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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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빈소
한동안 한국을 찾지 않던 규태는 오랜만에 전용기편으로 인천공항에 내려앉았다.
간만의 귀향이기에 밝아야할 얼굴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가시죠,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던 규태의 정신을 수행한 복일모가 깨웠다.
“그래 가야지, 병원은 어디라고 했지?”
“동남병원에 모셨습니다. 가족 분들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캐서린과 에단도 두 시간 후에 도착예정입니다.”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호흡이 힘들어져서 병원에 모신 것이다. 상황이 급하다 길래 LA에서 이모가족들과 어울리던 캐서린과 아들 녀석은 다른 비행기 편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동남병원은 할머니의 나이가 들어가자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규태가 만든 1,500병상의 최신의 병원이었다.
오면서 비행기에서 들은 할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전해들은 규태의 마음은 무겁고 답답했다.
규태가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가자, 마지막 임종은 뵈어야지.”
어린 시절부터 그를 키워주었던 조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뵈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준비된 차를 타고 가는 도중 길가에 코스모스가 환하게 피어있었다.
전생에서도 조모는 이 시기에 코스모스가 필 때 돌아가셨었다.
규태는 꽃을 보면서 할머니의 생각에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머니는요?”
“중환자실에서 이제 막 나오셨는데 아직 정신을 모차리셨다. 이젠 어머니 혼자 힘으로 숨을 쉬는 게 힘들다고 하더구나.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안 된데. 이를 어떻게 하니? 규태야, 이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단다.”
시집을 와서 초반에는 호된 시집살이를 했었지만 모녀처럼 사십년 가까이 함께 산 할머니의 죽음을 어머니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벌써부터 얼굴가득 눈물을 가득 담은 어머니의 말에 규태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 어떻게 하죠. 엄마. 할머니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
규태가 통곡을 하자 어머니가 규태를 달랬다.
“울지 마라! 이제 애 아빠가 된 다 큰 녀석이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하냐. 할머니 웃는 얼굴로 보내드려야지. 그래 캐서린하고 에단은 언제 도착한다니?”
“두 시간 후에요. 할머니가 잘못하면 에단 녀석 얼굴도 못보고 가시면 어떻게 하죠?”
어머니 남여사는 어린아이같은 큰아들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항상 큰아들 규태는 노인네처럼 진중했다. 갑작스럽게 큰돈을 벌어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고 가족들을 잘 건사했다.
미국에 가서는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부자가 되었다지 않나.
동생들도 잘 보살피는 큰 아들 때문에 어깨에 힘을 주고 살았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리는 규태를 어머니가 부드럽게 달랬다.
“규태야 괜찮을 거야. 할머니도 증손주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얼굴을 꼭 보고 돌아가실게다. 잘 버티실 게야.”
어머니가 살살 달래자 규태도 쏟아내는 눈물을 멈추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규태가 물었다.
”아버지는요? “
“병원에 가까운 성당에 가서 기도하신단다. 평생 성당 근처에도 안 가본 양반이......”
“아버지도 갑갑하니까 그러시겠죠. 그런데 갑자기 성당은 왜요?”
“할머니가 얼마 전부터 성당에 등록을 하셨거든.”
모친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뭐든 못해드리겠는가.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됐다. 자신이 믿는 신은 아니더라도 모친의 마지막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가족들과 작은 집 식구들까지 모두 모여서 병원을 채웠다.
이젠 사촌들도 다들 결혼을 해서 미국에 주로 거주하는 규태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작은 아버지가 회사를 서울로 옮기는 바람에 작은 집의 식구들은 모두 서울에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사촌동생 준태도 작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회사 일에 꽤나 바쁜 모양이었다.
“넌 미국에도 가끔 온다면서 왜 그렇게 얼굴보기가 힘이드냐?”
얼굴보기 힘든 사촌동생을 혼냈지만 되돌아온건 타박이었다.
“아이고! 형님 얼굴 뵙기가 쉬운 줄 아쇼? 내가 미국에 가서 형 찾으면 꼭 어디 가서 틀어박혀서 나중에 뉴스에 나옵디다. 태진이형은 얼굴 가끔 보는데 형 얼굴 보는 건 참 힘들어요.”
“그랬냐?”
“게다가 요즘에는 다시 중동 쪽에서 수주가 많아서 그쪽 오가기 바빠요.”
유가가 급등하면서 중동 건설경기가 되살아났다.
한국의 건설업체들은 모두가 중동으로 달려가서 수주를 받으려 애를 썼다.
“너희는 수주가 잘돼냐?”
준태가 빤히 규태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내 얼굴은 왜?”
“형님 이름만 대면 중동에서는 어지간한 공사는 프리패스요. 내가 형님 사촌동생이라면 왕족들도 껌뻑 죽더군요.”
“그래? 내가 중동 쪽에 크게 친한 사람이 없는데?”
중동에서 그나마 친분이 있다면 같이 시티은행에 지분을 투자한 알 왈라드밖에 없었다. 사우디왕자인 알 왈라드는 시티은행과 타임워너에 투자를 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거부지만 정작 본국에선 큰 권한이 없는 평범한 왕자의 하나다.
“작년에 타이거 건설의 중동수주는 210억 달러로 한국에서 두 번째요. 커다란 재벌그룹 소속의 건설사들을 가뿐하게 제쳤다는 말씀이지.”
