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최근 케이든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느라 바깥 외출이 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나를 감시하는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착각이면 좋겠지만, 리암 카터가 아무래도 결백하게 산 인간은 아닌지라, 이 느낌을 착각이라고 뭉개고 넘어가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몇 번은 목적지까지 빙빙 돌아서도 가 보고 시선이 느껴질 때 탐색 마법도 써 본 결과, 이 느낌이 착각이 아니란 확신을 얻었다.
‘문제는 누가 나를 감시하고 미행하느냐는 건데.’
또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걸음을 멈추어 섰다. 대낮의 수도 한복판에서 열흘째 이어지는 감시라니, 보통 사람은 아닐 듯했다.
처음엔 ‘혹시 케이든이?’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를 떠보듯 넌지시 운을 띄운 후 물어보니 그는 아니란 결론이 섰다. 애초에 그는 나를 미행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가 물어보면 다 대답해 주기도 했고, 그냥 사람을 당당히 붙였어도 케이든이 붙인 사람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였을 테니까.
괜히 바쁘게 오가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척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거대한 사람의 형체가 몸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던 골목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지만 실망스럽게도 그새 도망쳤는지 몇몇 흔적 외엔 누군지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허리를 숙여 미행하던 사람의 신발에 밟힌 것으로 추정되는 나뭇잎 하나를 들어 올리며 살펴봤다. 우그러지고 뭉개진 나뭇잎의 상태를 보면 급히 도망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추적 마법을 쓰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면 예상보다 외출 시간이 길어질 텐데……. 손안에 쥔 나뭇잎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다, 몸을 돌렸다. 역시 외출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기보단 오늘 범인을 잡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손안에 추적을 위한 작은 파란 마법진을 띄우며 골목을 나서던 순간.
“어?”
“자네. 나 좀 보지.”
골목을 나오자마자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는 듯 나와 맞닥뜨린 사람을 보고 놀라 나는 입을 헤 벌렸다. 아마도 지금 내가 쫓으려던 사람이었을, 남자는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근육이 몸 전체에 자리 잡은 곰 같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든과 똑 닮은 금발과 이글이글 타는 태양처럼 붉은 눈, 그리고 선명한 이목구비. 상대의 모습을 보자마자 누군지 정체가 짐작이 가, 나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다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칼레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를 미행하던 사람은 이 나라의 국왕, 케이든의 외삼촌. 루벤 케슈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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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은 자녀 셋을 두었고, 현 왕인 루벤 케슈너는 그중 막내였다. 나이 차이가 13세 이상 나는 형과 누나가 있었기에 루벤 케슈너가 자랄 땐 누구도, 그조차도 그가 왕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당연히 모두 입지가 탄탄한 일왕자 베르너 케슈너가 무리 없이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20년 전 예상치 못한 사고로 그 판도가 뒤엎어졌다.
일왕자 베르너 케슈너가 탄 말이 사냥 중 튀어나온 멧돼지에 놀라 날뛰다 그를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베르너 케슈너가 낙마로 죽은 후, 현 아미르 공작의 모친인 전 공작 부인 리디아 아미르에게 왕위 순번이 돌아갔었으나, 그녀가 부담감을 이유로 왕위 승계를 거절하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셋째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큰 탈 없이 루벤 케슈너의 통치가 이어졌고 7년 전 아미르 공작 부인이 병으로 죽고 난 뒤 칼레에 남은 왕족은 국왕 부부와 그들의 쌍둥이 공주, 일왕자의 아들 노엘 웬리르 그리고 케이든 아미르. 이렇게 여섯뿐이었다.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워낙 나던 탓에 루벤 케슈너와 그의 조카들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편이었다. 일왕자의 아들 노엘 웬리르 공작과는 13세 차이, 케이든 아미르와도 12세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니까.
루벤 케슈너가 젊을 때부터 조카들을 익히 아껴 왔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그렇기에 케이든 아미르가 갑자기 웬 떠돌이 마법사와 결혼한다고 발표하자 왕궁이 뒤집혔던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왕이 직접 그 마법사의 미행까지 감행할 거라곤 아무도 상상 못 했을 것이다.
국왕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다 길가의 개를 부르듯 따라오라며 까딱 손짓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안 따라갔다가 후일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국왕을 따라갔다. 그를 따라 걷자 곧 한산한 길목에 주차된 큰 마차가 나타났다.
분위기상 마차에 타야 할 것 같긴 한데 누가 봐도 나에게 좋은 소식을 갖고 온 게 아닌 국왕과 밀폐된 공간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마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부담스러운 눈빛이 따라붙었다.
그가 길거리에 멈추어서 뭐 하냐며 얼른 움직이라 나를 재촉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려니 마음의 소리가 나를 부추겼다.
‘그냥 가자. 딱 봐도 좋은 소리 못 듣게 생겼잖아!’
사람의 육감은 인생을 살면서 쌓아 온 경험의 총체라 하였다. 인생의 중요한 자리에서 도망치는 건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육감을 따라 도망가는 것이 옳을 듯했다.
도망가기 위해 티 나지 않게 마력을 운용하려던 찰나, 마차 문이 빠르게 열리며 회색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성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전, 주인님! 얼른 들어오십시오. 큼! 자네는 뭐 하고 있나? 주인님을 기다리게 만들고!”
그냥 전하라고 하시지. 말투에서부터 이미 ‘나 중요한 걸 숨기고 있어요~’라고 풀풀 풍기고 있으시네.
마차에서 나온 초로의 남성은 알버트 백작이었다. 즉위 전부터 국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최측근으로 유명한 이였다. 과연 명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조카사위를 미행하는 일정까지 함께하는 걸 보아 국왕이 어지간히 백작을 신뢰하는 듯했다.
알버트 백작은 마차에서 나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으며 얼른 마차에 타지 않고 무엇하냐고 나를 쪼아 댔다. 인제 보니 내가 도망갈 것 같아 붙잡으려고 마차에서 서둘러 나온 듯했다.
