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이게 왜 안 되냐
‘망했다.’
현 상황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었다.
멍한 정신으로 벽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니 약한 곱슬기가 도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마주 봐 왔다.
넋이 나간 파란 눈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의 거울 속 남자를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문득 몰려오는 현실감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옆자리에서 깊이 잠든 남자를 보자마자 현실을 믿지 못하고 곧장 집으로 도망쳐 온 멍청이는 거울에 머리를 박은 채로 미쳐 버린 현 상황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어쩌다 읽은 책에 빙의했는데 그게 서브공? 그래,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에 이런 깜짝 이벤트도 있어야 사람이 살맛이 나지.
메인 커플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회귀? 그으래……. 이 정도까지도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다.
회귀가 벌써 마흔두 번째인 건? 여기서부턴 문제가 좀 있다. 대략 6개월마다 회귀하기. 이게 사람을 아주 돌아 버리게 만든다.
메인 커플이 또! 파탄 나서, 또! 회귀하게 생겼길래 홧김에 메인공과 뜨거운 밤을 보낸 것? 그런데 꼴에 서브공도 공이라고 메인공을 깐 것?
그런데 자고 일어났는데 회귀가 안 된 것?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대로 도망쳐 와. 잠자리만 가지고 튄 미친 새끼가 된 것?
‘…죽자. 내 의지로 죽자.’
깊이 고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모든 과정이 문제였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빙의하지만 않았어도, 아니 이 세계가 나를 회귀만 안 시켰어도, 아니다. 시켜도 마흔두 번이나 시키지 않았으면 내가 정신이 나가서 메인공을 깔아 보겠다고 어젯밤 그 추태를 보이지 않았을 것 아닌가?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었지만, 그래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그나마 빠른 법이라고 했던가? 나는 주먹을 굳게 쥐고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 5층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더라?
“다음 생엔 제발 회귀 안 하는 엑스트라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터벅터벅 창가를 향해 걸어가며 인생의 마지막 소원을 빌고 창문에 발을 걸치려던 순간, 나는 바깥에 선 남자를 발견하고 뱀을 앞에 둔 쥐처럼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아, 아니 어떻게 벌써 여기에 왔지?!
“공, 공작님?!”
내가 놀라 까무러칠 듯한 얼굴로 비명처럼 그를 부른 순간, 나를 올려다보는 빨간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신화 속 남신 같은 금발의 남자는 나를 한 번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아래로 한 번 내리고 연이어 엄지로 목을 긋는 동작을 했다.
‘뭐, 뭐지……? 걸리면 뒤진다? 아래로 오면 죽여 버린다?’
내가 남자가 보낸 수신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벙쪄 물음표만 띄우는 사이에 현관에서 우당탕 문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곧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온 기사들에게 잡혀 그대로 땅에 무릎 꿇려졌다.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1층에서 내 집까지 올라온 남자가 집 안에 들어서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물러나 남자가 걸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사이로 지금 이 사태의 피해자, 이 소설의 전직 메인 공이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다가왔다.
내 앞으로 걸어온 남자가 거침없이 뽑은 검의 끝이 내 목젖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 혹시 침이라도 크게 삼키면 검에 베일까 봐 침도 삼키지 못하며 나는 벌벌 떨고 말았다.
‘살, 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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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빙의한 소설은 사건물 기반인 판타지 비엘 소설로 왕궁의 신입 행정 직원인 메인수 라비 플레어가 상사의 비리를 캐면서 시작한다.
상사의 비리를 캐는 과정에서 라비 플레어는 왕국 최악의 불법 조직 트리불라를 뿌리 뽑기 위해 약 1년간 동분서주했던 수사관 케이든과 동선이 겹치게 되었다.
라비 플레어가 트리불라 소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메인공 케이든 아미르는 라비 플레어에게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곧 여러모로 찐하게 얽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함께 여러 일을 헤쳐 나가다가 최종장에선 왕국에 해악만 끼치던 조직을 완전히 해체하는 이야기였다. 해피 엔딩. 해피 엔딩.
그리고 내가 빙의한 녀석의 이름은 리암 카터, 허우대만 멀쩡한 성격 더러운 마탑 출신 마법사였다. 이 녀석은 첫 만남에 라비에게 달려들던 뒷골목 깡패들에게서 그를 지켜 준다.
리암은 깡패들에게서 그를 구해 준 후 위험하니까 지금 하는 수사를 그만하는 건 어떠냐고 라비에게 권유하지만, 당연히 라비는 그 충고를 듣지 않는다.
