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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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 코리아
여자들끼리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부자는 서재로 들어갔다.
“쟤는 진짜 한국 사람하고 다를 게 없다. 목소리만 들으면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다.”
아버지의 말처럼 할머니의 옆에 찰싹 붙어서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어 발음이 좋았다.
“캐서린의 언어능력이 뛰어나니까요.”
“나이도 나이니까, 이제 서둘러라. 캐서린도 적은 나이가 아니잖니.”
“······네.”
여자를 사귀니 이젠 아이이야기가 나왔다.
서재는 규태가 집에서 업무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네가 사용하려고 만들었지만 여기에서 일을 하니까 그렇게 편하더라.”
규태가 없는 동안은 부친이 열심히 사용했는지 여기저기에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정부에서 그렇게 사람이 찾아오던가요?”
“내가 어지간하면 연락을 안했을 텐데 젊었을 때부터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지역구의원 놈이 정권의 대리인이 되더니만 뻔질나게 연락을 해오더라. 그놈도 한자리하겠다는 수작이니 뭐라 하기도 그렇고. 너도 알지 최성필이라고?”
공무원이나 기업의 직원들도 찾아오지만 역시 규태에게 연락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친븐이 있는 국회의원의 압박 때문이었다.
“최성필씨가 국회의원이 됐어요?”
“그래 고향에서 출마해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놈이 젊었을 때부터 나하고 친하게 지낸 사람이다. 너도 얼굴을 기억하지.”
아버지와 같은 지역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해서 일찌감치 높은 자리에 올라서 하급 공무원이던 부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규태였다.
“장관자리라도 노리나 보네요.”
“흠흠, 그놈이 내무부장관자리에 관심이 많거든. 네가 도와주면 한자리 차지하는 건 식은죽 먹기라고 하소연을 하니 나도 별 도리가 없었다.”
공무원출신이라 최고위자리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욕심을 내는 건 당연하다고 봐야했다.
“뭘 어떻게 해달라고 하던가요?’
“자금지원이지. IMF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아직도 힘든 기업들이 많지 않냐? 부실기업의 인수도 그렇고.”
작년에 십대그룹의 지형도가 바뀌었다.
7번째 대기업인 기아의 부도는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기아의 35% 주식이 규태의 손에 떨어졌다.
“말로는 그래도 삼정전자나 대현자동차같은 대기업의 주식이 대규모로 저한테 넘어온걸 어떻게 처리할지에 더 관심이 많을걸요.”
부친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럴 테지. 자칫하면 재벌들이 가진 경영권이 홀라당 넘어올 수도 있지 않냐.”
미국국적의 규태에게 커다란 지분이 넘어갔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재벌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정부에서도 당연히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규태가 대량으로 지분을 취득하면서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한국항공같은 경우는 단번에 경영권을 빼앗길 처지였다.
‘가만 거기는 먹어도 되잖아?’
한국항공의 대주주가 들으면 뒤로 넘어갈 소리였지만 추가적으로 주식을 매입해서 경영권을 가져와도 될 것 같았다.
규태는 한국기업의 경영권을 굳이 건드릴 마음은 없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애매했다. IMF의 지원을 받기로 했지만 일본과 유럽이 흔들리면서 자금여력이 없어진 IMF의 자금지원도 시원치가 않았다.
그래서 IMF의 간섭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환율이 크게 출렁거리면서 한국의 대외무역 흑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었다.
하지만 한국항공은 정부의 공적자금지원이 없으면 그대로 망하는 회사였다.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것 보다는 규태가 인수해서 건전한 기업으로 키우는게 낫지 않겠는가.
나중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3세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규태는 한국항공을 인수할 마음을 먹었다.
부친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낸 규태는 다음날부터 구체적인 한국의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규태의 집까지 달려온 소진세 기룡증권 사장과 정부의 요구사항을 점검했다.
“기룡증권은 요즘 어떻습니까?”
“지점숫자를 늘리고 직원들도 계속 뽑고 있습니다. 향후에 아시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으로 거듭나는 게 목표입니다.”
부도가 난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직원들을 고용하면서 급격하게 지점수를 늘렸다. 다른 증권사는 감원을 하니 어쩌니 난리속이지만 기룡증권만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눈치가 보여서 미국에 투자한 금액 중의 일부만 가져왔는데도 사상 최고의 흑자를 기록 중이었다.
달러가 귀해지다 보니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도 달러화를 가져오면 이유를 묻지 않는 판국이다.
업무보고를 하는 소진세의 기세가 당당했다.
“미국에서 처리를 해서 들여온 자금이 15억 달러라고요?”
“그렇습니다. 반년쯤 지나면 추가로 10억 달러 정도를 추가로 들여올 계획입니다. “
처음 미국에 투자를 하면서 시티은행 서울지점과 스왑거래를 하면서 주식투자자금을 충당했었다.
복잡한 회계처리를 해서 기룡증권 아메리카에 떨어진 금액이 20억 달러, 이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꾸준히 투자하면서 엄청나게 불렸지만 섣불리 한국으로 들여오지 않았다.
기룡증권은 비상장기업이고 주식의 대부분을 규태와 오장우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사주 열풍이 불면서 직원들에게 지분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미국투자 수익문제 때문에라도 회사 지분을 직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가 없었다.
