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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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분사
규태의 구상대로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예고되면서 회사가 시끄러워졌다.
야후의 사옥 옆에 건설되던 건물들이 하나 둘 완공되면서 흩어져 있던 규태의 투자회사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 규태는 팔로알토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규태의 골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마크였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야후 홀딩스의 부대표 임명을 철회하라고 징징거렸다.
“아! 그러니까 내가 왜 홀딩스의 부대표로 가야하냐고! 그것도 제리 밑으로!”
“넌 놀만큼 놀았잖아. 네스케이프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에 가서 열심히 일했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그때 뭐하고 놀았는지 생생한 증언이 다수 있으니까. 거기에다가 SSC 만들고 조금 일하다가 CTO한다면서 또 놀았잖아.”
“아니! 그러니까.......”
덩치가 산만한 놈이 머머리까지 돼서 울상을 짓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놈은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가 뒤로 후퇴하는 속도가 늘어나서 아예 지금은 박박 밀어버렸다.
훠이~ 절로가라. 캐서린 눈 버린다.
뱃속에 있을 내 자식이 저런걸 보고 있을걸 생각하니 빨리 치워버려야 했다.
“네가 그동안 열심히 놀았으니까 이젠 일하란 말이다.”
일해라 노예야.
감히 주인님과 같이 놀려고 하다니 이건 용납할 수가 없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마크를 규태는 억지로 때놓으려 하고 마크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규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옆에서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을 귀엽다는 듯 지켜보던 캐서린이 나섰다.
아이를 가지면서 암사자라 불리던 사나운 모습을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젠 배부른 사자가 되어서 마음이 한없이 넉넉해진 캐서린이었다.
“마크, 도대체가 홀딩스 부대표자리가 진짜 왜 싫다는 거야? 정말 일하기가 싫다는 거야?”
그 말을 하면서 캐서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게으른 벤처의 너드들을 달달 볶던 사나운 암사자의 면모가 이 순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캐서린의 날카로운 눈빛공격에 마크가 움찔했다.
“아니.....그게 말이지.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왜 제리 밑으로 가야하는데? 반대로 돼야 하는 거 아냐?”
“오호! 제리 밑으로 가게 돼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네.”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겪은 사람이 캐서린이다. 벤처 창업자들 사이에선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동등하거나 조금 앞서 있다고 자부했는데 느닷없이 아랫사람으로 가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 그렇다. 내가 왜 제리놈 밑으로 가야하는데!”
이게 진짜 마크의 본심이었다. 아예 까발려졌으니 당당하게 털어놓는 마크의 모습에 규태가 혀를 끌끌 찼다.
“잘됐네. 그렇게 제리 밑으로 가기 싫다면 이번에 자리가 비는 부분이 하나 있지 않아?"
캐서린의 말에 규태가 잠시 생각하는척하다가 탄성을 터트렸다.
“어디? 아! YM사장자리.”
대규모 인사이동과 함께 야후의 각 부분도 독립적으로 분사를 해서 사장을 뽑아야 했다.
YM은 야후 마켓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한마디로 당첨되면 이전의 제리처럼 지옥의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자리였다.
지금도 미전역에선 YM의 물류창고들이 건설되고 있어서 사장자리에 오르면 눈코 뜰세 없이 바쁘게 비행기를 타야했다.
“내가 왜? 난 게임스의 사장자리로 가고 싶다고!”
“거긴 이미 사장이 내정되어있는데.”
“누구? 나보다 더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게 세르게이인데?”
달변가처럼 요란하게 움직이던 마크의 입이 한순간에 다물어졌다.
세르게이 브린은 레리 페이지와 함께 구글을 만든 창업자였지만 레리가 야후에 들어오면서 구글은 아예 만들어지지도 못했다.
훌쩍 중간에 떠버린 세르게이를 야후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마크였다. 천재적인 프로그래머가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니 그 뒤로도 쭉 세르게이를 자기 밑에 데리고 있었다.
규태가 볼 때는 세르게이와 마크의 프로그래머로서의 능력은 누가 더 뛰어난지 알 수 없었지만 당사자들끼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
세르게이가 게임스의 사장으로 내정되었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검색엔진부분의 사장은 레리가 야후본사 CTO와 함께 겸임으로 내정됐고 게임스는 세르게이, 그리고 이미 YM사장으로 내정된 이는 따로 있었다.
“둘 중의 하나 선택해 YM사장으로 갈래 야후홀딩스 부대표로 갈래?”
“.......”
“선택해. 둘 중의 하나, 어디야?
이건 누가 봐도 명백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마크가 백기를 들었다. 아무리 봐도 과로로 갈리는 운명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왔으니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홀딩스. 그래 내가 더러워서 홀딩스로 간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래 마크 부대표, 제리대표와 함께 홀딩스를 잘 부탁한다. 아자아자, 너라면 할 수 있어.”
침울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마크의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쥔 규태가 약을 올렸다.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자칫 덤볐다가 YM사장자리로 가라고 하면 마크만 손해였다.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한 마크가 나가자 그제야 규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짜 저 자식, 빠져가지고. 정말 일을 하기 싫다는 게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서는.”
규태가 투덜거렸지만 캐서린이 삐죽하게 웃었다.
“저게 당연한 거야. 진짜 벤처는 살인적으로 일을 하잖아.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번아웃에 빠지는 게 당연해. 규태도 마찬가지잖아.”
“그런가?”