“타이거 건설이 실질적으로 투자사인 타이거 펀드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한국에선 재벌보다 더 영향력이 크다는 건 왜 쏙 빼고 말하냐.”
어느 사이 규태의 곁으로 온 복일모가 두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나이가 비슷한 두 사람은 꽤 친분이 깊은 듯 나누는 말에 거침이 없었다.
“어허! 복이사, 어딜 감히 우리 타이거 건설에 재벌 따위를 비비는 거야. 우린 그런 족벌 경영 따위는 애초부터 하지도 않는다고.”
“그럼 아저씨가 왜 너를 회사에 입사시킨 건데? 입사하자마자 대리부터 부장까지 주르륵 승진했잖아. 재벌이 아니기는 똑같이 하면서.”
“그거야 이놈이 다 잘난 탓이 아니겠는가. 중동에서 수주한 수주액 절반을 내가 따왔다는 것 아니냐.”
”이익! 그건 네놈이 보스의 사촌동생이란걸 팔고 다니니까 그렇지. 중동에서 보스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 줄 알아? “
이건 규태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내가 중동에서 인기가 높다고?”
“보스 답답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보스가 미국에서 싸우는 세력이 하나같이 유태인들 아닙니까. 알게 모르게 중동 왕가에선 유태인들하고 싸우는 보스의 이야기가 퍼졌다고요. 그러니 아주 환장을 할 밖에요. 중동에 가면 보스는 스탑니다. 스타. 중동왕가에서 보스라고 하면 할리우드의 스타하고도 비교도가 안된다니까요.”
규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법 한 소리였다.
“그래서 이놈이 중동에 가면 자기가 보스의 사촌동생이라고 그렇게 나발을 불고 다닌다니까요.”
“잘했네. 계속 그렇게 해라.”
“예?”
“잘했다고 내 이름을 팔아 사기나 치는 게 아니고 건설물량 수주 했다잖냐? 그게 잘한 거지 뭐냐.”
“아니 그걸 잘했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혼을 내야지.”
“거봐라, 내가 형님이 이럴 거라고 했지?”
기세가 등등한 준태의 꼴이 보기 싫은지 복일모가 픽하고 고개를 돌렸다.
복일모의 생각에는 규태가 준태를 따끔하게 혼내는 그림을 그렸었는지 한동안 삐쳐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촌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의 병실 옆 대기실에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가족들에게 의사가 와서 말했다.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준비를 하시죠.”
혼수상태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던 할머니가 깨어났단 소식에 온 가족이 모두 병실에 모여들었다.
달고있던 호흡기까지 떼어낸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생기가 넘쳐 흘렀다.
“우리 큰손주 오느라 고생했다.”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규태를 보곤 환히 웃는 할머니의 모습에 규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족들 가운데 언제나 할머니는 큰 손주를 챙기셨다.
이렇게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자신을 가장 먼저 챙기는 할머니를 보며 규태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할머니. 할머니.”
“그래 우리 강아지, 내가 가더라도 울지 말거라. 나도 이젠 쉬어야지. 그동안 너 때문에 편하게 지내다 간다. 내가 말년에 복이 있다던 점쟁이 말이 정말 딱 맞았어.”
“할머니! 이러게 가시면 안돼요. 으흐흑”
참았던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다.
할머니는 한동안 구슬프게 우는 규태의 머리를 살이 거의 없어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가 캐서린과 에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단 녀석은 규태가 우는 걸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우리 손자며느리 다른 나라에 시집와서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우리 장증손주, 아비가 우는 모습을 보니까 이상한가 보구나.”
할머니의 말에 캐서린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규태가 에단 앞에서 울 일이 없었으니까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하죠. 그리고 사랑해요. 그랜드맘.”
캐서린이 할머니를 꼭하고 안아주었다. 함께 있던 에단을 잠시 할머니의 품에 안겨드린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도 기다리는 가족들이 많았다,
가족들에게 한마디 이상을 남긴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참동안 긴 이야기를 나누셨다. 말을 하던 할머니의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
마지막 숨을 거둔 할머니를 앞에 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입에서 구슬픈 곡성이 터져 나왔다.
바쁘게 달려온 캐서린과 에단을 보고 환하게 웃은 할머니는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아흔이 넘어 돌아가셨으니 주변에서는 호상이라지만 가족이 죽었는데 좋고 나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멍하니 병원의 빈소에 앉아있던 규태는 슬픔에서 깨어나 빈소로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정말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규태는 한국의 정계와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힘든 사람이다.
97년에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IMF를 막았고 소액펀드를 만들어서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규태의 친조모가 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말 그대로 사람들이 해일처럼 빈소로 몰려들었다.
너무나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오자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병원안 강당에 따로 조문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사흘간의 조문이 끝나고 가족묘지에 할머니를 묻고 나서야 규태는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TV에선 카트리나가 남부를 강타하고 소멸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연방군을 투입해 치안을 잡은 엘 고어의 모습이 비춰졌다.
치안유지를 위해 신속하게 연방군을 투입을 결정한 엘 고어에 대한 인기가 급속하게 올랐다.
그만큼 연방군이 투입되기 전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태풍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의 치안이 불안했다.
살인과 강도,강간같은 강력사건이 끊이지 않았었다.
태풍으로 전력공급 시설이 타격을 입고 정전이 발생한 남부에선 미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