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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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나이 때문에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규태는 30대 중반 ,캐서린은 규태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두사람 다 결코 작은 나이가 아니었다.
규태의 마음도 처음에는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다가 이젠 해야 하나 정도로 변화했다.
겨울에 팔로알토를 방문한 부모님들도 올해 안에는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제 해가 바뀌면 캐서린 나이가 몇이냐. 넌 어떨지 몰라도 케서린이 더 나이를 먹으면 아이 낳기도 힘들어.”
더 많은 나이에도 아이를 잘도 낳는다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만 시간이 지나면 40대에 아기를 낳는 경우가 흔해지지만 이 시대에는 상당한 노산에 속했다.
‘캐서린은 몸이 튼튼해서 별로 힘이 안들 것 같은데.’
부모님이 들었으면 엄청나게 화를 내고 등짝을 얻어맞을 소리였지만 규태도 눈치란 게 있는지라 부모님의 앞에서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혼할 마음은 있는데 구체적인 일들은 캐서린한테도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청혼을 해도 캐서린이 받아줄지 모르잖아요.”
“이놈아 빨리 전화로 연락해서 캐서린에게 물어봐!”
노총각인 큰 아들놈이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장가를 가겠다고 말하자 부친이 성화를 부렸지만 모친이 옆에서 등짝을 때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여자한테 청혼을 하는 건데 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게 말이나 되요.”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실수한 것 같네.”
부친도 마음이 급해서 헛소리가 나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진짜 결혼할 마음은 먹은 거지?”
“그럼요, 그래도 이런걸 전화로 말하기는 그렇잖아요. 만나서 캐서린에게 정중하게 의사를 물어봐야죠.”
규태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결혼의사를 밝히자 모친이 만족스러워 했다.
“그래 난 네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해줘서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네가 결혼하지 않으니까 막내녀석도 결혼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여서 아들 두놈이 전부 총각으로 늙어죽나 했나.”
어쩐지 잔뜩 과장한 것 같았지만 늦게 까지 결혼하지 않고 버티는 큰아들을 보면서 부모님도 속이 썩었을 것을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규태가 결혼하겟다는 말을 꺼내자 부모님은 벌써 손주를 볼 생각에 들떳다.
딸은 결혼을 시켰지만 큰 아들은 일에 묻혀 사느라 그런지 예쁜 여자 친구가 있으면서도 큰아들이 결혼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영 미덥지 못했었다.
이제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에 있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딸이 낳은 외손녀도 예쁘지만 친손자가 있었으면 얼마나 더 예쁘겠는가. 사람이라면 은근슬쩍 바라는 마음이 커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규태가 올해안에 되도록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약속을 하자 아침에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뛸 듯이 기뻐하셨다.
“잘 생각했다. 우리 손주가 이제야 어른이 되는구나.”
“할머니, 제가 나이가 몇인데.”
“이눔아! 나이가 몇이건 장가를 가야 어른이 되지. 옛날 같으면 넌 아직도 댕기머리야. 상투를 틀어야 어른이라고 하지. 환갑 넘는 네 아비도 아직 내 눈에도 어린아이다. 어린아이. “
괜스레 할머니에게 한소리를 들은 규태가 멋쩍게 웃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봐야 할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규태가 어린아이처럼 비추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규태가 출근하자마자 케서린에게 연락을 했다.
“저기 캐서린 오늘 바빠?”
- 뭐야 자기, 할 말이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빨리해, 이제 회의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규태도 이것저것 벌린 일이 많아서 바쁜 사람이지만 캐서린은 규태보다 한술 더 뜬 워커홀릭이었다.
규태가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도 캐서린이 너무 바쁜 탓도 있었다. 단순하게 바쁜 거라면 일을 그만두도록 하겠는데 캐서린은 자신의 일을 정말 좋아했다.
“회의가 끝나면 뭐해야 하는데? 시간이 나면 오늘저녁에 같이 식사나 하자고.”
- 자기, 오늘 왜이래? 뭐 잘못한 거 있어? 주말도 아닌데 식사를 함께 하자고? 바람이라도 폈어?”
연인사이에 들리면 안 될 소리가 들리자 규태가 펄쩍 뛰었다.
“바람은 무슨! 내가 그런 거 할 시간이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런 놈이 아니란 건 캐서린이 잘 알잖아. 진짜 오늘 할 말이 있어서 그런다 할말이.”
