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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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셰일석유에 대한 대비까지 마치자 규태는 정말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에 진력을 다했다.
그렇게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전 생에도 뼈저리게 느꼈지만 아이들은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게 부자던 가난한 이든.
세계를 장막에서 주무르는 규태라도 마찬가지, 그저 바라는 것은 건강하고 탈 없이 자라주기를 바랄뿐이었다.
덤으로 아이들과 어린 시절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갖는 것이 규태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규태의 바람 때문인지 큰 아들 에단과 둘째 리즈는 큰 문제없이 자라주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제나 어린아이일 것만 같던 큰 아들 에단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났다.
규태였다면 그냥 고등학교 졸업식을 하고 끝이었겠지만 여기는 미국이었다.
규태는 교복을 입고 졸업한 마지막 교복세대였다.
입고 다녔던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뿌리는 우스꽝스런 졸업식 세러머니를 했던 기억이 났다.
머리도 두발자유화 전이라 짧게 짤라야 했었다.
하이스쿨을 졸업하는 것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입학할 대학까지 정해진 마당이라 그런지 날마다 늦은 시간에 귀가했다가 낮이 되면 사라지는 아들을 보며 규태가 쓴웃음을 웃었다.
오늘도 에단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점심을 먹자마자 부리나케 밖으로 사라졌다.
주렁주렁 경호원들이 옆에 버티고 있으니 안전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별 탈 없이 여기까지 자라줬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귀엽기만 하던 녀석이 이젠 턱에 수염까지 나니까 조금 징그러워. 요즘도 길거리에서 캐스팅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규태의 자식이란 걸 빼고도 에단은 고등학교시절 아주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학생이었다.
누가 봐도 눈이 부실정도로 잘생겼다.
방학 때 한국의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길거리에서 받은 명함만 해도 한통이 넘을 것이었다.
당연히 아들인 에단이 연예인이 되는 건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 일 정도였다.
한국말까지 잘하니 끈질긴 스카우터들은 한국 집에까지 연락을 한 모양이지만 에단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고는 그제야 포기했다.
잘못했다가는 그들이 다니는 회사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사안이었다.
“많은 학교 중에 스탠포드를 택해서 정말 다행이라니까요. 혹시 MIT라도 선택하면 정말 서운할 뻔했어요.”
에단은 전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스탠포드로 진학을 결정했다.
아들의 선택이 자랑스럽기는 엄마인 캐서린도 마찬가지.
아니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아들이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만했다.
수많은 동부의 유명대학의 합격통지서를 다 무시하고 선택한 게 스탠포드였다.
엄마가 다녔던 학교라는 이유에서였다.
겉으로는.
사실은 이미 규태가 소유하는 기업의 주류학맥이 스탠포드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기업인 야후가 실리콘 벨리에서 출발한 기업답게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하면 제일 입사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야후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하는 회사를 물려받겠다는 욕심이 강한 에단이 어설픈 선택을 할 리가 없었다.
하여간 에단은 어린 시절부터 유별난 아이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거실에 앉아서 가족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던 캐서린이 규태를 긁었다.
“에단이야 인기가 너무 좋아서 문제지, 당신하고 다르게 말이야. 고등학교 때 여자친구하나 없었다면서?”
아내의 말에 규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건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고등학교 때 인기가 좋았다고. 한국은 여기랑 다르게 하이스쿨이 남녀공학이 아니라 남자들만 다니는 곳이라 그렇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말이야 사귀던 여학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아니 당신 동생 말에 따르면 그게 아니던데.”
“누구? 미려? 그 계집애가 내 학교생활을 얼마나 안다고? 고등학교 때에는 얼굴한번 보기도 힘들였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
규태의 말에 딸내미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빠 정말이야? 정말 할머니가 나한테 말한 건 다르던데? 아빠 고등학교 때는 공부만 했다던데, 여학생한테 인기가 없어서.”
“끄응, 엄마는 애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거짓을 퍼트린 범인은 규태의 모친인 남여사였다. 한동안 모녀에게 둘러싸인 규태가 고군분투를 했지만 어김없이 침몰.
한참동안 남편을 놀리던 캐서린이 힐끔 신문에 난 아들의 사진을 보았다. 잘생긴 아들 에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젠 엠바고가 풀렸나보지?”
“할 수 없잖아. 그동안도 압박이 심했다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풀어준다고 약속을 했었으니까.”
규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신경 쓴 부분이 자신의 아이들이 누구인지를 언론에 보도되진 않게 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사생활 따위 닥치고 무시해버리는 미국이라지만 규탠ㄴ 수많은 신문과 방송을 소유한 대부호였다.
그래서 언론과 타협한 것이 고등학생 때까지는 보도를 하지 않는다 였다.
이를 어긴 언론이 나오면 유능한 변호사 군단이 달려들어 아주 혹독한 금융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에 잘 지켜졌다.
큰아들인 에단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엠바고가 풀리게 되었고 아주 요즘에는 심심하면 한 번씩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는 뉴스가 에단에 대한 것이었다.
크게 알고 싶지 않은 에단의 여자 친구의 얼굴까지도 자연스럽게 알 정도였다.
아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실린 신문을 보며 규태가 머리를 흔들었다.
잊고 있던 예전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중학교 다닐 때였나?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온 에단이 나한테 그랬었지? 아빠 난 정략결혼 같은 거 안 시켜?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에단의 학교친구녀석 두 놈이 정략결혼을 하게 됐었나? 그랬을 걸 아마.”
