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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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2001년은 여러 가지로 복잡다단하게 시작되었다.
1월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는 엘 고어의 모습을 TV로 지켜보았다. 초청을 받긴 했지만 굳이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가뜩이나 결혼문제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는데 거기 참석해봐야 식어버린 관심에 새롭게 불을 지필뿐이다.
“저기 안가서 아쉽지 않아? 명색이 대통령 취임식인데?"
“아쉽긴 개뿔이다. 저기 가봐야 이 추운날씨에 동태 되는 일밖에 멋있냐. 네가 가면 아마 응급실 직행이다.”
“하긴 넌 저기 안가도 엘 고어가 무시할 수 없는 레벨이지. 춥긴 하겠다.”
이젠 뒤로 후퇴하는 머리를 견디지 못해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삭발을 하고 다니는 마크였다.
뭔가 초점이 맞지 않은 질문과 답변이었지만 두 사람은 TV를 보며 43대 대통령의 임기시작을 알리는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결혼식은 언제하기로 했냐?”
“4월 달에, 그때가 되면 날씨가 가장 좋을 거라더군.”
“대형 크루즈 선에서 결혼식을 한다면서?”
“응, 파파라치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다.”
“흠, 그럼 나도 똑같이 하면 되겠군.”
“여자 친구 생겼냐?”
“다들 결혼하는데 나만 안하긴 그렇잖아. ‘
친구들 핑계를 대봐야 씨도 먹히지 않았다.
“바쁘다면서 연애를 할 시간은 있었나 보군.”
한동안 일 폭탄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제리도 그렇고 마크까지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요즘 들어서 일이 많이 줄어들어서, 되도록 야근은 하지 않으려고.”
“좋은 일이야. 이제 제리도 일이 많이 줄였지?”
그가 경영하는 SSC는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직원들만 대충 굴리면 어떻게든 끌고 나갈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제리가 수장으로 있는 야후도 마찬가지.
닷컴 버블에 휩쓸려 존재가 희미해진 AOL이나 아예 사라진 기업인 아마존과 달리 여전히 잘나가고는 있지만 많은 직원들을 거느리고 꾸준히 자회사들을 늘려나갔다. 야후 게임스나 야후 마켓 같은 부분들이 분사해나갔지만 야후는 플랫폼기업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알리바바하고 협의는 잘되가냐?”
“뭐 아직 지분문제 때문에 협의를 계속하고 있지.”
알리바바는 손정의의 투자이후로 날개를 달고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인터넷 상거래 시장의 규모가 커져가면서 결제수단의 다양화는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회귀 전에는 2004년에 시작되는 알리페이가 SSC의 투자로 조금 더 빨라졌다.
“마윈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적당한 선에서 그냥 타협을 해.”
합작사로 만들어지는 알리페이의 지분문제로 계속 협의를 하고 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규태는 이일에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리바바의 지분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몫은 확실히 챙겨야지.”
“네가 알아서 해라. 또다른건 없지?”
“유럽쪽 진출은 큰 문제가 없는데 중국이 문제지. 그렇지 않아도 내일은 중국에 들어가 볼 생각이다.”
“얼마나 있으려고?”
“일주일에서 열흘, 협의가 잘되면 더 있게 될지도 모르고.”
중국의 온라인결제시장 규모가 가파르게 커지다 보니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가는 김에 텐센트에도 들러. 그쪽도 성장이 빠르더라.”
알리페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 번째로 결제규모가 커질 기업이 텐센트였다. 한국게임들을 가져가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중이었다.
규태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은 게임결제라 시장성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냥 중국에 간김에 한번 들러보라는거야. 상해 인터내셔날의 로드릭도 만나보고, 너도 그곳에 많이 투자했잖아. 나를 대신해서 한번 둘러본다고 생각해.”
중국시장을 외면하고 싶지만 앞으로 10년간은 중국의 경제성장 속도는 10%에 육박한다.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를 견인하는 기관차 역할을 하는 중국시장에 투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OK, 네 말대로 한번 둘러보지 뭐. 말이 나온 김에 바이두까지 한번 살펴봐야겠다.”
결혼발표이후로 캐서린은 산호세의 급한 일을 처리한 다음부터 아예 팔로알토의 저택에서 규태와 함께 살았다.
한국의 집에서 캐서린과 함께 들어오라는 연락이 빗발쳤지만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며 사그리 무시해버렸다.
겨울이면 얼굴을 봐놓고 새삼스럽게 결혼한다고 또 얼굴을 보겠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규태가 한국으로 오지 않자 가족들이 전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왔다.
“아이고! 아예 우리가족 전부가 몰려오셨구먼.”
공항에 나가서 가족을 맞이하는 규태는 이마를 찌푸렸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직장에 다니는 막냇동생과 그 옆에 다정하게 서있는 낯선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젠장 막내 놈도 결혼하려는 모양이네. 전화로는 사귀는 여자 없다더니만.”
회귀 전에는 50이 넘어서 결혼을 해서 아예 동생의 결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태규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우리한테 한국에 들어오라고 한 모양이네.”
“그럼 전화로 이야기를 하던가. 한사코 들어오라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들어가냐고. 이번에 들어가면 진짜 난리가 날 텐데. “
규태가 가볍게 투덜거렸지만 함께 공항에서 가족들을 맞이하던 캐서린의 신경은 새로 등장한 막냇동생의 여자 친구에게 쏠렸다.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캐서린이 물었다.
“어머니, 여기 이분은 누군가요?”
“아이고 너희 결혼한다고 하니까 막내 녀석이 여자 친구라고 소개를 시켜주더라. 직장에서 만났다던데.”