실제로 위험에 처해 봤으면서도 꿋꿋이 수사를 계속하는 라비에게 흥미가 생겨 리암 카터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라비를 위험에서도 구해 주기도 하고 도움받기도 하며 라비에 대한 감정이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리암은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라비에게 반했을 리 없다고 내내 코웃음 치며 마음을 부정하는 바람에 반한 걸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땐 한참 늦어버린, 서브공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녀석이었다.
처음 빙의를 했을 때 나는 원작 스토리는 모르겠고 ‘나 좋을 대로 살게!’ 같은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내 태만으로 라비 플레어가 죽자, 나는 다음 날 회귀하고 말았다.
첫 번째 회귀를 겪자 슬슬 감이 잡혔다. ‘아, 원작이 진행되도록 도와줘야 하는구나.’ 그래서 두 번째부턴 충실히 라비도 도와주고 서브공으로서 케이든의 자극제도 되어 주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했다.
…아마도 충실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리암 카터 몫의 일을 끝내도 원작 커플이 이어지지 못하면 나는 또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처음엔 분명 두 사람의 마음이 잘 맞아서 후반부 사건까지 진행이 됐었는데 스무 번쯤 회귀할 무렵엔 두 사람은 연인은커녕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서 연애 진도가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건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일에 파묻혀 사는 일 중독자들의 서류 뭉치뿐이었다.
처음 두세 번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운명의 작대기가 어긋나기도 하고 그런 거지. 다들 다음부턴 좀 잘해 보자? 응?
그런데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던 것이 어느덧 마흔두 번이 되자 정말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뭘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회귀의 굴레! 이 회귀를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봤다.
케이든 아미르에게 라비 플레어인 척 연애편지도 써 보고 서동요처럼 둘이 사귄다고 소문냈다가 케이든의 칼에 베여 죽어 보기도 했다.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죽어도 회귀하더라. 젠장.
두 사람의 망한 큐피드 노릇이 열다섯 번이 넘어가자 슬슬 이쯤 되면 세계가 나서서 둘이 연애를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망하다 못해 시작도 안 하는 로맨스가 스무 번이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 이번 회차에서 회귀할지 안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가을 풍년제 때 케이든과 라비가 데이트하지 않는다? 아,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6개월 전으로 돌아가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된다.
그리고 어제는 대망의 마흔두 번째 풍년제 날이었다. 혹시나 해서 왕궁에 갔다가 공휴일인데도 특근을 하는 훌륭한 신입 공무원 라비를 발견하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 회귀 준비해야겠다.
동시에 머릿속에 한 가지 간악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내일 회귀할 거……. …내가 케이든한테 고백해도 되지 않아?
지금의 나라면 정신 차리라고 멱살을 쥐고 흔들어 줬을 텐데 이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마흔두 번의 회귀를 거치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케이든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솔직히 케이든은 무척이나 잘생겼고 냉정하면서도 가끔은 상냥한 웃음을 짓는, 멋진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을 20년이 넘게 곁에서 지켜본 셈이란 말이다.
내가 케이든을 사랑하게 되는 건 불가항력 같은 일이었다. 해가 지면 밤이 찾아오고 시간이 지나면 동이 트게 되는, 그런 당연한 일 말이다.
그래도 이 미친 회귀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그동안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글렀다는 사실이 내 머리 한편을 마비시키고 말았다.
원래 사람이 막판에 몰리면 멀쩡하던 사람도 갑자기 돌아 버리는 법이었다. 평소였으면 미친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잠이나 자다가 내일 아침 봄 공기나 맡을 준비 하라고 자신을 몰아세웠을 텐데.
쓸데없이 행동력이 좋았던 어제의 리암 카터는 여태껏 상상만 했던 일을 실행에 옮길 기쁨에 반쯤 미쳐 버리고 말았다.
너무 기쁘고 긴장된 나머지 맨정신으론 못 하겠다고 그대로 술 한 병을 들이마시고 케이든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온 세계가 방해하는 커플답게 특근 중인 라비와 마찬가지로 공작가에서 열심히 일하던 중인 케이든은 자신을 찾아온 나를 의아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여보내 주었다.
살짝 오른 취기에 신이 난 리암 카터는 활짝 웃으며 케이든의 손을 붙잡고 고백을 하였고, 그리고 케이든은……. …케이든은 고백을 받아 줬다!
미친 리암 카터. 거기서 끝냈어야지. 사람의 욕심은 원래 끝이 없다던가. 걱정과 달리 케이든이 무슨 길고양이가 배를 까고 올려다보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고백을 받아 주자 마음속에 욕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내일이면 이 고백도 없던 일이 돼 버리잖아……. …연인이 됐으니까 케이든하고 잠자리도 가지고 싶어.’
