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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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전쟁
TV에서는 엘 고어가 격앙된 목소리로 오사마 빈 라덴과 그 추종세력인 알카에다를 목소리 높여 비난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는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일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사마 빈 라덴의 송환도 알카에다의 축출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탈레반이 밝히면서 전쟁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뉴욕의 심장부인 세계 무역센터가 직접 공격을 받으면서 3000명의 사망자가 나온 초유의 사건이었다.
미국국민들은 절대로 테러 용의자들을 용납할 마음을 갖지 않았다.
전쟁을 해서라도 이들을 잡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론은 전쟁불사를 외치는 강경한 목소리를 높였고 정치권도 국민의 의사와 뜻을 같이했다. 세계적으로 미국에서 일고 있는 분노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감지했기에 평소에는 미국에 테러를 벌일 테러조직에 대해 칭송했을 반대세력들도 숨을 죽였다.
자칫하면 미국의 분노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형편이었다.
심심하면 벼랑끝 전술을 즐겨 사용하는 북한마저도 납작 엎드려 눈치를 볼 정도였다.
엔터프라이즈호급 항모전단이 인도양에 배치되고 미군의 해군전력이 집결햇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후원세력이던 파키스탄마져도 탈레반에게 알카에다를 포기하라고 종요했지만 탈레반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파키스탄의 고위관리에게 한말인 ‘길을 내주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돌려버리겠다’ 라는 협박이 먹혀 들어가며 파키스탄도 영공통과를 허가했다.
미 해군 5함대 소속의 함재기 250대와 사우디 아라비아,터키에 주둔한 9공군산하의 비행기들이 연일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공습하고 미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탈레반 연합인 북부동맹이 카불을 향해 진격했다.
공식적으로 미군은 10월 7일, 카불을 비롯한 대도시와 군사거점이 대규모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 되었다.
11월 13일.
카불이 함락되었다. 탈레반은 거의 소멸되어 12월 7일에는 탈레반세력의 거점도시인 칸다하르가지 함락되면서 전쟁이 이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탈레반의 잔존세력은 미미하게 남아 남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가고 12월 14일에 미군은 승리선언을 했다.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이었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미군의 지원을 받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재건 아프가니스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쥐었지만 기반이 취약해서 탈레반 축출에 공이 큰 북부동맹과 지원금 분배를 놓고 끝이 보이지 않는 다툼을 벌여야 했다.
이 때문에 1년 넘게 경찰과 군인의 아프간 전역배치가 늦어지면서 탈레반이 회생할 빌미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탈레반이 분쇄된 것 같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미군과 북부동맹의 포위망을 피해서 파키스탄으로 도주한 탈레반 세력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규태는 탈레반이 허술한 미군의 포위망을 뚫고 파키스탄으로 도주한 원래 역사를 알고 있어서 엘 고어에게 탈레반의 완전 섬멸을 요구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프칸 전쟁 승리를 선언하고 잔뜩 들뜬 목소리로 규태에게 전화를 건 엘 고어는 쓴소리만 잔뜩 들어야 했다.
“빈 라덴도 탈레반의 수장들도 하나도 못 잡았고 놓쳤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했다는 거죠?”
전쟁을 시작한 목표인 탈레반도 오사마 빈 라덴도 모두 놓쳐버렸는데도 정작 엘 고어는 태평했다.
- 탈레반의 마지막 근거지인 토라보라까지 점령했으니 탈레반의 근거지는 이제 모두 점령하지 않았나. 앞으로 아프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군대를 만들어서 탈레반의 잔당을 정리하면 되는 거 아닌가.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나 태평한 엘 고어의 말에 규태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소련이 가진 무기가 약해서 아프간을 점령하지 못했던 거로군요. 아니 주둔한 군대의 숫자가 부족한 거였었나?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아프간은 이미 소련이 지배하고 있어야죠. 아마 전쟁을 끝도 없이 길어질 겁니다.”
상황을 근거도 없이 난관적인 시각으로만 아프간 전쟁을 보는 엘 고어의 모습에 규태는 질려 버렸다.
- 그게 무슨 소린가? 탈레반은 이미 거점도시가 박살났는데. 어떻게 다시 뭉친다는 건가. 탈레반을 쫒아냈으니 아프간은 이제 자체적으로 정부를 수립해서 잘 꾸려 나갈 수 있을 걸세.