부담스러운 두 사람의 기세를 못 이겨 우거지상으로 엉거주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알버트 백작이 마차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빼도 박도 못하게 궁지에 몰린 사냥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울한 얼굴로 둘을 흘긋흘긋 보고 있으니, 국왕이 한껏 못마땅한 기세를 숨기지 않고 풍기며 팔짱을 끼었다. 과장 좀 보태 어린아이 머리만 한 두툼한 팔뚝은 저 팔로 한 대라도 맞았다간 수박 깨지듯 머리가 깨지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였다.
하여간에 분위기를 보니 이미 도망갈 타이밍은 놓친 것 같아 잡혀 온 이유나 알고 가자 싶어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국왕이 눈을 부라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귓가를 강타하는 큰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모, 모르니까 묻죠……. 아니,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닌데, 그거 하나 확인하시려고 직접 길거리에 행차하신 거예요? 정말로?’
지난번, 라비가 국왕 전하의 명을 받아 내가 혹시 케이든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걸었는지 살폈다는 이야기는 후에 전해 들었었다.
당연히, 마법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라비가 케이든이 멀쩡하다고 보고했을 테니 다 끝난 문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오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잘못한 것 없이 혼나려니 울분이 일었지만, 신분이 깡패였기에 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눈을 내리깔자 한층 더 격양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런 가증스러운 얼굴로 우리 애를 꾄 건가?!”
“예?”
가증? 이게 무슨.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번쩍 들자 눈썹이 치켜 올라가다 못해 눈썹 위가 벌게진 국왕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옆에선 알버트 백작이 헛기침하며 국왕 전하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나름 나에게 안 보이게 옷 뒤로 숨겨 찌르고 있었지만, 그 손길이 거추장스러웠던 국왕이 백작의 손등을 치며 손 좀 치우라 호통을 쳐 안타깝게도 은밀하게 해결하려던 백작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를 앞에 두고 콩트 한 편을 찍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손뼉이라도 쳐 주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랬다간 안 그래도 찍힌 상황에서 큰일이 날 것 같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의 투덕거림은 거세져 갔다.
“자네, 누구 편이야!”
“아이고, 저야 당연히 위대한 칼레의 태양이신 전하의 우편에 앉은 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네 하는 꼴이 영 탐탁지 않구먼. 속 시원하게 말해 보게. 루이제가 그대에게 뭐라 했던가?”
“왕비 전하께서는 그저 언제나 전하를 걱정하시는 마음으로…….”
알버트 백작과 말은 저렇게 해도 국왕이 결혼 전부터 왕비에게 잡혀 사는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왕비가 괄괄한 성미의 국왕을 완벽하게 다룬다지.
케이든 말에 의하면 왕비 전하께서 종종 국왕의 신하들을 불러 국왕 전하가 사고 칠 것 같으면 반드시 막으라 단단히 주의를 준다던데 지금 알버트 백작의 행동도 그 단속의 일환인 것 같았다.
지금 와서 국왕 입을 단속할 게 아니라 나를 미행하기 전에 막았어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삐딱한 생각을 지우긴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둘이 언제까지 싸우려나. 그냥 갈까?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왜 여기에 앉아 있나 싶었다. 보아하니 내가 여기서 도망가도 별 탈은 없을 것 같은데.
공간 이동 마법을 쓰려고 슬쩍 마력을 모으다 평소보다 갑갑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가 마력의 흐름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는 근원지를 쫓으니 국왕의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가 보였다. 햇빛을 받은 호수처럼 투명한 파란빛의 광물이 반지의 중앙에 박혀 있었다. 마력저항석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기 위해선 마력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력저항석은 일대의 마력의 흐름을 헝클어 놓는 특수 광물이었다.
과거 신들이 이 땅에 존재하던 신화시대 때, 신의 힘을 흉내 내어 마법이라는 힘을 구사하기 시작한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들이 인간들의 오만을 벌하기 위하여 만들어 냈다는 전설이 있는 광물이기도 했다.
그런 전설이 있을 만큼, 마력저항석은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굉장히 특수하고 가공이 어려운 물질이기에 가격이 비싼 편이라 저렇게 간이로 장식품에 박아서 들고 다니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법사가 아닌 신분 높은 이들은 가능하면 마력저항석을 지참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마력저항석이 있으면 마법에 의한 습격도 수월하게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교제를 시작하기 전엔 케이든도 마력저항석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었다.
내가 마법사인지라 마력저항석이 근처에 있으면 저절로 불쾌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그에게 지나가듯 하소연한 이후론 내가 근처에 있을 땐 빼 두고 다니긴 하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답답한 좁은 공간에서 마력이 헝클어지는 감각까지 더해지자 불쾌함이 치솟았다. 머릿속 한편에서 작은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파괴할까? 어렵지 않은 일이지.’
마음속에서 불쾌함과 살심, 분노가 뒤엉켜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손가락으로 의자를 살짝 툭툭 치며 마차 바닥을 가만 바라보다 주먹을 쥐었다.
‘안 돼.’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이젠 회귀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 조심해야 했다.
까딱이던 손을 거두고 얌전히 두 손을 무릎에 모으며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야 말다툼이 종결에 이르렀는지 손수건으로 진땀을 닦는 알버트 백작과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국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도록. 케이든한테 접근한 목적이 뭔가?”
“그냥, 공작님이 좋아서요…….”
반사적으로 케이든을 예전처럼 공작님이라고 불렀는데 내가 케이든에게 경칭을 사용하니 묘하게 흡족해하는 국왕의 얼굴을 보니 그러길 잘한 거 같으면서도 표정이 구겨지려는 걸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심문 시간이 이어졌다. 케이든에게 왜 반했느냐부터 혹시 어린 걸 이용해서 나중에 케이든이 너보다 일찍 죽으면 유산을 받아 갈 속셈이냐는 음모론까지. 상상도 못 한 겁박의 레퍼토리가 아주 다채롭게 이어졌다.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깜빡이면 우리 애는 순진해서 넘어갔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그런 가증스러운 얼굴은 통하지 않는다는 으름장이 바로 날아들어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달달 볶였다.
국왕이 다양한 헛소리를 할 때마다 옆에서 알버트 백작이 헛기침하며 국왕을 말리는 척하다가 슬쩍 뒤로 빠지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왜 옛말에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들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참을 나를 들볶다 광장 전체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섯 번 치자 국왕은 칫,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안 그래도 잔뜩 구긴 인상을 거기서 더 구기며 의자에 푹 눌러앉았다.