-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오후에는 오스틴에 가야 한단 말이야.
캐서린의 말에 규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자신의 연인은 바쁜 여자였다.
이렇게 바쁜 여자가 자신과 데이트 할 시간을 만들었다는 게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그거 취소해. 오스틴에서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르지만 그것 안한다고 회사가 큰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
전혀 안하던 소리에 캐서린이 조금 놀라서 되물었다.
-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내가 할 일까지 미루고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 생긴 거야?
“그래 진짜, 진짜 중요한 일이야.”
- 오올~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거 보니까 오늘 저녁에 청혼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뼈를 때리는 캐서린의 말에 규태가 움찔했다. 진짜로 눈치 빠른 캐서린이 그걸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오호호, 언제 청혼하나 기다리고 있었더니 진짜로 오늘 청혼할 모양이네. 좋았어, 내가 큰마음을 먹고 시간을 허락해주지.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 그게 정해지면 다시 연락해.”
진짜 캐서린처럼 활발하고 머리 좋은 여자에게 깜짝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으니 성공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규태는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의논을 해서 프러포즈 장소를 정하는 것도 일이었다. 캐서린이 정말 낭만적인 프러포즈를 원하는 여자라면 한참 고민을 하겠지만 캐서린은 생각보다 조금 건조한 성격이었다.
“프러포즈는 어디서 할까요?”
“샌프란시스코가 어떻겠습니까? 골드게이트를 보면서 청혼을 하면 분위기도 좋을 겁니다.”
금문교라? 규태가 턱을 마지며 고심했다. 좋은 장소이긴 한데 마땅한 곳이 있을까 싶었다.
“거기에 분위기 있는 쓸 만한 장소가 있었나요?”
“왜 쓸 만한 장소를 구하려고 그러십니까?”
“그럼요? “
“예전에 사놓은 요트 있지 않습니까? 그게 LA에서 개장을 마치고 놀고 있습니다.”
“내가 요트를 샀었다고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소리였다.
“작년까지 한참 요트와 자가용 비행기를 사는 게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지 않았습니까? 망하는 회사에 딸려서 온 게 있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비행기가 세대에 요트가 네 개정도 되는군요. LA에 있는 요트는 그중에 제일 큰놈입니다.”
“그런 회사도 있었어요?”
진짜 규태는 깜짝 놀랐다. 작년에 큰 인수합병은 진행하지 않았던 터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있었다.
“보스께서 신경을 쓰실 정도로 덩치가 큰 회사들이 아니었습니다. 벤처붐에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니까 흥청거렸던 기업 중의 하나였죠.”
2000년 초반까지 닷컴버블이 한창일 때 미국에서 고급요트와 자가용 비행기의 수요가 폭증했었다.
너도 나도 한몫을 챙기자 고급 물품의 수요가 폭발했던 것이다.
이젠 분위기에 휩쓸려 사들였던 물품들이 벤처기업들이 우수수 망하자 한꺼번에 떨이로 쏟아졌다.
“보스께서 그렇게 요트를 좋아하지는 않으시지만 워낙 중고 물품이 쏟아지는 시기라서 가격이 낮아지면서 인수한 요트를 리모델링하는중 이었습니다.
“지금 연락하면 시간에 맞춰서 올 수 있을까요?”
LA에 요트가 있다면 시간에 맞출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조금 늦으면 어떻습니까? 인생에 한번뿐인 이벤트인데 저녁식사를 하시고 천천히 이동하면 되죠.”
하긴 오선한의 말이 맞았다.
인생에서 한번이란 말은 살아봐야 알겠지만 여자에게 청혼이벤트는 무척 중요하다는 것쯤은 여러 번 경험해봐서 알고 있지 않은가.
“제가 장담하지만 요트위에서 금문교를 보며 청혼을 하면 성공적인 이벤트가 될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 장담합니다. 이제 보스도 결혼하시고 빨리 후사를 보셔야지요. 직원들도 언제 보스가 청혼을 하나 다들 궁금해 했습니다. 후사가 있어야 기업도 안정이 되지않겠습니까.”
부하직원들이 그런 생각까지 가지고 있다는 건 염두에 두지 못햇다.
자식이라?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신경쓰지 않았던 일이 기억났다. 진짜 부자가 되면 자신이 가진 돈이 얼마인지를 모른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은 규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제일자로 내 재산이 얼마나 되지요?”