“어떻게요? 설마 아프간 정부에 친미인사들을 잔뜩 앉혀놓고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 잘 굴러갈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죠?”
- 미군이 직접 군정을 펼치게 되면 국제여론이 좋지 않을 거야. 의회에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고.
자유라는 기치에 현혹되어 미군은 쓸데없는 짓을 잘한다. 대부분의 미국정치인들은 아프간 인들을 억압하던 독재세력 탈레반세력을 몰아냈으니 이젠 아프간전쟁은 끝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규태가 볼 때 이제부터 아프간은 밑 빠진 독이나 마찬가지다. 부정과 부패도 말도 못해서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지원금을 착복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극도로 높은 문맹률로 아직 부족사회의 전통을 그대로 가진 아프간은 미국인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700억 달러 넘게 지원하지만 경찰관의 급료가 몇 달씩이나 밀리는 막장국가가 아프간이다.
한마디로 국제사회의 눈먼 지원금을 착복하는데 만 유능한 아프간 정부다.
이런 부패의 고리 속에서 명줄을 늘린 탈레반이 남부산악지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군은 끝도 없는 전투에 시달려야만 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까맣게 모른 채 전쟁에서 이겼다고 전쟁이 마무리 됐다고 여기고 또 다른 전쟁을 기획하고 있을 미국정부가 한심했다.
“아프간을 손봐줬으니 밑에서는 이젠 이라크 차례라고 하지 않나요?”
- 그런 소리가 나오고는 있네만......
“말 안 듣는 이라크의 후세인을 혼내줄 확실한 기회라고 잔뜩 기세가 오른 매파들이 날뛰겠군요.”
부시가 아니라 엘 고어가 대통령이 됐어도 전쟁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암약은 멈추지 않았다.
- 국방부에서 그런 의견이 나오는 모양이지만 나도 아직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네.
“아프간에 쏟아 부은 전비나 전쟁기간이 너무 짧기는 했죠. 아직까지 피를 덜 흘렸으니까요.”
생각보다 짧게 끝이나버린 전쟁 때문에 군수물자의 소모량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에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건 군수업체들의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했다.
거기에 큰 전쟁을 바라는 건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사병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하지만 출세를 바라는 장교들에게는 기회의 장이었다.
전쟁 승리를 선언하고 잔뜩 들떠있는 엘 고어에게 규태는 차디찬 현실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엘 고어, 지금 당신과 미국은 거대한 수렁에 빠진 거예요. 베트남전의 교훈을 벌써 까맣게 잊었나요?”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에겐 거대한 트라우마였다.
엄청난 전비와 인명피해를 당하면서 지원했지만 남베트남은 결국 공산화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전쟁을 벌인 미군이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한 전쟁이었다.
- ...... 이건 정말 의외의 소리로군. 지금 아프간전이 베트남전처럼 흘러간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 정말 아프간전쟁이 그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가? 미군과 다국적군이 이미 아프간 전역을 통제하고 있는데?
“아프간을 통제하는 일이 그렇게 쉬었다면 소련이 어째서 많은 인명피해와 전비를 들이고도 결국 철수했겠어요? 미국은 아프간은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닙니까? 아프간 사람들이 보기에 소련과 미국이 다를 것 같나요?”
지금 미국정부와 미국인들은 너무 쉬운 승리에 들떠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겠지만 이런 교만이 결국 아프간전쟁을 끝도 없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었다.
2020년까지도 탈레반을 정리하지 못하고 미군은 아프간에서 철군하고 그 후에 탈레반은 재기에 성공해 아프간을 준무정부상태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국의 무지와 태만으로 2번째 소말리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도대체가 미국 정부 내에 아프간 지역전문가가 있기는 한 겁니까? 지역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밀어붙이는 걸 보면 아마추어나 다름없는데요.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미국정부 내에 아프간 전문가가 진짜 있기는 한 겁니까? 있다면 그런 어설픈 전략 따위를 추진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을 테고 함부로 전쟁승리를 선언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CIA나 NSA가 고용한 아프간 전문가가 없을 리가 없었다. 다만 아무도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게 함정이었다.
