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장 & 강(1)
"마스터, 여기 한 잔 더."
청담동에 있는 회원제 고급 바 '디오니소스'의 바텐더이자 오너이기도 한 박우석.
그는 단골손님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오늘은 그만 마시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어."
"…그냥 줘."
탁!
항의의 뜻으로 잔으로 바 테이블을 내리치는 여인.
박우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위스키를 따서 그녀의 잔을 채웠다.
벌컥!
여인은 그 독한 술을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기분 나쁜 일? 그런 식으로 표현할 일은 아니지. 날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
평소처럼 말로 한 자락 위로라도 건네보려 했더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박우석은 시선을 돌려 마른 헝겊으로 물기가 묻은 컵을 마저 닫았다.
여인은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박우석을 향해 도돌이표처럼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한 잔 더."
"……."
박우석은 말없이 다시 그녀의 잔을 채워줬다.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켜는 미모의 여인.
남자라면 은근슬쩍 다가와 말이라도 붙이며 수작을 한번 걸어볼 만도 하지만, 이곳 '디오니소스'의 회원들은 감히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디오니소스'는 회원권만 무려 5억 원에 달한다.
그 돈을 기꺼이 지불하면서도 이곳의 회원이 되려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과 같은 상류 계층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맺은 인맥을 통해 지금보다 더욱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부상조의 목적으로 모인 회원들의 직업은 의사, 변호사, 대기업 중역, 중견 회사 대표 등 다양했다.
누구 하나 상위 1%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여인에게는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장강 그룹 오너 가의 일원.
속칭 얼음 미녀 장세연.
초면에 겁도 없이 그녀에게 치근덕거리다가 그날부로 '디오니소스'에서 제명된 철부지 회원의 사례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녀 앞에서는 몸을 사렸다.
다만, 평소보다 주량이 과한 장세연의 낯선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훔쳐볼 뿐이다.
장세연이 술이 고파질 때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자신이 상당 금액의 돈을 투자한, 친구의 술집이라는 것과 여기선 남들의 간섭 없이 편하게 술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재벌 후계자들이 들락거리는 최고급 바도 있지만, 같은 계층이라 생각해서인지 몇몇 망나니 자식들이 시시때때로 다가와 귀찮게 굴곤 했었다.
"한 잔 더 줘."
탁!
바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박우석은 더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만하지. 벌써 한 병을 다 비웠어. 그러다 너 몸 상해."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니?"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바의 지분을 60%나 가진 투자자이자 최고 매상을 올려주는 단골이신데. 게다가…."
"아, 됐어. 더 듣기도 싫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 평소보다 아주 많이 마시기는 했지.
근데도 취하지 않는다.
낮에 구조조정본부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손에 쥐어질 듯 눈에 선하다.
- 계집이라서.
배다른 동생의 조롱이 귓가에 다시금 들려온다.
꽉!
그 생각을 하니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분했다!
그 말에 제대로 반격을 해야 했는데.
자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라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버렸다.
- 출가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될 너한테 그룹을 물려줄 생각은 없다.
죽은 장남과 차남을 지지했던 임원들을 모은다는 소식에 며칠 전 자신을 불러다 놓고 아버지, 장철구 회장이 한 말이다.
"……."
데릴사위를 들여 나중에 태어날 아이에게 장씨 성을 붙이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했지만, 자신의 뒤는 남자가 이어야 한다며 장철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고 20년간 인연을 끊고 살다시피 한 녀석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시다니.'
아직 장기우를 후계자로 정했다는 장철구의 공표는 없었다.
이 때문에 그룹 임원들은 차기 회장이 누가 될지 몰라 자신과 장기우를 두고 저울질 중이다.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엎어져 버렸다.
후계자 발표야….
입사한 지 겨우 반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 좀 더 시간을 두려는 생각이시겠지.
사실, 장세연도 처음부터 그룹에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5년 전, 두 오빠가 해외 출장 도중 교통사고로 죽지만 알았어도 자신은 여느 재벌가 여식처럼 정해진 인생 루트를 탔을 거다.
하지만 그날의 사고로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애지중지하던 두 아들의 죽음에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아버지, 장철구는 자식들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갓 스물이 된 장기우를 데려와 동생이라며 장세연에게 소개했었고.
그날, 장기우는 장철구의 호적에 올랐다.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동생이 갑자기 생겨버린 것이다.
- 네가 아들이었어야 했어. 네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가끔 제정신을 차리는 어머니는 그때마다 장세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장기우에 대해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는데도….
오빠들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어머니는 이미 아셨던 것 같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 일생을 부모와 형제로부터 귀염받는 막내로 살아왔었다.
그런 장세연에게 어머니의 한 맺힌 말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로 장세연은 전의 밝았던 모습과는 달리 180도로 돌변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장기우를 증오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
"정말 안 줄 거야? 한 잔만 더 할게. 딱 한 잔만."
"안 돼."
장세연이 아무리 사정해도 박우석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갈래."
카드를 꺼내 술값을 계산한 장세연은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박우석은 서빙하던 직원에게 손짓해 얼른 대리기사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휘청-
의자에서 내려서는 장세연의 몸이 흔들린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박우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장세연은 다시 몸을 바로 세우며 괜찮다는 듯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 마스터."