“벤처를 만들고 일할 때 보면 살벌하잖아. 일주일 내내 쉼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공을 거두고 나면 일을 하기 싫어지는 게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회사가 커지면서 성취감도 낮아지고 괜히 성공한 벤처 창업주들이 조기은퇴하는게 아니라고.”
규태도 캐서린의 말을 인정하는 바였다.
회사가 작을 때야 자신의 의사결정하나로 회사가 휙휙 바뀌는 게 느껴지지만 커지고 나면 그런걸 쉽게 체감하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경영주라도 조금씩 성취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
“그러니까 마크를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마크가 규태보단 나으니까. 내가 규태 회사에 투자한 벤처캐피탈이었으면 몇 번 멱살을 잡았을걸.”
“응?”
“규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최선을 다해서 갈려본 적이 없잖아. 내가 투자자라면 아마 속이 터졌을 거야.”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내가 처음부터 투자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데. 애초에 난 다른 사람 돈을 투자받을 일도 없엇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규태가 지금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해?”
“......아니.”
그럼 진짜 난리가 났을 거다.
아니 지금까지 살아있지도 못하겠지. 지금까지 규태는 필사적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용인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상정하면서 투자를 했었다.
솔직하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투자를 하며 살아왔는지 속마음을 캐서린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YM사장은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마크가 아닌 건 눈치 챘어?”
“그럼 내가 누구야? 나 케서린이야. 캐서린 그린. 어설프게 마크에게 YM사장 자리를 넘기지 않을거란 건 눈감고도 알 수 있지.”
요염하게 눈웃음을 치는 캐서린의 모습을 보며 규태의 신체 일부분이 자기도 모르게 불끈했지만 규태는 애써 참았다.
요즘들어 시도 때도 없이 붙어있는데 함부로 힘을 뺏다간 밤이 괴로웠다.
“제프로 생각하고 있어.”
“제프? 제프 베이조프? 그 파산한 아마존의 사장이었던 대머리?”
“응. 그사람이 YM의 사장자리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규태의 말에 캐서린이 팔짱을 끼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프라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야. 아마존이 자금이 꼬여서 무너지기는 했지만 제프가 유능하기는 하지. 밑에 사람들 관리도 잘할거고.”
그 자금을 꼬이게 만든 당사자인 규태의 가슴 한켠이 슬쩍 찔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캐서린이 규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데 이제 마크를 홀딩스 부대표로 보낸 진짜 이유를 말해봐. 그냥 마크를 놀리려고 보낸 게 아니지?”
역시 눈치라면 캐서린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규태의 속마음을 벌써 짚어냈다.
“마크에게 맡길 일이 있어서.”
“맡길 일? 지금부터 준비하는걸 보면 보통일이 아닌가 보네?”
“그럼 아주 큰일이지.”
“호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난 규태가 어디에 투자할지 알 것 같아.”
캐서린이 도도하게 머리를 치켜세우고 콧대를 높였다.
“그래 그게 어딘데?”
“메신저.”
“.......”
어떻게 알았지? 속마음을 들킨 규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으로 마크는 메신저 분야를 담당하게 될것이다.
이쪽 분야에 얼굴책과 짹짹이가 나오기전에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해 버릴 계획이었다.
“보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인데. 바보야. 그걸 누가 모르겠냐. 분사를 하면서 메신저만 쏙 빼놨잖아. 그전까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관리해놓고. 지금쯤 마크와 제리도 함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걸. 넌 진짜 똑똑한데 가끔 보면 마크보다 바보 같아.”
케서린의 말에 규태가 삐져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비교를 해도 마크라니!
“그래서 좋다고.... 그래도 내 눈엔 귀여운 걸 어떡해.”
잔뜩 화가 났던 규태도 캐서린의 말에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고 정말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캐서린의 모습에 덤벼들었다.
아직도 밤이 무섭기는 하지만 본능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내말대로지?”
“그래 나도 네 이야기를 듣고는 준비를 했지만 진짜 규태 녀석이 YM사장 자리이야기를 하니까 움찔했다. 으흐흐, 생각만 해도 소름 돋네.”
“왜 한번 맡아보지 그래?”
“내가 미쳤냐? 네가 전국 뺑뺑이 도는걸 뻔히 지켜봤는데 나는 진짜 그렇게는 못한다."
마크의 말에 제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못할 짓이지. 나도 한번 해봤지만 너무 주변에 걸려 있는 이익이 많아서 사람들 만나는 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야. 직원들 관리도 보통일이 아니고.”
규태는 모르지만 이미 제리와 마크, 캐서린은 규태가 돌아오면 어떤 일을 벌일지를 의논해 두었었다.
리처드의 조언도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규태가 힘든 싸움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과 이젠 적당히 뒤로 몸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 상대가 록펠러하고 모건이라니, 정말 흐덜덜 하지 않냐?”
“그들뿐만이 아니지, 점점 우리들의 적은 늘어난다고 봐야해. 우리가 버는 만큼 손해를 보는 자들이 늘어날 테니까.”
전세계적으로 부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규태와 자신들의 지분이 늘어날수록 적대하는 자들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기득권을 쥔 자들이 신참에게 먹이를 고스란히 나누어 주는걸 본적이 있는가.
앞으로도 규태와 함께 자신들은 험난한 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겨.”
“당연하지. 이젠 그자들은 구시대의 유물들이야.”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힘이 들어갔다. 험난한 싸움이 되겠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피할 생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