그리고 케이든은 내 부탁을 곤란한 얼굴로 거절했다. 당연했다. 사귀자고 고백한 지 5분 만에 자자고 요구하는 놈이라니. 최악이다. 케이든이 자고 싶다고 조르는 내 뺨을 안 때린 것만으로도 그의 인격은 증명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술기운이 문제였다. 머리로는 케이든의 결정을 이해하는데 내일이면 다시 케이든과 연인 관계가 아니던 때로 돌아간다는 슬픔이 나를 잠식해 버리고 말았다.
평소였으면 무사히 억눌렀을 슬픔은 술기운을 이기고 내 몸을 지배해 버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울어 버린 것이다.
케이든은 자신 앞에서 소리 없이 우는 내 모습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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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양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서서 살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케이든에게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케이든은 내 어설픈 웃음을 싸늘한 미소로 되돌려 주며 칼을 좀 더 나에게 가까이 댔다.
“리암 카터. 변명해 보게.”
“그으게요. 아침에… 그만 너무 놀라서…….”
“술주정뱅이를 받아 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혀를 차며 탄식하는 케이든의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술 때문에 고백한 거 아니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그대가 원래 신의 없는 인간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 아니 그건 아니고…….”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당연히 회귀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케이든에게 회귀를 고백할 순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냥 술주정으로 고백했다가 잠자리만 가지고 튄 쓰레기에서 술주정으로 고백한 주제에 잠자리만 가지고 튄 데다 미치기까지 한 쓰레기가 되는 것 아닌가.
케이든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내가 쓰레기 같은 짓을 한 게 맞긴 하지만 나도 사정이 있단 말이다……. 무슨 사정인지 말은 할 수 없지만. …세상에! 진짜 쓰레기들이 하는 변명 같다.
이런저런 서러움에 눈물이 고였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는데 벌써 케이든 앞에서 두 번이나 울게 되었으니 큰일이다.
잘못한 주제에 울기까지 하면 너무 밉상일 것 같아 눈물을 흘리진 않으려고 코를 훌쩍이며 버텨 보는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케이든의 잘생긴 입술에서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을 최대한 부릅뜨며 케이든을 올려다보자 그의 검이 천천히 내 목에서 거두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자 기다렸다는 듯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가 느껴졌다.
케이든은 검집에 검을 꽂은 후 한쪽 무릎을 꿇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곧 볼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내 볼을 잡은 큰 손이 눈가를 가볍게 훑어 눈물을 닦아 냈다. 나는 놀라 눈만 빠르게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에게 케이든의 다정한 목소리가 닿았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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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이는 나를 그대로 어깨에 둘러업은 케이든은 자연스레 나를 데리고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갔다. 단단한 어깨에 밀가루 포대처럼 얹혀서 계단을 내려가니 배가 너무 아파 결국 그에게 다른 자세를 요청하고 말았다.
내 민원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속칭 공주님 안기로 나를 다시 안아 올렸다. 거의 차이가 없다곤 하나 그래도 내가 그보다 약간 더 큰데 힘겨워하는 기색 없이 나를 번쩍 들어 올린 케이든의 모습이 참으로 듬직했다.
그러나 그 상태로 안겨 가려니 이번엔 우느라 흉해진 내 얼굴을 가리기가 어려워 다시 케이든에게 민원을 넣고야 말았다.
악성 민원인의 거듭된 요청에도 군말 없이 멈추어 준 케이든은 나와 잠시간의 토론을 거친 후 그의 허리에 내 다리를 감은 후 안겨 가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 같은 모습에 잠시 회의감이 들었지만, 눈물범벅인 얼굴을 내내 케이든에게 보이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았다.
마차로 가는 동안 케이든의 뒤편에서 아닌 척 상사의 품에 새끼 코알라처럼 안긴 나를 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결국 케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케이든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봐주리라 믿으며 그에게 물었다.
“더 뭐라 안 하실 거죠……?”
“스무 살짜리를 여기서 더 겁박해서 뭐 하겠나.”
스무 살. 조금 억울했다. 내가 평균 6개월 정도를 마흔두 번 회귀했으니 최소 21년은 여기서 더 쳐 줘도 되지 않나? 그러면 올해 서른둘인 케이든보다 내가 아홉 살 연상인 셈인데.
하지만 지난 마흔두 번의 회귀 동안 케이든이 자신보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각박하게 구는지 익히 보아 왔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케이든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면 눈물 기미만 보였어도 목이 뎅겅 썰렸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반추해 보았을 때 괜히 입을 놀려 케이든에게 연상 운운을 하기보단 조용히 케이든의 어깨에 업혀 가는 것이 현명했다. 회귀에 문제도 생겼겠다, 이제 몸 좀 사려야지…….
