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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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 브라더스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걸 보면 세월이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걸 느낄 수 있듯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의 시간도 정신없이 지나간다.
처음 만났을 땐 중년에서 노년으로 막 접어드는 초로의 사내였던 레온 회장도 이젠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를 먹어서 인지 활력에 예전만 못했다.
허옇게 변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르고 월가사람들 특유의 값비싼 정장을 입은 옷차림은 변하지 않았지만 얼굴을 덮은 주름은 깊이를 더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가 석달 전이었으니까 시간이 흐르긴 흘렀군요. 요즘은 최대한 바쁜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중입니다. 후계자들도 키우고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후계문제에선 회장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리만의 경영에는 간섭할 마음이 없으니까요.”
“그 점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규태가 경영권을 장악하고 리만 브라더스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다른 월가의 투자은행들도 지난 시간동안 덩치가 커졌지만 리만은 이미 세계에서도 제일 손꼽히는 투자은행이었다.
회사를 인수한 이후 세계에서 10번째 안에 간신히 들던 리만은 이젠 당당하게 1위의 투자은행으로 거듭났다. 자체적인 자산규모가 해도 1조가 넘었고 투자운영금액은 2조 4천억을 돌파했다.
“지금까지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리만을 세계제일의 투자은행으로 키워냈으니 말입니다.”
규태가 투자한 회사들의 최대장점은 대주주가 되었어도 유능한 경영진에게 경영을 맡기고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회사의 주가가 하락해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하게 경영진을 밀어주었다.
단기경영성과 집중하는 미국식 경영에선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레온이 리만브라더스를 자신의 뜻대로 바꾸어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은퇴를 코앞에 두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냈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은퇴하실 생각입니까? 리처드도 은퇴했다고 낚시나 다니다가 다시 불려 나오지 않았습니까.”
리만의 회장 레온보다 연준의장자리에 앉은 리처드 그래이엄의 나이가 일곱 살 더 많았다.
레온이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는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전화해서 괜히 맡았다고 투덜거리더군요. 예전처럼 머리도 잘 굴러가지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바이든이 사흘밤낮을 쫒아 다녔답니다. 자리를 맡아달라고요.”
대통령만큼이나 바쁜 사람이 국무장관이다. 분초단위로 스케줄을 잡는다는 미 국무장관이 매달려 애걸하는 것을 마냥 무시하기 힘들였으리라.
“두 사람이 친구라지요?”
“나이 차이는 조금 나지만 친한건 사실입니다.”
“두 사람이 크게 접점이 없을 텐데 이상하군요.”
“바이든이 초년시절부터 정계에 나서서 개인적으로 불행한 이도 겪고 조금 고생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후원을 해왔다고 하더군요.”
젊은 시절 아내와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불행한 바이든의 가정사는 나중에 유명해지지만 이때만 해도 친한 사람들이 아니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리처드는 발도 넓어요.”
“젊은 시절부터 여기저기 안 걸친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워낙 좋은데다가 유능하다고 알려졌으니까요. 가문의 후광도 있고요.”
두 사람은 한참동안 연준의장자리에 올라서 박박 구를 리처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처드가 의장자리에 오르면 어디부터 칠까요?”
7개의 지역은행 총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연준의 주요한 업무를 도맡는다. 그중 핵심중의 핵심은 뉴욕지역은행의 총재자리였다.
이사자리와 함께 연준의 실질적적인 일처리를 도맡아 처리하는 자리다. 이 자리만큼은 한 번도 모건가가 외부인에게 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
“뉴욕은행총재자리겟죠. 대통령까지 합세해서 어떻게 하든 괴롭혀서 자리에서 떨구어낼 겁니다.”
모건가는 리처드를 단순하게 지나쳐가는 인물정도로 가볍게 여겨 자리를 내주었지만 천만의 말씀.
리처드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칼을 꺼내 목을 겨눌 인물이 가이트너 뉴욕연방은행총재였다. 재무부에서 일하다가 2,003년부터 연준으로 자리를 옮긴 가이트너는 리처드와 악연이었다.
가이트너를 재무부 국제금융국장자리에서 쫒아낸 당사자가 리처드였다.
역사대로라면 순조롭게 6년간 연준 뉴욕은행총재자리를 연임하며 재무장관자리까지 오르는 가이트너지만 리처드를 만나서 인생이 꼬였다.
재무부에서도 쫓겨나더니 이젠 자리 잡고 있던 연준에서도 밀려나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자업자득.
리처드가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가이트너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것은 포트녹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방의 금보관소가 있는 켄터키 주 루이빌에 위치한 불리언금고 탓이었다.
한 번도 연준은 이걸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었다.
얼마나 극도의 비밀을 유지했는가하면 최고책임자인 연준의장조차도 금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부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포트녹스의 금보관소에 보관된 금이 없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고 나중에는 일부 사실로 밝혀졌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8천 톤의 미국의 금보관량 상당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희대의 스캔들이 밝혀진 것은 앞으로도 반세기가 지난다음이었다.
“아마도 반항이 거셀 겁니다. 절대로 포트녹스의 금보관소를 건드릴 수 없는 확실한 보장을 받은 후에야 뉴욕은행총재자리를 넘겨줄 겁니다.”
“리처드가 초반에 자리를 잡으려면 고생을 많이 하겠네요.”
