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술이나 한 잔 할까요?
불화수소.
플루오린화수소로도 불리는 독성이 강한 부식성 기체.
에칭가스로도 불리는 고순도의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 중 식각과 세정에 사용되는 소재다.
현재 우송은 일본에서 액화 불화수소인 불산을 수입해 고순도의 에칭가스로 가공해 국내의 반도체 재조업체로 납품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현시운의 얼굴에 강하민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에칭가스라는 게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건 알겠는데…, 대부분은 일본에서 직수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삼정전자나 SC하이퍼닉스,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인 두 곳 모두 말이죠."
강하민의 지적은 타당했다.
전 세계 수요량의 90%를 일본 업체들이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다.
가격도 저렴하여 국내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업체가 일본산을 사용하는 실정이다.
"대표님 말씀도 맞지만, 그건 안정적인 공급망이 유지될 경우의 일입니다."
"그 말은…, 일본에서의 수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요.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으음…."
후쿠시마 농수산물 수입 규제에서 시작된 한일 간의 갈등은 작년 대법원에서 내린, 일제강제징용 배상판결 이후로 최고조에 달했다.
거기에 지난 12월 동해상에서 일어났던 일본 초계기 사건.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회귀 전의 기억으로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걱정될 정도였다.
웹 상에서 한동안 이에 대해 서로의 국가를 비난하는 설전이 벌어졌었다.
지금도 일본의 한국대사관 앞에는 연일 일본 우익단체들이 몰려와 집회를 빙자한 항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양국의 무역활동은 지금까지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건 좀 실현가능성이 낮을 거로 보이는데…."
강하민은 결재판을 덮어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현 부장도 알겠지만, 일본의 대한 무역은 흑자입니다. 반면 대일 무역은 적자죠. 뻔히 흑자를 보는 나라에 수출을 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않는 추측입니다."
강하민의 논리적인 반박에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무척 상식적이기도 하고.
그러나 앞으로 몇 달 내에 일어날 일들은 일반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다.
"아무리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세계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 나라마다의 정치적인 성향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일본은 그 정도가 심하죠."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 행위라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저질러버린다.
지금 일본을 장악한 내각은 그랬다.
최장기 집권당에 최장수 총리.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말을 잘 보여주는 표본이다.
"정치적인 성향이라…."
시운이 한 말을 되뇌며 강하민은 다시금 생각해본다.
분명 각 나라마다의 정치, 문화, 종교 등의 영향으로 무역 환경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일례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자마자 중국이 행한 경제보복 조치를 들 수 있겠지.
'그래도 미국과 더불어 오랜 우방 국가였는데….'
만약 상대 국가가 일본이 아닌 북한이었으면?
시운의 의견에 아무 의심없이 동의했을 거다.
'아니…, 나도 모르게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건가? 오늘이 맑았다고 내일도 맑으란 법은 없잖아.'
한일수교 후 50년 이상의 경제 교류로 자신이 안이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강하민은 의심해본다.
그 점을 제하고 보면, 시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여전히 흑자인 국가를 상대로 수출을 중단하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기는 하지만.
"삼정전자나 SC하이퍼닉스에서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일본에서 수입해야만 하는 필수 소재의 비축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진성전자가 있지 않습니까. 대비해야죠."
"현 부장의 우려처럼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럼 이 불화수소만 확보한다고 끝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소재도 있던데. 그, 뭐더라? 포토…, 뭐라고 했던가?"
"포토레지스트 말입니까?"
"음, 그래요. 그 소재도 일본에 꽤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현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들이며,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 대부분을 차지한 분야다.
추후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을 향해 경제 제재의 수단으로 꺼내들 만큼.
'물론 그들의 예상이 빗나가게 되지만.'
시운은 회귀 전 이미 겪었던 한일 간의 무역 분쟁 흐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살며시 웃음지었다.
"에칭가스와 포토레지스트 모두 2년치 재고량을 항시 유지해 달라고 진성전자에 일러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비할 수 있습니다."
"2년치 재고라…."