투덜거리는 걸 보니 그도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드디어, 라는 생각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질문 세례를 받느라 식은땀이 흐른 등이 이제야 서늘했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의 국왕이 아무 말 없이 턱짓하자 알버트 백작이 우아한 손길로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드디어 열린 탈출구에 눈을 반짝이며 뛰다시피 나가던 찰나 내 뒤통수에 지금까지 언제 온갖 협박을 했냐는 듯 태연하게 위엄을 갖춘 목소리가 닿았다.
“케이든에게 오늘 만남은 비밀로 하도록.”
그 말과 함께 내 발이 땅에 닿자마자 마차의 문이 닫혔다. 어처구니가 없어 떠나는 마차의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뒤늦게 분이 치솟아 주먹이 달달 떨렸다. 나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두고 보자. 집에 가자마자 케이든한테 다 말해 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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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에게 한낮의 납치 사건을 고발하자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곧 삼촌의 만행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이를 갈며 내가 준수해야 할 몇 가지 수칙을 적어 주었다.
[1. 혼자 다니지 말 것.
2. 잘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 것.
3.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면 주변에 도움을 청할 것.
4. 호신용품을 구비하고 다닐 것.]
그 주의사항들을 듣고 있자니 미행을 당한 배우자보단 유괴를 당할 뻔한 아동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운 것 같았지만 그가 이해했느냐며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쏘아봤기에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내가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했는데도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이어 면식범 사이의 납치 사례를 늘어놓으며 조심할 것을 누차 강조하는 케이든을 보고 있자니 그가 외삼촌에 대해 가진 인식이 사뭇 두려웠다.
하여간 그때는 일단 분한 마음에 케이든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케이든의 걱정이 과하다 싶었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그가 현명했다.
[1. 혼자 다니지 말 것.]
케이든이 다른 원칙들에 앞서 가장 신신당부했던 사항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지키기 어려운 조항이었다. 케이든의 생일 선물을 위해 의뢰를 맡긴 마법 공방이 보안상 이유로 의뢰인 외의 출입을 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위가 필요할 일이 뭐가 있겠냐는 내 안일함도 한몫했고 말이다.
공방이 안 되면 공방 근처까지라도 호위를 데리고 다니라는 당부를 똑바로 들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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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크흠. 오랜만이군.”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원수까진 아니지만 불편한 관계인 알버트 백작과 이 넓은 수도 한복판에서 딱 마주칠 줄이야. 역시 옛말은 무시할 게 못 된다.
공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어디론가 향하던 알버트 백작과 길 가운데에서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피하지도 못하고 우리는 서로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당황도 잠시, 나는 연이어 든 생각에 몸을 긴장시켰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알버트 백작이 있으면 높은 확률로 국왕이 있을 것이다. 내가 바짝 경계하며 목을 빼고 주위를 살피자 알버트 백작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개인적으로 손녀의 선물을 사러 온 걸세. 긴장하지 않아도 되네.”
“그러시군요.”
아무리 봐도 알버트 백작도 예상치 못하게 나와 마주쳐서 곤란한 것 같은데 예의가 뭐라고 서로 곤란한 얼굴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호위의 존재가 절실했다. 누군가의 핑계를 대고서라도 도망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케이든 말 좀 잘 들을걸.
내가 머쓱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엉거주춤 비켜 가려고 하자 갑자기 알버트 백작이 내게 불쑥 말을 걸었다.
“그, 너무 경계는 말게. 본인은 리암 경에게 별 유감이 없으니.”
“아, 예.”
대답하는 내가 어련히 참도 그러시겠습니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백작은 큼큼 헛기침하였다. 유감이 없다면 그냥 보내 주면 고마울 텐데.
그나저나 나는 평민인데 ‘경’의 칭호를 붙여 부르다니. 케이든이 말해 주길 왕족의 혼인 상대가 평민인 것은 전례가 없는 것이라 내게 형식적으로나마 ‘경’의 칭호가 곧 내려올 것이라 했었다.
귀족이 되는 것에 별 감흥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넘겼던지라 ‘리암 경’이란 칭호를 갑자기 듣게 되니 어색했다. 아직 내게 그런 조서가 내려오진 않았지만, 알버트 백작이 내게 ‘경’ 칭호를 쓰는 걸 보니 곧 받게 될 모양이었다.
내 멀뚱한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알버트 백작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정말이네. 안 그래도 그 일이 있고 나서 케이든 공작님이 왕궁에 와서 한차례 난리를 친 통에…….”
“와우.”
케이든, 나한테 유아 납치 대비 준칙 같은 걸 제시해 준 거로 끝낸 줄 알았더니 나 모르게 왕궁에서 한바탕했었구나.
어쩐지 꼬인 속이 풀리는 기분에 씩 웃었다. 갑자기 화색이 돈 내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한 알버트 백작은 떫은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어정쩡하게 올렸다.
“하하. 아무래도 케이든 님도 나이가 있으신데 국왕 전하께서 참견을 과하게 하시는 경향이 있지. 노엘 님도 그렇고 케이든 님도 어째 결혼들을 늦게 하셔서 걱정되신다고는 해도 말이지.”
“에이. 케이든 정도면 결혼을 늦게 하는 것도 아니죠. 그 정도로 잘난 사람인데 이 정도 늦는 것쯤이야.”
“편을 들어 줘도…….”
알버트 백작의 말을 건성으로 듣다가 반사적으로 반박하자 알버트 백작이 얼굴을 구기며 무어라 꿍얼거렸다.
물론, 칼레의 평균 혼인 연령이 26세 정도긴 하다. 하지만 케이든쯤 되면 결혼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니 그가 노총각이었다고 돌려 까는 알버트 백작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서로가 탐탁지 않은 기색이 가득했다. 말없이 서로 노려보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악수까지 나눴겠다, 이대로 헤어져서 가면 될 것 같은데 손을 놓은 그가 날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더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자네, 옛날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았는데 또 그런 것도 아니군.”