자랑스럽게 규태에게 전쟁이 끝났다고 전화를 걸어온 엘 고어에게 규태는 쓴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잘 생각해요. 군부나 정부 내의 매파들에 끌려 다니다가 임기 내내 전쟁에 시달리지 말고요. 막말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한들 그게 미국에 무슨 상관입니까. 이스라엘이야 위협을 느끼겠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피를 흘리게 만들 셈입니까?”
쉽게 이기는 전쟁은 권력자들에겐 달콤한 꿀과 같이 달디달게 느껴지는 법이다. 당장 아프간전쟁 승리를 선언한 이후 엘 고어의 지지율은 끝도 없이 치솟았다.
-...... 그럼 아프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네가 추천하는 방법은 뭔가?
“확실하게 미군병력을 때려 박아서 군정을 선포해요. 한 5년 아프간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아프간군대를 키우면서 전역을 감시하다보면 탈레반의 씨도 마르겠죠. 확실하게 아프간 전역을 안정화시키기 전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면 그땐 당신의 재선을 물 건너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전에 정부 내에 있는 바퀴벌레들도 빨리 정리하고요.”
전쟁승리에 취한 대통령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규태는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주변의 어리석은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전쟁을 길게 끌고 가게 되면 유권자들에게 표로 심판받게 된다.
전쟁종식을 자랑하기 위해 규태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잔뜩 쓴 소리만 듣게 된 엘 고어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영리한 것으로 따지자면 전임 대통령인 클린턴보다 한수 위였다.
“......다시 전화하겠네.”
민주당의 엘 고어행정부는 전쟁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실무자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다.
누가 뭐라 해도 국방부는 아프간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이라크까지 확전해야 한다는 매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확실하게 추가적인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
재무부의 입장은 중립이었다.
규태와의 전화통화이후로 많은 생각을 거듭한 엘 고어는 결단을 내렸다.
“어떻게 생각하나?”
“KT(규태)의 말이 맞아, 전문가들이 말하는 데로 아프간은 자칫하면 제2의 베트남이 될 여지가 많아. 국방부에선 탈레반 세력이 소멸되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서부 파키스탄에 상당한 탈레반 세력이 숨어들었다는 증거를 잡았네. 국방부나 NSA놈들이야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말이야.”
나중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바이든 국무장관은 미 행정부 내에 온건파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견과 반하는 정보를 숨기거나 조작하려 들지는 않았다.
엘 고어와는 같은 상원의원으로 만나 오랜 친분이 있어서 첫 번째 국무장관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오랜 상원의원 경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엘 고어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FBI를 동원해 미정보부와 국방부를 내사한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끄응, 에반더 NSA 실장이 이럴 줄은 몰랐군.”
엘 고어의 입에서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자신이 선택해서 뽑은 NSA국장이 자신의 뒤통수를 아프게 후려갈긴 것이다.
911테러의 정보누락을 조사한 비밀스런 감찰결과 NSA의 국장과 부국장 하나, CIA의 부국장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국방부 소속의 장성 여러 명도 직간접적으로 테러 정보조작에 관여한 것으로 나왔다.
아프간 전쟁이 벌어지면서는 일부러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들어서 탈레반조직의 도피를 돕기도 했다.
아프간 전쟁의 책임자인 미 중부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대장을 교모하게 압박했다는 증거까지 속속 등장하는 판국이다.
나중에 사실을 안 토미 프랭크스가 국방부로 달려오겠다며 펄펄 뛰었지만 모종의 압박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래서 예전부터 친분을 가지고 있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인물인 바이든과 이번 일의 처리방향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이자들을 전부 기소해야 할까?”
“전부 기소하면 미국이 시끄럽게 될 걸세, 아마 난리가 날걸.”
엘 고어가 주저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사실이 드러나면 미국의 치부가 드러나고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동조라고 하기는 그렇지 저들도 이렇게 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을 거야. 아마 적당한 규모의 테러라고 여겼겠지. 이렇게 미친놈들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테러에 동조하거나 묵인한 정보기관 놈들도 마찬가지, 알카에다가 이렇게 무모할 것이라고는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93년에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주차장 폭발사건 정도의 테러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자국에서 테러가 벌어지는데 묵시적이나마 동조한 정보기관의 책임자들과 군 장성들이 있다는 것은 미국의 치욕이자 치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