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선호작품 등록/취소
알림 등록/취소
가벼운 일상
규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대폭 일을 줄였다.
대충 바쁜 일은 마무리가 됐고 새로운 투자 포지션의 구축도 끝이 났다.
마지막 서류에 결재를 마치고 난 규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한동안 운동을 게을리 했더니 몸이 불었다. 이제부터 관리를 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서 고생이었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규태가 루드 터너와 힘을 합쳐 디즈니를 인수한 이후 폭발 적인 성장세를 거듭했다.
그리고 토이스토리로 대성공을 거둔 픽사였지만 실제로 달콤한 과실을 거둔 쪽은 디즈니였다.
픽사는 루카스 필름의 컴퓨터 사업부에서 86년에 분사해서 나온 회사였다. 애플에서 나온 스티브 잡스가 1,000만 달러에 매입을 하고 사장자리에 취임했다.
자금사정이 좋지않아서 디즈니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한 작품이 토이 스토리였다. 픽사와 디즈니는 10년간 5개의 작품을 제작하기로 계약하였다.
디즈니는 5개 작품의 영화와 캐릭터의 모든 판권을 독점하고 각 영화가 내는 이득의 10%에서 15%를 배급료로 가져가기로 하였다.
문제는 픽사의 5개 작품이 평균 5억 달러가 넘는 이익을 창출했다는 점이었다.
디즈니야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했지만 당사자인 픽사에겐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계약이었다.
재주는 픽사가 부리고 열매는 디즈니가 따먹는 셈이었다.
경영권을 확보한 이후로도 꾸준히 주식을 매입해 40%가 넘는 주식을 확보해 디즈니의 사주나 마찬가지인 규태로서도 나쁜 일이 아니지만 이 일로 가뜩이나 사이가 별로인 스티브와 관계가 더욱 묘해졌다는 점이다.
스티브와 자주 왕래하며 친분이 깊은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엘리슨은 자사의 대주주인 규태와 거의 척을 진 사이였다.
둘이 만나서 규태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었다.
문제라면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한 애플의 책임자로 스티브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더러운 성질머리와는 별개로 창조적인 그의 능력을 써먹지 못한다는 건 죄악이었다.
호출을 받고 달려온 오선한에게 규태가 물었다.
“스티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뉴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의외였다. 지금쯤이면 픽사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리치몬드에 머물고 있을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뉴욕이라니?
"뉴욕이요?"
“픽사의 상장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픽사의 임원들과 함께 뉴욕에 머물고 있습니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가 개봉한 후 1주일이 지나서 공모가 22달러가 장중에 50달러까지 올랐다.
최종가격은 39달러에 마무리가 되었지만 픽사가 상장으로 끌어당긴 현금은 1억 5천만 달러, 픽사주식 80%의 주식을 가진 스티브는 1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애플에서 쫒겨난 후 실패를 거듭하면서 파산 설까지 나돌던 위기국면에서 멋지게 반등한 것이다.
“잡스가 디즈니에 불만이 많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디즈니에 불만을 계속 토로하고 있답니다. 계약조건을 바꾸고 싶다고요.”
스티브다운 말이었다. 스티브가 아니었다면 이미 계약으로 정해진 내용을 바꿔 달라 요청하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법률적으로 문제는 없습니까?”
“2600만 달러를 투자하고 5편의 영화판권 대부분을 가져오기로 한 계약은 문제가 없지만 자금 지급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26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데 처음 1,000만 달러를 지급하고는 두 번째가 계약보다 한참 늦어졌었습니다. 이 문제를 걸고 들어가면 재판에 들어가면 이기겠지만 판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스티브와 사이는 최악이 되겠군요.”
이게 스티브 잡스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근본이유였다.
목소리가 큰데다 성질머리까지 나쁜 스티브와 원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실리콘 벨리의 사업가는 드물었다.
경쟁자인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스티브에겐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참 독특한 캐릭터란 말이지’
규태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앞으로 픽사에서 나올 작품들은 연이어 성공을 거둔다.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 2,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가 전부 픽사에서 만들어낸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다.
픽사의 지분에 지금 투자를 해도 상당한 이익을 볼 것이다.
“스티브가 가진 픽사 지분이 전부 얼마나 됩니까?”
지분이 작다면 픽사의 주식에 침을 발라놓는 것도 좋았다.
“80%가 넘게 가지고 있었다가 지금은 50.1%의 주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로 경영권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애플에서 한번 호되게 당했으니까요.”
스티브와 같은 독재자도 창업회사에서 밀려나는 악몽 같은 경험 탓인지 경영권 방어가 지독했다.
“조금 담아보지요.”
규태의 조금이란 말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가진 현금이 어마어마해서 자칫하면 주식을 사들이다가 스티브의 경계를 살수도 있었다.
“싸움닭은 피하는 게 최선입니다. 굳이 픽사주식을 사들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샘을 파는 법이니까요. 픽사주식을 사들이면 깜짝 놀랄 거 아닙니까.”
분명 잔뜩 화가 나서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
친한 친구인 래리 엘리슨에게 귀가 따갑도록 규태의 수법을 들었을 테니까.
“혹시 스티브에게 원하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실리콘 벨리에서 잡스의 전화를 기쁘게 기다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보스는 잡스의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눈치 빠른 오선한이 규태의 속뜻을 조금 읽은 것이다.
“애플의 주식을 45%가 넘게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이제 제대로 운영할 사람에게 경영을 맡겨야 할 때가 됐습니다.”