옛날? 아, 알버트 백작의 말을 들으니 생각났다. 예전에 궁에서 들어온 의뢰 때문에 궁에 갔다가 알버트 백작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지. 리암 카터가 18세 때였던가…….
“기껏 자네를 좋게 봐서 말을 걸었더니 이런 곳에서 허비할 시간은 없다고 했었지?”
“제가 어렸던지라.”
알버트 백작이 말을 하니 구체적으로 기억이 났다. 당시 궁전 결계 보수를 위해 마탑에서 리암이 파견 나왔었다. 별로 어렵지 않았던 일인지라 금세 마치고 떠나려던 리암을 붙잡고 스카우트 제안을 했던 사람이 알버트 백작이었다.
궁정 전속 마법사가 되지 않겠냐고 권유하는 알버트 백작에게 리암 카터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마탑의 마법사를 구할 시간에 당신이 마법을 배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했었지.
아무래도 알버트 백작의 기억은 상당히 미화되어 있는 듯했다. 리암 카터는 백작의 기억보다 더 싹수가 노란 놈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래, 아무리 싹수없는 과거여도 자기 비하는 그만하자. 나라도 나를 옹호해 줘야지. 내가 내 편을 안 들면 누가 내 편을 들어 주겠는가.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알버트 백작의 작은 눈이 다시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리암 카터에게 핀잔을 들었던 알버트 백작은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대었지만 나름대로 교양 있는 귀족답게 자신의 반절도 안 산 어린 마법사에게 직접 항의하는 대신 마탑에 항의 서신을 넣었다.
그 후 마탑에서 뭐라도 조처했으리라고 믿는 듯한 알버트 백작이 자신의 항의 서신을 받은 스승이 교육 조치를 하겠노라 답장한 후, 리암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거로 날뛴다고 혀를 찬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원래 콩 심은 데 콩 나고 스승을 심은 데서 제자가 나는 법이다. 마탑에 항의 서신을 넣은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성격이 거기서 거기였고, 워낙 다양한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인 터라,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부담감도 별로 느끼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사실을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나이도 있으신데 혈압 조심하셔야지.
내가 눈웃음치며 말대꾸하자 알버트 백작이 이를 갈며 억지로 웃었다. 둘 다 어색하게 마주 웃다가 동시에 정색하며 몸을 돌렸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으로 생긴 걸쩍지근함을 흘려보내며 나는 발걸음을 재개 놀렸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얽힐 일 없던 사람, 케이든이 궁전까지 가서 뒤집어엎었다고 하니 앞으로 더 볼 일이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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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의 생일이 부쩍 가까워졌다. 공방을 닦달한 보람이 있게 때맞춰 완성된 케이든의 선물을 받아와 방에 잘 보관해 둔 뒤 신이 난 발걸음으로 그를 찾아가자, 한창 열심히 일하던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케이든!”
“리암. 잠시 거기 멈춰 보게.”
“네에?”
신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던 중 갑자기 케이든에게 제지당했다. 그의 말대로 멈춰 서서 멀뚱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두 손을 겹쳐 액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대로 팔을 뻗어 작은 액자 안에 나를 이리저리 넣어 본 케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도 잘생겼군.”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곤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짝 흘겨보자 그가 모르는 체하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주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내 얼굴을 칭찬하곤 했다.
살면서 누군가가 하는 얼굴 칭찬이 부담스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가 하는 모든 칭찬은 감정을 요동치게 했다. 한 번은 너무 부끄러워 혹시 놀리는 것이냐고 내가 불퉁하게 물으니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의 장점을 끊임없이 말해 주는 것은 배우자의 당연한 의무인 법이지.”
그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 머뭇거리다 케이든도 잘생기고 다정하다고 더듬거리며 이야기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날 놀린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하여튼, 열이 오른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하며 그에게 다시 다가가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나요?”
“초대장을 쓰고 있었네. 대부분은 집사가 작성한 걸 보냈지만, 몇몇은 친필로 적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케이든쯤 되면 생일 연회가 단순한 생일 축하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에 신경 쓸 거리가 많았다. 나는 케이든의 근처에 의자를 끌어 앉으며 그가 편지를 쓰는 것을 구경했다. 우아한 필기체로 써 내려가는 편지는 머뭇거림 없이 금세 완성되었다.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갈겨쓰는 내 글씨체와 비교하기가 미안하도록 케이든과 닮은 글씨를 즐겁게 바라보다가 책상 한쪽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초대받은 사람 명단인가요?”
“그래. 오늘 아침에 확정된 최종본이네. 마침 잘됐군. 한 부 가져가도록 해. 그대도 누가 오는지 알아 두는 게 좋으니.”
“네에.”
그의 말대로 나도 이젠 아미르가의 일원으로서 손님을 접대할 의무가 있으니 누가 오는지 정도는 점검하는 것이 당연했다. 비록 케이든은 내가 귀족으로서의 의무에 연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는 내가 자신과의 혼인 때문에 팔자에 없던 귀족 사회에 반강제로 들어가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안주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을 케이든이 대부분 대신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의무도 외면할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나는 흔쾌히 종이를 집어 들어 읽다가 새삼 감탄했다.
“케이든이 평소에도 무척 바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많은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확실히 바쁠 수밖에 없겠어요.”
“그렇지. 가끔 짜증 나는 인간들과 교류하고 있으면 차라리 나가서 칼을 휘두르는 게 낫겠단 생각도 많이 하곤 해.”
“케이든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많지.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것도 많고.”
많다고? 그동안 케이든을 옆에서 보며 그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싫어한단 느낌을 못 받았는데 정작 그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니. 놀라웠다. 내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티를 안 내도록 훈련받았으니 대부분 모르지. 어머니께서 싫어하는 것이 많은 것은 천성이니 어쩔 수 없더라도 그걸 남들이 모르게 하는 건 노력으로 가능한 부분이라며 어릴 때부터 훈련시키셨네.”
이어지는 솔직한 말에 놀라워 입을 벌리며 그를 보자 그가 가벼운 손짓으로 내가 든 명단의 위쪽에 적힌 누군가를 가리켰다.