마차에 나를 앉힌 케이든은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로 가란 말도 안 했는데 출발하는 마차의 목적지는 아마도 공작가일 것이다.
‘이대로 공작가로 되돌아가도 되나? 나 이제 지하실에 갇히는 거 아냐?’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공작가의 지하 감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케이든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꿈지럭대다가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밥은 언제 먹나요?”
“그대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식사를 마치고 정원을 산책 중이었겠지?”
“네에……. 이따가 정원 보여 주세요.”
생각해 보니 식사도 못 하고 지하 감옥이냐 공작가의 손님이냐의 갈림길에 선 작금의 사태도 내 잘못이라, 나는 딴소리나 꺼내며 비굴해지기를 선택했다. 내 말에 케이든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실소를 흘리는 게 들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을 끝으로 마차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케이든은 쓸데없는 말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고 나는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으로 마음의 평안을 조금 얻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차 밖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검사답게 바른 자세를 고수하는 케이든이 조금 삐딱한 자세로 마차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픈가?’
걱정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공작님, 혹시 어디 아프세요?”
“뭐?”
내 말에 케이든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가 내가 자신의 자세를 보고 물은 것임을 깨닫고 얼굴이 야차같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잘생겼… 이게 아니라. 아, 나 때문이구나. 이놈의 주둥아리 진짜.
케이든은 남자를 받아 낸 것이 처음이었을 텐데 어제 술에 취한 나를 받아 내던 아래가 마냥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나를 잡으러 왔으니……. 입만 열면 지뢰란 지뢰는 다 밟아 버리는 이놈의 혀를 뽑아 버려야 하나 싶었다.
케이든의 기어이 성난 눈빛이 나를 향하자 나는 절로 주인에게 혼난 개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마차의 의자를 살살 긁으며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은 내가 입을 완전히 다무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마법으로 좀 더 편하게 해 주겠다고 하면 이대로 마차에서 쫓겨나겠지.
회귀만 마흔두 번을 겪은 내 촉이 경고하는 대로 조용히 입 다물고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로 바르게 앉아 있자 다행히 케이든은 나를 쫓아내지 않고 공작가까지 데려가 주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지하 감옥에 갇힐 것까지 각오한 내 생각과 달리 내게 주어진 방은 아주 아주 근사한 곳이었다. 크고 넓은 데다가 곳곳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침실이 아니라 작은 회랑 같기도 했다.
침대도 아주 컸다! 과장 좀 보태 침대가 내가 오늘 아침까지 살던 집만 한 크기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침대에 덥석 누워 내게 이런 방을 내어 준 케이든의 큰 배포에 감탄하다가 갑자기 등골을 치고 올라오는 불안감에 벌떡 일어났다.
‘아니. 잠깐만. 이 방 그러고 보니 케이든 옆 방 아냐?’
조금 전에는 케이든이 나를 지하 감옥에 안 보내는 것이 기뻐 미처 신경을 못 썼는데 여기 옆방이 내가 알기론 케이든 방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가주의 옆방은……. 안사람에게 주어지는 방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사실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나는 급히 방문을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나서려다가 내 방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막혔다.
“공작님한테 다녀오려고요. 진짜로. 도망 안 가요. 도망가면 네발로 기어서 돌아올게요.”
내 인권을 걸고 한 맹세에도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대로 드러누워 통 속에서 튀어 오르는 구더기처럼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땅을 발로 몇 번 차 대고 나서야 기사들은 질린 얼굴로 공작님께 여쭤보겠다며 제발 좀 들어가라고 애원하였다.
꼭 사람이 말로 하면 안 들어주고 이렇게 인권을 버리고 나서야 부탁을 들어준다.
곧 기사 한 명이 돌아와 공작님한테 안내해 주겠다며 나오라 하였다. 희희낙락하여 방에서 나온 내 앞뒤로 기사가 한 명씩 서서 나를 데리고 갔다. 안내보다는 연행에 가까운 모양새였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한동안은 얌전히 감내하기로 했다.
기사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케이든의 집무실이었다. 아미르가의 문양이 음각으로 크게 새겨진 문이 열리자 집무실에서 보좌관에게 부지런히 무언가를 지시하던 케이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가 생긋 웃으며 이리로 오라 손짓했다.
“마침 잘 왔네. 그대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도 몇 있거든.”
“제 서명이요?”
내 서명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지? 의아한 얼굴로 책상에 다가가자 케이든의 보좌관이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 무언가가 이미 빽빽하게 작성된 서류를 쓱 훑어 내리다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겨, 겨, 결혼? 결혼이요?”