시운의 추측처럼 일본에서의 수입 길이 막히더라도 그만한 시간이면 대안을 세우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계획서에도 기재한 사항이지만, 이 우송이란 회사는 7년 전 이미 초고순도 불화수소 제조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일본산보다 더 뛰어난 품질의 불화수소를 말입니다. 시설 투자 비용이 없어 지금처럼 현상 유지만 하고 있을 뿐이지만요."
"여기에 우리가 투자를 한다면…."
"길어도 반 년. 그 안에 에칭가스의 국산화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회귀 전 우송은 무역 분쟁 발발 직후, 삼정에 인수되어 초고순도 불화수소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반년 후, 국산화에 성공하여 향후 국내 반도체 기업의 수요량을 모두 커버하게 된다.
에칭가스에서만은 완전한 탈 일본화를 실천한 것이다.
십수 년은 걸려야 기술개발이 가능할 거라는 일본 전문가들의 예측을 보기좋게 뭉개버린 쾌거였다.
시운은 그걸 미래투자신탁의 손으로 실현하려 한다.
진성전자에 안정적인 재료 공급을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으음…. 그게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공급망 이슈와 상관없이 일본산에 의존하던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수요량까지 가져올 수도 있겠군요."
"그렇게 되게 만들 겁니다."
시운의 말대로만 된다면.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
강하민은 결재란에 사인을 시원하게 그렸다.
"아, 그리고 대표님."
"네?"
결재판을 덮은 강하민은 시운을 쳐다봤다.
"해외에 투자법인을 하나 만들어볼까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외? 미래투자신탁에서 해외지사를 만드는 건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은데…."
"아뇨, 그런 말이 아닙니다."
"?"
"이곳과는 상관없는, 독립된 해외 투자법인을 만들고 싶습니다."
"……."
삼정의 일로, 또한 장기우와의 만남으로 시운은 느꼈다.
국내에서는 재벌들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걸.
해서 그들의 눈이 잘 닿지않고 영향력이 비교적 덜한 해외로 눈을 돌려볼 참이다.
"혹시…."
시운의 돌발발언에 강하민은 며칠 전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예전에 재벌을 손에 넣고 흔들 수 있는 방법을 묻던 시운의 모습과 함께.
"너 장강 그룹과 뭔 일이라도 있는 거야?"
강하민의 말에 살짝 놀랐지만, 시운은 티를 내지 않고 옅게 웃으며 되물었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며칠 전에 봤거든. 너랑 장강 그룹 장 회장 아들이 1층 편의점 앞에서 이야기 나누는 걸. 별로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던데?"
시운은 대답을 회피한 채 결재가 완료된 결재판을 챙겨들었다.
"오늘 퇴근하고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시운의 제안에 강하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장기우와의 악연을 그에게도 털어놓을 때가 온 것 같다.
물론 시운 못지않게 강하민도 할 말이 많았다.
* * *
- …미안합니다, 장 부사장.
"……."
상대방의 사죄에 장세연은 굳은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벌써 열 명째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했던 임원들 중 요 며칠 사이 열 명이나 입장을 바꿔버렸다.
특히나 방금 통화를 한 사람은 장강건설의 임원우 사장.
예전부터 큰오빠를 열렬히 지지했던 이였다.
"장기우, 이 개자식이!"
그들이 왜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는지, 이유는 알아냈다.
구조조정본부 산하에 있는 그룹 감사팀.
장기우는 감사팀을 움직여 장세연이 포섭한 임원들의 개인적인 비리를 캐며 그들을 압박했다.
적게는 30년, 많게는 40년 이상을 회사에 몸담았던 이들이다.
회사 비용을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든지, 거래처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는 등 크고작은 잘못들은 으레 있어왔다.
하지만 오너는 그들의 그런 작은 잘못을 들춰내지 않는다.
다만, 알고있다는 것만 그들에게 주지시켜 자신의 말을 잘 듣게 할 뿐.
암묵적으로 서로 쉬쉬하며 넘겼던 그 치부를 들춰낸 자신의 배다른 동생.
녀석은 그걸 무기로 장세연의 손발을 쳐내버리고 있었다.