"…그래, 조심히 들어가."
여전히 좌우로 비틀대는 장세연의 모습에 불안하기만 하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부축이라도 할라치면 그녀가 몹시 화를 낼 걸 알기에 박우석은 걱정어린 눈으로만 장세연을 배웅했다.
* * *
탁-
강하민이 조수석 문을 닫았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건물 앞에 강하민을 내려준 현시운은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지하 입구로 들어서는 차 뒤꽁무니를 쫓던 강하민은 이내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디오니소스' 입구에 도착한 강하민은 자동문의 열림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근데 그 순간, 문이 저절로 열리며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
먼저 술 냄새가 강하민의 코끝으로 확 풍겨왔다.
뒤이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미모의 여인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강하민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후우-"
연신 달뜬 숨을 내쉬며 여인은 강하민의 옆을 비틀대며 지나갔다.
"어?!"
그러다 제 발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여인의 몸이 확 앞으로 기울었다.
그대로 놔두면 얼굴이나 머리를 다칠 판.
강하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여인의 팔을 낚아챘다.
"아…. 고마워요."
넘어질 뻔한 걸 도와준 강하민에게 여인은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팔을 놓는 강하민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 보였다.
강하민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많이 취한 듯 벽에 몸을 기대던 여인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강하민은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 지켜봤다.
"장세연…."
오늘 처음으로 실물을 본 거지만, 절대 잊지 못할 얼굴이다.
* * *
남들의 이목이 신경 쓰인 현시운과 강하민은 '디오니소스'의 룸을 하나 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별도의 요금이 더 청구되지만, 이미 적은 돈에 연연하지 않는 둘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그날 일은 말이죠."
강하민이 봤다는 편의점 앞에서 서로 만났었던 얘기를 시작으로 시운은 장기우와의 기나긴 악연 중 일부를 털어놓았다.
회귀 전 이야기까지 하면 아마도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이번 생에 있었던 일에 한정하여 시운을 시간순으로 설명했다.
대학교에서 쫓겨난 일과 작년 아파트에 든 강도 사건까지.
모든 걸 들은 강하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작년의 강도 사건이 장기우라는, 그 장철구 회장 아들이 시킨 일이라고?"
"물증은 없지만요."
있다 해도 예전에 이미 다 없애버렸겠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강하민은 타는 속을 술로 달랬다.
탁.
잔을 내려놓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확인처럼 물었다.
"이유는? 그렇게 괴롭히는 데에 뭔가 이유라도 있을 것 아냐?"
"…저도 모릅니다."
"물어는 봤어?"
"후후. 물어봤자 대답해줄 놈이 아니에요, 장기우는."
시운은 손에 든 술잔을 빙글 돌렸다.
소용돌이치는 호박빛 물결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요."
장기우와의 사이에 베를린 장벽보다 더 두터운 벽이 쳐진 지 오래다.
강하민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알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긴 할 거야. 그 집안의 사람들이 원래 좀 음흉한 구석이 많아."
"네?"
술잔을 입에 가져다대던 시운은 강하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장강 오너 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뉘앙스다.
"장강 그룹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봐요?"
시운은 의문을 그대로 표출했고, 강하민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만약 5년 전 죽었다는 장철구 회장의 두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후계자 싸움으로 그 집안 난리였을 걸. 당장 장철구 회장만 해도 세 명의 형제들을 몰아내고 지금 그 자리에 올랐잖아."
모략과 암투가 판을 친 왕좌의 게임.
그야말로 아비규환과도 같은 혈전을 치른 끝에 장철구가 권좌를 손에 넣었다는 강하민의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가득 채웠던 술잔을 다시 깨끗이 비워낸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왜 사명이 장강인 줄 알아?"
"…글쎄요."
오너 가의 성이 장 씨이니 그런 게 아닐까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장강이란 사명에 특별한 의미나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장강 그룹의 초대회장인 장만영에 대해서 너도 조금은 알지?"
"그죠. 꽤 유명하니까요."
사망한 지 20년도 지났지만, 아직도 포털 사이트에 장강 그룹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장만영 명예회장이 뜬다.
전후 피폐해진 땅에 도로와 다리를 놓고 아파트를 올린 1세대 경영인으로 20년 전엔 그의 일대기로 드라마까지 제작된 적이 있었다.
"장강 그룹의 모태가 된 게 장강건설이지. 전쟁으로 파괴된 교량과 도로를 복구하는 사업에 뛰어들면서 사세를 확장한 건 너무나도 유명한 얘기고."
"……."
시운은 술을 조금씩 나눠 마시며 강하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사람들이 그건 잘 모르던 것 같더라."
"뭘요?"
"…원래 장강건설의 사장은 장만영 회장 혼자가 아니었어."
"……?!"
"공동 대표 체제였어. 장강건설은."
시운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시운이 따라준 술을 반쯤 마신 강하민은 이어서 말을 했다.
"장만영 회장과 같은 고향 친구이자 6.25 전쟁터를 함께 누볐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같이 건설회사를 설립한 사람."
"……."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운을 바라보며 강하민은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이름은 강지벽."
말을 잇는 강하민의 표정이 무척 씁쓸해 보였다.
"…내 할아버지야."
"?!"
시운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