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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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경제위기
1997년의 봄까지 규태가 크게 한 일이 없었다.
규태가 한 일은 96년의 미국대선에서 정치자금을 지원한 정도, 이미 승패가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 긴장감은 1도 없는 대선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대선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리처드는 재무장관의 자리를 지켰다. 조금 더 높은 포스트인 국무장관 이야기도 나왔지만 규태가 말렸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리처드가 재무장관 자리에 있지 않으면 곤란했다.
주식시장은 조금씩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95년에 씨를 뿌렸다면 96년부터는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겨울이 되자 나스닥을 중심으로 미국증시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예전과 다른 점은 나스닥의 앞에서 달리는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훨씬 크게 올랐다는 것이다.
2000년에야 1억 달러 수준까지 올라가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시총이 97년 초반에 이미 900억에 가깝게 올라갔다.
그 다음으로 AOL과 야후가 뒤따랐다.
AOL의 주식은 항상 야후보다 앞섰다. 가입자 수는 유료회원이다 보니 꾸준하게 늘어나는 가입자가 투자자들에겐 마르지 않는 돈줄로 보인 탓이다.
하지만 이런 유료방식은 가입자의 숫자가 제한된다.
야후는 반대로 무료가입자 숫자가 꾸준하게 증가했다. 가입자가 당장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서버유지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전략을 추구하면서도 현금을 벌어들이는 사업에 진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터넷 광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켓을 조성하고 수수료를 받았다. 동종의 경쟁자로 떠오른 이베이와 치열한 시장 점유율 경쟁을 벌이면서도 선전하면서 주가가 97년 초반에 역전됐다.
이런 미국증시와는 별개로 아시아시장은 조금씩 출렁거렸다.
“소로스가 함께 손을 잡고 태국을 공격하기를 바라더군요.”
투자 포지션구축이 끝나고 조금씩 조정을 하는 일 이외에는 커다란 일이 없어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샨은 자리에 앉자마다 팔로알토까지 달려온 이유를 말했다.
이미 여러 번 자신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아예 무시를 했더니 샨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헤지펀드들의 공격목표가 태국이로군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작이었다.
“소로스의 말에 의하면 지금 태국의 환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높은 건 사실입니다만 태국중앙은행이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외환스왑을 해서 섣불리 들어가기가 조금 두렵습니다. “
“그래서 소로스도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이겠지요.”
지금 미국시장에 투자해서 벌어들이는 돈만해도 엄청났다.
수십 번의 자금세탁을 거쳐서 자금출처를 숨겼지만 타이거 펀드의 주요 투자대상은 나스닥이었다. 상장된 주요종목 가운데 대부분의 종목에 30~40%가 넘는 지분을 사들였다.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지만 이제 버블의 초입이다.
앞으로 벌어들일 금액을 생각하면 지금 투자를 멈추고 그 돈으로 아시아에 투자하는 건 오히려 손해였다.
규태가 보기에는 미국시장의 기술주에 투자하는 게 보다 쉽게 돈을 버는 길이지만 소로스의 주요 투자대상은 외환거래였다.
그 뒤를 따르는 상어 떼들도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타이거 펀드의 가세는 헤지펀드들에게 엄청난 힘이 될 것이기에 열심히 샨을 설득한 모양이었다.
규태는 잠시 팔짱을 낀 채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태국은 결국 방어에 성공하지 못한다.
거기에 외환위기를 상정하고 한국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위기가 오지 않으면 한국 기업들의 지분을 빼앗아 오는 것은 어렵다.
“투자자금은 얼마나 요청하던가요?”
“200억 정도를 투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월가의 상어들은 수익이 보이면 지옥에까지도 따라가는 인종이다.
“200억? 200억이라?”
그 정도 자금이면 빼내도 크게 포지션에 타격이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정도면 채권투자부분을 줄이면 됩니다. 국채에 투자했던 걸 매각하고 일본에서
여유자금을 끌어오면 대출을 받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일본시장에서 금융주투자를 작년부터 금지했다.
“일본지사에 여유자금이 조금 더 있지 않나요?”
“그 자금들은 전부 미국의 나스닥에 투자를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지시를 내려놓고도 잊어버린 탓에 조금은 무안해졌다. 워낙 타이거의 투자를 숨기려고 온갖 수를 다 쓰다보니 가끔은 규태도 투자규모가 헛갈렸다.
“그랬군요. 아예 이번기회에 일본증시에 투자한 금액은 전부 빼내죠.”
“전부를요? 상당한 자금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왔지만 아직 남은 투자금액이 상당합니다.”
“천이백억 달러정도 되던가요?”
“천 삼백 억입니다.”
규태의 기억에 잘못된 부분을 샨이 정정해 주었다.
“하여간 태국이 공격받는다는 건 아시아 시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 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탄입니다.”
“일본까지 영향을 받을 거라고 보십니까? ‘
조금은 놀란 샨에게 규태는 차분하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태국에 투자한 자금이 어디에서 온 거라고 아십니까?”
“여러 나라에서 투자를 했습니다. 경제규모가 있어서 일본의 투자규모도 크지만 300억 달러정도로 추산됩니다만?”
“태국의 회사채에 투자한건 일본만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에서 투자를 했지요. 그 자금줄이 일본입니다.”
리만의 중계를 받아서 타이거펀드는 조금 태국회사채에 투자를 했다. 작년에 전부 회사채를 매각했다.
밑에서는 추가투자를 원했지만 규태의 지시로 불발되었다.
그 당시에는 샨도 불만을 품었지만 시간이 흘러보니 규태의 지시는 참으로 현명했다.