누가 들어도 깜짝 놀랄 소리였다.
애플에서 쫓겨난 창업주가 다시 대표로 자리를 차지하면 등골이 서늘할 임직원들이 한 둘이 아니다. 거기에다 잡스는 이미 실패한 경영자가 아니던가.
30%가 넘던 개인 PC시장 점유율이 7%까지 떨어지고 만드는 제품마다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애플이 살아날 길을 요원했다.
시장가보다 한참 비싼 10달러로 애플주식을 사들이는 규태의 행동을 주변에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티브를 다시 대표 자리에 앉혀 놓는다면 몰락하던 애플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미 스티브가 구상하는 제품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는 규태였다.
복귀하며 첫 번째로 출시하는 아이맥은 첫 6주에 25만 대가 넘게 팔려나갔다. 그해 말에는 그 수치가 80만 대로 늘어났다. 그리고 1년 만에 1백만 대가 팔리면서 애플회생의 신호탄이 된다.
어떻게 스티브와 협의를 해서 애플의 신임경영자로 올릴지를 잠시 규태가 고심을 했다.
워낙 성질머리가 더러워야지.
그렇지만 쫓겨난 회사로 돌아가고픈 복귀의욕이 강렬한 스티브였다.
결국에는 규태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때까지 애플의 지분보유를 늘려야 했다.
여느 때와 달리 규태는 일찍 퇴근을 했다. 바쁜 일도 끝이 났으니 한동안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퇴근하는 규태를 맞이한 사람은 팔로알토의 저택을 담당하는 집사 에리히였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규태는 이마를 찌푸렸다.
“캐서린은 오늘도인가? 이만 하면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캐서린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기세입니다.”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 캐서린은 아예 팔로알토의 저택으로 들어왔다.
“들어가는 인풋에 비해서 아웃풋이 너무 하잖아! 이젠 그만 포기해야지. "
캐서린의 음식 솜씨는 괴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음식에 버금갈 정도로 요리들이 때마다 만들어졌다.
이건 캐서린의 가장 환경 탓이었다.
캐서린의 부모는 미니에 폴리스에서 유명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져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쨍그랑
텅 텅 텅
요란스런 주방의 소음에 규태는 이마를 짚었다.
잘못했다가는 불이 났다는 오해를 부를 검은 연기가 주방에서 퍼져 나왔다.
난리속인 주방에 들어간 규태는 전쟁터의 폐허처럼 변해버린 주방을 보았다.
“캐시, 주방은 출입금지라고 했잖아!”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애칭인 캐시로 캐서린을 부른 규태가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집안으로 불어왔다.
“콜록, 잘못하면 집에 불이 난줄 알겠다.”
목에 연기가 들어갔는지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의기소침한 캐서린이 주방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방을 일사불란하게 정리했다.
거실에 앉아 있는 캐서린의 풀죽은 모습을 보곤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왜 그렇게 주방에 집착하는 거야?”
“그거야!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내가 만든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얼마나 멋있어?”
전혀 캐서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꿈이었지만 규태는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캐시가 뛰어난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천천히 가벼운 요리부터 시작을 해야지. 집에서 엄마가 제일 많이 해준 요리가 뭐였어? 그거부터 시작하자.”
“...... 없어. 없다고.”
“.......”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엄마가 요리를 하면 아빠가 필사적으로 막았어. 다른 식구들도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먹었지 엄마의 요리는 절대 먹지 않으려고 했어.”
“...... 진짜 걱정이다.”
한바탕의 난리가 끝나고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식사준비가 끝났다.
“오늘 저녁요리는 뭐지?”
“뵈프 부르기뇽입니다. 식전주로 시드르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랫만에 맛보는 프랑스 요리였다. 사과로 만든 시드르는 가볍게 마시기에 좋았다. 이걸 증류하면 프랑스 노르망디지방의 특산 술인 칼바도스가 나온다.
시드르 종류는 스위트한 두(doux), 드라이한 브뤼(brut), 농장에서 제조되는 페르미에(fermier), 발포성 시드르인 부셰(bouché)로 나뉜다. 가볍고 당도가 높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시드르 두, 시드르 브뤼, 시드르 부셰다.
가을 노르망디의 사과밭에 가면 발갛게 익은 사과와 이것을 따서 시드르를 만드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규태는 노르망디 지방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름다운 곳이니까. 봄에 사과 꽃이 필 때는 정말 아름답지.”
규태는 잠시 아련하게 떠오르는 옛 추억에 눈을 감았다.
눈이 내린 것 같이 뽀얀 사과 꽃이 환하게 피어난 한밤의 사과밭은 규태의 기억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언제 노르망디에 가본 적 있어?”
“그거야......”
대답을 하려던 규태는 이번 생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하고 말문을 닫았다.
“가본적도 없으면서 큰소리를 치긴, 거기에다가 뵈프 부르기뇽은 노르망디가 아니라 브르타뉴지방의 요리잖아. 우리가 마실 시드르도 노르망디가 아니라 브르타뉴 산일걸.”
음식만드는 요리솜씨는 형편없어도 입은 아주 고급인 캐서린이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도락을 즐기는 게 캐서린의 취미였다.
캐서린의 타박에 진짜로 말문이 막혀 버린 규태였다.
“맞습니다. 오늘 준비한 시드르는 브르타뉴 렌지방에서 만든 술입니다.
“킥킥, 그렇게 좋으면 나중에 시간 내서 한번 가보자. “
옆에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에리히가 시드르의 출처를 밝히자 캐서린이 가볍게 웃었다.