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SIX MONTHS LATER(2)
노르웨이 베르겐에 본사가 있는 석유 시추 전문기업 '디그'는 1980년대 중반에 세워졌다.
여느 우로보로스의 장로들이 그러하듯, 당시의 일 장로이자 라인하트 가문의 당주인 톨 라인하트가 차명으로 만든 회사다.
현재 해양 플랜트 부문으로 세계 1위를 석권할 정도로 성장한 '디그'.
톨 라인하트에게 이 회사의 존재 목적은 사실 자산 증식 같은 게 아니었다.
비록 우로보로스의 일 장로직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른 장로들의 견제로 힘을 잃은 상황.
그중 새로이 이 장로직에 오른 베르너 가의 젊은 당주, 루이스의 적개심은 그 정도가 심했다.
과거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로 베르너 가는 라인하트 가문에 원한이 있었다.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던 그 와중에 다른 유대계 장로의 안위보다 제 가문의 영달만을 위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때는 라인하트 가문에 나치의 그런 만행을 저지할 힘이 전혀 없었다고 해명을 해도, 피해 당사자인 베르너 측에겐 변명으로 치부될 따름이었다.
매번 장로 회의에서 대립각을 세우길 여러 번.
베르너 가문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삼 장로 로쉬찰트까지 그에 가세하여 라인하트를 몰아붙였다.
라인하트 그룹의 사세 확장이 막히기 일쑤였고, 야심 차게 준비하던 사업도 중도에 생긴 불상사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이 장로와 삼 장로가 있음은 명확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톨 라인하트로선 당장보다는 훗날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어떡해서든 그들의 수작을 근근이 막아낼 정도는 되었지만, 아들 대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근심만 한가득이다.
그래서 리처드 도슨이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그 이름으로 '디그'를 만들었다.
여차하면, 라인하트의 이름을 버리고 도슨으로 견제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라도 아들과 손자가 안전하길 바라였다.
노르웨이의 대부호 도슨 가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이후, 새로운 천년이 도래하기까지 큰 사고는 없었다.
이 장로와 삼 장로로부터 통상적인 견제 정도만 이어졌을 뿐, 노골적인 야욕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톨 라인하트는 안심해버렸다.
그 직후, 일어날 사고를 짐작도 하지 못한 채.
2001년 가을.
톨 라인하트의 아들 내외와 손자가 타고 가던 차가 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그는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손자, 윌리엄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수 개월 동안이나 병상 신세를 져야 할 만큼 중상을 입은 채로 말이다.
이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쯤은 톨도 잘 알았다.
찰리 정과 가디언 1팀을 움직여 사고를 내고 도주한 트럭 운전사를 수배했지만, 이미 모처에서 숨진 채 발견된 뒤였다.
추적의 실마리는 잃었지만, 톨은 확신했다.
이 일의 배후에 이 장로와 삼 장로가 있을 거라고.
또한 손자가 살아남은 이상 흉수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디그'와 도슨 가를 이용할 때가 왔다.
톨 라인하트는 가공의 인물인 리처드 도슨의 늦둥이 자식으로 알렉 도슨이란 신분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윌리엄을 노르웨이에 보내 알렉 도슨으로 살게 했다.
하나 남은 혈육에게 적들의 칼날을 피할 도피처를 마련해준 것이다.
톨의 안배대로 윌리엄은 적들의 눈을 피해 무탈하게 자랐다.
그리고 5년 전, 그가 노환으로 숨졌을 때.
윌리엄 라인하트는 원래의 신분으로 우로보로스 일 장로를 계승했다.
같은 시기에 '디그'의 젊은 CEO, 알렉 도슨은 우로보로스의 입단 제의를 받아들여 일반 단원이 되었다.
"……."
노르웨이 베르겐 외곽의 도슨 저택으로 옷 상자가 하나 배달되었다.
윌리엄이 직접 주문·제작한 옷이 오늘에서야 도착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상자에 담긴 검은색 로브를 들어 올렸다.
왼쪽 가슴 부위에 우로보로스를 상징하는 문양이 큼지막하게 수가 놓여있다.
오직 우로보로스에서 일곱 명만이 입을 수 있는 권위의 상징.
장로의 로브였다.
반년 전, 윌리엄 라인하트의 제명으로 비게 된 장로 한 자리.
이미 일반 단원 중에서도 수위권의 재산을 자랑하던 알렉 도슨 역시 장로 후보에 올라갔다.
남은 여섯 장로는 자신이 내세운 후보를 새로운 장로로 선출하려 갖은 애를 썼지만, 서로의 이해와 견제 속에 도리어 아무런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던 알렉 도슨이 덜컥 장로에 올라버렸다.
물론 겉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소리다.
현시운이 유레카의 정식 이용자임을 알았을 때, 윌리엄의 계획은 확립되었고, 그의 능력을 빌려 사 장로부터 육 장로까지의 약점을 손에 틀어쥐었다.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협력을 약속한 칠 장로, 노아 펠노러의 한 표는 확보해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추가로 세 개의 표가 더 필요했다.
그렇게 세 장로의 약점으로 협력할 것을 강요했고, 무난히 네 표를 얻어 다시 장로의 자리에 올라섰다.
물론, 전과는 다른 이름과 서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쓱.
품이 넉넉한 로브를 몸에 걸쳐봤다.
새 옷 특유의 냄새와 함께 서늘함이 몸을 감쌌다.
"이게 뭐라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했는지.
할아버지께서 여생을 회한 속에서 살아가실 수밖에 없었는지.
윌리엄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사고가 일어날 당시의 순간을.
지면의 우둘투둘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한 차체의 진동.
차창에 연신 부딪혀 오는 바람의 소리.
사고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있었던 어린 시절 윌리엄이 경험했던 것들이다.
