 이런 날도 있을 수 있지. 하고 넘길 수 있을 만한 아침. 약간 습습한 날씨.

살짝 헝클어진 매무새로 출근한 에드거에게 비서가 고국에서 개인적으로 온 편지를 전해 준 그 순간이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또렷했다.

‘친애하는 내 친구 에드거에게.’로 시작하는 반가운 편지. 그리고 평소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적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글씨가 전하는 결혼 소식. 에드거는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믿기지 않아 편지를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읽었다.

‘결혼? 결혼이라고? 케이든이?’

처음 느낀 것은 우습게도 황당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든 이 녀석은 평소에 자신은 결혼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말해 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다짐을 실천하듯 서른둘이 되도록 혼인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었기에 그가 결혼한단 소식은, 그것도 그가 직접 전하는 결혼 소식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결혼할 것이냐는 물음에 느물대며 슬쩍 대답을 피해 놓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케이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자신이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케이든의 표정은 어쩐지 어수선해 보였다.

누군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결혼을 다짐하고, 누군가는 혼자 살 것을 다짐하곤 하는데 케이든은 후자였다. 아미르 공작 부부의 모습이야 모범적인 부부의 상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자란 케이든은 부부라는 관계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에드거가 보기엔 케이든은 세상에서 제일 냉정한 척하지만 낭만주의자의 면모가 강한 녀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 다 적당히 만나서 적당히 살아가는 결혼 관계에 저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도 그의 부친에게서 물려받았을 그 면모는 녀석이 남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것뿐만은 아니고 무엇에든 쉽게 질리는 케이든의 성격이나 아미르 가문 내의 정치적 상황 같은 여러 이유가 뒤섞여 비혼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저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케이든의 인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면 누군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장난 편지를 보낸 줄 알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케이든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편지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으므로 에드거는 우선 침착하게 ‘결혼 축하한다. 그런데 네가 어쩌다 결혼 생각을 하게 된 거니?’라는 요지의 편지를 서둘러 보냈다.

사실, 첫 번째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순간까지도 에드거는 좀 황당하긴 했어도 묘하게 현실감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온 케이든의 답장을 받은 에드거는 편지를 읽는 순간, 피어나지도 못하고 지진 부진하게 끌어오던 감정에 종지부를 찍어 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웃고 있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되고.

울고 있으면 눈물을 멈추게 뭐든 해 주고 싶어지고.

힘든 일은 내가 대신해 주고 싶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이야.]

곳곳에서 사랑이 배어 나오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에드거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펠튼의 삼왕자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펠튼의 삼왕자는 사갈 같은 인간이라는 옛 비유가 완벽히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통찰력은 꽤 높이 쳐 줄 만한 것이었다. …짜증 나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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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그는 모처럼의 휴일을 보내는 에드거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왔었다.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에드거가 그를 내쫓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틈을 타 삼왕자는 에드거의 집 곳곳을 뒤적였었다.

제 궁이라도 되는 듯 거침없이 에드거의 집을 뒤적이다 에드거가 고국의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발견한 그는 흥미 가득한 손길로 그것들을 넘겨 보기 시작했다.

중요한 편지들은 집 안 깊숙이 숨겨 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사적인 편지를 들추어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에드거가 황당함에 언성을 높이려던 찰나 어느새 케이든과 주고받은 편지까지 읽은 그는 창백한 흰 얼굴에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에드거를 바라봤다. 불안한 느낌에 에드거가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그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매일같이 사창가에 발걸음하시는 우리 칼레 대사님께 이런 순정적인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네?”

미친 새끼. 에드거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갈 뻔한 욕설을 간신히 삼키며 그를 쏘아보았다. 저 말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가 틀려먹었다.

에드거는 살면서 사창가에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으며 그는 단순히 관세 협상을 위해 단기로 파견된 외교관이었지 대사가 아니었다.

에드거가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가 한 말을 정정하자 삼왕자는 낮게 웃기만 했다.

어느새 책상에 걸터앉아 에드거가 집 안에 구비해 놓은 머스켓을 들어 올려 사냥감과의 거리를 재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에드거를 바라본 그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왕실만큼 대가를 받고 몸 굴리는 인간들이 가득한 곳이 또 어딨겠나? 그곳만큼 고급 창부가 가득한 사창가가 없지. 에드거 씨는 그곳을 매일 오가는 중요 손님이니 곧 대사로 승진하실 테고.”