“그대를 찾으러 가면서 고민해 보았네. 사람을 구속하며 연애하는 것은 별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대는 좀 필요할 것 같더군. 그대, 듣고 있나?”
‘결혼? 내가 케이든이랑? 결혼을? 꿈인가? 아 혹시 이미 회귀했는데 일어나기 전에 꿈을 꾸는 중인 건가?’
입을 떡 벌리고 서류를 보다 급히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세상에, 이게 현실이라고?!
“물론 그대가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 원한다면 약혼 형식으로…….”
“아뇨! 해요! 결혼! 케이든, 저랑 결혼해 주세요!”
급히 케이든의 손을 붙잡으며 외쳤다. 내 열렬한 구애에 케이든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가 내 손등을 툭툭 치곤 내 손 안에서 구겨진 서류를 꺼냈다.
“기뻐하니 다행이군. 풍년제가 끝나고 왕궁에 서류를 제출하면 되겠어.”
“네. 네. 어디 어디 서명하면 되나요?”
나는 급히 케이든의 옆으로 옮겨 가 펜을 건네받으며 그가 가리키는 모든 곳에 사인을 휘갈겼다. 머릿속이 흥분으로 새하얘졌다.
만약 이게 결혼 관련 서류가 아니라 신체 포기 각서였어도 지금의 나는 기꺼이 서명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케이든이라면 언제든 신체 포기 각서 정도는 써 줄 용의가 있지만 아무튼.
“더 있나요?”
내가 눈을 빛내며 혹시 더 서명할 것이 있냐고 묻자 케이든은 주인이 던진 공을 잘 물어온 개를 칭찬하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금은 없다 하였다.
내가 무사히 서명을 마친 서류를 보좌관에게 넘긴 케이든을 보다가 그제야 내가 그를 왜 찾아왔던 것인지 생각이 났다.
“공작님. 그런데 안주인이 쓰는 방은 제게 너무 빠르지 않나요?”
나야 모종의 이유로 케이든을 근 21년째 보는 중이지만, 사실 케이든 입장에서 나는 본 지 6개월이 된, 좀 수상한 한량 마법사일 뿐이었다. 내가 케이든이 고백을 받아 줬을 때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결혼이야, 지금 서류를 제출한다고 해도 정식으로 수리되고 최종으로 결혼식을 치르려면 그의 신분 때문에 최소 6개월은 필요하다. 그 말은 최종 결혼식 전에 그가 이 관계를 무르고 싶다면 약간의 추문만 각오하면 무를 수 있단 소리다.
하지만 안주인이 쓰는 방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공작가 내의 실질적인 대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까지 회귀하는 동안 라비에게도 절대 안주인의 방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일반적인 귀족 집안에선 결혼 이후 혹은 결혼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나 안주인이 쓰는 방을 신부에게 내어 준다.
지금 케이든이 내게 방을 벌써 내어 준 건 지나치게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사귄 지 하루 된 사이였다. 결혼 서류에 신나게 서명해 놓고 할 말은 아니다만.
내 말에 케이든은 고개를 기울여 내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반듯한 조각상 같은 얼굴에 그려지는 근사한 미소에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볍게 툭 쳤다.
“글쎄. 그 방의 주인이 될 사람이 그대 말고는 내 인생에 없을 거 같은데.”
케이든의 말에 순간 머리가 굳어 눈만 깜빡거리며 그대로 멈춰 있다가 잠시 후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해졌다. 그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데굴 굴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였다. 케, 케이든. 이 심장에 해로운 사람…….
그가 내 화끈한 볼에 자신의 오른손을 갖다 댔다. 내 뺨에 닿은 손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나는 얼굴에 다가온 그의 손을 붙잡고 뺨을 식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보석 같은 두 눈이 부드러운 빛을 띠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잡힌 손을 움직여 내 손가락을 맞잡은 그가 짐짓 얼굴을 진지하게 가다듬으며 내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리고 내 옆방에 그대가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거든.”
그 말에 결국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버리고 말았다. 내 볼에 닿은 시원한 손은 어느새 내 열기가 옮겨 가 한껏 따뜻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 모습에 크게 웃으며 남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품 안에 얼굴을 기대며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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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제가 끝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 눈에 보이는 곳이 내 작은 방이 아니라 케이든이 내준 거대한 방이라는 사실도 눈물 나게 기뻤다.
실제로 살짝 눈물이 핑 돌긴 했지만 감동할 때마다 울었다간 내가 탈수로 쓰러지게 생겨서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말려 냈다.
