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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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마무리?
“인터라켄의 벙커가 공격받았습니다.”
“준비하고 있던 보람이 있네요. 인명피해는 얼마나 됩니까?”
유럽공격이 격화되자 규태는 함께 있던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미리 준비한 스위스의 벙커로 이동했다.
“대원 둘이 죽었습니다. 다섯 명이 부상이고요. 그중 하나는 부상이 심각합니다. 예상하지 못하게 적들이 공격헬기를 동원한 바람에 피해가 컸습니다. “
미리 준비한 첫 번째 벙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규태는 이마를 찌푸렸다.
주변에서는 그렇게까지 조심해야하느냐고 했지만 규태는 이런 쪽 예감이 아주 발달했다.
뒷골을 찌르는 강한 예감에 콩고에 주둔하고 있는 정예 PMC를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 규태를 경호를 맡은 사람은 이십년간 수많은 전장을 누빈 경험 많은 제이였다. 적들이 공격을 한다면 접근할만한 동선을 파악하고 상당한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이정도 인명피해를 입었으니 적이 단단히 준비를 하고 달려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공격한 적이 누구인지는 파악이 됐나요?”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증원부대가 갔을 때는 이미 저들이 철수를 한 다음이었습니다. 상대의 인명피해가 만만치 않았는데도 흔적하나 남기지 않는 걸 보면 보통 실력의 놈들이 아닙니다. “
PMC들이 벙커주변에 포진하고 즉각 연계대응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함정에 가까운 곳을 습격하면서도 적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보나마나 특수부대였다.
“적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흔적을 남겼더라도 추적이 불가능하게 막아두었을 겁니다. 공격자들은 아마 실종처리가 된 특수부대원이었을 겁니다.”
제이가 반대 입장이라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PMC에서 파견되어 나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제이는 수많은 흉험한 전장을 경험한 책임자답게 이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아했다.
얼굴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희미하게 남은 칼자국이 범상치 않은 제이의 과거처럼 보였다,
“이렇게 끝내지는 않겠지요?”
“당연합니다. 적들이 노리는 목표가 분명하니까 반드시 추가적인 공격이 있을 겁니다.”
“가족들의 경호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대거 인원을 보강했습니다. 불편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잘 참아내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경호원들을 줄줄이 매달고 다니려면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규태와 연락을 한 후에 다들 잘 견뎌주고 있었다. 만약에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다면 규태도 참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적들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규태는 그동안 외부와의 연락도 철저하게 차단했다.
이미 준비한 플랜에 따라서 실무자들이 일본과 이탈리아, 프랑스의 주식과 외환시장을 거칠게 흔들었다.
***
이탈리아의 은행들이 쑥대밭이 되고 프랑스의 크레디 리요네가 끝내 파산했고 독일의 코메르츠방크까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미국투자은행들의 주가도 급락했다.
파산의 도미노가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상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메릴린치와 베어스턴스의 주가가 급락하자 미국정부에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견디지 못한 클린턴정부는 여러 가지 금융위기의 대처방안을 발표했지만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로 인해 자금을 지원하는 일에는 반대가 심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는 핵심은 규태를 만나 담판을 짓고 유럽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것이다.
개인적인 친분을 고려했는지 정부의 대표로 규태를 찾은 사람은 리처드였다.
“여긴 조용하고 아름답군. 한눈에도 보통 튼튼한 공간이 아니게 생겼어.”
멀리 마테호른이 보이는 산골짜기에 만든 규태의 벙커는 견고하고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공중공격까지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해두었기에 적이 접근하려면 육로밖에는 없다.
미리 연락을 했음에도 경호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두 명의 방문자들을 감시했다. 리처드와 동행한 인물은 얼핏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다.
“이 친구는 크게 신경 쓰지 말게. 자네 행적을 찾느라 CIA와 DIA(국방정보국)이 총동원되었다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을 알고 있었다면 나한테도 이야기해주지 그랬나.”
“CIA의 에릭 도넌 입니다.”
“지금 말하는 이름은 믿지 말게, 나한테는 다른 이름을 밝혔으니까.”
리처드와 함께 나타난걸 보면 고위급이긴 한 것 같은데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귀에 이어폰을 한 제이가 다가와 주변동향을 전해왔다.
“보스, 주변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없습니다.”
“이친구가 자네 경호를 책임지고 있었군.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네.”
벌써 세 차례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신문이나 방송은 조용했다. 상대나 규태 모두 일이 떠들썩해지는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기관의 눈과 귀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미국정부가 원하는 게 뭡니까?”
리처드와 사적인 친분이야 깊지만 이럴 때는 냉정하게 업무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지금 상대하는 건 친구 리처드가 아니라 미국의 재무 장관이자 정부대리인이었다.
“지금 골드만이 위태 롭네.”
유럽금융 위기의 직격탄에 골드만이 비틀거렸다.
“보나마나 루빈이 길길이 날뛰었겠군요.”
행정부로 들어오기 전에 골드만삭스의 회장 자리에 있었던 루빈이다. 당연히 지금도 골드만과 깊이 연결되어있었다.
“말도 말게 욕이란 욕은 다하더군. 내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욕까지 하더군. 그렇게 화를 내는 루빈은 처음 봤네.”
말은 그렇게 해도 리처드도 통쾌한 얼굴이었다.
“미국정부에서 원칙대로 골드만을 파산시키면 되겠네요.”
“흠흠, 그게 말이야. 입장이 곤란해.”
“왜요 아시아에서는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파산시키도록 미국정부가 압력을 넣었지 않습니까."
민간영역의 금융지원을 정부에서 하는걸 막은 게 미국정부였다.
