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화 스캔들(4)
이어지는 벨 소리에도 신명훈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4년 전, 파나마에서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그였다.
근데 왜 갑자기?
"……."
몇 번의 울림 뒤에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다시 걸려왔다.
입술을 질끈 씹은 신명훈은 잠시 주저하다 통화버튼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아이고, 형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일부러 밝게 음성을 내본다.
얼굴은 그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있었지만 말이다.
-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그럼요. 이 이상 잘 지낼 수 없을 정도로 잘 지낸답니다. 하하하."
- 스타 체이서에서 일한다며?
"히야, 누가 형사님 아니랄까 봐 제 뒷조사까지 하신 겁니까? 이거 당사자 동의 없으면 불법인 거 잘 아시죠?"
자신의 너스레에도 상대는 초지일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 나 경찰 관뒀다.
"네, 왜요? 아니, 언제요?"
- 너랑 비슷해. 4년 전 파나마에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
이때만큼은 신명훈도 억지웃음을 자아낼 수 없었다.
둘 사이를 이어주던, 그러나 지금은 찢겨나간 끈을 떠올린 까닭이다.
"그러셨구나. 흠, 흠! 그럼 지금은 경찰 관두고 뭐하십니까?"
- 흥신소.
"…아, 네."
예상 밖의 답변에 반응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 무거움을 깨트린 건 전화를 한 정민철이었다.
-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다.
"으음, 부탁이요? 형님, 저 고려일보 나오고 나서 끈 떨어진 연 신세입니다. 뭘 물어보셔도 별로 아는 게 없어요. 도움이 안 될 겁니다."
- 걱정 마. 그런 건 따로 얻는 곳이 있으니까.
"…네?"
- 너한테 지금 영상 캡처한 사진 몇 장 보낼게. 그걸 기사로 내줬으면 해. 그게 내 부탁이다.
"그게 무슨…."
- 일단 그걸 보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그럼.
뚜우- 뚜- 뚜-
"……."
전화가 끊기고, 신명훈은 정민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려 애썼다.
기사? 영상을 캡처한 사진?
그게 도대체 무슨….
수십 초 뒤에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연달아 울렸다.
정민철이 보낸다고 한 사진일 거로 생각한 신명훈은 확인하려고 메시지함을 클릭했다.
그리고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들을 보곤 멈칫했다.
"뭐야?!"
어두운 조명 아래 여러 남녀가 술을 마시고 노는 룸 안의 풍경.
다만,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사람은 분명 GJ 그룹 가의 고희준? 그리고…."
함께 한 배불뚝이 대머리 남성은 분명 강남구청장이다.
양복 입은 두 사내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희준 아니면 구청장과 연관된 사람이겠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술을 따르고 있는 네 명의 여성들.
룸살롱에서 일하는 전문 호스티스로 보기에는 나이가 어려 보였다.
"고희준…. 맞아. 분명 연예기획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댔지."
회사명은 HR 엔터테인먼트.
스타 체이서의 기자로 4년간 일해오며, 연예계에 알려진 여러 소문을 접해봤다.
때론 기삿거리가 없을 때 그걸 묶어 특집 기사로도 냈었고.
터무니없는 루머들도 많았지만, 개중엔 꽤 신빙성이 있는 추측도 있었다.
HR 엔터의 술과 성 접대는 이 바닥에선 공공연한 비밀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증거가 없어서.
또한, 상대가 미디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GJ그룹의 일원이라서.
모두 사실일 거라 여기면서도 뚜렷한 물증이 없어 쉬이 건드리지 못한 사안이었다.
근데 이렇게 노골적인 증거라니?
배치된 촬영 각도가 마치 앞에서 들고 찍은 듯 적나라했다.
자신들의 치부를 이렇게 대놓고 남겨놨을 리는 없을 테고.
결국은 몰래카메라라는 말인가?
몇 년간 대충 일하던 때와 달리 모처럼 만에 신명훈의 머리를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사진을 내장메모리로 다운로드 받고는 바로 정민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확인했어?
"…형님? 이게 도대체 다 뭡니까? 어디서 이런 걸…."
- 그건 일부야.
"네?"
- 원본 영상의 길이만 2시간을 넘어.
"……."
- 어때, 기사 낼 수 있겠지?
신명훈은 고민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신명훈의 신경이 아까 봤던 사진으로 이어진다.
정치인과 재벌 3세의 어두운 커넥션.
신명훈에게는 그런 구도로 비쳤다.