“정확한건 누구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재산들만 입니다.”
뻔히 자신을 쳐다보는 오선한의 시선이 뻘쭘해서 규태는 헛기침을 했다. 워낙 이리저리 돌려서 빼어놓은 재산이 많았다. 오선한이 아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투자를 한 재산이다.
“제가 알고 있는 한 11월에 8,50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나머지는 저도 모릅니다.”
오선한도 모르는 자금은 여러 페이퍼 컴퍼니와 역외펀드를 거쳐서 금과 자원선물에 투자했다.
그게 1200억쯤 될 거다. 아마도.
그러고 보니 두 개를 합친 규태의 재산이 내년이면 1조 달러를 넘어설 것 같았다.
닷컴 버블이 꺼지고 증시가 폭락할 때 공식적으로 규태가 소유한 타이거 펀드나 야후 홀딩스는 공식적으로 하락에 배팅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투자자가 번히 돈이 눈앞에 굴러가는데도 줍지 않는다면 직무유기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누구도 모르는 투자펀드를 만들었고 엄청난 수익을 거둔 것은 당연한 노릇.
의도치 않게 오산한도 모르는 비자금의 규모가 폭증했다. 규태가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직접 투자를 하는 펀드였다.
투자자금이라 비자금이라고 말하기는 그랬지만 규태의 재산을 관장하는 오선한의 입장에서 보면 비자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을 넣어둔다는데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규태는 생각했다.
그러다니 갑작스럽게 일이 생기면 스위스 은행 배만 불려 주는 것이다.
오선한의 큰소리처럼 청혼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미리 통째로 빌린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런 저녁식사를 하고 항구에 대기하고 있던 요트에 올랐다.
캐서린은 오늘 이용하는 요트가 빌린 것이 아니라 규태의 것이란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규태가 이런 요트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쪽엔 통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
“내가 관심을 가져서 뭐하게. 아무리 사람을 써도 관리하려면 귀찮기만 하지. 이것도 어쩌다보니 가지게 된 거야.”
전생에는 요트니 비행기니 관심이 많아서 비싼 것들을 잔뜩 사들였던 시기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시들해 졌었다.
솔직히 람보르기니니 하는 최고급 스포츠카도 직접 몰아보면 그리 만족도가 높지않은 차다. 위로 올리는 차문은 보기에는 좋지만 타기도 불편하고 차 바닥도 너무 낮아서 전혀 선호하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에 비싼 차라는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차라 인기가 좋지만 그것도 잔뜩 사서 주차장을 가득 채우다보면 시들해진다.
요트도 마찬가지 파티를 좋아하면 선상파티라도 벌리려고 들고 있겠지만 그것도 별로.
파티를 벌이는 목적이야 놀려하는 거든지 사업적인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 두 가지인데, 규태 같은 사람은 이 두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번에 대통령 당선 파티에도 가지 않았잖아. 나중에 들으니까 엘 고어가 투덜거렸다는데.”
“내가 거기 가서 뭐하게 가봐야 청탁이나 해올 텐데. 당선자파티의 주인공은 대통령 당선자가 돼야지.”
“그런가? 그래도 너무 외부사람하고 만나지 않는 것도 크게 좋지 않아 보여. 사람들 시선도 의식해야지.”
위로 올라가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규태는 이런 건 아예 깡그리 무시하는 중이었다.
야후의 일은 제리에게 타이거 펀드의 일은 샨에게 전적으로 떠넘겼다.
“어유, 생각해보니까 진짜 얄밉네. 규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내가 바쁜 것 아냐!”
“벤처가 요즘 바쁠 게 뭐가 있다고? 투자를 해달라는 요청이야 많겠지만 새로 생겨나는 회사는 거의 없잖아.”
규태의 말에 캐서린이 펄쩍 펄쩍 뛰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얼마나 일이 많은데 투자한 회사들을 찾아가서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그것 때문에 캐서린이 전국을 전용기로 방방곡곡 누비는 것을 잘 알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미 타이거 벤처의 파트너의 숫자도 20명이 넘었다.
그쪽에 맡겨두면 될 일이다.
자신이 투자한 회사들의 사정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도 병이었다. 직업병.
타고 있는 요트가 금문교가 잘 보이는 곳에 정박하자 멀리 보이는 금문교의 불빛을 배경으로 규태가 무릎을 꿇었다.
All-4-One의 "I Swear"가 요트안에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