축제가 끝나자마자 케이든과 함께 왕궁의 행정실에 방문해 서류를 제출하고 왔다. 공휴일, 평일 가리지 않고 일하는 성실한 공무원 라비는 우리 둘이 동시에 들어오자 의아한 눈빛을 보내다가 우리가 제출한 서류의 정체를 알고는 과장 없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하긴 라비 입장에선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데면데면하게 굴던 지인들이 나흘 사이에 손잡고 결혼 서류를 제출하는 셈인데 저 정도의 반응이면 아주 점잖았다.
그때가 다시 생각나 헤벌쭉 웃다가 약지에 낀 반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케이든이 본식 전까지 끼고 다닐 용도로 선물해 준 반지였다.
그는 급하게 마련한 이 반지가 완전히 흡족하진 않은 듯했지만 나는 그가 온전히 담긴 듯한 금과 루비로 장식된 이 반지가 마음에 들었다.
선물을 받은 날 너무 기뻐 훌쩍이면서 잘 때도 끼고 자겠다고 우기다가 그러다 반지에 흠집 나니까 빼고 자라고 한 소리 들은 기억이 생각나 배시시 웃었다.
반지를 받은 때를 생각하니 또 케이든이 보고 싶어졌다. 요즘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겠지 싶었다. 케이든에게 청혼을 받았고 눈을 떠도 회귀를 안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든 보러 갈 수 있다.
너무 행복했다. 만약 이 순간이 모두 꿈이라면 그 꿈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몽일 것이 분명했다. 이런 꿈을 꾸고 나서 내가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잖나.
이제는 내가 나가도 붙잡지 않는 익숙한 문 앞의 기사들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 케이든의 집무실로 가던 중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갈색 머리의 단정한 얼굴, 라비였다.
나는 라비가 걸어 나오던 방향과 나를 발견했는지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해 오는 그를 번갈아 보았다.
‘케이든의 집무실 쪽이잖아?’
내가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나에게 다가온 라비가 햇빛을 받은 여름철 나뭇잎 같은 눈을 빛내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하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리암, 결혼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비. 본식 때 꼭 와 주실 거죠?”
내가 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맞잡자 라비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참석할게요.”
이 흔쾌한 태도에 타오르던 투기가 조금 사그라졌다. 이번 회차의 라비는 정말 케이든에게 연애 쪽으론 일말의 관심도 없구나.
순간 라비는 생각도 없는데 정실한테 질투하던 첩의 기분으로 굴던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비랑 케이든이 이루어지는 게 일종의 원본이니까!
누구도 모르는 사실에 혼자 흥분하던 게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다가 궁금증도 채우고 말도 돌릴 겸 라비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집무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국왕 전하께서 저를 심부름꾼으로 삼아 공작님께 축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별일은 아니었어요.”
“국왕 전하께서 조카인 케이든을 익히 챙기신단 이야기는 자자하죠.”
케이든의 삼촌 되는 국왕 루벤 케슈너가 가족애가 강한 것은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케이든이 갑자기 혼인서를 제출했으니 분명 반응할 것이라 예상은 했다만 라비를 보낸 것은 의외였다.
그나저나 축하의 말이 용건 전부가 아닐 텐데, 케이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지 좀 궁금했다. 케이든한테 물어보면 알려 줄 거 같은데. 나는 케이든의 집무실과 라비를 번갈아 보다가 그에게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인사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라비.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죠.”
“저도요. 리암. 만나서 반가웠고. 좋은 하루 되세요.”
라비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재개 놀렸다. 케이든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어보고……. 오늘은 뭐 하자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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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아미르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남자를 보며 라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암 카터. 실력 있는 마법사였지만 마탑 출신이라는 것 말곤 과거가 불분명한 남자였다.
라비는 그를 볼 때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를 앞에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분명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쾌활하고 싱그러운 사람이란 건 맞지만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있겠냐, 한다면. 글쎄? 리암 카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라비는 언뜻 새어 나오던 그의 광기를 목격한 순간들을 기억한다. 리암 카터는 사람의 생명을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남의 생명만을 하잘것없이 여겼다면 라비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적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하곤 했다. 겁이 없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생명도 일종의 재화처럼 여겼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종류의 것.
그가 아는 리암 카터가 그나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케이든 공작과 라비였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케이든 공작’과 ‘라비의 목숨’이었다.
리암 카터는 종종 무기질적인 눈으로 라비를 보곤 했다. 물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은 그 시선을 받을 때마다 라비는 자신이 매대에 놓인 판매 상품 같다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그에게 왜 그런 시선을 보내느냐 굳이 따져 묻지 않은 것은 리암 카터가 대부분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선에 예외가 있다면 케이든 공작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리암의 시선은 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아차릴 만큼 열기와 다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라비는 어렵지 않게 케이든 공작이 리암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암이 공작과 관계를 맺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가 아는 리암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강박적으로 피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소식을 알려 왔을 때 라비는 깜짝 놀랐다. 케이든 공작쯤 되는 사람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했다는 사실도, 그 상대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리암의 결정이었다. 리암이? 리암 카터가 결혼이라는 관계를 만든다고?
