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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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CM의 처리
그때 워렌은 투자를 거절했지만 LTCM이 채권투자를 성공하면서 펀드규모가 급상승,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대형 펀드로 성장하면서 커다란 후회를 했었다.
이제 싼값에 잡아먹을 기회가 왔으니 가차 없었다.
“단기 유동성 문제만 해결되면 이후에는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겁니다.”
“러시아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당장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겠지만 곧바로 회복할겁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과연 그럴까?”
이건 워렌도 자신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존이 도움을 청했을 때 망설이던 것도, 인수가격을 터무니없이 낮춘 것도 과연 펀드의 러시아 투자 피해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는지 정확하게 추정하기 힘들 어서였다.
피해가 전부 100억 달러를 넘지 않는다고 존이 주장했지만 그걸 순순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앞으로 러시아의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에 대해서는 변수가 많았다.
정확하게 추산하긴 힘들었지만 대략 월가에서 러시아에 물린 자금만 9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됐다.
97년의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끄떡없이 튼튼해보였다. 루블화는 큰 변동 없이 안정됐고 회사채금리는 50%에 육박했다. 불안을 피하고 고금리의 달콤한 맛에 이끌린 투자자들이 러시아로 몰려들었었다,
이제 하나같이 발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러시아 채권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매매가 될 리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워렌을 규태가 차분하게 설득했다.
“러시아가 요즘 들어서 어려움에 처한 건 원유가격의 급락 탓이 아닙니까? 어려운 시기가 끝나면 조금씩 유가가 올라갈 겁니다.”
이라크전쟁이후로 급등했던 원유가격이 급락하면서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비중이 큰 러시아가 직격탄을 맞았다. 14달러에서 30달러 사이를 등락하는 원유가격이 석유수출에 목을 매고 있는 러시아 경제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원유가격은 앞으로 급격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올라간다. 본격적으로 원유가 상승세를 보이는 시기는 2000년대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최소 원유가격이 20달러만 넘어가도 러시아는 숨통이 트인다.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국채와 가스프롬과 같은 에너지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는 모라토리움을 벗어나면 크게 어렵지 않게 상환 받을 수 있게 된다.
바닥까지 가격이 내려간 러시아 채권을 조금씩 타이거 펀드에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그때는 본격적으로 헐값으로 러시아 채권을 거두어들일 작정이었다.
규태와 타이거 펀드의 직원들은 러시아의 위기상황을 빠짐없이 체크했다.
보리스 엘친 정권이 얼마나 버틸 수가 있을까? 달러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막바지까지 몰린 러시아 정부의 대응이야 뻔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설마 천하의 러시아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할까 의문을 가졌다.
워렌도 그중의 하나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미국과 전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던 러시아가 그 정도로 몰락했다고는 믿겨지지 않은 것이었다.
“믿으세요. 며칠 내로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할겁니다. 그때가 되면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자네가 그렇게 까지 이야기를 하니 기다려보지 그때 다시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진짜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뒤를 보지 않는 러시아다운 해결책이었다.
긴가민가 규태의 말을 의심쩍어 하는 워렌이었지만 불과 이틀이 지난 뒤 진짜로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자 두 손을 들었다.
초췌한 얼굴의 LTCM 회장 조 메리웨더가 규태를 찾아왔다.
진짜 LTCM은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으로 핵폭탄을 맞았다. 단기적으로 자금이 물린 타격도 크지만 투자자들의 자금인출 요구가 빗발친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자금을 인출해주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포지션을 청산해야 하는데 손해도 손해지만 이게 1조가 넘는 덩치가 덩치다보니 시장에서 소화시키기엔 너무 막대한 금액이었다.
자칫하면 LTCM의 청산물량 때문에 채권시장이 엎어지고 LTCM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였다.
당연히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존 메리웨더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메리웨더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뻔히 아는 규태였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존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클린턴이 LTCM의 문제를 규태에게 해결하라고 떠밀었지만 정작 가장 초조한 사람은 존 메리웨더였다. 이제나 저제나 연락이 올까 싶어 초조해 하던 존이 참지 못하고 직접 규태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 LTCM에서 절실하게 필요한건 돈이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 시장에서 돈이 말라버렸다. 남은 해결책인 공적자금 투입은 연준의장인 앨런이 거절했다.
자금지원에 난색을 표하는 건 미 재무부도 마찬가지 그리고 나온 소리가 타이거 펀드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뿐이었다.
미 재무부는 갑작스럽게 터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으로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국제금융시장이 다시 흔들릴까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공적자금 투입에는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재무부에서는 타이거 펀드에 도움을 받으라고 압력을 넣더군요. 타이거 펀드의 자금지원을 받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펀드를 넘길 마음은 있습니까? “
“......어쩔 수 없지 않소. 최악의 경우라면 넘겨야겠지요.”
“타이거 펀드는 직접 나설 생각이 없습니다. 워렌과 인수협상을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타이거 펀드가 인수에 나서지 않을까하던 기대가 꺼졌는지 존 메리웨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인수대상자가 버크셔 해서웨이라서 가격협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타이거 펀드는 인수에 직접 나설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독수리의 눈으로 타이거를 보는 이들이 많았다. LTCM까지 인수해서 적을 늘릴 필요가 없었다.