[해봤자 소용없다, 위험해서 안 된다. 그런 말들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순 없잖아. 기자라면 부조리한 현실을 향해 펜촉으로 찌르는 시늉이라도 해봐야지.]
왜일까?
이 순간, 죽은 선배가 평소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던 말들이 떠오른 건.
"하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주세요."
- …그래. 고맙다.
어쩌면 사진을 보낸 정민철 역시 자신과 비슷한 심정으로 부탁해온 걸지도 몰랐다.
신명훈은 그렇게 추측했다.
"형님, 지금 어딥니까?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 그냥 이메일로 보내도 되는데.
"아닙니다. 직접 만나 뵙고 싶어서 그럽니다."
4년간이나 서로를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정민철 역시 같은 생각인지 이윽고 답을 했다.
- 문자로 주소 찍어줄게.
"네, 형님."
- 근데….
"네?"
- 정보원에 대해선 절대 못 알려준다. 그게 내 철칙이라서.
"그런 거라면야 당연히 제가 따라야죠. 기다리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신명훈은 바로 시동을 걸었다.
때마침 정민철이 문자로 주소를 보내왔고, 그는 강동구 길동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 * *
딸랑-
입구에 걸린 작은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주문한 커피를 내리고 남은 찌꺼기를 청소하던 함수아는 습관처럼 인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또 오셨네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남성.
그를 본 함수아의 인상이 굳어갔다.
"수아 씨, 오랜만입니다."
남성은 히죽 웃으며 주문대로 다가왔다.
그에 함수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대꾸했다.
"어제도 오셨잖아요."
"…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할게요."
말을 돌리는 남성을 살짝 노려본다.
함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손에 들린 신용카드를 낚아채 계산을 마쳤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형식적인 멘트 후 함수아는 남성의 시선을 외면하며 커피머신 앞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했다.
주문대에 우두커니 선 남성, 신명훈은 수염이 삐죽 자란 턱을 긁으며 말했다.
"생각은 좀 해봤습니까?"
"……."
"이렇게 침묵한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수아 씨가 용기를 내주기만 한다면…."
일주일 전, 4년 만에 정민철을 만나 HR 엔터의 접대 증거를 입수한 신명훈은 여러 명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한 장의 리스트도 함께 받았다.
- 올해 HR 엔터테인먼트를 그만두고 나오거나 쫓겨난 연습생들 목록이야.
- 네?
- 데뷔시켜주겠다, 성공하려면 이건 관례다. 이런 식으로 꼬드겨서 술자리에 끌려나온 애들도 있었을 거야.
- …….
- 불법으로 촬영된 영상은 법정에서 증거가 되지 않잖아. 그래도 피해 당사자들이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 …형님. 단순히 기사에 싣는 것만 원했던 게 아니었군요.
-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에 따른 벌을 받는 건 당연하잖아.
- 그렇죠. 현실은 좀 다르지만 말입니다.
-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을 거다.
전 HR 엔터 연습생들이 쉽게 취재에 응할 리 없었다.
어찌 보면 숨기고 싶은 치부이기도 했으니까.
결국 설득할 수 있냐 없냐는 신명훈의 몫이었다.
현시운의 추가 의뢰로 조사한 전 HR 엔터 연습생 리스트를 가지고 신명훈은 서울과 수도권, 심지어 저 멀리 부산과 강릉까지 돌아다녔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열두 명 중 여덟 명은 룸살롱 접대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소문은 들어봤다고 하는데,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지인이 연루되어 있어서 감추는 건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관련이 있어 보이는 셋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아무래도 재벌 3세와 관련된 일이고, 괜히 이번 일로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하여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 취재가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신명훈으로선 익명성 보장도 어려웠다.
신명훈 역시 그녀들의 처지는 이해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이인데 이 일 하나로 평생 주홍글씨를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묻어둬 버리면 계속해서 피해자는 생겨날 것이다.
신명훈은 남은 마지막 연습생에게 희망을 걸며 찾아다녔다.
그리고, 사흘 전 이곳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함수아를 만났다.
- 맞아요. 데뷔 시기를 앞당겨주겠다는 말만 믿고 몇 번 술자리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냥 하는 소리인 줄은 몰랐죠, 당시에는. 그만큼 데뷔를 하고 싶었으니까….
처음으로 사실을 인정한 피해 당사자였고, 유일하게 신명훈의 말에 반응해준 증인이었다.
신명훈은 그 자리에서 취재를 요청했다.
익명성을 보장한다면 응하겠다고 함수아는 대답했다.