6개월은 길진 않지만 누군가를 파악하기에 그렇게 부족한 시간도 아니었다. 그간 리암을 지켜보며 라비는 얼추 결론을 내렸다. 리암 카터는 사람과의 관계를 두려워한다. 혹은 무슨 이유에서든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를 파헤칠 수도 없었고. 그건 리암 카터가 라비에게 그어 놓은 선을 넘는 일이었다. 라비는 구태여 그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리암에 대해 파고들고 싶진 않았다.
“뭐, 공작님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놀라운 일이긴 하지.”
라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전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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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 공작과 리암이 결혼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난 뒤 국왕 전하께서 난리가 나셨다는 이야기가 왕궁에 파다했다.
동성혼이 법적으로 가능하긴 했지만, 이것은 주로 후사가 없어도 되는 경우의 가문 간 결합을 위해 사용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케이든 공작의 신부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리암 카터는 후사도 가질 수 없는 남성이었고, 평민 출신으로 아미르 가문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도 아니었기에 다들 무슨 일인지 입을 놀리느라 두 사람이 다녀간 후 왕궁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리암이 서류를 제출하러 들어올 때 라비에게 말을 걸었기에 둘이 다녀간 후 혹시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아느냐며 다들 라비에게 달라붙어 질문을 던졌다. 집요한 질문 세례가 사방에서 쏟아지자 정신이 없어 그날 라비는 도망치다시피 외근을 나갔다.
친애하는 조카가 누군지도 모를 마법사와 결혼을 하겠다고 예고 없이 서류를 제출하자 당연하게도 국왕 전하는 마법사가 혹시 조카에게 세뇌 마법을 건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마법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만 상대방이 마탑의 마법사니 당연히 해 볼 만한 의심이긴 했다.
국왕은 축하의 말을 전한다는 핑계로 최근 공작과 일 때문에 만남이 잦던 라비를 직접 지목하여 오늘 공작가로 보내었다. 케이든에게 혹시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특명과 함께 말이다.
덕분에 공작을 만나기 전까지 잔뜩 긴장했었으나 공작과 대화하며 라비는 공작이 콩깍지면 모를까 세뇌 같은 것에 걸린 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혹시 리암 씨와 관련해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요?”
국왕의 인사를 전한 뒤 혹시 몰라 에둘러 표현하자 공작은 눈을 접어 웃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울면 뭐든 다 해 주고 싶어져서 곤란하긴 하지.”
지금 그런 답변이 저를 곤란하게 한다고 말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라비가 절로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공작이 가볍게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팔걸이의 끝을 가볍게 치던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느긋한 어조로 말하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정말로 아무 문제 없네. 내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애인의 머릿속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단 것뿐이니까.”
그는 답지 않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열두 살 차이가 주는 간극이 생각보다 크단 말이지. 리암은 별생각 없는 듯해도 나로선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
말하다가 갑자기 날 껴안고 한 바퀴 돌질 않나, 가만히 있다가 울질 않나.
공작의 불평을 듣고 있자니 나이 차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리암이 특이한 것 같았지만 라비도 확신할 순 없었다. 그도 스무 살이었던 적이 6년 전이었으니까. 라비는 차마 맞장구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직접적으로 다시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는 공작님이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연인과 결혼하겠다며 서류를 제출하신 것에 우려하고 계십니다.”
“내가 그와 연인이 된 것은 며칠 되지 않아도, 인연을 맺은 것은 그보다 더 전이거늘 어찌 성급한 결정이라 매도하시는지 원.”
공작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차더니 시선을 옮겨 창밖을 바라봤다.
그를 따라 창밖에 시선을 두자 전날까지 공작가에서 풍년제를 맞아 건물에 달아 놓은 전등 여럿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물건들이 곳곳에 보였다. 부지런히 장식을 치우는 일꾼들을 보던 공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풍년제의 기원을 아나?”
“예. 저승의 왕이 내어 준 석류를 먹은 딸이 1년 중 넉 달을 저승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을 슬퍼하는 대지의 여신을 달래며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이지 않습니까.”
“그래. 저승의 왕은 여신을 붙잡기 위해 여신을 속여 석류를 먹였지. 그리고 여신은 결국 저승에 발목이 잡혔고.”
