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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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경제위기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머리위로 내려앉는 초여름, 에어컨이 풀로 돌아가는 실내 분위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프랑스에선 에어컨이 설치된 건물을 보기가 힘들었다. 라데팡스에 현대적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창밖으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량들을 바라보던 규태에게 타이거 펀드의 유럽담당책임자인 리건 해서웨이가 태국중앙은행 총재의 발표를 듣고 달려왔다.
“마침내 태국이 손을 들었습니다. 1차 공격은 막아냈지만 2차는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태국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8억 달러까지 떨어졌는데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언제 항복하느냐는 시간문제였죠. 그래서 어떻게 바꾸겠답니까.”
“가장 커다란 변화는 IMF의 권고대로 변동환율제로 개편하는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바꾸자마자 바트화가 박살이 나겠군요. 얼마나 갈 것 같나요?”
“얼마나 갈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단기간에 환율이 급락하면 분명히 오버슈팅이 나옵니다. 최소한 50바트까지는 올라갈 겁니다.”
샨 나링햄의 뒤를 이을 차기 CEO대상자중의 하나인 리건은 손꼽히는 외환전문가였다.
“27바트에서 50바트라? 태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환율은 올라가건 내려가건 단기간의 급등락을 주의해야한다.
환율이 급등하거나 급락하면 경제는 큰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단기적으로는 그렇지만 안정이 되면 40바트 선에서 움직일 겁니다.”
확실히 규태가 골라서 뽑은 인재답게 리건은 환율의 변동을 감지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졌다.
규태가 기억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태국바트화는 리건의 말처럼 움직였다.
“이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데킬라 효과로군요.”
95년 멕시코 위기가 발생하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제까지 덩달아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멕시코의 유명한 술 이름을 딴 데킬라 효과.
경제위기가 주변국으로 전파되는 현상을 뜻했다.
“말레이 링킷화도 추락을 시작했습니다. 싱가포르 외환시장에서 1달러에 2.7링킷이 벌써 4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0년간 9%를 넘었던 말레이의 성장이 이젠 끝이 나겠군요.”
“그나마 인도네시아가 환율의 변동 폭을 넓혀서 사장이 낫군요. 12%까지 올렸죠? “
폐장한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의 링킷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방한 루피아화였다.
“그래봐야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외국인들의 투자자금 탈출이 러시를 이룰 테니까요. 수하르토 정부가 흔들거린다는 소식입니다.”
경제위기는 안정적이던 정치까지 뒤흔들었다. 64년부터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독재자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후임자가 자리를 물려받는다.
규태의 시선은 사무실에 걸려있는 지도위의 작은 도시를 향했다.
태국에서 시작된 불길은 어김없이 홍콩과 싱가포르를 향하고 있었다.
리건이 돌아가고 한참동안 사색에 잠겨있던 규태를 오선한이 깨웟다.
“보스, 아버님께서 연락을 하셨습니다. 대단히 화가 나신 것 같더군요.”
“끄응, 내가 뭐 잘못한 것 있나요?”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보스 때문이 아니라 아무래도 한국도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게 돌아가니까 보스와 연락을 필사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아버님을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라 재계 사람들까지도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생각할 때 규태가 도움을 준다면 이번 어려움은 크게 어렵지 않게 비켜나갈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랬지만 규태는 전혀 그들에게 도움을 줄 마음이 없었다.
“통화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우냐! ‘
규태가 전화를 걸자마자 불퉁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요즘 제가 바빠서요. “
“너 유럽에 있다면서. 일 때문이냐?”
“예.”
“우리도 거기로 가야겠다. 여기에 있으니까 온갖 잡놈들이 몰려와서 못살게 군다. 도지사부터 시작해서 장관 청와대에서도 연락이 왔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아들놈한테 연락을 하라고 해도 말을 도통 들어먹질 않는구나. 네 엄마도 요즘은 밖에 나가지를 못한다. “
부모님들이 어지간히도 시달린 모양이었다.
모친이 바깥나들이를 못해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저절로 같은 이불 덮고 사는 아버지가 힘들다.
지난번에 은근하게 돌려서 말했을 때는 아직 건강이 완전하지 않은 할머니를 핑계로 규태의 제안을 거절 했었다.
“할머니는요? 건강은 괜찮으시죠?”
“그래 네놈 결혼하고 애 낳는 것 보시겠다고 운동도 열심히 하신다. 아침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신다.”
“아이고!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 연세도 있으신데.”
“그럼 집안에만 계시게 할 수 있겠냐!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들이 고생이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할머니의 건강이 괜찮다는 말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고생하는 경호원들은 나중에 따로 챙겨주면 된다.
“하여간 네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전용기 보낼게요.”
“알았다. 끊어라."
용건만 마친 아버지가 전화를 사정없이 끊어버렸다. 이럴 때는 참 정이 없다. 경상도 남자답게 용건만 간단하게 끝내면 전화를 사정없이 끊어버린다.
“아이고! 아버지 성질도 급하셔가지고.”
아들된 입장에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입만 쩝쩝거렸다.
“호텔을 예약할까요?”
“여기에 하면 언론에서 눈치를 차릴 거 아닙니까. 조용한 곳으로 알아보세요.”
파리는 대도시답게 규태를 알아보는 인간들이 많았다. 가족들과 함께 다니면 행적이 노출되기 십상이다.
“코모호수주변은 어떻습니까? 여름이라 기온이 서늘한 곳이 머물 기에 좋습니다.”
“거기라면 나쁘지 않네요.”
할머니까지 함께 오신다는데 여름더위를 피할 곳이 좋았다. 코모호수주변은 이탈리아의 북부 관광지로 조용하게 머물 곳이 많았다.