캐서린이 다가가서 막내의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규태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직장에서 만났다고요?”
“그래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다고 하더라. 할머니하고 너희 아버지는 아주 홀딱 넘어갔다. 저게 얼마나 여우라고. 미려는 조금 두고 보자는 입장이고.”
막내의 여자친구이야기를 하면서 탐탁치 않아하는 모친의 모습을 보면 소위 말하는 부잣집 딸내미는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는 나중에 며느리한테 무슨 구박을 받으려고 그렇게 굴어요. 집안이 좋지 않아도 사람만 좋으면 되지요. 오히려 재벌이나 정치하는 사람들하고 엮여봐야 골치만 아프다고요. 황본부장은 뭐래요?”
당연히 막냇동생의 여자 친구에 대한 검증이 없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교육자라서 부자는 아니지만 평범하게 살았다고 하더구나. 남자문제나 금전문제는 없었고.”
“그럼 됐네요.”
“되긴 뭐가돼! 난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요. 안 들어.”
“막내가 여자 친구를 데려와서 서운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막내도 이젠 서른이라고요."
“누가 뭐래니. 흥. 그래 나만 나쁜 년이다. 나쁜 년. ‘
“그게 아니잖아요. “
온 집안 식구들이 막내의 여친을 좋게 생각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규태도 처음부터 찬성을 하고 나서니 어머니가 많이 삐진 것 같았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가 규태를 슬그머니 밖으로 불러냈다.
“휴, 너도 이해해라. 너희 엄마가 막내가 여자 친구가 있단 소식을 듣고는 많이 충격을 받았다. 너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아니 왜요?”
“의사말로는 갱년기란다. 갱년기. 자식들 이제 다 커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
“엄마나이가 이제 환갑인데 무슨 갱년기요?”
“글쎄 말이다. 나도 아주 미치겠다. 아주 사람을 달달 볶아대는데 내가 갱년기가 올 판이다.”
젊을 때는 집안을 꽉 쥐고 흔들던 부친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힘이 빠져서 인지 모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젠 집안에서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고 외손자까지 보신 양반이.”
“그래서 너를 들어오라고 달달 볶아댄 모양인데. 네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냐, 들어와봐야 번거롭기만 하지. 네 결혼발표이후에 한국 언론들이 난리였다. 난리.”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부친이 고개를 흔들었다.
“미국은 더 난리였어요.”
“아직도 한국은 네 결혼문제로 시끄러운데 네가 들아와봐야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직도요?”
“그래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지 않구나. 어제만 해도 총리하고 만나서 네 이야기를 했다. 넌지시 한국에 안들어오냐고 묻더구나. 네가 이번에 추임한 엘 고어대통령이랑 그렇게 친하다면서? “
“친하긴 하지요.”
이미 엘 고어와 규태가 친하다는 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대통령에 올랐으니까 미국정부와 연결고리로 널 이용해 보겠다는 게 눈에 보이긴 하는데 어쩌겠냐. 조국인데.”
“도울 게 있으면 도와 야죠. 그건 그렇고 할머니는요? 힘이 조금 없어 보이시던데.”
“아이고!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시다. 너하고 막내 결혼식은 물론이고 증손주 얼굴까지 보시겠다고 운동도 매일 열심히 하신다.”
“다행이네요. 지난번에 어째 힘이 없어보이셔서 마음을 졸였거든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 규태의 모습을 보던 부친이 말했다.
“그리고 규태야.”
“네?”
“고맙다.”
“뭐가요?”
“결혼한다고 해줘서 고맙다는 말이다. 이놈아, 난 네 녀석이 아예 장가가지 않을 줄 알았다. 예전부터 결혼이야기만 나오면 네가 질색을 해서 난 네가 몸이나 마음에 문제가 있는 놈인 줄 알았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규태가 질색을 했지만 부친은 아예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내친김에 풀었다.
“말 많은 여자들이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얼마나 뒤에서 씹어 댔는지 아냐. 너도 알다시피 상류층 여자들이 좀 뒷말이 무성하냐. 네가 좋은 혼처를 한사코 마다하고 사귀는 여자도 없이 노총각으로 늙어가니까 별소리가 다나왔다.”
규태에게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입조심을 시켰지만 어지간히도 부모님이 뒷말에 시달린 것 같았다.
“참 할 일도 없는 사람들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흘려들었는데 네 엄마가 자꾸 시달리니까 속에서 열불이 나더라.”
규태는 부친의 말에 한국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게 정말 다행이라 여겨졌다.
한국은 남자나이가 30이 넘어가면 노총각 소리를 듣던 시절이다.
규태야 시달릴 대로 시달려서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부모님이 이런 뒷말을 듣는데 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엄마는 태진이 여자 친구를 왜 그렇게 반대하는 거예요?”
“나도 모른다니까. 처음에는 집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니, 그다음에는 웃는 게 여우같아서 마음에 안든 단다. 나 참.”
“아이고 태진이가 중간에 껴서 마음고생을 조금 했겠네요.”
“나도 네 엄마가 그렇게 반대를 하는 건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이젠 그러려니 한다. 한동안 집안이 시끄러우니까 끊었던 담배가 간절해지더라.”
“캐서린이 나서서 잘 중재를 해야겠네요.”
“너보다 똑똑한 아이니까 잘 처신을 하겠지. 난 캐서린이 큰 며느리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아주 기분이 좋더라. 할머니도 소식을 듣고는 아주 좋아하시고.”
"그나저나 여자들끼리 이야기가 길어지는것 같네요."
"잘되겠지. 캐서린이 잘 중재해서 네 엄마 마음이 풀리기를 바라야지. 네 엄마가 또 캐서린이라면 아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