어린아이도 아는 신화 이야기를 갑자기 시작하는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었다. 그는 시선을 창에서 돌려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에게는 저승의 석류가 없으니 내가 가진 가장 귀한 패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그 패가 결혼이라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말이지.”
그의 말이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리암 카터를 자신의 곁에 잡아 놓기 위해 그와 결혼한다는 소리인가?
공작이 이렇게까지 맹목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누구보다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을 이리 바꿔 놓다니, 사랑이란 참으로 놀라운 감정이다.
공작의 말이 무슨 소리일지 가늠하고 있으려니 그가 손을 내저었다. 축객령이었다. 약간의 피곤함이 서린 얼굴로 그는 라비를 내보내며 말했다.
“나도 아직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 복잡하니, 나중에 정리되면 다시 말해 주지. 전하께는 축하의 말씀 감사하다고 전해 주게.”
공작과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신이 나 공작의 방으로 가는 리암의 뒷모습을 보다가 라비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긁적이며 돌아섰다. 이 이상은 자신이 관여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아 둘 것은 공작은 국왕의 염려와 달리 마법에 걸리지 않은 상태고 리암은 현재로선 수상한 구석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만 알면 족했다.
생각을 마친 라비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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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가 나가자마자 집무실에 쳐들어온 나를 본 케이든은 못내 피곤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괜히 그의 손을 잡아끌어 정원 산책을 나섰다. 정오가 살짝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햇살이 눈 부셨다.
아직 풍년제의 흔적이 남은 정원을 둘러보다가 한구석에 잘 익어 붉은 열매가 달린 사과나무를 발견하고 신이 나 물었다.
“사과나무네요? 꽤 큰 걸 보니 오래된 나무인가 봐요?”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심었던 나무네. 어린 눈에 사과꽃이 예뻐서 심었었는데 그 이후로 베지 않고 내버려 두었더니 꽤 많이 자랐지.”
그렇게 말하는 케이든은 딱히 이 나무의 열매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긴 사과를 따 먹을 용도로 키운 것도 아니고 꽃을 보기 위한 용도로 키운 듯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잘 익은 붉은 과일을 보니 하나쯤 먹는 것도 괜찮겠거니 싶었다. 나무 쪽을 향해 손을 뻗자 사과 두 개가 이쪽으로 천천히 날아와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마법?”
“네에. 케이, 아니. 공작님도 하나 드세요.”
평소처럼 케이든을 부르려다가 갑자기 조금 전에 본 라비가 생각나 호칭을 급하게 바꿨다. 풍년제 전까지 그를 공작님이라고 불렀었는데 결혼 서류를 제출한 이후 나는 은근슬쩍 그를 케이든으로 부르고 있었다.
사실 원래도 속으론 늘 케이든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도 케이든이라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너무 친한 척하게 될 것 같아 마지막 선을 지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서류까지 제출한 이상 굳이 공작님이란 칭호를 고집스레 유지할 필요는 없어 보여 호칭을 바꾸었고, 케이든도 딱히 호칭으로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아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 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라비를 흉내 내서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원래 사람은 성공 사례를 모방해 가며 발전하는 법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호칭을 바꾸자 케이든은 피식 웃으며 내가 건넨 사과를 소매로 대충 닦은 후 한 입 베어 물었다.
붉은 사과를 베어 무는 모습조차 명화 속 한 장면 같아 나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입 안의 과실을 삼킨 그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편하게 불러도 되네.”
“앗, 네! 자기야?”
내 대답과 동시에 케이든의 손에 든 사과가 터져서 과육과 즙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경악이 담긴 붉은 눈동자로 나를 보던 그는 제 손안에서 뭉개진 사과를 잠시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정처 없는 고갯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고민했다. 편하게 부르래서 불렀는데 역시 공작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나?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매자 케이든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어쩐지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 말하는 기세에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는 소리였네.”
그 호칭은 아직 이른 것 같군.
‘자기야’가 문제였던 건가. 내심 마음에 든 호칭이어서 언젠가 불러 보리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데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굴었다간 다음에 터져 나가는 건 저 사과가 아니라 내 머리통이 될 수도 있어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닦아 주며 얌전히 대답했다.
“네에……. 케이든.”
“풀 죽지 말고.”
“그러면, 자ㄱ.”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케이든의 깨끗한 반대쪽 손이 다가와 내 입술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오리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열심히 뻐끔거리니 케이든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내게 경고했다.
“그대는 이따금 나를 널뛰는 감정의 파도 위에 올려놓을 때가 있어. 조심하게.”
“네에.”
평이한 어조로 한 가벼운 경고였지만 이쯤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눈치껏 입꼬리를 올리며 얌전히 대답하였다. 그가 칭찬하듯 내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