“루퍼트 후작, 아들이 마약 후 환각 상태에서 빈민가에 방화를 저질렀지. 배상은 했으나 그 과정에서 보인 태도가 별로였어.”
그가 이어 다른 이름을 짚었다.
“샬롯 남작, 아르안 공국산 고급 원단을 주문해 놓고 대금을 치르지 않았지. 값을 치르라 찾아온 의상실 주인을 되레 신고해 결국 의상실이 문을 닫게 했네.”
그는 계속해서 명단의 이름들을 짚으며 그가 싫어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대부분은 싫어할 만하다 싶었고, 어떤 것은 별거 아니지 않나? 싶은 것도 있었다.
그가 명단의 마지막까지 짚었을 때 명단에서 그가 이유를 말하지 않은 사람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인원의 절반가량은 그의 친척들이었다. 케이든……. 가족 외의 사람은 대부분 싫어하는구나.
한 명, 한 명 짚어 가며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끝마친 그가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대는 싫어하는 것이 별로 없으니 나와 참 반대된단 말이지.”
“아니에요! 저도 싫어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음, 벌레도 싫어하고요.”
또 뭐가 싫더라? 막상 생각하려 하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고민에 빠져 끙끙거리자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손등을 툭툭 쳤다.
“됐네. 싫은 게 없으면 좋은 거지. 굳이 싫어하는 걸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으니.”
나는 머쓱해져 목덜미를 문지르며 케이든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싫어할 만큼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뭐가 떠오를 리가 있나.
내 반응에 케이든은 자신이 세상의 절반 정도는 싫어하는 미치광이 같은 인간이라며 자조하듯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하고 관심을 두는 사람이기에 그만큼 싫어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음, 같은 상황이어도 긍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 그의 까다로운 면을 부정할 순 없지만 말이다. 하여튼 내 생각은 그랬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그새 편지를 다 쓴 케이든이 가볍게 몸을 풀며 내게 농담을 던졌다.
“그나저나 내가 그대를 많이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야. 그 꼴들을 보고도 그대가 예뻐 보이는 걸 보면.”
“케이드은…….”
그 말이 듣기 좋은 한편 거지꼴은 안 들켜서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돌이켜 봐도 그때의 내 꼬락서니는 정말 한심했는데 케이든이 그 꼴을 봤다간 정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유치장행까지만 들켰던 것에 내심 안도하며 그에게 달라붙을 때 시종 한 명이 급한 손짓으로 노크를 하였다. 케이든이 들어오라 명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은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저택에 방문하셨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당황한 케이든과 내 눈이 마주쳤다. 이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
“큼, 오랜만이구나. 케이든.”
“칼레의 태양을 뵙습니다. 언제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인사를 주고받는 국왕 전하와 케이든의 뒤편에서 눈이 마주친 알버트 백작과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서로 눈을 피했다. 내 인생은 보면 맨날 이런 식이었다. 역시, 사람은 만나는 인연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케이든과 국왕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 몇 마디를 나눈 후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근에 서운한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익숙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꽤 친밀해 보였다.
이미 집이라 어디 도망치지 못하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가만히 의자에 앉으니 케이든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국왕의 못마땅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내가 케이든에게 그와의 만남을 졸래졸래 일러바친 것에 원한이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안 찾아왔으면 되는 거잖아.
곰 같은 사내가 보내는 불같은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짐짓 당당하게 수컷 공작새처럼 허리를 쭉 펴고 있으니 그 시선에 분노가 더해졌다.
‘그냥 쭈그려야 하나?’ 고민이 들 때, 케이든이 우리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그가 가볍게 눈웃음치며 삼촌에게 말했다.
“결혼식 전에 제 신랑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러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신랑이라니!”
엄밀히 따지자면 공작 부인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니 신부겠지만, 거침없이 신랑이라 칭하는 케이든의 말에서 도발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도발에 걸려든 국왕이 벌컥 성을 냈다. 그 노성에 케이든이 눈썹을 쓱 올리며 따지듯 물었다.
“분명 제겐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제게 거짓을 말씀하셨습니까?”
“크흠. 처음 목적은 그랬지.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신랑’에게 보내는 축하의 말은 아니었단다. 그나저나 케이든, 내가 다시 보니 이놈은 너와 격이 맞지 않는구나.”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저 한마디를 하기 위해 응접실에 오기까지 국왕이 얼마나 케이든의 눈치를 봤던가. 곰 같은 사내가 조카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꼴은 빈말로도 썩 미관상 보기 좋진 않았다.
모두가 혀를 차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모습을 걷어 내자 드디어 예상했던 말이 국왕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국왕의 입에서 격 운운이 나오자 케이든은 표정을 굳히며 손깍지를 끼고 국왕을 바라봤다. 자연스러운 몸짓이 하나의 연극같이 우아했다. 그러나 조카의 살벌한 표정이 익숙한지 신경도 쓰지 않은 국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나에게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케이든, 네 배우자로는 참하고, 어른 말 잘 듣고 수상한 것 하나 없는 아이가 어울린단 말이다! 저런 수상하고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망나니 같은 놈이 아니라!”
솔직히 내가 케이든의 배우자에 어울리지 않는단 말은 상처인데 참하단 말은 부정을 안 해서 잠깐 안도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내가 너무 나 좋을 대로 해석하나? 싶긴 했지만, 개떡같이 말씀하시길래 개떡같이 이해하며 케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긴장이 되었다.
케이든은 삼촌의 망발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국왕의 말에 진심으로 불쾌해졌는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리암이 어때서 말입니까? 배우자의 말을 존중할 줄 아는 미덕을 갖춘 훌륭한 신랑인걸요.”
오늘 아침에도 언제쯤 잠자리에서 멈추라는 말을 제때 들을 거냐며 꼬집힌 볼이 아직도 얼얼한데 그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나 조카 부부의 침대 사정을 알 리 없는 국왕은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말이다. 케이든, 저놈이 3주 전에 무얼 했는지 아느냐? 나는 살면서 그렇게 왕실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처음 봤다!”
“경비대 사건이라면, 그가 어릴 때부터 마탑에서 살아서…….”
“길거리의 행인들에게 구걸하더라!”