진짜로 미친 새끼. 한순간에 왕실 사람들을 창부로 격하시키는 삼왕자의 언행에 에드거는 두통이 일었다. 그는 최대한 왕자의 언행에 반응하지 않도록 천천히 심호흡했다.

언행이 격해서 그렇지 이건 왕자가 던지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섣불리 맞장구라도 쳤다간 이걸 꼬투리 잡아 온갖 행패를 부릴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인간에게서 제물을 받던 신들조차 왕자님의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하겠군요.”

“아하하!”

에드거의 답변에 왕자는 크게 웃으며 천천히 머스켓을 내려놓았다. 소리 내 웃고 있지만 웃음기 없이 삭막한 눈을 마주하며 에드거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순간,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건 펠튼의 왕족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이런 인간뿐이란 것이었다.

과거 펠튼에서 노엘이나 케이든 둘 중 하나를 펠튼의 왕족 한 명과 혼인시키는 것이 어떠냐는 혼담을 칼레에 넣었을 때 아미르 공작 부인과 웬리르 대부인께서 길길이 날뛰시며 혼담을 거절하도록 한 이유가 있었다.

노엘이 펠튼의 왕족과 인연을 맺었다면 그는 분명 정신병에 걸려 일생을 우울하게 보냈을 것이고, 케이든이 혼담의 주인이 됐다면 그는 일주일도 인내하지 못하고 펠튼 왕실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후 잡혀 사형당했을 것이다.

자신은 왕족도 아닌데 무슨 죄로 삼왕자를 상대하고 있는지 한탄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에드거에게 삼왕자가 느긋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나저나 칼레 사람들은 왜 이렇게 쉬운 길을 어렵게 가는지 모르겠다니까.”

“펠튼 사람들은 어려운 길도 쉽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에드거의 말에 삼왕자는 크게 웃으며 에드거가 케이든과 주고받은 편지를 두 손가락에 끼고 이리저리 돌리며 장난을 쳤다. 그 행동에 에드거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민하며 계획만 세우다가 출발도 못 하는 것보단 낫지.”

삼왕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에드거는 출발선에서 얼쩡거리기만 하다가 출발할 기회도 잃은 머저리 축에 속해 있긴 했지만.

그날의 대화를 떠올리고 나니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리암이란 남자에게 치졸한 질투가 이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는 조용히 자신이 가진 술 중에 가장 독한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켜며 편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케이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끄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며 에드거는 묵묵히 술이나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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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처리할 일 때문에 칼레에 잠시 귀국한 후 케이든을 우선 만났었다.

그가 1년 넘게 쫓고 있는 트리불라에서 유통하는 마약이 펠튼산 마약으로 추정되어 혹시 펠튼에서 생산되는 마약 몇 가지를 구해다 줄 수 있겠느냐고 케이든이 요청한 바가 있어 그곳에서 구해 온 것들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었다.

구해 온 물건을 전해 주며 농담처럼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냐 물으니 케이든은 답지 않게 쑥스러움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여워.”

“뭐라고?”

“뭐어. 활기차다, 사랑스럽다, 장난꾸러기다. 등등 묘사할 말은 많지만 그러면 말이 너무 길어지니 귀엽다는 말로 요약 가능할 것 같네.”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군.”

아무래도 녀석은 갓 결혼했던 노엘이 그랬듯이 신혼이라면 누구나 빠지기 마련인 팔불출의 늪에 빠진 듯했다. 질색하는 친구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어린 신랑과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케이든의 모습에 에드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신랑을 두신 케이든 아미르 씨.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도록.”

“저녁 전엔 집에 돌아가 봐야 하는데 이야기가 그 전에 끝날는지 모르겠군.”

얼마나 배우자 자랑을 해 대려고. 에드거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쭉 펴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케이든은 말을 고르듯 손가락으로 의자를 툭툭 두드리다가 대답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정도는 천성으로 타고난 듯도 해.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타인에게 냉정한 면도 있으니. 꽤 특이하지.”

배우자의 이야기를 하라 판을 깔아 주니 신이 나 열심히 말을 하는 케이든에게 에드거는 농담을 던졌다.

“반면에 너는 의심덩어리니까 두 사람의 조합이 괜찮군.”

그의 농을 듣곤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코웃음을 치는 케이든의 행동에 에드거는 소리 내 웃었다.