위기를 감지했는지 벌써부터 태국회사채는 매매가 실종됐다.
“일본 금융회사들이 난리가 나겠군요.”
“완전하게 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미국정부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요.”
미국정부가 한사코 일본까지 불똥이 튀려는 걸 막은 이유였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지 일본이 힘없이 무너지는 건 미국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타격은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본도 손해를 봐야죠.”
한국이 IMF관리체제에 들어가는데 일본이 타격 없이 넘어가는 건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일본이 동남아 경제위기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미일 간에 체결된 통화스왑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미국정부가 나설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대외적으로 규모는 비밀이었지만 규태는 이미 리처드를 통해서 통화스왑의 규모가 얼마인지를 알아냈다.
겉으로는 한도가 2000억 달러의 스왑거래지만 사정이 악화되면 5,000억 달러까지 보장하는 계약을 미국과 체결했으니 일본정부도 마음이 꽤나 든든할 것이다.
그러나 규태는 일본에 이번기회에 깽판을 칠 생각이었다.
클린턴이 알게되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아예 외면할 생각이었다.
이런 장대한 계획을 세워놓고도 마지막까지 망설인 것은 위기가 닥치면 손해를 보는 것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마치 핵버튼을 누르는 심정이 들어서 규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나스닥을 제외하고는 전체 투자포지션을 줄입니다. 채권이건 주식이건 뭐든 전부 팔아서 최대한 달러화를 보유하도록 하세요.”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샨이 말문을 닫았다.
“유럽까지도 말입니까?”
“......”
99년의 단일통화 사용 때문에 유럽투자를 크게 늘렸다. 특히 중심국가가 될 독일의 주식을 많이 매수했는데 그것도 팔게 생겼다.
하지만 샨 나링햄의 반문에 규태의 머릿속에 반짝하고 섬광이 터졌다.
“예, 줄이세요.”
왜 아시아만 위기를 겪어야 하는가? 이번기회에 아예 전 세계적으로 한번 난리를 만들어야 겠다. 그러면 미국 정부도 느긋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것이었다.
규태는 밀실에 앉아서 아시아를 어떻게 쪼개 먹을까 고민하고 있을 월가의 하이에나 떼를 떠올렸다.
2008년에 예행연습이라 치고 이번에 한번 호된 맛을 보여주면.......
통합의 중심이라면 역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다.
세 곳 다 모두가 약점이 존재했다. 이 시기의 독일은 플라자합의와 독일통일의 후유증을 크게 앓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이탈리아는 이때나 나중이나 경제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빈틈을 이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위기가 유럽까지 전이된다면 유럽의 은행들도 흔들거릴 테고 이 와중에 비틀거리는 놈을 한두 개 잡아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찌릿한 기분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규태를 보며 샨이 흠칫하고 놀랐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규태의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샨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리고 뉴욕에 있는 오장우를 불러들였다.규태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통보받은 오장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거 계획이 살벌한데요?”
오장우는 그동안 여러 개의 펀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규태와 기룡증권의 자금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수익률이 여타 펀드에 비해 높다는 것으로 유명해지며 거액의 자산가들을 투자자로 모집하는데 성공했다.
뮤추얼펀드로서는 피델리티와 경쟁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시아만 당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경제가 엉망인걸로 따진다면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시아를 콕 찍어서 노린다는 건 투기자금의 출처가 미국과 유럽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흔들리면 손해를 볼 투자자들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공격대상이 아시아로 정해진 것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경제도 엉망이더군요. 심지어는 독일까지 도요.”
유럽의 통화통합에 대한 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경제를 심도 있게 파헤친 오장우도 이렇게 까지 유럽경제가 엉망일 줄은 몰랐다.
가장 유럽에서 앞서가던 독일도 독일통일의 막대한 자금 조달 때문에 휘청거리는 판국이었다.
지금이야 유럽 통화통합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주춤했지만 두 나라의 재정적자는 심각했다.
경제성장률도 2%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태국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되고 동남아로 위기가 번져갈 때 일본과 유럽을 동시에 타격할 계획입니다.”
“.......”
아시아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천지사방에 불을 지르고 다니겠다는 의미였다.
“하하, 이거 잘못하면 보스, 목숨이 위태롭겠는데요.”
“저만 위험한건 아닐 테니까요.”
규태의 말에 오장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투자 쪽에 몸을 담고 있다는 건 반쯤은 교도소의 담장에 걸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목숨도 마찬가지.
막대한 손해를 본 놈이 미친 척하면 노리면 꼼짝없이 당한다.
“가족들의 경호를 강화해야겠군요.”
친분이 있는 오장우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규태의 가족들도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예, 한국으로 보내지요. 그쪽이라면 미국보다는 안전합니다. 한국에 있는 저희 부모님 댁에 당분간 머무는 걸로 하지요.”
“하하, 아무래도 자식 놈들이 한 소리하겠는데요. 느닷없이 한국에 가라고 하면 말입니다.”
“선영이가 펄펄 뛰겠죠. 걔가 성깔이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겠습니까. 감수를 해야죠. 그래도 히로스에는 고집을 피울 겁니다. 하고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제가 한국에 미술관을 짓는 일을 맡길 겁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오장우가 반색을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부쩍 고집이 세진 아내를 설득할 길이 막막했는데 규태의 지시가 내려진다면 크게 반발하지 않을 것이었다.
“당연하죠. 우리 동지가 아닙니까. 한국에서의 경호도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을 공격하는 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오장우가 뒤통수를 때려서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규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아는 김규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투자에 실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승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