‘아, 젠장.’
국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든의 고개가 나에게로 홱 돌아왔다. 필사적인 변명대신 반사적으로 그의 눈을 피하는 내 얼굴에서 진실을 읽은, 경악과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울화로 가득 찬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하… 구걸은 나도 마지막 존엄성을 위해 케이든에게 고백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들키네…….’
내가 국왕의 미행을 눈치챈 것이 일주일 전이라 그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완전 범죄라 생각했는데 국왕은 생각보다 더 일찍부터 내 행적을 감시했던 모양이다. 미행만 일주일 전부터 시작했던 건가.
“내가 그걸 듣고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런 녀석이 정말로 네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사정이 있기도 했고, 다시 안 하기로 했으니 괜찮습니다.”
학교에서 사고 친 자녀의 선생 앞에서 아이의 행실을 변명하는 부모 같은 말을 하며 케이든은 이를 악물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자 아래의 내 허벅지를 쥔 큰 손에 분노로 힘이 더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길이 매서워 발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내가 입을 한마디라도 열었다간 그대로 온갖 구박이 떨어질 것 같아 평소처럼 엄살도 떨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어려? 스무 살이면 다 컸지! 어? 내가 스무 살 땐 말이다. 너랑 노엘을 데리고 브리츠 지방을 순회했다!”
“20년도 전 이야기를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리고 그때 결국 피레 숲에서 길을 잃으셔서 수도에 있던 알버트 백작까지 브리츠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알버트 백작이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고 추억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을 쏘아보는 국왕의 시선에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었다. 원래도 평온하진 않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더욱 어둑해졌다.
허벅지가 너무 아파 케이든의 손등을 살살 톡톡 두드리자 반성 없는 내 손길이 괘씸했던지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아주 강하게 내 허벅지를 쥔 뒤 손을 떼었다. 마무리 응징이 너무 아파 눈물이 맺힐 뻔했다. 이거 분명 나중에 확인해 보면 보라색으로 멍들어 있을 거다.
내가 입술을 꾹 내리 물며 허벅지를 살살 문지르고 있자 이제야 살짝 화가 풀린 듯한 케이든이 천천히 차로 입을 축이며 국왕에게 여유를 가장한 목소리로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리암은 마탑에서도 손꼽히던 굉장한 인재입니다. 과거 알버트 백작도 궁에 스카우트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케이든의 말에 알버트 백작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쯤 과거 리암 카터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지 않을까? 국왕이 알버트 백작을 흘기는 꼴을 보니 분명 돌아가는 길에 과거의 자네는 왜 그런 소리를 했냐고 달달 볶을 게 분명했다.
“능력 있는 마법사가 한둘도 아니고. 그런 놈이 구걸은 왜 해?”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구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케이든의 손에 핏줄이 서는 걸 보니 내가 알버트 백작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유치장은 봐줬지만, 이번은 봐주지 않을 거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법 공방은 더 갈 일이 없고, 한동안 잡힌 일정이 없어 저택에 감금당해도 이젠 괜찮았다.
아마 한동안 저택 밖으론 발도 못 내밀 미래의 나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얌전히 따뜻한 차를 한 입 마셨다가 나는 눈을 꾹 내리깔며 입 안에 번지는 쓴맛을 감내해야 했다.
하필이면 곧 펼쳐질 내 미래처럼 쌉싸름한 차였다.
커피는 쌉싸름한 것도 무리 없이 마시는데 이상하게 차는 조금만 써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남들은 무리 없이 마시는데 차가 쓰다고 오두방정을 떨 순 없었다.
입안에서 쓴맛이 가시길 기다리며 묵묵히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는데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던 케이든이 손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내 찻잔에 설탕 두 덩이를 넣어 주었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앞의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티스푼을 들어 차를 휘저었다. 정숙해야 하는 자리인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삐져나왔다.
우리의 작은 찻잔 소동과는 무관하게 테이블 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국왕이 말했다.
“그리고 과거가 불분명하지 않으냐? 수상하지 않아? 그런 놈을 왕가에, 아미르 공작가에 들일 셈이냐?”
뒷조사했다는 이야기를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이야기하다니, 역시 신분이 깡패였다. 국왕은 자신이 조사한 리암 카터의 행적들을 줄줄 읊으며 여러모로 수상하지 않느냐 주장했다.
듣고 있자니 조금 의아해졌다. 내 과거가 그렇게 불분명한가? 다섯 살 전엔 아르안 공국의 탄광촌에서 자라다가 다섯 살에 부모님이 강도 사고로 돌아가신 후 마침 마을을 지나가던 벨로니 스승님이 나를 발견해 거두어 주셨다.
그분 밑에서 마법을 배우며 지내다가 열다섯에 마탑에 들어간 후 열여덟에 마탑의 인장 반지를 받은, 아직은 짧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이 인생에서 과거가 불분명하다고 할 만한 시기는 마탑을 나와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던 열여덟에서 스물 사이의 2년의 세월뿐이었다.
아, 스승님과 함께 살던 시기도 스승님 연구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거주지가 불분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상할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리암 카터의 기억을 대부분 물려받았지만 온전한 것은 아니라 마탑의 인장을 받은 이후 2년의 기억이 군데군데 흐릿하긴 해도 다른 기억들로 유추해 보면 딱히 수상한 짓은 안 했던 것 같아 과거가 불분명하다는 비난에 조금 억울해졌다.
내 억울함을 읽기라도 했는지 케이든이 내 편을 들어 주며 말했다.
“어떻게 삶의 모든 족적이 흔적을 남기겠습니까?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어린 마법사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어야 분명한 것이겠습니까?”
국왕의 비난에 케이든이 내 역성을 들어 주자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 당당한 척 가슴을 내밀며 이제는 마실 만하게 달달해진 차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자못 당당한 우리의 태도에 국왕이 눈꼴 시단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는 못마땅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케이든이 온갖 것을 감싸 주니 어디까지 나를 감싸나 보자는 듯한 태도였다.
“저런 어린놈에게 공작가 운영을 맡기는 게 말이 되느냐? 연륜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것한테. 지금도 안주인이 해야 할 일까지 네가 대부분 하고 있지 않으냐?”