신명훈은 거기에 더해 다른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며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당장 영상 증거로만 해도 충분히 HR 엔터테인먼트의 스캔들 기사를 낼 수는 있다.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도 예상되는 바이다.
하지만, 관련자들에게 제대로 된 법적 처벌까지 내리게 할 수 있을까?
신명훈은 회의적이었다.
물론 기사가 나온다면 대중들의 반응이 뜨거워질 거고, 수사기관 역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순 없을 거다.
하지만, 증거물인 영상이 불법으로 촬영되었으니 법적인 증거 효력은 상실하겠지.
혐의는 확실하지만, 그들을 옭아맬 수단은 많지 않았다.
만약 고희준이 돈과 가문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 일과 관련된 연습생들의 입을 막거나 회유해 버린다면?
아무리 수사기관에서 영상에 찍힌 연습생들을 참고인으로 불러와 조사해봐도 강제성을 입증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스스로 술을 마시러 룸살롱에 갔던 거라고 한다면 무슨 조사를 더 이어 나갈 수 있겠는가.
당시 술자리에 미성년자가 끼어있었다면, 아동 청소년 보호법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민철의 흥신소에서 알아본바, 다들 스무 살 이상의 성인들이었다.
결국, 처벌이 내려진다 해도 하수인 정도만 이에 연루될 것이고 그 형량 역시 낮을 확률이 높다.
신명훈 역시 정민철이 영상 증거물을 주며 했던 말처럼 죄를 지은 이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지길 원했다.
기자의 양심이랄까?
부도덕한 모리배가 떵떵거리며 사는 걸 두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
그랬기에 함수아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녀가 보고, 또 듣고, 직접 겪기까지 했던 기억들과 자발적인 증언이 신명훈에게 꼭 필요했다.
함수아와 비슷한 처지의 피해자들을 모아 일을 주도한 고희준에게 법의 엄중한 심판을 묻게 하고 싶었다.
그런 게 바로 사회 정의 실현이니까.
신명훈의 기나긴 설득에도 함수아는 이를 거절했다.
그의 뜻은 이해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럴 순 없어요. 아직 전…, 아이돌이 되고 싶거든요. 이 일로 얼굴이 알려져서 꿈마저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그녀가 허락한 건 익명성 보장 하의 취재뿐이었다.
탁-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
신명훈은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그 자리에서 반 이상 들이켰다.
쓰다, 무척이나.
부조리한 현실만큼.
"나쁜 짓을 한 놈들은 버젓이 잘 먹고 잘사는데, 수아 씨 같은 피해자가 죄인처럼 숨어 사는 건 말이 안 됩니다."
"……."
함수아의 반응은 어제와 같았고, 처음 만났던 날과도 같았다.
사실 그녀의 우려도 맞는 말이긴 하지.
이 사건이 불거진다면, 피해자인 함수아와 연습생들을 색안경 끼고 볼 사람들도 적지 않을 건 분명했다.
신명훈은 한숨을 내쉬며 언제나처럼 자신의 명함을 주문대 위에 올려놨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해줘요. 저도 도울 수 있는 데까진 전력으로 도울 테니까."
힘없이 터덜터덜 가게 문을 나서는 그를 향해 함수아는 습관처럼 말을 내뱉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하지만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진하게 서렸다.
* * *
카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원룸으로 돌아온 함수아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
평소보다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더욱 피곤하게 느껴졌다.
며칠째 계속 찾아오는 신명훈 탓이리라.
그의 말이 맞고, 또한 그의 행동이 옳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거기에 동참해버리면 자신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어느 연예기획사가 스캔들에 연루된 연습생을 뽑아주고 데뷔 시켜 주겠는가.
이미지로 먹고사는 게 연예인인데.
"하아…."
절로 한숨만 나왔다.
한동안 가만히 천장만 올려다보던 함수아는 불현듯 뭔가를 떠올리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분명 오늘이 발표랬지?"
일주일 전, 오디션을 본 중소 기획사의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당시 자신의 춤과 노래에 심사를 보던 기획사 대표와 간부들은 기립박수까지 쳤었지.
물론 그 전에 오디션을 본 다른 기획사에서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었다.
한결같이 불합격을 통보해왔지만.
하지만 이번엔!
"합격했을 거야."
부푼 가슴을 안고 기획사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함수아의 기억대로 오늘이 오디션 합격 발표일이 맞았다.
공지사항에 떠 있는 합격자 공고문을 클릭했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
하지만, 밝았던 함수아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