포트녹스의 문제는 아직은 터트릴 시기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리처드라 할지라도 포트녹스를 건드리는 순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지금이야 이런 눈치 저런 눈치를 보느라 자제하는 중이지만 구석으로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겠죠.”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이미 여러 번 겪지 않았습니까. 리처드는 이미 여러 겹의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규태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니컬해서인지 레온이 조금 놀랐다.
어둠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세상을 움직이고 싶어 하는 미친놈들은 한둘이 아니다. 아니 이득이 당장 눈앞에 보이면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어있다.
규태가 대충이나마 아는 어둠의 조직들만 해도 백여 개가 넘는다.
이름조차도 만들어지지 않은 조직들이 마피아에서부터 정계에까지 연결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연준의 경영권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 문제는 이중에서도 엄청난 이권이 달린 일이었다.
그걸 뒤집으려면 엄청난 피가 흐를게 자명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규태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레온을 만나고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리만의 투자방향을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투자방향이요?”
“이걸 경영간섭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대주주로서의 권고입니다. 권고!”
규태가 말로는 권고라고 하지만 이걸 지키지 않고 손해를 입으면 경영자인 레온이 고스란히 책임져야 했다.
“말씀하시죠. 듣겠습니다.”
“앞으로 리만은 내년 말까지 모기지론에는 투자 비중을 낮추고 단순 중개업무만 하세요. 취급하는 금융상품에서도 비중도 제로까지 축소하고요.”
규태의 말에 듣고 있던 레온이 이마를 찌푸렸다.
“ 내년 연말까지 그런 식으로 자산을 운용하면 내부적으로 반발이 심할 겁니다. MBS와 CDO의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유롭게 투자를 하게 두는데 우리만 막으면 퇴사하는 직원들의 숫자도 많을 테고요. 그렇게 되면 애써 뽑은 인재들이 상당수 외부로 유출될 겁니다.”
레온이 난색을 표하자 규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는 타이거펀드나 야후에 비해 리몬브라더스는 외부의 눈치를 봐야한다.
규태의 뜻대로 리만을 이끌고 가려면 제일 먼저 레온을 설득해야했다.
“리만 브라더스가 지금까지 모기지론과 파생하는 금융상품에 투자한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
“아마 채권투자의 절반정도가 될 겁니다. 항상 그 정도 비중을 유지했으니까요.”
회장이라고 투자부분을 속속들이 아는 게 아니다.
“리만의 전체 투자비중 65%가 모기지론과 파생상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야........”
“돌아가셔서 확인해보세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여러 가지로 겉모습을 바꾸어서 투자한 금액이 상당할겁니다.”
당장의 수익보다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을 우선하게 여기는 레온회장이 규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규태의 말은 리만의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무력화되었다는 소리였다.
어떤 투자부분이던지 절대적으로 전체 투자금액의 절반이상은 보유할 수 없도록 강력한 규제 법안을 만든 사람이 레온회장이었다.
“그건 회사내규상으로 불가능합니다. 내부적으로 전체자산의 절반이상은 한곳에 투자할 수 없도록 막아두었단 말입니다.”
“예외조항도 있지 않습니까? 국채투자 같은 것 말입니다.”
“국채에 투자하는 부분은 당연히 풀어두었지요. 미국채가 부도가 나면 그대로 전 세계가 망하는 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가서 다시한번 내부규정을 확인해 보세요. 프레디맥이나 페니매이가 보증한 모기지론이 어떻게 분류가 되어있는지를요.”
“.........”
“아마 두기관이 보증한 모기지론을 기반으로 발행한 상품들은 전부가 미국채와 동일하게 무위험자산으로 분류가 되어있을 겁니다.”
“두기관은 정부기관이란 말입니다.”
“정말로요? 이미 68년에 민영화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민영화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입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아직까지도 준정부기관으로 인식하는 게 문제였다.
모기지론 보증에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정부가 나설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투자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두기관의 보증 채권은 무위험자산으로 분류했다.
서브프라임이 터진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손실을 본 두기관이 뒤로 나자빠지면서 시작되었다.
안전자산투자로 분류되었던 것이 고스란히 손실로 잡혔으니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넘어가는 게 당연했다.
“두 기관이 위험해지면 행정부와 연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둘이 무너지면 경제공황이 닥칠 겁니다. 절대적으로 정부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도 않을 테고요.”
레온은 쉽게 규태의 말을 믿지 못했다.
불황기를 겪었지만 레온과 같은 노년의 사내들은 2차대전이후로 발전을 거듭하는 미국의 영광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작은 지방은행이 아니라 연방정부가 보증하는 공적 금융기관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레온을 설득하기위해 규태가 자료를 꺼내들었다.
“이걸 한번 보시죠. 지난달 말까지 프레디맥과 페니매이가 보증한 모기지론의 내역입니다.”
“이 자료를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좀처럼 외부로 공표하지 않는 자료들일 텐데요?...... 이게 법적으로 가능합니까? 두기관이 보증한 모기지론의 총금액이 8조 달러를 넘는다고요? “
당연히 가능했다.
주택경기가 살아나면서 모기지론의 보증수요가 급증하자 아예 자본금대비 보증금액제한을 풀어버린 것.
350억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프레디맥의 모기지론 총보증금액이 5조 달러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확인한 레온의 얼굴색이 변할 수밖에.
페니매이도 프레디맥과 비슷한 규모였다.
두기관이 보증한 보증규모가 너무 커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에서도 감당불가였다. 실제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문제가 생긴 이후 추산한 두기관의 손실금액이 5,000억 달러를 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