“누구한테나 처음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차차 배우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케이든은 국왕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차분히 대꾸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리암한테 어리단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조카가 열두 살이나 어린 남자애를 따먹은 것도 모자라 안주인으로 앉혔다고 왕국 전체에 소문이라도 내실 생각이십니까?”
“따, 따, 먹…….”
케이든의 역정에 국왕이 뜨악한 얼굴로 어버버했다. 평소였으면 국왕의 그 얼굴에 통쾌해져 손뼉이라도 쳤겠지만, 이번만큼은 나 역시 경악하며 먹이를 발견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따먹…….’
케이든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테이블에 앉은 순간부터 매사에 공격적으로 나왔던 국왕이었지만, 조카의 폭탄 발언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넋이 나가 이후 티 타임에선 무슨 말을 제대로 못 하였다.
침묵을 지키며 남은 차나 홀짝이던 그는 아련한 표정으로 곧 자리를 떴다.
곰 같은 이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니 터덜터덜 걷고 있으니 가련하기보단 그냥 동면기 직전의 곰 같았지만, 알버트 백작의 눈에는 아닌지 그는 석 달 열흘을 굶은 아들을 마주한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국왕을 감싸며 저택을 나섰다.
잘 가시라며 둘을 배웅하는 케이든의 얼굴을 흘긋 보니 후련함 그 자체라서 그가 일부러 삼촌을 도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32년간 삼촌을 곁에서 익히 지켜본 이의 솜씨는 얕볼 것이 못 되었다.
그 수완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중 내 어깨에 케이든의 손이 닿았다. 당장 도망갈 것을 경고하는 찌릿함이 몸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삐걱대며 케이든을 보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깨를 잡은 손에 사정없이 힘이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발발 떠는 나에게 인자하게 웃어 보이며 케이든이 말했다.
“리암. 오늘부터 외출 금지네. 이유는 그대가 더 잘 알리라 믿지.”
“네에…….”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나는 눈을 내리깔며 얌전히 대답한 후 방으로 올라갔다.
‘하, 진짜. 이걸 들키네.’
━━
알버트 라노에는 상심이 커 보이는 주군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케이든 공작의 성질 좀 작작 긁으라고 충언을 해도 안 들으시더니 기어코 공작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아들처럼 여기는 조카의 매몰찬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지 꾹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심각한 얼굴에 마차에 동승한 젊은 시종이 눈치껏 시원한 물을 건네자 목이 탔던지 벌컥벌컥 마시는 그 힘찬 몸짓이 알버트 백작의 눈에는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주군은 제 형제자매들이 죽은 후부터 조카들을 어떻게든 좋은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에 조카들의 일에 도가 넘치게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노엘 공작 같은 경우엔 그나마 모친 벨렌 웬리르 대부인이 정정하시니 그나마 간섭이 덜했지만, 케이든 공작은 양친이 모두 없었기에 그를 대할 때 주군은 더욱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7년 전, 케이든 공작의 모친 리디아 아미르가 폐병으로 죽은 후, 전대 공작 제레미 아미르는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가 잠든 밤중에 심장 발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 이후로 주군은 케이든 공작을 자신이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케이든 공작이 비교적 빨리 양친의 장례를 치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거늘, 주군의 눈에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함께 놀아 달라 조르던 일곱 살 난 아이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 그가 결혼하겠다며 사람을 데려오자 눈이 뒤집혀 나서시지. …아니다. 이건 온전히 주군의 탓으로 돌릴 순 없었다. 케이든 공작이 데리고 온 사람이 수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인 것도 전하가 나서는 데 한몫했다.
그러고 보니, 노엘 공작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을 때도 이러셨지. 그때 웬리르 대부인이 국왕 전하의 관심은 감사하지만 과하다고 쳐냈었으니…….
노엘 공작이 결혼하겠다며 몰락 귀족 출신의 화가를 데려왔을 때도 주군은 그녀가 괜찮은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겠다며 현 웬리르 공작 부인 당시 안젤라 메이어를 한참 쥐잡듯이 잡으셨었다.
이러다 결혼하려는 여인이 자신과의 결혼을 재고할까 봐 두려웠던 노엘 공작은 삼촌을 말리는 것을 좀 도와 달라며 케이든 공작을 급히 불렀었다.
사촌 형이 긴급히 부르자 서둘러 웬리르 공작가에 왔다가 삼촌이 형수 될 사람을 압박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케이든 공작은 그때 결심한 바가 컸는지 이번엔 아주 초기부터 삼촌의 간섭을 쳐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조카 일에 좀 나설 수도 있지 그렇게 밀어낼 일인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알버트 백작은 마지막에 괜히 케이든 공작을 흉보며 그가 데려온 배우자를 떠올렸다.
처음 그가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인물이 리암 카터란 말을 들었을 때 알버트는 체통을 잃고 놀라 뒤집힐 뻔했다. 아니, 그 리암 카터? 그 싹수 노란 애새끼 말인가?
전통 있는 귀족 명가 출신으로 태어나 자라와 국왕 전하를 모시기까지 알버트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리암 카터는 그가 만난 사람 중에 손꼽게 성격이 흙탕물 같은 이였다.
사람을 기껏 좋게 보아 스카우트 제의를 했더니 영광된 자리에 감사하거나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뭐? 이런 황무지 같은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마법사를 구할 시간에 내가 마법을 배우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싹수없는 애새끼!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니 저도 모르게 콧김이 흥! 뿜어져 나왔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마법 좀 한다고, 그렇게 굴어? 그 싹수 노란 놈!
하여튼, 그날의 기억 덕분에 케이든 공작이 놈과 결혼한다고 전해 왔을 때 알버트는 그놈이 케이든 공작에게 수작을 부렸으리라고 완벽하게 확신하였다.
그런데 웬걸. 놈을 만나니, 2년 전의 싹수 노랗고 눈을 세모꼴로 뜨며 사람을 노려보던 양아치 놈은 온데간데없이, 큰 눈을 반푼이처럼 티 나게 이리저리 돌리며 헤벌쭉 웃는 모자란 놈이 있는 것 아닌가.