우리사주가 거절되면서 다른 증권사에 비해서 직원을 뽑는데 애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
다른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기룡증권의 배후를 알고는 옮겨오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이런 혼란상황에서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 회사를 최우선으로 선호했다.
“정부에서 외평채를 발행하면서 인수를 요청할 것 같습니다.”
“예상금액은요?”
“많을수록 좋겠지만 100억 달러면 한국정부도 급한 불은 끌 수가 있을 겁니다.”
무역수지 흑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한숨을 돌렸지만 외환보유고가 바닥까지 떨어진데다 금융위기의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은행과 기업을 마구잡이로 통폐합하는 뻘짓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가지고 되겠어요? 아예 이번기회에 통 크게 300억 달러어치의 외평채를 사들이죠.”
규태의 말에 소진세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리가 나겠네요. 그 정도 자금을 지원한다면 정부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겁니다.”
300억 달러가 한꺼번에 들어오면 한국의 금융위기는 단번에 끝이 난다.
아직 환율이 1400선에서 1500선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였다. 이정도 환율이라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도 손해가 나지 않을 환율이다.
정부의 지원 하에 막대한 달러자금을 합법적으로 원화로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외평채를 인수하면서 추가적으로 200억 달러정도를 투자해서 상업용 부동산에 투자하기만 해서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가 있었다.
“정부에 요구할거라? 한국항공 말입니다. 거긴 인수해도 되지 않겠어요?”
“한국항공이요! 한국그룹의 저항이 거셀 겁니다. 거기에다가 작년과 올해 적자가 엄청납니다. 이미 자본 잠식에 들어갔을 겁니다.”
재벌 그룹의 하나의 핵심 계열사를 먹겠다는 소리에 소진세가 흠칫 놀랐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재벌이란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대단했다.
막대한 양의 기름을 사용하는 항공사는 환율에 따라 엄청난 손익이 엇갈리는 업종이다. 달러환율이 급등하면서 한국항공은 엄청난 적자에 시달렸다.
거기에다 비행기를 도입하면서 지불해야 하는 금액도 달러화 베이스였다.
창업자의 장남에게 상속된 한국항공은 이미 막대한 적자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자본 잠식이라? 한국항공을 인수해서 증자를 하면 좋아지지 않겠어요?”
이번 위기를 넘기면 급격하게 늘어나는 해외 여행객 수요로 탄탄대로를 걷는 기업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은행을 인수할 준비를 하세요. 제대로 된 투자은행 그룹을 만들려면 은행은 하나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규태의 지시를 들은 소진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증권사가 은행을 잡아먹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항공을 이수하는건 소진세에게 별 감흥을 불러오지 못했지만 은행의 인수라면이야기가 달랐다.
IMF위기가 닥치면서 시작된 것은 한계기업들이 줄줄이 망했고 그다음으로 금융산업의 개편이 진행되었다. 실질적으로 금융위기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금사들이 줄초상이 났다.
규태가 인수한 대전종금을 제외하고는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면서 대부분 쓸려나갔다.
심지어 절대 망할 리가 없다고 여겨지던 은행들도 정부가 요구하는 데로 8%의 BIS를 맞추지 못한 은행은 퇴출이 예고되었다.
“알겠습니다. BIS를 맞추지 못해 퇴출이 될 만한 은행들 중에 쓸 만한 은행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규태의 지시는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투자신탁운영사 말입니다. 새롭게 펀드를 하나 만들도록 하세요.”
“신규펀드를요?”
“자금을 모아서 나스닥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이미 많이 올라서 나스닥의 거품이야기가 나오는 판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스닥 시장의 광란이 시작된다.
“모집이 잘될까요? 거기에다가 미국에 투자하는 펀드면 달러자금이 빠져나가는 게 아닙니까? 재경원에서 기겁을 할 겁니다.”
가뜩이나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해외 투자펀드를 만들겠다는 소리는 정말 한가한 소리로 들렸다. 더군다나 정부가 가쯕이나 부족한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원화로 투자를 하면 미국 투자은행과 스왑거래를 통해서 한국에서 달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장부상으로 달러화 예금이 늘어나는 거라 재경원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
원화를 달러화로 바꾸어서 미국으로 송금하는 게 아니라면 정부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규모를 늘리지 못해 안달을 하면 했지.
“그리고 펀드가 만들어 지면 제가 직접 운영할 생각입니다. 투자 최고금액은 일인당 500만원까지 투자할 수 있는 것으로 하죠. “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이미 규태는 세계최고의 부자로 포브스지에 의해서 널려 이름이 알려졌다.
콧대 높은 월스트리트에서도 자금을 맡기지 못해서 안달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규태가 직접 운영하는 펀드라면 이건 시작하자마자 매진이었다.
펀드를 만드는 목적이 IMF로 갑작스럽게 무너진 가정의 재정지원을 위한 펀드였다.
‘바이 나스닥 펀드’는 만들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일주일 만에 1,230억의 자금을 모았다. 가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발을 굴렀지만 추가적인 펀드 발매계획이 석 달 뒤로 잡혀있어서 미리 예약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규태는 나스닥에 상장된 첨단기업들을 사들였다. 8천만 달러의 금액이라 주식을 사들여도 사도 표시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