오랜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자 어수선했던 마음이 차분히 정돈되어 갔다. 어찌 됐건 그는 에드거의 소중한 친구였으니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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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방문한 아미르 저택에서 실제로 만난 리암 카터라는 남자는 예상보다 헐렁했고, 생각보다 더 예리했고, 어처구니없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와 따뜻한 바다의 눈을 가진 청년은 아름다웠다. 하얀 얼굴에 화가가 검은 물감으로 정성 들여 한 획, 한 획을 거듭해 칠한 것 같은, 짙고 반듯한 눈썹. 그 아래로 자리 잡은 큰 생기가 가득한 쌍꺼풀진 파란 눈. 또렷한 콧대. 보기 좋게 도톰한 입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냉막한 인상도 쉽사리 풍길 얼굴은 케이든의 곁에 있는 내내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나이대의 혈기 왕성함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남자에게선 어릴 적 에드거를 매료시켰던, 월계관을 쓰고 활짝 웃던 빛나는 소년이 얼핏 보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소년의 자취에 멈칫하기도 잠시, 에드거는 그 입에서 나온 경망스러운 말에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편하게 에드거라고 불러 주십시오. 케이든의 배우자가 되실 분인걸요. 그리고 교제하는 사람은, 제가 일이 바쁜지라 부끄럽게도 없습니다.”

“와! 그렇다면 혹시 소개를 받아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라비 플레어라고 행정부에서 일하는 유능한 행정관이 있는데…….”

지금 나를 놀리나? 잠시나마 이 청년에게서 기억 속 소년을 겹쳐 봤단 사실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에드거의 표정이 안 좋자 급히 제 어린 신랑에게 경고하는 케이든이 덩달아 조금 아니꼬워졌다.

그 태도에서 자신이 한 소리 하기 전에 급히 선수 쳐 말할 타이밍을 주지 않겠단 것이 티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 싫은 소리를 해도 네가 해야 한다 이거지.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을 관찰하며 에드거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리암 카터는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내가 케이든을 좋아했단 걸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케이든의 주변 인물은 모조리 경계하는 의부증 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케이든에 대한 마음을 애저녁에 접은 상태에서 저런 경계를 받으려니 기분이 나쁘면서도 조금은 심술이 채워지는 기분이라 유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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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기억이 생각나 새삼 입꼬리를 올리며 심술궂게 웃자 옆에서 다른 이와 이야기를 하던 노엘이 의아하게 보는 것이 보였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주곤 어느새 파티장 끝까지 걸어간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레 안 좋아진 리암 카터의 상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리암 카터의 상태를 보자마자 급히 그를 데리고 나아간 케이든의 태도였다. 자신이 주최자인 연회에 국왕 부부도 참석한 자리를 이렇게 이탈하다니, 그답지 않았다.

케이든 저 녀석, 어지간히도 목을 매고 있네.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배알이 비틀렸다. 저 성격 꼬인 놈도 어떻게 인연을 만나서 저러고 있는데 나는 어쩌다 이 나이까지.

심술이 일어 괜히 오랜 친구를 흉보고 있는 에드거에게 또 다른 오랜 친구 노엘이 조용히 속삭였다.

“케이든, 안 돌아올 것 같지?”

“내가 보기엔.”

“말씀드려 놔야겠군.”

노엘이 자신과 대화하던 이들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며 양해를 구한 뒤, 몸을 돌려 반듯한 몸가짐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왕 부부, 그중에서도 왕비에게 가는 노엘을 보니, 여기서 가장 신분이 높은 국왕 부부에게 케이든 대신 파티를 마저 진행해 달라고 말해 두기 위함인 듯했다.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에서 잔을 들어 올린 에드거는 미소 지으며 떠난 친구들 대신 사람들을 상대하였다.

“그러고 보니, 체이스 소백작께선 곧 펠튼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예, 이번은 임시로 귀국한 것이기도 하고, 펠튼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도 있어서요.”

오랜만의 휴가에서 펠튼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위가 쓰려 왔다. 돌아가서 외교랍시고 그 성격 괴팍한 왕족들의 비위를 맞출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사랑이고 결혼이고 알 게 뭐냐. 일이나 하자. 일이나.’

에드거는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모든 감정에, 어린 시절의 에드거와 스물다섯의 에드거가 그랬듯 그 위에 완전하게 흙을 덮으며 손에 든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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