그 꼴을 귀엽다고 어여삐 여기는 케이든 공작의 태도도 가관이었다. 평소의 닿으면 베일 듯한 기세는 어디다 버리고 풀어진 기색 하고는. 그 꼴을 보고 알버트는 그의 생각과 다르게 혹시 케이든 공작이 리암 카터에게 역으로 세뇌 마법을 건 것이 아닌가 잠시 의심했다.
방금도 보고 온 예비 부부의 추태를 떠올리며 알버트는 혀를 끌끌 찼다. 주군께선 극구 부인하시지만, 그가 보기엔 두 사람은 그냥 결혼시켜야 했다.
서로 콩깍지가 단단히 낀 저 상태에서 헤어지라고 펄펄 날뛰어 봤자 헤어지겠는가? 어디 신전에 달려가 비밀 결혼식이라도 하겠지.
그냥 저 상태로 두다가 뭐든지 쉽게 질려하는 케이든 공작이 리암 카터에게 질리든가 리암 카터가 케이든 공작의 성격에 질려 헤어지기를 달에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안 질리면? 그냥 저 꼴을 천년만년 봐야지 별수 있겠는가?
알버트는 여전히 조카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단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조카가 저런 발언을 하게 만든 조카사위에 대한 분노를 태우는 주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다 결혼식 때까지 저러시겠군. 저러다가 왕비 전하께 크게 한 소리 들으시지.’
아, 왕비 전하.
큰일이었다. 왕비 전하께서 국왕 전하께 오늘 리암 카터에게서 아비가일 공주님의 추천장을 꼭 받아 오라 신신당부하셨었는데.
국왕 부부 사이의 쌍둥이 공주, 아비가일과 라울라 공주는 거의 모든 것이 똑 닮았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볼의 점, 약간 더 큰 키, 등등 두 분 사이의 차이점을 찾으려면 몇몇 가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마법이었다.
루이제 왕비의 친정에선 종종 마법에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굳이 왕비의 먼 친척을 찾을 것도 없이 루이제 왕비의 오빠, 그레이슨 백작 역시도 마법사였다. 그리고 그 집안의 재능이 이번에는 아비가일 공주에게서 꽃피었다.
본인의 재능 자체도 뛰어나고 그 재능을 키워 주기에 충분한 배경도 갖춘 아비가일 공주는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멈추지 않고, 그녀는 모든 마법사의 꿈이라는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전 대륙을 통틀어 1년에 50명도 되지 않는 이를 뽑는 마탑에 들어가는 것은 아비가일 공주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마탑에 지원하기를 벌써 세 번째 반복한 아비가일 공주는 올해도 불합격 통보를 받자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차 편지를 받은 자리에서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렇게 들어가기가 힘든 마탑이지만, 아주 지름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탑의 인장을 가진 마법사의 추천장이 있다면 특별 전형으로 마탑에 지원할 수 있었다.
추천장이 있다고 해서 모든 시험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루이제 왕비는 케이든 공작이 데려온 배우자가 마탑의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좋아했다.
조만간 새로운 아미르 공작 부인을 궁에 초대해 이야기 나눌 자리라도 한번 마련해 봐야겠다고 공공연히 말했을 정도니, 그녀가 리암 카터에게 건 기대를 굳이 더 설명할 필욘 없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부군이 리암 카터를 따로 찾아가 윽박질렀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왕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딸 아이를 위해 조카사위에게 잘 대해 줘도 모자랄 판에 무슨 짓이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꼭 아비가일을 위한 추천장을 받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왕비와 영 싫은 표정으로 옷매무새나 거듭 매만지며 딴청 부리던 국왕이 떠올라 알버트 백작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대로 궁으로 돌아갔다간 두 모녀로도 모자라, 라울라 공주까지 가세해 국왕을 들볶을 것이 분명했다.
리암 카터는 케이든 공작의 말이라면 심장이라도 빼다 줄 것처럼 굴고 있던데 케이든 공작이 있는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추천장을 받아 오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알버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흘긋 국왕을 바라봤다.
“전하, 아비가일 공주님의 추천장을 받아 오는 걸 잊으셨습니다.”
“허.”
알버트 백작의 말에 국왕이 눈을 홉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초조한 몸짓으로 팔짱을 끼며 고민했지만, 쉽사리 그 입에서 돌아가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알버트 백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전하, 라고 부르자 그는 에라 모르겠단 태도로 등받이에 몸을 털썩 기대며 딴청을 피웠다.
“흠, 알버트 백작, 추천장 말일세. 왕국에 마탑 출신 마법사가 그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순순히 군말하지 않고 추천장을 써 줄 만한 마법사는 현재로선 리암 카터만 있는 상태죠. 아시지 않습니까, 억지로 추천장을 작성하게 했다간 마법사들이 추천장에 이상한 내용을 써도 저희는 알 수 없는 것을요.”
마법사들은 마탑 출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장을 써 주는 것을 기피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마탑이 추천장을 무한정 받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마탑 출신이라 해도 일생에 단 두 번만 추천장을 써 줄 수 있었으니,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마탑 출신 마법사들은 선뜻 추천장 써 주기를 꺼렸다.
그렇다고 억지로 쓰게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마법사들이 추천서에 마법사들이나 알아챌 수 있는 마법을 걸어, 추천장을 받은 사람을 깎아내리는 내용을 적어 버릴 수도 있었다.
가끔 왕실이 제시한 조건에 더 조건을 걸며 이걸 들어주면 추천장을 써 주겠다고 역으로 제안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조건을 본 아비가일 공주가 이런 조건으로 추천장을 받을 바엔 10년을 각오하고 마탑에 도전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리암 카터의 존재를 알았을 때 루이제 왕비가 눈을 반짝인 것이다.
오랜 충신의 가감 없는 충언에 왕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로는 가서 받아 와야 하는 것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몸짓에 알버트 백작은 조용히 머리만 가로저었다. 그래, 전하의 자존심에 돌아갈 거라 기대도 안 했다.
체념한 초로의 남성과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이 자리가 버거운 젊은 시종을 태운 마차는 그 안의 사정과 관계없이 부지런히 왕궁을 향해 굴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