사회가 많이 변했지만 가문의 의사에 따라 결혼상태가 정해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에단이 다니던 학교도 상류층이 모인 학교라 그런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래서 당신 뭐라고 했는데?”
“미안하다. 아빠가 너 정략결혼 시킬 정도로 가난하지가 않다 그랬지 뭐.”
정략결혼이란 게 보험의 의미가 강한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를 대비한 보험.
굳이 규태가 아이들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빠 멋쟁이.”
리즈가 이야기를 듣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딸에게는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빠 말에 좋아하는거 보니까. 수상한데? 너 남자친구 생겼니? 아빠가 하는 말이 뭐가 멋있어?”
“아니, 그게 내가 학교에서 마음이 가는 남자애가 하나있거든.”
“어머 어머 그게 누구니?”
딸아이가 잘난 오빠를 보고 자라서인지 어지간한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캐서린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그게 말이야......”
“빨리, 엄마 궁금하단 말이야.”
잠시 쭈뼛거리던 리즈가 채근하는 엄마의 재촉에 어쩔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딸아이와 엄마는 시시콜콜 안하는 말이 없었다.
아들까지 있었으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고를 했을 것이었다.
규태는 가만히 모녀간에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럴 때는 입 꾹 다물고 귀를 쫑긋 세워서 딸이 하는 말을 듣게 좋았다.
이럴 타이밍에 아빠가 나서봐야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어떤 괘씸한 놈이 사랑하는 딸내미의 마음을 훔쳤나
안보는척하지만 아빠인 규태의 눈동자가 어디에 쏠리는지를 직감으로 알아차린 모녀가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밖에서는 천재적인 투자자이자 IT 산업의 상징인 규태지만 두 모녀에게는 골려주기 딱 좋은 딸 바보였다.
잠시 귀엣말을 소곤거리던 캐서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어! 그 남자애랑 키스를 했다고?”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작아지자 귀를 쫑긋 세우며 하나라도 들으려 애쓰던 규태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세게 일어났는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큰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놀란 모녀의 시선이 규태에게로 향했다.
“누구냐! 그 너랑 키스한 못된 놈이. 당장 내가 샷건으로 머리통을.....“
생각보다 과한 규태의 반응에 두 모녀가 잠시 놀랐다가 깔깔 거렸다.
“누구냐니까! 웃지만 말고 빨리 말해! 제임스, 엘리엇! 누구야!”
규태가 말한 이름은 하나같이 딸아이의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남자애들의 이름이었다.
펄펄 뛰는 규태를 보며 두 모녀가 눈물이 날만큼 큰소리로 깔깔 대며 웃었다.
“아빠, 오늘도 당했다면서요.”
저녁에 돌아온 아들 녀석이 아빠를 놀렸다.
“끄응, 나도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구나.”
이건 한국이 좋아, 결혼을 위해 장인을 찾아갔을 때 기껏해야 빗자루로 맞는 것으로 끝나는데 여긴 사건이란 위험한 물건이 굴러다닌다.
규태도 장인을 처음 만났을 때 장인의 시선이 자꾸 벽에 매달아 놓은 사냥용 총으로 향하는 것을 보곤 가슴이 서늘했었다.
“나도 이야기를 듣고는 기분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인데요. 참아야죠.”
에단도 규태와 마찬가지로 나이차이가 있는 여동생 리즈를 참 예뻐했다.
“그래, 너까지 있었으면 부자가 쌍으로 놀릴 거리가 될 뻔했다.”
딸아이의 키스이야기를 하니까 머리가 하얗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 규태였다.
때가 되면 당연히 하는 거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로만 여겼던 딸이 이젠 성숙해 가는걸 느끼기 때문일까.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집에서 다니는 게 좋더라고요. 밖은....“
“그래 이불 밖은 위험하다. 그나마 동부보다는 서부가 낫지.”
경호팀이 처리를 해서 그렇지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눈에는 로또처럼 비춰졌다.
제아무리 방비를 잘해도 도둑놈을 이길 수는 없다. 어딘가에는 구멍이 있기 마련이다.
동부에 비하면 LA와 샌프란시스코에 더 잘 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에단은 외모와 다르게 집구석을 좋아하는 너드였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전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컴퓨터 만지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수학문제 푸는걸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여기던 아이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만든 투자프로그램을 규태에게 팔아먹기도 했으니 머리가 좋은 건 당연지사였다.
“아빠 이젠 저도 컸으니까 솔직히 말해주세요.”
“뭘 솔직히 말해?”
찔리는 게 많은 규태가 화들짝 아들의 말에 놀랐다.
회귀한 다음 그동안 무수하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들의 말에 당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아들의 검푸른 눈을 바라보자니 입이 바싹 바싹 말랐다.
혹시 이자식이 내가 회귀한 걸 눈치 챈 게 아닐까?
“뭐가 뭐에요! 아빠가 만든 투자프로그램이죠. 내가 만든 투자프로그램은 수익률은 높지만 너무 위험하더라고요. 아빠가 만든 프로그램이 어떤 건지 몰라도 역산으로 돌려보니까 수익률이 터무니없었어요.”
규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긴 아들 에단도 규태가 회귀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빠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멀뚱하게 바라볼 것이었다.
언젠가 술에 취했을 때 캐서린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가 한참동안 놀림거리가 되었었다.
그 다음부터는 규태도 삐져서 그 이야기는 입에도 담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