나중에야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버글거리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런 가족들의 이탈리아 방문 때문에 규태도 어쩔 수 없이 코모호수를 찾았다. 커다란 르네상스 시대의 저택을 통째로 빌려서 머무는 것이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긴 비행 때문에 힘들어 하시던 할머니도 시간이 흘러 피곤한 몸을 추스르자마자 펄펄 날아다니셨다.
세상은 금융위기 때문에 시끄럽지 만 여긴 전혀 동떨어진 세계였다.
오랜만에 가족과 만난 캐서린은 유창한 한국어를 뽐내어 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가족들이 이탈리아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캐서린은 이탈리아로 달려왔다.
처음에 부모님이 캐서린을 조금 떨떠름하게 여긴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서 수다를 떠는 캐서린의 한국어 실력은 놀라웠다. 이제 서로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의사소통마저도 완벽하게 되자 아예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규태는 모른 체하고 캐서린을 옆에 끼고 다녔다.
“머리가 좋다고 하더니 진짜로 좋은가 보다. 얼마나 지났다고 한국말을 저렇게 잘한다니?”
“이제 9개 국어를 할걸요?”
규태의 말에 어머니가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머!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진짜 공부를 잘하겠다. 엄마가 머리가 좋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머리가 좋을 테지.”
“흠흠, 우리아이들도 머리가 좋잖아.”
“그럼요, 다 나를 닮아서 그래요.”
젊을 때는 아버지에게 기가 죽어서 지내던 어머니는 규태가 큰돈을 벌기시작하면서 집안에서 목소리가 커졌다.
“너는 공부할 생각이 없니 막내가 그러는데 네가 들어가고 싶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면서.”
“아이고 제 나이가 이제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공부에요.”
자칫하면 어머니의 성화에 대학원으로 끌려갈지 몰라서 규태가 한사코 두 손을 내저었다.
나이는 고사하고 대학원에 간다고 배울거나 있겠나.
규태가 기억하는 투자이론들은 지금부터 한참이나 지난 미래의 것들이다.
“지난 며칠간은 아주 재미가 있었다니까.”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때문에 먼 여행은 꿈도 못하던 어머니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아주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베니스를 방문해서 곤돌라도 타보고 유리 공예로 유명한 리도 섬에도 방문해 한아름 유리제품을 쓸어 오셨다.
다음 여행지는 가까운 밀라노였다. 명품으로 유명한 도시를 방문할 생각에 잔뜩 들뜬 어머니에게 규태가 슬그머니 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원하는 게 있으면 사세요.”
처음 보는 카드에 어머니의 눈이 반뜩 거렷다.
“한도가 없는 카드거든요.”
“어머나! 어머나! 내가 말만 들었지 이런 카드를 사용해볼 줄이야.”
규태가 내민 카드는 아멕스에서 세계의 부자들 가운데 엄선해서 만들어주는 카드였다. 시험적인 카드라 오래가지는 못하고 사라졌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버지가 자신의 것은 없냐고 연신 규태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애써 무시했다.
다음날 어머니는 여동생과 함께 밀라노 관광을 떠났다. 한사코 싫다는 아버지까지 끌고 결국에는 매제까지 짐꾼으로 끌려갔다.
캐서린은 피곤하다며 저택에 머물기로 결정을 내린 할머니와 함께 있겠다며 코모에 남았다.
“여긴 듣기보다 별로야. 물 냄새도 너무 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여동생부부가 밀라노로 떠나자 규태는 할머니를 위해 코모호수에 배를 띄었다.
낮잠을 주무시러 가시고 배위에서 선탠을 하던 규태가 가볍게 투덜거리자 규태의 옆구리를 캐서린의 팔꿈치가 치고 들어왔다.
“아이처럼 투정은 그만부리고 요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요?"
할머니와 함께 지내느라 바깥사정에 어두운 캐서린과 다르게 규태는 코모에 머물면서 꾸준히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받고 있었다. 늦여름으로 들어가면서 동남아는 그대로 외환위기에 침몰했다.
화들짝 놀란 홍콩은 금리를 초스피드로 인상했다.
증시는 박살나더라도 외환위기는 막아내겠다는 신호였다.
초단기금리가 30%까지 올려버리자 투기세력의 시선은 대만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엉망이지. 원화에 대한 공격 때문에 한국은행이 비상사태야. 달러 원화 환율이 1,000원까지 올라갔어. 한국은행이 필사적으로 환율을 방어하고 있지만 가진 자금이 별로 없어서. 오래 버티기 힘들 걸,”
한국에서 시달리는 건 가족만이 아니었다. 기룡증권의 소진세 사장이 전화를 걸어서 규태에게 하소연을 했다.
가족마저 한국을 떠나자 소사장을 어지간히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올 초부터 시작된 기업들의 부도행진은 지금도 이어져서 얼마 전에 10대 기업의 하나인 기아가 넘어갔다.
기아의 부도유예는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한국에서 주인 없는 기업은 위기에 살아남기 힘들었다.
“한국정부가 얼마나 버틸 거 같아요?”
“가을? 최대한 버텨봐야. 11월이 한계일걸.”
여러 번 한국정부와 기업들의 부채를 가지고 시뮬레이션을 해 얻어낸 결과였다.
“일본은요? 일본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에는 재앙이었다.
“일본은 지금이라면 무사할거야. 미국정부가 일본까지 무너지는 건 바라지 않거든.”
“정말 그대로 넘어간다고요?”
“어디까지나 미국정부의 생각은 그렇다는 거지.”
“흐음, 규태생각은 다르다는 거네요.”
역시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캐서린다운 판단이었다. 규태가 일본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진행하는걸 아는 사람은 타이거 펀드에서도 세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극비리에 일을 진행해나갔다.
“그래 난 일본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샨이 일본에 간 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