쾅!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선 장세연은 그 길로 장강유통 사옥을 나와 그룹 본사로 향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난폭한 운전으로 도로를 달렸다.
근처의 차들이 크게 놀라며 외마디 욕설을 내뱉지만, 곧 수억을 호가하는 장세연의 차를 보곤 기가 죽은 듯 옆으로 뒤로 비켜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장강 그룹 본사.
그녀는 차를 아무렇게나 주차해놓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을 향했다.
띵-
13층에서 내린 장세연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직원들을 휑하니 지나 본부장실 앞에 도착했다.
"……."
이를 악문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아돌리며 거칠게 밀쳤다.
"?!"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장세연에 본부장실 전속 비서실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장세연 부사장님…. 여긴 어쩐 일로 오신…?"
"안에 있나요?"
평소 얼음미녀로 불리는 장세연이다.
근데 오늘은 그 차가워보이던 얼굴에 열기가 가득 차올랐다.
"안에 있냐고 물었어요."
서슬퍼런 그녀의 되물음에 비서실 직원은 저도 모르게 쭈뼛대며 대답했다.
"네, 안에 계십니다만…."
확인을 받자마자 장세연은 세찬 걸음으로 내실의 문을 향해 갔다.
그에 화들짝 놀란 직원이 뒤늦게 그녀를 만류하려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는 장기우의 모습이 비쳤다.
"……."
돌발 상황에 그는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방문자를 바라본다.
"죄,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장 부사장님께서 막무가내로…."
"괜찮으니 그만 나가보세요."
"네, 네!"
서둘러 비서실 직원이 문을 닫으며 나갔다.
"……."
장세연은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장기우에게 시종일관 매서운 시선을 겨눴다.
그에 장기우도 그녀를 잠시 마주보더니 응접용 소파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할말이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여기에라도 앉아서…."
"뭐하자는 거야."
"…뭐가 말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장기우의 대꾸에 장세연은 이를 아득 물었다.
"화학의 한도경 상무, 박세문 전무."
"……."
"유통의 김인권 전무, 조선의 강한성 부사장, 건설의 임원우 사장. 왜? 아직도 뭘 말하는지 모르겠니? 더 말해줘?"
"흐음…. 그분들이야 응당 감사팀에서 할일을 한 것 뿐입니다. 다들 잘못을 뉘우쳐서 적당히 감봉으로 끝났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장기우는 장세연의 말을 막듯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지금 너무 흥분하셔서 잊어셨나본데, 여긴 회사입니다. 본분을 지켜주시죠. 장세연 부사장님."
장세연은 기가 찼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던 녀석이 이젠 회사 주인 행세다.
"감히…, 혼외자 주제에. 서자 따위가!"
"……."
그녀의 악담에도 장기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점점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재밌다는 듯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다행이죠."
'뭐?"
"서자라도 아들이니까."
"……."
즐겁다는 듯 웃는 장기우.
장세연은 그의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조롱을 느꼈다.
"정실의 소생이라도 누님은 참 안 됐습니다."
동정의 빛을 가득 담은 채 장기우는 다음 말을 이었다.
"계집이라서."
"뭐…?! 너, 너어!!"
"아,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장기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쳐죽일 듯 노려보는 장세연을 놀리듯 작게 손을 흔들었다.
"전 약속이 있어서 그만. 나중에 집에서 봐요, 누님."
"너, 거기서!"
장세연의 외침을 무시하며 문을 향해 걸어가던 장기우는 막 알아챘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는 사족을 달았다.
"참! 집을 나가셨지? 후후. 나중에 다시 봅시다. 장세연 부사장님."
장기우의 놀림에 장세연은 너무 화가 나서 말문마저 막혀버렸다.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쥔 그녀는 말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탁-
문을 닫고 나온 장기우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무표정했다.
"저기…."
그의 시선은 조금 전 장세연을 막지 못했던 직원을 향했다.
"네, 네! 본부장님."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장기우는 직원의 저자세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바탕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마음을 졸이던 직원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 아아아악!!
"?!"
내실에서 들려온, 악에 받친 외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