내부 공간을 떠도는 먼지 입자가 햇빛에 존재를 드러내고, 가죽 시트 특유의 냄새가 코안을 간질였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 너머의 수풀과 나무들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한….
그날 앞 좌석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시던 부모님의 모습도.
- 오늘 날씨 정말 좋네?
- 그렇네요. 나들이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앞으로 일어날 일도 모른 채 그들은 밝은 얼굴이었다.
'아뇨. 이날 밖으로 나와선 안 됐습니다.'
상념 밖의 윌리엄이 이를 까득 물지만, 기억 속 장면들은 정해진 수순으로 흘러갔다.
- 어머! 윌리엄 일어났니? 창밖을 보렴. 벌써 가을이야.
아직도 잊히지 않는 어머니의 말.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순간, 맞은편 차로에서 달려오던 대형 트럭이 방향을 틀어 윌리엄 가족이 타고 있던 차로 돌진했으니까.
콰앙-!!
"!!"
기억 속 충돌음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윌리엄은 눈을 떴다.
뇌리에 각인이 되듯 선명히 남은 기억의 흔적들.
아직도 그날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윌리엄이다.
"하지만…, 곧!"
교통사고를 사주한 이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게 되리라.
그것을 위한 일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단죄의 시작을 알릴 '찬반의 장'도 얼마 남지 않았고.
장로의 로브를 도로 벗은 윌리엄은 그걸 옷 상자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베르너와 로쉬찰트. 당신들의 끝도 머지않았습니다."
시린 안광을 번뜩이며 윌리엄의 시선이 세계지도가 걸린 벽을 향했다.
북미 대륙의 서부 끝자락을 훑어보는 윌리엄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식전에 입맛을 돋울 에피타이저가 곧 선보일 곳이기도 했다.
* * *
현시운은 전화통을 붙잡고 오랜 시간 설명을 했고, 마지막으로 상대에게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했다.
- …….
하지만, 상대는 내용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전화를 끊은 건 아니겠죠, 대런?"
- …그럴 리가요.
시운의 장난스러운 말에 스피어의 대표인 대런 체스터는 느지막이 답했다.
- 근데 보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 하아…. 다들 죽었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그가 느낄 혼란을 시운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계획된 일을 예정대로 행하는 게 먼저다.
"고글로부터 주주총회 참석을 통보받았죠?"
- 아, 네. 이 주 전에….
"블레스와 티엔유로부터 위임장도 오늘내일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 …네, 알겠습니다.
작년에 참석했던 주주총회와 비슷한 자리면서도 상황은 달라졌다.
단순히 시운이 원하는 대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거기에서 맞닥뜨리게 될 상황을 상상하니 벌써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렇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대런."
- 후우….
대런은 긴 한숨을 내쉰 뒤에야 말을 꺼냈다.
- 보스 말대로 진행된다면 제가 딱히 할 것도 없잖습니까? 진귀한 구경이나 하고 돌아오죠.
왜 이런 일에 자신을 끼워 넣냐는 듯, 약간은 원망이 섞인 목소리다.
그에 시운은 멋쩍은 웃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시운은 탁상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9월 5일…."
닷새 뒤다.
그날 이후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시운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 업무에 집중할 시간이다.
* * *
2022년 9월 5일 월요일 오전 9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소재한 고글의 본사 건물 12층 대회의실에서 상반기 결산과 주요 사업 보고 등의 안건을 다루기 위한 주주총회가 열렸다.
상정된 여러 안건 중 오늘 이곳에 모인 주주들이 주목하는 사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새로운 고글 CEO의 선임.
물론, 그 전에 기존의 CEO인 미하일 르빈의 해임안이 선행될 예정이다.
미하일의 실종이 일어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그가 무사할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
가족들마저 포기한 상태.
실종 예상 지역으로부터 반경 50해리에 달하는 해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경비행기의 잔해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해 초에 개정된 캘리포니아주의 실종자 재산 상속 절차법에 따르면 앞으로 6개월은 지나야 미하일의 가족에게 그의 고글 지분 13%가 옮겨간다.
그런 까닭에 오늘 미하일이 소유한 주식 의결권은 동결된 거나 마찬가지다.
다들 해임안 통과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총 3%의 고글 지분을 가지고 의결권을 행사하러 온 대런 체스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런은 대회의실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현시운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지런히 시선을 움직였지만, 대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짓말일 리는 없을 텐데…."
나직이 읊조리는 그때,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저기 봐. 해리 페이퍼야."
"흠, 근 1년 만에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건가?"
자신의 추종 세력을 이끌고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해리 페이퍼.
특유의 싸늘한 표정 아래 희미한 미소를 띤 그 모습은 마치 고글 CEO 자리는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은연중 보이었다.
회장 안의 주주들이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며 옆 사람과 조용히 수군거린다.
그 사이엔 고글에 몸담은 임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표정이 몹시도 어두운 그들은 해리 페이퍼의 뒤를 따르는 무리를 부러운 시선으로 봤다.
작년 CEO에 올라선 미하일이 그러했듯 해리 페이퍼 역시 숙청을 단행할 것이다.
그 불벼락을 받을 대상이 자신들이라는 걸 직감한 임원들은 이제라도 배를 갈아타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대충 마음을 읽은 해리는 픽 웃었다.
이미 그들은 해리의 안중에도 없다.
다시 고글의 주인이 되는 대로 좌천 혹은 해고할 퇴물일 뿐이니까.
"잠시 후,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참석하신 주주분들께선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을 맡은 직원의 당부에 어수선하게 몰려있거나 흩어졌던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다.
입구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던 진행요원은 이제 대회의실 문을 닫아야겠다고 여기며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잠시만요."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나 닫히려는 문을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