“워렌하고 인수협상의 가장 큰 난제가 뭡니까?”
“워렌은 너무 거저먹으려고 합니다. 인수가격으로 책정한 금액이 25억 달러요. 그것도 분할 지급하겠다는 거요. 적어도 45억 달러는 받아야겠소. 이것도 작년까지 다른곳에서 LCTM의 인수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왔던 이야기의 1/10의 가격이란 말이오.”
워렌과 존이 이런 와중에도 줄다리기를 하는 이유는 인수가격의 차이 때문이었다. 워
렌이 제시한 가격은 25억 달러였고 존은 그런 헐값에는 넘기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존의 입장도 이해가 되긴 했다.
러시아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는 LTCM은 월가에서 가장 잘나가는 펀드의 하나였다.
타이거 펀드보다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신중한 건지 느려터진건지 어떤건지 몰라도 워렌은 빠른 투자의사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도와주시오. 당장 50억 달러의 지원만 있어도 숨을 쉴 수가 있소.”
존은 끝까지 버티려는지 규태에게 단기자금 지원을 요구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적어도 120억에서 150억 달러는 가지고 있어야 단기 유동성 부족을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존이 급박한 마음에 여기저기 자금을 빌리려는 시도를 하는 모양인데 사정을 뻔히 아는 규태에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소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 LTCM이 청산 되도 큰 불만이 없는 사람입니다.”
LTCM이 채권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하며 월스트리트에서 성공신화를 쌓아왔지만 러시아의 모라토리움과 같이 급격한 위기에는 터무니없이 취약했다.
이번이 아니라도 급격한 위기가 찾아오면 언제라도 무너질 곳이었다.
거기에다가 다양한 곳에 투자하는 타이거 펀드와 경쟁자라면 경쟁자였다.
경쟁펀드가 이번 기회에 청산된다면 나쁜 일이 아니다.
미국정부야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까봐 노심초사 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정부에야 한꺼번에 물량을 쏟아내겠다고 협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타이거 펀드에겐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자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겉돌 자 존 메리웨더가 답답한 얼굴을 했다.
답답하긴 규태도 마찬가지.
망하는 일만 남은 주제에 뻗대기는 왜 그렇게 뻗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준다고 하는 가격에 넘기면 그만일걸.
자신이 만든 펀드를 헐값에 넘기는 것이 아까운 건 사실이겠지만 그건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바라는 자금지원은 불가합니다. 어떤 가격이던지 펀드를 워렌에게 넘기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끝까지 타이거 펀드의 자금지원을 받으려던 존의 시도는 규태의 완강한 거부로 끝이 났다.
절망적인 얼굴로 떠나는 존의 모습이 크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제 규태의 일도 대충은 끝이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워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인수하기로 했네. 인수금액 때문에 실랑이를 했지만 자네 말처럼 러시아가 언제까지 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35억에 인수하기로 했네.
“잘 하셨습니다. 내가 인수할까 했지만 워렌에게 넘겨준 겁니다.
- 생색은!
“진짜라니까요. 주변 눈치 때문에 워렌에게 넘겼지만 잘 가지고 있으면 좋은 펀드지 않습니까. 인적자원이 그곳보다 좋은 곳이 어디있다고요.”
- 그래 그건 자네 말이 맞아. 하여간 약속한대로 자금을 지원해 줘야겠네.
“제가 자금지원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는데요.”
생각해보니까 너무 날로 먹으려고 들었다.
- 여태까지 내가 자네를 도와준 게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워렌이 저를 도와주기야했지만 공짜는 아니었잖습니까?”
워렌이 규태의 일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전부다 막대한 수수료를 받아갔다.
- 알았네. 앞으로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더 이상 놀렸다가는 워렌이 삐질 것 같아서 규태가 서둘러 손을 들어 항복했다.
“그럴 리가요. 자금지원을 하겠습니다. 100억 달러면 되겠지요.”
-그 정도면 충분하네. 인수를 발표하면서 자네 투자도 같이 발표를 하도록 하겠네. “
워렌과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니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보통 노인네가 아니었다. 자금지원의 조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벙긋하지 않았다. 실무자를 보내봐야 정확하게 알겠지만 후한 조건은 아닐 것이었다.
워렌은 이익이 걸리면 정말 사람이 변했다.
겨우 한숨을 돌린 규태였다. 클린턴이 던진 큰 문제를 해결했지만 꺼진불도 다시 봐야했다.
정보담당자인 해롤드에게 몇 번이고 확인했다.
“다른 곳들은 문제가 없지요?”
“LTCM만 해결되면 조용해질 겁니다. 나머지 투자은행들도 많은 금액을 물리긴 했지만 여유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제가 터지면서 가장 큰 지뢰인 LTCM이 해결되었으니 규태의 바쁜 일도 정말로 끝이었다.
이제 제법 한가해지나 싶었지만 규태를 기다리는 일들이 산더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