한국에선 IMF의 권고에 따라 BIS 8%를 맞추지 못한 은행을 퇴출시켰다. 말이 좋아 IMF의 권고지 실상은 미국정부의 뜻에 따른 것이다.
“말로는 은행이 파산하면 세계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게 미국정부의 뜻이네.”
“진짜 이유로는 미국은행을 파산시킬 수 없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 골드만삭스만이 아니라 메릴린치와 베어스턴스, 그리고 모건 스탠리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투자은행뿐 아니라 헤지펀드들은 줄도산을 걱정하고 있을 테고요.”
“거기에 LCTM도 위험하네.”
이건 정말 의외였다. 철저하게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탓에 아직 규태는 정확하게 미국 금융기관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보고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LCTM까지 타격을 받았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높은 이자율을 따라 투자대상을 움직였다.
나중에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으로 채권투자에 실패하면서 망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디 투자가 잘못됐답니까?”
“러시아에서 물린 모양이야.”
이건 원래 역사와도 같았다.
“지금 러시아가 위험합니까?”
“이 시국에 러시아라고 무사하겠나. 처절하게 터지고 있네. 외국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휘청거리고 있네.”
생각해보면 원래보다 조금 빠르기는 했지만 러시아가 위태롭다면 러시아 채권투자가 많은 LCTM이 위험하단 말이 이해가 됐다.
미국정부의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이건 월가에서 다룰 위험 수준을 한참 넘어갔다.
“그래서 미국정부가 저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미국정부는 자네 쪽이 유럽 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그만 멈춰주길 바라네.”
아직 단일통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유럽정부들의 대응은 제각각이었다. 이 와중에 독일은 또다시 금리를 인상해서 자국만 살겠다고 빠져나갔다.
흔들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게 격렬한 항의를 듣고도 마이동풍이었다.
독일의 금리인상과 함께 리라화와 프랑화가 다시 한 번 대폭 약세를 보이면 외환위기의 기운이 높아졌다.
일본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탈리아와 프랑스까지 무너지면 세계경제에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 정말 초비상이었다.
기세 좋게 올라가던 나스닥의 기술주조차도 하향세를 그리는 판국이다. 자칫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갈 대공황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미국정부가 원하는 대로 하면 제게 좋은 일이 뭐가 있다고요.”
“이미 충분한 이익을 얻지 않았나. 자네가 거둔 수익이 천억이 넘지 않나? 가뜩이나 이번 일로 사방이 적인데 미국정부까지 적으로 만들 셈인가. 이 정도에서 멈추도록 하게.”
“이 정도에서 멈춘다? 흠,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리처드와 에릭을 앞에 두고 규태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둘의 앞에서 고심하는척하기는 했지만 이미 결론은 내려진 상태였다.
월스트리트와 시티, 프랑크푸르트와 파리까지 이번에 손해를 본 세력들이 하나같이 규태를 향해 이를 갈고 있지만 규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흙탕물을 만들면 깊숙이 숨어있던 대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규태는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암중에 숨어있는 자들을 기다렸다.
음모론이라면 코웃음을 치는 규태지만 아무래도 전생부터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 카르텔과의 싸움이 벌어졌던 순간부터 샅샅이 뒤집어 기억을 해봤더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전생이건 지금이건 중간에 쥐새끼들이 끼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구에게 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공격의 진짜 목표는 숨어있는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모건 쪽에서는 뭐라고 한답니까?”
공격을 해온 배후는 누가 봐도 90% 모건이었다.
2차 대전 이후 깊숙하게 가문의 부를 숨기고 대중들의 시선을 피해 뒤로 숨어들었지만 그들이 쌓아온 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미국정부를 쥐락펴락하면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은 헛소리에 가깝지만 비슷한 길을 걷는 록펠러 가와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믿지 않겠지만 헨리는 이번 일에 중립이네.”
“설마요? 이런 중요한 일에서 중립이라고요? 모건가에서 밀려난 겁니까?”
헨리 모건은 모건 스탠리의 창업자로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배후에서 중요한 일에 관여했다.
“헨리가 가주라고 하지만 절대적인 힘을 가진 건 아니네. 모든 움직임을 제어할 수는 없지. 이번처럼 손해를 본 사람이 많으면 말이야.”
규태가 이번 작전에서 영국을 빼놓은 것은 모건에 이어 로스차일드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다.
뿌리가 깊은 가문들을 상대할 때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어디에서 그 뿌리가 드러날지 모른다.
음모론에 숨어서 음모론을 만들고 전파하는 이들.
자신들의 영향력이 숨겨지기를 바라면서도 또 반대로 드러내기를 바라는 양면적인 속성을 가진 모건과 록펠러였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 음모론에서 말한 것처럼 엄청난가 하면 글쎼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규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국정부에서 원한다면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저도 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조금 걱정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이제 한시름을 놓겠구만.”
리처드는 정말 기뻐보였다. 사실 규태는 리처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작전을 실행한 탓에 행정부 내에서 리처드의 입지가 말이 아니게 어려웠을 것이었다.
“리처드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요. 이번에 고생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처드는 자리에서 물러날 각오를 했기에 크게 신경을 않았다.
“클린턴에게 욕좀 먹고 루빈과 대판 싸우기는 했지만 상관없네. 이젠 나도 쉴 때가 됐지. 그리고 자네가 말했던 작자는 이미 인사조치 했네.”
보기보다 성깔이 있는 리처드였다. 물러나기 전에 거슬렸던 작자들을 칼같이 쳐버렸다.
차관인 서머스가 반발했지만 인사권은 장관인 리처드에게 있었다.
순순히 규태가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리처드도 마음을 놓았는지 말이 많아졌다.
그가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규태도 오랜만에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시계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